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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1년 12월 19일 주일 오후 예배
성탄 주일 설교
성경낭독 : 시 80:1-7; 히 10:5-10
본문 : 룻 4:11-12
제목 : “우리의 보아스, 우리의 오벳이신 그리스도”
주일 오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100편 1,2,3,4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147편 5,7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84편 1,2,3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5편 8,9 (고정)
설교 후 찬송 – 찬송 259쪽 3,4,5
성찬식 찬송 – 시 132편 8,9 (고정)
폐회찬송 – 시 139편 1,3,12 (고정)
우리의 보아스, 우리의 오벳이신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받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기념하는 성탄 주일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코로나로 인하여 온 세계가 신음하고 있는 중이지만, 이런 우리의 형편 중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참된 기쁨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영원을 내다보는 데서 오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친구의 죽음을 맞은 후에 굉장히 심한 슬픔에 빠져서 탄식하다가, 문득 자신의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깨닫게 되죠. 자기가 이렇게 슬퍼하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을 궁극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유한하고 없어질 것”을 사랑하는 이는 반드시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불행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없어질(유한한) 것에 우정을 붙이고 살다가 거기에 얽매여 버리면 불행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던 것이 없어지게 될 때, 그 사람의 마음은 갈래갈래 찢어져 자기의 비참한 실존을 알게 되고, 또한 이런 일이 있기 전의 자기 모습도 비참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외칩니다.
“오 만군의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3). 인간의 혼이 어디로 향하든지 당신에게 향하지 않는 한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비록 당신 밖에(extra te), 나 자신 밖에(extra se)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으로부터 오지 않는 아름다운 것이란,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내 영혼은 사랑스러운 것들과 함께 있고 싶어하고 또한 그것들 안에서 쉬려 합니다. 그러나 무상한 존재인 그것들 안에는 쉴 곳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온 말은 아니지만,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말은 참 유익한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세계”에 마음을 너무 많이 빼앗깁니다. 그래서 아웅다웅하고, 없으면 죽을 것 같이 덤벼들고, 그래서 실로 ‘일희일비’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여러분! 궁극을 소유한 사람! 영원을 소유한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에게 있어 참된 기쁨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과, 그 ‘자신을 주신 이유’란 ‘우리들에게 영원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신의 아들/딸’들로서!(행 17:29) 영원을 소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사실들을 참으로 기뻐합시다. 2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 이 구속의 역사 전체를 성취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참 아드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이제 그 영원을 분여받게 되었다는 사실! 바로 이것을 이 세상의 ‘유한한 것들’보다 더욱 더 기뻐하면서! 우리 구속의 도리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고, 또 성탄 주일을 도구로 하여 다시금 하나님을 찬송하고 찬미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진실로 살아가면서 해야 할 진정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을 생각하면서, 땅에 오신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를 아주 오래 전에 보여주고 있는 룻기의 말씀을 통하여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두 모델, 보아스와 오벳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기업 무르는 법
룻기의 전체적인 주제는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는 익숙한 것입니다.
룻기는 전체가 ‘고엘’이라는 주제를 보여주기 위한 성경입니다. ‘고엘’이란 “기업 무르다”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구속하다”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즉 어떤 사람이 자식이 없어 죽을 때, 그 집의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녀를 낳아 주는 것, 혹은 비슷하게 한 집이 금전적인 이유 등으로 망하게 되었을 때 가까운 친척이 대신 그 빚을 갚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은 이 둘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땅이 현대의 우리들처럼 사고 팔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가문에 땅에 종속되어 있었다), 대가 끊어진다는 것이 곧 가문의 땅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의미했고, 따라서 자식을 낳아주는 것과 대물려줄 땅을 보존시켜 주는 것은 보통 함께 있었습니다. 이렇게 형제나 친인척 중에서 그 가문의 땅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대신 아들을 낳아주건, 토지를 되찾아주는 사람을 “기업 무르는 자”라고 불렀고, 이 말이 ‘고엘’이라는 제도의 뜻입니다.
룻기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기근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땅을 떠난 엘리멜렉 가문의 이야기, 특히 그 중에서 여인인 나오미(남편은 죽었으므로)의 회복의 이야기입니다. 나오미는 기근 때문에 모압 땅으로 갔지만, 거기서 남편과 아들들을 모두 잃고 모압에서 얻은 며느리인 룻과 단 둘이서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옵니다. 나오미의 이런 모습은 ‘남편 하나님을 잃어버린 과부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강력한 장치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 나오미의 모습에다 우리의 모습을 투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17절을 보면, 여기 회복이 일어났음을 보게 됩니다. 보아스와 룻이 결혼을 했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두고 17절에서 이웃 여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오미가아들을 낳았다!”
현대인인 우리들로서는 며느리 룻이 사위 보아스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말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고엘’이라는 제도는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자기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4장 5절을 보십시오. 여기에서 보아스는 자기보다 기업 무를 서열이 더 높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하여야 할찌니라.”
그러니까 더 서열이 높은 이 사람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다음 절에 나오죠?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여기서 볼 수 있듯이, ‘고엘’ 제도에서 기업 무르는 자는 얻는 것이 없습니다. 기업 무르는 자는 자기 재산과 힘을 낭비하여 여자를 부양하고 책임져 주지만, 그녀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는 결국 이전의 죽은 남편의 아들, 그러니까 자기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는 먼저 죽은 이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보아스는 룻을 통해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는 보아스의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르는 자가 됨으로써, 그는 아이를 낳아 주었고, 그 아이는 나오미 집안의 아이가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고엘 제도’, 곧 토지법과 연결되어 있는 고엘 제도였고, 보아스는 이 일에 사용된 사람이었습니다.
여인의 회복과 교회
하나님께서 이런 고엘 제도를 이스라엘에게 주신 이유에 대한 설명을, 드라마처럼, 소설처럼 내러티브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이 ‘룻기’의 내용입니다. 즉 우리는 룻기를 통해서, 고엘 제도를 사용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인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시는가”를 분명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가지고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재판정에서 보아스가 법적으로 ‘기업 무를 자’의 지위를 획득한 후, 성경은 룻과 보아스 두 사람이 혼인하였음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혼인이 있게 될 때, 성문에서 이 혼인을 공식적으로 인증한 장로들이 보아스와 룻에게 축복의 말을 이런 방식으로 건넵니다. 11절입니다.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보아스와 혼인하는 룻을 두고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라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라헬과 레아는, 여러분도 다 아시는 대로 야곱의 두 아내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이야말로 ‘이스라엘’ 나라의 시조와 같은 이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에게서 나온 열 두 아들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라는 말의 의미는, 이 룻을 통하여 “이스라엘 나라의 형성이 시작된 것과 같은 일이 있기를 원한다!”라는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성경의 구속역사 안에서’ 읽지 않고, 단순히 이야기로만 읽으면, 장로들의 이런 축복은 “과하다”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역사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보아스와 결혼하는 룻은, 당시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여자가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에 기근 때문에 이스라엘 땅을 떠나 외국으로 피신한 가정이 엘리멜렉 한 가정 뿐이었겠습니까? 그리고 기근이 어느 정도 끝났을 때 다시 돌아온 가정이 나오미 한 사람 뿐이었겠습니까? 또한 그렇게 해서 돌아온 가정들 중에서 외국 며느리 하나 쯤 데리고 온 가정이 어디 그 가정 뿐이었겠습니까? 단순히 이야기만을 보면, 당시 거기 살고 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보아스와 룻의 혼인은 ‘평범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범한 한 여자에게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기를 원한다!”라는 축복은 좀 과한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로 치자면, 지극히 평범한 중산층 이하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너는 나중에 어른이 되거들랑 밥 걱정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아이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하면 괜찮은 축복일 수 있지만, “너는 알렉산더나 카이사르 같은 사람이 되어서, 온 세계를 정복하는 아이가 되거라!”라고 축복한다면, 이건 좀 뻥이 심한 사람의 터무니 없는 농담 같은 축복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당시에 이미 가나안 땅 안으로 들어와서 정착을 시작한 시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라헬, 레아와 같은” 그런 사람은 사실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스라엘을 다시 세울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지 그때 예루살렘 성에 거하고 있던 장로들이 뻥이 너무 심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굳이 성경에 적은 하나님이 이상한 분이 됩니다.
그래서 결론은 분명합니다. 그때 장로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말한 것입니다. 이들의 정서로 보면 이런 축복이 가당치 않았을지 몰라도, 이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정말로 필요한 그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보아스와 룻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정, 그리고 이것이 성경에 기록될 때, 이때 이 상황이란, 단지 그 때 거기 살고 있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나오미의 가정이 보여주고 있는 현실, 곧 ‘하나님의 약속을 잘 의지하지 못하여 세상으로 내몰린 교회’, 곧 ‘남편을 잃고 과부된 것과 같은 교회’에 보아스와 룻과 같은 이 ‘언약적 신실함’, 또 룻기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을 빌리자면 ‘언약적 헤세드’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오고 오는 교회들에게 무엇을 주실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언적, 계시적 선포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하여, 원래의 교회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였던, ‘베들레헴’, 심지어 ‘떡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에 살고 있었던 한 가정이 떡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고 그 약속의 땅을 떠나갔을 때, 그들이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에게 다시 기업 무를 자를 주시고, 그리고 그 기업 무를 자를 통해서 완전히 그들의 기업이 회복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 “라헬, 레아와 같게 하시고”라는 말씀은 ‘여인의 회복’, ‘교회의 회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이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선언이며, 룻의 입장에서 보자면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 하나님의 복 속에 있지 아니하던 이를 불러들여, 그 왕국의 왕후로 삼겠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마태복음에서 이 룻이 왕족의 계보에 왕의 어머니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후에 있게 될 다윗 왕가의 이른 시대의 어머니로서, 또 장차 오시게 될 모든 왕들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른 시대의 어머니로서, 하나님은 이 아무에게도 환영받을 수 없었던 모압 여자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깨달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룻기의 이런 정황을 읽으면서, ‘보아스를 통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지위로부터, 또 이방여자의 지위로부터, 왕후의 신분으로 회복되게 된 이스라엘’을 읽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들, 특히 유대인인 아닌 우리들로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진 사건 이 자체가 ‘룻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업 무를 자 보아스, 구속자 보아스를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써,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우리를 ‘로열 패밀리’, 왕족의 일원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보잘 것 없고 가치 없는 우리들, 아무런 힘도, 능력도, 소망도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 품으로 불러주셔서, 온 우주를 주시려고 하신 이 일! 우리는 이것을 이 룻기를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편 보아스, 이스라엘의 참 남편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이 룻기에서 발견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룻기에서 나오미나 보아스는 ‘받아들여짐직’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헤세드’, 곧 그분의 자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보아스는 협박을 받지도 않았고, 자기가 애를 써서 그 일을 떠맡아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남편, 우리의 보아스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막중한 손해’를 감수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래서 형편없는 신부를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시기로, 그들의 부채, 그들의 죄악의 삯들을 떠맡아주시기로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왜요? 글쎄요......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사랑하기로 하셨는지,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물러주시려고 했는지, 우리는 이유는 잘 모릅니다. 그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말한 정도로 만족하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이 그분을 행복하게 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즉 우리의 존재가 그분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언가를 증대시키기 위해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우리는 그분의 자기 충족을 위한 ‘도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빛이 비추는 대상이 빛을 밝게 하지 않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증진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궁극의 선이시기 때문에 세상 만물이 사랑받게 하시기 위하여 일하십니다. 즉 하나님께는 신적 삶을 관조하는 것 말고는 궁극의 목표가 없습니다......하나님은 우리가 최고의 선에 이르게 하려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의 선에 기여하게 하려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룻기에 나오는 두 번째 축복은 12절에 나옵니다. 여기에도 11절과 마찬가지로 구약의 인물이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경의 본의를 제대로 읽지 않는다면, 이런 류의 축복은 마치 잔칫집을 초상집과 같은 분위기로 만들기 십상은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장로들이 축복하고 있는 “다말”이라는 여자, 그리고 “유다”라는 사람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로 아들을 낳은’, 오늘날로 치자면 말할 수 없는 패륜을 저지른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2절에서 장로들이 축복한 바, “이 태어나는 아이를 통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다말과 유다의 이야기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라는 말의 의미에 집중해 보도록 합시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 38장에 나옵니다.
당시 예수님의 조상이 될, 그리고 유다 지파의 조상이 될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라고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게”(2절)됩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낳게 되죠. 혼인의 순수성을 지켜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면서, 동시에 장차 예수님이 나실 계보가 되어야 할 유다가 ‘가나안 여자’와 동침하고 아이를 낳는 일은, 당시 이들의 신앙 상태가 어땠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때 낳은 아이들이 셋이었는데, 엘, 오난, 셀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아이들이 자라 첫째 아들인 엘이 혼인할 시기가 되었고, 엘은 ‘다말’이라는 여인을 아내로 취하게 됩니다(6절).
그런데 이어지는 7절 말씀을 보면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엘이 어떤 점에서 악했는지, 또 어떤 이유로 하나님께서 죽이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단지 유다의 장자 엘이, 하나님께서 자연적인 이유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을 만큼 악했다는 사실 정도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이 불가피했을 정도로 엘이 악한 사람이었다......정도만을 생각해 두도록 합시다.
졸지에 다말은 과부가 되었습니다. 과부가 되었다는 점에서 조금 전에 살폈던 룻과 나오미의 집안과 유사점이 있습니다.
엘이 죽자, 유다는 수혼법에 따라서 동생이었던 오난에게 말합니다. 8절에 나와 있습니다.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스라엘의 수혼법을 현대의 관점에서 보시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음탕한 성적 부패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문을 존속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가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현대의 관점으로 음행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어쨌든 둘째 아들이었던 오난은 죽은 형 엘의 뒤를 이어줄 아이를 위해서 형수에게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때 오난의 행동을 성경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의 정황을 지나치게 일상적인 것으로,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으로 읽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 오난의 마음, 이 오난이 ‘생활적인 면에서’ 맞게 된 어떤 처지를 먼저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난의 행동은 ‘있음직한 일’이 되게 됩니다. 오난은 태어난 아이가 자기의 씨로 인정받게 되지 못할 줄을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그것을 막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하십시오. 오난은 지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적 문제’에 맞닥뜨린 것이 아니라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과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수혼제를 통해서 형에게 자식이 없을 때 동생을 통하여 ‘형의 아들’을 낳아 주도록 법을 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난은 그것이 싫었습니다. 마치 앞에서 보았던 보아스보다 더 서열이 빨랐던 친척 같습니다. “내 재산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가 오난의 마음과 똑같습니다.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그러니까 오난은 하나님의 법이고 나발이고, 내 것이 되지 않을 줄 알았으니 율법과 충돌하는 방향을 선택한 것입니다. 죄악의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를 이으라고 하신 명령에 반항하면서 듣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오난도 죽이십니다.
유다는 졸지에 두 아들을 잃고 다말에게 말합니다. “네 아버지 집에 가 있거라. 셋째 아들 셀라가 자라면 다시 주도록 하마. 자칫하면 셀라까지도 죽을까 한다.”(11절)
이 말을 듣고 다말은 아버지의 집에 가 있습니다.
하지만 14절 말씀을 보면,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줄 마음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서방 잡아 먹은 년”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다말이 무언가 불길한 징조가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하나님을 모욕하고 무시하여 죽은 제 아들 생각은 하지 않고 원인이 다말에게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14절을 보면 유다는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말을 아내로 주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말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다말은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유다가 딤나로 올라간 틈을 타, 창녀로 여겨 자기를 돈으로 살 수 있도록 거리에 나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유다는 성적으로 타락한 경향을 가진 사람임에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다말의 덫에 걸려들었고, 유다는 다말과 동침했으며, 그 결과로 다말은 아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 임신한 다말이 남편도 없는 사이에 임신했으므로 불륜으로 죽임을 당하려 할 때, 아이의 아비가 자기 시아버지인 것을 밝힘으로써 죽음을 면하게 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해서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베레스’였습니다(정확히는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
이 긴 이야기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또 룻기에서 장로들이 바로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 축복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에서 ‘다말이라는 한 여자가 어떻게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온갖 악한 방법을 동원하여 결국에는 그것을 성취하는가’라는 것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절대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은 ‘룻이 음란한 여인이 아니었듯’, ‘다말 또한 음란한 여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고 있는 여자들(다말, 라합, 룻, 밧세바-밧세바의 경우는 약간 다를 수 있다, 마리아)이 음란한 여인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화적 정황과 다르기 때문에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는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다말은 ‘음란했기 때문에’ 시아버지와 동침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렇게 했던 것은 (비록 방식이 잘못이었다 하더라도) 그녀로서는 ‘하나님의 율법에 송사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다말은 ‘음란한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자신의 처지를 요청하고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말’과 ‘유다’는 어떤 점에서 대척점에 서 있습니까?
우리는 유다가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끊어버릴 위험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인 것을 보아야 합니다. 유다는 가나안 여자에게 내려갔고, 불의한 방식으로 자식을 낳았으며, 이제 그 아비의 뒤를 따라 그 자식들도 여호와의 법에 저항적인 것을 봅니다. 여기 유다의 편에는 ‘신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들은 악하고, 불성실하고, 패역한 우리 인생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들만 가득 차 있습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다말은 마치 율법을 따르려 했던 룻과 같이, 하나님의 법에 의지합니다. 비록 방식은 잘못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며느리 다말을 사용하셔서, 이 언약의 계보가 이어지게 하십니다. 며느리 다말이 하나님의 법에 의지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이 태어나실 계보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룻기의 장로들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이라고 축복했을 때, 거기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까? 이들은 무엇을 축복한 것이라는 말입니까?
이들의 축복이란!
“언약에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언약적 패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씨는 멸절되게 되었으며, 우리의 후손은 모조리 없어지게 되었고, 믿음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 그분의 교회는 문을 닫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태어나게 하신 이 아이를 통하여!그 계보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신다! 바로 이 복이 너 보아스와 룻의 집안에도 있게 되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태어난 아이 오벳은! 언약이 끊어져 멸절 관계에 있게 된 우리를 향하여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상황과 똑같은 것입니다. 오벳은 그야말로 ‘구속적 아기’였고, 그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성취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이것이 룻과 보아스의 상황과 얼마나 똑같은 것입니까!
우리가 앞에서도 살핀 것처럼, 나오미의 집안은 ‘남편 없는 과부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보아스를 보내어 이 계보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창세기의 시절에는 유다의 패역으로 인하여 이 계보가 끊어지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언약의 계보가 사라지지 않도록 다말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장로들의 ‘성령 안에서의 통찰력’을 봅니다!
이들은 ‘아무 말이나 막 던진’, ‘과하게 아무렇게나 말한’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성령의 영감 안에서 본 예언이요, 계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룻기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됩니까? 그리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교훈을 깨닫게 됩니까? 우리는 룻기의 말씀을 통해서 부실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봅니다. 우리는 언약 안에 있다고 해서 언약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족은 생계의 문제 때문에 약속의 땅을 버리고 떠났고, 결국은 기업 무를 자가 없으면 대가 끊기게 되어버린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유다의 집안은 예수님이 오셔야 하는 집안인데, 아들이 모조리 죽어버려 대를 이을 수 없는 집안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고엘 제도를 통해서, 수혼제를 통해서, 기업 무를 자를 보내시는 일을 통해! 또 그 기업 무르는 일을 통해 태어나는 아이를 통해!
우리는 룻기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룻기의 마지막은 “이새는 다윗을 낳으니라”(룻 4:22)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제일 처음에 나오는 족보의 시작 부분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입니다. 우리는 룻기가 가깝게는 다윗을 겨냥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겨냥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불신실, 우리의 어리석음, 우리를 통하여 단절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왕국을, 새롭게 되살리십니다. 우리의 기업 무르실 자인 새 보아스이신 그분을 통해서, 또 단절되고 끊어질 계보를 잇기 위하여 태어난 씨인 새 오벳인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끊어져 버릴 수 있었던 이 땅의 계보를 이어가십니다.
여러분은 ‘성탄’이라는 주제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만으로는 ‘완전한 멸망’, ‘영원한 소멸’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오셔서, 이 생명의 존속자, 이 계보를 이어주실 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잘나서 우리가 여기 교회로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의 유업이 되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이으셨고, 바로 이로 인하여 우리는 이제 “소멸되지” 아니하고, 살아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찬송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