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때 파주 갈곡리란 곳으로 가서 살던 이야기를 지난번에 잠시 하다 끝을 냈었다
우리 동네는 천주교 신자만 사는 동네고 성탄절을 설 명정보다 더 기다리는 동네다
부활절에는 미사 드리고나 서 나이별로 나누어 밥 해 먹으러 동네 산 골짜기나 냇가에 가서 서툰 밥을 하던지 아니면 미군 부대에서 밀가루 배급 나온 것으로 소다를 넣어서 빵을 쪄 먹기도 하며 동네 아이들이 놀았다
성당 마당에서 비사치기 잣치기 강건너 뛰기 하면서 항시 동네가 시끄럽게 재잘거리며 놀았다
삔 먹기를 하면 내가 원에 잘 들어가게 생겼으면 못먹게 하려고 옆에서 와 하고 소리를 지르고 아우성이다 그러면 정신이 빠져서 삔을 손가락으로 튕길때 제대로 안되어 원안에 많이 못넣어서 속상해서 씩씩거린다
연극 한다고 애들 모아놓고 연극도 하고 고무줄 놀이 하면 남자 애들이 와서 끊어 버리면 쫓아가서 싸우기도 하고
학교 갈때 어느날 흑인과 미국 사람이 탱크를 몰고 굉음을 내며 지나가면 생전 처음 보는 외국 사람이라 너무 무서워서 행길옆에 고랑으로 내려가서 엎드려 얼굴을 땅에 묻고 무서워서 학교도 못갔다
오전 반은 괜찮은데 오후반에 혼자 십리를 걸어가다 탱크를 만나면 지옥이다 왜 그리 무서운지
그러다 한참 살디 보니 이력이 나서 동네 어귀 넓은 벌판에 미군 부대가 훈련 오면 애들하고 가서 헤이 찹찹 하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처음에는 초코렛이나 과자 아니면 통조림을 주다 자꾸 가니까 귀찮으니까 공포를 쏴서 너무 놀라 뛰어오기도 했다
그 때 놀란 것이 꿈에도 그래서 자다가도 놀라서 깬적도 있다
학교 가다 미군 차가 지나기면 헤이 찹찹 하면 통조림을 던지고 간다
그 동네 애들은 그게 놀이다 어느때는 구호 물품이 들어와서 번호를 매겨서 뽑게 하는데 그 옛날에 브레지어가 생소하고 몰라서 이게 뭐야 하고 들고 야단 일 때도 있었고 머리에다 써보기도 하고 어느사람은 아니야 가슴에다 하는 거야 하고 어느 집은 빨간 센들 굽이 높은것에다 빨간 털이 달린 것이 뽑혀서 누가 그것을 신을까 하며 웃다 어느애가 그것은 양공주가 신는거야 하고 웃기도 했다
그 동네에서 멀지 않은 법원리에 양공주가 많이 있었다 그것이 다 전쟁 뒤에
미군이 주둔 해서 생긴 일이다
정말 신앙밖에 모르는 순수하고 순진한 시골 사람들에 동네였다
사순 절 때는 저녁 8시만 되면 종이 울린다
그 시간에는 동네 사람이 다 모여 성당에서 40일동안 기도 한다
삼종을 치면 일 하다가도 기도 한다 하루 세번 새벽 6시 낮 12시 저녁 6시닺
우리동네 애향회도 성직자들이 주측이 되어 하게 된다
나와 동창인 애 삼촌이
서울교구에서 대주교가 되어 광주교구 교구장으로 가시어 애향회 때 마다
광주교구 부주교님과 그외 신부님을 대등하고 오신다
우리 동네 오빠들이 신부님이 세분이나 되었다
수녀님도 여럿이다
이러니 자연 성직자들이 애향회에 많이 참석하게 된다
현재 광주 교구장이신 김희중 대주교님은 그때 부주교님이라 우리 고향주교님이 고향에 오실때 꼭 오신다
우리가 광주로 가기도 했다
또 어느때는 군인들이 특무대라고 하며 간첩 잡는다고 동네 강당에 와서 한달간 있을 때도 있는데 어느 군인이 20원을 주면서 우리 친구 언니에게 편지를 갖다 주라고 해서 심부름도 했다
어느날 밤에 조명탄이 터지면서 밤새 대낮처럼 환해지고 번쩍이며 야단 이더니 아침에 보니 강당 마당에 간첩이 다섯명이나 사살되어 가마니로 덮혀있다
그뒤로 무서워서 강당 근처도 못갔다
성탄절이 되면 미군 부대에서 한집에 집 식구 대로 선물을 주는데 밤새 미사드리고 새벽에 와서 잠 잘때 동네 청년이 갖다 놓고는 싼타 클로스할아버지가 선물 준것이란다 그것을 그대로 믿었었다
장난감 과자 사탕 먹을게 큰 양말로 한가득이다
정말 재미 있었다
우유도 천미리 짜리 팩에 들은것도 배급해 주고 옷도 사철 보내 주었다
아마 전쟁뒤에 미국에서 보낸것같다
우리 성당이 미군 부대에 신부님과 자매 결연 했으니
그 신부님이 본국에 연결되어 보낸것 같다
아무튼 어릴때 그 동네서의 추억이 제일 마음과 머리에 남고 즐거웠던 추억으로 남는다
요즘 울 자유방 분위기가 좀 그래서 순수 했던 어린 시절을 떠 올리며 두서 없이 적어 봤다
2004년도 애향회때
고향 신부님과 광주 교구 신부님 김희중 대주교님현재 분과 함께
우리 액자에서 찍었습니다
정면에 날씬한분이 고향 에서 나신 대주교님 으로 광주교구 대주교님
몇일전에 애향회지를 보내왔네요
그동안 회장 했던 사람이 너무 힘들게 했는데 강능으로 이사를 가고 새 회장이 우리 후배가 되었다고
먼저 회장은 16년을 했는데 남은게 없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첫댓글 산 나리님
어릴적 추억이 듬뿍 담긴 재미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당에 다니셨군요.
그래서 신앙이 깊으신가봅니다.
저는 어릴적엔 교회 다니다가
결혼해서는 시댁이 불교라서
못가고 있다가
서초성당 다니는 친구가
화요일마다 퇴근하면 저를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교리 공부 하다가
지금은 쉬고 있는 상태 입니다.
다시 꼭 나가시기를요.
지성과 영적의 페이지님. ♥
네 저는 어릴때 신앙을 받아들여서 한지에 먹물 들듯이 그대로 다
믿고 아무 이해 타산 없이 다 믿었나봅니다
어릴때의 신앙이 순수한것 같습니다
이 사태가 지나면 교리를 다시 할것입니다
그때 다시 해보세요
하느님 밖에 없더군요
힘들고 어려울 때도 그분께 의탁하니 든든하구요
@심미안 네~
제 영혼이 갈급함을 부쩍 느낍니다.
@페이지 할렐루야!!!!♥♥♥♥♥
청량감이 도는 향긋하고 정다운 얘기네요.
성당촌, 미군, 헤이 짭짭!!!
자유방에 불밝혀 주셔서 감사해요!
심미안님 요즘 생각 못한 야릇한 것에 힘들어 하시니 안타깝네요
힘내시고 다시 밝은 글로 만나요
글구 헤이 찹찹은 그곳에서 생존의 대화였어요 ㅎㅎ
@산 나리 선배님 제마음을헤아려 주셔서 늘 고맙습니다. ♥♥♥♥♥
카톨릭 신앙 마을에서
사셨으니 어릴때 부터
몸에 베인 신앙이네요
넘 재미난 유년기 였네요
네 일일이 다 쓰지 못해서 그렇지요 너무 재미 있는 일 많았어요
@산 나리 어린시절 남다른 신앙의 분위기에서 신앙공동체 안에서 넘 부럽습니다
저도 이사가면 서서히 성당에 다시 나갈 준비를 할까 합니다
@라아라 꼭 그러세요
우리는 하느님밖에 없어요
그렇군요.
할 말은 많지만 생략하겠습니다.
홑샘님도 천주고 신자 분 이신줄 알고 있는데요
공감 가는데가 있으시겠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지금 내일 분 성경 책 읽고 있는 중입니다
늘평화님 미사보 쓰신 모습이 천사 같네요
너무 아름더워요
오래 신앙생활 했다고 더 잘 알지 않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예수님 말씀이 있잔아요
산 나리님.
어릴 때부터 천주교 신자셨군요‥
그래서 글케 믿음이 좋으신가 봐요‥
그당시 울동네도 구호품이 집집마다 한보따리씩 온적 있어요‥
주로 옷들인데 엄청 큰옷이라
엄마가 다 뜯어서 재봉틀로 다시 만들어 주셨는데‥ㅎ
산 나리님 덕분에 그 시절로 추억여행 했습니다‥
굿 밤요~^^
그렇다고 그리 신앙이 좋은건 아닙니다
보통 사람 처럼 하는 것뿐입니다
맞아요 미국 사람들이 입던 옷이니 다 크지요
우리때도 그랬어요
그때 청바지도 나왔어요
그 청바지는 젊은 사람이 입었지요 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때 정말 의심도 안했어요
싼타 할아버지가 진짜 오신줄만 알았지요
그 선물 받을 때가 참 좋았지요
그시절이 그립습니다
장문의
어릴적 여러기억들 ~
결국은
우리모두의 기억들 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ㅎ
수고하셨어요~
일찍부터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어릴때는 아름다운 추억이 참 많았지요
자연도 순수하구요
남은 더위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