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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목차
제 1장 자기를 위하여 싸우지 않는자
제 2장 바람은 멈추었쓰나 물결이 인다
제 3장 함이 없어야 이로움이 있다
제 4장 내가 할수 있는 일은 남도 할수 있다
제 5장 마음으로 기를 다스린다
제 6장 타고난 신령스런 성품이 빛을 발한다
제 7장 뜻을 따라 몸이 행한다
제 8장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제 9장 만물은 도에서 나왔다
제 10장 무욕의 대욕
제 1장 자기를 위하여 싸우지 않는자
대륙에서 오악이라 일컬어지는 산들중 첫 번째인 태산은 고대 제왕이 봉선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산이다.
어디 제전의 신성함뿐이랴! 산동성에서 제일 높은 태산은 수려한 자연 경관과 수많은 유적들로 천하제일
의 산으로 칭송받아 오고 있다.
그 태산에 무림삼장으로 유명한 비월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본래 처음부터 비월장이 태산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천하십대고수라는 비월장주가 입신양명하여 세운 장원이 비월장이며, 그것이 태산에 세워
진 것은 이십년을 넘지 않았다.
다른 무림삼장의 오랜 전통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짧은 것이었으나, 무림세가라는 것이 그렇듯 무력을 인
정받으면 그뿐이이다. 비월장 장주 금거산은 무림에서 태산장법으로 이름을 얻었고, 일가를 이룰수 있었다.
바로 그 천하십대고수 중의 하나인 금거산이 연무장에 식솔들을 모은 뒤 침중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오늘 이후로 혈마사가 중원에서 사라질 때까지 비월장을 폐쇄하겠다.모두들 각자 자기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훗날 혈마사가 강호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리거든 돌아오도록 해라."
비장한 금거산의 말에 비월장의 총관 철권 소천성이 황급히 입을 열였다.
"장주께서 나가라고 하시지만 어찌 저희들만 위기를 넘길 수 있겠습니까?"
"허허헛! 하남성에 있다는 혈마사가 비월장으로 온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만약 온다 해도 나 혼자라
면 그들에거서 벗어나는 것이 어렵지 않소이다. 혈마사가 강북일대를 돌아다닌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어
찌 내가 장원을 비울수가 있겠소이까? 나의 일은 염려 마시고 총관께서는 남은 가족들을 이끌고 황산으
로 가주시구려."
장주를 바라보는 소천성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나이 예순이 될때까지 금거산을 따라다녔지만 오늘처
럼 암담하기도 처음이다. 안휘성의 황산은 장강 이남이기도 하지만 금거산의 처가가 있는 곳이다. 장주
가 황산으로 가라고 하니 분명 처가로 가족들을 보낼 심산이가 본데, 어찌 사십 년을 함께한 장주를 버
려두고 혼자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장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남아 장주를 거들도록 하겠습니다. 제자들이 많이 있으니 그들로 하
여금 하북성까지 동행케 하면 될 것입니다."
"어허, 총관께서는 어찌 그리도 내 마음을 몰라주시오."
금거산의 마음이 답답해졌다. 한 사람의 고수라도 안전해야 후사를 도모할 수가 있다. 소천성은 금거산
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이번에 잔류했다가 화를 당하면 앞으로 누굴 밎
고 장원을 이끌어 간단 말인가!
"장주님! 저희들도 장주님의 곁에 남겠습니다!"
비월장의 제자들이 일제히 허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비월장의 제자는 일대 제자부터 삼대 제자까지
모두 구십여 명이었따. 그많은 사람들이 비분강개한 음성을 소리를 지르니 연무장의 분위기는 장엄하기
까지 했다.
비월장의 제자들 앞에 서 있던 금철심이 성큼 한 걸음 나섰다.
"저도 남아 숙부님을 돕겠습니다."
금철심의 말이 끝나자마자 금거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우리 금가의 미래가 네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늘 어찌 그런 망발이냐! 또한 설령 네
가 남는다고 해도 나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헛된 바램일랑 일찌감치 접어 두거라!"
금철심은 금거산의 형인 금거정의 일점혈육이었다. 본래 금씨 삼형제가 있었으나 큰형은 호손을 남기지
못하고 일찍 사망했다. 그 뒤 둘째인 금거정이 아들 하나를 낳는 동안 금거산은 딸만 둘을 낳았다.
후에 금거정은 동생 금거산에게 하나뿐인 아들을 보냈다. 무림일절이라는 금거산의 무공을 금철심에게
잇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금거산도 하나밖에 없는 조카라 아낌없이 무공을 전수해 주고 친자식처럼 돌
보아주었다. 그런 금철심이니 어찌 금거산이 조심하지 않을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금철심은 금씨 양가에서 고이고이 키운 철부지였다. 그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금거산이 위기의
순간에 자기만 떠나라고 하니 양심상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숙부께서 뭐라고 하시든 저는 비월장에 남을 것입니다. 저도 제 한몸은 지킬 수 있다로 믿고 있습니
다."
"어허!"
금거산이 탄식을 터뜨리며 조카를 바라보았지만, 그 쇠 심줄같이 질긴 고집을 익히 알고 있는 바다. 어
릴 때부터 자신이 하고싶지 않은 일을 시키면 누가 뭐라고 해도 하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하
면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가던 금철심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엄하게... 엄하게 키울 것을....'
말 안 듣는 조카를 앞에 두고 금거산이 땅을 치며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그러기에는 금철심이 너무 자
라 버린 것이다. 금거산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였다.
"장주, 소장주의 생각이 저러하시니 차라리 저와 소장주로 하여금 장주를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
시요."
총관의 말에 금거산은 하늘이 무너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금철심은 억지로 떠나 보내면 혼자 길을 돌
아서라도 다시 찾아올 녀석이다. 그것이 멋이며 협객의 도리라고 저 홀로 믿고 살아가는 녀석이니 이제
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저들을 데리고 황산으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편이 낫겠다.'
어쩌면 자신이 황산에 다녀올 즈음이면 혈마사의 혈겁도 끝났을지 모른다. 지난해 무림첩이 비월장까지
날아왔지만 그때는 마침 페관 중이라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무림첩이 발동했으니 혈마
사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금거산이 제자들에게 명했다.
"비월장의 제자들은 들어라! 내가 일대 제자들을 이끌고 식솔들과 함께 황산으로 가겠다. 그러나 이대
와 삼대 제자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강호의 풍파가 가라앉거든 돌아오로록 하라."
총관인 소천성의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그렇지 않아도 강북지역은 혈마사가 돌아다니며 무림인들을
주살하고 있는 형편이니 모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장주가 혹시라도 헛된 명
예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면 후환이 무궁했을 것이다. 역시 장주인 금거산은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노련
한 무림인 이었다.
'이런 주인을 만나기도 어렵지... 암....'
소천성은 장원의 사람들을 재촉하여 짮은 시간 안에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늦여름의 정오, 마
침내 비월장의 일대 제자 삼십 명과 장주 가족들은 안휘성의 황산을 목표로 미래를 알 수 없는 여정에
올랐다.
* * *
사공철은 혼신의 힘으로 태극양의검법 삼초식을 펼쳤다. 검풍이 사방으로 날리자 근처에 있던 나뭇잎들
이 솟아올랐다. 불규칙적으로 날아다니는 나뭇잎들 사이로 파란 광망이 날 선 이빨을 번득였다.
'아아, 언제부터 내가 저런 검기를 뿜을 수 있게 되었을까?'
사공철이 문득 움직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했다.
짝! 짝! 짝!
"좋군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사공철이 몸을 돌렸다. 장염 조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사공철이 얼굴을 붉히며 허리를 조아렸다.
"아직 멀었습니다."
사공철은 문득 '내가 이처럼 겸손했던가?' 되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느닷없이 파란 검기며 자
신의 겸손함이라니, 이건 혹시 꿈인가?
사공철이 힘겹게 눈을 뜨자 해거름의 황야가 눈에 들어왔다. 거친 풍광 속에 사람들은 셋, 혹은 넷씩
짝을 지어 모여 있는데,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당주님, 정신이 드십니까?"
자신의 곁에 늘 붙어 다니는 얼굴이 통통한 쌍혈귀였다. 사공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극심한 부상을 당한 이래 묵직하게 굳어있던 목덜미가 편하게 움직여졌던 것이다. 지난번 장염 조
사의 운기행공 덕분일까? 온몸에 가득한 것이 이전에 느껴보지 못하던 신선한 기운이었다.
"이곳은 어디냐?"
"근처에 천주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음... 어느새 안휘성에 들어왔던 게로군."
고개를 끄덕이던 사공철이 사방을 둘러보았다.그리고 보니 아스라이 먼 곳에 몇개의 산들이 보였다.
'그렇다면 저곳이... 천주산인가?'
사공철은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산들 중에 제법 우뚝 솟은 것이 천주산이리라. 그렇다면 지
금 무림맹의 별동대는 천주산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제법 많은 거리를
이동했다. 그동안 자신을 들쳐 업고 다니느라 두 쌍혈귀의 고생이 컸을 것이다.
"무림맹 본진으로부터 연락은 있었다더냐?"
"쩝, 왠걸요, 그놈들이 별동대를 미끼로 삼은 듯싶습니다요."
쌍혈귀가 혀를 끌끌거리며 대답했다.
미끼가 되었다니, 사공철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쌍혈귀의 말을 들은 뒤라 그런지 붉은
노을을 등 뒤로 하고 앉아있는 사람들에게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믿었던 무림맹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
해서일까? 초췌한 무림인들의 몰골을 살피던 사공철은 '그놈이 그놈이라니까' 하고 중얼거리며 혀를 찼
다.
그 시간 이무심은 장염과 함께 무리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따. 아직 장염에게 무당파가
낯선 것처럼 이무심에게도 청룡당이 낯설었다. 게다가 이무심은 오랜만에 동행하게 된 장염에게 묻고 싶
은 일들도 많았다.
"장 사부,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소. 무림맹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니 납득이 가질 않소이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무림맹은 한 사람의 손이라도 필요한 시기인데 이곳의 고수들
을 싑게 내칠 리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장염의 음성은 말과는 달리 왠지 자신이 없는 듯 했다. 이미 강호에서 이 꼴 저 꼴 다 겪은 이
무심이 그 마음을 읽지 못할 리가 없다.
"아무래도 무림맹에서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구려. 맹주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질 않겠소?"
장염은 대답하지 않고 검게 타오르는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 며칠 간 하늘 한번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이무심이 장염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청신없이 지내온 날들이었다.
쫓고 쫓기느라 하늘은 고사하고 땅도 살핀 적이 없다. 아마 장 사부는 더 심했을 것이다. 고산에서 몸을
뺀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그 동안 혈마사 라마승들의 집요한 추격 속에 몇번이나 위기를 넘겼는지 모
른다.
"장 사부께서 워낙 바쁘질 않았소..."
장염이 이무심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대체 무엇에 그리 바빴을까? 한 편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상케 하는 이로? 아니면 무림의 정의라는 고상한 이념 아래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다니느라? 자
신이 알기로 음 과 양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어느 한 편만을 극단적으로 고집
할뿐이다. 그 속에서 자신도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자연의 더하고
덜어내는 이치를 너무 깊숙이 알아버린 탓일까? 이무심을 향한 장염의 음성은 공허하기만 했다.
"바람이 일면 구름은 떠나갑니다."
장염이 청명검의 고색창연한 검집을 툭툭 치며 말했다.
"누구든 칼로 흥한 자는 결국 칼로 망하고 말 터인데... 언제나 이 덧없는 분란이 가라낮을지 걱정입니다."
장염은 자꾸만 날카로워져 가는 자신의 검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나면 공력과
검기가 더욱 의지대로 좌우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의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더 많은 파괴를 가져오고
있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인데, 세상은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리
고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분명해졌다.
"내 장 사부가 추구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지금은 장 사부의 검이 필요한 세상이오. 나는 그것
이 장 사부를 향한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외다. 지금 저들의 하늘을 거스르는 행위는 사람의 힘으로 막
을 수조차 없지 않소?"
"그러나 그들이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역천의 힘이라면, 어쩌면 저 역시 그들과 같은 부류일지도 모릅
니다. 저도 하늘을 거스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이지요."
"......."
이무심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장염이 역천의 힘이라니! 자신은 단 한번도 장
염의 힘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다.
장염도 착잡한 눈빛으로 이무심을 마주 보았다. 세상에 어차피 절대적인 선이란 없다. 경재학이 그랬고,
무림맹이 그랬으며, 사마외도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그러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나름
대로의 삶을 살아갔다. 그들은 지금까지 서로를 용납하지 않았고, 상대에게 적당한 피해를 끼치며 살아
왔던 것이다.
그걸 수없이 경험한 장염은 자신이 어느 한 편에 서서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러기에
는 자신의 힘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이다. 혈마사와 오행혈마인이 역천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상
대인 자신도 역시 같은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장염이 생각하기에 역천과 순천은 서 있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달랐다. 요즘 들어 장염은 자연계를 초월할 수 있는 자신의 절대적인 능력이 두렵기 까지
했다.
그렇지 않아도 불어지는 노을 속에 대화마저 무겁게 느껴지자 이무심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장 사부를 만나면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소."
장염의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이무심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한 달쯤 전 저기 있는 네 사람 중 세 사람과 손을 섞은 적이 있소. 그런데 마지막에 내가 이해하기 어
려운 일이 일어났다오."
이무심이 다비천왕의 건검을 집어 던졌을 때 일어나 현상에 대해 자세히 셜명했다.
"나는 지금껏 그 이치를 알기 위해 수없이 고민했지만 아직 알지 못했소. 장 사부에게 그 이유를 듣기
위해 오래 기다려 왔소만....."
장염이 이무심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염이 들으니 태극양의검법으로 건검을 다스렸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에게야 이상할 것도 없는 문제이지만, 이무심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문제 일지도 모른
다.
"이 대협, 태극양의검의 궁극은 용의불용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대협이 느낀 것은 바로 그 초입의
단계인 이기어검입니다. 처음에는 기로써 검을 부리고 그 다음은 의지로 검을 부립니다. 며칠 전 이대협
이 연공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기를 허공에 풀고 있더군요. 자신의 기를 허공에 풀어 끝까지 그 기
세를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기어검의 시작입니다."
이무심이 깜짝 놀란 얼굴로 장염을 바라보았다. 이기어검이라니! 듣기만 해도 절로 마음이 떨리는 소리
였다. 자신의 나이 이제 사십 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지난 오 년 간 쉬지 않고 무극일원심법을 운용했지
만 설마 하니 이기어검에 근접했다는 말을 듣게 될줄은 몰랐다.
"정말... 내가 어검술을 펼칠 수 있다는 말이오?"
"이 대협의 말씀은 분명 이기어검에 대한 것입니다. 다만...."
"다만 무엇이오?"
장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검술을 펼치기 위해서는 진기가 상련부단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순한 공력과 평상심의 유
지가 관건입니다. 공력도 문제이지만, 만일 그 마음이 올곧지 못하면 기가 흐려지고, 그렇게 된다면 주화
입마의 위험도 뒤따르게 되는 법입니다."
이무심의 얼굴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검술의 지고한 경지란 결코 한걸음에 다다를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한번 맛본 그 희열을 어찌 누르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장염이 이무심의 얼굴에 가득한 열망을 알아채고 더욱 진중하게 말했다.
"이 대협께서 어검술을 펼치실 때는 단전에 공력이 가득하고 마음이 혼탁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짧
은 시간 홀로 수련할 때라면 그런 기회가 한두 번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그 이외에는 모든 것이 충분히
갖추어질 때까지 어검술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무심의 얼굴에 희망과 좌절이 거듭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손끝에 잡힌 이기어검의 초입이었다. 그러
나 장 사부의 말을 들으니 그것을 펼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단전에 끊임없이 공력이 가득하
기도 어렵거니와 무념무상에 가까운 평상심을 유지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살아생전에 자유롭게 이기어검을 펼치고 거둘 수 있을까?"
이무심의 얼굴에 떠오른 번민을 보고 장염이 격려했다.
"이 대협께서 하고 계시는 허공에 기운을 푸는 연습이야말로 이기어검의 수련에 더없이 좋은 방법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상심을 유지하며 기운을 끊어지지 않게 풀어가다 보면 언젠가 원하는 때에 자유롭
게 펼치고 거두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장 사부의 말을 들으니 막혔던 가슴이 뚫린 듯하오."
비록 현재는 불가능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무심은 만족하기로 했다. 장사부가 아니라면 누가 이
런 문제를 속 시원히 알려줄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자유롭게 검을 다루고야 말리
다.
장염은 이무심의 얼굴에 떠오른 결의를 보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과연 이무심이 어검술의 유혹을 견
딜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보다 좋은 것에의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그것이 자신의 손안에 놓여 있다
고 느낄 때는 더욱 그렇다.
문득 장염은 향이와 이무심에게 찾아온 기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태극양의검법
의 궁극인 용의불용력에서 온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추구하던 바로 그 최후의 경지가 은연중에 사람
들에게 기연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향이는 그녀의 신선주의 공력과 그녀의 고운 심성 때문에 기연을 얻었다. 검기점혈이라는 지고한 경지
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연공 기간이 짧은 향이의 검기점혈은 불완전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불
완전한 공력이었지만 향이는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무심은 달랐다. 특별한 기연이 없는 이무심은 향이만큼 공력이 갚지 못하다. 그런 그가 평상
심마저 잃게 된다면 이무심의 이기어검은 그를 주화입마로 이끌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장염은 이무심이 더욱 걱정스러웠다. 둘다 불완전했지만 향이와는 달리 이무심은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대협의 마음에 성급함이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
장염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무심의 일은 이제 그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욕심없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단지 바랄 뿐' 이었다. 자신의 의지로 오욕칠
정을 다스릴 수 있는 그때에야 비로소 이무심은 한 사람의 진정한 무인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장염이 떠나가자 이무심은 자신이 이기어검을 펼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참오하기 시작했다.어차피 공
력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늦은 나이지만 장염이라는 일대 기인을 만나 일원무극심법을 전수 받았다.
그 심법은 생활 가운데 연공할 수 있어 지금은 나름대로 작은 성취가 있었다.
'물론.... 이기어검을 펼치기에 충분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무심에게 있어 정작 문제는 평상심이었다. 자신이 이기어검을 간절히 원하는 바는 자식과 제자들의
복수를 위해서다. 어찌 원수를 눈 앞에 두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도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간 자식을 생각하면 손이 부들부들 떨릴지경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기어검은 가장 필요한 것
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이기어검을 완성한다.'
자신의 이기어검이 경재학과 마교의 고수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희망이라
도 없다면 살아갈 힘이 없게 된다.
이무심이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점점 멀어져 가는 상승의 검술을 생각하며 한숨지었다.
'하늘은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을 주시는가. 이것은 기회인가, 더큰 절망인가....'
이무심에게서 떠난 장염은 무당파 사람들이 마련해 놓은 자리로 가지 않았다. 갑자기 무당파의 울타리
로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노호의 살기 어린 눈빛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적반하장이
라는 말은 노호와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당한 것이었다.
처음 노호를 알게 되었을 때 그의 내가진력에 당해 생사의 위기를 넘겼다. 혈마사에서 탈출할 대 노호
는 자신을 핍박했으며, 이제 무당파 사람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자신을 부정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악연이 있나.'
생각할수록 노호와 자신은 정말 악연이었다. 세상에 살면서 만나서는 안될 사람들이 있나 보다. 장염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자신도 지금까지 노호에게 호의를 베풀지 못했다. 언제나 노호가 한
걸음 떨어져 자신을 견제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를 싫어하고 있는지도....'
그렇게 생각하면 더없이 초라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장염에게 있서 수련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지만, 본래의 성격상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한참 만에 장염이 자리 잡은 곳은 사방을 관측하기에 좋은 약간 높은 지대였다. 다행히 그 자리는 무리
의 중간쯤 되는 위치라 마음도 편했다 장염은 그곳에 몸을 뉘일 만한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장염이 쉴 자리를 마련하는 동안 어느덧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갔다.
"아니, 아래에 마련한 자리가 불편하시면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지지 않구요."
정좌를 하고 있던 장염은 조심스럽게 들려오는 음성에 눈을 떴다. 가까운 곳에 춘양 진인이 기척없이
서 있었다. 어둠 속에 서 있는 춘양 진인의 손에는 작은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아닙니다. 원래 스스로 손발 놀리기를 즐겨 하는지라...."
장염의 곁으로 다가온 춘양 진인이 작은 꾸러미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건량입니다. 그리고 혹시 사숙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아무 때라도 말씀하십시오."
장염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
춘양 진인은 더 말이 없는 장염을 힐끔 쳐다보았다. 장염이 건량만 받아 들뿐 다른 필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 사숙은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인가?'
남들이 인정하든 말든 무당파는 당금 무림을 이끌어 나가는 하나의 거대한 축이다. 무림을 이끌어간다
는 말은 무력과 재물에 있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구대문파는 터를 닦은 지역세서 단지 명예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산한 제자들 중에 일부는
표국,객점,주루,도박장 등을 운영했다. 그들은 하산한 이후에도 수입의 일정 부분을 출신 문파에 기부해
왔다. 그것은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고 있다는 감사의 마음도 있었지만, 무력을 사용하게 될 경우 사문
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 문하생뿐이랴? 지역에서 재물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대문파와 친분 관계
를 유지하려고 했다. 구대문파는 그런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대상이었다. 재물이 넘치는 사
람들은 자식들을 문하생으로 들여보냈고, 이런저런 이유로 재물을 희사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구
대문파는 그들이 자리 잡은 지역에서 상당한 재물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 춘양 진인이 말한 것에는 바로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문파의 어른으로서 무당파에 넘치는 재물
을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장염은 그런 문제에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허... 강호에서 생활하려면 최소한도의 재물이 있어야 할 텐데...'
춘양 진인은 장염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장가촌의 궁핍함은 말할 나위도 없고, 돈
이 없어 주방에서 일해야 했던 장염의 과거까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장염은 도통 경제적인 문제에 관심
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기사 지금같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당에 무슨 그런 사치스런 일을 떠올릴 수 있을까? 장염에게
조금씩 문파의 일을 이야기해 주려던 춘양 진인은 씁쓰레하게 웃으며 고래를 저었다. 아직은 소소한 이
야기로 시간을 보낼 만한 때가 아니었다.
"장 사숙의 몸은 괜찮습니까?"
춘양 진인이 생각났다는 듯 장염의 아래위를 세세히 살폈다. 장염은 퇴로를 막아주기 위해 항상 제일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때문에 앞이 막히면 다시 앞으로 달려와 달아날 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어제도 끈질긴 혈마사의 추격을 받았지만 장염 덕에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 뒤늦게 돌아온 장염
의 한쪽 어깨가 피로 물든 것을 보았다. 춘양 진인은 장염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춘양 진인의 눈이 어깨 부위에서 떠나지 않자 정염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 부상을 입은 사람이 한둘입니까? 다른 분들에 비하면 저의 상처는 가벼운 것입니다."
"장 사숙께서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사람들을 차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 사숙 같은 고수가 피를
흘릴 지경이었다면 그 내외상이 실로 적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본래 무공이 깊지
않으니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입지만, 장 사숙은 그런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장염이 듣기에 거북한 이야기였지만 춘양 진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반 사람들의 상처와 장염 같은 고
수의 상처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장염 같은 절대 고수는 어지간해서는 피부가 상할 일도 없
다. 그런 고수가 피를 흘렸다는 것은 몸에 엄청난 손상을 입은 것이다.
"장 사숙의 몸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무당파뿐만 아니라 무림이 장 사숙을 필요로 하고 있습
니다."
"하하, 장문인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나 제 몸은 그다지 크게 축나지 않았으니 심려치 마십시
오."
"....."
마음 같아서는 장염의 어깨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사숙에게 무례하게 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춘양
진인은 몇 번이나 장염의 몸을 살펴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공 중인 사숙에게 불쑥 찾아와 너무 오
래 머물렀다. 어쩌면 지금 자신의 최선은 장염 사숙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장 사숙,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보중하시기 바랍니다."
장염도 자리에서 일어나 춘양 진인에게 모리를 숙이며 말했다.
"장문인께서도 몸을 잘 돌보셔야 할 것입니다."
"....."
장염이 보기에 춘양 진인의 상세도 쉽게 회복될 것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그나마 곁에 자기가 있으
니 무리하지 않게 된 정도다. 그러니 장염의 입장에서는 장문인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헛! 알겠습니다."
춘양 진인은 서로의 몸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를 생각하니 왠지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언제 자신
과 무당파에 이런 날이 오리란 걸 상상이나 했던가! 허리를 세운 춘양 진인은 검은 산 그림자를 바라보
며 몇 번을 더 웃다가 자리에서 떠나갔다.
* * *
황야의 뒤편에 하늘에서 흙더미를 뚝뚝 떨어뜨려 놓은 것 같은 산들이 우뚝 솟아 있다. 해가 지기 시작
할 무렵 바로 그 기묘한 산 사이로 북은 가사를 걸친 라마승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피처럼 북은 가사
를 걸친 라마승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자 골이 깊은 산 주변은 금세 음산해지기 시작했다.
"필요 이상으로 살기가 가득하구나."
정상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던 마하륵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살기가 너무 강했다. 이미 극마
의 지경을 넘어선 마하륵에게 그것은 거북했고, 굉장한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마하륵이시어, 형제들을 잃은 슬픔 때문입니다."
마하륵은 곁에 다가와 공손히 말하는 혈마륵을 바라보았다. 혈마륵은 허리에 천을 친친 동여매고 있었
는데 그 사이로 지금도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변한다. 죽음도 변화의 일부분일 뿐이니 크게 집착할 이유가 없다."
피에 물든 혈마륵의 허리가 더욱 수그러들었다. 보래 혈마사의 승려들은 죽음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 말해 크게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가벼이 여기기 까지 했다. 자신도 지금까지 그
렇게 믿고 살아왔다. 그런데 요즘 들어 마하륵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죽음은 가벼운 것만도 아니라는 생
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더 흥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마하륵이시여, 열흘 사이에 형제들 오십여 명이 성불하였습니다."
마하륵은 작은 한숨과 함께 눈을 지그시 감았다.
"성불한 것은 축하할 일이지 분노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육체는 죽으면 흩어져서 다시 본래의 흙, 물, 불, 바람으로 되돌아가 버리지만, 마음은 항상 신령하여
하늘과 땅, 온 세상에 가득하고 영원하다."
혈마륵은 정좌하고 있는 마하륵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혈마사의 주지인 마하륵은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일까? 무극지기의 주인에게 당한 혈마사의 라마승 오십여명을 직접 성불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혈마륵 자신이었다.
무극지기의 사내와 마주친 형제들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직접손을 맞댄 사람은 내공이 소멸됐고, 간접
적으로 그의 검기에 휩쓸린 사람은 내상을 입어 자유로운 운신이 불가능했다. 혈마륵은 그런 라마승들의
숨통을 끊어주었다. 지금은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혈라마들이 중원에서 서장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강호에서 홀로, 혹은 작은 무리로 여행하
는 라마승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라마교 이단인 혈마사의 라마승 때문에 애꿎은 정통라마교의 승려들
도 분노한 무림인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반 라마승마저도 살해당하는 마당에 무공을 발휘할 수
없는 혈라마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다고 이제 와서 혈마사가 중원에 온 목적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혈라마는 마하륵에게
진언하여 형제들을 성불시키게 되었다. 혈마륵이 더 살기를 띠는 이유는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았기 때문
인지도 몰랐다.
혈마륵이 답답한 심정이 전달되었기 때문일까? 마침내 감겨 있던 마하륵의 눈이 서서히 열렸다. 그토
록 바랬건만 혈마륵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앞에 감히 마주 설 수 없었다. 머리를 숙이는 혈마륵의
귀로 마하륵의 낮게 깔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가 누구인지는 알아냈느냐?"
"자세한 건 알 수가 없지만 중원에서는 그를 장천사라고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흠......"
혈마륵은 음식을 구하기 위해 찾아들었던 마을에서 한인들의 절규를 들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죽어
가면서도 마귀들을 무찌른다는 장천사를 찾았다. 호기심으로 그 장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탐문하던 혈마
륵은 무림맹에서 용을 타고 승천한 장천사, 그가 바로 무극지기의 사내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
다.
"장천사라면 저들이 섬기는 신선이 아니냐?"
중원인들에게 있서 장천사는 장도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장도릉이라면 천 년 전 '하늘이 이 땅 위에
내려보낸 인류의 스승' 이라는 뜻에서 자신을 '천사' 라고 칭하던 도인이다. 마하륵도 그를 중심으로 일
어난 종교가 천사교였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렇습니다."
혈마륵의 대답을 듣던 마하륵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장천사라... 그럴 법도 하지."
"그는 정말 신선입니까?"
"네가 보기에는 어떻더냐? 너는 이미 그와 대면했으니 잘 알 것 아니냐?"
마하륵의 눈이 다시 혈마륵의 허리 어림으로 향했다.
혈마륵은 아직도 욱신거리는 허리의 성처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가 신선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적어도....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마하륵은 혈마륵의 자존심을 잘 알고 있다. 그런 혈마륵이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상대라면 역시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 여기서 저 무극지기의 사내, 장천사라 일컬어지는 남자를 꺾지 못하면 더이상의 중원행
은 불가능한 것이다.
"네가 보기에 그의 나이는 어느 정도나 되어 보이더냐?"
"가까이서 보니 이제 겨우 삼십 재 정도로 보였습니다."
"음... 무공이 인간의 경지를 넘으면 오히려 다시 젊어진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마하륵은 처음 아미타삼혈존에게서 상대가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
러나 지금 혈마륵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였다면 사내는 반로환동의
고수일지도 모른다.
혈마륵은 마하륵이 장천사가 반로환동의 고수인지도 모른다고 말하자 묵묵히 고래글 끄덕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미타삼혈존과 자신의 공세를 뚫고 유유히 사라질 리가 없다. 어제 일을 떠올리자 허리의 상
처가 다시 은은히 저려왔다.
어제 정오 무렵 혈마륵은 아미타삼혈존과 함께 길을 조금 앞질러 가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만
늦어도 대부분의 상황은 이미 종료된 뒤였기 때문이다. 그가 마하륵과 함께 현장에 도착하면 애써 따라
잡은 무림인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있고, 대지위에 나뒹굴로 있는 것은 무공을 잃은 혈라마뿐이었다.
사실 무림인들의 움직임은 혈마사보다 조금 느렸다. 혈마사에서는 자신이 직접 무공을 잃거나 움직이기
어려운 동료를 성불시켜 주었기에 전체의 행진 속도가 느리지 않았다. 그에 반해 무림인들은 부상자들을
모두 이끌고 도망치는 형편이었다. 그 덕에 혈마사가 쉬지 않고 뒤를 쫓으면 무림인을 따라잡을 수 있었
다.
그러나 그 무림인들에게 접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미타삼혈존의 말에 의하면 장천사가 번번이
앞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장천사는 혈마사의 앞에 가장 먼저 나타나 가장 늦게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처
음에는 아미타삼혈존이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다. 혈마사 최고라 일컬어
지는 아미타삼혈존은 처음부터 장천사의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이 다가갈 때까지만이라도 붙잡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언제나 간발의 차이로 장천사를 놓치곤 했다.
혈마사의 전진 속도가 빠르다고 해서 모두가 빨리 움직여 주는 것은 아니다. 혈마사에도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혈마륵은 그중에서도 최고수라 할 수 있는 아미타삼혈존과 함
께 무림인들이 가는 방향을 앞질러 갔다. 그리고 그토록 마주치기를 원하던 장천사의 일행과 대면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난 다섯 명의 도사를 땅에 눕혔을 때 아미타삼혈존이 다급하게 외쳤다.
"저자가 바로 그 장천사입니다!"
아미타삼혈존이 가리키는 곳에 한 젊은 사내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 갓 삼십이나 되었을까? 삼
십치고는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그 이하로는 보이지 않는 젊은 사내가 도사들을 좌우로 가르며
달려왔다. 아니, 장확히는 도사들이 사내에게 길을 터주고 있었다.
"그대가 장천사인가?"
어색한 한어를 동원하여 정중히 물었건만 상대는 질문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한어에도 종류가 많다더니.....'
처음에는 상대가 전혀 말을 못 알아듣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조금 후에야 그가 못 알아듣는 것은 '자
신이 장천사라고 불린 것' 임을 깨닫게 되었다.
"일찍이 서장에서 그대들의 고행하는 모습을 보았소. 가는 길이 다르다고는 하난 멀리 이곳까지 와서
수행할 이유는 없다고 보오만,원하는 것을 아직 얻지 못했소?"
사내의 음성에선 그다지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중원에 혈마사의 오대참화라는 것이 전해지지 않을
리 없건만, 특이한 사내였다. 그는 단지 '가는 길이 다르다' 는 말로 혈마사의 행위를 일축하고 있었다.
게다가 원하는 것이라니? 설마 하니 이자는 혈마사가 중원에 온 목적 중의 하나가 오행혈마경의 회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신앙이나 서로의 비밀에 대해 논의할 때가 아니다. 혈마륵은 사내가 단지 '
무극지기의 주인인 장천사' 라는 것을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그대가 무극지기의 주인인가?"
사내는 무극지기라는 말에 일순 놀라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해탈시켜 주마."
혈마륵은 다짜고짜 사내의 정면으로 검지손가락을 곧게 뻗었다. 전륜신공을 일으킨 뒤라 '찌직' 하는 소
리와 함께 지풍이 뻗어 나갔다.
이 정도의 공세라면 막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혈마륵이 처음부터 자신의 절학인 지풍으로 공격한 것은
스스로의 투쟁 본능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왠지 사내와 대화를 나누자니 마음이 느슨해지고 권태로
움마저 밀려왔기 때문이다. 사내가 피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면 그 순간 달려들어 가루를 내고 말리라.
그러나 사내는 혈마륵이 날린 지풍을 피하지 않았다.
퍽!
사내의 몸에서 울려 나오는 격타음에 깜짝 놀란 것은 혈마륵과 아미타삼혈존이었다.
심장 어림을 강타당한 사내는 오히려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해탈은 타인이 시켜줄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 급박한 순간에 그런 것까지 꼬치꼬치 따지고 들다니, 상대는 정상이 아니었다.
'이런 미친......!'
혈마륵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으며 뒤로 물러났다. 장천사가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놀란 것이다. 곁에 있던 아미타삼혈존도 자신을 따라 뒷걸음치고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다
섯 사람 사이로 지나갔다.
그때였다. 멀리서 구경하던 무림인들 틈 속에서 작은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혈마사의 라마승
들이 근처까지 다다른 듯 싶었다.
무림인들이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하자 땅바닥에 처박힐 번했던 혈마륵의 투지가 한순간에 솟구쳐 올
랐다.
"형제들, 마하륵께서 오시기 전에 속히 끝을 내자!"
혈마륵이 장천사의 정면으로 달리며 소리치자 아타삼혈존도 좌우로 갈라지며 따라붙었다. 네 사람이 풍
차처럼 휘두르는 강철 선장은 무엇이든지 가루로 만들 것처럼 보였다.
부웅! 붕! 붕! 붕!
폭풍처럼 휘몰아쳐 가는 네개의 선장 한가운데 장천사는 조용히 서 있었다.
아미타삼혈존의 선장이 장천사의 머리와 양쪽 허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얼핏 보기에 장천사의 몸은 그
냥 가만히 서 있는데 아미타삼혈존이 일부러 피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있나......'
중얼거리던 혈마륵은 장천사의 머리를 향해 전륜무적의 초식을 펼쳤다.그의 손끝에서 강철 선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천사의 머리가 부서진다고 생각한 순간, 정작 혈마륵의 눈
에 걸린 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었다.
"헉!"
그제야 장천사의 신법이 절륜하여 모두가 비껴 지나간 것이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네 사람이
바람처럼 장천사를 스쳐지나간 뒤, 처음으로 움직임을 멈춘 사람은 마혈존이었다.
혈마륵이 보니 어느 틈에 마혈존의 눈빛은 서장을 유랑하는 수많은 수도사들과 닮아 있었다. 그 허탈과
무상함이 가득한 동공이라니. 마혈존은 그간의 내공을 모두 상실당한 것이 분명했다.
남은 분노존과 수호존이 혈마륵에게 힐끔 눈길을 던졌다. 한순간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허무와 슬
픔이었다. 장천사에게 무공을 폐쇄당했다는 것은 곧 성불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과 같다.
다음 순간 수호존과 분조존이 괴성을 지르며 장천사에게 육박해 들어갔다.
장천사는 갑자기 사나워진 두 사람의 모습에 일순 당황하는 것 같았다. 놀란 장천사가 양손으로 수호존
과 분노존의 선장을 붙잡았을 때, 혈마륵은 벼락같이 달려들어 그의 열린 가슴으로 선장띁을 밀어 넣었
다. 장천사의 상체가 살짝 비틀어졌지만 선장은 목표를 놓치지 않았다.
꽈직!
쇠가 바위에 박히는 소리를 내며 선장은 장천사의 좌측 어깨에 박혀 들어갔다.
'성공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이었다. 장천사의 상체가 부드럽게 흔들렸다고 느낀 순간 박힌 줄 알았던 선장을 통
해 감당할 수 없는 반탄력이 밀려 들었다. 혈마륵은 자신도 모르게 선장을 놓고 말았다.
"크윽!"
장천사의 어깨에 꽂혔던 선장은 도리어 빙글빙글 돌며 혈마륵의 허리를 때리고 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보니 장천사가 어깨로 선장을 걷어낸 꼴이 아닌가!
장천사가 연이어 두 손을 흔들자 수호존과 분노존도 자신처럼 멀리 팅겨져 나갔다.
'어찌 이럴 수가....!'
수호존과 분노존의 입술을 타고 흐르는 검붉은 피를 보는 순간 혈마륵의 가슴으로 오한이 치밀기 시작
했다. 단 두 수 만에 혈마사 최고고수들 모두가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이다.
사람들의 귀에 멀리서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장의 끝에 매단 강철 고리가 울리는 소리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호존이 재빨리 마혈존을 들쳐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분노존도 그 뒤
를 따랐다.
혈마륵이 보니 장천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마도 그는 자비를 베풀었건만 세 사람이 더
욱 미친 듯이 달려든 이유를 알 수 없었으리라.
장천사는 혈마륵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선두의 라마승이 보일때 쯤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사라졌다.
혈마륵은 혈마사의 본진이 올 때까지 허리를 움켜쥐고 움직이지 않았다. 장천사의 눈빛과 앞으로 자신
이 해야 할 내키지 않는 일들 사이에서 그만 현실을 잊고 만 것이다.
"아직도 어제의 일을 생각하느냐?"
문득 고개를 드니 마하륵이 담담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에는 도망 다니던 그가... 어제는 왜 그처럼 손을 썼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입니다."
사실 지금 혈마륵이 알 수 없는 것은 그것이다. 어쩌면 속으로 장천사를 경원시했던 것도 다 아미타삼
혈존이 '그는 달아나기를 잘한다' 라고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말 모르겠느냐? 그는 자기를 위하여 싸우지 않는 것이다."
"....."
자기를 위해서 싸우지 않는다는 건 또 무슨 말인가? 혈마륵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마하륵을 바라보았다.
"그 이전에는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해 자리를 지켰던 것이다. 어제도 우리가 다급하게 뒤쫒지만 않았어
도 그는 무림인들을 다 보낸 뒤에 또 달아났을 것이다. 무림인들에게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고자 급하게
손을 쓴 것이겠지. 왠지 장천사란 사람을 만나보고 싶구나."
마하륵은 지금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이 말의 의미는 싸워서 제거할 대상으로 보고 있지만은 않다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혈마사의 최대 걸림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천사를 말이다.
게다가 마혈존의 죽음은 자신의 성급함 때문이란 말인가? 혈마륵은 마하륵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마하륵이시여.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위해 싸우지 않습니까? 그의 모든 것은 위선입니다."
마하륵이 혈마륵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내게는 그가 위선이기를 바라는 것으로 들리는구나."
"......"
사실 혈마륵에게 장염에 대한 원한이 새겨지기 시작한 것은 어제의 일 이후다. 그 이전까지 장염은 그
저 대단한 중원의 고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제저녁 혈마륵은 장염 때문에 마혈존을 성불시켜 줘야 했다.
마혈존은 천령혈에 손을 얹은 혈마륵에게 '제르 제용(다음에 보자)' 이라고 했다. 그러나 혈마륵은 마혈
존의 눈을 외면했다. 아니, 내세에도 이런 식으로 이별해야 한다면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다른 혈마사의 라마승들과 달리 아미타삼혈존은 혈마륵에게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혈마륵이 다음 세대
를 이끌어갈 혈마사의 차기 주지감이라면, 아미타삼혈존은 그를 도와 혈마사를 이끌어갈 사람들이다. 혈
마륵은 마하륵의 곁에 자신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곁에는 아미타삼혈존이 있다고 믿어왔다.
그런 아미타삼혈존의 하나인 마혈존을 어떤 이유로든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다. 혈마륵은 지금 그것이 괴로웠다.
'네가 반로환동의 고수든 뭐든 다시 만나면 반드시.....!'
마하륵은 혈마륵의 원념에 가득한 눈동자를 보며 허탈한듯 말했다.
"과연 너는 형제들을 성불시켜 주지 못하였구나."
혈마륵의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형제들을 성불시켰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마하륵의 말
을 듣는 순간 그 믿음이 흔들인 것이다. 형제들을 성불시켜 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은 과
연 무엇이란 말인가? 마혈존은 차지하고라도 그 이전에 자신의 손으로 이승을 떠나게 한 수많은 형제들이 있다.
연약해진 믿음만큼 혈마륵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하륵은 격동에 떨고 혈마륵을 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것이 중원에 와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행위가 시험받고 있다. 너는 그에게
복수하려고 하기에 앞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하거라."
마하륵이 떠나가자 혈마륵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마음의 갈등으로 혈기가 솟아 허리에서
피가 더 많이 배어 나왔지만 혈마륵은 쳐다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혈마륵이 앉은 자리로 피가 홍건
히 고이기 시작했다.혈마륵은 자신의 몸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았다.
'저것은 나의 피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흡혈한 다른 사람의 피인가.'
혈마륵은 몽롱한 가운데 자신의 몸이 서서히 굳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심장마저 굳어지며 숨이 서
서히 멈추어졌다. 입을 벌려 소리를 치려고 해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검은 하늘이 눈앞으
로 다가왔다.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지자 몸이 뒤로 넘어가고 만 것이다.
'주화입마인가.... 이렇게 죽고 마는구나.'
전신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던 혈마륵은 마침내 눈을 감고 말았다. 잠시 후 모
든 것이 멈추었다. 그렇게 혈마륵이 자신의 몸에 찾아든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 순간이었다.
"나.무.아.미.타.혈."
혈마륵의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마하륵의 진언이었다. 혈마륵은 조용히 마하륵의 음성
을 들었다. 마하륵은 동이 터 오를 때까지 진언을 멈추지 않았다.
혼돈의 와중에서도 혈마륵은 자신을 생으로 잡아 끌어주는 마하륵이 고마왔다.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알면서도 책망하지 않는 마하륵이다. 혈마륵의 가슴에서 이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잠
정이 솟아났다.
'살고 싶다. 정말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다.'
그토곡 죽음을 경원시하던 혈마륵이었지만 그날 밤 그는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의 바램 때문이
었을까? 새벽 미명이 서서히 밝아오자 혈마륵의 심장도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근육이 다시 뒤틀리자 마하륵은 부드럽게 혈마륵의 몸을 감싸 안았다.
"네가 살아서 바르도(죽은 뒤 사람의 영혼이 49일 동안 경험하는 혼몽한 세계) 를 경험하였구나. 언젠
가 너도 알게 될 테지만, 피는 우리 수행의 방편이지 목표가 아니다. 어쨌든 아루래도 우리가 본 사로
돌아갈 날이 다가온 것 같다."
혈마륵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아직 혀가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혈마륵은 마하륵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길 바랬다.
'그레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하륵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바르로들 경험했다는 것은 혈라마께서 너를 차기 주지로 세우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곧 혈라마께
서 너에게 강림하여 말씀하실 것이다. 그때는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본 사로 돌아가야겠지. 그전에
나는 장천사를 만나야겠다."
혈마륵이 눈을 끔뻑이며 자신의 굳은 의지를 나타냈다.
'마하륵이시여, 장천사는 반드시 제 손으로.....'
"너는 아직도 생사에 그토록 집착하느냐? 혈라마께서 그런 너를 차기 주지로 세우셨다니, 알수가 없구나."
답답하다는 듯 혈마륵의 눈이 찡그려졌다. 마하륵은 그런 혈마륵을 아랑곳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네가 생사에 잡착하는 만큼 원한이 깊을 것이다. 알고 보면 원한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지....."
"마하륵이시여..... 저는 결코... 결코....."
겨우 혀가 풀린 혈마륵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사실 마하륵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단지 원한을
풀고 싶었다. 마하륵이 저처럼 반대하니 지금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위대한 혈라마 께서는 자신
의 이런 바램을 이루어주실까?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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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읽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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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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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제목 : [조진행] 천사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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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