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 / 노정희
여자는 예민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하다. 비가 올 것 같으면 뼈마디가 쑤시고 기온이 내려갈 것 같으면 발목이 시리다. 그뿐인가, 남편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촉’이라는 범상치 않은 감각기관은 늘 고주파 더듬이를 세우고 있다.
요즘 대주大主의 행동이 이상타. 이 추위에, 더구나 저녁때에 손수 세차를 하는가 하면, 일요일 저녁에 모임에 간다며 바지에 칼날을 세운다. 어떻게 할까, 정면 돌파로 직진하면 미리 대응하여 막아설 수 있으니 우회해야 하나. 이 격랑의 수압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는지 생각이 생각의 끈을 문다. 격랑의 바닷물에 빠져 마냥 허우적거리기보다는 무언가 부유물이라도 잡아야 한다.
신년 빨간 날짜에 여행을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다. 바다 쪽이 좋겠지, 남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여행지에서 사용할 용품과 먹을거리를 장만하러 막 나서는데 남편 폰에 카톡이 뜬다. 순간 감전되듯 찌릿하게 ‘촉’이 작동한다. 폰을 감추려는 쪽과 확인하려는 쪽의 몸싸움이 발생했다. 모른 체 넘어갔으면 여행이라도 다녀올 것을 기어이 사단이 난 것이다.
-땅거미 지는데 세차하는 사람도 이상하거니와 일요일 저녁에 모임 하는 얼간이족이라니, 분명 구린내가 진동한다 싶더니만. 그래, 누군가와 열심히 카톡 중이었어?
-지는 남자들과 모임도 하고, 문자와 전화도 잘도 하더라만 내는 카톡하믄 왜 안 되는데?
-내는 모임의 사람인께 그라지요, 당신은 부킹해서 만난 사람이잖우.
-뭔 부킹?
-저번 주에 부킹한다고 이마빡에 써 붙이고 나가 더 만. 거기서 만난 여자 아이가?
-그래, 맞다. 근데 그게 그거제, 니캉 내캉 뭐가 다르노?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현관문을 박차고 나왔다. 칼바람을 안고 동네를 두어 바퀴 돌았으나 마땅히 갈 곳이 없다. 혼자 소주잔 기울이기도 그렇거니와 이슥한 밤 시간에 친구를 부르기도 뭣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춥다. 얼굴이 꽝꽝 얼어붙는다. 내가 젊은이도 아니고 오십 넘은 나이에 쓰러지면 ‘지화자’ 할 사람은 따로 있겠지.
집으로 돌아와 안방 문을 잠갔다. 문 열어달란다. 대화 좀 하잔다. 이 풍진 세상에 어찌 일부종사를 강요할 수 있으랴, 낙락장송이 되어달라고 정화수 떠놓고 치성을 드린 것도 아니고. 하지만 배우자에 대한 예의를 생각했다면 ‘들키지’ 말았어야했다.
변명을 늘어놓는다. 마누라는 매일 바쁘고, 집에 오면 아프다고 하고, 혼자 외로웠단다. 부킹은 딱 한 번 했는데 카톡을 주고받다가 마누라한테 들킨 것이다. 남자의 ‘아내에 대한 지능지수’는 얼마일까. 내가 놀러 다닌 것도 아니고 푼돈 벌겠다며 허리에 복대하고 다니는 것을 누누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본인 생각만이 우선이다. 하기야 나도 잘 한 것은 없다. 남편을 외롭게 방치한 대가라면 달게 받을 수밖에.
며칠 후, 남편은 친구들과 등산을 가기로 했다며 눈치를 본다. 등산하려니 웃옷이 낡아서 하나 장만해야겠다며 웅얼거린다. 카톡 사건도 있거니와 이제 모든 일이 의심 쪽으로 ‘촉’이 선다. 두 발로 다니는 사람을 따라다니며 간섭할 수도 없는 일이고, 마누라 속이는 일이야 눈 감고 아웅 하면 알 게 뭐람. 그냥 내가 선 자리에서 내 역할에나 충실하자. 옛말에도 있잖은가, 안에서 잘하면 미안해서라도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그동안 가족을 위해 헌신한 남편이니 그 고마움을 상기하련다. 차가운 바람보다는 따스한 햇살로 감싸줘야지, 등산갈 때 멋진 윗도리 사 입혀서 대범한 마누라라는 느낌이 들도록 해야겠다.
아,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을 눈치 챈 큰아이가 귀띔한다.
-남자에게 비싼 옷을 사 입히면 고마워할 겁니다. 그러나 현명한 여자는요, 남자에게 헌신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몸을 가꾸어 건강하고 예뻐져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본인이 비싼 옷을 사 입어야 남자의 관심을 끕니다. 고마운 여자보다는 사랑 받는 여자가 되십시오.
이럴 수가, 생각의 세대 차이를 느낀다. 곱씹어보니 딸아이의 말이 명쾌하다. 송충이는 솔잎만 먹고, 누에는 뽕잎만 먹고, 배추벌레는 배추만 먹으니 자기 수준에서 몰입하느라 생각의 폭을 넓히지 못했다. 먹고 보는 데만 집착하느라 ‘벌레’로서만 머물렀다. 나방이 되고 나비가 되고 비단을 뽑는 성장의 길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촉觸’을 운운하며 행동에 ‘촉鏃’을 세웠다. 내 삶을 돌보고 가꾸기도 버거운데 나이 오십 넘어서까지 남편 바깥일을 일일이 간섭하랴, 너그럽게 보아 넘기자. 작금의 사회생활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건전한 만남이라면 슬며시 눈을 감을 수밖에. 남편인들 고운 추억 하나쯤 안주머니에 감추어 두고 싶지 않으랴.
모든 근원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남편을 탓하기 전에 나를 돌아볼 일이다. 결혼생활 30년이 흘렀는데 어찌 배우자가 한결같기를 바라랴. 어찌 몸을 묶고 마음을 묶으랴. 단지 지나온 걸음이 남루하지 않기를 바라자. 이 겨울 지나기 전에 내안에 파란 촉 하나 심어야겠다. 이 밤 지나기 전에 내 가정에 환한 촉 하나 밝혀야겠다.
첫댓글 촉, 잘 읽었습니다. 촉 운운하다, 행동의 촉을 세워 너그러워졌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