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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전기철도를 아시나요
- 금강산 관광개발 이야기
일제강점시 시절의 금강산 관광은 초기에는 내금강 관광이 거점이었으며, 금강산 전기철도 개통 후 금강산 관광의 관문이기도
한 장안사(長安寺)가 핵심이된다. 옛날에는 장안사(長安寺)나 표훈사(表訓寺) 등의 사찰이 있을 뿐이었지만,금강산관광 개발이
진행되는 가운데 장안사(長安寺)는 여관·요리집·기념품 가게가 늘어서게 되었다.
먼저 장안사(長安寺)이란 외금강의 관문인 온정리(温井里)와 달리 정식 지명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면 '장안사'란 어떤 이름인가하면, 장안사에 있는 금강산 사대 사찰 중 하나인 장안사(長安寺) 이름 그 자체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장안사(長安寺)라고하면 금강산의 관문(특히 내금강)인 이곳은 원래 장안사(長安寺)가 있을뿐 특별히 민가와
마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덧붙여서 장안사(長安寺)의 본래 지명은 장연리(長淵里)이라고 한다.
그러나 장안사(長安寺)는 일제강점기 시절, 금강산의 관문으로서 번영 해 갔고, 각종 관광 안내 등에도 "長安寺"로 표기된 "長安寺 마을"이라고도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長安寺"라는 이야기를 사용키로 한다.
조선시대 금강산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단발령이라는 험한 고개를 넘어 내금강 측에서 금강산에 들어간 것 같다.
내금강쪽에서 금강산에 들어가면 먼저 99 % 확실히 먼저 장안사(長安寺)에 갈 수 있다. 어쨌든 장안사는 내금강의 입구에 있고, 내금강의 안쪽에있는 경승지에 가기 위해서는 자연히 장안사(長安寺) 앞을 지나는 것 같은 지형으로 되어 있다.
19 세기 말에 금강산을 찾은 이사벨라 버드 여사도 당연히 장안사에서 금강산에 발을 디뎠다.
금강산 관광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장안사 주변에 관광 시설이 들어서는 것은 자연적인 추세 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장안사(長安寺)의 관광개발은 외금강의 온정리에 비해 상당히 늦었다.
이것은 온정리는 해로(海路)를 통해 비교적 쉽사리 들어갈 수 있었는 반면, 한반도의 간선 철도·도로에서 장안사까지 가는 길의
어려움은 기본적으로 금강산 전기철도의 개통때까지 해소 될 수 없었고, 금강산 관광객이 장안사(長安寺)까지 도착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 그 원인이다. 평강에서 내금강으로 가는 도로사정이 매우 위험하였던 것 같다 "이런 도로를 운전자는 수명이
줄어든다" 이 길로 여행한 일본이 쓴 여행기가 이를 잘 나타내 주고있다.
금강산관광버스
1918 년 7월, 당시 한반도의 철도 전체의 경영을 지휘하고 있었던 남만주 철도는 장안사(長安寺) 건물 하나, 극락전을 개조 해
호텔로 사용했다. 이 때 처음 장안서(長安寺) 라고 말하는 장소에 전문 숙박 시설이 생긴 것이다. 사찰을 개조 한 호텔이라고해도, 식탁·침구 등 서양식으로 통일되어 있고, 식사도 본격적인 양식이 나온 것이다. 단, 목조 건물에 서양식 욕실이있는 등, 역시 꽤
색다른 호텔이었다. 같은 해, 경원선의 평강역에서 장안사까지 정기적 자동차 편의 운행도 시작 된 것 같다.
덧붙여서 1923 년 장안사 호텔에 숙박 한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촬영 여행팀은 장안사 주변에서 붙잡은 곰 요리 (아마 커틀릿(cutlet)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가 저녁 식탁에 올라 있었다고한다. 또한 1923 년 당시 장안사 호텔 소유 방갈로 (홀리데이)가
오픈하고 있어,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촬영 여행팀의 일부는 방갈로에 숙박 한 것 같다
1922년 남만주 철도가 제작 한 금강산 탐승 안내는 "장안사에는 장안사 호텔 이외에는 조선식 여관이 2 ~ 3 개있을뿐 일본 여관은 없다"라고 쓰여져 있다. 그러나 1924년에 금강산을 등반 한 일본인들에 의하면 "내금강여관"이라는 일본 여관에 묵고 있었으며, 1922 ~ 24년 사이에 내금강 첫 일본 여관인 "금강여관 '이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23 년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촬영 여행팀의
기록에도 내금강여관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금강여관은 1923 ~ 24 년 사이에 생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같은 무렵, 외금강의 온정리에는 3 곳의 일본 여관이 영업을 개시하였던 것으로 볼 때, 장안사 관광개발은 온정리에 비해 늦었다 것은 분명하다.
만이천봉조선금강산 (만철경성철도국 소장판·1924년 간행)에서 장안사 유일의 일본 여관. 당시 영업 개시 얼마되지 않은
내금강여관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의 말에 의하면, 내금강여관은 5방 밖에없는 아담한 여관으로, 게다가 신축중인 장안사
호텔 건축 노동자 등이 묵고있어 만실 상태였던 것 같다. 숙박한 일본사람들은 꽤 좋은 대우를
받으며, 만족 한 것 같다. 장안사 건물을 빌려 사업을하고 있었던 장안사호텔도 1924년 6월에는 호텔 전용 건물이 거의 완성 되어 영업도 시작하고 있던 것 같으며, 약 6년간 계속 된 장안사 건물을
빌린 영업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 같다. 이 무렵 장안사에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여관이나 소바 가게와 술집 등이 들어서 시작했다고,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촬영여행팀의 기록 등으로 알 수 있다.
대정(大正)말기, 드디어 장안사도 관광 개발의 물결이 밀려 들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금강산 전기철도의 건설이 시작된다. 일본 각지와 조선, 대만 등으로 철도 건설 사업을 해왔 사업가 쿠메타미노스케(久米民之助)가 1918 년에 금강산을 시찰하고, 그 관광 자원으로의 유망성에 주목한다. 더우기 쿠메는 금강산 근교에서 수력발전소을 건설하고 그 전력으로 금강산 기슭까지 전철을 달리게하여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는 당시로서는 참신한 계획을 세우게된다.
1936년 장안사 다리앞의 두 여학생
당시 부자로 알려져 있었던 사업가 쿠메는 당시 일본 재계와 철도 관계의 유력자 등의 동참을 얻은 다음, 1919년 12월에 금강산 전기철도 주식회사를 설립한다. 1921년에 기차를 달리게 하기 위한
발전소와 철도 본체의 건설도 시작되었다. 하지만 진행 도중 에 1차 세계 대전 후 공황과 관동대 지진의 영향으로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하면서도, 금강산 전기철도는 1924년 8월 1일에는 우선 철원(鉄原)에서 금화(金化)까지 영업 개시에 도달한다.
1929년에 쿠메의 가족으로 장안사호텔의 방갈로를 이용한 이즈미세이이치 (泉靖一)에 따르면 관광 개발의 물결이 밀려 들기 시작했다고는 해도, 장안사는 아직도 상점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장안사 호텔과 방갈로를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주로 경제적이나 휴가면에서도 여유있는 서양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금강산을 여행하는 한국인과 일본인은 거의 전부 단체 손님이었다고한다.
금강산 전기철도가 운행될 당시의 객차
그후 금강산 전기철도에서 내금강까지 연장 공사를 꾸준히 진행시켜 나간다.
1930년 말휘리(末輝里)까지 연장이되어 1931년 7월 1일에는 장안사 근처 (약 2 ㎞)의 내금강 역
까지 개통한다. 교통이 편리하게된 장안사는 이즈미(泉靖一)에 따르면 " 두드리면 열린다"는 식
으로, 금강산 관광객도 많이 찾아와 번창하게 된다.
금강산전기철도가 아직 개업하지 않은 10년전 (1921년경)에는 장안사에는 관광 시설이 거의
없었는데, 금강산 전기철도 전 노선 개통 직후인 1931년 7월 금강산을 여행 한 일본인 키쿠치
(菊池謙譲)는 장안사를 "여관 있고, 요정 있고, 점포도, 사진관 있습니다 ..."라고 적고 있어,
10년 동안 급속하게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즈미(泉靖一)의 설명을 참고로하면, 1930.31년 사이에 급속하게 개방된 것으로 보인다.
온천장으로 알려진 온정리 대하여 장안사는 여름에도 더위를 모르는 피서지로 알려져, 장안사
호텔 (후 내금강 산장)의 방갈로는 여름철에 장기 체류하는 사람도 있었다.
외금강과 함께 내금강 쪽도 관광객이 급증했다. "금강산전기철도 이십년사"에 의하면, 금강산전기철도가 영업을 개시 한 1924 년에는 184명에 불과했던 금강산 관광객은 내금강까지 개통 된 1931년에는 15219 명에 급증했다. 그리고 더욱 1938년에는 24892 명까지 증가한다. 금강산전기철도
개통 후부터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의 1940 년경에 걸쳐 장안사는 가장 번성했던 시대를
맞이했다.
금강산전기철도의 종점인 내금강역
이처럼 금강산관광이 활성화를 가져 오게한 쿠메타노스케(久米民之助)는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자.
쿠메타노스케(久米民之助) 현재의 군마현(群馬縣) 누마타시(沼田市))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누마타(沼田) 번사의 구메(久米) 마사아키(正章)이었지만, 어릴 때에 부모와 이복여동생을 잇따라서 잃어버리는등 가정 환경에는 풍족하지 않았다.
1876년6월, 쿠메(久米)는 상경해서 우선 케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 배우지만, 1878년에는 코우베(工部)대학교 (후의 도쿄대학(東京大學) 공학부)에 전학을 했다. 1884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쿠메(久米)는, 최초 豪商高島嘉右衛門의 토목공사를 도왔다고 하지만, 머지않아 미야우치(宮內)성에 입성(入省)하고, 궁성조영 사무국용무계가 되어서 궁성 이중다리의 설계, 조영에 종사했다. 1886년에는 코우베(工部)대학교의 조교수도 겸했지만, 실업에의 관심이 높았던 구메(久米)는 1886년
중에 미야우치(宮內)성과 코우베(工部)대학교의 조교수를 퇴직해서 오쿠라(大倉) 기하치로(喜八郎)가 경영하는 오쿠라(大倉) 조합에 입사, 1887년부터 1889년에 걸쳐서 구미 제국을 시찰해서
견문을 널리 퍼지게 했다.
귀국한 쿠메(久米)는 1890년, 쿠메(久米) 공업사무소를 설립, 그 후 다이쇼(大正)의 전반에 걸쳐서 일본, 대만, 한반도의 철도공사를 많이 손수 다루었다. 쿠메(久米)가 참가한 철도공사의 일부를
소개하면, 산요본선(山陽本線), 산인본선(山陰本線), 대만 서부간선, 한반도의 경의선(京義線),
호남선(湖南線)등이 있다. 철도공사이외에도 요요기(代代木) 상회를 일으키고, 마닐라에서 기사, 직공을 초대해서 담배, 여송연의 제조 판매를 손수 다루는 등 실업가로서 폭넓은 활약을 했다.
쿠메(久米)의 사업의 대부분은 성공을 거두고, 메이지(明治) 후반부터 다이쇼(大正)에 걸쳐서
쿠메(久米)가 살았던 요요기우에하라(代代木上原)의 집은 부지 그 규모가 4만평으로, 쿠메(久米)의 취미인 능력무대를 주문한 호화스러운 집은 요요기(代代木) 고텐(御殿)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1926년에 세워진 금강산전기철도 교량(강원 철원군 김화읍 도창리 산81-2)
쿠메(久米)는 1898년에 행하여진 제5회 중의원의원 총선거에 당선, 그 후 1903년의 제8회 중의원의원 총선거까지 연속 4회 당선을 행했다. 그러나 실업에의 관심이 제일이었던 쿠메(久米)에 있어서 의원생활에의 집착은 얇았던 중, 1904년의 제9회 중의원선거에 즈음해서 라이벌의 입후보가
결정되자마자 입후보를 단념, 그 후 다이쇼(大正) 시대에도 그 고장에서 쿠메(久米)의 옹립이 의도되었지만, 실현하지 않았다. 쿠메(久米)의 정치가생활은 5년여라고 하는 단기간으로 끝났다
쿠메 타미노스케(久米民之助)
1918년, 쿠메(久米)는 한반도(朝鮮半島)의 금강산(金剛山)과 그 주변을 시찰했다. 당시의 금강산(金剛山)은 교통편이 지극히 나쁘고, 경승지이면서 방문하는 사람도 지극히 적었다.
쿠메(久米)는 한반도의 동쪽이 급경사를 이루고 서쪽이 완만한 지형에 착안했다.
서쪽에 흐르는 물을 터널에서 동쪽에 이끌고, 수력 발전을 해서 그 전력으로 금강산(金剛山)까지 전기철도를 달리게 할 수 없을가 라고 생각한 것이다. 곧 전문가에게 위탁해서 사업의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고, 유망한 사업이다 라는 결과가 나오자마자 회사설립에 분주, 1919년에 금강산(金剛山) 전기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스스로 사장에게 취임했다. 금강산(金剛山) 전기철도는 회사
설립 직후, 제1차세계대전후의 불황의 영향을 정면으로 평판, 그 위에 철도의 영업 시작 직전에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고, 전철용의 전동발전기가 지진 재해로 발생한 화재로 소실해버리는등
경영에 고생했다. 쿠메(久米)는 요요기(代代木) 고텐(御殿)을 매각하고, 그 자금을 금강산(金剛山) 전기철도의 운전 자금으로 충당하는등 경영에 힘썼다.
그 결과 1931년7월1일, 금강산(金剛山) 전기철도는 완성되지만, 쿠메(久米)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병사했다.
쿠메 타미노스케(久米)의 만년은, 금강산(金剛山)의 관광 개발에 실업가인생의 최후의 정열을
쏟고 있었다. 예를 들면 금강산(金剛山)의 등산 코스 정비나, 금강산(金剛山) 협회라고 하는
금강산(金剛山)의 보호와 선전을 하는 기관의 창설에 힘썼다.
금강산최고봉인 비로봉에 있는 쿠메산장
그 공적이 인정을 받아, 쿠메(久米)의 유골의 일부는 금강산(金剛山)의 기슭에 건립된 쿠메(久米)의 표창비석 밑에 분골되었고, 금강산(金剛山)의 최고봉인, 비로봉(毘盧峰) 바로 아래에 세워진
산장은 구메(久米)의 이름을 따서 구메(久米) 산장이라고 명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남북분단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금강산(金剛山) 전기철도는 폐선이 되고,
금강산(金剛山)의 관광 개발에 쿠메(久米)가 쏟아부은 노력도 세월따라 잊혀져버린다.
장안사 전경
장안사(長安寺)의 전성기 인 1934 년경 장안사(長安寺)에는 다음과 같은 숙박 시설이 있었다.
한국식 여관
유일여관(唯一旅館) 장안여관(長安旅館) 금강산여관(金剛山旅館) 평화여관(平和旅館) 옥천여관(玉泉旅館)
서양식 호텔
長安寺호텔 (5 월 ~ 10 월 오픈. 방갈로 식 3 실과 취사장을 갖춘 별장 5 동 있음)
일본식 여관
내금강여관(内金剛旅館)봉래관(蓬莱館)시라누이여관(不知火旅館) (금강산전기철도가 건설, 경성의 여관, 시라누이 여관에
경영을 위탁하고 있던 여관. 내금강 역에 있었다)
1936년경의 내금강산장(内金剛山荘)
1941 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 금강산 관광에 갑자기 먹 구름이 자욱하게 된다. 물자 부족과 수송 상황의 긴박화, 더욱
경제 통제 강화 등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 금강산 관광객은 격감 해진다. 장안사를 창구로 한 금강산 관광을 이끌어온 금강산전기철도도 1942년 1월 1일에는 경성전기에 흡수 합병되어 1944년 10월 1일에는 창도 (昌道) - 내금강 사이의 49 킬로미터 운행이
중단되고 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 후, 북한 땅이 된 장안사는 현재 북한지도에 따르면, 금강산전기철도의 내금강역이 있던 주변에
"내강리(内剛里)"라는 지명의 마을이 있는 것과 내금강 호텔이 있었던 장소 부근에 "내금강휴양소(内金剛休養所)"라는 이름의
건물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안사는 현재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안사는 금강산의 4대 사찰의 하나로 내금강 만폭동의 유명한
명승지였으며, 내강리 금강산 장경봉 아래 비홍교(만천다리) 건너편에 그 터가 자리잡고 있다
장안사의 가람배치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과 사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의 두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각 중심법당은 중층 구조로 되어 있고 각 영역 입구에 누각 건물 하나씩 갖추고 있었다. 6전(殿)·7각(閣)·2루(樓)·2문(門) 외에
10여 채의 부속건물이 있었는데, 6·25전쟁 때 불에 타버리고 축대·비석 등만 남아 있다
이번에 올린 이글은 일본 아이치현 이누야마시에 살고있는 지인이 보내 온 자료를 정리하여 조블 가족님들께 소개하는 것이다.
금강산유람은 구한말까지도 특정한 사람들이 갈 수 있는 동양최고의 경승지였으나 교통 불편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당시 기차를 타고 금강산에 갈 수 있도록 철도를 가설한 쿠메 타노스케는 선경지명이 있었던 인물인 것 같다.
그로부터 반세기를 지나는 숱한 세월이 흐른뒤에야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금강산관광이 북한의 일방적인 폐쇄로 단절되어
서운함이 가득하기만하다. 하루속히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그날이 하루라도 빨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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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혹시 이것 어디서 자료 구할 수 있는지 아시나요?
제가 금강산선이나 당시 관광 상황 에 대해 공부하고싶어서요...
번거롭더라도 자료 출처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ko.m.wikipedia.org/wiki/%EA%B8%88%EA%B0%95%EC%82%B0%EC%84%A0
위의 영어자료를 누르면 자료를 볼수있어요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SBS G1 강원민방입니다. 저희가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아이템을 바탁으로 다큐멘터리 방송을 제작하여 방영하고 싶은데 선생님께 문의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jonghyeok90@naver.com 메일로 답변을 주시면 감사드립니다.
이메일 주소가 없다고나와요
선생님의 다음메일로 내용 보내드렸습니다. jonghyeok90@naver.com , JONGHYEOK90@NAVER.COM 입니다. 답변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