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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 목 한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달빛에뜬술잔
Shin Sa Im Dang A great mother who is proficientin poem and drawing and gave birth to Yulgok. Although she did not live for along time, only living up to the age of 48, she is a highly-gifted artist and a great scholar and statesman and being the mother of Yulgok, Shin Sa Im Dang isa person that represents a good and wise wife, and is still revered today. (하략) 신사임당 시와 그림에 능한 예술가이자 율곡 이이를 낳은 훌륭한 어머니. 48세를 일기로 작고할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훌륭한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로서, 그리고 위대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사임당은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상징하는 인물로 여전히 추앙받고 있다. 1. 신사임당 작품 포도 신사임당(1504-1551)은 화조나 초충을 잘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그녀가 살던 시기에는 그보다는 산수와 포도 그림으로 화명이 높았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지은 「선비행장(先妣行狀, 돌아가신 어머니 행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자당(慈堂)께서는 늘 묵적(墨迹)이 남다르셨다. 7세 때부터 안견(安堅, 1418-?)이 그린 것을 모방하여 드디어 산수도를 그리셨는데 지극히 신묘하였고, 또 포도를 그리셨다. 모두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것으로 그리신 병풍과 족자가 세상에 널리 전해진다.(慈堂平日墨迹異常. 自七歲時, 倣安堅所畵, 遂作山水圖極妙, 又畵葡萄. 皆世無能擬者. 所模屛簇, 盛傳于世.)” 수박과 들쥐 산차조기와 사마귀 맨드라미와 쇠똥벌레 오이와 개구리 어숭이와 개구리 노연도 산수도(山水圖) 1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2폭 병풍 형태의 산수도 (크기 : 위 34.2×62.2cm 아래 34.8×63.3cm) 산수도(山水圖) 2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2폭 병풍 형태의 산수도 [제화시 1] 移舟泊煙渚(이주박연저) 배를 움직여 안개 낀 물가에 정박하고 日暮客愁新(일모객수신) 날 저무니 나그네 근심이 새롭네. 野曠天低樹(야광천저수) 들판은 넓어 하늘이 나무에 내려오고 江淸月近人(강청월근인) 강은 맑아 달이 사람에게 다가오네. * 詩 출처 : 중국 당대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04)의 오언절구「숙건덕강(宿建德江)」 [제화시 2] 天淸一雁遠(천청일안원) 맑은 하늘에 외기러기 멀리 날고 海闊孤帆遲(해활고범지) 넓은 바다엔 외로운 돛단배 천천히 떠가네. 白日行欲暮(백일행욕모) 밝은 해는 저물어 가는데 滄波杳難期(창파묘난기) 푸른 파도는 아득하여 기약하기 어렵네. * 詩 출처 : 중국 당대 시인 이백(李白, 705∼761)의 「송장사인지강동(送張舍人之江東)」 출처: Naver Blog 오똑이 (kalsania) 초서 (6폭 병풍) 종이바탕, 세로 44.5㎝, 가로 33.5㎝.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1호. 사임당은 대유학자 율곡(栗谷)이이(李珥)의 어머니로 자식 교육에 있어 남달랐을 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서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 초서 필적은 당시(唐詩) 오언절구 6수를 각각 한 장에 쓴 것으로 뒤에 병풍으로 꾸민 것이다. 글씨는 둥그런 원필세(圓筆勢)가 또렷하고 점획이 매우 깔끔한 점이 특징이다. 병풍 말미의 2폭에는 강릉부사 이형규(李亨逵, 1733∼1789)의 1744년 발문, 강원도지사 이용(李龍)의 1963년 발문, 시인 이은상(李殷相)의 1971년 발문이 있다. 이중 이형규의 발문에 따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인 권처균(權處均)이 초서 6폭을 얻었는데, 그의 딸이 최대해(崔大海)란 사람에게 출가하면서 이것을 시집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그 뒤 영조 때 이웃고을 사람의 꼬임으로 넘어갔는데 부사가 그 사연을 듣고 후손에게 도로 찾아주었다고 한다. 근래까지 강릉시 두산동의 후손 최돈길(崔燉吉)씨 집에 전해오다가 1971년 강릉시가 양수(讓受)받아 율곡기념관에 보관하였다. 이 필적이 사임당의 진적(眞蹟)이라면 그녀는 명필이던 아들 이우(李瑀)는 물론이요 16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명서가 백광훈(白光勳)·한호(韓濩) 등에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람이 된다. 차후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한편, 이 필적은 1868년에는 강릉부사 윤종의(尹宗儀)에 의해 목판으로 간행, 널리 전파되었다. [네 2. 신사임당 시(詩) 蹂大關嶺望親庭 (유대관령망친정) 대관령에서 친정을 바라보며 慈親鶴髮在臨瀛 (자친학발재임영) 백발 되신 어머니 고향에 두고 身向長安獨居情 (신향장안독거정)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回首北坪時一望 (회수북평시일망) 고개 돌려 북쪽 들을 바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 (백운비하모산청) 흰 구름에 푸른 산만 보이네 千里家山 萬疊峯 (천리가산 만첩봉) 산 넘어 내 고향 천리이건만 歸心長存 夢魂中 (귀심장존 몽혼중) 자나 깨나 꿈에서도 돌아가고파 寒松亭畔 孤輪月 (한송정반 고륜월) 한송정 앞에는 외로이 뜬 달 鏡浦臺前 一陳風 (경포대전 일진풍)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沙上白鷺 恒聚山 (사상백로 항취산) 갈매기는 모래밭에 모이고 波頭漁船 各西東 (파두어선 각서동) 고기 배들은 바다를 오가는데 何時重踏 臨瀛路 (하시중답 임영로) 언제 강릉 길 다시 밟아서 彩舞斑衣 膝下縫 (채무반의 슬하봉)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까 3. 신사임당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문인.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밖에 시임당(媤任堂) · 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19세에 덕수이씨(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 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 : 지금의 壽松洞과 清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이 지향한 최고의 여성상은 태임으로 그녀를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었는데,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의 그림 · 글씨 · 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 · 포도 · 화조 · 어죽(魚竹) · 매화 · 난초 · 산수 등이 주된 화제(畫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 · 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 ·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爨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담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사임당으로 하여금 절묘한 경지의 예술세계에 머물게 한 중요한 동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먼저 그의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소신껏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명석한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교적 규범은 여자가 출가한 뒤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하였는데도 그것을 알면서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는 순수한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 속에서 바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가장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사랑의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조1)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당숙이기는 하나 이와같은 사람과 남편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아들 이(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우(瑀)와 큰딸 매창(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작품으로는 〈자리도(紫鯉圖)〉 · 〈산수도(山水圖)〉 · 〈초충도(草蟲圖)〉 · 〈노안도(蘆雁圖)〉 · 〈연로도(蓮鷺圖)〉 · 〈요안조압도(寥岸鳥鴨圖)〉와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 신사임당 [申師任堂]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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