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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오토 금각사
1. 일시 : 2011. 10. 20.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박 4일
2. 여행단 : 대구 변호사 19명
3. 여행경로 : 김해공항 9시출발-칸사이 공항-오오사카-오카야마-히로시마 1박-일본변호사와 오전 합동세미나-오후 합동시내구경(양조장,평화공원)-히로시마 1박-교오토(금각사-청수사 - 고쇼)- 1박-니죠성-동샤관광-오오사카-칸사이-인천공항 7시도착
4. 여행내용 : 3박 4일 중 2일은 일본변호사 40여명과 한국변호사 19명이 합동으로 세미나, 시내구경, 축구, 골프, 바둑 등 친선경기를 하고 나머지 일정은 일본 간 김에 한국 변호사끼리 일본 각처를 관광하는 모임임. 세미나 이외에는 취미가 달라 각자 조를 맞춰 행동함.
5. 여행 후기
가. 하지메니
일본 여행은 이번이 3번째다. 1996년경 형님이 동경에 외교관으로 있을 때 우리 가족 4명이 느긋하게 개인적으로 구경간 적이 있고, 2000년경 밀양지원장 시절 마츠에(松江) 지방재판소를 공식으로 방문한 적이 있다.
10년동안 일본은 뭐가 변하였는지 보니 변한 거는 하나도 없고, 택시요금은 15년전이나 지금이나 650엔인데 환율이 800원에서 1500원으로 되어 일본 물가가 훨씬 비싸 보이는게 다르다. 우리도 처음에는 23명이 갈라고 했는데 물가가 비싸서 4명이 포기하였다. 한일교류 가 지난해 10주년이었는데 10년 전에는 여행경비가 우리돈 80만원이었는데 지금은 140만원이 된다. 우리는 경제가 발전하였다고 하지만, 환율이 자꾸 올라가 한국돈 가치가 없어진다. 지난 여름 중국을 가도 한국 돈은 이제 안받을라 칸다. 받아도 가치있게 생각 안한다. 이번 유럽 재정위기가 터지니 한국이 제일 피를 보고 있다. 그 원인은 뭔지.... 각자 자성을 해 봅시다.
나. 출국준비
20일 새벽 6시에 떠나야 되는데, 19일 퇴근때까지 아무런 짐준비도 안되있다. 신신당부를 했건만 이 일을 어쩌나. 여권과 돈만 챙기면 나머지는 우찌 되것지.... 한 3시간 짐준비를 하니 그럭 저럭 새벽 1시가 되었다. 잠도 충분하게 자지 못하고, 출발버스에 오르니 기분이 썩 상쾌하지는 않다. 김해공항에서 9시 비행기를 타니 1시간 20분만에 칸사이에 도착한다. 듣던대로 칸사이는 해상공항이었다. 육지에 거의 붙은 해상이 아니라 한 4키로는 떨어져서 완전히 바다 한복판을 메워 만들었는데, 그게 실패작이라 한다. 공항활주로 및 건물이 계속 침하되어 1996년경 준공이래 15년동안 약 8미터가 침하되었다 한다. 지금도 침하하고 있는데 보수공사땜에 공항운영이 늘 적자라 한다. 공항도 썩 잘 지은 것 같지는 않다. 출국수속을 받고 전차를 타고 한 1키로는 타고 가야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인천공항은 하드웨어 면에서 어느 공항보다도 잘 지은거는 맞는데, 너무 독식하는거 아녀. 무려 20조원을 투입하고, 또 10조원을 투입하여 제3의 활주로를 맹근다고 한다. 한국을 완전히 도시국가로 만들 셈인가. 아무리 빨라도 지방에 사는 사람은 3시간 이상을 더 허비해야 하는데...
다. 오사카 도착
우쨋기나 내려서 한 40분간 고속도로를 달리니 오사카 시내 한복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 기억으로 40분간 고속도로를 달렸지만 전부 고가도로로 달려 지상고속도로를 달리는 때 보다 더 피로도가 심하다. 로폭도 좁은데다가 커브길도 많아서 승차감이 퍽 좋은 거는 아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오사카만의 풍경은 공업도시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해안가로는 거의 공장지대였으며, 고속도로 주변은 전부 단독주택 또는 5층이하 아파트로 공항에서 오사카 시내까지 시가지가 거의 연결되어 있다. 여행을 가기 전에 오사카의 인구를 알아보니 어떤데는 330만이라 하고, 어떤데는 800만이라 하는데,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오사카는 단일 행정구역이 아니고 오사카부라하여 오사카시 인구 330만 외에 외곽도시 인구를 포함하는 우리의 광역시 개념이다. 외곽도시라 하지만 사실은 오사카 시내와 완전히 연결되어 있어 한개의 도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니 오사카의 인구는 800만이라고 보는게 옳다. 오사카부의 경제는 캐나다, 호주와 맞먹는 정도라 한다.
오사카를 지나 히로시마로 가는데, 버스로 약 5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350키로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 5시간이라고 하여 놀랐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일본의 고속도로는 시속이 80키로로 제한되어 있고, 거의 제한 속도를 지키며 운전을 하니 5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일본이라고 하여 준법의식이 철저하여 그렇다기 보다 고속도로가 우리나라 고속도로만큼 로폭이 넓지 않고, 커브길이 많아 빨리 달릴 수 없는 구조로 보였다. 노견도 거의 없고....
그래서 일본을 여행하다가 보면 우리가 일본보다 뭐든지 한 20%는 더 크게 보인다. 맥주잔, 밥공기, 버스, 승용차, 도로폭 등이 그렇고, 사무실은 평균적으로 우리가 일본보다 50%는 더 크게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잘 살아서 그런지, 허세를 부리는 건지....
고라쿠엔 정원
오카야마 성
다. 오카야마 도착
히로시마로 가자면 5시간이 걸리는데 그냥 버스만 타고 가기가 지루하여 중간에 오카야마현에 들려 오카야마성과 이에 붙어 있는 코라쿠엔(後樂園) 정원을 구경하였다. 일본은 대도시를 가면 거의 시내 중심가에 성이 있는데, 그 성이 과거에는 다이묘의 거주지로서 서민들에게는 착취의 대명사였지만, 오히려 지금은 관광의 중심지가 되어 있다. 과거에 성주가 도시 중심가에 해자를 만들고 성을 쌓지 않았다면 도시 중심가에는 녹지공간이 전혀 없는 삭막한 도시가 되었을 거다. 그래서 세상 이치는 묘하다. 코라쿠엔은 정원을 정말 잘 가꾸어 놓았다. 성의 제일 높은 곳을 천수각이라 하는데 오카야마성은 외부색이 검은색을 띠고 있어서 가마귀성이라고도 한단다.
라. 히로시마 도착 후 만찬
1시간 남짓 성 구경을 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2시간을 가니 히로시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 8시가 되어 호텔에 도착하니 일본 변호사 10여명이 우리를 환영하고 있다. 지난해 보았던 얼굴들이라 전부 아는 사이이고 그래서 악수나 간단히 인사만 하고 호텔에 짐을 풀고 나와 일본 변호사 20여명들과 함께 비공식 만찬을 하엿다. 한식 비슷한 저녁을 먹고 우리나라에서 가지고 간 소주로 반주를 하면서 8명당 1명의 통역사를 배치하여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처음 30분간은 통역이 필요하지만 소주를 서너잔 마시고 난 다음에는 언어가 필요없었다. 대충 눈짓, 손짓으로 알고 각자 언어를 사용해도 알아 듣는다.
첫날 저녁식사 시간에서 인사말
2시간 정도 식사를 하고 난 뒤 아쉬운 감이 들어 각자 일본인들과 대충 조를 마추어 3개 그룹으로 나뉘어 2차로 술집에 갔다. 구냥 일본식 사케와 맥주를 파는 집인데, 보다 가까이 앉아서 대화를 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안주를 시키는데 싱싱한 회가 나왔다. 우리나라는 2차 술집에서 회가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그거 참 좋은 아이디어 같았다. 찌게다시는 필요없고, 회와 와사비만 있으면 돈도 크게 들지는 않고 훌륭한 안주가 되는데, 한국의 술집에는 그런걸 왜 벤치마킹 안하는지 모르것다. 술잔이 좀더 도니까, 완죤히 통역이 필요없고, 이럴때 나의 콩글리쉬 실력은 빛을 발하였다. 대충 단어를 끼워 맞추면 일본인들도 알아 듣는다.
마. 일본의 식당문화
더 마셔서는 다음날 공식일정를 소화할 수 없어서 일단 호텔로 들어왔는데, 술에 골아 떨어져 다음날 겨우 기상하였다. 아침식사는 한식과 일식이 있는데, 이왕 일본에 왔으니 일본식으로 먹어 보자. 일식당에 가니 왠걸 입구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일본 호텔의 식당에서는 무조건 빈자리가 있으면 앉을 수 있는게 아니고, 종업원이 입장을 시켜야 들어갈 수 있다. 설사 빈자리가 많더라도 금방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거는 서양식 문화의 소산이다. 의자에 앉아서 신문을 보니까 카다피가 사망하였다고 톱기사로 나왔다. 식사주문은 커녕 그 소식이 궁금하여 몇줄 안되는 신문을 해득할라고 카니 들어오라 한다. 식당에 들어가니 일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분위기에 식단도 정말 좋았다. 조용한 식사시간에 음식을 음미하듯 하는 일본인들을 우리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어딜가나 시끄럽다.
호텔 일식당 내부
바. 합동세미나
식사를 대충 마치고 오전 공식일정으로 변호사 회관 회의실에서 합동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한국에서는 배진권 변호사가, 일본에서는 쿠가사라는 변호사가 한일 양국의 후견제도에 대해서 발표하고 질의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일 양국의 후견제도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동일하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나라가 일본제도를 거의 베꼈다. 과거 금치산, 한정치산 제도를 폐지하고 후견제도로 바꾸었는데 일본은 2000년경, 우리나라는 2010년경 바꾸었다. 뭐든지 일본은 우리보다 10년 정도 앞서간다고 보면 된다. 전자제품, 자동차 등 제조업 분야는 우리가 거의 따라 붙었지만 정치, 경제, 법률 등 제도면에서는 우리가 아직 일본을 따라가는 형국이다.
그 외 일본 대지진과 법률문제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어 반경 30키로 이내에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고 죽은 사람만도 1만 5000명 실종자가 약 5000명인데, 놀라운 거는 일본에서는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는 도쿄전력에서 사망자에게 법률상 피해보상을 한 사실이 없다는 거다. 그냥 사망위로금 정도는 지급하였지만 호프만 수치를 적용하여 완전한 손해배상을 한 적은 없고, 토지에 대한 보상도 지급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그거는 자연재해인 것이고 인력으로 불가항력적인 사태이기 때문에 동경전력이나 일본정부가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일본인들이 불만을 가질만 한데도 참는게 우리 변호사 입장에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 히로시마 평화공원 관광 및 쇼핑
점심은 도시락으로 때우고, 오후에는 일부는 양조장 구경을, 일부는 원폭피해 현장이 있는 평화공원으로 관광을 떠났다. 난 원폭돔이 있는 평화공원을 갔다. 내가 생각했던 거 보다 공원의 규모가 더 컸다. 우리들은 대부분 원폭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것은 일본이 군국주의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을 불법으로 침략한데 대한 당연한 응보라고 우리는 생각하는데, 일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것같았다. 공원 각지의 조형물에서 조용히 합장하고 흐니끼는 사람도 있고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수없이 많이 왔다. 갑자기 군인의 맹세 같은 구령을 합창하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중학생 100여명이 선생님의 인솔하에 조각상 앞에서 간단한 문장으로 한 10여가지 이상을 복창하였다. 내용은 우리는 평화를 사랑한다. 원자폭단은 인류를 파멸시키는 가공할 무기이다. 따라서 평화를 위해서는 원자폭탄은 절대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서 무슨 노래를 조용히 합창하는데 어린이들의 목수리가 우렁차기 보다 너무나 차분하여 무서운 광기까지 느껴졌다. 우리나라 같으면 무슨 단체에서 어린이들에게 군국주의교육을 시켰다고 난리가 날 거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히로시마 성을 관람하였다. 히로시마 성도 조용히 산책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그러고도 저녁 만찬까지는 시간이 남아 히로시마 시내 상가에 좀 안내해 달라고 해서 쇼핑을 하였다. 쇼핑이라고 해야 엔고로 인하여 비싼 물건은 살 수 없고, 그냥 쌍안경을 하나 샀다. 메이커가 일본인데 의외로 값이 싸다 하여 자세히 보니 중국산이었다. 일본 브랜드 중에서 싸다 싶으면 무조건 오이엠 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한국도 안그런감....
원폭 돔
원폭돔, 평화의 불꽃, 평화의 연못이 일직선이 되게 배치한 폼이 좋았슴(원폭 돔 사이로 쬐끄만 불곷이 보이제. 이 평화의 불꽃이 50년동안 꺼지지 않고 타고 있다 함)
어린이 선서
히로시마 시내에는 아직도 전철이 운행되고 있슴, 지하철은 없슴
아. 공식만찬
쇼핑을 하다가 보니 공식만찬 시간이 임박하였다.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을 거 같아서 택시를 타니, 히로시마에서는 기본요금이 620엔이었다. 한 20분을 타고 가니 "한베"라는 일본식 정원을 가진 큰 식당이었다. 좀 늦게 도착하니 이미 공식만찬을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일본측에서 40며명의 변호사가 참석하여 한 60명이 식당에 앉아 환영사, 답사, 건배 등을 하고 장기자랑, 퀴즈 등을 하는데 2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노래를 일본사람보다 더 잘 부르는 변호사가 있어서 매년 단골로 출연하는데, 음반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공식 만찬장에서 일본 변호사의 피리 연주
자. 2차 노래방
비는 추적 추적 내리고 그냥 호텔로 들어가기가 아쉬어 또 다시 술집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집이었다. 우리식 노래방은 일본에는 없는 것같았고, 가라오케라 하여 손님들이 공통으로 화면을 쓰고, 이쪽에서 노래를 부르면 저쪽에서도 같이 부르고 하는 그런 술집이었다. 개인주의적인 일본이지만 가라오케만은 우리가 오히려 개인주의적인 것 같았다. 우리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면 일본인도 따라 부르고, 우리가 모르는 한국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일본인도 있었다. 노래방 규모도 아주 작아 3팀이 들어오면 다 차는 그런 집이었다. 중간에 피아노도 설치해놓고 복잡한 가운데서도 재미가 있었다. 한국노래도 목록에 쫙 떠서 나도 2곡 신청하여 불렀는데, 다른 한국변호사들이 신청한 노래를 자기들이 안부르겠다 하여 내가 한 5곡은 불렀지 싶다. 또 푼수 같은 짓....
일본 변호사의 피아노 반주
(우리도 맨날 음향기계에만 의존할 게 하니라, 피아노, 색소폰, 트럼펫 등 실제악기로 연주하고 노래할 수도 있는 품격있는 노래방이 몇군데는 있었으면....)
차. 쿄오도(慶都) 관광
밤이 늦어 호텔에 도착하여 자고 다음날 일정이 시작되었다. 히로시마에서 버스를 타고 쿄오토로 이동하여야 한다. 쿄오토는 메이치 유신 이전까지 일본의 수도였으니 최근세까지도 수도로서 기능을 한 문화유산이 풍부한 도시다. 메이치 천황은 쿄오토 황궁인 고쇼(御所)에서 20세까지 자라고 1869년경 동경으로 천도하였으나 초창기에는 쿄오토가 그리워 가끔씩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나....
우쩻든 5시간을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가는데 중간에 갑자기 펑크가 나서 버스를 교체하고 가느라 1시간 정도 시간이 더 걸렸다. 일본 국내 여행은 버스로는 부적당하고, 신칸센 또는 비행기라야 되는 제법 큰 나라라는 걸 실감하였다. 쿄오토에 도착하여 금빛으로 건물을 치장한 금각사, 언덕에다 절을 지은 청수사 절을 구경하고 1박하고 다음날 동사(東寺), 니죠오성(二條城)을 구경하였다. 금각사는 금으로 치장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모르겠으며, 청수사는 하필이면 언덕에다가수백개의 기둥을 박고 터를 만든 다음 그 위에 절을 지을 일이 뭔지... 동사에는 5층 목탑이 있는데 높이가 너무 높아서 사람을 압도한다. 탑의 형식도 피라미드 식이 아니고 수직방식이어서 지진의 나라에서 무척 위험해 보였다.
동사 내 금당에는 역시 웅장한 불상이 있는데, 황금빛 도색이 중간 중간에 벗겨져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었다. 일본의 국보급 불상들은 대개 개금을 하지 않고, 건물외부에는 단청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색칠을 하게 되면 문화재의 가치가 소실된다고 생각하는지.... 글코, 일본의 절은 우리의 절처럼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서 신발을 벗고 참배하는 것이 아니라 신발을 신은채로 들어가서 정면을 바라보고 한 30초 정도 합장하고 참배하며 시주함에는 주로 동전을 넣는것 같았다.
고쇼(일본 황실 거처)
5층 목탑
카. 귀국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다시 오사카로 와서 먹거리 살거리의 명물 도돔보리로 가서 쇼핑하고 사람구경하고 식사하고 칸사이 공항에서 오후 5시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귀국하였다. 한국버스를 타니 좌석이 널직하고 일본 버스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도로도 널직하고 운행방향도 좌우가 바뀌어 약간의 이질감을 느낀다.
타. 여행중 간담회
일본에서부터 버스를 타는 시간이 너무 길어 버스 안에서는 1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30분 이상 마이크를 잡고 사람을 웃기고 웃지기 못하면 국제교류위원장의 주도로 가혹한 청문이 실시되어 배꼽을 잡아 쥐에 되었는데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5명이 마치지 못하였다. 한국에 도착하여서 4시간 30분 동안 관광버스를 타고 오면서 마지막 남은 5사람이 차내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모두가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 놓은 유익한 시간이었다. 자신의 자랑 보다는 자신의 어려웠던 과거, 가정의 몰락 등 넘이 모르는 우여곡절에 대하여 이바구를 하였다. 모두가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한 때는 판사로, 검사로 날렸지만, 그 이면에 눈물겨운 사연이 없었던 사람이 없엇다. 합격 후에도 여러가지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몸이 이유 없이 아파서 신학을 공부하고 실제로 목사 자격을 딴 사람, 변호사가 취미에 맞지 않아 출가를 결심하여 산사에 갔다가 되돌아 온 사람, 10년 이상 회사에 다니다가 30대 후반에 고시에 합격하여 자칭 "잃어버린 10년"에 대하여 열변을 토한 사람, 등등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확인한 사실은 성공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절대 절명의 순간에 다가온다. 죽기로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줄을 잡으려고 하면 줄은 점점 멀어진다.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각오를 할때 생명의 줄이 손에 쥐어 진다. 법원 앞 주차장에 도착 할 때도 이바구가 끝이 안나, 다음 주에 해단식을 할 때 마져 듣기로 하였다. 끝...
첫댓글 안 가보아도 여정이 머리 속에 그려지네. 새로운 세상을 보고온 후기가 좋네. 잘 읽었네.
우리와 큰 차이가 없는 일본은 조용하고 좀 더 깨끗한 이미지로 기억한다.
업무상의 여행도 의미있었겠지만...회원들 인생사를 들은 것들이 더 오래 남아있을 것 같네.
막다른 골목, 절대 절명의 순간...눈물겨운 사연들..
우리 세대에 상당수 그런 분들이 있겠지만 크게 성공한 사람들의 것은 남들이 들으면 공감이 오래 간다는 것..
재밋게 잘 보앗습니다~~저 같으면 몸살 났을거 같은데....후기까지...역시..사나이들은 대단해요~~^^
노래방에 피아노가 있어 좋은데요~~이쪽저쪽 화답하는 분위기도 좋으네요^^ㅎㅎ
사진을 진작에 올릴라고 했는데, 삼성 KIES가 말을 듣지 안네요. 이래 저래 프로그램을 다시 깔아 해결했슴.
난 여행을 할 때 보다 한 후에 더 힘들어, 이런 짓을 해야 하니, 카페지기의 숙명이라 할까. 약삭바른 인간들 눈에는 바보같은 짓이겠지. 그렇지만, 나도 이젠 좀 덜 부시대야 할 거 같다. ㅎㅎㅎ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너무 무서워진다. 이건 누구 비위를 상할 까.... 등등. 그래서 차띠고 포띠고 나면 졸만 남는데, 그라마 글이 재미 없어진다. 있는 그대로 한순간을 포착했을 뿐이니,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라.
왜 그런 말을 자꾸 하노? 마음이 가는대로 말 해. 괜찮아...희생적으로 오랬동안 아주 잘 하고 있는데 뭘^^
대단하네. 눈요기 포함하여 하나도 빼지 않고 잘 보았네. 황변 같은 친구가 있으니 우리 모두 잘 보잖아? ㅋㅋㅋ
구경했으니 입장료는 내야겠지. 구경하고 몰래 빠져나가면 양심불량이라는 소릴 듣겠지.
일본 정원에서 소나무 종류중 금송(金松)이 보이던가? 첫 사진에서 소나무가 연못 가운데서 자라네,신기하다.배수가 잘되는 곳에서 자라는데?
솔잎이 우동가락처럼 굵고 가을이 되면 황금색을 띄우지.
우리나라서는 잘 자라지 앟아서 귀한 대접을 받는데... .
도산서원에 박통이 기념식수한 금송이 자라고 있지.
그런데 박통은 왜 퇴계서원에 친일색이 강한 정원수를 심었응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