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의 옛이름이 북평이라고 중국에서는 주장한다.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당태종이 연개소문에 쫒겨 겨우 목숨을 부지한 탑이 어디있었는가?
요동의 전쟁 문제를 양만춘·추정국 두 사람에게 맡긴 연개소문은 정예병 3만을 거느리고 적봉진 즉 지금의 열하 부근을 향해 계속 남진했다. 그는 만리장성을 넘어 상곡(上谷) 즉 지금의 하간(河間)5) 지역을 기습했다. 어양에 머물러 있던 당나라 태자 이치(李治, 훗날의 당고종, 고구려를 멸망시킨 주역_옮긴이)는 크게 놀라 긴급을 알리는 봉화를 올렸다. 봉화는 하룻밤 사이에 안시성까지 전달됐다.
당태종은 임유관 아래쪽에서 변란이 생겼음을 알고 곧바로 회군을 준비했다. 이때 오골성주 추정국과 안시성주 양만춘은 봉화를 보고 연개소문이 목적지에 도달한 것과 당태종이 조만간 도망할 것을 예견했다. 이에 추정국은 전군을 거느리고 안시성 동남쪽의 협곡으로 몰래 진군하여 기습을 단행하고, 양만춘은 성문을 열고 공격을 개시했다. 당나라 진영은 대혼란에 빠져 사람과 말이 서로 짓밟고 달아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태종은 헌우락에 이르러 말발굽이 진흙 벌판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고, 왼쪽 눈마저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생포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당나라 용장 설인귀가 달려와서 당태종을 구출하고 말을 갈아 태웠다. 전군(前軍) 선봉장인 유홍기는 추격자들을 가로막고 혈전을 벌였다. 시간이 꽤 오래 흐른 뒤에야 당태종은 탈출에 성공했다. 《성경통지(盛京通志)》 〈해성고적고(海城古蹟考)〉에 기록된 ‘당태종함마처(唐太宗陷馬處)’(당태종의 말이 빠진 곳_옮긴이)가 바로 그곳이다. 지금까지도 현지의 식자들 사이에서는, 당태종의 말이 진흙 벌판에 빠지고 화살에 눈알을 잃고 생포될 뻔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양만춘 등은 당태종을 쫓아 요하에 이르러 수많은 당나라 장수들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요택에 이르러 보니 당태종이 말들을 진흙 벌판에 눕혀 놓고 그것을 교량으로 삼아 건너고 있었다. 음력 10월에 임유관에서 남쪽의 연개소문은 당나라 군대의 퇴로를 끊고 북쪽의 양만춘은 당나라 군대를 추격했다. 당태종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때마침 눈바람이 크게 불어 천지가 아득해지고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양쪽 군대의 병사와 말들이 엎어지고 자빠져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당태종은 이 틈을 타서 도망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상곡의 횃불과 당태종의 패주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산동성 즉묵시 마산(馬山)에서는 정관17년(643년)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마산대전(馬山大戰)이 있었던 사실이 청(淸)대의 초영제본 '마산지(馬山志)'와 '즉묵향토지(即墨鄕土志)'에 실려 있으며 이 전투에서 당나라 장수 김걸(金杰)이 사망하고 당태종이 패하여 도망갔다고 되어 있으며 마산에는 지금도 연개소문이 주둔하던 대왕구라는 골짜기와 김걸 장군의 사당인 대왕묘(大王廟)가 남아 있다.
산동성 봉래에서는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전투에서 유래된 지명과 유적지가 남아 있는데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했던 고성과 당태종 형의 사당인 대왕묘, 식수가 모자라 판 우물인 일검천, 당태종이 패하고 숨은 왕구촌, 당태종의 가마가 빠진 락가하, 투구와 갑옷을 말린 쇄갑하 등이 남아 있으며 이 전투에서 당태종의 형이 전사하였다고 한다.
강소성 염성시 건호현 몽룡탑
당태종이 혼자 전장을 둘러보다가 발각되어서 도망치다가 시궁창에 구르고
우물 밑에 숨었는데 마침 거미가 거미줄을 우물 위에 줄쳐 주어서 연개소문이
거미줄이 무사하니 인간이 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가버렸다. 그래서 거기에 거미를 위해 탑을 만들었다. 몽룡탑이다.
강소성 흥화시 재남구 호국사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겨서 강소성 흥화시 고묘의 보살상 뒤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하고 훗날 호국사를 만들었다.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기는데 설인귀가 강소성 숙천시 장군동에 군사를 숨겼다...
산동성과 강소성에는 연개소문과 당태종,설인귀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몽롱탑이란 유적도 있습니다 연개소문과 당태종에 관한 전설이 있다는 것은 연개소문과 고구려군이 당나라 정벌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연개소문의 전설이 전해지는 지역의 주민들도 그 전설이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합니다 발해무왕때도 산동성의 등주지역을 수군을 동원해서 공격했고
당나라와 마도산 전투도 했습니다 고구려보다도 군사력이 약한 발해도 당나라을 공격했는데 수십만대군을 보유한 고구려군과 야심만만한 연개소문이 가만이 있는다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연개소문이 당나라을 공격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출처] 연개소문은 고당전쟁 승리후 만리장성을 넘어서 당나라을 공격했다|작성자 menghen
1. 중국 베이징의 옛 이름[편집]
한자로는 北平이며 베이핑이라고 읽었다.
2. 중국의 옛 군[편집]
원래는 우북평군인데 삼국 시대 위나라에서 우 자를 뗐다. 베이징 근처지만 베이징과는 거리가 있다.
대륙의 종심 ‘산서성 영락진’ 대고구려 수도 흔적
산서성 남단 황하변 영락진(永樂鎭)에 영락궁(永樂宮)이라는 행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터가 수몰됐고 건축물은 예성현(芮城縣)으로 옮겨졌다. 역사상 영락이라는 연호를 쓴 황제는 고구리 광개토호태왕과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뿐이다. 중국은 영락궁이 명나라 영락제와 관련 있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실은 고구리 영락제 즉 광개토태왕과 연관된 행궁으로 밝혀졌다.
출처: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04134 스카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