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으로 현대 문화 읽기] 뮤지컬 ‘IMAGO DEI. 하느님의 모상’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네
발행일 : 2015-12-27 [제2975호, 21면]
생명 없는 무채색의 황량한 풍경. 그 돌무더기 골짜기 저 아래 보이는 작은 푸른 점. 숲 같은데, 설마?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데 맞다. 숲이다. 거기 땅 깊은 물에서 생겨난 기적 같은 오아시스. ‘공연 횟수 127회. 연인원 2만7000명’이라는 실적을 가진 IMD 제작 뮤지컬 ‘이마고 데이’가 내년 2월 다시 무대에 오른다.
며칠 전 여행 다큐멘터리에서 본 오아시스를 꼭 닮은 소식이다. “투자와 관심 부족의 한계를 딛고 문화사목의 새 이정표로 우뚝 선… ”이라는 7년 전 초연 때의 어느 기자의 말은 지금도 여전할 것이니 그 세월에 담긴 제작팀의 수고와 인내에 감사와 박수를 보낸다.
IMAGO, 모상. DEI, 하느님. 하느님의 모상. 열한 개의 뮤지컬 넘버를 가진 두 시간짜리 뮤지컬 성극이다. 이야기는 매로 온몸이 걸레처럼 찢긴 죄수 바오로에서부터 시작한다. 예수가 죽은 서기 33년에서 다시 37년이 흐른 때, 여기는 로마의 감옥. ‘당신은 누구냐’는 질문에 “날 때부터 로마시민, 율법 어긴 적 전혀 없네, 흠잡을 데 없는 의로운 사람, 나는 사울이었던 바오로”라 노래하는데 피투성이 스테파노가 끌려 나오며 무대의 시간은 과거로 바뀐다.
사울은 죽어가는 스테파노를 차갑게 지켜보며 크리스챤의 뿌리를 뽑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기로 자청하는데 바리사이들은 사울을 자신들의 칼로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다마스쿠스로 향하는 사울, 그 길에서 터지는 저 유명한 회심 사건. 예수의 목소리와 빛. 이 장면은 어렵다. 신비이기 때문이다. 연극적 고민의 최대치가 기대된다.
무대 다른 쪽으로 등장하는 새 인물 하나니아스. 박해의 원수인 바오로를 도우라는 황당한 계시에 벼락 맞은 기분인데 그 점에서는 바오로가 더한 상태. 둘은 노래한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나를 선택했는지, 알 수 없네 그분의 뜻, 믿고 따를 뿐.” 그러나 바오로가 걷는 하느님 모상에로의 여정은 “수고와 밤샘, 옥살이, 굶주림, 추위, 채찍으로, 서른아홉 대 매질로 돌에 맞아,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지긋지긋한 고난의 파노라마다.
바오로는 “주님 함께 계신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믿음과 “주님 주신 사명, 가서 전하리라”는 소명과 “모든 것을 바라고 견디고 참는 영원한 사랑”의 힘으로 2차, 3차 전도여행을 감행한다. 이제 다 타버리고 재가 된 늙은 바오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감과 죽음이다. 죄명은 로마시 방화범.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네. 주님 주신 모든 열정 쏟아붓고 내 목숨마저 드리네.” 떨어진 바오로의 목이 세 번 튀고 그 자리에서 맑은 샘이 붉은 꽃처럼 솟아난다.
정신을 몽땅 빼앗는 볼거리로 넘쳐나는 세상. 온갖 좋은 것으로 포장했어도 결국은 할리우드풍의 액션과 사랑 놀음인 영화와 TV. 자본주의 논리로 태어난 초대형 스타들의 부정적 파워. 수천만 개의 스마트폰으로 세포분열처럼 확산되는 세속적 동영상들. 이런 세상에서 가톨릭 문화는 어떤 가치를 지닐까? 아니 가톨릭 문화라는 것이 따로 꼭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No’면 속 편하게 세상문화를 즐기면 되고 ‘Yes’면 투자와 관심 부족의 한계를 깨부수는 고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고난의 구경꾼보다는 동참자가 훨씬 많아져야 할 것이다. ‘신앙으로 현대문화읽기’ 이 귀중한 지면이 마지막 회를 기록한다. 그러나 문화에서 신앙을 읽어내기는 지속돼야 한다. ‘신앙으로 현대문화읽기’는 이 소란한 시대에 내 영혼의 파수꾼으로 긴박하게 요구되는 지혜일 것이다.
이원희(엘리사벳ㆍ연극배우 겸 작가) - 뮤지컬 ‘서울할망 정난주’ 극작가이자 배우로서 연극 ‘꽃상여’ ‘안녕 모스크바’ ‘수전노’ ‘유리동물원’ 등에 출연했다.
※ 이번 호로 ‘신앙으로 현대문화읽기’ 연재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수고해 주신 필진들과 애독해 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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