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9월 29일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제1독서 : 다니 7,9-10.13-14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복 음 : 요한 1,47-51
그때에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천사적 삶
-찬미讚美와 선행善行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천사란 말은 ‘messenger(전달자, 사자, 심부름꾼)’란 뜻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 또는 이웃사이에 선한 다리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런 천사 같은 삶을 사는 이들도 곳곳에 많습니다.
천사란 말만 들어도 위로가 되고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우선 하루를 마치며 끝기도 때마다 부르는 다음 시편 대목은 더욱 그러합니다.
“주께서 너를 두고 천사들을 명하시어,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셨으니
행여 너 돌부리에 발을 다칠세라,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떠 받들고 가리라.”(시편91,11-12).
하느님의 자비로운 현존을 상징하는 천사들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음은 천사들의 보호가 늘 함께 있었기에 가능함을 믿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천사들은 그 이름에 따라 미카엘은 ‘하느님의 힘’을,
가브리엘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분’을, 라파엘은 ‘하느님의 치유’를 뜻하며
그 역할이 다 다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전능하심을 널리 드러내는 천사들의 존재입니다.
천사신심 역시 우리 영성생활을 풍요롭게 함을 깨닫습니다.
토마스 머튼도 늘 천사가 있는 상본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합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과 영성체송 시편은 늘 들어도 흥겹고 힘이 납니다.
“주님,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시편138,1).
이 거룩한 미사시간 위 시편 말씀 그대로 천사들 앞에서 천사들과 함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 노래 부르는 시간입니다.
언젠가 세기洗器중 수사님이 ‘미사 때 제대 주변에서 천사들이 나팔을 부는 것 같다’고 한 말도 생각이 납니다.
요즘 밤새 활짝 하얗게 피어나는 ‘천사의 나팔Angel’s Trumpet’이란 재미있는 이름의 꽃이 있는데
흡사 전례기도 시 찬미시편을 노래하는 수도자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이름의 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 다니엘서에 보다시피 하느님은
역사 속에서 당신 활동을 중개하는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계십니다.
미사 전례 중 다음 천사들과 함께 감사송을 바칠 때는 말 그대로 기쁨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하나이다.”에
곧장 이어지는 천사들과의 합창인 ‘거룩하시다’입니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그 영광! 높은 데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
말씀의 전례가 끝나면 곧 우리는 성찬전례시 천사들과 함께 윗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천사의 우선적 역할은 하느님 찬미이며 다음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선善한 다리역할입니다.
그러니 늘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착하게 사는 이들은 그대로 천사 같은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나타나엘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나타나엘과 예수님의 만남은 늘 읽어도 반갑고 신선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와 주님과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세상에 이보다 좋은 찬사의 말씀은 없습니다.
이런 순수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찬미와 선행의 삶을 삽니다.
천사들을 보고 천사 같은 삶을 삽니다. 이에 즉시 이어지는 나타나엘의 화답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참사람과 참사람의 만남입니다. 참사람과 주님의 만남입니다. 참사람은 참사람이 알아봅니다.
이어 주님은 나타나엘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현존하심에 따라
‘하늘이 열리고’(이사63,19;마르1,10;루카2,9-13), 야곱의 꿈이 예고한(창세28,17) 하느님과의 통교가
마음 순수한 믿는 이들에게 항구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아마 우리 마음의 눈이 열린다면 이 거룩한 미사 중 제대 위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육화된 아드님이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과 그의 백성을 잇는 다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내려오고 그의 백성이 하느님께 올라가는 사다리와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대천사들중 대천사the Archangel of archangers’이며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의 ‘궁극적 사자the Ultimate Messenger’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고,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갑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그대로 실현되고 체험되는 진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천사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하늘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천사들이 이 땅에서 저희 삶을 보살피게 하소서." 아멘.
15분 동안이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사는 게 하루 단 15분도 주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지내는 날이 수두룩한데,
오늘 제가 찾아 나선 분은 이런 말씀을 남기셨더군요.
“큰일 났습니다, 오늘 저는 하루 동안 15분이나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돈 보스코와 함께 살레시오 수녀회를 공동창립하신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성녀聖女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성녀의 말씀에 얼마나 부끄럽던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토리노에서 버스로 두 시간을 가야 나오는 모르네제의 시골 소녀 마리아는 뜨거운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물에 물탄 듯한 신앙이 아니라 그야말로 불타오르는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성인聖人이라면 열정보다는 깊은 내면의 평화를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열정은 내면의 불순물을 활활 불태워버리기도 하고
연약한 육체를 승화시키는 힘이 되기에 성화의 길에 큰 힘이 됩니다.
마리아는 강렬한 육체적 에너지를 영적으로 전환시키는데 아주 탁월한 능력을 지니셨더군요.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서 이미 유명인사로 통했던 돈 보스코와의 첫 만남 때도
마리아는 그런 열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습니다.
대도시와는 동떨어져 있던 시골마을이었지만 그녀는 페스타리노 신부의 지도하에
또래 동정녀들과 의기투합해서 복음선포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돈 보스코 못지않게 모르네제 소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녀의 순수한 열정에 큰 박수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미래에 대래 뚜렷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1864년 어느 날 돈 보스코는 아이들과 함께 모르네제로 소풍을 오게 됩니다.
그때 마리아는 돈 보스코와 첫 대면을 하게 되는데, 그를 보는 순간 그녀는 즉시 확신했습니다.
“저 분은 성인이시다! 안심하고 우리의 미래를 맡겨도 될 분이다!”
내면 가득히 신뢰로 가득차자 조금도 망설임 없이 돈 보스코와 한 배를 타게 됩니다.
돈 보스코의 제안에 따라 즉시 갈 곳 없는 소녀들을 위한 집을 마련했습니다.
그들의 미래를 위해 학교를 짓습니다.
오라토리오를 열어 아이들을 기쁨과 행복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살레시오 수녀회는 살레시오회와 더불어 신속하게 전 세계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1872년 살레시오 수녀회가 창설되고 마리아는 초대 총장에 임명됩니다.
마리아가 23세 되던 해 모르네제에 장티푸스가 창궐했는데, 가까운 친척들도 여러 명 전염되었습니다.
천성적으로 나 몰라라 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그녀는
그들을 지극정성으로 간병하다가 그만 자신도 덜컥 전염되고 맙니다.
겨우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 후 그녀는 평생 병약한 몸으로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정식 학교교육을 받은 바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글을 읽고 쓰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토록 병약하고 교육을 받거나 교육계에 종사한 적이 없었던 마리아였지만
지금은 전 세계 수많은 여성 교육단체 혹은 여성 수도단체 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큰 단체인 살레시오 수녀회의 공동창립자 겸 초대 총장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장상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겸손했습니다.
“원장 수녀님!”하고 부르던 수하 수녀들에게만 틈만 나는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원장수녀가 아니라 부원장 수녀입니다. 우리의 원장은 성모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방식은 늘 이런 식인 것 같습니다.
나자렛 산골의 겸손한 처녀 마리아를 하늘의 모후요, 전 인류의 어머니로 들어 높이셨듯이
모르네제 산골의 겸손한 처녀 마리아를 같은 방식으로 성덕의 정상에로 높이 들어 올리신 것입니다.
소녀시절 마리아는 틈틈이 다락방으로 올라가 창을 열었습니다.
그 창을 열면 저 멀리 성당이 바라다 보였습니다.
그녀는 거기서 즉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성체조배를 하곤 했습니다.
그녀가 습관처럼 열곤 했던 바로 그 창,
발포나스카의 창 앞에서 그녀의 열정과 용기와 열린 마음을 묵상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부모의 사랑을 가장 큰 사랑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맞는 것 같습니까?
실제로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고생하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종종 자녀에 대한 아쉬움을 표시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신부님, 제가 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아세요?
그렇게 집이 어려웠는데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공부 다 시키고, 필요한 것은 다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부모를 만나러 오지도 않아요. 어쩌면 이럴 수가 있지요?”
괘씸한 자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부모 역시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부모의 말에는 ‘내가 이렇게 애를 썼으니, 너도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냐?’라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았던 순수한 사랑보다는 보상받으려는 사랑이 생긴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어렸을 때에 단순히 의무감이 아니라, 키우는 재미 그 자체에 집중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부모를 찾아오지 않는 것이 서운하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냥 독립해서 가정을 잘 꾸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사랑을 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순수성이 사라질 때에 미움과 다툼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바로 이렇게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에 물들어 있는 우리를 향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서 꾸짖지 않으십니다.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고 함께 하면서 응원해주십니다.
오늘은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입니다.
대천사는 중대한 사건을 전하는 이들이지요.
미카엘은 요한 묵시록에 나오듯이 우리의 원수와 싸우도록 파견되어, 우리들이 악을 멀리해야 함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동정 마리아에게 가브리엘이 파견되어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전했으며,
라파엘 천사는 토비아의 눈을 고쳐주어서 하느님의 치유를 전해주었습니다.
대천사들이 전하는 중요한 사명들은 바로 인간을 위한 한 없는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주님의 사랑을 본받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어떤 보상을 원하는 삶이 아니라,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으로
나의 이웃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억울함이나 서운함을 단 한 번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도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의 억울함과 서운함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억울함과 서운함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안에서 느끼는 기쁨과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대천사의 임무처럼 세상에 사랑을 전하는 또 다른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입니다.
교회는 천사의 존재를 신앙교리로 선언하고 있지만
(4차 라테란공의회(1215년), 1차 바티칸공의회(1870년)),
천사의 본질이 무엇인지, 역할이 무엇인지, 혹은 사람마다 수호천사를 가지고 있는지,
여러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등의 학자들의 주장
(그레고리오 대종의 천사직무론, 디오니시우스의 9품 천사론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유권적 결정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천사론>에서 믿어야 할 교리는 한 가지밖에 없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우리의 감각을 초월하는 영의 세계도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천사는 하느님의 사자들이요,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능력들이요,
하느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들로서(히브 1,14). 자주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기념하는 미카엘 대천사는 ‘누가 하느님과 같은가’라는 뜻을 지녔으며,
주로 천상 군대의 장수요, 악에 대한 수호자요, 임종자의 수호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을 지녔으며,
다니엘이 본 환시와 예언을 설명해 준 대천사이고,
즈가리아와 마리아에게 각각 탄생을 알린 하느님의 사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라파엘 대천사는 ’하느님의 치유’라는 뜻을 지녔으며, 토비아를 위해 파견된 천사이고,
맹인들의 수호천사로 큰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사 이야기는 모두가 하느님께서 갖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관심을 쏟고 계시다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곧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보디가드가 존귀한 것이 아니라, 보디가드를 받는 인간이 존귀한 까닭입니다.
우리가 존귀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대천사를 보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을 찬미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오늘, 우리는 대천사들의 대축일을 지내면서, 하늘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을까? 하늘은 어디에서 열릴까?
대체, 어떻게 하늘을 만날 수 있을까?
그것은 만남의 신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만남에서 하늘이 열렸듯이,
예수님의 세례 때 하늘이 열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셨듯이,
오늘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곧 하늘이 열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늘이 땅에서 열리는 것은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을 우리 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분명, 우리 안에는 당신이 계시니, 우리가 곧 당신께서 계시는 하늘이 됩니다.
그러니, 사실 하늘은 이미 열려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자리요,
우리 일상의 삶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장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시며,
우리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분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천사 축일을 맞아, 우리의 마음과 일상 안에서 하늘을 열고,
주님의 사랑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천사가 되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천사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지속적으로 전달하고 도와주는 심부름꾼입니다.
우리 인간을 위해서 파견된 일꾼입니다. 히브리서1장 14절에는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시중드는 영으로서,
구원을 상속 받게 될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되는 이들이 아닙니까?” 하고 적고 있습니다.
천사란 말은 그들의 정체나 본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맡고 있는 직무와 사명을 뜻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우주를 다스리는 하느님의 일에 협조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될 때 우리도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의 아브라함은 길손을 대접하다 천사를 만나는 축복을 얻었습니다(창세18장),
다니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기도응답의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다니8,17).
토비트는 라파엘 대천사를 통해 눈을 뜨는 기적의 축복을 누렸습니다(토비11,4-13).
구약에서 천사론이 전개되는데 하느님의 아들, 거룩한 자, 수호자 등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하느님의 피조물이요, 순수한 영적존재로 나타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고(루카1,28), 요셉의 꿈에 나타난 분도(마태1,20) 가브리엘 천사입니다.
루가2장14절에 보면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때 천사들이“하느님께 영광”이라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천사는 꿈에 나타나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할 것도 알려주고(마태12,13),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13).
또한 흰옷을 입고 부활을 알려주었으며(마르16,5),
심판 때에는 그리스도를 옹위하여 나타날 것(묵시22,6)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치며
천사들이 영적인 실체라고 가르칩니다(1차 바틴칸 공의회).
그리고 선한 천사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생각은 성경에서 나온 사상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이바지 한다는 것은
성경과 교회 정통 가르침에 의거한 교회의 신앙입니다.
각 사람에게는 수호천사가 있습니다.
우선 길을 인도하고 돌보는 존재로서 사람과 동행하는 천사입니다.
“주께서 너를 두고 천사들을 명하여,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셨으니,
행여 너 돌부리에 발을 다칠세라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고 가리라”(시편91,11).
마태복음은
“너희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마태18,10)하고
각자에게 배속된 천사를 언급합니다.
결국 천사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천사에 대한 의식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을 통해서 그리고 예언자와 율법학자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전해졌지만 이제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성직자나 수도자, 교리교사를 통해
예수님의 계시진리가 좀 더 쉽게 전달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천사의 존재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천사는 존재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18,10).
각 사람을 수호하는 천사들이 있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뜻을 사는 내가 천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이웃에게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되어야 합니다.
천사를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천사가 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 이미 천사를 만났습니다.
이제 누군가의 천사가 되어주어야 할 때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미카엘은 ‘누가 하느님과 견줄 수 있느냐?'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만군의 주님 사령관으로 악마를 물리치는 대천사 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영웅’, ‘하느님의 권세’이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라파엘은 ‘하느님의 치유자’, ‘ 하느님께서 고쳐 주셨다’라는 의미입니다.
@@ 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저는 세례명이 ‘가브리엘’입니다.
오늘이 축일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제가 정하지는 않았지만 저의 세례명을 좋아합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요셉에게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주변을 보면 천사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분들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대전 가톨릭 대학교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부제님들이 강의를 부탁하였기 때문입니다.
서울역에서 전의역으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였습니다.
조치원에서 천안, 천안에서 서울로 오는 기차표도 예매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난처한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제가 가는 날, 철도 노조에서 파업을 시작하였고, 제가 예매한 기차는 운행이 중지되었습니다.
대전까지 가는 길이 멀기도 하고, 길이 막힐 것 같아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천사처럼 버스를 예매 해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스마트한 세상입니다.
인터넷으로 조치원 가는 버스를 예매하였고, 스마트 폰으로 버스표를 전송해 주었습니다.
저는 덕분에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눈은 외부의 사물을 보기도 하지만, 눈은 내 마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눈, 사랑의 눈, 희망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고, 즐겁습니다.
하지만 시기의 눈, 증오의 눈, 불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통 회색 빛깔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의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세균, 바이러스와 같은 것들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있지만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이 아무리 좋아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빛에 의해서 반사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면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카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목적지가 같은 분들을 연락해서 승용차를 함께 이용하는 나눔입니다.
연말연시에는 사랑의 나눔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돼지 저금통을 가져오기도 하고, 군인들도, 기업체를 운영하는 분들도
이웃을 위한 나눔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평생을 모은 재산을 기꺼이 신학교를 위해서 기부하신 분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나눔이 더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치를 해도 함께 나누고, 잔치가 있으면 이웃을 초대하였습니다.
누군가 돌아가시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신 분의 장례를 위해 함께 수고하였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예전에 농경시대에 있었던 방식의 나눔이 계속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쁘고 분주한 현대사회에 살면서도
나눔의 아름다운 모습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천사입니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었다.
남이 나보다 잘 되는 걸 기뻐해 주는 사람이 천사
전삼용 요셉 신부
어느 한적한 마을의 숲속에 우주선이 나타납니다.
우주선에서 내린 외계인들은 지구의 각종 표본들을 채취하던 중
인간들이 나타나자 서둘러 지구를 떠나는데, 그 와중에 뒤쳐진 한 외계인만 홀로 남게 됩니다.
방황하던 그 외계인은 한 가정집에 숨어들고, 그 집 꼬마 엘리어트와 만나게 됩니다.
엘리어트는 외계인에게 E.T.(Extra-Terrestrial)란 칭호를 붙여주고
형 마이클과 여동생 거티에게 E.T.의 존재를 밝힙니다.
그때부터 삼남매는 엄마의 눈을 속인 채 집안에서 몰래 E.T.를 돌봐줍니다.
어느새 아이들과 E.T.사이엔 끈끈한 정이 생기고, 특히 엘리어트는 E.T.와 텔레파시로 교감할 정도로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E.T.덕에 분열되었던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E.T.는 자신의 별로 돌아가야 할 몸.
그는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집안의 잡동사니로 자신의 별과 교신할 통신장비를 만듭니다.
그리고 할로윈 축제를 이용해, 우주선이 착륙했던 숲속으로 가서 그곳에 통신장비를 설치하지만,
그만 체력의 급격한 소모로 탈진 상태에 빠집니다.
특이한 점은 E.T.가 아플 땐 엘리어트도 함께 아프다는 것.
엘리어트와 E.T.가 빈사상태에 빠졌을 때, 그동안 이 집을 조사해오던 항공 우주국 직원들이 들이닥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 자전거를 타고 E.T.를 숲속으로 피신시킵니다.
숲에는 E.T.의 메세지를 듣고 온 우주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E.T.는 지구를 떠납니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엘리어트와 E.T.가 작별인사를 하는데,
엘리어트가 눈물을 흘리자 E.T.의 심장이 뜨거워지며 “아프다(OUCH!)”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엘리어트도 “아프다(OUCH!)”라고 화답합니다.
우리나라 유명한 드라마 대사인 “아프냐?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뭐 이런 식의 말입니다.
이 영화는 스필버그가 이혼가정에서 태어나서 자신의 아픔을 이 세상을 넘어선
누군가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든 일종의 자기치유를 위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아픔을 알아주고 자신이 잘 되기를 기도해주는 누군가를
아주 처음부터 원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세 대천사를 기리는 축일인데, 천사들이 아마도 우리 곁에서 그런 분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천사는 주님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이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다가가면 천사는 인간보다 더 낮은 존재가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고 천사들은 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싫어서 뛰쳐나간 천사들이 사탄과 그의 졸개들입니다.
따라서 천사는 남이 자신보다 잘 되는 것을 기뻐할 줄 아는 본성을 지녔습니다.
사탄은 반대로 인간의 지위가 자신들보다 높아지는 것을 질투하여 끌어내리려 합니다.
하느님은 누군가를 자신들 위로 들어 높일 줄 아는 이들만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무언가 저보다 잘 하는 이를 보면 질투가 마음속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운동회 때 몸이 안 좋게 태어난 친구의 손을 잡고 모두가 꼴찌가 되려고
함께 걸어 들어오는 아름다운 사진을 보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도 아닌 척은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 저보다 강론을 더 잘한다거나
운동을 더 잘하는 모습을 보면 질투가 서서히 올라옴을 느낍니다.
사제가 되어서까지도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니 참 창피합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자신 위로 높이는 것인데
질투는 어떤 누구도 자신보다 더 높아지는 꼴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어찌 보면 예수님과 경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천사의 마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자신이 진정 천국에서 가장 못난 사람이고 그런 자신을 천국에 올려주시는
주님께 무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겸손함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남이 슬플 때 울어주는 사람보다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나보다 잘 되는 것을 기뻐해줍시다.
또한 나의 행복이 너의 행복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내가 행복해지려면 또 다른 나인 상대가 행복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행복도 우리의 행복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부모가 자녀가 아픈 것을 보고 혼자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인 것입니다.
따라서 천사들은 아직도 우리 곁에서 우리가 자신들보다 높아지기를 기도하고 지켜주고 있습니다.
천사들도 우리 옆에서 우리가 자신들의 모습이기를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