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후 도독(夏侯 都督)의 출병(出兵) -
공명(孔明)은 조운(趙雲)에게는 정병(正兵) 이만과 그를 보호(保護)할 열 명에 이르는 부장(副將)을 따로 주어, 전부(前部) 대선봉군(大先鋒軍)이라는 칭호(稱號)의 깃발을 주면서 본군(本軍)보다 하루를 앞서 성도(成都)를 출발(出發)하게 하였다.
촉국(蜀國) 건국(建國) 이후(以後)로 이렇게 거국적(擧國的)인 군사(軍事)가 원정(遠征)길에 오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기에 공명(孔明)의 본군(本軍)이 출사(出師)의 길에 오르자 후주(後主) 유선(劉禪)은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을 거느리고 북문(北門) 밖까지 전송(傳送)을 나왔다.
성도(成都)의 백성(百姓들)은 가는 곳마다 깃발을 높이 휘두르며 장병(將兵)의 출정(出征)을 환송(歡送)하였다.
공명(孔明)이 탄 수레가 지나가자 늙은이들은 땅에 엎드려 전도(前途)를 축복(祝福)하였고,
부녀자(婦女子)들은 떡과 고기와 술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며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빌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삼십만 대군(大軍)으로 조위(曺魏)를 공격(攻擊)하기 위해 한중(漢中)에 주둔(駐屯)하며 기회(機會)를 노리고 있다는 소식이 위국(魏國)에 알려지자, 위제(魏帝) 조예(曺叡)를 비롯한 조정(朝廷)의 상하는 마치 벌집을 쑤신 듯이 들끓게 되었다. 더구나 노신(老臣)들은 그 옛날 장판교(長板橋)에서 위명(威名)을 떨친 조자룡(趙子龍)이 최선봉(最先鋒)으로 쳐들어 온다는 바람에 더욱 겁(怯)을 집어 먹었다.
이에 조예(曺叡)가 국가(國家) 원로(元老)들과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입을 열었다.
"경(卿)들, 들리는 바로는 제갈량(諸葛亮)이 삼십오만 대군(大軍)을 이끌고 북벌(北伐)에 나서, 현재(現在) 한중(漢中)에 주둔(駐屯)하며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압박(壓迫)하고 선봉(先鋒)인 조운(趙雲)은 국경(國境)을 넘었다 하니 말해보시오. 어찌 대응(對應)해야겠소?"
그때, 대장군(大將軍) 조진(曺眞)이 대청(臺廳) 중앙(中央)으로 나와 고(告)한다.
"폐하(陛下)! 제갈랑(諸葛亮)이 한중(漢中)에 주둔(駐屯)한 것은 동정(動靜)을 살피려 함이니, 신(臣)이 볼 때는 각 군 도독(都督)들에게 성(城)을 방비(防備)하며 지키도록 하고 후에 조운(趙雲)에 맞설 장수(將帥)를 보내심이 좋겠습니다."
"조운(趙雲)은 촉(蜀의 오호상장(五虎上將 : 관우, 마초, 장비, 조운, 황충이란 명예를 지닌 촉의 名將)으로 천하 맹장(天下猛將)으로 알려져 있는데 누가 나가서 맞서겠소?" 조예(曺叡)가 이렇게 말하는 도중(途中)에, 조진(曺眞)은 그 자리에서 그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쪼르르>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는 필시(必是) 자신(自身이 촉(蜀)의 선봉(先鋒)인 조운(趙雲)과 대적(對敵)할 장수(將帥)로 지명(指名)되는 것을 피(避)하려는 행동(行動)이었으리라...
그런데 갑자기 잠깐의 적막(寂寞)을 깨고,
"폐하(陛下)!" 하고, 나타나는 사내가 있었으니, 그는 일찍이 명장(寂寞)으로 이름을 떨쳤던 장군(將軍) 하후연(夏侯淵)의 아들 하후무(夏侯楙)였다.
【여기서 잠깐! 조조(曹操)의 명장(名將) 하후연(夏侯淵)에 대한 기억(記憶)이 있으십니까?
본 삼국지 280회 초반(初盤)에 유비(劉備)의 한중(漢中) 공략(攻略) 중, 정군산(定軍山) 산성(山城)을 방어(防禦)하면서 조조(曹操)의 지원군(支援軍)을 하나도 못 받은 상태(狀態)에서 싸우다가 황충(黃忠)의 군사(軍士)에게 전사(戰死)한 조조(曹操)의 최측근(最側近) 장수(將帥)라는 것을... 】
대청(臺廳) 중앙(中央)으로 나온 하후무(夏侯楙)는 단상(壇上)의 처자(天子) 조예(曺叡)를 향하여 자신의 의지(意志)를 이렇게 밝힌다.
"신(臣)의 아비가 한중(漢中)에서 전사(戰死)함에 촉군(蜀軍에 대한 신의 원한(怨恨)은 골수(骨髓)에 맺혀 있습니다. 만약(萬若) 폐하(陛下)께서 본부(本部) 맹장(猛將) 부대(部隊)와 관서(官署) 군사(軍事)를 내주신다면 신(臣)은 기필(期必)코 공명(孔明)의 군사(軍事)를 쳐부숴 아비의 원수(怨讐)를 갚겠나이다."
일찍이 조조(曹操)는 어려서 아비를 잃은 하후무(夏侯楙)를 친자식(親子息)처럼 사랑한 나머지 자신(自身)의 딸인 청하공주(淸河公主)를 주어 그를 부마(駙馬)로 삼았었다. 그런 그가 은혜(恩惠)에 보답(報答)코자 자원(自願)을 하였으나, 실상(實狀)은 병법(兵法)만 연구(硏究)했을 뿐 하후무(夏侯楙)는 실전(實戰) 경험(經驗)이라곤 하나도 없는 속칭(俗稱) <때깔만 훌륭한>장수(將帥)였던 것이다.
"오오, 장군(將軍)이 젊은 나이에 공명(孔明)의 지략(智略)을 막아낼 수 있겠나?" 조예(曺叡)가 하후무(夏侯楙)의 청원(請願)을 듣고, 좌 중(座中)둘러보며 이렇게 묻는 까닭은 실전(實戰) 경험(經驗)이 일천(日淺)한 신예 장수(將帥)가 이름도 드높은 상산(常山) 조자룡(趙子龍)에게 맞서려고 나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는 판단(判斷)이 들어서였다. 그러자 황제(皇帝)의 의중(意中)을 간파(看破)한 사도(司徒) 왕랑(王郞)이 대청 중앙(中央)으로 나와
"폐하(陛下), 하 장군(夏將軍)의 말은 갸륵하오나 실전(實戰) 경험(經驗)이 없어 조운(趙雲)의 적수(敵手)가 못 되며 특히 그 뒤에는 제갈량(諸葛亮)이 버티고 있습니다. 신(臣)이 볼 때는 대장군(大將軍) 조진(曺眞)을 수장(首將)에 봉(封)하시고, 조휴(曺休)를 부장(副將)으로 삼아 내보내는 것이 옳은 듯 하옵니다." 하고, 아뢰는 것이었다.
(어, 엉?)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던 조진(曺眞)이 흠칫 놀랐다. 그것은 천하(天下)의 명장(名將)으로 이름 난 촉장(蜀將) 조운(趙雲)을 대적(對敵)하는데 자신(自身)의 이름이 거론(擧論)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후무(夏侯楙)는 그 소리를 듣고 크게 노한다.
"흥! 이보시오? 왕랑(王郞)! 병법(兵法)에 능통(能通)한 나에게 감(敢)히 경험(經驗)을 논(論)하다니, 혹시(或是) 제갈량(諸葛亮)과 내통(內通)할 뜻을 품고서 나를 모해(謀害)하는 것이 아니오?"
"허! 장군(將軍)의 그 말만 들어도 장군의 불같은 성격(性格)을 알 수가 있소." 왕랑(王郞)은 하후무(夏侯楙)에게 이렇게 말한 뒤에 황제(皇帝) 조예(曺叡)를 향(向)하여 다시 아뢴다.
"폐하(陛下), 보신 것처럼 하후무(夏侯楙) 장군(將軍)과 같이 급(急)하게 모든 일을 처리(處理)한다면 사리 판단(事理判斷)하는 오류(誤謬)를 범(犯)하기 쉬운 법이고, 이것은 적(敵) 앞에서는 금기 사항(禁忌事項) 입니다."
그러자 즉각(卽刻) 하후무(夏侯楙)의 반론(反論)이 터져나왔다.
"아뢰옵니다. 신(臣)이 제갈량(諸葛亮)을 생포(生捕)하지 못 한다면, 귀환(歸還)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사도(司徒) 왕랑(王郞)과 장군(將軍) 하후무(夏侯楙)와 <옥신각신>이 이어지자, 이번에는 조진(曺眞)이 앞으로 나온다.
"폐하(陛下)! 하후(夏侯) 장군(將軍)은 선제(先帝 :조조)의 부마(駙馬)이며, 용감무쌍(勇敢無雙)하여 조운(趙雲)과 결전(決戰)을 벌이는데 전혀 손색(遜色)이 없는 장수(將帥)입니다."
조진(曺眞)은 이렇게 하후무(夏侯楙)를 추켜 세우면서 자신(自身)을 대신(代身)하여 사지(死地)인 전쟁(戰爭)터로 몰아 넣는 술책(術策)을 부렸다.
이것을 지켜 보던 조예(曺叡)가 드디어 하명(下命)한다.
"음, 하후(夏侯) 장군(將軍)!"
"예!"
"그대를 정서(征西) 대도독(大都督)에 봉(封)하니, 관서군 이십만(二十萬)으로 대적(對敵)하되, 제갈량(諸葛亮)을 필(必)히 생포(生捕)해서 선친(先親)의 넋을 위로(慰勞)케 하라!"
"명(命)에 따르겠습니다!"
이에 왕랑(王梁)은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만을 좌우(左右)로 흔들어 보였다.
삼국지 - 353회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