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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81
8월8일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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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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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bS6DnI7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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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능력과 권위는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강론대에 설때마다 늘 조심스럽습니다. ‘무심코 사용하는 단어 하나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반드시 원고를 준비하며, 시작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펴보곤 합니다.
특히 장애인과 관련된 용어를 사용할 때는 더 주의해야 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만, 오래 전부터 장애인 비하 법령 용어의 개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었고, 2014년 정부 차원에서 장애인들을 비하하는 어감을 띤 용어들에 대해 대대적으로 손질한 바 있습니다.
맹인은 시각장애인으로 농아자는 청각 및 언어장애인으로 등등, 많은 비하 용어들을 수정했습니다.
또한 이에 앞서 4년여 전인 지난 2010년 5월, 대한의사협회는 대한뇌전증학회와 한국뇌전증협회의 요청에 따라 용어심의위원회 검토를 거쳐 ‘간질’의 공식 명칭을 ‘뇌전증(腦電症)’으로 고쳤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보니 은근슬쩍 걱정이 앞섰습니다. 난감하기도 합니다. 뇌전증 환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공식 병명을 뇌전증으로 변경한 지 이미 오래 전인데...
뇌에 전기파가 온다는 뜻을 담은 뇌전증은 뇌에서 비정상적으로 발생한 전기파가 뇌조직을 타고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경련성 발작을 일으키는 질환입니다. 적절한 약물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예전과는 달리 요즘은 약물치료만으로 정상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약물치료를 통해 70% 이상의 뇌전증 환자들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고, 일부는 완치되기도 합니다. 뇌전증 환자가 증상을 나타나는 시간은 지극히 한시적이며, 약을 복용하면 발작이 조절되어 정상인과 다름없이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일생을 살면서 증상을 보이는 시간은 지극히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소외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뇌전증 환자들은 요즘도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예수님 시대 당시 그들이 겪고 있었던 고통은 얼마나 혹독했는지는 모릅니다. 발병의 원인도 몰라, 마땅한 예방약이나 치료제도 없어, 증상은 날로 심각해지고, 더 괴로운 것 하나는 세상 사람들의 편견어린 시선이었습니다.
그런 뇌전증 아들을 둔 아이 아버지의 마음은 그야말로 바짝바짝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전지전능한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찾아왔지만, 마침 예수님께서는 출타중이셨습니다. 다급했던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치유를 청했지만, 치유를 받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마자 아버지는 예수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습니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간절히 아들의 치유를 청합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사를 받은 바 있습니다. 사목 실습까지 나가서 수많은 치유를 일으킨 바 있습니다. 충분한 능력의 소유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된 것일까요?
아마도 제자들은 잠시 자만심에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스승님께서 부여하신 치유의 은사에 늘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한 도구로 여겼어야 했습니다. 또한 스승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늘 기도해야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마도 잠시 우쭐 했을 것입니다. 신비스런 치유의 은사에 신기해하며 하늘에라도 오른 듯 했을 것입니다. 내 힘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치유한다는 강한 믿음과 겸손의 마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치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요 대리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능력과 권위는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무장한 제자라면 신앙으로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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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산을 옮길 믿음이 있다면 삽부터 산다>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hPcrnzdxu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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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간질병 마귀에 걸린 아이를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변모된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내려오시는 중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안 계시니 먼저 제자들에게 이를 청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그 마귀를 쫓아낼 수준까지는 올라오지 못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실 때 제자들도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에 제자들이 못 쫓아내는 마귀가 없고 못 고치는 병이 없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매우 암담합니다. 우선 우리 안에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때 제자들은 시도라도 해 보았습니다.
저도 본당에 있을 때 아프다고 안수해 달라고 오시는 분들이 제일 겁났습니다. 어차피 제 믿음으로는 안수해 줘 봐야 치유가 안 일어나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치유해 달라고 기도하고서도 “병원 가보셔야죠!”, “수술 잘 받고 오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마음 안에서는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열매로 주어질까요, 씨앗으로 주어질까요?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을 옮기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만약 복권에 당첨될 믿음이 있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먼저 복권을 살 것입니다. 한 번에 안 되면 또 살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것들이 맞아가며 정말 믿음이 성취될 수 있음을 더 확고하게 믿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엔 반드시 당첨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이 자라나는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제자들이 예수님께 꾸중을 받는 것은 “그동안 왜 믿음을 성장시키지 못했느냐?”인 것이지, 믿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한자성어를 잘 압니다. 중국의 어느 마을에 ‘우공’이라는 사람이 죽기 전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을 앞에 있는 큰 산 때문에 외지와의 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산을 옮길 계획을 짭니다.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어디서부터 옮길 것인가를 궁리하고 삽을 삽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못하면 내 아들이 이을 것이요, 아들이 못하면 손자가 이을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게 한 노인이 산을 옮기기 위해 매일 산을 파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에 감복한 임금이 산을 옮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인도에서 ‘다쉬라트 만지히’라는 농부가 바위산을 뚫은 일이 있습니다. 그가 살던 마을은 바위산으로 갇혀있어 다른 마을로 가려면 70km를 걸어야 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다쳤을 때 그 산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이 그가 산을 파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그는 염소를 팔아 망치와 정을 사고 그것으로 22년간 돌을 깨서 110m의 길을 만듭니다. 이로 인해 70km가 5km로 단축되었습니다. 인도 정부에서 그에게 상을 주려고 했을 때 그는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만든 길을 포장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 길이 완성된 것입니다.
현대에 이렇게 치유의 기적이 부족한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은 열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씨로 뿌려집니다. 살이 빠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식사량을 줄이기 시작하고 운동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믿으면 옮겨지기를 기다리지 말고 삽과 곡괭이를 사야 합니다.
재테크 크리에이터 주언규 씨가 tvN ‘유퀴즈 온 더 블록’에 나왔습니다. 그의 수익이 한 달에 1억8천이 넘을 때도 많다고 합니다. 180만원 월급쟁이에서 어떻게 100배의 성장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재테크 비법 때문입니다. 비법은 간단합니다. 우선 삽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쇼핑몰을 만드는 데는 그리 큰 비용이 안 든다고 합니다. 물론 잘 안 될 것을 압니다. 그러나 안 되는 카페도 한 명은 손님이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으로, 매일 한 개씩, 수백 개의 쇼핑몰을 만드는 것입니다. 잘 되는 쇼핑몰이 하루 10개를 판다면 그는 100개의 쇼핑몰을 만들어 하나씩만 판다고 합니다. 결국, 다 합치면 한 달에 엄청난 수입이 들어옵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도 키워나가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몸이 아프다고 안수해 달라고 하는 분들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물론 나에게 치유할 능력이 없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크게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산성당에 있을 때는 미사가 끝나고 나면 항상 수십 분의 신자분들이 머리를 숙이고 계셨습니다. 100명 안수해 드리면 2~3분은 몸이 좋아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볼 때 감기가 낫는 정도인 것도 있고 조금 신기한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본당 평일 미사 중에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치유의 미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분께 병자성사를 드리면 한두 분은 분명히 치유되는 분이 나올 것입니다. 병자성사는 돌아가실 분들만이 아니라 치유를 위한 성사입니다. 그 좋은 것을 돌아가시기 직전인 분들에게만 주기 위해 묵혀두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을 키울 때야 주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들으라고 하시는 이 꾸중을 듣지 않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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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7,14-20 : 믿음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
간질병이란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꽤 큰 시차를 두고 사람을 공격하는 병이다. 증세가 나타나지 않으면 정상인과 똑같다. 증세가 나타나면 정신을 잃고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다가 멀쩡하게 일어나는 병이다.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겉으로는 건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간질병이 공격을 하면 그들은 사기와 이 세상의 갖가지 욕망에 사로잡힌 것처럼 되고 만다.
예수께서 산에 계시는 동안에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그 아들을 고쳐달라고 제자들에게 갔으나,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을 받은 제자들이(마태 10,1) 그 아들을 치유하지 못했다. 그 아버지는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 그 앞에 꿇어 애원하고 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15-16절)
이를 보신 예수님은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17절) 하시고 호통을 치셔서 마귀를 나가게 하시고 그 아들을 낳게 해주셨다.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쳐주지 못했다. 많은 신자들이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에 대하여 실망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들이기에 예수님께 확실한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19절) 제자들은 마귀를 몰아내는 권능부터 죽은 사람을 살리는 권능까지 받았는데(마태 10,8 참조) 자신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것은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20절)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러한 것은 기도와 단식이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다른 사람 안에 든 마귀를 쫓아내려 기도하는데, 자신의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는가! 이 기도와 함께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완전한 믿음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산은 간질병 환자의 경우 귀먹고 말 못하는 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로 말미암아 인간들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지고 친밀해진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에는 하느님과 가깝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의 문제, 아픔, 고통에 응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과의 일치는 바로 나의 이웃들과의 일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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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지체하지 않는다. ……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오늘 독서에서 하바쿡 예언자는 민족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비록 유다 왕국이 잘못하여 바빌로니아를 하느님의 도구로 삼으신 것을 인정하지만, 악인이 의인을 처벌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로 번민하다 하느님께 따졌던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는 모두 스러질 것이며, 오직 의인들만이 ‘성실함’을 통하여 살게 되리라고 답하십니다.
이처럼 믿는 이의 삶에 근거가 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의인의 성실함은, 화답송의 시편 저자가 노래하듯 “당신을 찾는 이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성실함에서 비롯됩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하바쿡에게, 겉모습은 그렇지 않게 보여도 분명히 실재하는 당신의 성실함에 관한 환시를 주십니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정해진 때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하여 의인의 성실함 대신 존재의 가벼움을 드러낸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토로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갈라 5,22 참조). 우리의 인내가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으로 드러나도록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인내가, 바로 의인의 성실함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께서는 변치 않으시는 분, 인내가 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 하느님을 가진 사람은 아무런 아쉬움 없고, 하느님만으로 넉넉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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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년 동안 염색을 하였습니다. 아버님을 닮아서 일찍 머리가 하얗게 되었고 아직은 젊은 나이였기에 염색을 시작하였습니다. 염색을 하지 않고 지내는 동창신부들도 있었습니다. 염색을 해야 하는 이유도 찾으면 많고, 염색을 하지 않는 이유도 찾으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적도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외부의 일정이 대부분 취소되면서 20년 동안 하던 염색을 그만두었습니다. 오랫동안 가려졌던 하얀 머리카락을 보았습니다. 조금은 낯설었지만 곧 익숙해졌습니다. 지인들도 좋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염색을 하는 것도, 염색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며 기쁘게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문도 새롭게 지면을 개편하곤 합니다. 최근에 평화신문은 지면을 새롭게 단장하였습니다. 정민 베르나르도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사보다는 야사가 흥미진진하듯이 정민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한국 교회사의 숨은 그림을 찾는 재미가 있습니다. 김혜경 세레나 연구원의‘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도 있습니다. 교회사의 큰 사건을 그림으로 보면서 해설을 읽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분도회의 박재찬 신부님의 ‘토머스 머튼 영성 배우기’가 끝났고, 작은 형제회 호명환 신부님의 ‘프란치스코 영성’배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성인(聖人)은 업적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성인은 삶으로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낸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오늘은 도미니코 사제 축일입니다. 동창 중에는 두 명이 도미니코 본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신부님은 운동을 아주 잘 하셨습니다. 테니스, 농구, 축구와 같이 공으로 하는 운동을 잘 하였습니다. 다른 신부님은 음악을 잘 하셨습니다. 전체 회식이 있을 때면 우리 반을 대표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두 분 신부님 모두 한 번 마음먹은 것은 꼭 실천에 옮기는 성격이었습니다. 한 분은 운동만으로 20킬로를 감량하였습니다. 그것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감량도 중요하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신부님은 악기를 손에 잡으면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연습을 하였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동창 신부님들을 생각하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실천이다.’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실천을 할 때는 주저하곤 합니다. 실천을 하다가도 며칠 하고 그만두곤 합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금연을 하겠다고, 금주를 하겠다고,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결심은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어머니에게서 난 자녀들도 각기 재능과 성격이 다르듯이 한 못자리인 신학교를 나왔지만 저마다 다른 재능으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있습니다. 축일을 맞이하는 동창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전에 이런 격언을 배웠습니다. ‘Rome was not built in a Day!'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텃밭을 가꾸면서 변화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여린 모종이 잎을 내고, 줄기를 세우며 꽃을 피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꽃이 지는 자리에는 방울토마토, 고추, 오이, 호박이 열렸습니다. 물을 주고, 지지대를 세워주고, 거름을 주면 텃밭은 좋은 결실을 맺습니다.
예전에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를 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말씀 역시 신앙 안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태산이 높다고 하지만 하늘 아래에 있는 뫼’일 뿐입니다. 오르지 못할 산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믿음은 인내와 성실함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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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
마태오 17,14ㄴ-20 (어떤 아이에게서 마귀를 내쫓으시다)
그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물속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호통을 치시자 아이에게서 마귀가 나갔다. 바로 그 시간에 아이가 나았다. 그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믿음>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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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쳐 주시고는 간절히 바라는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참으로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할 만큼 그 효과는 대단합니다.
산을 옮겨 놓을 수 있고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현실이 우리 눈앞에 온갖 폐해를 늘어놓더라도 거룩한 영의 힘과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병든 아이의 아버지가 한 이 말을 통하여 짐작해 볼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철저하게 믿지 못하였다고 느껴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자주 목격하면서도 그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기적을 바라는 군중, 믿음이 약해 병을 고쳐 주지 못하는 제자들,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백성의 지도자들, 때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자주 불신하는 모든 시대의 당신 제자들인 우리를 생각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변함없는 상황에 질리신 듯하지만, 인간의 불행보다 더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병든 아이의 아버지에게서 생겨나는 믿음을 알 수 없지만, 믿음이 약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믿음이란 양이 아니라 질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 곧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여정은 두렵고 떨리는 의심과 의혹의 어둠을 떨쳐낸 뒤에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을 의심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갖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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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정석 라파엘 신부님]
두 번째 수난 예고 직전에 위치한 이 일화에서 제자들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의 답답한 심정이 잘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죽음을 향한 스승의 여정을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도무지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지지리 못난 이들 같아 보이니 3년 공부가 공염불입니다. 스승의 속은 타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이와 비슷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에서 이태 동안 유다인의 회당과 티란노스 학원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을 일으키자 몇몇 유다인이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라고 말하며 바오로를 흉내 내어 구마행위를 합니다.
특히 스케우아스라는 유다인 대사제의 일곱 아들이 악령 들린 사람을 치유하려 하자 악령 들린 사람이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라며 달려들어 짓누르는 바람에, 그들은 달아났습니다.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에는 관심도 없고 단순히 놀라운 능력에만 사로잡혔던 사람들이 졸지에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한번 꼬인 실타래를 풀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잘하려 하면 할수록 꼬이고 꼬여 실수를 연발했던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마태 10,1)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원인은 그들의 믿음에 있었습니다. 올바른 믿음과 실천 없이 말로만 예수님을 내세운다면 그 믿음이 화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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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형제님 중에 젊었을 때부터 건강 하나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분이 계십니다. 건강해서 그런지 술도 엄청나게 마시고, 밤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실 때 늘 끝까지 남는 분도 이 형제님일 정도로 타고난 건강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글쎄 직장암 3기라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 그렇게 좋아했던 술, 담배를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가족과만 함께 하면서 기도 생활에 전념하고 계십니다.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병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하느님께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도 감사할 일이구나 싶습니다. 병이 생기고 나서 욕심도 줄어들었고,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병도 하나의 은총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고 하십니다.
불평불만만 가득하다면 이런 깨달음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감사할 일을 찾으면서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덕에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필요한 것을 모두 얻었을 때,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될 때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 완전한 믿음은 늘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채웠을 때, 원하는 바를 이루어질 때 생기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과 이기심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짜 믿음, 완전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런 믿음을 갖추고 있을 때 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하시지요. 엄청난 사악함의 홍수 속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권능까지도 거뜬하게 무찌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들에게는 마귀들을 무찌르는 것뿐 아니라 죽은 이들을 되살리기도 하는 모든 권능이 주어졌습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이 되었을까요? 진짜 믿음, 완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사도들이 원하는 바를 채우면서 생겼던 것이 아니지요. 오늘 복음에서처럼 마귀를 쫓아내는 실패를 통해서 갖게 되었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얻게 되었으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온갖 박해를 통해 얻게 된 것이 믿음이었습니다.
하바쿡 예언자는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실함이라는 덕목을 가지고 진짜 믿음, 완전한 믿음을 키우도록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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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지 마세요>
지금이야 식사를 해주시는 식복사 자매님이 계셔서 냉장고 열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식복사 없이 식사를 비롯한 살림을 직접 할 때는 냉장고 열 일이 꽤 많았지요.
특히 냉장고 안을 정리하는 것이 큰일이었습니다. 나중에 먹을 것을 생각해서 또 좋아해서 아껴 먹을 생각으로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것을 몇 년이 지나 꺼내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선물 받은 물건들을 아껴 쓴다고 잘 보관했다가 곰팡이가 생겨서 못쓰고 버린 적도 있습니다. 향초를 선물 받았지만 사용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가 향이 모두 날아 가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세상의 물건은 아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두면 똥 된다’라는 말도 있듯이, 후딱 쓰는 것이 물건의 가치를 살리는 것이고 나의 기분도 좋게 해줍니다.
아껴야 할 것은 아끼고, 후딱 써야 할 것은 얼른 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거꾸로, 정반대로 하곤 합니다. 그래서 내게 다가올 행복을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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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믿음의 전사>
-믿음 예찬-
-“새로운 주의 용사 도미니코는
위대한 그의 업적 찬양받으며
그이름 삶과 맞는 주님의 사람
복음의 전파자가 되시었도다”-
아름다운 전례의 찬미가가 성 도미니코 축일을 참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참 자랑스런 종교입니다. 교회안에는 얼마나 많은 보물이 있는지요. 보물중의 참 좋은 보물이 아름다운 전례에 성인들입니다. 교회가 필요한 시기마다 선물처럼 보내주신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이야말로 참으로 자기를 살았던 참자기를 실현한 분들로 우리 모두의 희망의 표지, 구원의 표지, 회개의 표지가 되는 분들입니다.
기억하고 기념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고 우리 삶의 모범으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이 성인들입니다. 성인이 되는 것, 주님이 바라시는 바요, 우리 모두의 삶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하느님 불러주신 각자 고유의 모습, 크기, 색깔, 향기로 사는 평범한 성인들입니다.
오늘은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이자 우리 요셉수도원 수도형제들의 신뢰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문도미니코 수사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문수사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때마다 ‘문보물’, ‘문천사’. ‘문천재’라 부르기도 합니다. 혼자만의 믿음은 약해 병들고 시들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와 '더불어 믿음의 여정'중에 강하고 건강해지는 믿음의 성장이요 성숙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도미니코 사제는 참으로 치열하게 살다가 만51세에 전사한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입니다. 저는 성인보다 무려 20세를 넘어 살고 있네요. 성인은 12세기 말 13세기초 스페인 출신으로 남프랑스에 만연해 있던 알빈파 이단과의 대결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신 분입니다.
성인은 복음적 가난을 살았고 설교했으며 설교 수도회의 창립자가 되었습니다. 성인은 설교와 공부에 강조점을 두었으며 전통적인 수도승 삶중 육체노동을 포기했고 성무일도도 많이 간소화했습니다. 마침내 일과 고행에 소진했던 성인은 51세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합니다. 말그대로 치열한 복음적 청빈의 삶을 살다가 전사戰死한 ‘믿음의 전사戰士’입니다. 문득 ‘믿음으로’라는 성가 480장이 생각납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저 산도 옮기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바다도 가르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생명 다하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넋을 다하리 믿음으로”
2절까지만 인용했지만 4절까지 다 불러 보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성인이요 아름다운 품위의 사람들입니다. 살아갈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믿음입니다. 노추와 노욕의 노년에 대한 답도 믿음의 삶입니다. 끝까지 믿음의 전사로 살다가 전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여정중의 우리들이요 믿음의 전사인 우리의 신원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성장, 성숙하는 믿음의 내적 여정인지요. 성서의 모든 인물들이, 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요 그 모범이 복음의 예수님이요 제1독서의 하바꾹 예언자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떤 사람은 아들의 치유를 간청합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오.”
바로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이요 기도의 힘은 그대로 믿음의 힘이 됩니다. 주님은 이들의 믿음 없음을 책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아침성무일도 모세의 찬미가중 다음 대목도 같은 맥락입니다.
“마음 굽은 자식들아. 너희는 나쁘고 사악한 세대로다!
생각없고 미련한 백성들아, 너희는 이따위로 주님께 은혜갚음 하느냐
주님은 너를 낳아주신 아버지가 아시시며, 너를 만드시고 보존하시는 주님이 아니신가.
지나간 옛날을 추억해 보아라. 여러 세대에 지난 일들을 헤아려 보려므나.“(신명32,5-7).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기에 비뚤어진 세대입니다. 이어 주님께서 호통치시니 마귀는 나갔고 아이는 나았습니다. 주님은 이어 제자들이 믿음이 약해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
인자무적仁者無敵만 있는 게 아니라 신자무적信者無敵이란 말도 그대로 통합니다. 무신불립無信不立,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한다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믿음은 삶의 기초임을 깨닫습니다. 반석같은 믿음위에 인생집인지 반성하게 됩니다.
믿음은 기도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믿음은 인내입니다. 믿음은 희망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기다림과 인내의 믿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침묵입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믿음은 겸손입니다, 우리 삶의 모두가 믿음을 드러내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 분도 수도자의 정주서원 역시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리는 항구한 믿음의 수행을 뜻합니다. 주님은 초조히 탄원기도를 바치는 기도의 전사이자 믿음의 전사인 하바꾹에게 응답합니다.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 하더라도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한다. 지체하지 않는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살리라.”
주님께 희망을 두고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믿음의 전사가 구원을 받습니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믿음으로 삽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모토였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목표하는 바 성실한 믿음의 전사들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죽는 그날까지 주님의 영원한 현역인 믿음의 전사로 살다가 선종의 죽음으로 전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믿음의 전사로 항구하고 충실히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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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눈높이 사랑>
예수님께서는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하시며 불평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사람들의 불신의 태도에서 왔습니다. 당신의 구원활동에 대해 배은망덕한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히브5,7)
예수님께서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심은 우리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의 눈높이로 품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께 와서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하고 말씀하시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능력은 믿음 안에서 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살아나고 기적을 가능케 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배를 떠나 물위를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 능력을 주십니다. 아니 나를 통해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어떠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믿고 바라보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면 고통만 키우게 됩니다.
바오로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피1,29)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마태28,20)을 믿어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믿음에 믿음을 더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분명히 그 믿음이 헛되지 않음을 믿는 만큼 체험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음식을 나누시고 앞 못 보는 이의 눈을 침을 발라 뜨게 하셨으며 때로는 병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고 믿음으로 구하는 곳에는 어디에든 마다 않고 계셨습니다.
성전 정화를 위해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마태21,12)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지셨으면서도 그것을 뽐내지 않으시고 필요한 이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며 기쁨이 되어 주셨으며 모든 사람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주님의 품을 기억하며 우리도 이웃을 향한 눈높이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단지 내가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 마음이 비뚤어져 세상에 더 기울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의 동행을 믿으며 나에게는 엄격하되 이웃에게는 한없이 넉넉하길 소망해 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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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다림의 조건을 이야기합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마태 17,17)
병에 걸린 아들의 치유를 청하러 예수님을 찾아온 한 아버지의 간청에 그분께서 한탄하십니다. 이미 그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희망을 걸었다가 잔뜩 실망하고 만 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물론 당신 주변에 모여든 군중에게서 믿음이 싹 트고 자라길 바라십니다. 번번이 안타까운 한탄으로 끝나버리기도 하지만 주님은 결코 우리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으시지요.
사실, 언제까지 참아 주어야 하느냐고 말씀은 하셔도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처럼 끝까지 우리를 참아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아버지를 믿고 또 우리를 믿으시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권고하시는 "믿음"의 모범이요 원형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바꾹 예언자가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 항변에 가까운 질문을 던지면서요.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바라보고만 계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이를 집어삼켜도 잠자코 계십니까?"(하바 1,13)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바빌론을 통해 유다의 불륜과 불충을 심판하고 벌하셨음을 모르지 않지만, 원수의 잔악하고 무자비한 폭력에 대해 이제는 주님께서 나서 주시길 청합니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하바 2,3)
이제 이슈는 바빌론이 아니라 믿음으로 넘어갑니다. 기다릴 수 있는 이는 믿는 이지요. 인간 편에서 볼 때 그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을 뿐,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느님께는 반드시 이루어질 섭리니까요.
믿지 못하는 인간의 조급함은 기다림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유한하고 평면적인 도식 안에 억지로 우겨넣기 때문입니다. 그 도식에 맞아야 안심하고, 그 도식을 넘어서면 불안해 하니 삶의 불확실성 앞에서 믿음은 자랄 터전을 잃고 맙니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 2,4)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부족하나마 하느님의 모상성을 최대한 발휘하며 살아가는 의인 역시 그 성실함을 닮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 주심으로써, 의인은 그런 하느님을 변함없이 믿음으로써 각자의 성실함을 완성하지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의 힘을 말씀하십니다. 믿는 이에게 불가능이 없다는 말씀은 늘 자기 한계 언저리만 맴돌다 주저앉고 마는 제자들과 우리들을 내리치는 죽비 같은 깨우침입니다.
영성생활에서 기다림은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저 어째도 상관 없는 수동적 시간 보내기가 아니지요. 그래서 기다림은 고요한 투쟁입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약속의 실현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너지려는 내면을 반복적으로 붙잡아 일으키는 수고로운 결단의 연속과 같습니다. 시간이나 결과에 대한 인간적 셈법을 내려놓고,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며, 논리 밖의 것을 신뢰하면서 하느님의 질서 안으로 몸을 던지는 신비적 투신인 동시에 도약입니다.
"주님, 당신 이름을 아는 이들이 당신을 신뢰하나이다."(화답송)
앎은 사랑입니다. 주님 이름을 아는 이는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가리키지요.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이는 믿습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다가와도 성실하신 그분께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안에서 믿음의 강자는 병든 아이의 아버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먼저 제자들을 믿었고, 그 믿음이 보상받지 못해도 지치지 않고 예수님께 달아들었지요. 그리고 그는 온전해진 아들을 돌려받음으로써 믿음을 보상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구마 치유 기적은 그 아버지의 믿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를 믿어 주시는 주님을 오늘 우리가 믿어드립시다. 그분은 믿을 구석 별로 없는 우리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시고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오늘 이 자리까지 오셔서 말씀을 통해 만나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성 도미니코, 믿음이 부족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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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인생에서 숫자를 지울 것> : 나라별 중산층
◈영국(옥스포드대에서 제시한 중산층의 조건)
*- 페어 플레이를 할 것
*-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 나만의 독선을 지니지 말 것
*-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게 대응할 것
*-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프랑스(퐁피두 대통령이 ‘삶의 질’에서 정한 중산층 기준)
*- 외국어를 하나 정도 구사하여 폭넓은 세계 경험을 할 것
*- 한 가지 이상의 스포츠를 즐기거나 하나 이상의 악기를 다룰 것
*-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별미 하나 정도는 만들어 손님을 대접할 것
*- 사회 봉사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할 것
*-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꾸짖을 수 있을 것
◈대한민국(연봉 정보 사이트 직장인 대상 설문)
*- 부채 없는 아파트 평수 30평
*-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 자동차는 2,000cc급 중형차
*- 예금 잔고 1억 원 이상
*- 해외여행은 1년에 몇 번
※한국은 제물(물신숭배神崇拜))의 숫자만. 정신과 자아 실현, 인격 완성 없음.
-김수현,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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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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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1)
예수님께서 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신 후, 산을 내려오시어 군중에게 가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하였습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마태 17,15-16)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이야?”(마태 17,17)
“비뚤어진 세대”라는 표현은 <신명기>(35,5)에서 모세가 죽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비판을 연상시켜줍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없이 홀로서기를 할 때처럼, 이제 그 당시의 사람들도 예수님이 수난의 길을 가신 뒤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데도 믿음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이야?”라고 하시는 “언제까지”라는 표현에서는 당신 수난의 운명을 감지하고 난 뒤의 상황에서 오는 급박감을 드러내줍니다.
특별히 여기서는 ‘비뚤어졌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이 대조를 이루는데, ‘비뚤어졌다’는 것은 <신명기> 32장 5절에서 모세가 말해주듯이, 주님을 향하지 않아 비뚤어졌기에 우상숭배에 빠짐을 말합니다. 곧 주님께 속하기보다 우상을 소유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함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인정하기에 전능하신 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임입니다. 곧 ‘비뚤어졌다’는 것은 타자를 믿으려 하지 않음이요, 그 결과 병을 치유하지 못하는 무능력임을 말해주는 반면, ‘믿는다.’는 것은 받아들임이요, 그 결과 병을 치유하고 마귀를 쫓는 능력이요, 나아가서는 ‘못할 일은 하나도 없는 전능’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태 17,19) 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의 전능하심에 온전히 개방되어 있지 못하고 의혹이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그분에게서 오는 치유의 능력이 흘러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복음에 바탕을 둔 믿음이 아닌 자기 자신을 믿어버린 까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무능한 자신을 믿으면 무능해질 것이고, 전능하신 그분을 믿으면 전능해질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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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기도 -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주님!
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당신 뜻에 합당하게 하소서.
당신을 통해 제 뜻을 이루기보다, 당신 뜻을 알아듣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하고, 먼저 기도하게 하소서!
힘을 주시는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서, 당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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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치유하지 못한 ‘마귀 들린 간질병 환자’의 간청을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마태 17, 17)
여기서는 ‘비뚤어졌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이 대조를 이룹니다. 곧 ‘비뚤어졌다’는 것은 타자를 믿으려 하지 않음이요, 그 결과 병을 치유하지 못하는 무능력임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믿는다.’는 것은 받아들임이요, 그 결과 병을 치유하고 마귀를 쫓는 능력이요, 나아가서는 ‘못할 일은 하나도 없는’ 전능함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뚤어짐’과 ‘믿음’의 태도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비뚤어졌다’는 것은 <신명기> 32장 5절에서 모세가 말해주듯이, 주님을 향하여 비뚤어졌기에 우상숭배에 빠짐을 말합니다. 곧 주님께 속하기보다 우상을 소유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함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이 주인이 되기 위해서 타자에 대해 폐쇄적이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인정하기에 전능하신 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임입니다. 곧 절대타자를 주님으로 모셔 들이기 위해서 개방적이게 된 것입니다.
결국, ‘비뚤어짐’의 태도는 우상, 곧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함이요,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음에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믿음’의 태도는 자신의 무능과 허약을 인정하고 타자이신 주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받아들임에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무능한 자신 결국 무능한 자신이 될 수밖에 없고, 전능하신 분을 믿으면 전능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태 17, 19) 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 20)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의 전능하심에 온전히 개방되어 있지 못하고 의혹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닌, 전능하신 그분에게서 오는 치유의 능력이 흘러들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복음에 바탕을 둔 믿음이 아닌 자기 자신을 믿어버린 까닭이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무능한 자신을 믿으면 무능해질 것이고, 전능하신 분을 믿으면 전능해질 것입니다. 곧 그분을 믿음이 전능함이요, 불신이 무능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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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eB9dCqriI0&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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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마태 17, 20)
우리 자신의
믿음을
되돌아봅니다.
언제나 그렇듯
결정적인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단순한
믿음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게 하는 간절한
믿음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를
살아가게 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약한
까닭입니다.
믿음은
실천 속에서
자라납니다.
실천은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게 합니다.
바꿀 수 없는
믿음이 오늘을
태어나게 합니다.
오늘에
필요한 것은
오늘의
믿음뿐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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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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