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6월 9일 연중 제9주간 토요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코12,38-44)
“Amen, I say to you, this poor widow put in more
than all the other contributors to the treasury.
For they have all contributed from their surplus wealth,
but she, from her poverty, has contributed all she had,
her whole livelihood.”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우선적 사명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말씀 전파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지배 계급의 지식인들을 책망하신다. 그들은 자기네 지식을 백성을 착취하는 데 이용한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에서도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에 주님께 칭찬을 듣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들이 백성을 지배하고 백성을 등쳐 먹으려는 행태는 같은 모양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근간인 율법을 다루는 법조인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하느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억울한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고, 그들은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힘 있는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민생(民生)! 민생(民生)!”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허울 좋은 말뿐이며, 실상은 자신들의 안위만 걱정하는 파렴치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지배 계층에 있는 지식인들을 정면으로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언제나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며,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도,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무척 오래 합니다. 요즘도 조찬 기도회니, 뭐니 하면서 자신들만의 기도회를 수시로 엽니다. 그리고 그럴듯한 말로 국민을 현혹합니다. 그들에게는 진실, 진리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거짓말, 사기 등으로 중무장한 것처럼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법을 적용할 때, 자신들에게는 관대하고, 서민들에게는 가혹합니다. 불의와 부조리는 그들 편이 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반면에,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행실을 두둔하시고 칭찬하십니다. 가난한 과부의 삶 속에는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디에 속합니까? 율법 학자와 같은 부류입니까? 아니면 과부와 같은 사람입니까?
☆☆☆
누구에게나 돈은 귀중한 것입니다. 그 귀중한 돈을 교회에 바치는 것이 헌금입니다. 신앙 없이 가능할는지요? 믿음이 없으면 헌금이 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어 바치는 공납금이지 헌금은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헌금하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정성을 담아야 합니다. 정성과 함께 바쳐야 올바른 헌금이 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정성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헌금은 무모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생활비를 바치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여인은 바쳤습니다. 그만큼 하느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자세입니다. 자신이 바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드리겠다는 각오입니다. 여인의 정성이 행동으로 나타난 셈입니다.
너무 단순하게, 생활비를 바쳤다는 사실에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왜 바쳤는지, 그 동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부의 헌금은 믿음과 신뢰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눈여겨보셨습니다. 이렇듯 헌금의 정성은 마음가짐입니다. 얼마나 많이 바치는지가 아닙니다. 어떤 돈을 어떻게 바치는지도 아닙니다. 얼마만큼 정성을 담아 바치는지가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판단하는 것처럼 물질의 양 자체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의 형편을 먼저 헤아리십니다.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탈렌트를 받고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다섯 탈렌트를 받고 태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재주도 없고, 배경도 없고, 그저 건강 하나만을 받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귀한 가문에 많은 상속을 받을 뿐만 아니라 타고난 재능에 빼어난 용모까지 받아 태어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한 탈렌트를 가진 사람이 벌게 된 한 탈렌트를 다섯 탈렌트를 가진 사람이 벌게 된 다섯 탈렌트와 똑같이 평가하십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참으로 공평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양승국신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
율법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과 질책은 신랄할 정도를 넘어 낯 뜨겁기까지 합니다. 그토록 과격한 공격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생각해봅니다.
원인은 아무래도 이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율법학자들이 너무 커질 대로 커져버린 것! 적당히 커졌어야 했는데 제대로 커져버렸습니다. 적당히 자신을 포장했어야 했는데 지나치게 과대포장했습니다.
율법학자들, 사실 알맹이는 별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실체, 본질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공부 좀 했다는 것, 당대 주류층이었다는 것, 좋은 부모 뒀다는 것, 그래서 안락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
그들의 내면은 위선과 교만으로 부실했는데, 그럴수록 그들은 외면을 치장했습니다. 그럴 듯하게 차려입고 윗자리에 앉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우쭐해진 그들은 더 자신을 부풀렸습니다.
이런 율법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무섭도록 날카롭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지적은 어쩌면 사제요, 수도자들, 교회지도자들을 향한 지적입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커질 대로 커진 사람들입니다. 어쩌다가 높은 직책, 큰 자리에 한번 앉아본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번 자리를 차지하면 내려올 생각을 안 합니다. 그 ‘물 좋은’ 자리에 맛이 들었는지 그 자리를 떠나기가 그렇게 아쉽습니다.
갓 입회한 지원자 시절을 떠올립니다. 가장 졸병이니 모든 말에 기쁘게 순명합니다. 이제 첫걸음이니 잔뜩 군기가 들어 있습니다. 선배들의 말 한 마디에 신속하게 움직입니다. 갓 시작한 신입이니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수용합니다.
그런 지원자의 마음으로 한 평생 살아가길 바랍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강물처럼 그렇게 흘러가길 바랍니다.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떠나라면 미련 없이 떠나가고...
너무 커져버린 나, 실체보다 너무 부풀려져 있는 나를 정확하게 바라보길 바랍니다. 있는 그대로의 부족하고 나약한 내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하기를 바랍니다.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부족하니, 내가 이렇게 한심스러우니, 그저 주님 자비를 바랄 뿐이고, 그저 주님 도우심만 기다립니다, 하며 기도하길 바랍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강아지들이 토실토실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이제 한 달 남짓 지나가니 자기들도 개라고 왈왈 짖어대기 시작합니다. 그 어린 것들의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말도 못할 지경입니다.
반면에 어미는 7살입니다. 사람 나이로 환산하면 4-50도 넘었습니다. 등치도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 녀석을 바라보면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품에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귀여워해줄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가 큰 사람이어서, 제대로 성공한 사람이어서, 높은 직책에 앉아서가 아닐 것입니다.
부족하고 어리버리해서, 실수와 실패만 거듭하는 측은한 존재여서, 첫 마음을 잃지 않아서, 결국 작은 존재여서 우리를 당신 품에 꼭 안아주시고 사랑해주시지 않을까요?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곧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김기현신부-
오늘 독서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어떻게 말씀을 선포해야 할까요? 거리에서 개신교 사람들이 하듯이, “예수 천국, 불신 지옥” 하고 외쳐야 할까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나이 많은 부부가 자동차를 타고 가고 있는데, 타이어가 펑크 났습니다. 그래서 펑크를 떼우려고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A와 B 라는 신자가 보고 있었습니다. 먼저 A라는 신자가 그 노부부에게 가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돌보십니다. 시간되면 성당에 한 번 오십시오.” 그리고 돌아서며 마음으로 ‘말씀을 선포해서, 너무 보람 있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에 반해 B는 그 노부부에게 가서 종교 이야기를 하지 않고, 타이어 교체하는 것을 도와 드립니다. 그리고 헤어지려고 악수를 하는데, B의 손에 묵주 반지가 있었습니다. 노부부는 그것을 보고 B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노부부는 A와 B중에 어떤 사람을 통해서 ‘천주교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될까요? 아무래도 B를 통해서, 천주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에 대해서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가 힘듭니다.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 중에 하나가 오지헌 이라는 개그맨에게서 드러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를 알고 있는 윈 베네딕트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못 생긴 개그맨이 오지헌이다. 개그맨은 두 가지 부류가 있다. ‘개그맨을 하고 싶은 사람’과 ‘개그맨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오지헌은 개그맨을 할 수 밖에 없는 얼굴을 가졌다.
개그맨 시험에 한 번에 붙은 사람이 지금까지 두 명 있었다고 한다. 바로 옥동자로 불리는 정종철과 오지헌이다. 오지헌은 내가 아끼는 제자이다. 중학생 때부터 내가 하던 모임에 나와서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공부했다. 개그맨을 꿈꾸는 그는 자기 얼굴에 대한 열등감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얼굴에 대해 자신만만해 한다.
언젠가 같이 식사하면서 외모 때문에 몇 번이나 힘들고 마음이 어려웠냐고 물었다. 그는 얼굴색 하나 안변하고,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얼굴이 못 생겼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너무 놀라 밥이 목에 걸리고 말았다. 이유를 물었더니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실수가 없으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개그맨을 할 수 밖에 없는 얼굴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에게는 열등감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외모에 대해 당당하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는 어디에 가든지 늘 성경을 들고 다니며, 읽고 묵상한다. 그의 당당함은 말씀에서 나온 것이다.】
오지헌이라는 개그맨은 자신의 삶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으면 자신감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으면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으면 열등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아마도 하느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게 되었겠죠. 또 ‘하느님 말씀이 내 삶에도 도움이 될까?’ 하는 호기심과 관심이 생겼을 겁니다.
우리도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삶으로 살아낸다면, 자신감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하루,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삶으로 살아내 봅시다.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부자
-김찬선신부-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부자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즉시 떠오른 생각이 이것이어서
이 말씀으로 말씀 나누기를 할까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율법학자와 과부에 대한
대비되는 예수님의 태도가 나옵니다.
율법학자는 모든 면에서 가진 자를 대표하고
과부는 모든 면에서 가진 것이 없는 자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학자를 존경 받고자 하지만
존경 받을 만한 짓은 하나도 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의 등이나 쳐 먹는 위선자로 얘기하시며
그들을 조심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에 비해 과부는 가난하지만 있는 것을 다 바치는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칭찬하십니다.
계급투쟁적인 시각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제 자신이 그런 잘못을 과거에 많이 저질렀고
지금도 어쩌면 그러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저는 과거 이 복음의 가르침대로
한 편으로는 율법학자들처럼 되지 않으려 애쓰면서
다른 한 편 가난한 사람을 우선 선택하는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우선 선택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가난한 이를 우선 선택하는 것이지
부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닌데도
부자들은 다 남을 등쳐먹는 나쁜 사람들이라고
감정으로도 배척하고 실제로 잘 만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가진 사람들의 고통을 차츰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어찌 보면 그들이 더 불행하고 불쌍합니다.
그들은 나눌 줄을 모릅니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보면서 가난하고
그래서 많이 가지고도 나누지 못하는 것도 불행하고 불쌍하지만
제가 볼 때 더 불행하고 불쌍한 것은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열어보여도 큰 부끄러움이 아닌데도 내보이지 못합니다.
겉으로 보면 가장 친하고 늘 만나는 사람들한테도 숨깁니다.
자기가 속한 그룹에 끼이려면
문제가 있어도 없는 척,
불행한데도 행복한 척 일정한 품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위, 품위가 나눔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진정한 부자가 아니고
지위, 품위가 사랑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불행하고 불쌍합니다.
반대로 하느님께이건 인간에게이건
재물이건 내면이건
있는 그대로, 가진 그대로 내보이고 나누는 사람은 복됩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닮은 인간
-강우현 신부-
거짓된 삶은 파멸로 이끌고, 진실된 삶은 축복을 받아야 하는데, 이와 반대되는 경우를 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요령을 부리고,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 왠지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우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오히려 융통성 없고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삶에 대한 우리의 이런 시선을 율법 학자들을 통해
다시 바라보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식적인 행동을 지적하시고,
또 약자들에게 가혹한 그들의 악행을 지적하십니다. 율법 학자들의
위선적인 행동들은 오늘날에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공지향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왜 성공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보다는 이
세상에서 대접받으면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를 겉과 속이
다른 처세의 달인으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우리가 가꾸고 다듬어야
하는 참다운 인간 본성을 살리는 일에는 소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본성을 닮았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가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서만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은 내 마음의 지성소에
계시는 하느님을 불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하느님의 본성을
살리는 일에 우리의 마음을 모았으면 합니다.
겉과 속
-전삼용신부-
얼마 전에 논문지도 교수 신부님과 마지막 모임을 하고 한국 음식을 대접해드리기 위해 로마 시내에 있는 음식점에 모시고 갔습니다.
신부님은 굳이 포크 대신 젓가락을 사용하시며 식사를 하셨습니다. 불고기를 대접해 드렸는데 젓가락질을 잘 못하시는 관계로 음식이 식탁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교수님은 스스럼없이 손으로 음식을 집어 드셨습니다.
또 저의 교수님은 클러지 셔츠를 입는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엽구리가 뜯어진 바지를 입고 다니시기도 합니다. 그 날도 버너를 올려놓고 불고기를 구웠기 때문에 더우셨는지 음식을 먹다가 윗도리를 벗고 러닝셔츠만 입고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주인 자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혀 신부님 같지 않으세요!”
아마 그 자매님의 머리엔 끌러지를 입고 긴 수단을 늘어뜨리고 한 손엔 성경을 든 그런 사제의 모습을 상상하고 계셨나봅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교수 신부님만큼 신부님 같은 신부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나라 전통을 존중하시기 위해 굳이 그 나라 문화대로 젓가락질을 배우려 하신 것이고 음식 하나 버리지 않기 위해 손으로 집어 드신 것이고 당신은 버려진 옷을 주워 입으시면서도 돈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내어놓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리스도께서 지금 사셨더라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제는 세상이 원하는 그런 모습의 사제가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는 사제가 되어가야 할 것입니다.
한 할아버지가 도시에 살다 놀러온 손자를 데리고 해변으로 나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바윗돌들을 가리키며 그 돌들 위에 아름다운 것들이 굉장히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손자가 가까이 가서 보았을 땐 시커멓고 울퉁불퉁한 것들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못생긴 돌 하나를 떼어냈습니다. 그리고 반을 갈랐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안엔 매끈하고 무지갯빛이 나는 아름다운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굴이었습니다. 겉 표면과는 너무 다른 굴의 속을 보고서 아이는 참 신기해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치 이 아이와 같이 속보다는 겉모습에 더 중점을 두는 시선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영이시고 물질은 창조된 것들이며, 영혼은 영원하고 육체는 썩어 없어질 것이며, 보이는 것은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육체보다는 영이,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고 겉모습 보다는 영혼의 모습에 더 중점을 두며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겉모습에 더 치중하게 되는 이유는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고 잘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할까요? 스스로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은 그 안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 됩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더라도 양심은 그렇게 심판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로부터 평가절하 된 자신의 존엄성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숨기며 가식적으로 잘 보이려고 합니다. 정말 하느님께 인정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마치 성인들처럼,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이나 명예가 아니라 ‘멸시’를 청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의 위선적인 모습과 과부의 보이지 않는 헌금을 비교하시며 누구를 닮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율법학자는 긴 옷을 입고 인사 받기 좋아하고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고 잔치에서는 가장 윗자리를 즐깁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 긴 수단을 입고 인사 받는 것을 좋아하고 성당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고 식사 자리에서는 가장 중앙에 앉았습니다. 어찌 이리 똑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과부는 아주 작은 액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비교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당연히 과부의 모습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옥에는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입고 다니고 그렇게 보이려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영은 생명을 주고 육은 죽음으로 이끈다.
<< 짧은 묵상 >>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는 행동 중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핑계’를 댄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핑계를 댑니다. 하느님이 그들 마음을 모르시지 않으실 텐데도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해서라도 작게 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이렇듯 하느님께나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께 밉보였다고 양심이 판단하면 사람은 그것을 보상받기라도 해야 하듯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려고 자신을 포장합니다.
오늘 복음엔 율법학자들과 가난한 과부가 대조되어 등장합니다.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갖은 수를 쓰는 사람들을 대표하고, 가난한 과부는 어디 보여주기도 창피한 액수를 헌금함에 넣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세상은 겉모습을 좋아합니다. 예전엔 비싼 차를 끌고 다니면 지방에선 경찰들이 아예 잡지 않는 경우들도 많았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힘도 당연히 있을 텐데 괜히 딱지 한 장 잘못 끊고 큰 불상사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당연히 돈 많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고, 강하게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이미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 하여도 끊임없이 잘못을 무마하기 위해 핑계를 대고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전가시킵니다. 결국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끼리 잘못을 전가시키면서 자신들끼리도 친해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골방에서 문을 잠가놓고 하고 오른 손이 착한 일을 하거든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한다면 점점 더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그 사이에 끼어드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에만 알아야 하는 것들을 회사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 사람의 관계는 종말에 접어 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둘 만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과부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바치면서도 누구에게 그것을 자랑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가 더 쉽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 과부의 비밀스런 행위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과부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하느님과의 비밀스런 관계를 더 깊게 하기 위해 ‘침묵’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삶 안에서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핑계’를 대지 않을 것을 권합니다. 물론 착한 일을 한다면 왼손도 모르게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하느님만이 알아 줄 무엇’을 쌓아가는 것이 그분과의 더 깊은 관계를 맺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가 없었다면 물론 하느님 앞에서 핑계를 댈 거리도 없었을 것이고, 또한 핑계도 대지 않았을 것입니다.
†♡†♡†♡†♡†♡†♡†♡†♡†♡†♡†♡†♡†♡†♡†♡†♡†♡†♡†♡†♡†
†♡†♡†♡†♡†♡†♡†♡†♡†♡†♡†♡†♡†♡†♡†♡†♡†♡†♡†♡†♡†
헌금과 세금
-조용상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헌금에 대해 말씀하신다. 헌금의 액수보다는 헌금이 그 사람에게 차지하는 비중을 더 강조하신다. 그렇다. 봉헌금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이 가진 전부라면 그보다 더 큰 헌금은 없다.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과부를 보면서 예수님은 성모님을 떠올리지 않으셨을까?
불현듯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떠오른다. 생전에 어머니는 주일 헌금을 항상 미리 준비해 놓으셨는데, 가장 깨끗한 지폐를 골라 성가 책 속에 넣어두셨다. 어머니는 내게도 꼭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그 가르침 덕분에 지금도 주일 미사 헌금은 신권으로 준비해 봉헌한다. 그리고 교무금에 관해서 잊혀지지 않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어머니는 쪼들리는 살림에도 교무금을 생활비의 십일조로 내셨다.
신학생일 때, 주임 신부님이 나를 부르셨다. 당신이 우리 집 사정을 다 아는데 어머님이 교무금을 너무 많이 내시는 것 같다며 어머님이 책정하신 금액의 반이 적힌 교무금 카드를 어머니께 갖다드리라고 하셨다.
그걸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니 어머니는 새 교무금 카드를 다시 주임 신부님에게 가져다 드리고, 배려에 감사하지만 정한 대로 교무금을 내겠다고 정중히 말씀드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중간에서 난감한 입장이 되었는데 결국 주임 신부님이 양보(?)하시는 걸로 매듭이 지어졌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머니의 그 고집에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헌금을 세금에 빗대어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럴 때 화가 난다. 어떻게 헌금을 세금에 비교할 수 있는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을 자발적으로 표현하는 그 거룩한 행위를,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내는 한갓 세금 따위와 비교를 하다니, 그것은 마음을 다해 헌금하는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고, 나아가 하느님마저 모욕하는 행위다. 아까워하며 마지못해 내는 헌금이라면 차라리 내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렙톤 두 닢이지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기꺼이 봉헌한 가난한 과부를 보면서 헌금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한번 되돌아보자.
†♡†♡†♡†♡†♡†♡†♡†♡†♡†♡†♡†♡†♡†♡†♡†♡†♡†♡†♡†♡†
믿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느님
-이강우 신부-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과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의 모습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신앙생활과 가난한 과부의 신앙생활을 구분짖는 유일한 기준은 바로 믿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로 구분됩니다.
율법학자들의 신앙 생활속에서 그 믿음의 중심은 철저히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합니다.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의 말씀도, 하느님의 뜻도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해 이용됩니다. 이들에게 하느님과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인사 받고, 회당이나 잔치에서 윗자리,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을 챙기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결국 이들에게 신앙 생활은 자기 자신을 위한 하느님과의 거래가 되어 버립니다.
복음에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이들에게 있어서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 역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투자의 의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한 단죄를 받을 것이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의 신앙 생활 속에는 그 믿음의 중심이 철저히 하느님께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 사실은 과부가 보여주는 봉헌 하나만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과부가 보여준 봉헌은 율사들이 보여준 모습과는 정반대로 그 모든 것보다 우선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진 봉헌이었습니다.
과부의 봉헌 속에는 어떠한 계산도,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능력껏 아낌없이 바치는 모습, 주님을 찬양하며 내 가장 소중한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 아름다운 봉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러한 과부의 봉헌을 극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여러분! 우리들의 신앙 생활속에는 율법학자의 모습도, 가난한 과부의 모습도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주님께 받은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주님을 찬양하며 아무런 조건없이 오로지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내 신앙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도 있지만 또 때로는 내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주님과 거래를 하며 내 뜻에 주님을 맞추려는 마음으로 철저히 나 자신을 신앙의 중심으로 두고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번 한번만 해주시면 제가 이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기도해 드릴테니 이번 한번만 도와주십시오“...이렇게 기도하며 하느님과 흥정을 벌이고, “내가 이렇게 하느님께 정성을 들였는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러 실수가 있느냐“ 원망하며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실 자체에 회의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두가지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과연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믿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를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가난한 과부처럼 하느님께 인정받는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은 하루 우리의 신앙에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빌며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
율법학자의 위선과 가난한 과부의 정성
-김영남 신부 -
오늘 복음은 두 대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 을 칭찬하는 말씀인데, 전체적으로 보아 율법학자의 태도와 가난한 과부의 태도가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먼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 는 내용의 말씀을 살펴보겠다. 사람들이 율법학자들에 대하여 조심하여야 할 내용은 크게 보아 명예욕과 재물욕이다. 예수님은 먼저 장터와 회당과 잔치 자리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그들의 명예욕을 비판하신다.
둘째로는 두 가지 예를 통해 율법 학자들의 위선을 들추어내신다. '과부들'은 구약성서에서 '고아' 와 '떠돌이' 와 함께 공동체의 보호가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 의 대표격으로 자주 언급되는데,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 이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는 날카로운 비판의 말씀을 하신다.
율법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먹는 일이 일어 나는지에 관하여는 복음말씀을 통해 알 수는 없지만,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변호사의 역할을 하면서 과부들을 속여 먹는 경우들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는 있겠다.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옳지 못한 행동을 하면서 남들에게는 거룩한 듯이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며,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신다. 그러면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이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에 관한 대목을 살펴보자. 이 대목은 예수께서 '헌금함' 이 놓여 있던 성전 앞마당에서 앉아서 가르 치고 계셨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앞의 대목에서는 율법학자들의 태도가 본받지 말아야 할 예로서 제시되었다면, 과부의 헌금에 대한 칭찬의 대목에서는 과부의 태도가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되어 있다. 매우 대조적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대목에 나오는 과부에 관하여는 그가 나이가 많은지, 병중에 있는지, 가족들은 있는지 등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헌금 하는 것을 "바라보고" 계시다가 어느 가난한 과부가 가장 작은 화폐단위였던 렙톤 두 닢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히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며 매우 장중 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사람들의 일반적인 가치평가가 잘못 되어 있음을 가르치신다. 헌금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헌금으로 표현되는 자세의 질이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외양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가르치신다 (참조: 야고 2,1~13).
그리고 바로 앞 대목에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율법학자들" 에 관한 말이 있었는데, 다시 이 대목에서 과부가 언급되면서 그의 '가난한' 처지가 매우 강조되어 있다. '가난한' 과부들을 도와 주어야 할 율법학자들이 오히려 그들을 '등쳐먹어' 그들의 가난의 골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판단은 준엄 하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 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종교지도자들의 그릇된 태도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말해준다.
율법학자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그토록 날카로운 비판의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들이 유다인 사회에서 영향 력이 매우 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과부는 일반적으로 성서의 유다인들의 사회에서 너무 가난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없고, 무시받기 쉬운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가난한 과부를 본받아야 할 예로 제시하신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들은 당시의 사회에서 볼 때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었다. 오늘날에는 어떠 한가?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을 말하기 전에 우선 종교의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종교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피해를 주는 경우들도 더러 있음을 생각할 때, -그것이 어찌 사이비 종교들 에게서만 보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찌르듯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신자들은 복음 말씀을 통하여 한편으로는 율법 학자들의 명예욕과 재물욕이 뒤섞인 위선을 본받아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하지만 온 정성을 다해 헌금하는 과부의 정성어린 '하느님 공경' 의 태도를 본받으라는 초대를 받는다.
또한 복음 말씀은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특히 교회안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분들에게, 자신들이 혹시라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 부터 심하게 비판받는 율법학자들의 태도에 떨어져 있지는 않은지 철저하게 자기 성찰을 하라고 요청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늘 복음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서, 교회 공동체 전체는 교회 안에서 가난한 과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무시 당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고, 그들이 교회를 따뜻한 공간으로 느낄 수 있도록 각별히 배려한다고 깨우쳐 준다.
교회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신앙 공동체' 안에서만은 '하느님의 사랑' 과 '이웃 형제자매들의 사랑' 을 따뜻하게 느낄 수 있도록 급히 구체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리운 신부님>
-양승국신부-
정말 웃기는 인간들인 불쌍한 율법학자들, 그들은 오늘도 예수님으로부터 신나게 야단을 맞습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율법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꼭 저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았기 때문입니다.
수도생활의 연륜이 더해갈수록 더욱 겸손해져야 하는데, 가난한 아이들, 고통 받는 사람들을 하느님으로 섬겨야하는데, 새싹 같은 소중한 후배들을 하늘처럼 섬겨야 하는데, 그게 어렵습니다. 마음은 굴뚝같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님을 따라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하는데 가진 것은 점점 늘어만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 민족의 지도자로서 백성들에게 좋은 이정표가 되어주고, 모범이 되기는커녕, 백성들을 갈팡질팡 방황하게 만드는 율법학자들의 잘못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지적의 가장 구체적인 대상은 위선입니다. 탐욕입니다. 교만입니다. 언행의 불일치입니다. 그로 인한 거짓가르침입니다.
백성들은 기가 막히게 알지요. 누가 착한 목자인지, 누가 악한 목자인지를.
무엇보다도 그들은 가난한 민중들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이 축척한 부의 출처는 가난한 과부들이었습니다. 착한 목자임을 식별할 수 있는 첫 번째 기준은 가난한 목자임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율법학자들은 조금 배웠다고, 가방끈이 길다고 엄청 뻐겼습니다. 못 배운 사람 대놓고 무시했습니다. 길을 갈 때면 단 한 번도 먼저 인사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안하무인이었습니다. 공식적인 석상에서는 기를 쓰고 연단에 앉으려고, 그래서 폼 한번 잡으려고, 매스컴 한번 타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더욱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들의 위선적인 신심생활이었습니다. 마음은 콩밭에 가있으면서 기도할 때는 엄청 거룩한 척 했습니다. 길기는 또 왜 그렇게 깁니까? 하늘을 향해 팔을 펼치고, 눈을 치켜뜨고, 정말 꼴불견이었습니다.
이런 율법학자들의 해도 해도 너무한 위선에 마음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예수님이셨기에 목숨까지 걸고 그들의 위선을 질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어지러운 세상, 힘겨운 세상,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백 마디 말보다는 행동을 통해 복음을 증거 하는 착한 목자, 자신의 구체적인 삶 전체를 통해 또 다른 예수님을 보여주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매월 일선 사목자들을 위해 발간되는 ‘사목’이란 잡지가 있습니다. 최근 획기적인 변화를 통해 사목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목자료들을 제공하는 좋은 잡지입니다. 사목자들 뿐만 아니라 신자들께도 큰 도움이 되리라 믿기에 구독을 권유합니다.
이번호 ‘내가 만난 그리스도인’이란 꼭지기사에 제가 존경하는 신부님에 대한 글이 실려서 너무나 반가웠고 행복했습니다.
“1978년 겨울 한가운데의 어느 토요일 오후라고 기억된다. 교적을 옮기느라 본당을 방문하고, 성체조배를 하려고 성당에 들어갔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큰 마스크를 쓰고 작업복 차림을 한 어떤 분이 성당 바닥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가뜩이나 추운 실내 공기에 유리창까지 열려 있어 단 몇 분도 있지 못하고 성당을 나오면서, 직장이 없어 성당 청소를 해야만 하는 왜소한 체구의 그 아저씨의 처지가 안타깝고 측은하였다. 그런데 그분이 본당신부님이신 서정술 신부님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1980년 겨울, 꾸르실료 교육을 받고 하느님의 사랑이 고마워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우선 본당 청소를 해볼까 하여 어느 토요일에 성당에 갔더니 그 아저씨, 아니 본당 신부님께서 여전히 혼자서 성당 청소를 하고 계셨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성당에서 그 일에 몰두하고 계신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하시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였다.
신부님께서는 당신이 쉬시는 월요일이면 농사짓는 교우 집을 방문하시어 땀 흘리시며 일손을 빌려 주셨고, 소독저가 방안 가득 쌓여있는 교우 집에서 소독저 포장을 척척 해내시며 교우들과 어울려 국수도 삶아먹고 김치 한 가지의 조촐한 식사를 즐겨 드셨다. 된장 뚝배기에 수저를 점벙점벙 담그시며 소탈하게 식사하시는 모습이 마음 편한 이웃 아저씨 같았다.”(조두이, ‘내가 만난 그리스도인’ 사목 329호 참조).
제 마음 깊숙이 언제나 제가 나아가고픈 이상향으로 남아계시는 그리운 신부님, 오랜 날들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양떼 곁에 착한 목자로 남아주십시오.
새벽을 열며
드디어 월드컵이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히 2002년에 우리나라가 너무나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온 국민들의 관심들이 온통 이 축구에 쏠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저 역시 스포츠 경기 자체를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에 이 월드컵의 시작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승리를 위해서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할 것입니다.
텔레비전을 비롯한 각종 방송매체에서도 이 월드컵에 관련된 소식만 전하고 있지요. 그리고 2002년과 마찬가지로 각종 표어로 국민들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Again 2002', ‘우리는, 대한민국이다.’, ‘태극 전사, 당신의 승리를 믿습니다.’등의 표어를 통해서 승리를 기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온 국민이 마음을 모아서 우리나라를 응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내가 발을 딛고서 살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열심히 응원하는 것이 하나의 애국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런 응원만이 진정한 애국일까요?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미래가 결정될 한-미 자유무역협정, 대추리 미군기지 문제, 시각장애인들의 직업 문제, 점점 심해지는 이 사회의 빈부 격차, 청년실업과 고용안정의 문제……. 우리가 결코 무시하면 안 될 사건과 정책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 어쩌면 이것들이 월드컵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것들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런 것들에는 무관심하면서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라고 목이 터져라 응원만 하고 있으며, 이것만이 진정한 애국인 듯 한 착각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즉, 풍족한 데에서 얼마를 헌금한 부자들과는 달리, 궁핍하기에 얼마 되지 않지만 가진 것을 모두 다 넣은 과부를 칭찬하시는 것이지요. 사실 주님께서 돈의 액수에 연연하실까요? 그보다는 자기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봉헌할 수 있는 그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그 중요한 것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과연 어떤가요? 정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처럼 중요한 것에 모든 관심을 갖고 있나요? 그보다는 각종 시급한 문제들이 우리들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은 다 무시한 채 부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화려한 월드컵 응원에만 온갖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축구 응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응원을 하더라도 중요한 현안들은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더욱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이 모습이 가장 중요한 것을 행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빠다킹신부
향기가 있는 꽃, 향기가 없는 꽃
-이봉하수사-
지난 2005년 가을, 80대 할머니 한 분이 갖은 고생을 하며 평생 동안 모은 큰 돈을
어느 대학에 기부하였다는 훈훈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할머니뿐 아니라
세상에는 평생 법 없이도 살 만큼 선하게 살면서 모은 전 재산을 금액과 상관없이
사회에 환원하는 아름다운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단지 본인의 희망에 따라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할 뿐입니다.
이분들은 하나같이 돈이 많은 가운데서 얼마를 사회에 기부한 것이 아닙니다.
전 재산 아니 생명을 다 내놓았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놓은 것입니다.
사회 안에 익명의 독지가들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가 그 사회의 건강함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는 기부 문화가 미흡한 가운데
날이 갈수록 빈부의 격차는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신앙생활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라는 이야기가 있으니 말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려다보면 모든 것이 욕심이고/ 내려다보면 모든 게 허공인데/ 나는 오늘
어디를 보고 걷고 있는가?’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박경수 신부-
◆군종후원회에서 일하면서 기특한 젊은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군입대 전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청년이 많다는 사실은 많은 신자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청년이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으며 주일에는 군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고, 그동안 하느님과 멀어졌던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며 고해성사를 통해 새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자대 배치를 받고 좀더 나은 환경에 있게 되면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일부 흐트러지기도 하지만 많은 신자 병사들이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부대에 발이 묶여 있는 청년들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주어진 시간이 전부일 때가 많습니다. 같은 군생활이지만 주 2회 있는 종교행사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병사들이 있는 반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신자 청년들이 레지오 마리애·사도회·성가대·성경모임·전례단·주일학교 봉사 등 신앙생활을 기쁘게 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주기에 충분합니다.
모두에게 같은 시간이 주어졌지만 한 주에 한 번뿐인 주일미사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거나, 미사에만 참례하고 도망치듯 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신앙생활 여건이 좋지 않아도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함께 노래하는 시간을 감사하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궁핍한 가운데 가진 것을 다 바친 과부처럼 주어진 짧은 시간에 자발적으로 모여서 하느님을 찾고 함께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특히 이들에게서는 군기사고의 위험한 그늘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니 군에서는 더욱 기뻐하는 일이지요. 이들에게 군생활은 젊은 시절의 잃어버린 아까운 시간이 아니고 진정한 은총의 시간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들 청년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저 청년들이 미사를 봉헌하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봉헌하였다. 너희는 남는 시간을 쪼개어 미사를 봉헌했지만, 저 청년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그 시간을 모두 나와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과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의 모습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신앙생활과 가난한 과부의 신앙생활을 구분짖는 유일한 기준은
바로 믿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로 구분됩니다.
율법학자들의 신앙 생활속에서
그 믿음의 중심은 철저히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합니다.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의 말씀도, 하느님의 뜻도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해 이용됩니다.
이들에게 하느님과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인사 받고, 회당이나 잔치에서 윗자리,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을 챙기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결국 이들에게 신앙 생활은 자기 자신을 위한 하느님과의 거래가 되어 버립니다.
복음에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이들에게 있어서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 역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투자의 의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한 단죄를 받을 것이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의 신앙 생활속에는
그 믿음의 중심이 철저히 하느님께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 사실은 과부가 보여주는 봉헌 하나만으로도 넉넉히 알수 있습니다.
과부가 보여준 봉헌은 율사들이 보여준 모습과는 정반대로
그 모든 것보다 우선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진 봉헌이었습니다.
과부의 봉헌속에는 어떠한 계산도,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능력껏 아낌없이 바치는 모습,
주님을 찬양하며 내 가장 소중한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
아름다운 봉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러한 과부의 봉헌을 극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우리들의 신앙 생활속에는
율법학자의 모습도, 가난한 과부의 모습도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주님께 받은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주님을 찬양하며
아무런 조건없이 오로지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내 신앙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도 있지만
또 때로는 내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주님과 거래를 하며 내 뜻에 주님을 맞추려는 마음으로
철저히 나 자신을 신앙의 중심으로 두고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번 한번만 해주시면 제가 이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기도해 드릴테니 이번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며 하느님과 흥정을 벌이고
“내가 이렇게 하느님께 정성을 들였는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러 실수가 있느냐“ 원망하며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실 자체에 회의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두가지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과연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할 믿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를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가난한 과부처럼
하느님께 인정받는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사람의 큰 신앙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2티모 4,1-8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십시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의로움의 화관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복 음 : 마르 12,38―44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도 돈을 더 많이 넣었다.)
여러분들께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대답해보세요. 우리나라에서는 기초 생활 수급자들에게 구청을 통해서 얼마씩의 생계비를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당에서도 생활비나 기타 장학금 등의 명목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지요. 이렇게 여러 종교 단체나 사회복지 시설에서 끊임없이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도처에 가난한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들 중에는 신자들도 많지요.
그런데 어려운 처지의 신자들 중에서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한테 도움을 받는 처지에 제가 무슨 교무금을 내겠습니까??
도움을 받고 있으니 안 내는 것이 남을 돕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것이 오늘 저의 질문입니다. 형편이 어려워 주위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도 교무금을 내야 할까요? 안 내는 것이 타당할까요?
교무금은 당연히 내야 합니다. 교무금 납부는 모든 신자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자에게는 신자로서의 6대 의무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축일과 대축일 미사, 즉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 성모승천 대축일, 예수 성탄 대축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참례할 의무가 있지요. 둘째, 정해진 날에 금육과 단식을 지켜야 합니다. 단식은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지켜야 하고, 금육은 사순절 동안의 재의 수요일과 매주 금요일에 지켜야 하지요. 셋째,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고백성사를 받아야 하고, 넷째,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부활 때는 반드시 영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다섯째, 신자는 교회 유지와 사업을 위하여 가정 단위로 교무금을 내고 헌금을 각자 봉헌해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째로 혼인성사에 관한 혼인법을 지켜야 하지요. 태어난 자녀에게 세례를 주고 교리를 가르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신자라면 당연히 교무금을 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지요. 구약성경에서 사렙타 마을의 한 과부는 심한 기근이 들어 마지막 먹을 것만을 남겨 둔 상태에서 하느님의 사람에게 음식을 먼저 대접했고, 그 이유로 하느님의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기근이 끝날 때까지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지요.
?콩 반쪽이라도 나누어 먹는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나눔은 면제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헌금궤 맞은 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넣은 렙톤 두 닢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12,43-44)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렙톤 두 닢은 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의 1/72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돈이었습니다. 하루 노동자의 일당이 5만원이라면 약 700원에 해당되는 액수이지요. 그러나 과부는 그 돈을 정성을 다해 봉헌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그 가난한 과부의 정성된 마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늘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정성을 다해 봉헌하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고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불우한 이웃에게 더욱 정성이 담긴 봉헌과 나눔이 이루어져야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동전 두 닢2004-06-05
-강영구신부-
사랑하는 예수님, 새 날이 밝았습니다.
찬란한 태양은 눈부신 햇살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하루를 엽니다.
성당 앞뜰의 느티나무는 무성한 가지들을 하늘 향해 펼치며 푸르름과 싱싱함으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장미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으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갖가지 새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눈부신 햇살과 싱싱하고 푸른 잎새,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과 예쁜 새소리 안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보석같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마음들이 담겨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들로 찬란한 하루가 시작됩니다.
가난한 과부는 동전 두 닢 속에 그녀의 정성과 사랑과 감사의 정을 담습니다.
동전 두 닢 속에 눈물과 한(恨), 슬픔과 고통을 담습니다.
동전 두 닢 속에 기쁨과 근심, 걱정과 염려, 번민과 고뇌를 담습니다.
과부는 동전 두 닢 속에 그녀의 모든 것을 담아서 하느님께 바칩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전 두 닢이 아니라 그녀 자신을 받습니다.
허영과 사치, 허세와 허위, 자기과시와 탐욕이 묻어나는 부자들의 뭉치 돈에 비해
과부의 동전 두 닢은 보석보다 찬란하고 꽃보다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예수님, 저도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이 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동전 두 닢이 되고 싶습니다.(一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