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글 올리는군요. 쓰다 보니 긴 글인데 재미는 없습니다. -ㅅ-; 언제나처럼 시간 봐서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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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절판되었습니다만 한국에도 번역되어 나온태평양 전쟁과 일본군 (상권 - 지휘관의 역할 - 하세가와 케이타로/이성렬 역 - 정보여행 1997)이란 책이 있는데 이 책에 보면 미노베 타다시 소좌란 사람의 일화가 나옵니다.
대전 말기 일본, 일부에서는 자원의 이름을 빌린 반강제적인 특공 출격이 반복되고 있었을 때. 특공을 거부한 부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이 책에 있던 단편에서였는데 이 책의 내용은 월간 프레지던트라는 잡지에 연재되던 단편들을 모아 책으로 발간한 것으로주로 구 일본군의 패인과 전쟁 지도의 문제점에 대해 신랄하게 다룬 책이었습니다. 태평양전쟁 기간동안 일본군의 경직화된 사고, 행동패턴을 몇번이나 봐 온 저도 이양반의 얘길 읽고는 처음엔 사실 거의 믿을 수 없었습니다. -ㅅ-;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도대체 어떤 남자가 이 부대를 지휘한 것일까라는 점에도 매우 흥미를 느꼈습니다. 이후 한참이나 잊고 있다가 이양반의 이야기를 다룬 와타나베 요우지씨의 저작 "혜성 야습대" - 란 책을 우연히 중고책방에서 보고 집어왔는데 이후 내막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관심히 동해 이리저리 검색해 자료를 좀 더 모아 글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해군 전체의 분위기가「특공 불가피, 통상공격은 의미가 없다」- 라는 생각에 지배되고 있을 때, 제대로 근거를 대면서 상층부를 설득, 그리고 부하들에게도 합리적인 맹훈련을 시켜 최종적으로는 야간 통상공격을 상층부가 인정하게 만든 그 근성은 충분히 존경할만한 자세입니다. 만약 내가 그같은 입장이면 어떻했을까라고 생각될 정도로 말이죠. 그자리의 분위기에 지배되지 않는 확고한 의지, 피아의 전력을 허심탄회하게 재검토하는 솔직함, 확실히 대전 말기 일본 군인으로써는 매우 드문 사람이었던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하는 이양반이 이끌었던 한 부대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ㅅ-;그럼 글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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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부대 >
구 일본군에서 육군에는 지휘관의 이름을 붙인 부대, 예를 들면 이치지 지대라던가 가토 하야부사 전투대같은 이름이 꽤 많았고 어느 의미론 반 공인된 부대명으로 문서에도 그리 표기됩니다만 해군에선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 유명한 겐다 대좌의 츠루기 부대조차 그것은 별칭이었고 실제 공식 명칭은 343 해군항공대(정식명칭은 343공)였지요.
그런데....해군에 딱 하나 넘버가 붙지 않고 이름만 붙은 부대가 존재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용 부대(芙蓉部隊/후요우 부다이)로 흔히 부용대(芙蓉隊)로도 불리는 미노베 타다시(美濃部正) 소좌가 이끌던 구 해군의 마지막 정예 항공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정예" 였지만 "정예" 대접을 받지 못하고 해군의 고위 포스트로부터 백안시된 기묘한 이력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부대가 훌륭한 전과를 보였음에도 그리 유명하지 않고, 고위층에겐 백안시까지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이 부용 부대가 창설부터 임무에 이르기까지 오직「이례」뿐인 부대였으므로 엄정 군기를 자랑하는 구 제국 해군(...)에선 역시나 껄끄러웠기 때문이겠지요.
우선, 이 부용부대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설명해볼작시면....
1. 부대가 존재한 시기는 1944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의 단기간.
2. 해군성 편제상은 야간전투기 부대였지만 실제 장비기체는 영전의 각종 잡다한 형식과 혜성 초기형(액랭엔진 장비형인 12형), 그리고 부대원들도 함폭(혜성)탑승원은 수상기 출신의 기종 전과자 중심으로 실제 부대의 주임무는 통상공격에 의한 야간 지상/대함공격.
3. 부용대의 구성은 제 804, 제 812, 제 901의 3개 전투비행대로 편성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대함/대 지상)공격임무를 맡은 부대. 부대의 상급부대는 계통상 121 항공대와 관동항공대의 이중 체제지만 그 어느 쪽도 부용대의 지휘와 작전운영엔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며「부대 지휘관」격인 미노베 타다시 소좌가 작전운용/용병/정비/보급/병참 모두를 관리하고 있음(...) 그러나, 그 미노베 소좌의 부용 부대에 대한 지휘권도 서류상에서는 애매. orz
4. 부용대는 다른 해군 항공부대에선 거의 취급하지 않는 특수 폭탄을 전국 때문인지 모조리 모아서 운용하고 있다.
5. 부용대 독자의 전선기지(이와카와)와 후방기지(후지에다)를 보유했기에 로테이션이 존재하지 않고 자기 부대에서 죽을때까지(...)근무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일본 육해군 항공부대완 달리 독자적인 휴식/훈련/재편부대를 보유, 전선을 일정기간 경험한 탑승원은 후방 기지에서 휴식&신병에게 재교육을 하고 있었다.
..........뭐 이정도 되면「 해군항공대 소속이 아닌, 거의 독립전대」 - 라고 불러도 될만한 조직을 운용하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부대의 지휘관인 미노베 소좌는 당시 약관 28세의(1944) 젊은 소좌였다는 사실...orz 만약, 부용 부대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미노베 소좌의 반 사병 독립부대」라고 밖에 표현이 안될 정도였습니다.
뭐, 리얼리티가 필요한 가공 전기나 전쟁영화에서조차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설정의 부대를 만들면 말도 안된다거나 고증 무시로 취급되어 버립니다. -ㅅ-; 하지만「 현실은 영화나 소설보다 신기하다」 - 라는 좋은 실례인듯 합니다.
부용대가 이렇게나 이례적인 편제와 구성이었던 점, 그리고 그 지휘관조차 이례적으로 젊은 소좌였던 것의 원인은 일단 1945년 2월 말, 치바 키사라즈 기지에서 연합함대 주최로 열린「오키나와전 작전연구회」(장래 벌어질 오키나와 결전을 위해 해군군령부와 연합함대의 각 참모, 부대 지휘관급이 모인 연구회 형식의 좌담회)에서 벌어진 한 사건이 그 발단이 되었습니다. 44년 말, 매리애나전 패배 이후 시점의 해군전법은 거의 완전히 특공으로 경직되게 되는데 그에 비례해 연구회 분위기도 암담 그 자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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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광인사 NF문고 「 혜성 야습대 ~ 특공거부의 이색집단 ~ 」와타나베 요우지 저 에서 인용>
「............입다물고 있자, 아무것도 말하지 말자..........」
말석에 앉은 28세의 미노베 소좌는 애써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것처럼 1945년 2월말, 각급지휘관 80여명을 모아 치바 키사라즈 기지에서 열린 연합함대의 오키나와 작전 회의. 수석참모로부터 미노베가 사전에 전해들은 방침은「전력 특공」이었습니다.
당시 미군은 이미 이오지마에 상륙해 일본의 패색은 기정사실화된 와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상부에선 계속해서 훈련이 부족한 소년 비행병이나 학도병까지 계속 특공에 내보내고 있었는데 이래서는 더더욱 이길 수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미노베 소좌였습니다.
하지만......... 반대 의견을 내세운 사람은 누구하나 없었습니다. 그저 침울한 얼굴로 담배만 줄창 피워댈 뿐이었지요.
미노베는 마음속에서 문답을 계속했습니다.
「 ........지휘관이라면 반드시 생환의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해군병학교에서 배웠다. 생명을 포탄처럼 소모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리석고 못난 작전이다.」
오오니시 타키지로 제 1 항공함대 사령장관「.......이제 해군항공대에서 훈련에 사용할 수 있는 연료는 탑승원 일인당 월 15시간분 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러므로 차기의 오키나와 작전부터는 교육부대를 폐쇄하고 연습기를 포함, 전원 특공편성으로 나간다. 」
..........「 상관의 명령은 짐의 명령과 같다」- 는, 일본 군인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항명죄로 군법회의로 넘겨진다면 사형당할수도 있다......소좌는 갈등했습니다. 하지만, 미노베는 거수하고 일어섰습니다!!!!!!!!!! ㅡ.ㅡ;
미노베 소좌「 필리핀에서 적은 기동부대 상공에 300기 이상의 직위전투기를 배치했습니다*(주1). 이번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 상대에게 느려터진 연습기까지 투입한다 해도 겹겹이 쌓인 그라망*(주2)의 방어진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특공으로 이길 수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습니다.」
항공참모 「 필사 진충의 사기가 하늘을 뒤덮어 진격할 때, 어느 누가 이것을 막을 수 있을것인가!!! ㅡ.ㅡ; 그게 모범을 보여야 할 제일선의 소장 비행대장이 말할 도리인가!! 언어도단이다!!!!!!!! 」
미노베 소좌 「 지금 우리 해군항공대의 젊은 탑승원 중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목적과 의미가 필요한 것입니다. 게다가 죽는 것은 확실한 이상, 어떻게든 목숨과 맞바꾸어서라도 전공을 세우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정신력만의 공염불로는 진심에서 솟아오르는 사기로 전장을 향해 출발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죽는다면 확실한 수단을 강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항공참모 「 그렇다면 귀관에겐 구체적인 방책이 있단 말인가!!!!」
오오니시 타키지로 사령장관 「 그렇다. 대안이 없는 이상 귀관의 말은 변명에 지나지 않아. 앞서 말한것처럼 미 기동부대를 상대로 통상공격은 불가능하다. 아니, 하고싶어도 할 수가 없는것이다. 우리에겐 이미 정상적인 공격부대를 편성할 항공기도, 연료도, 기량있는 탑승원도 현저히 부족한 것이다. 방책이 있다면 오직 특공뿐이다. 」
미노베 소좌「 ...........항공기 부족을 특공전법의 이유의 하나로 들고 계시지만 지난 미 기동부대 내습시(매리애나전) 우리 군은 항공기의 분산 위장을 게을리하고 항공기를 비행장에 노천주기시켜 너무나도 귀중한 전력을 하늘에 띄우지도 못하고 날려버린 부대가 많지 않습니까. 또, 연료 부족과 훈련 부족으로 인한 탑승원의 숙련도 저하도 이유의 하나로 들고 계시지만 그것은 교관들의 지도상 문제입니다. 소관의 직을 걸고 장담드립니다만 소관의 부대는 체계화된 교육을 이수시켜 비행시간 200시간*(주3) 정도의 영전 탑승원도 모두 야간 해상항정이 가능합니다. 이런 탑승원들을 모아 전원이 죽음을 각오로 교육하고, 신편될 공격부대 탑승원 또한 결사의 각오로 교육받는다면 미 직엄기군을 뚫고 적함에 육박해 충분히 효과적인 통상공격을 할 수 있습니다. 모두 죽어버리는 필사대는 절대 안됩니다. 그런 의지가 있다면 결사대로 좋습니다!!!!!!!」
이어 미노베 소좌의 발언 계속 -ㅅ-;
미노베 소좌「 마침 여기에 있는 분들은 모두 지휘관, 막료들이십니다. 스스로 적함에 특공으로 돌입하실 분은 없으시겠지요. 필사 진충과 같은 말은 용감한 것을 말씀하시지만 적의 탄막을 얼마나 빠져 나오셨단 말입니까? 실례입니다만 소관은 출격회수만으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고 이곳에 계신 어느 분보다 최일선에서 실전을 경험해 왔습니다. 지금 여러분들 지휘관 스스로가 목숨을 주고받을 생각을 하시고 특공에 나가시겠습니까? 」
.......당시 일본군의 경직성과 연공서열을 생각하면 경이적인(...)이 발언에도 동요하지 않는 각 지휘관과 참모들, 아니......이미 할 말이 없어 좌중은 계속해서 조용히 담배만 끊임없이 태울 뿐이었습니다.
미노베 소좌「 열속의 연습기를 모아 주간에 수천기 진격시킨다 해도, 그라망에 걸리면 모조리 떨어집니다. 그런데도 2,000기의 연습기까지 특공에 끌어내고 빨강잠자리*(주4)까지 꺼내 특공시키시려면 먼저 여기에 계시는 분들이 그걸 타고 모의로라도 공격해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소관에게 영전 1기만 내어주신다면 후지산 상공에서 대기하고 있다 전기 격추시켜 보이겠습니다!!!」
<인용 끝>
*(주1) 직위전투기란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함대의 상공을 선회하며 함대 방공임무를 맡은 전투기를 가리킴.
*(주2) 그라망 - 그루만 F4F와일드켓이나 F6F 헬켓 등 그루만사(社)제 항공기. 하지만 당시 일본해군에서 그라망이란 주로 미 해군의 함상전투기(함전)를 통칭하는 대명사처럼 사용되었음.
*(주3) 통상 당시 야간 해상항정에는 600~700시간정도의 비행 캐리어가 필요. 그러므로 당시 미노베 부대의 이 숫자는 경이적.
*(주4) 빨강잠자리 - 아까돔보(빨강잠자리)란 이름은 해군항공대의 연습기에 붙은 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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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랬던겁니다. 당시 항공대 사령 대리로 우연찮게 고급지휘관 회의에 출석하게 된 미노베 소좌는 당연히 회의에선 최하급자이자 말석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습기까지 특공기로 돌려 적 기동부대에 돌진하려고 하는 해군 상층부에...............
「 정말 빨강잠자리까지 꺼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여기에 계신 분들이 먼저 그걸 타고 공격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소관이 영전 1기로 전부 격추시켜드리겠습니다(...)」
(...) 라며 단칼에 뽀큐를 날린겁니다...-ㅅ-;
뭐, 이미 사전 교섭도 끝난 상태에서, 방침이란 오직 전군 특공으로 결정되고 있던 그 회의가 고작 대리(...)로 온 최하급 소좌의 돌출발언으로 완전히 망가져 버린, 그때 참가자 일동의 난감한 표정이 마치 YTN돌발영상처럼 눈에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풉)
하지만.....이러한 경우에도 일본식 회의의 결론이라는 것은 그런데도 회의 자체는 사전 교섭대로 진행되는 것이 상례입니다. 뭐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죠-_-; 어찌보면 일본의 문화와도 같은겁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그렇게 회의에 뽀큐를(...)날린 발언자는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경우가 많지요. 때문에 회의의 결과는 연습기를 포함한 전군 특공은 당초대로 결정, 하지만 미노베 소좌의 부용부대는 특공이 면제된 대신 그 실적을 증명하도록 명령되었습니다.
그리고.........실제로도 종전까지 부용부대는 상층부가 특공을 강요하지 않을 정도의 훌륭한 실적을 계속 올리게 됩니다.
참고로 그라망 헬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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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부대의 편성 >
당초 부용부대의 편성은 필리핀전에서 괴멸되어 장비를 상실한 3개의 항공부대(원래는 복좌 야간 전투기 월광을 장비하던 부대)를 기간으로 수상기 탑승원들을 보충 인원으로 전과시킨 오합지졸의 부대였습니다. 하지만 이 재편부대가 하나의 정예부대로 결집된 유일한 이유는 바로 지휘관 미노베 소좌의 리더쉽에 의한 것이었죠.
때문에 부용부대는 서류상 부대 지휘계통도 전쟁 말기의 혼란을 반영해 복잡하고 터무니없어서 실제로는 지휘관이며 부대의 대부이기도 한 미노베 소좌의 사병부대적 존재가 되어 독자의 부대 행동을 실시, 최종적으로는 해군 상층부도 제 5 항공함대 소속의 부용부대로서 공식 인정하게 됩니다.
참고로 이게 복좌야전 월광.
보통은 어떤 이명을 가진 부대라도, 예를 들면 겐다 미노루의「츠루기 부대」는 원래 343 항공대란 등 어쨌건 넘버링된 정식 부대명이 존재하는 것입니다만 앞서의 이유 등으로 이 부대의 경우엔 단지「부용부대」라고 밖에 부를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미노베 소좌의 항명이 어디서 많이 본 대사같다면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에 나오는 "사문회 발언" 이 바로 이것의 원조입니다(뽀핫). 게다가 반 독립적으로 작전과 용병을 하고 부대장 개인의 카리스마로 뭉쳐진 부대인 이 부용부대란 마치 자유행성동맹「얀 함대」와 같은게 아닌가.....orz 아는 분은 다들 아시겠지요.
부대의 장비는 각종 잡다한 형식의 영전과(후에 들어선 영전 말기형이 대다수) 다른 부대에선 취급이 불가능한(사실은 꺼려한) 혜성 액랭형(12형)으로 무장 또한 28호 로켓폭탄과 31호 광전관 폭탄, 나머지는 3호 폭탄이라든지 반도폭격용(스킵 보밍)의 3식 25번 8호 폭탄이라든지 정말로 일본해군 항공부대인가? - 라고까지 생각되는 특수 병기뿐....(풉) 이렇게 특이한 신형무기들은 미노베 소좌가 직접 영전을 몰고 전국의 항공창을 샅샅히 뒤져 잉여품을 모았다고 전해집니다. 왜냐? 특공중심의 부대에서는 이미 정비능력이 없어서 취급할 수 없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전선기지로 이와카와, 후방기지로 후지에다(시즈오까현)로 두군데의 기지를 가져 연일 임무로 피로한 탑승원들은 주기적으로 후방의 후지에다로 교체/휴양시켰고 또 이 베테랑 요원들이 꾸준히 신규 탑승원을 양성시켜 보충한다는 체제로 피로해도 쉬지 못하고 죽을때까지(...) 계속 싸우는 것이 통례인 다른 일본 육해군 항공부대와는 확연히 다른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로테이션을 짜 정기적인 휴식이나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니, 마치 미군의 항공부대 같습니다.
여기에 더해, 대전 말기면서도 그 정비 능력의 우수함으로 부대 기체또한 경이적인 가동률을 자랑하고 있었고 연료 할당이 다른 부대와 같은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탑승원 1명당 연료 할당이 1달에 비행시간 약 15시간분) 훈련방식을 체계화시켜 다른 부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숙련도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말기였어도 특공이라는 안이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노력하면 일본군도 이만큼이나 할 수 있었던 것을 나타내 보인 몇 안되는 사례입니다.
그리고. 이 부대의 주력기 또한 매우 특이한 녀석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엔진의 라이센스(생산권)를 육해군이 개별적으로 산 대표적 어리석은 짓(...)으로 유명한 액랭엔진 장비 함폭「혜성」이었습니다.
이 혜성을 주력으로 결정했을 때의 일화도 역시 매우 재밋는 일화가 있죠. -ㅅ-;
< 항공기 수급을 위해 있었던 미노베 소좌와 군령부원간의 대화 >
군령부원 「「월광」은 더이상 구할 수 없어. 이참에 귀관에 부대에서「은하」를 사용하는게 어떻겠나? 이것이라면 신형인데다가 월광보다 좀 더 모을 수가 있어. 20기 정도는 어떻게든 마련해줄 수 있네.」
미노베 소좌 「..........20기는 너무 적어. 그래도 3개 항공대에서 모은 인원이다.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미노베 소좌의 이 얘기를 들은 군령부원은 상당히(...)머뭇거리더니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군령부원「 액랭엔진을 장비한「혜성」의 12형이라면 상당히 있네. 뭐 아무도 사용하고 싶어하지 않는 기체이지만...............하여튼 모으면 100기 정도 줄 수 있어 이거라도 괜찮은가?」
미노베 소좌「....혜성인가......(한참을 고민한다 -ㅅ-;).........그걸 주게나.」
결국 미노베 소좌가 혜성 12형을 신청하고, 해군 항공본부측도 놀고 있는 비행기가 도움이 된다면........이란 생각에 부용부대의 기체 공급은 이렇게 꽤 순조롭게 행해졌습니다. 확실히 미노베 소좌의 부용부대 결성에 있어 초기의 가장 큰 사건은 이 기체 교환의 결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때의 시기가 벌써 쇼와 19년(1944년) 12월. 이미 일본해군이 항공기란 항공기는 거의 다 소모하고 있던 이 시기에,「아무도 사용하고 싶어하지 않고」, 「100기나 남아있다」- 면 그 기체가 얼마나 문제아인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참고로 이게 은하.
부용부대의 특징에 있어「특공 비판」으로 상징되는 미노베 소좌가 그 하나라면, 또하나의 특징 또한 분명하게 이 함폭「혜성」이었습니다.
부용부대에게 있어 이「혜성」을 잘 다루기 위한 악전고투 또한 웃으면 안 되겠지만 뭐 웃을수밖에 없습니다.(풉) 당초 해군의 신예 함상폭격기로 기대 속에 태어낸 혜성은 99식 함폭의 후계기로 채용되었습니다만 높은 익면하중, 다임러.벤츠 DB601이라는 메샤슈미트의 엔진을 해군에서 라이센스 생산한 아츠타 21형 액령엔진의 부진, 랜딩기어나 플랩을 전동식으로 했기 때문에 모터, 배터리의 문제로 졸작/결함기란 낙인이 찍히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랜딩기어가 제대로 올라가거나 내려가지 않는 것은 일상다반사. 또한 일본기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액랭엔진이기 때문에 엔진이 멈추는 에피소드도 몇번이나 나왔거든요. 그중에서도 가장 굉장한 것은.......
「 이륙 후, 엔진 커버가 날아간(...) 드문 케이스......orz」
.......그렇습니다. 정말 잘도 이런 조악한 기체로 싸워 전과를 내었다고 할까요. 아니 그 이전에, 잘도 비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부용부대 정비반의 능력은 톱 클래스였습니다. 확실히 이것은 가동률에서도 증명되고 있죠. 이렇게 문제가 많은 혜성의 정비를 위해 미노베 소좌는 제작사인 아이치 항공기 회사로 직접 방문, 기사의 파견을 요청했고 이 아이치사에서 파견된 담당자가 후방 기지인 후지에다에 상주해 파일럿은 항법과 기체특성에 대한 많은 조언을 들을 수 있었으며 정비사들도 액령엔진의 기술습득에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로 부용부대의 혜성 가동률은 85%란 경이적인 가동율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뭐 이쯤에서 함폭 혜성에 대해서도 간단히 첨언하자면....
애물단지 함폭 혜성. -ㅅ-;
이 함폭 혜성은 앞서 언급한것처럼 진주만 트리오로 유명한 99식 함폭의 후계기로 개발된 녀석입니다. 하지만 그 설계는 이미 전쟁 전에 항공기술창에서 이미 완료한 상태였고 시험 제작기도 쇼와 15년(1940년)에 완성하고 있었지만 기체 강도의 부족 등으로 함상 급강하 폭격기로서는 사용할 수 없었죠. 때문에 일단 쇼와 17년(1942년)엔「 2식 함상 정찰기」로 선행 채용, 다시 개수를 더한것이 이 혜성이었습니다. 참고로 함폭으로 제식채용 후의 양산은 역시 아까 언급한 것처럼 아이치 항공기 회사가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이 혜성은 일본의 항공기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드문「고압 액냉엔진」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냉각계통의 압력을 올려 기존의 냉각액(에틸렌글리콜 성분)이 아닌 일반 물도 냉각액으로서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만 이방면은 제가 잘 모르므로 여기서 패스. 다른 분이 보충설명을......orz
하여간 이 아이치 「아츠타」엔진은 카탈로그 스펙상 기본 설계는 다임러벤츠 DB601의 유용 + 나름데로의 개수가 가해진 훌륭한 엔진이었지만 너무나 엔진이 섬세한 것, 금속의 질적 저하, 정밀 가공기술이 저하된 전시의 일본에선 너무 비싼 대용품이었던 것입니다. 역시 뱀에 다릴 붙이지만 본가 독일에서도 하인켈이 비슷한 짓을 시도하다 실패했죠. orz
뭐 이때문에 생산도 원활하지 못했고 양산형의 품질도 조악했다는게 혜성의 가동률/신뢰성이 낮은 원인의 하나로 기술되는 글이 자주 보입니다만 해군의 경우엔 그래도 품질상 육군보단 나아서 사실 혜성의 가동률 문제엔 부대의 정비 능력 문제가 더 컸습니다. 사실 아이치는 아츠타 엔진의 생산시 최대한 사내 작업분을 늘리고 부품의 강도도 확보해 하-40(3식전 히엔에 사용된 엔진, 역시 DB-601의 라이센스)과는 달리 엔진 그 자체가 분해되어(...)버리는 미친 불량사태는 적었거든요.
어쨋건 엔진 문제나 기체 정비문제만 해결되면 혜성은 꽤 우수한 기체였습니다. 99식 함폭에 비해 최고속도도 150 km/h이상이나 올라가 최고속도 580 km정도의 고속 공격기였으며 항속거리도 400 km이상 늘어난 기체였거든요. 이렇게 신뢰성이 확보된 좋은 공격기가 있었기에 미노베 소좌의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 적 전투기가 압도적인 제공권을 장악한 주간에 미 함대나 미군 기지를 공격해도 전과는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야전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으며 때문에 야간의 장시간 비행은 단좌전투기보다 항법이 가능한 복좌가 유리하다. 이 임무엔 복좌인데다가 속력도 빠르고 영전보다 폭탄 탑재량이 많은 혜성이 최적이다. 타부대에서 덮어놓고 경원당하는 혜성을 모으고 항법에 뛰어난 탑승원을 추출해 정예부대를 편성하면 먼 오키나와까지 야간에 공격하고 귀환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 -
뭐 대충 이런 것이죠. 그리고, 혜성의 여러 결점은 충분한 정비원을 교육하고 아이치 항공기사로부터 인원과 자재도 직접 보충받는다는 것입니다. 장점을 살려 단점을 기술로 보충한다, 실로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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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부대의 활약 >
1945년 3월, 오키나와전이 개시되었습니다. 이 전투에 임하는 일본군 상층부의 항공 운용방침은 앞서도 소개했지만 단지 하나뿐.........오로지「특공에 의한 적 수상부대 타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미노베 소좌는 홀로 반대했으며 또 자신의 부대를 「특공」에 투입한다거나 미숙한 파일럿을 연습기 빨강잠자리나 수상정찰기 따위에 실어「특공」을 실시하는 등의 계획도 끝까지 반대했지요. 이렇듯 미노베의 계급을 가리지 않은 직언 때문인지 부용부대는「특공」의 편성에서 제외되게 됩니다.
그리고, 오키나와전이 시작되자 미노베 소좌의 자신을 증명하듯이「부용부대」는 4월 6일의 첫 출격에서 미 수송선단에게 로켓탄 공격을 명중시켜 일본측 전 출격기 중에서 유일한 대함 전과를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카데나 비행장 실함 후는 공격목표를 카데나 비행장으로 전환, 공격을 계속해 이곳에 전개한 미 해병비행대에 다대한 손해를 주었습니다.
이제야 부대의 효력을 겨우 눈치챈 해군 상층부는 이후 적극적으로 부대를 지원, 이후 4월말의 키쿠스이 4호작전에선 부용부대가 그 주력을 맡아 미군 비행장/함선에 대해 상당한 손해를 주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후도 부용부대의 출격은 계속되었는데 이 곤란한 야습 전문부대에 진절머리를 친 미 해군은 이 대책으로서 레이더를 탑재한 야간전투기 F6F-5N 헬켓을 5월 초 오키나와에 최초로 배치, 이후 부용부대는 장기엔 야습에서도 막대한 손실을 강요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가고시마로 기지를 옮긴 후엔 부용부대 소속의 혜성 야전이 동종의 야간전투기인 미군의 P-61 블랙위도우를 경사총으로(독일군의 슈레게 뮤지크와 같은) 격추한 드문 전과도 있죠.
그리고......전황의 악화에 따라 당초 기지인 록가케 기지에서 가고시마현 오오쿠마 반도의 이와카와로 전선기지를 옮깁니다만 그 이전 과정에도 미노베 소좌는 직접 상공에서 기지 예정지를 먼저 관찰, 부대이동 이후에도 이후 철저한 위장을 통해 주기중인 항공기는 반드시 숲속에 숨기거나 풀로 가리도록 지시했고 또한 피탄되어도 주위의 항공기로 이어붙지 않기 위해 주기중인 항공기에선 반드시 가솔린을 빼낼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또한 활주로에 주간엔 소를 방목(...)하거나 이동식 오두막까지 설치해 목장으로 가장하는 등 정말로 철저한 위장(...)을 보여줬기에 한번도 공습을 받지 않고 부용부대는 적기 공습에 의한 기체소모는 면할 수 있었습니다.
6월 23일, 오키나와의 지상전 종결 후 오키나와전에 마지막 승부를 걸었던 해군은「본토 결전」으로 방침을 변경, 전력 온존책으로 돌아섰고 이때문에 그때까지 잔존한 각 일본해군의 항공부대들은 7월 중순 이후엔 산발적인 색적(정찰)공격만 수차 펼칠 뿐이었습니다.
이 시기를 전후해 록카게 기지의 제 5 항공함대 사령부에서도 7월 말을 기점으로 서서히 미군의 대규모 상륙을 맞아 싸울「결」호작전 준비에 돌입, 우가키 장관도 직접 해안선의 시찰이나 도상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이 도상 연습에는 당연히 부용대의 지휘관인 미노베 소좌도 동참했으며8월 3일,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판단한 5 항함 사령부에선 마지막으로 미군의 본토 상륙시 육전부서나 최후 파기 준비 등「결」호작전 최종지시를 보내 왔습니다.
이대로 진행되면 전원옥쇄는 확실하다고 생각한 미노베 소좌는 이제 부대의 최후도 가깝다고 판단, 부장인 토쿠라 대위와 이시다 대위 등 양비행 대장을 시작으로 각 분대장을 불러 최종 출격에 참가할 24기 공격대 편성표를 하달했습니다.
이 최후의 출격에 탑승하는 파일럿은 전원 사관과 준사관, 그리고 야습에 숙련된 하사관들로 공중 지휘는 물론 자신이 폭장영전에 탑승할 예정이었습니다. 최후의 출격은 모두 간부와 숙련자뿐.....나머지는 이제 의무가 없다는 것이 미노베 소좌의 기분이었겠지요. 전법은 부용부대에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특공공격」............
8월 8일, 우가키 장관이 소집한 항공부대의 도상 연습 때문에 토쿠라 대위와 오노 대위는 2, 3일 전부터 혜성으로 5 항함 사령부에 파견중이었습니다. 그리고.......침울한 얼굴을 하고 히로시마 인근에서 간신히 도착한 제 5 항함의 참모가 시내의 참상을 당시 제 5항함 사령부에 있던 모두에게 설명했습니다.
바로 원자폭탄이었습니다. -ㅅ-;미군의 신형폭탄(당시는 원자폭탄임이 알려지지 않았음)을 듣게 된 토쿠라, 오노 대위 등 두 명이 이와카와 기지로 급히 돌아온것은 8월 9일, 그리고.......이날 2발째의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고 소련의 참전도 각 부대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8월 15일 12시, 「옥음 방송」이 방송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옥음 방송」을 듣지 못한 부용부대와 미노베 소좌에겐 아츠기 302 해군항공대의 지휘관으로부터 입전된 철저 항전의 전문만 도착한 상태라 기지에서는 여전히 임전 태세를 갗추고 긴장이 계속되었습니다.
천황의 종전칙어가 전해진것은 다음날인 8월 16, 17일 양일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수한 미노베 소좌는 그날도 큐슈 서해안으로 야간에 출격시킨 각 20기 정도의 색적대에 즉시 교전행위를 중지하고 회항할 것을 명령했고 이후 아츠기 기지의 철저 항전의사 표명에 호응하는 움직임을 보인 부하들에겐 부대장 미노베 소좌가 직접 설득에 나서「 천황폐하의 종전조칙이 나온 이상 나에게 부대의 지휘권은 더이상 없다. 납득할 수 없다면 나를 베고 나서 출격하라」라고 설득했습니다.
8월 21일 아침, 록카게 기지 진출이래 첫 합동 위령제가 거행되었습니다. 4월 1일부터 시작한 4개월 반간의 총 출격횟수는 630회, 그 전투에서 산화한 70여명의 명복을 비는 위령제였지요. 그리고 오후.......미노베 소좌는 그때까지도 비행장에 남아있던 50기 가까운「혜성」,「영전」의 각 항공기 앞에 전 부대원을 모아놓고 해산의 훈시를 했고 미군의 지시를 거부한 채 소좌의 독단으로 대원들을 남아있는 비행기로 전부 귀환시켰습니다.
부용부대의 마지막 1기가 나타낸 비행운이 석양속에 사라질 때까지 미노베 소좌는 천천히 손을 계속 흔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미노베 소좌가 정식으로 군적에서 나온 것은 이듬해인 쇼와 21년(1946년) 5월로, 그 후 10개월은 1000여명이 넘던 「부용 부대」해체 잔무 정리때문에 미노베 소좌 외 간부 대원은 군적에 함께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이 미노베 타다시 소좌는 전후엔 산토쿠 물산 주식회사란 기업의 회장을 역임하고 은퇴, 지난 1997년에 8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고 합니다. 이후 딸인 타케우치 사토코씨가 망부의 추억을 쥬니치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는데 미노베 소좌는 죽기 직전까지도 워드프로세서로 회고록을 작성하며「일본은 이대로 좋은 것인가」- 라고 계속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미노베 소좌는 오키나와 특공작전 -뭐 영화「남자들의 야마토」에서 다룬 바로 그 이야기죠. - 그 작전도 반대/비판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미노베 소좌는 야마토가 가라앉은 오키나와 근해는 충분히 해군기나 육군기의 행동 범위였던 점을 그때도 해군 상층부에 건의/지적했습니다. 그러나, 해군은 야마토를 위해 어떠한 항공전력도 붙여주지 않고 특공만을 요구했지요. 만약 미노베 소좌와 같이 항공부대의 정비를 충분히 행하고, 잘 훈련된 탑승원이 항법을 갈고 닦으며 폭격에 대해 위장을 행하는 등 항공병력을 온존시키는데 노력했다면 야마토를 항공기의 원호 없는 수상 특공으로 몰아낸 결과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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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며 >
미노베 소좌는「전기특공」이 지상 명령이었던 그 시기에, 스스로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특공을 거부한 유일한 지휘관입니다. 확실히 미노베 소좌의 모토처럼 이 부용부대는 「필사」의 특공을 하지 않는 대신,「결사」의 야간 습격에 철저한 부대였습니다.
지휘관이 특공을 거부한 것으로 대원의 사기도 확실히 올라갔습니다.. 그 근저에 있는 것은 부하에 대한 깊은 애정이었던 것이죠. 또, 부하도 이 애정에 보답하기 위해 사실상 특공에 맟먹는 다대한 희생을 지불하면서도 끝까지 용전분투했던 것입니다.
확실히 대전 말기 일본 육해군의 작전결정과정을 각종 서적들을 통해 읽다 보면, 무리한 작전 지도에 관해 어려운 전황아래 비정상적인 명령이 나왔거나, 혹은 마음을 독하게 먹어 명령을 내렸다는 것 보다도 전시에 사고나 판단 능력 자체를 정지시킨 무책임한 상급자가 정신론에 근거한 명령을 타성으로 내고 있었다는 것이 제일 실정에 가까운 듯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특공에 대해 비합리적이라든가,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할 비인도의 길과 같다는 등 일상 기준으로 상식적인 감상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사실 어찌보면 이렇게 평화로운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나 가능한 것입니다. 수십척의 미 고속항모기동부대와 수천대에 달하는 미 함재기에 대응할 함대는 전멸, 항공기와 탑승원은 모두 소모, 이런 와중 유일한 전과는 사마르해에서 시키시마대의 특공기 뿐....
특공을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구 일본군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사람들도 정작 당시 해군이나 육군 수뇌부처럼 저 참담한 현실앞에 서있다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저라도 목숨이 아까워 가만히 있는게 보통이고 아무런 대안은 낼 수 없었을거라 생각합니다.
가장 궁금했던 미노베 소좌의 특공에 대한 생각은 아래와 같습니다. 전후에 개인적으로 간행된 회상록 중에서 말한 내용으로 짐작됩니다.
「 전후, 당시의 특공 전법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의 승부를 도외시한 전후인의 이념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나처럼 당시의 군적에 몸을 두었던 사람에게는 져도 좋은 전법이란 생각될 수 없었습니다. 나 자신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해야 할 대안이 없는 한, 특공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어려움은 휴머니즘으로 비판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사실, 다행히 그 직전 일본이 항복했지만 아까 소개한것처럼 미노베 소좌가 계획한 특공도 분명 있었습니다. 물론 특공이란 그 자체로「죽음밖에 없는 특공」작전이었지만, 이것도 필사는 안된다, 결사로 좋다 - 인 미노베 소좌가 계획한 것이었기에 왠지 인간의 작전이라고 생각되는것은 저뿐일까요. -ㅅ-;하여간 이 책에선 이「처음이자 마지막의 특공 공격 계획」이 마지막 클라이막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컨데 미노베가 비판한 것은 정확하게는「안이한 특공」이라 생각됩니다. 그 논리적 귀결이「 더이상의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특공도 어쩔 수 없다」- 인 것은, 당시를 경험한 사람의 사고방식으론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적 상륙시에는 군인이 국민의 방패가 되는
그 방패의 맨 앞엔 장관이든 영관이든, 지휘관이 서지 않으면 안 되는
뭐, 이것이 소좌의 지론이며 결론이었습니다.
미노베 소좌의 이 일화와 말을 읽고, 제가 생각한 것은. 이러한 각오와 책임을 가진 상급 지휘자가 구 제국 육해군에 10명만이라도 있었다면 우리가 아는 전사는 대단히 다른 것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라는 점입니다. 물론, 전략의 실패를 전술로 만회하는 것은 무리로 패전이라는 결과는 같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적어도 젊은이들의 애국심만을 의지해 소중한 생명을 사지로 계속 몰아넣는 타성만으로 계속된 특공작전이, 이정도로까지 대규모이고 행해졌어야 하는 것을 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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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애둘러 쓰다보니 두서가 없군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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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톰클랜시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픽션과 사실의 차이는 픽션은 말이 되어야 한다.
뭐, 제정신이 아닌 시대였으니까요.......
앞뒤 사정은 가리지 않고 무조건 열심히만을 외쳐대는 정신력 지상주의가 일제의 망령으로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데 이런 교훈을 통해 하루 빨리 윌사회가 정신력 지상주의로 부터 각성 해야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