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로마서 10장 1-3절『형제들아(아델포이)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 하나님께 구하는 바(헤 데에시스 프로스 톤 데온)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휘페르 아우톤)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에이스 소테리안)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에피그노신)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ἡ μὲν εὐδοκία τῆς ἐμῆς καρδίας)는 나의 마음의 만족감이다. 헤 데에시스 프로스 톤 데온(ἡ δέησις πρὸς τὸν θεὸν)은 하나님을 향한 그 간구함이,
휘페르 아우톤(ὑπὲρ αὐτῶν)은 그들을 위하는 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다시 번역해 보면 『형제들아 실로 구원 속으로 들어가도록 그들을 위하는 내 마음의 만족감과 하나님을 향한 그 간구함이 있다』
에피그노신(ἐπίγνωσιν)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 관계를 통해서 아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체험적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이 진단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복음은 이 땅(성도)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선민사상에 붙잡혀 이러한 근본적인 목적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죄악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모두가 심판의 대상이 된다. 이게 하나님의 의다. 구원받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가 된다. 하나님의 심판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받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면서도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심판받으셨다. 우리도 육신이 건재할 때, 미리 심판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회개하여 옛사람의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될 것이다. 결국 심판받은 자와 심판받을 자로 나누어질 것이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심판받은 자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자가 된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3장 12절에서『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고 바리새인들에게 저주의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므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의로운 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말석으로 떨어지고, 예복을 갖추지 못하면 결국 어두운 곳으로 쫒겨난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하늘을 우르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들이다.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므로서 스스로 의롭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인데, 그들보다 더 의로워져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래서 교회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서 믿음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 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들어보면, 하나님 나라의 것보다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서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몰두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거룩하게 사는 삶,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삶, 성화를 이루기 위한 삶 등이다.
이는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판단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루신 일을 닮아가는 것은 어리섞은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을 믿으면, 예수님이 이루신 일과 동일하게 이룬 것이므로, 예수를 닮는 삶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물론 신앙생활 하면서, 거듭난 자로서 삶의 변화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정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열매이지, 자신이 노력해서 이렇게 살아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자신이 육에 있는지, 아니면 영에 있는지 날마다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육에 있어 영의 상태로 나아가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육에 대해서는 죽노라, 그리고 영에 대해서는 날마다 사노라 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자기의 의에 빠지는 자들은 육적인 모습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모습으로 스스로 노력해서 나아가려고 하므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의 인식이 중요한 것이다.
로마서 7장 18-20절「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육신은 육의 몸(사륵스)으로서 죄의 몸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 죄의 몸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믿는 것이다. 로마서 6장 6-7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죽고, 함께 부활함을 믿는 신앙이다. 그래서 이것을 전하는 것이 전도의 핵심인 것이다. 왜냐하면, 죽었던 영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었던 영을 살리기 위한 행동과 활동을 벗어나 단순히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만 예수님을 닮는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섞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거룩, 성결, 성화 등의 말은 다 같은 의미를 닮고 있다. 많은 목사들은 설교에서 이와 같이 되도록 노력하자는 말들을 할 때가 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말을 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이 그저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룩한 된 자임을 인정하시는데, 굳이 자신이 이렇게 되기를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거짓 교사들이 잘못된 교리로 말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