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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한나라의 관계
< 차 례 >
1. 고구려의 건국과 추모왕(주몽)의 즉위
2. 한서 지리지 현도군의 기록
3. 기타 중국 정사 동이전 기록
1. 고구려의 건국과 추모왕(주몽)의 즉위
고구려가 건국한 때는 한나라(전한) 때이다.
고구려의 시조는 추모(주몽)이다.
추모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가 하는 것은 구삼국사를 인용한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에 잘 나와 있다.
동명왕편에 추모왕이 비류왕 송양과 다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왕(추모왕)이 스스로 띠자리 위에 앉아서 대강 임금과 신하의 위치를 정하였다.』
『왕(추모왕)이, “과인은 천제의 뒤를 이었지마는 지금 왕(비류왕 송양)은 신(神)의 자손도 아니면서 억지로
왕이라 칭호하니 만일 내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하였다.』
이 기록은 추모왕이 하늘의 자손이기 때문에 스스로 왕위에 올랐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때,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중국과 아무련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추몽왕(주몽)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즉, 아무런 교류 관계가 없었다. 관계 자체가 없었다.
다시 강조하건데 고구려는 건국할 때 중국과 관계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고구려와 중국관계가 조공과 책봉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관계 자체가 없었는데 무슨 조공이니 책봉이 있는가?
그런 말은 그야말로 미친 자들의 헛소리이다. 그런 것은 끼어들 여지 자체가 없었다.
굳이 못박아 말하라면 고구려 건국초기에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에 조공과 책봉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고구려는 중국과 조공 책봉관계에 있다’라는 명제와 ‘고구려는 중국의 종속 정권이며 지방정권
이다’라는 명제는 명명백백한 거짓 명제이다.
그것은 고구려 초기부터 고구려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터무니 없는 명제이며 그런 명제 자체가 있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 명제 자체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판정을 내리라고 하면 위 두가지 명제는 명백한 부존재 명제이다.
허위 명제이며, 거짓 명제 이전에 그런 명제 자체가 있을 수 없는 명제이다.
위 두가지 명제는 존재자체가 있을 수 없는 거짓임에 따라서 ‘고구려 역사가 중국역사’라는 말은
근거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거론할 가치 자체가 없는 미친 소리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고구려는 중국과 조공 책봉 관계에 있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음. 따라서 고구려 역사가 중국역사라는 것은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미친 소리임을 말하고 있음)
‘고구려는 중국과 조공 책봉관계에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명제는 나아가서 ‘고구려는 중국의 종속 정권이며 지방정권이다’라는 명제에 도달하고 끝내는
‘고구려는 중국역사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 고구려 역사를 중국에 강탈당하게 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나는 고구려는 중국과 조공 책봉관계에 있다’, ‘고구려는 중국의 종속 정권이며 지방정권이다’라는
두 개의 명제가 얼마나 엉터리이고 거짓인 말인지 집중 조명하여‘고구려는 중국역사이다’라는 것은 입에
담을 수가 없는 미친 소리임을 밝히고자 이 글을 쓴다.
2. 한서 지리지 현도군의 기록
고구려 초기, 고구려와 한나라의 관계를 알수 있는 또하나의 기록은 한서지리지이다.
한서지리지를 가지고 고구려 초기와 한나라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고구려 초기와 한나라의 관계에 대한 기록은 한서지리지 현도군조에 있는데 한서지리지 현도군에 대한 기록
본문은 다음과 같다.
현도군 4만5천6호, 인구 22만1845명, 현이 셋(3): 고구려 상은태 서개마
(玄菟郡 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 上殷台 西蓋馬)
<출처: 漢書卷二十八下, 地理志第八下>
이것이 전부이다.
즉, 현도군은 4만5천6호에 인구 22만1845명, 현이 셋(3)인데 고구려, 상은태, 서개마이다.
이게 현도군에 대한 기록 전부이다.
이중에서 고구려라는 현이 나오는데 이것과 고구려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먼저 현도군 본문에 주석을 달아놓은 게 있는데 그것을 보자
첫째, 현도군에 대한 주석:(한)무제 원봉 4년 개설. 고구려이다. (왕)망은 ‘하구려’라고 하였다.
유주에 속한다.
응소는 “옛 진번이고, 조선호국(조선이라는 오랑캐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武帝元封四年開。高句驪,莽曰下句驪。屬幽州。[一]應劭曰:「故真番,朝鮮胡國。」
둘째, 고구려현에 대한 주석
고구려, 요산에서 요수가 나와 서남으로 요대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
또 남소수가 있어 서북쪽으로 새외를 지난다.
응소는 “옛 구려호(구려 오랑캐)이다”라고 하였다.
(高句驪 遼山,遼水所出,西南至遼隊入大遼水。又有南蘇水,西北經塞外。[二]應劭曰:「故句驪胡。」)
셋째, 상은태현에 대한 주석
상은태는 (왕)망이‘하은’이라고 하였다. 여순은 “台의 음은 태이다”라고 하였다.
(안)사고는“(台의) 음은 태이다”라고 하였다.
(上殷台,莽曰下殷。[三]如淳曰:「台音鮐。」師古曰:「音胎。」)
넷째, 서개마현에 대한 주석
서개마는 마자수가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 서남쪽으로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2개의
군(郡)을 거쳐 2천1백리를 간다.
(왕)망은‘현도정’이라고 하였다.
(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過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玄菟亭)
※ 주석은 「한서지리지 구혁지(이용원 해역, 자유문고: 몇넌도 판인지는 글씨가 작아 모르겠음)를 참조한
것임」
이 네 개의 주석 중에서 현도군에 대한 주석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나머지 주석은 중요성이 떨어지므로 생략함)
< 현도군에 대한 주석 >
현도군에 대한 주석은 두 개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하나는 누가 언제 달았는지 모르는 주석과
나머지 하나는 응소가 단 주석이다.
먼저 누가, 언제 달았는지 모르는 주석에 대하여 살펴보면
4개의 구문으로 되어 있다.
즉, 「(한)무제 원봉 4년 개설하였다. 고구려이다. (왕)망은 ‘하구려’라고 하였다. 유주에 속한다」
이 주석에서 핵심적인 것은 ‘현도군이 고구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어떤 근거로 이렇게 주석을 달았는지 또한 올바른 주석인지 검토해보자
① 이 주석은 한서지리지 현도군 본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석이다.
본문은 현도군은 현이 셋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고구려’라고 하고 있다.
즉, 현도군 안에‘고구려’라는 현이 있다고 하였지 ‘현도군이 고구려’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주석은 ‘현도군이 고구려’라고 다르게 설명하였다
본문과 주석이 다르면 본문과 주석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당연히 본문이 옳은 것이고 주석은 옳지 않은 것이다.
본문이 주(主)라면 주석은 종(從)일 뿐이다. 주석은 주석을 단 사람의 생각일 뿐이며, 본문이 기록된 이후에
누군가 덧붙인 설명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이 올바른 것이고 주석은 틀린 것이다.
그러므로, ‘현도군이 고구려’라고 한, 위의 주석은 틀렸다.
그 주석은 존재가치가 없다.
② 응소의 주석을 보자.
현도군에 대해서는 “옛 진번이고, 조선호국(조선이라는 오랑캐 나라)이다”라고 하고 있고 고구려현에 대해
서는 “옛 구려호(구려 오랑캐)이다”라고 하여 현도군과 고구려 현이 다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현도군이 고구려’라고 한, 위의 주석은 틀렸다.
(첫번째 주석은 누가 언제 주석을 달았는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주석이고 두번째 주석은 누가 주석을 달았는지
분명히 알수 있고 언제 달았는지도 비교적 잘 알수 있는 주석이 있을때 어떤 주석이 역사적 증거 가치가 있는가?
물론 두 번째 주석이다. - 여기서는 응소의 주석
그리고 그 둘의 주석이 정반대로 되어 있을 때 어느 것을 사적 증거로 채택해야 하는가?
물론 두 번째 주석이다.
따라서 두 번째 주석을 사적 증거로 채택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첫 번째 주석을 판정할 수 있다.)
※ 응소는 후한 말 사람으로 대략 204년 8월 이전에 죽은 사람이다.
응소는 대략 삼국시대 조조 초기 흥평 2년 - 서기 195년, 경부터 저술 활동을 하여 건안 9년 -
서기 204년, 8월 이전에 죽은 사람이다.
③ 삼국지 동이전, 옥저편을 보면
『한(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B.C.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沃沮城)으로 현도군(玄菟郡)을 삼았다.
뒤에 이(夷)·맥(貊)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의 이른바 현도(玄菟)의
고부(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의 기록을 보면 최초에 현도군을 설치한 곳은 옥저성이고 그 때는 원봉2년(서기전 109년 - 사실은 원봉
3년, 서기전 108년임)인데 이맥의 침략을 받아 현도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 설치하였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기록은‘현도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이고 따라서 고구려와 현도군이 각각 따로
있었으니, 현도군은 고구려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또한 위의 삼국지 기록은 현도군을 옮기기 전부터 이미 고구려는 존재하고 있었고
현도군을 옮긴 후에도 고구려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고구려와 현도군이 제각각 따로따로 존재하였다.그러므로, ‘현도군이 고구려’라고 한, 위의
주석은 틀렸다.
참고로, 현도군을 옮겨 설치한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자.
위만조선이 무너진 때를 우선 생각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사기 조선열전 원봉 3년(서기전 108년) 여름조를 보면
알수 있다.
그 여름조에 전쟁이 끝나고 4군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중국 옛 문헌의 여름이란 4,5,6월을 말한다.
그러면 위만조선이 무너지고 4군을 설치한 것이 늦어도 원봉 3년(서기전 108년) 6월이다.
최초 설치후 약 1년 동안 공격을 받아 못견디게 되어 옮겨 설치하였다면 원봉 4년(서기전 107년) 6월 경이다.
늦어도 그해 말경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도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 설치한 것은 대략 원봉 4년(서기전 107년)이 맞을 것이다.
④ 또하나 후한서 동이전 고구려편을 보면
「(한,漢) 무제(武帝)는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玄菟)에 속하게 하였
으며...」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玄菟)에 속하게 하였으며’라는 구절은 후한서를 지은 범엽이
잘못 쓴 구절(나중에 살펴볼 것임)이지만 여기서도‘현도군이 고구려’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도군이 고구려’라고 한, 위의 주석은 틀렸다.
⑤ 또한 고구려와 현도군이 다르다는 것은 삼국사기를 보아도 알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유리명왕 본기 33년조를 보면「가을 8월에 왕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進兵] 한(漢)나라의 고구려현
(高句麗縣)<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을 공격해서 차지하였다.」이렇게 되어 있다.
여기서도 고구려가 있고 고구려현이 따로 있고 현도군이 제각각 따로 있음을 알수있다.
게다가 고구려현과 고구려 사이에 양맥이라는 나라까지 있었음을 알수 있다.
즉, 고구려, 양맥, 고구려현, 현도군(치소) 이러한 순서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서 고구려는 현도군이 아님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도군이 고구려’라고 한, 위의
주석은 틀렸다.
⑥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고구려=현도군이라는 주석은 명백히 틀렸다. 따라서 그 존재가치가 없다.
아무 근거없이 제멋대로 어느 누군가가 주석을 단 것으로 보인다.
이 틀린 주석은 현도군과 고구려가 다름을 모르고 고구려와 고구려 현이 다름을 모른 자의 소행으로 보인다.
아니면 고구려 역사를 말살하기 위하여 어떤 자가 악의적으로 끼워넣어 사기를 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서지리지의 본문도 아닌, 주석을 가지고, 그것도 명백히 틀린 주석을 가지고‘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
이었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엉터리 주장이고 거짓말이다.
주석은 주석을 단 사람의 주관적 견해일 뿐이며, 사서를 지은 후 몇백년이 지난 뒤의 사람이 해설을 적어
놓은 것 뿐이어서 맞을수도 틀릴수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틀린 주석이라면, 주석 자체가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어서 신경쓸 꺼리도 못된다.
그 주석은 주장의 근거가 될수 없기 때문이다.
틀린 주석을 주장의 근거로 삼는 것은 주장의 근거 자체가 없는 것이므로 근거없는 주장이며, 거짓 주장이고
성립할 수 조차 없는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따라서 ‘현도군이 고구려’라는 틀린 주석을 근거로‘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근거없는 주장이며, 거짓 주장이고 그러한 주장 자체가 성립할 수 조차 없는 허무맹랑한 헛소리일
뿐이다.
다시말해서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던 적이 없었고, 따라서 지방정권이라는 말은 고구려와 아무 상관이
없는 용어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본문도 아니었으니 신경쓸거리도 못되었지만 그러한 엉터리 근거를 가지고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어서 자세하게 다루어 본 것이다.
⑦ 기타
「(왕)망은‘하구려’라고 하였다. 유주에 속한다.」는 문장은 고구려라는 문장을 받아서 쓴 문장이고
현도군이 유주에 속한 것을 보고 쓴 것이니 이는 별로 쓸모없는 껍데기 문장일 뿐이므로 분석을 생략한다.
3. 기타 중국 정사 동이전 기록(1)
< 차 례 >
1)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편
2)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편
3)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편
4)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편
1)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편
『한(漢)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樂工)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도군(玄菟郡)에 나아가 [한나라의]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받아갔는데, [현도군의] 고구려령(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현도(玄菟)]군(郡)에 오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城)을 쌓고서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幘溝漊)라 부른다. 구루(溝漊)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城)을 부르는 말이다.
(원문: 漢時賜鼓吹技人, 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 高句麗令主其名籍. 後稍驕恣, 不復詣郡,
于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 歲時來取之, 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 溝漊者, 句麗名城也.)』
위 기록을 보면...
1) 음악(북과 피리, 악공)과 복장(조복과 의책)이 핵심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음악...
위 기록과 유사한 사건이 추모왕(주몽)때 고구려와 비류국의 사이에서도 일어났었다. 구삼국사를 인용하고 있는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을 보면...
『왕(추모왕)이,“국가의 기업이 새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고각(鼓角)의 위의(威儀)가 없어서 비류(沸流)의 사자가 왕래함에 내가 왕의 예로 맞고 보내지 못하니 그 까닭으로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하였다. 시종하는 신하 부분노(扶芬奴)가 앞에 나와, “신이 대왕을 위하여 비류의 북을 가져오겠습니다.”하였다. ...(중략)... 이에 부분노 등 세 사람이 비류에 가서 북을 가져오니 비류왕이 사자를 보내어 고하였다. 왕이 비류에서 와서 고각을 볼까 두려워하여 빛깔을 오래된 것처럼 검게 만들어 놓으니 송양(松讓)이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여기서 고구려는 남의 나라 북을 강제로, 몰래 가져오고 있다. 국가의 위의(威儀: 위엄과 의례)를 갖추기 위해서 이다.
마찬가지로 고구려가 음악을 들여 온 것은 국가의 위의(威儀: 위엄과 의례)를 갖추기 위해서이고 이 때문에 한나라에게서 음악(북과 피리, 악공)을 가져오고 싶어하여 한나라에 이를 청했고 그에 대하여 한나라가 응낙하여 음악(북과 피리, 악공)을 준(賜) 것이다.
고구려로 말하면 문물의 수입이고, 쌍방간을 말하면 문화적 교류이다.
비류국의 경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비류국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강제로, 몰래 가져온 것이고 한나라에 대해서는 음악을 달라고 청했고, 한나라는 거기에 응하여 음악을 준 것(賜)이다. 굳이 '하사했다' 라는 표현을 썼다면 그것은 이 글을 쓴 것이 중국 사서이니 자기들을 높여 쓴 춘추필법이다.
둘째, 복장(조복과 의책)
조복과 의책 역시 국가의 위의(威儀)내지 규례(規例)를 갖추기 위해서 가져온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하여 볼 사항은
처음에는 고구려가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현도군에 가서 가져왔으나 나중에는 조복과 의책을 가지러 현도군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에 대하여 한나라는 고구려와 경계에 작은 성을 쌓고 거기에 조복과 의책을 두어 고구려인에게 가져가게 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다시한번 확실하게 집고 넘어갈 사항은
① 고구려가 조복과 의책을 가져오고 싶으면 가져오고, 가져오기 싫으면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복장의 수입을 고구려가 자기들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② 고구려가 복장(조복과 의책)을 가져가지 않자 중국은 작은 성을 쌓기까지 하고서 고구려인들에게 복장(조복과 의책)을 주려고 한 사실이다.
복장을 주는데 상당히 정성을 들이고 있다. ‘가져 가십시요’하는 모습이 역역하다. 마치 조복과 의책을 바치는 듯한 모습이며, 무슨 달래는 듯한 모양이다. 이러한 모습에서 확실한 것은 최소한 한나라가 고구려에게 조복과 의책을 강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다시말해서 복장을 수입하는데 고구려는 자기 결정권이 있었고 한나라는 복장을 바치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최소한, 한나라가 고구려에게 강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 이 두가지 사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것은 조복과 의책을 주고 받는 관계가 주종관계나 종속 피종속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 준다.
그것은 최소한 대등한 관계에서 물건을 주고 받은 것이며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한나라가 고구려에게 물건을 바치는 것이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고구려가 한나라에게 종속되었기 때문에 복장을 가져온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음악과 복장을 가져온 것을 합쳐 말한다면 이것은 넓게 말해서 문화적 교류내지, 문물의 수입이며. 소극적으로 말해 당시 선진 문물이라고 할수 있는 한나라의 음악과 복장을 수입한 것이다.
음악과 복장을 수입해 온 것은 문화교류와 문물을 수입 했다는 증거이다. 이것을 가지고 어느 누가‘고구려는 한나라에게 종속된 정권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엉뚱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의 교류와 정치적 종속은 서로 별개이며, 서로 다른 영역이다.
문화적 교류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종속적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타당을 결여한 것이다. 문물을 교환하였으니 그 둘은 종속관계에 있다는 말이 성립하는가? 말도 않되는 소리이다.
혹시 고구려가 한나라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문물을 받아갔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간과 한 것이다.
고구려는 문물을 가져 오는데 자기 결정권이 있었고 한나라는 문물을 주는데 강제가 없었다는 사실이다.(오히려 가져가 달라고 성까지 마련했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가 문물을 가져온 것은 한나라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가져온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종속되었기 때문에 강제로 받아들여진 문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제 모든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다.
그런데도 마치 문물의 수입이 종속의 증거인양 떠드는 것은 무지와 무식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고, 문물의 수입이 종속의 결과가 아님을 사서는 증명하고 있는데 마치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학문적 사기일뿐이다.
2) 오히려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朝服: 관원의 예복)과 의책(衣幘: 옷과 두건)을 받아갔다는 자체가 고구려가 있었고, 현도군이 따로 있었다는 말이며, 현도군의 고구려(현)령이라는 말로 고구려현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즉, 고구려, 현도군, 고구려현이 각각 따로 있음을 알수 있다. 따라서 현도군=고구려라는 주석(한서지리지)은 틀렸음을 또한번 확인할수 있을 뿐이다.
3) 결론적으로,
음악과 복장의 수입을 근거로 ‘고구려가 중국의 종속정권이다’라는 주장과,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다’라는 주장은 무지와 무식의 소산이며 그것이 아니라면 사기이다.
아무관련이 없는 것을 관계가 있는 것처럼 말한 것이고 인과관계가 없다고 사서에 명백히 씌여 있는데도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주장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주장했다면 무지와 무식이고 알면서도 주장했다면 사기이다.
굳이 찍어서 말하라면 명백히 틀린 주장이며 사실이 아니다.
또한 조공과 책봉이라는 것도 없었다. 여기에는 조공과 책봉이라는 것이 끼여들 여지도 없기 때문이다. |
3. 기타 중국 정사 동이전 기록(2)
< 차 례 >
1)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편
2)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편
3)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편
4)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편
2)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편
『한(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B.C.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沃沮城)으로 현도군(玄菟郡)을 삼았다.
뒤에 이(夷)·맥(貊)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의 이른바 현도(玄菟)의
고부(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위 기록을 보면,
현도군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음을 알수 있다. 여기서도 또한번 현도군 설치 당시와 현도군이 옮겨갔을 당시에도(서기전 107년)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이것으로 고구려 역사가 서기전 37년에 시작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며 최소한 70년 줄여졌음을 다시한번 확인 할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이른바 현도군에 설치했다는 고구려현은 각각 다른 실체임을 간접적으로 알수 있다
그 다음 뒤에 이(夷)·맥(貊)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의 이른바 현도(玄菟)의 고부(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라는 말로 보아 고구려는 현도와는 다른 곳임을 알수 있다. 즉, 고구려는 현도가 아니며 다른말로 말하면 한나라의 지방정권이 아님을 알수 있다. |
3)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편
『[한(漢)] 무제(武帝)는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玄菟)에 속하게 하였으며, 북(고,鼓)과 관악기(管樂器)와 악공(樂工)을 하사하였다.』
위 기록에 관하여
1) 여기서도 고조선이 망할 때(서기전 108년) 고구려가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 할수 있다. 2) 그러나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현도에 속하게 했다는 말은 틀린 문구이다.
왜냐하면,
첫째, 후한서의 동이열전 등 외이전은 삼국지 등의 전사(前史)의 것을 옮겨적은 것인데 삼국지에 그런 내용이 없다.
삼국지에는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현도에 속하게 했다'는 기록이 없을뿐만 아니라, 반대로 고구려가 따로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즉, 삼국지에는 고구려가 현도군에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다고 되어 있으며 [현도군의] 고구려령(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고 되어있어, 고구려와 고구려(현)령, 현도군이 각각 따로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고구려가 현도군에 오지 않자 『[(고구려와 접경인) 현도군의]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城)을 쌓고서...』라고까지 기록하고 있으므로 현도군의 동쪽 경계 넘어에 독립적인 고구려가 따로 존재하고 있음을 더욱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현도에 속하게 했다'는 후한서의 기록은 명백히 틀렸다.
둘째, 한사군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한서(漢書)에도 「무제(武帝)는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玄菟)에 속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셋째,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에 썼던 사기(史記)에도 「무제(武帝)는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玄菟)에 속하게 하였다」는 말이 없다.
넷째, 같은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편을 보면
『[한(漢)]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망시키고서 옥저 땅으로 현도군(玄菟郡)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라고 되어 있어, 고구려편과 정면 배치된다.(후한서 고구려편)
여기서는 현도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함으로써 고구려가 현도군의 동남쪽에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현도에 속하게 했다'는 후한서의 기록은 명백히 틀렸다.
넷째, 삼국사기 유리명왕 본기 33년조를 보면
『가을 8월에 왕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進兵]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을 공격해서 차지하였다.』라고 해서 고구려가 고구려현을 공격하여 차지했음을 말하고 있다. 고구려는 고구려현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고구려와 고구려 현은 엄현히 다르고 위치도 고구려는 동쪽에 있었고 고구려현은 먼 서쪽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고구려, 양맥, 고구려현, 현도의 순으로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고구려와 고구려현은 고구려가 고구려현을 차지할 때까지 공존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현도에 속하게 했다'는 후한서의 기록은 명백히 틀렸다.
이상의 증거가 보여주듯이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玄菟)에 속하게 하였다는 후한서의 기록은 명백히 틀렸다. |
4)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전
『[한(漢)] 무제(武帝)가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서 옥저(沃沮) 땅으로 현도군(玄菟郡)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위 기록에 관하여,
위 기록은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전을 옮겨 쓴 것이니 같은 내용이다. |
5) 이상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기타 중국 정사 동이전 기록의 핵심은 두가지 이다.
① 한나라 문물의 수입과 고구려, 한나라의 관계- 음악과 복장의 수입(북과 피리 악공 및 조복과 의책의 수입)
② 고구려를 고구려현으로 만들었다는 후한서의 내용
이중에서
①은 문물의 수입은 문화적 교류의 증거이다.
그것을 고구려가 한나라에 종속되었다거나 한나라의 지방정권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무지와 무식의 소산
이거나 사기이다.
②는 범엽이 한서지리지에 나오는 고구려현을 보고 고구려를 고구려현으로 생각한데서 나온 오판이며
고구려, 고구려현, 현도군이 각각 따로 존재하였다는 사실과 고구려가 고구려현을 차지할때까지 고구려와
고구려현이 공존하였음을 모르는데서 오는 무지가 낳은 오류이다.
우리사서 삼국사기와 중국 정사를 살펴보면 고구려, 고구려현, 현도군은 제각각 따로 존재하였음을 알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한나라 시절, 어느 때에도 한나라에 종속되었거나 지방정권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고구려현이나 현도군과는 관련없는, 따로 존재하였던 독자 국가였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