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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뒤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누가복음 14:25-35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눅 14:25-35 / [제자가 되려면] 큰 군중이 따라오자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26)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사랑해야 한다. 아니, 자기 목숨보다도 더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건물을 지을 때 먼저 견적을 뽑아 보고 자기에게 그 비용을 지불할 돈이 충분히 있는가를 검토해 보지 않고 건축을 시작할 사람이 있겠느냐? 29) 만약 기초만 서둘러 세워 놓고 완성할 힘이 없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느냐! 30) `저기 저 사람 좀 보게. 건축을 시작만 해놓고 돈이 바닥이 나 저러고 있다네!' 하고 조롱할 것이다. 31) 또한 어떤 왕이 전쟁계획을 세울 때에 2만 명의 적군을 1만 명으로 당할 수 있을는지 먼저 자기 참모들과 앉아서 의논하지 않고 무작정 나갈 수 있겠느냐? 32) 만일 이길 힘이 없다면 적군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절단을 보내어 싸우지 말고 잘 지내 보자고 화해를 청할 것이다. 33)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34) [맛 잃은 소금 ; 마 5:13, 막 9:50]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35) 맛 잃은 소금은 흙으로도 못쓰고 사료로도 쓸 수가 없어 밖에 버려질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동행하는 수많은 무리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25-27)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고 있는 예수님을 수많은 무리가 따라갑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예수님의 뜻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가시는 길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이들은 수많은 이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이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로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메시야가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무리의 빗나간 기대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가 되는 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목숨과 자기의 가족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며, 자기의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무겁고, 고통스러우며, 매우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가셨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그 길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를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28-35) 예수님은 망대를 세우는 자와 전쟁을 하러 나가는 왕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들에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점검해 보기를 기대했습니다. 즉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이전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일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실패합니다. 이는 애초에 예수님을 따라나서지 않은 것보다도 못한 상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스스로 망신을 당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죄악을 범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결코 쉬운 길이 아닌 온전한 순종과 헌신을 바라십니다. 그보다 더 귀한 길은 없기에 성도는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제자는 세상의 소금입니다(마 5:13). 순수한 소금은 맛을 잃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염된 소금은 맛을 잃어버려 그 기능을 할 수가 없으며, 그런 소금은 버려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듣고 판단하고 따르는 것은 들은 자들이 선택해야 합니다.
적용: 예수님이 지금 당신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제자를 찾고 계십니다. 순종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하루 분량의 즐거움을 주시고 일생의 꿈은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끼게 해 주소서. 떠나야 할 곳에서는 빨리 떠나게 하시고 머물러야 할 자리에는 아름답게 머물게 하소서. 누구의 말에나 귀 기울일 줄 알고 지켜야 할 비밀은 끝까지 지키게 하소서.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게 하시고 그 사람의 참 가치와 모습을 빨리 알게 하소서. 용기를 주소서.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드러내는 용기를 주시고 용서와 화해를 미루지 않는 용기를 주소서. 언제 어디서나 사랑만큼 쉬운 길이 없고 사랑만큼 아름다운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늘 그 길을 택하게 하소서.
< 설 교 >
호크마 주석
=====14: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 바리새인의 집에서 떠나 예수께서는 게속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무리들은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여기서 '허다한 무리'(* , 오클로이 폴로이)는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상당히 많았음을 시사하며 아울러 예수의 인기가 대단하였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늘 예수께 현세적 축복을 갈구하는 무리들이었다. 혹자는 이 무리가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레자들 이었고(Farrar),이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등극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따랐던 것이라고 한다(Plummer).
돌이키사 - 예수의 가르침이 사작 될때 많이 사용되는 용법이다(7:9; 9:55; 10:23; 22: 61; 23: 28 ). 예수께서 이] 시점에서 진행을 정지시키신 것은 무리들의 빗나간 기대에 제동을 걸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14:26
미워하지 아니하면 - 예수에게 나아오는 것이 그의 부르심에 대한 일차적인 응답이라면 본절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보여야 할 이차적인 응답에 해당한다. 일차적인 응답으로부터 이차적인 응답으로 발전하기 의해서는 수행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의 모든 혈육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심리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미워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세이'(* )가 '조금사랑하다', '덜 사랑하다'의 뜻으로,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덜 귀히 여기는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마 19:29). 결국 예수의 말씀은 무리들이 당신을 따름에 있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예수의 뜻을 추종하려는 것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즉 세상의 일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 중 후자의 것에 궁극적(窮極的) 가치를 두지 않고 있다면 예수를 따르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한편 누가는 마태가 기록하지 않고 있는 '형제 자매' 및 '아내'와의 단절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 중 특히 '아내'에 관한 부분은 20절과의 관계에서 누가가 특별히 기록한 것이라고 본다(Marshall).
=====14:27
자기 십자가를 지고 - 본절의 문구는 9:23에 표현된 진리를 부정적 형식으로 바꾼 것이다. 여기서 부정적인 형식으로 말씀하시는 까닭은 지금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십자가 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예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여기서 '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스타조'(* )는 요19:17에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예수께서 십자가 지신 것처럼 그를 따르려는 자는 '누구나' 십자가를 져야 하며 당시에 죄수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자신이 져야 했듯이 예수를 따르는 자도 자기의 십자가를 자기가 몸소 져야 하는 것이다.
=====14:28
망대 - 이는 13:4에도 언급되는데 그와 달리 여기서는 '농장 건물'을 뜻한다고 본다(A.G.Marshall). 이러한 건물을 지을 때는 기초 공사만 놓는데도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먼저 앉아 - '앉아'(* ,카디사스)는 정밀한 계산을 위해서 정좌하여 앉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거기에 소요(所要)되는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여 자기가 확보한 돈으로 건축을 시작해도 될지 잘 판단해야 하는 것처럼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도 그길은 결코 부귀영화를 누리는 길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길임을 알아 냉철한 판단에 의해 따르기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때 주께로 향한 뜨거운 열정을 보이던 사람이 얼마가지 않아 작은 시험조차 이기지 못해 쓰러지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더욱 깊이 상고되어야 할 것이다.
=====14:29
기초만 쌓고...이루지 못하면 - 아마 당시에는 치밀하고 완벽한 준비없이 건축을 시작하여 기초만 쌓고 건축을 증단하거나 또는 건축 중간에 비용이 없어 중단하는 미련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듯하다. 일설에 의하면 빌라도가 수도 공사를 진행시키던 중 공사비 부족으로 중도에 공사를 중단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이상근).
비웃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피이제인'(* ))은 '놀림감'을 만들다', '조롱하다', '우습게 보다'의 뜻으로 어리석은 건축자가 당하게 될 부끄러움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고 신앙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일에 있어서 실패가의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애초에 따르겠다고 나서지 않은 것만 못한 상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망신을 당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죄악조차 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4:30
이 사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 호 안드로포스'(* )는 경멸적 또는 풍자적 용법으로서 '이 친구'라는 뜻이다. 예수를 따르려는 자는 일시적인 충동이나 잘못된 비전(Vision)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시작될 경우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지는 참다운 제자가 될 것이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작의 귀중함은 결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히 6:11).
=====14:31
싸우러 갈 때에 - 정확한 판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주제의 비유가 연속하여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앞의 비유처럼 '너희 중에'라는 서두가 없는데 이는 거기에 있던 무리 가운데 왕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인 만큼 더욱 정확한 판단이 요구된다.
헤아리지 - 만명을 거느린 임금이 이만명을 이끌고 공격해오는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을 때 승산이 있는지의 여부를 빨리 판단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조속히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집단 몰사할 가능성이 많겠기 때문이다. 적군의 숫자가 아군에 비해 두 배나 많은 것으로 언급된 사실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는 일이 마치 중과부적(衆寡不敵)과도 같은 상황처럼 어려움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써만 감당되어질 수 있다(히 2:18).
=====14:32
화친을 청할지니라 - 이는 순수한 전쟁의 상황에서 적용되는 것이지 선과 악의 싸움 또는 영적인 싸움에서 적과 타협하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 비유의 초점은 화친을 하고 안하고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임하는 자의 냉철한 판단력에 맞춰져 있음에 유의하자.
=====14:33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 27절의 구체화이자 두 비유(28-30, 31-32절)의 결론으로서 본문의 말씀은 매우 증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리들은 예수를 따르며 그의 제자가 되려고 결정할 때, '모든 소유'를 버려야하는 상황마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 후에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한다. 결국 소유에 대한 집착은 제자가 되는 것 그리고 구워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18-20절). 본문에서 '버리다'(* , 아포타쎄타이)는 말은 사용되는 대상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데, 사람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작볕 인사를 뜻하고 사물에 대하여 사용될 때는 '포기하다', '버리다'의 의미가 된다. 특히 '아포타쎄타이'는 현재형으로서 그 '포기'가 지금 당장 결단해야 할 성질의 것임을 말해준다. 한편 본문에는 18:22의 부자 청년에게 주어진 명령과는 달리 포기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본문의 말씀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 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무소유의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의식을 버리는 것 또는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을 강조하는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마음대로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에게 위임(委任)된 것이라고 여기는 청지기 정신을 가지라는 말씀으로 이해된다(Liefeld).
=====14:34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 소금은 음식의 맛을 조절하는 양념으로 사용되었고 종교 의식상의 용도 곧 소제(레 2:13)와 번제(겔 43:24)의 예물 위에 뿌리는데도 사용되었다. 또 성전에 피우는 향의 성분 속에 소금이 들어갔으며(출 30:35) 새로 태어난 아기를 위해 의학적 목적으로 소금을 뿌리기도 했고(겔 16;4) 방부제로 쓰기도 했다. 이중 특히 소금의 역할로 중요한 것은 맛을 내는 일이다. 본문도 이점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는다는 표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본래 이 말씀은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없듯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복음도 없어지거나 그 영향력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이 전승과정에서 제자들의 변절 가능성을 지적하는 말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G.Bertram). (2) 가축의 똥을 연료로 땔 때 소금을 촉매제로 함께 섞어 사용했는데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소금의 촉매력이 없어져 화력이 떨어지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본다. (3) 팔레스틴에서 만들어진 소금은 사해(死海)의 소금물을 증발시켜서 만든다. 그런데 사해의 물에는 염화나트륨 외에도 여러가지 성분이 있기 때문에 수분을 증발시키면 거기에는 소금과 광로석 및 찌꺼기가 남게 된다. 이때 소금이 먼저 결정되므로 그것들을 모으면 순수한 소금이 되지만 쓴 맛을 내는 광로석을 소금으로 착각하여 채취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잘못 채취된 광로석의 표면에 묻어있던 염분이 용해되어 버리면 그것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는 것이다(J. Tinsley, Marshall). 이 세개의 해석 가운데 (3)의 해석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말씀을 앞의 말씀과 관련지어 이해할 때, 이는 소금도 그 맛으로 소금됨을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의 제자들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과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으로 참다운 제자됨을 확인받을 수 있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14:35
땅에도,거름에도 쓸데없이...버리느니라 - 소금이 땅과 거름에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소금이 비료나 거름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부정과 긍정의 견해로 갈리기 때문이다. (1) 부정하는 견해-팔레스틴에서 소금을 거름으로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소금은 땅을 황폐하게 한다는 언급이 있을 뿐이다(Jeremias). (2) 긍정하는 견해-현대 이집트에는 소금기 있는 흙을 비료로 사용한 증거가 있다(H. Gressmann). 소금은 잡초를 죽일 뿐만 아니라 땅속깊은 곳에서 사해의 소금이 가지고 있는 칼슘성분을 용해시켜 토양을 개량시키고 아울러 인분의 부패를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E. Deatrick). 이러한 양 견해에 대해서 어느 것이 옳은지를 판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의 사실성 여부에 관계없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즉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태는 누가의 본문보다 더 강하고 경멸적(輕蔑的)인 표현인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밝힝 뿐이니라"로 서술하고 있다(마 5:13).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매우 의미있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던 무리들에게(25절) 필요한 말씀을 충분히 해주셨다. 이제 남은 것은 무리들이 예수의 말씀을 잘 이해하여 현명한 결단을 하는 일이다. 그 결단은 강요에 의한 것도 구걸에 의한 것도 아니요 다만 듣는 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제자가 되려면
눅 14장 25-35절 / 김철한목사
제자란 따르는 자다. 제자란 섬기는 자다. 제자란 배우는 자다. 제자란 닮아가는 자다. 바로 이러한 제자가 보이지 않기에 교회는 교회가 아니고 단체가 되어 간다. 모임은 있는데 복음의 광채를 발하지 못한다. 다른 말로 맛을 잃어버린 소금인 것이다. 제자의 삶을 살려는 각오와 결단이 없이 대충 웃고 기뻐하고 교인들 틈에 섞여 그리스도인인 척 하기에 맛을 낼 수 없는 소금이 된 것이다. 맛이 없는 소금은 버려진다. 길가에 버려져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밟히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광이 밟히지 않고 교회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려면 예수의 참 제자가 되도록 살아야 한다. 즉 이 일을 위해 제자가 되려는 결단과 선택이 먼저 있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제시하는 제자가 되려면 그 선택을 몇 가지가 된다.
1. 사람의 정에 얽히는 것을 뛰어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눅 14:26)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였다.
여기 제자가 되려면 “미워하라”고 한다. 그것도 부모, 처자, 형제, 자매를 미워하라고 한다. 심지어 자기 목숨마저도 미워하라고 한다. 도대체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 주님의 정신인데 미워하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정이란 것이 주님 따르는 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더욱이 혈육을 나눈 가족의 정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보다 더 질기고 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자라고 하면서 부모의 정, 가족의 정, 아내의 정에 얽히다 보면 주님을 따르기 어렵다. 이 세상 부귀 영화 등 모든 것을 뛰어넘어 주님이 말씀하신 곳으로 따르고 싶은데 아내가 만류한다. 형제가 만류한다. 나를 기르신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 아내가, 나를 믿어주는 형님이 정을 담아 호소한다. 그러면 마음은 흔들리고 붙잡아야 할 중요한 가치를 놓아버리게 만든다. 정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도 보류하게 만들고 섬김과 희생의 삶을 보류하게 만든다. 마16:21~24에서 예수님은 정으로 다가오는 유혹을 이기셨다. 십자가의 길을 만류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꾸짖으셨다. 그러므로 제자가 되려면 가족들의 정에 얽매인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정에 인질이 되어 아무 것도 실천하지 못하는 자는 제자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가정 사역, ‘너를 행복하게, 나를 행복하게’하는 사역은 순교자를 낼 수 없다. 정을 넘어 거룩한 생을 살지 못하게 한다. 이제 크리스챤이라면 뛰어넘으라. 정에 매이는 것을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사람의 일로 말하는 자, 그 자가 가족이든, 형제 친척이든, 자기 자신이든 주님을 어기게 한다면 그를 미워하고 나가야 한다.
주기철 목사님이 감옥에 갇혔을 때 일본 순경은 주 목사를 출옥시킨다. 따뜻한 집에 돌아가 사랑스런 아내의 돌봄을 받게 되면 마음이 약해져서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주 목사를 사모님이 미워한다. 주님을 따르는 목사가 자기 육신의 평안함을 바라고 집으로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주의 종답게 불사각오 정신으로 신앙에 승리하라고 남편 주 목사를 감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렇게 누구든지 주를 따르므로 주의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정에 얽매이는 것을 뛰어넘는 선택이 요구된다. 목숨마저도 제자의 길을 가로막는다면 미워하는 선택이 필요한 것이다. 내 생명의 안전을 구걸하기 위해 예수를 외면한다면 그 목숨을 미워하라. 주님을 쫓아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인간적인 정을 단연코 미워하라.
2. 수치와 저주, 아픔의 고통을 뛰어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눅14:27)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제자가 되려면 주를 쫓아야 한다. 주를 쫓을 때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남의 십자가가 아니다.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자기 십자가다. 십자가 없이,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 없이는 제자가 될 수 없다. 십자가는 무엇인가? 주님이 못 박히신 자리다. 십자가는 이 땅에서 최고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사형 방법이다. 십자가에는 수치와 조롱, 저주와 아픔의 모든 고통이 담겨 있다. 내가 나의 십자가,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이 모든 아픔을 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질 때 만이다.
사람들은 수치와 저주를 싫어한다. 아픔의 고통이 생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자의 길은 십자가 없이 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따를 때 억울하고 분하게 당해야 하는 고통의 크기를 피하지 아니하고 아픔을 뛰어넘어 인생의 고통보다 더 소중한 주님을 붙잡아야 한다. 그것이 제자다. 어떠한 고통으로 가로막아도 피하지 않는다. 그 아픔을 짊어지고서라도 한다. 어떠한 괴로움의 아픔도 주님을 쫓아가는 일을 막을 수 없다. 제자의 영광이 훨씬 더 큰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제자는 수치와 저주를 뛰어넘어 예수를 놓지 않는 자다. 어디서든지 예수를 선택하는 자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통을 뛰어넘는 선택을 하지 못하면 제자가 아니다. 정말 ‘No pain, No glory. No Cross, No Crown’을 외치며 십자가의 짐을 받아들여야 제자인 것이다.
3. 소유에 집착하는 것을 뛰어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눅 14:33)
눅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사람은 무엇인가 더 가지려는 재미로 세상을 산다. 돈도, 땅도, 집도 가지는 기쁨으로 일을 한다. 사람에겐 남보다 더 가진 것을 자랑하고 가진 것으로 인해 자기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그런데 그 소유욕을 버려야 한다. 제자가 되려면 소유에 집착하는 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소유에 집착하고 관심을 두는 순간 그것은 탐심이 되고 우상 숭배가 된다. 권세를 더 갖고 싶고 명예를 더 갖고 싶으며 인기와 물질을 더 갖고 싶어서 매달리는 자는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고 붙잡으려 가는 자가 무슨 예수의 제자인가? 다 버려야 한다.
더러운 것을 버리고 재물과 토지, 집을 버리고 세상 욕심을 버리고 나의 소유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가 더 행복의 조건이요 예수가 더 붙잡아야 할 분이라는 선택이다. 주님이 더 귀하고 주님이 더 가치가 있고 주님이 더 기쁨이 된다는 말이다. 주님이 더 소중하기에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내가 지금 돈을 버는 일에 손해가 생겼어도 ‘I'm OK’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마4:17~20을 보라. 예수님을 따르게 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2의 길을 간다. 그때 그들은 버렸다.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아갔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간다. 제자가 되기 위해 버리는 선택을 단호하게 하였다. 머뭇거리거나 주춤하지 않았다.
원종수 권사, 그는 미국 암 전문의 박사로 연봉을 더 많이 받는 곳으로 초빙 제의를 받았을 때 그는 거절했다. 왜냐하면 새벽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과의 교제를 위해 재물을 내려놓았다.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는 주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갖는가?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가로막는 인간의 정을 미워하고 거절하는가?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가로막는 자기 고통의 몫을 수용하고 짊어지는가?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가로막는 소유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가?
이제 내가 예수의 제자인가 아닌가는 당신 자신이 안다. 정 때문에 미워할 것을 미워하지 못하고 고통 때문에 짊어질 것을 짊어지지 못하고 욕심 때문에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나는 신자라도 세상과 벗하며 세상을 따르는 세속인이다. 정말 예수가 좋아서 예수께로 온 당신은 제자인가 아닌가? 30년, 50년 제자를 기르는 교회 안에서 우리는 머물며 맴맴 돌았을 뿐 제자로서의 선택을 유보한 체 산 것은 아닌가?
제자가 되려면 분명해야 한다. 제자의 길은 대충 대충으로 걷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제자가 되어가기는 깊은 헤아림과 계산을 통해 철저히 수지 계산을 하고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더하면서 확실한 선택을 하는 일이다. 망대를 세우는 것처럼 준비하는 것이다. 이제 결단하고 제자가 되자. 제자의 길을 걸으라. 제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고 제자의 영광에 나아가라.
제자가 될 수 없는 세 가지 경우
눅 14장 25~33절 / 김흥규목사(내리교회)
폭염으로 찌들었던 날씨가 어느 날 갑자기 선선해졌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가을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야말로 1년 중 가장 좋은 계절이 왔습니다. 하늘은 높고 맑고 햇빛은 따사롭습니다. 들판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추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좋은 계절에 우리의 신앙도 새로워지고 깊어져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내리교회에서는 특히 9월에 그동안 얼굴이 보이지 않던 장기 결석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달로 정했습니다. 그렇게 열심을 내던 분들이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습니다. 한 주 빠지고, 두 주 빠지고, 계속해서 빠지다 보니 어느새 세상에 깊이 빠져 아예 교회 출석을 못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당연히 명단을 만들고 전화도 드리고, 심방도 해서, 최선을 다하여 돌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역자들만의 힘으로는 부족하니 우리 모두가 다함께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으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기어코 찾을 때까지 찾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9월 22일부터는 김진홍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할 예정입니다. 이번 부흥회야말로 여러분들처럼 교회에 열심히 다니시는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저런 이유로 그동안 교회에 나오지 못하시는 분들까지 다 연락하고 심방해서, 그야말로 우리 내리 가족 총동원 부흥성회로 모여야 할 것입니다.
<제자가 되기 어려우 세 가지 경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크리스천이 된 것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분의 제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 옛날 2천 년 전에 12명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구세주로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대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너무 쉽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냥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저절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들어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아니, 간단하지 않을 정도를 넘어 우리 같이 보통 사람들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불가능해보이기까지 합니다.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 14장 25-33절은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제자도(discipleship), 즉 제자가 되는 길을 일러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어려운 세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로, 26절을 봅시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가족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과 처자식과 형제와 자매까지 미워해야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지만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어려운 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의 가족과 자기의 목숨까지도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물론 예수께서 “미워하라”는 표현을 쓰실 때의 원뜻은 마음 깊은 곳에 원한 감정을 갖고 원수를 미워하듯이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고, “돌아서라”(turn away from), “멀리하라”( detach oneself from)는 의미를 갖습니다. 창세기 29장 30절에 보면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를 더 사랑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은 야곱이 레아를 미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라헬보다 덜 사랑했다는 뜻이지요. 야곱은 결코 레아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미워했다면 레아와 동침해서 아들을 일곱 명이나 낳았습니다. 야곱은 단지 라헬보다 레아를 덜 사랑했을 뿐이고,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가족들과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진정한 의미는 적대감을 가지고 증오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대개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랑하는 대상은 자기의 가족이나 자기의 목숨일 때가 많은데,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이나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알코올이나 마약과 같은 최악의 것들을 버려야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최선의 것들조차도 두 번째, 세 번째가 되게 해서 예수님을 오직 으뜸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중동 지역에서는 한 개인의 정체성은 언제나 가족과의 유대관계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한 집안의 가장이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로 개종할 경우 집안 식구 전체가 기독교인이 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마치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부족의 추장 한 사람이 개종하면 그 마을 전체가 개종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가장 떼어내기 어렵고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 가족관계인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가장 중요한 관계를 두 번째로 둘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27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우리는 너무 자주 오해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마치 무슨 큰 부담이나 고통을 지는 것처럼, 심지어 속을 썩이는 남편이나 자식을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억지로 지는 골칫거리나 부담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실 때 구레네 사람이 구경 나왔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적이 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진 십자가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자발적으로 기꺼이 진 십자가가 아닙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였을 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지는 십자가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하여 어떤 희생이나 고통도 감수하고 모욕과 조롱까지도 감당하겠다는 자세를 말합니다!
셋째로, 33절을 봅시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신의 소유물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이 세 번째 제자의 조건을 말씀하시기 전 두 개의 비유를 드십니다. 먼저 망대 짓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28-30). 망대, 즉 탑을 세우기 전에 먼저 비용 계산부터 먼저 한다는 말이지요. 예산 문제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건물부터 짓게 되면 기초만 달랑 놓은 채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게 된다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비유를 더 드십니다. 선견지명이 있는 임금의 비유입니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전쟁을 할 때 먼저 상대편 전력과 자신의 전력을 비교하고 따져봐서 충분히 승산이 있는가를 검토부터 먼저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편 임금이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올 때 자기의 군사는 겨우 만 명밖에 되지 않아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설 경우,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비유는 모두 사전 검토, 어떤 일에 뛰어들기 전에 손익계산부터 먼저 한다는 말씀입니다. 망대를 짓는 사람이 예산에 대해서 충분히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건축에 뛰어들지 않고, 전쟁을 치르는 이 역시 이기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인가를 따져 본 다음에 전쟁에 뛰어든다는 말이지요. 예수께서 이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희생도 치를 각오고 하지 않고 너무 쉽게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결코 쉽고 가벼운 길이 아닙니다.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가 순교당한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것처럼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건축하는 사람이 건축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예산을 다 따져보고 건축에 뛰어들 듯이, 전쟁을 앞둔 임금이 상대편 전력과 자기 편 전력을 비교 계산해서 승산 여부를 따져본 다음에 전쟁을 치르듯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도 이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가를 따져본 뒤에 결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섣불리 쉽게 생각하고 뒤따랐다가 도중에 낭패를 보는 이들이 그 얼마나 많습니까?
<그 멀고 험한 길, 제자의 길>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제자의 길이 그리 수월치 않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가족이나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도 참 제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자기 소유물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도 주님의 제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좋게 여기는 것들을 포기하고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그 비용을 충분히 계산해 봐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너무 쉽게 안이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아무런 희생도 손해도 모욕이나 조롱도 치르지 않은 채 제자가 되는 값싼 은혜를 추구해왔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들은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리 귀한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문제는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너나없이 낙심하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보통 사람들이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가족보다, 자기 목숨보다, 자기 소유물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한계성을 절감하고 우리가 낙심하고 절망할 때가 바로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출발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결단이나 각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합니다. 내 의지나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구할 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가족이나 목숨이나 소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제자의 길이 결코 손쉬운 값싼 은혜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터키의 노벨 문학상 작가 오르한 파묵은 소설쓰기를 바늘로 우물을 파는 작업으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각고의 정신으로 글을 쓴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도 바늘로 우물을 파듯이 치열하고 진지하게 걸어가야 할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담설전정(擔雪塡井)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어깨에 짊어질 담, 눈 설, 메울 전, 우물 정. 무엇을 하더라도 눈을 짊어지고 우물을 메우는 것처럼 하라는 말이지요. 우물을 메울 때 흙을 져다 부어야지 눈을 져다 부어봤자 다 녹아 없어지고 맙니다. 참으로 무모한 일이지요! 하지만 담설전정이라는 말속에는 중단하지 말고 끝없이 노력하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흙을 져다가 우물을 메우면 손쉽게 금방 메워지겠지만 결국 우물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눈을 져다가 우물을 메우는 일은 바보처럼 보이지만 눈은 스스로 녹아 없어져 우물은 계속 있게 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기 위하여 겸손히 끝없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의 좋은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눅 14장 25~33절 / 이대성목사(광성교회)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여러분! 어제는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스승의 날 제가 성경공부를 할 때에는 그래도 스승과 제자의 정을 나누곤 했었답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그 마저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었는데 여전도회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참 아름답지요? 정말로 감사합니다^0^
스승의 날이 되면 아버지와 함께 찾아뵙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영적 은사이시자 제 결혼식 주례를 서 주신 고 임택진 목사님이십니다. 임택진 목사님은 제가 지금까지도 진심으로 존경하는 진짜 목사님이십니다.
그 분을 찾아뵙게 되면 우리에게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我生敎會死 我死敎會生’(내가 살면 교회가 죽고,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산다.)
임목사님은 지도자의 참된 권위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심에 자리 잡는다고... 탐심을 버리고 자신을 비울 때, 더 나아가 자신을 죽일 때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 영혼을 구원하신 참 목자의 삶을 따라갈 수 있다고 강조하곤 하셨습니다.
오늘 따라 참 스승이셨던 ‘我死敎會生’(내가 죽으면 교회가 산다.)는 그 분의 말씀이 여전히 아직 많이 부족한 저 이대성 목사에게 힘과 소망을 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성경을 보면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표현 그대로 ‘수많은 무리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저마다 부푼 꿈을 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열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 직접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원래 제자라는 말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배우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치 학생이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수업을 받듯이 열심히 배우는 자, 그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둘째, ‘훈련 받는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러분! 제자를 영어로 뭐라고 말합니까? ‘disciple’ 이 ‘disciple’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말과 일맥상통하는가 하면 ‘discipline’ 즉 ‘훈련하다’는 말과 맥을 같이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는 훈련받기를 즐거워하고, 계속해서 훈련받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신자는 믿음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되지만 제자는 훈련을 통해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셋째, ‘따르는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데 있어 좋은 곳만 가는 것이 아니라 괴로운 곳, 나쁜 곳, 아주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제자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는 주님 전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우리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병을 고침받기 위해서... 이런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제자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무리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무리와 제자가 뭐가 다를까요? 무리는 자기중심적이라면, 제자는 예수님 중심적입니다.
무리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제자는 자기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라는 말을 세 가지로 정의하셨습니다.
첫째, 주님 말씀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요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그렇습니다. 주님 말씀에 거하는 사람이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된다고 하십니다.
둘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요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인 겁니다.
셋째, 전도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요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그렇습니다. 전도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사람이 참된 주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가 도대체 무엇이 바뀌어야 참된 스승 중에 스승이신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든든히 세워질 수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다같이 26절 말씀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모든 혈육과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을 해석하는 데에는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종종 자기 부모나 형제들에게 옳지 못한 행동을 하면서 이 말씀 가지고 자기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라. 아내를 사랑하라. 자녀를 돌보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미워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미세오’라는 말인데요? 이는 “조금 사랑하다. 덜 사랑하다.”라는 말로써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덜 귀히 여기라는 뜻인 겁니다.
즉 제자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 있어 우선순위가 바뀌지 않고서는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부모, 처자, 형제, 자매를 버리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단언코 비성경적인 자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저 산 속에다가 초막 셋을 짓자는 아주 거룩한 유혹을 합니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 짓고,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짓고,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자고 너무나도 거룩한 말로 우릴 유혹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는 사람들끼리 산 속에 따로 모여서 살면 정말이지 잘 살 것 같습니까?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성경은 절대로 자기 가정을 희생시키고 떠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메세지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The good is the enemy of the best!”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좋은 것’이 ‘최선의 것’의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는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주님보다 덜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목숨은 차치하고 그 까짓 돈 몇 푼 때문에 주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는 이미 제자 조건에서 미달된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가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사십니까? 우선순위를 진정 분명히 하고서 살고 계십니까? 그 무엇보다 주님을 우선순위 일번에 모시려는 가치관으로 바뀔 때에 우리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여러분의 잘못된 가치관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진정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존의 잘못된 가치관을 단호하게 바꿈으로써 우리 주님과 주님의 일을 세상 그 무엇보다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 모두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다같이 27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형수들은 그냥 가서 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리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습니다.
처형 장소까지 자기가 죽을 십자가를 지고 가서 그 곳에서 처형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따르는 자 또한 빈손으로 가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이 오라는 그 곳까지 갈 때에는 반드시 우리에게 지워 주신 십자가가 있습니다. 각자 그것을 지고 주님이 오라는 곳까지 가야 되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가 지고 있던 짐은 사실 십자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본래 무슨 짐을 짊어지고 있었을까요? 죄의 짐을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근심의 짐, 걱정의 짐, 염려의 짐, 저주의 짐, 욕심의 짐들을 우리가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모든 저주와 근심과 염려의 짐 등을 대신 다 맡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을 보면 우리 주님의 귀한 선포가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의 짐, 근심의 짐, 죄악의 짐 등을 다 맡아 주시고, 우리에게 그 대신 십자가를 지워 주신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쓸데없는 짐을 지고서 그것을 십자가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흔히 독재자들이 이를 많이 이용합니다. "내가 민족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겠노라고..." 하지만 여러분? 이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십자가는 그럴 때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지는 짐!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인 겁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당하는 불이익!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당하는 고통! 주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당하는 온갖 고초와 갈등! 바로 이런 것들이 자기 십자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주님을 모신 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소망과 기쁨을 맛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모신 까닭에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남들은 죄를 범해도 괜찮은데, 우리는 조금만 죄를 범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남들은 대충 대충 자기 욕심 따라 살지만, 우리는 진실되고 바르게 살기 위해서 남들이 모르는 고통과 갈등을 겪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거룩한 아픔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지신 거룩한 그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자기 십자가를 지기만 하면 저와 여러분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기만 하면 내가 진정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줄 믿고서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과 30절 말씀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러분! 누구의 멍에라구요? 나의 멍에 즉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에는 멍에를 소 한 마리가 끄는 것이 아니라, 항상 소 두 마리가 끌었습니다. “와서 멍에를 메라. 십자가를 지라.”는 이 말은 여러분 혼자 십자가를 메고 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자기 십자가를 지면 그 옆에는 항상 누가 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함께 계셔서 여러분의 십자가를 같이 져 주십니다. 그 순간, 나는 가만히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지고 있는 짐이 너무나도 무겁다고 탄식하고 계십니까? 남들에 비해 나는 너무 어려운 십자가를 졌다고 원망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게 합당한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게 주신 그 십자가! 바로 그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짊어지고 주님 가신 길을 묵묵히 따라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진정 주님의 참된 제자로 든든히 세워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콜럼버스입니다. 그런데 본디 그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입니다. 크리스토퍼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지고 가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는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황금을 지고 다녔습니다. 그의 눈은 황금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끝나갈 즈음, 그는 괴로워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내 이름은 그리스도를 지는 자인데 지금까지 저는 헛된 것만 짊어졌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고 가는 크리스토퍼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여러분! 제 이름은 큰 대 소리 성 ‘대성’입니다. 목사님이셨던 아버지께서 세례요한처럼 큰소리로 주의 복음을 외치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서원 기도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접니다.
하지만 저는 한 때 큰 대 소리 성이 아닌, 세상 것을 이루기 위해서 큰 대 이룰 성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주의 복음을 담대히 큰 소리로 외치는 큰소리 목사로 삼아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저 이대성 목사는 사도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겠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예수 복음만을 담대히 선포하며 살겠습니다.
그리하면 주님이 늘 항상 동행하사 반드시 사탄 마귀와의 영적싸움에서 승리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참된 목자로 온전히 세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후로는 괜히 황금의 짐을 머리에 지고 무겁다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물질의 짐, 염려의 짐, 욕심의 짐, 이런 짐들만을 지고 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십니다.
물론 우리가 돈도 벌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사업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짐은 우리의 짐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모든 짐은 주님께서 대신 맡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짐을 우리 주님께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대신 우리의 짐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의 짐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순종의 십자가! 교회를 위한 충성의 십자가!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십자가! 바로 이런 것들이 저와 여러분이 지고 가야 할 사명의 십자가인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가 반드시 져야 하는 네 가지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1) 말씀의 십자가 2) 기도의 십자가 3) 전도의 십자가 4)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까지 쓸데없는 짐을 지고서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면, 오늘 이 시간 당장 주님 앞에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물질, 욕심, 근심 등 세상 짐들은 다 주님께 내려놓고서 오직 주님께서 맡겨주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자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다같이 33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두 가지 비유를 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망대 짓는 비유입니다.
여러분! 망대를 짓기 전에는 먼저 예산을 잘 세워야 합니다. 계산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야 끝까지 망대를 지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한 가지 비유는 무엇입니까?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 먼저 자기 전력을 살펴보고 전력을 평가한 다음에 전투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화친을 청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것을 미리 계획하지 못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 어리석은 지도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분명히 알고서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지금 왜 주님을 따르고 계십니까? 예수 믿으면 병도 낫고, 자녀도 잘 되고, 장사도 잘 되고, 또 출세도 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누르고 넘치도록 물질적으로 현세적인 복을 주시기 때문에 주님을 따라 가십니까? 그러다가 만약에 여러분 뜻대로, 여러분의 기대대로 되지 않으면 그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분명히 알고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처럼 우리 또한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함도 경험할 것입니다. 억울함도 맛볼 것입니다. 답답함도 느낄 것입니다. 손해도 볼 것입니다. 자존심도 상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함에도 우리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진정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제자의 길은 이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손해도 있는 길입니다. 주님이 모욕을 당하셨으니 제자도 모욕을 당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릴 위해 고통을 받으셨으니 제자도 주님과 함께 고통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자기 이익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포기할 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나’이기를 포기할 때, 하나님은 ‘나’를 위한 당신의 계획을 시행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나’이기를 고집할 때는 하나님께서 결단코 일하실 수 없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에서는 아무런 능력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들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지식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낙타를 보셨지요? 낙타는 유별스럽게 눈썹이 깁니다. 그렇다면 왜 눈썹이 길겠습니까? 이유는 사막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끝도 없는 사막에 모래 바람이 붑니다.
모래 언덕에서 뜨거운 모래 바람이 앞을 가릴 때, 오직 길을 잃지 않고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은 낙타뿐입니다. 낙타는 커다란 혹도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 이유 역시 사막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가도 가도 목이 타는 사막에서 갈증을 이기는 길은 자신 속에 물을 저장해 두는 길뿐입니다. 낙타는 무릎에 굳은살이 유독 눈에 띄게 두껍습니다. 사막의 모래 바람이 불어 닥칠 때에는 낙타라고 해도 더 이상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 때에는 조용히 무릎을 꿇습니다. 그 모래 폭풍이 지나가기를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사람들을 흔히 ‘낙타 무릎’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무도 많이 무릎을 꿇었기에 무릎에 굳은살이 두껍게 생긴 덕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라 할지라도 삶의 고난에서는 예외일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인생의 깊은 고뇌 속에서도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의 내 삶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자기 포기는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다같이 한 목소리 따라하십시다. “자기 포기는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여러분! 자포자기가 아니라, 자기 포기입니다. 자기 포기는 자신의 생각과 계획과 생명의 주체 권한까지도 다 포기하는 겁니다. 그 권리는 내가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 이미 주님께로 이양된 것입니다.
다만 내가 순종하지 못함으로 아직 내 것처럼 여기고 있었을 뿐이지, 이제 나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함은 실제의 주인에게로 그 권리가 옮겨지는 것뿐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 아무리 계산해 봐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망대 짓는 비용이 전혀 나오질 않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제 더 이상 내 힘으로 내 인생의 망대를 세우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우리 주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 모두 다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분명 목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고 내려놓게 되면 우리 주님께서 그 어떤 적군이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군대를 동원해서 저와 여러분을 당당하게 세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다가 올 모든 전쟁과 대적을 우리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승리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자신을 포기하면 내가 망대를 대신 지어 주겠노라! 너 자신을 포기하면 내가 반드시 너를 승리하게 해 주겠노라!”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여러분 혼자하려 하지 마시고, 주님께 맡기고 주님과 함께 일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의 비전은 단호히 포기하시고, 주님의 비전을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주님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이 다 하십시오! 저는 오직 주님만 따르겠습니다! 저는 일평생 주님의 제자로 살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답게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온전히 따를 때에 우리 주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날마다 증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무리인가? 제자인가
눅 14장 25~27절 / 김광일목사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의 원래 이름은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입니다. 크리스토퍼는 "그리스도를 지고 가는 자" 란 뜻입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황금을 지고 다녔습니다. 그의 눈은 황금 찾기에 혈안 되었습니다. 결국 콜롬버스는 인생이 끝나가고 있을 때 괴로워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주님, 내 이름은 그리스도를 지는 자인데 지금까지 저는 헛된 것만 지고 다녔습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를 지고 가는 크리스토퍼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콜롬버스는 그 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만 지고 가는 거룩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하와이의 모로카이 섬은 나병에 걸린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된 곳입니다. 신부 다미엔이 복음을 들고 찾아갔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믿고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사랑하신다' 고 말하면, 문둥병자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우리를 이렇게 나병에 걸려 죽게 하시느냐고 빈정대었습니다. 결국 다미엔은 자신도 나병이 들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얼굴에 반점이 피어나는 자신을 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게 나병이 걸리게 해주시다니요"하고 기도했답니다. 그리고 "형제들이여, 이제 나도 당신들처럼 나병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며 나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전도하자 많은 병자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병에 걸린 지 4년 만에 세상을 떠난 다미엔은 모로카이의 성자로 알려졌습니다. 그리스도를 지고 가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자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를 무리와 제자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중심에 의해 나누어집니다. 무리들은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이익이 있기에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께서도 무리를 향하여“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요6:26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철저히 예수 중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무리들은 자기를 위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제자들은 예수를 위해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하십니까? 허다한 무리에 속하여 사십니까? 아니면 제자로 살아가십니까? 예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려면,
첫째로 오직 예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유명한 축구 선수인 펠레에게 "하루에 몇 시간 씩 연습을 하십니까?" 라고 물었더니 "공을 차고 있는 시간은 공을 차는 시간이고요, 공을 안 차면 축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요, 축구에 대해 이야기 안 할 때는 축구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꿈도 축구에 대한 꿈만 꿉니다." 오로지 축구에 대해서만 24시간을 생각하며 지내니 유명한 선수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중 얼마나 예수를 생각하며 살아갑니까?
예수님의 제자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제자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제자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26절에서 주님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모, 처자, 형제, 자매를 미워하라"는 말은 가정에 대한 사랑을 파괴하라는 뜻이 아니라 가정이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생명을 구원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주님보다 가정을 더 사랑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보다 집을 꾸미는데 더 많은 노력과 물질을 소비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붙들려 있으면 평생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이 외아들을 키우며 신앙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예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달게 받으려 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사라지고 의욕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달렸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내 심령이 이렇게 답답하며 기쁨이 없습니까?"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네 모든 것을 나에게 바치지 않고 있느니라" 그 순간 그의 아들이 방에 들어왔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하소연하듯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위해 재물이든 생명이든, 다 희생할 각오로 살아왔는데, 예수님께 더 이상 무엇을 바쳐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러자 아들은 조심스럽게 "어머니, 제가 아프리카 선교사로 지원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안 돼, 그 일만은 결코 안 된다" 라고 말한 후 "오! 예수님. 제발 내 아들만은 나의 곁을 떠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라고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이 우상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본문 33절에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참된 제자 의 모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언제나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맥스웰 몰츠가 쓴 '성공의 법칙'이란 책은 3천만부 이상 팔린 책입니다. 저자인 몰츠는 성형외과 의사입니다. 그는 성공하려면 '마음의 성형 수술' 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변화와 자아혁명은 마음의 성형 수술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그 첫 번째 작업은 자아 이미지부터 바꾸는 것입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부정적 자아 이미지를 성공할 수밖에 없는 자아 이미지로 바꾸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성공하려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부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살아가는 인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자는 자기 성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왕국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현대어 성경 번역과 공동번역에는 '부인하고' 를 '버리고' 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뜻은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갈 2:20절의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 입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생명도, 명예도, 권력도, 재능도, 학식도, 건강도, 자녀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디(D. L. Moody)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다음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에는 내 소원이 축복이더니 지금은 주님 자신이고, 전에는 내가 감정의 중심이더니 지금은 말씀이 나의 중심이고, 전에는 내가 쉬지 않고 달라고만 하더니 지금은 쉬지 않고 찬송하며, 전에는 내가 주님을 사용하려 하였더니 지금은 그가 나를 사용하심을 내가 원하게 되었습니다.”옳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제자가 되려면 삶의 우선순위가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자매나 목숨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처럼 자기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자신이 포기되고 죽어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는 사람을 제자로 쓰시는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김동길 교수의 글에 나옵니다. 한 여학생이 금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을 보고는 그 학생을 불러 놓고 "십자가는 앞에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지고 다니는 것이야"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여학생이 하는 말, "뛰어 가면 가끔 뒤로도 가요"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묵묵히 지고 가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하루 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지고 가는 것입니다. 눅 9:23에서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구두방에서 구두를 훔치다 주인한테 얻어맞고 누워 있는 성도를 심방하였답니다. 그런데 위로를 하는 목사님에게 그 성도가 하는 말, "목사님! 예수님은 십자가도 지셨는데 이까짓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둑질하다 맞은 것이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 진일입니까? 자신의 잘못으로 고생하는 것을 십자가 지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고난의 십자가를 순간순간 짊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봉사를 하는데 있어서도 '3D 업종'이 있다고 합니다. '주방봉사', '차량안내위원', '교회학교 교사'를 말합니다. 이 일들은 매우 힘이 들기 때문에 서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 봉사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편하게 신앙 생활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제자가 되려면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편하게 다닐까? 어떤 교회에 나가야 더 많은 서비스를 받을까? 이런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십자가를 지고 갈까, 어떻게 하면 희생할까 믿음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며 그 고난의 길에 동참할 수 있는 우리의 사역을 재 다짐하는 기간입니다. 금번 사순절 기간을 통하여 여러분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님만을 사랑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을 부인하면서 날마다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은혜 없는 허다한 무리에 속하지 마시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자가 가는 길
눅 14장 25~27절 / 이정익목사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 오늘부터 시작해서 한 주간동안 고난의 길을 걷게 됩니다. 2천 년 전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그날 참 예수님은 군중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춤을 추며 환호하고 영접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내일 월요일은 성전을 척결하신 날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서 짐승 떼와 장사꾼들을 모두 몰아내고 정화시키고 화가 나신 예수님은 나가시다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당시 제사장들에게 퍼붓고 싶었던 분노를 그 무화과나무에 쏟아 부으십니다. 그래서 그날 죄 없는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시들어 말라 죽었던 것입니다.
화요일은 감람산에 올라가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던 날입니다. 그리고 수요일은 침묵의 날입니다. 그날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3년 만에 하루를 안식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셨다는 날입니다. 목요일은 번민의 날입니다. 그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을 남기시고 제자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산에 올라가 밤새도록 기도하셨던 날입니다. 그리고 금요일은 수난의 날입니다. 오는 금요일 오전 9시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시고 마침내 무덤에 묻히십니다. 오는 토요일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보내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이 비애의 날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날 아침 일찍이 예수님은 생전에 말씀하시던 대로 부활하십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이 부활주일입니다.
그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소수의 사람들이 나가 세상에 예수의 부활을 전함으로서 오늘 기독교가 세상에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 복음이 120년 전 우리나라에 까지 전파되어 마침내 오늘 우리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120년 만에 우리나라는 기독교 국가처럼 부흥했습니다. 그리고 전 국민의 1/4정도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기적입니다. 기독교인은 수도 중요하지만 예수의 제자화 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자기의 몫을 다 하는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제자의 길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이런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의 삶은 한마디로 말해서 섬김의 삶입니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삶은 섬기는 삶입니다. 이 섬기는 삶에는 향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모양도 있습니다. 맛도 있습니다. 그곳에 개혁도 일어납니다. 변화도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섬김의 삶을 살았던 가장 좋은 모델은 뭐니 뭐니 해도 예수님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철두철미하게 섬기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시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그 시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가난한 집안을 골라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교훈의 내용을 보면 하나같이 섬김의 교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 중 핵심이라고 하는 산상수훈을 보십시오. 거기에 보면 잘 사는 방법에 대해서는 한 가지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어떻게 하면 잘 섬기고 잘 죽을 수 있는가 하는 교훈만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가르치고 돌아다닐 때 만나는 사람들 마다 지극한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각종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한사람도 왔다가 그냥 돌아간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격려하셨고 위로하셨습니다.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하며 탄식하며 기도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진리를 외면하고 그날그날 생각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남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무덤에 묻히면 모든 것이 끝장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침내 그가 생전에 그렇게 장담하던 대로 살아나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 모습입니다. 이 예수님의 생애의 모습 속에 가득 들어 있는 것은 오직 섬김이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그 유명한 교훈을 통해서 이 땅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섬김의 삶을 강조하셨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는 제자가 가야 할 길이 있고 삶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 길과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이 시대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간직하고 발휘하여야 할 길이고 내용이고 원리입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3가지 원리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부정"
본문 26절을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헌신한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제물로 드렸고 철저하게 희생시켰습니다. 예수님은 냉정하리만치 부모와 형제들과 자기 목숨까지도 철저하게 부정한 모델입니다. 밖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와서 찾고 있을 때 누군가 밖에 형제들이 와 있다고 말 하자 정색을 하면서 “누가 내 부모이며 내 형제들인가” 하고 반문하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내 부모요 내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십자가에 달려야 하고 죽으면 3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이상은 예수께서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신 말씀들입니다. 그러면서 말씀 하시기를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우선 자기 극복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자기부터 극복해야 하고 자기를 지양하고 부정해야 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데 이 점이 가장 어려운 조건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축소하는데 는 큰 수양이 필요합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자기부정의 극치를 이룬 사람이 소개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 압둘 라흐만이라는 사람이 회교도로 있다가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 사회에서 이것은 굉장히 큰 모험입니다. 이 문제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가문의 차원도 넘어 때로 생명을 포기해야 하는 모험과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로 망명을 하려다가 실패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와 어머니가 당국에 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구속을 당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회교도법에 의해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그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그를 사형시키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영국과 서방세계가 사형시키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사형시키지 않는 대신 이 사람을 추방하여 서방세계에 무사하게 망명하게 되었던 일이 지난 주간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당당하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는 초연하게 죽을 각오를 하고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과 비교해 집니다.
이것이 자기부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때로 우리 목숨이 우상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위협이 오면 우리는 몸을 사립니다. 신앙을 포기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내 목숨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또 때로 부모가 우상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 때문에 신앙생활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가 무서워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또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부모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순종하느라고 신앙생활을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이것이 효도인 것 같이 보이고 순종인 것 같이 보이지만 좀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 어리석은 짓입니다. 빨리 부모를 일깨워 신앙의 길에 들어가게 해서 부모로 하여금 구원받고 돌아가시게 해야 그것이 진정한 효도이고 순종이 아닙니까. 그래야 되는데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머뭇거리는 것은 효도도 순종도 아니고 맹목적인 순종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우상이 될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자식이 우상인 사람도 있습니다. 자식에게 너무 정성을 쏟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러느라 신앙생활도 아주 형식적으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우상입니다. 또 어떤 분은 잠이 우상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새벽기도 한번 못합니다. 새벽기도 하는데도 자기부정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는 기도회를 통해서 큰 능력을 입는다는 것보다도 자신을 훈련하고 극복하는데 아주 좋은 훈련이 됩니다. 이 새벽기도회가 힘든 일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새벽마다 저절로 깨어지지 않아서 시계를 울리게 해 놓고 잠을 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새벽에 조금 늦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깨어 뛰어가다 시피 나가서 성경을 펼치려고 하니까 손에 든 것이 성경책이 아니고 탁상시계를 들고 나왔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이 모두 자기부정의 훈련입니다. 이 자기부정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깊이 있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나 할 것 다 하고 놀 것 다 놀고 잠잘 것 다 자고 제자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처럼 신앙의 길을 가려면 가족들에게는 실격입니다. 부모에게도, 자녀들에게도 모두 실격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제자의 삶을 살고 목회하려면 휴가한번 제대로 갈 시간이 없습니다. 아이들과 충분하게 놀아줄 여유도 없습니다. 목회자가 놀아 줄 것 다 놀아주고 쉴 것 다 쉬고 잠잘 것 다 자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부모와 형제와 자식을 너무 사랑하고 자기 목숨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
본문 27절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잠시라도 부정하거나 회피하신 적이 없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내내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가 결코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환호했지만 예수님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예정대로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철저하게 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십자가는 자기가 지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저도 이 목회의 길을 가지 않으려고 피해보고 길을 바꾸어 보려고 힘써 보았습니다. 신학교 다니다가 군에 가서 다른 길로 빠져 보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 보았더니 아무 소리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자원입대 신청서를 내 보았더니 받아주지 않아서 그냥 이 길을 갔습니다. 신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로 잠시 있으면서 이 교사의 길을 계속 가 볼까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때 학교 선생님이 전도사 월급보다 많아서 그런 유혹도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 보았더니 또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목사안수 받고 군목으로 군에 가서 3년 근무하고 제대할 때쯤 되니까 장기 근무하라고 종용해 왔습니다. 키도 크고 잘 생기고 군인답게 생겼다고 일반목회 보다 좋을 것이라고 장기 근무하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래서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군에 있으면 안정되고 편하고 좋긴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 길도 내가 갈 길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 길을 여기까지 오는데 유혹도 참 많이 있었습니다.
이 제자의 삶을 살아가려면 때로 평안한 삶이 크게 유혹으로 다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만두고 다른 길을 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 풍부한 것이 유혹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난한 길을 버리고 여유 있는 길을 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다 피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지금은 별소리를 다 들어도 피해가는 지혜와 용기도 생겼지만 젊었을 때는 그런 말 한마디가 크게 유혹이 되고 시험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두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제자가 되려면 자기십자가는 자기가 지라고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모두 회피하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자기에게 부여된 책임이나 십자가는 회피하지 말고 자기가 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유를 버리라”
본문 33절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소유들을 철저하게 버리셨습니다. 하늘의 보좌도, 영광도, 평안도, 가정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한가하게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아가는 그런 삶에 대해서는 여유조차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 상영된다고 해서 야단입니다. 이 작품을 보면 예수님이 결혼을 하였고 그의 아내는 막달라 마리아이고 지금도 예수님의 자녀들이 생존해 있는데 이런 사실이 지난 2천년동안 숨겨져 왔다는 내용으로 이 영화가 만들어져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책이 전 세계적으로 4천만권이나 팔렸고 한국에도 이 책이 138주 동안이나 베스트셀러로 화제를 모았는데 이 책이 마침내 영화화되어서 곧 상영된다고 합니다. 예수처럼 철저하게 부정하고 버린 사람도 없습니다.
이 소유는 꼭 물질만은 아닙니다. 취미도 여기에 속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이 취미가 신앙생활의 길을 막고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유혹입니다. 그래서 이 취미 때문에 주일도 지키지 못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주일날 다 끊고 예배드리려 나오는 것도 참 존경스러운 일입니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대통령 유세 때 잠시 시간이 남아 그 틈에 골프를 쳤는데 파 쓰리 홀에서 공을 쳤는데 이 공이 날아가서 홀컵 바로 옆에 떨어졌습니다. 그랬더니 참모진들이 홀인원할 것인데 아깝다고 아주 아쉬워했습니다. 그런데 케네디는 오늘 공이 홀컵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말하면서 즉시 골프를 중단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취미생활을 적절히 제어하지 않으면 신앙생활도 발목 잡히고 어느 사람처럼 공직생활도 발목이 잡힙니다.
또 시간도 소유입니다. 시간은 돈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드리러 잠시 왔다가 다름 박질 하여 돌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이 조금만 길면 시계를 보느라 야단인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나와서 시간을 투자하고 헌신하는 분들을 보면 참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물질은 생명과 같은 소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질을 생명같이 여깁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 물질은 최대의 우상입니다. 그럼에도 11조를 드리는 것을 보면 참 위대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질을 요구하시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측정해 보려면 물질을 가지고 시험해 보면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삶은 그냥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과 마음과 생각을 새로 지음 받아야 합니다. 내 인격과 내 중심이 예수의 정신과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존중하며 살아가야 그것이 제자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나는 “주님의 제자인가”를 한번 생각 해 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예수살이의 삶
눅 14장 25~27절 / 이정익목사
우리나라 기독교는 이제는 세계적인 수준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 자신 있게 내 놓을 것은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일본교회에서는 한국을 성지라고 부릅니다. 한국 기독교계를 한번 둘러보는 것이 꿈이고 희망입니다. 그리고 중국과 대만의 그리스도인들은 한국을 아시아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러워합니다. 또한 세계의 선교학자들은 한국교회의 성장을 기적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는 참으로 기적을 낳았습니다.
한편 한국 기독교를 돌아보면 성장한 모습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시급히 보완하고 가다듬어야 할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의 내적 성숙”이고 “영적성장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많은 양적 성장을 이룬 반면 내적 신앙의 성숙함이 취약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제자로 살아가는 제자의 삶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의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앙인의 자기부정의 삶이고 자기 축소의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 신앙인들은 열심도 있고 깊은 신앙체험도 있는데 그에 비해서 자기부정이나 자기 축소의 정신발휘가 부족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지닌 취약점이고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좀 더 깊고 원숙한 예수를 따르는 정신의 신앙이 요구됩니다.
그 예수를 따르는 정신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오늘 그리스도인이 어떤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두 가지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기 못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말은 실제로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고 헬라어로 “미세이”(misei)라는 말로 “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중심을 극복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뜻은 “바스타조”(bastazo) 즉 “우유부단, 무소신을 버리고 결단하라”는 뜻입니다. 신앙의 길에서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것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나친 자기중심적 삶”이고 또 하나는 “무소신”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예수의 정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살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삶”을 예수살이라고 말 합니다. 머슴살이, 시집살이, 종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똑같은 의미 입니다. 머슴살이나 시집살이 그리고 종살이에서 내가 강조될 수가 없습니다. 나를 배제하고 오직 주인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예수살이”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예수살이의 기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 같이 자기를 덜 사랑하고 소신과 결단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의 내용이 몇 가지 있습니다.
“순종의 삶”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순종의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하고 판단될 때 그 뜻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르는 삶이 순종의 삶이고 예수살이의 삶입니다. 그 순종을 요구하는 일이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면 순종하고 따르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 때는 노래를 부르면서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순종의 차원은 그리 쉽게 결단하고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요구하는 순종의 길에는 상당한 갈등과 고민과 주저함이 들어있는 요구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스스로가 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신실한 크리스천 부부가 결혼을 했습니다. 드디어 기도하고 기다리던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해산하는 아내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남편이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 땀을 흘렸습니다. 그때아이가 나옵니다. 그런데 나오는 아이를 보니까 기형아였습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이 남편이 순간 큰 충격을 받습니다.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내에게는 비밀로 했습니다. 여러 시간이 지나고 기도한 후에 이 남편이 아내에게 조용히 그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때 그 아내가 뭐라 대답했겠습니까. 그 대답이 여러분들이 이 시간에 답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 대답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가 아니면 불순종 하는가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스스로가 그것이 내 경우라 생각하고 대답을 준비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 상태에서 무슨 대답을 하겠습니까.
그때 그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한참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남편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 그런 불행한 아이를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우리 부부에게 맡기신 것이 얼마나 감사해요, 여기에 분명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을 거예요.” 여러분은 마음속으로 이런 대답을 준비했습니까. 이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이 예수살이의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그 삶이 자기부정의 삶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 즉 예수살이의 삶인 것입니다.
“나의 몫을 인정하는 삶”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 삶의 몫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으로부터 몫을 받아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 몫이 내가 세상에서 발휘하고 살아갈 인생의 길이고 은사이고 할 일이고 사명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충실히 살아가는 삶이 예수살이의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부정하고 회피하고 포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자꾸만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벗어나고 회피하고 포기하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가 되려하고 남자가 여자가 되려 하고 자꾸만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뜯어 고치고 자기 정체성까지 부정하려고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내가 아닐 수 있습니다. 나는 나만의 고유한 몫이 있고 은사가 있고 이 세상에 나만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값이고 나의 삶의 이유입니다. 그것을 스스로 무시한다면 그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를 들면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7세기 영국의 정치가였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4.25~1658.9.3)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에 보기 흉한 혹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크롬웰이 유명한 화가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초상화를 그려온 것을 보니까 얼굴에 있는 혹을 빼고 그려왔습니다. 그래서 크롬웰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 혹을 빼면 내가 아니지 않느냐, 그대로 그려라”해서 초상화를 다시 그렸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은 아름다움을 신봉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자꾸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만하고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고 다시 꾸미고 바꾸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나만의 고유한 몫이 있고 은사가 있고 생이 있고 모양이 있는데 이것을 자꾸만 부정하면 자기 자신이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라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몫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몫을 회피하지 말고 전가하지 말고 자기가 지는 결단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씨 뿌리는 삶”
인생은 씨를 뿌리는 삶입니다. 열심히 씨를 뿌리면 때가 되면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보장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면 한 알의 밀알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반드시 썩어야 합니다. 그것이 밀알의 사명이고 도리이고 할일 입니다. 그러면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썩는 삶이 신앙의 삶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예수살이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은 오늘 심는 삶이고 씨를 뿌리는 삶입니다. 오늘 씨를 뿌리면 언젠가 거두게 됩니다. 그래서 뿌리는 삶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고 생산적인 삶인 것입니다. 거둘 때는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거두지 않으면 내 주위의 어떤 사람이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 뿌리는 삶이 축복의 삶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고 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삶입니다. 내가 오늘 아주 작은 것을 심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결국 어떻게 거두어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직업을 잃은 실직자가 구걸에 나섰습니다. 어느 겨울 추운 날 식당 앞에 가서 손님들에게 구걸을 했습니다. 어느 손님이 그에게 1000원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돈으로 음식을 사서 먹는데 어느 굶주린 노인이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을 나누어 그 노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이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데 신문팔이 소년이 오니까 그 음식의 반은 떼어 소년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 소년은 그 음식을 받아 들고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그때 길을 잃고 헤매는 개가 곁에서 쳐다보자 또 반을 떼어 그 개에게 주었습니다. 그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 실직자가 그 개를 데리고 잃어버린 주인을 찾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개 주인은 잃어버린 개를 찾았다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주인은 실직자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같이 양심적인 사람을 보지 못했소, 내일 내 사무실로 찾아오시오, 나는 당신에게 일자리를 주고 싶소.”
내가 뿌린 씨가 이렇게 전개되더니 결국 때가 되니까 이렇게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 씨를 내가 거두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거두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거둘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실을 누가 거두든지 거둘 때는 큰 기쁨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살이 삶은 실망하지 않고 때가 되면 거두게 될 줄 믿고 오늘 열심히 심는 삶입니다. 내가 오늘 심으면 자라나고 열매 맺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지금 열심히 심고 있습니까. 심으십시오, 그러면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살아가다가 풀리지 않는 문제는 하나님께 돌리는 삶”
사람이 살아가다가 보면 숫한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많은 문제들 가운데 대부분은 그때그때마다 풀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문제를 만나도 크게 당황하지 않습니다. 곧 풀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때로 별 방법을 다 해도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만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힘든 때입니다. 그리고 그 때가 믿음과 신앙과 기도와 지혜가 필요한 때 입니다. 살다 보면 그렇게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문제에 봉착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생각이 짧으면 신앙 상에 큰 시험이 오고 낙심이 오고 회의가 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 때는 스스로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안고 시험 들지 말고 그것을 하나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눈먼 소경이 예수께 왔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은 인간의 논리로 풀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이유를 놓고 해석하고 알아보려 해 보았자 해답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알아보려고 할수록 스스로에게 더 큰 문제에 부딪치게 되고 회의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고 시험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들을 만나게 되거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돌리라는 말입니다.
198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엘리 비젤(Elie Wiesel)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이 "밤“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이 소설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겪은 고난의 삶을 토대로 해서 쓴 작품입니다. 어린 시절 비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여동생이 무참하게 고문당하고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그 모습을 목격하면서 이 소년이 너무나 큰 충격을 받습니다. 내 아버지 어머니 누이가 고문당해 죽어 가는데도 이 소년은 바라만 볼 뿐 속수무책 입니다. 자신이 도울 길이 전무합니다. 그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 내 아버지 어머니 누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이 소년이 그렇게도 신뢰하고 믿던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지며 울부짖으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지금 이 시간 도대체 어디서 무얼하고 계십니까, 어디서 무얼하고 있기에 당신이 택했다는 이 백성들을 이렇게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 하고 울부짖으며 목 놓아 웁니다.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그 광경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절박한 순간입니까. 자기 생각으로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듣고 믿고 신뢰해 왔는데 그런데 이 절박한 순간에 아무 도움도 없고 액션도 없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는 하나님이냐 그 말입니다. 정말 살아계시는 하나님이라면 이 절박한 상황에 보란 듯이 나타나서 저 범법자들에게 벼락을 때리든지 보기 좋게 거꾸러트려 죽게 하시든지 해야 이해되고 그래야 하나님이지 않겠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손오공처럼 그렇게 위기에 빠지면 금방 나타나서 구원해 주시고 목마를 때는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고 몸이 아플 때는 손을 얹어 금방 기적같이 낫게 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기대하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응답이 늦고 길이 막힐 때는 야단입니다. 그러니 이 소년이 그 상황에서 얼마나 다급하고 절박하게 부르짖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하나님은 빨리 다가와 도와주신 것이 아니고 그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따뜻한 기운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나님은 지금 저 교수대 위에 계시단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이 그렇게 다급해할 때도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이렇게 조용하시고 침묵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부르짖어도 어디서 무얼 하시는지 여전히 침묵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 조용히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 그 삶이 진정어린 예수살이의 신앙의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말씀하기를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도 처자도 형제와 자매도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살이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값싼 은혜만 구하고 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지 못하고 그냥 가볍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이렇게 영적으로 성숙한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제자이어야 한다
눅 14장 25~33절 / 채규현목사
19세기 중반, 영국에 장 프랭클린이라는 해군 장교가 있었습니다. 그가 138명의 해군 장교와 수병들을 이끌어서 영국에서 출발하여 캐나다 북쪽-북극해를 지나서 태평양으로 직접 가는 항로를 처음 개척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큰 증기선(돛도 달고 증기로도 갈 수 있는) 두 척으로 출발했습니다. 분명히 이 길은 엄청나게 어려운 길입니다. 2~3년을 예상하고 가는 길이었는데, 그들이 준비한 것을 보면 완전히 무슨 장교클럽 회식 떠나는 식으로 떠났습니다. 석탄은 열이틀 분만 준비해서 갔고, 그 대신 도서관 하나를 가져갔습니다. 1, 200권이나 되는 책을 가져갔습니다. 그 때의 책은 오늘날과 같은 책이 아닙니다. 19세기 중반이면 엄청나게 무거운 책입니다. 그리고 빅토리아 식의 멋진 은그릇들과 음식을 먹을 때 쓰는 모든 서양의 연장들을 가져갔습니다. 이게 엄청나게 무거운 거예요. 옷은 해군 장교복으로 멋진 정복을 해서 갔는데 방한을 위한 옷은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실패는 이미 예견되었던 거예요. 그들이 캐나다 북쪽 얼음바다까지는 갔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나중에 에스키모들에 의해서 그들의 행적이 발견되었는데, 곳곳에 여기저기 가는 길에 그들이 죽어있습니다. 굶어서 죽고, 얼어서 죽고, 그들 옆에는 그 무거운 은그릇들이 놓여있었고 무거운 책들이 놓여있었습니다. 배로 가니까 제한된 공간 안에 제한된 무게만을 가지고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극항로를 새로 개척한다는 그 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장교 클럽 야유회식으로 가다가 그냥 죽게 된 것입니다. 내가 가야 될 길과 그 길에 따른 준비가 이렇게 차이가 나면 문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면이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발견되는 모양이었습니다. 지금 이 누가복음 14장의 이 대목은 예수님께서 이미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로 작정하고 가시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가시는 길이 무엇인지 모르고 제자들은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상징적으로 예수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제자들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는 것은 마치 장 프랭클린이라는 사람이 이끈 영국 수병들의 가는 길과 비슷한 길이었어요. 그 길은 확실하게 준비하고 가야 됨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기에 대한 감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준비할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희들이 앞으로 가야 될 그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 제자의 길의 특징을 여기에서 세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야 될 길입니다. 요즘에 “제자 훈련” 이라는 프로그램이 많이 있기 때문에 얼핏 성도님들이 잘못 생각해요. 교회 전체성도 중에서 제자도 있고, 성도도 있고, 그런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다 예수님의 제자이며 예수님의 가는 길을 같이 따라가고, 닮아가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필요한 말씀이 바로 오늘 여기 적혀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그 당시 예수님을 좇던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세 가지 면이 바로 여러분의 삶에서도 드러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제일 먼저, 25절~26절을 봅시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To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인간관계에서 여러분이 버려야 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물론 다른 성경 구절과 연결해서 생각해봐야 됩니다. 하나님의 원래 뜻은 무엇입니까? 부모를 존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친구들과 이웃들과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라고 하신 말씀은 이게 무슨 말입니까? 미워한다는 얘기는 예수님께서 더 좋은 것과 그 다음 것을 비교할 때 그 다음 것을 “나쁘다, 악하다, 미워한다”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강조해서 비교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고 있는 말은, 주님에 대한 사랑-주님과의 관계와 이 세상의 모든 관계-부모 자식간의 관계, 부부의 관계, 형제의 관계, 자매의 관계, 친구의 관계, 이웃의 관계 등 모든 관계와 서로 경쟁관계에 있을 때에는 언제나 우리 주님과의 관계를 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보통 우리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해야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실제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여러분은 경험하고 있습니까? 내가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할 때 실제 삶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실제 삶에서 보면,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끊어야 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이 세상의 관계에서 처음에는 손상되는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가족들이 만약에 예수님을 믿지 말자고 할 때 어떻게 합니까? 그 말을 들을 수는 없죠? 여러분의 친구들 가운데 죄악 된 일을 같이 하자고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들을 수가 없죠. 여러분의 회사에서 여러분의 동료들이 회사의 물건들을 빼먹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가만히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통 사회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을 고발하거나 고소하는 사람들을 상당히 안 좋게 생각합니다. 동료를 배신했다고 하면서 의리 없다고 합니다. 그게 과연 맞는 말이냐 이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함께 물들지도 말아야 될 것이며, 잘못된 것을 드러나게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을 때에 여러분은 분명히 왕따를 당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회사에서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여러분의 학교에서 왕따를 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학생이 그러더라고요. 공부 잘 하는 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 다른 학생들에게 왕따를 당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공부를 못한대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그 어떤 것을 하려고 할 때에는 여러분의 가정에서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여러분의 직장에서도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여러분의 친구들에게도 왕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각오가 되어 있냐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이것은 “아, 그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지.” 가 아닙니다. 주님을 택하기 때문에 바로 내 모든 인간관계에서, 여러 가지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잘 생각해 봐야 되죠. 애초에 문제 있는 사람이 많은 문제가 있을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핍박받는 거야.” 이러면서 합리화시켜서는 물론 안 되지만,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에는 절대로 이 세상의 규례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죠? 범죄 하다가 걸리게 되면 뭐라고 합니까? “관례대로 행했습니다.” 이런 말을 요새 많이 듣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관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관례대로 행합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뭐 합니까? 관례대로 행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서로 악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서로 불공평한 것이라 할지라도 관례대로 행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친구들이, 심지어는 죄악 된 일을 하려고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동참하는 것은 물론 나쁘고, 동참하지 않으면서 말도 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먼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을 이미 가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제자의 도는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 가신 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왕따를 당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 위해서 관례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관례를 중요하게 여기는 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제일 싫어하죠. 그 왕따가 마침내 그의 생명까지 앗아가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게 십자가의 길이고, 그게 제자의 길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을 때 그냥 예수님 믿으면 됐다, 천국가면 됐다 그렇게 생각하고 안심하면서 이 세상에서 그냥 살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길을 가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런데 그 길은 제일 먼저 이 세상에서 비일비재하게 왕따 당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 각오가 되어 있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해 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얘기가 아닙니다. 그저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분명히 양쪽의 가치체계가 서로 충돌하는 그 순간이 무수히 많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 때 주님을 택한다면 이 세상은 여러분을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길을 갈 각오가 되어 있냐는 것입니다. 아니면 여러분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아직도 세상의 방법 그대로, 세상의 관계 그대로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먼저 그 면을 주님께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모든 관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를 때-가치체계가 다를 때, 무엇을 택하겠느냐? 그리고 그것을 택할 때 많은 희생이 있는 것을 너희들이 아느냐?”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미워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강력한 말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봅시다. 27절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삶의 방향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인생의 목표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살든지 그것은 관계없습니다. 어떠한 직업을 가지든, 어떠한 일을 하든 관계없이 그 모든 삶의 현장 속에서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삶의 목표와 내용이 달라지죠. 과연 내가 인생을 살 때 나만을 위한 길이며 목표인가, 아니면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이기 때문에 가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에 이 사회에 풍비하고 있는 생각이 무엇이냐면 “너 자신을 찾으라, 너 스스로를 발견하라.” 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에 모든 인간관계가 짜여져 있는 농경사회일 때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어느 가문의 몇 째 아들, 몇 째 딸, 이러면 됐습니다. 이름도 필요 없어요.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산업화 사회가 되면서 그 모든 인간관계를 모르고 그냥 개인적으로 살다 보니까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상실감에 삽니다. 그래서 요즘에 급격히 부상하는 학문이 심리학이며 상담학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도 “기독교 상담학” 이라는 이름만 걸면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입니다. 그 속에서 내가 누군지를 찾으려고 해요. 여러분은 누굽니까?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냥 너 자신을 찾으라는 이런 얘기 안 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가는 길대로 가라. 내가 사는 방식대로 너희도 살라. 그리하면 너희가 누군지 안다.” 그 방식대로 살아봐야 됩니다. 그냥 주저앉아서 생각한다고 내가 누구인지 나오지 않습니다.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어느 여론 기관에서 미혼 여성과 기혼 여성에게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입니까?” 하는 것을 물어봤더니, 미혼 여성의 절반이 자기만의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기혼 여성은 절반 정도가 남편이 있음으로 행복하다고 했고, 25% 정도는 아이가 있어야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다르죠? 미혼 여성과 기혼 여성이 달라요.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행복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미혼 여성은 68%가 지금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기혼 여성은 그보다 높을까요, 낮을까요? 기혼 여성은 76%가 지금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미혼 여성보다 기혼 여성의 훨씬 더 만족도가 높았어요. 전에 조사한 또 다른 통계를 말씀드리면, 중매결혼과 연애결혼을 구분해서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결혼생활이 행복합니까?” 그런데 결혼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중매결혼을 한 사람들이 훨씬 높았어요. 여러 가지 면에서 시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삶에 대해서 더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미혼 여성보다 기혼 여성이었어요. 그게 뭐냐면,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내가 특정한 일을 이루거나 특정한 어떤 일을 성취했을 때 행복을 느끼는 것 보다, 관계 속에서 느끼는 행복이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여러분이 어떤 목표를 달성해서 행복한 것보다 관계가 사랑의 관계로 되어 있을 때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잠언에서도 뭐라고 그랬습니까? “마른 떡 한 조각만 있어도 화목한 것이 낫다.” 육선(肉饍:좋은 반찬)이 가득하고 다투면 뭐하냐는 겁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어도 화목한 것이 진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만족감을 주는 것은 좋은 관계, 평화의 관계, 사랑의 관계, 이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 중에 가장 중요한 관계가 무엇이냐면 하나님과 나와의 화목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셔서 마침내 천국가게 하신다는 그 믿음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지금 현재 어떤 환경에 있던지, 현재 무엇을 가지고 있던지, 무엇을 잃었던 지에 관계없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믿으십니까?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어떤 기준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보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현재 이 세상에서의 환경은 전혀 관계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믿을 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사실 속에서 강건하고 담대하고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더 행복한 사람들은 바로 그 모든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지, 인생에서 뭔가 이룸으로써 거기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목표를 뭔가 이루겠다고 하는 것보다,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살겠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에 살겠다 하는 면에 목표를 다시 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목표도 “내가 이것을 꼭 하리라” 이것보다는 “내가 주님을 따르는 삶, 주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삶을 살겠다” 하는 목표를 두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현재 인생의 목표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무엇을 위해 삽니까? 무엇을 추구하고 삽니까? 바로 그 목표에 대해서 주님과 충분히 대화하셨습니까? 거기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이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주님께서 원치 않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결단도 주님의 참된 제자에게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33절에 이야기합니다. 그 중간에 28절~32절까지는 예화를 들어서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33절을 봅시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사실은 이게 제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소유라고 이야기하는데 여기에는 물질도 들어가고 심지어는 관계까지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내 인생의 목표까지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나의 소유, 이 안에 모든 게 다 들어가 있습니다. 관계나 목표는 미리 다 이야기했으니까 여기서는 물질적인 면에서만 한번 이야기해봅시다. 여러분의 모든 소유, 물론 잡고 있어야 되죠. 내 것은 내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지나치게 꽉 잡지 마십시오. 왜 지나치게 내 인생의 소유를 잡게 됩니까? 이것 말고 다른 것은 믿을게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도 금전적인 문제만은 주님께 못 맡겨요. 돌아서서 자기 혼자 셉니다. 여러분은 어때요? 이민가는 사람들 있죠? 미국이나 일본, 호주에 이민가는 사람들이 일단 이민을 가면 한국에서는 절대로 안 할 그런 일들까지 서슴없이 합니다. 왜 하겠어요? 돈을 벌어야 되니까요. 왜 그렇게 한국에서는 없던 열정을 가지고 돈을 벌려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거기서는 혈혈단신, 자기나 자기 가족만 갔기 때문에 다른 게 믿을게 없어요. 오직 믿을 것은 돈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착같이 돈을 벌고 돈을 꼭 쥐려고 노력합니다. 왜냐면 그것밖에 믿을게 없고, 다른 건 다 불안하니까요. 그래서 더 열심히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내가 한국에서 이렇게 살았으면 이민 올 필요도 없었는데….” 합니다.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악착같이 사니까요.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믿을 수가 없어요. 한국만 해도 믿을 게 많이 있어요. 가족들도 있고, 일가들도 있고, 자기 친구들도 있고 동창들도 있고…, 걸리는 게 많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느냐면 불안해서 그래요. 정말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물질을 쥐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가장 비춰보려면, 한 달 동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돈의 방향만 제대로 보면 돼요. 여러분의 한달 소득의 몇 %를 하나님께 드립니까? 제일 먼저 십의 일조, 첫열매를 하나님께 못 드리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재정에 관한 한 하나님을 못 믿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자기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제대로 열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소유를 먼저 하나님께 드릴 줄 압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드린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의미의 관대함을 베풀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께는 못 드리면서 잘 베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그 베푸는 것이 자기 의를 위해서 베푸는 겁니다. 이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하나님 안 믿으면서도 이런 사람들, 전부 자기 의입니다. 저는 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심방을 갔는데, 아주 비싼 식당에서 대접을 해요. 감사히 먹었습니다. 돈이 상당히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주에 심방 감사헌금을 했는데 쥐꼬리만큼 했어요. 먹은 게 넘어오는 거예요. 저는요,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 그럴 거면 저 대접하지 말고 그것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려야 돼요. 그게 먼저 앞서야 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 풍성하게 드리고 같이 앉아서 칼국수 먹는 게 저는 훨씬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게 더 좋은 것입니다. 저한테 몇 만 원짜리 대접하는 것이 제 앞에서 얼굴내고 생색내는 것이지, 그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된 것입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가장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께 헌신하고 먼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을 원하지, 제게 잘 하는 것 원치 않습니다. 그게 제대로 돼야 됩니다. 그게 제대로 되면 다른 모든 관계에서도 은혜롭게 되고 풍성하게 됩니다. 그게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소유의 면에서 너무 쥐지 마십시오. 너무 쥐게 될 때, 정말 여러분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그 쥔 손가락을 억지로 푸십니다. 그때는 굉장히 아픕니다. 그런 일 당하지 마시고 미리미리 하나님 앞에 펴시고, 같은 성도들에게 펴시고, 다른 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폅시다. 뭐든지 하나님 앞에 맡기는 것이 제일 안전합니다. 여러분의 불안함은 왜 오냐면, 하나님께 맡기지 않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모든 것은 안전치 못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맡긴 것만이 안전한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소유의 면에서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주님의 길을 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내게 있는 소유를 얼마든지 하나님께도 드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드릴 수 있는 바로 그런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주는 훈련이 되면 어느덧 언제부턴가 하나님의 안식과 평강이 내게 옵니다. 참 이상해요. 처음에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다 드린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칙은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 뜻대로 내 재물을 쓰면 그 다음에 하나님이 믿어지고 안식이 옵니다. 완전히 반대에요. 원수도, 내가 먼저 주면 그 다음에 사랑하게 됩니다. 관계가 바뀌어요. 관계가 좋아지면 준다가 아닙니다. 주면 좋아집니다. 하나님께 드리면 그 관계가 사랑의 관계로 바뀌고, 이웃과의 관계도 먼저 내 것을 내어 놓으면 좋은 관계로 바뀌는 것입니다. 소유의 면에서 먼저 은혜 받아야 됩니다. 이게 제일 중요해요. 앞의 두 가지도 전부 내 소유 중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내 인간관계도 내 소유라고 할 수 있어요. 내 인생의 목표도 내 소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집약해서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28절~32절까지는 어떠한 방식으로 희생을 각오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 망대의 비유가 나오죠? “어떤 사람이 망대를 지을 때 미리 얼마 들 것을 알아서 그것을 다 준비하지 않겠느냐, 그것을 다해서 망대를 짓지 않겠느냐?” 내가 주님을 믿을 때, 주님을 믿고 가는 길에 내가 얼마만큼 버릴 것이 많은가 그것을 충분히 각오하고 그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을 때 어떠한 각오를 했습니까? 그러니까 사실 처음에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십자가의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 믿으면 당신은 예수님 앞에 헌신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먼저 이야기 해주어야 해요. “예수님 믿으면 복 받습니다.” 이것 보다도요. 확실히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그 사람에게 있다는 확신이 들면 그 다음에 “이제부터 당신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길을 가야 됩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헌신을 시켜야 돼요. 처음부터 예수님 믿는 초기부터 헌신하는 법을 배우는 성도들은 제대로 신앙생활에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복 받기 위해서 예수님 믿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 아주 신앙생활에 문제가 많습니다. 미리 충분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가? 수많은 것을 버려야한다.” 그런데 그렇게 처음에 각오를 단단히 하더라도 물론 나중에 전혀 새로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저도 처음에 신학교에 간다고 할 때 제 인생 끝난 줄 알았습니다. 가기 싫은데 억지로 끌려갔거든요. 이제까지의 내 인생길은 총천연색이었는데 앞으로 주님을 따르는 그 길은 흑백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마 이 중에도 아직 변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예수님 따라가는 길은 흑백, 세상길은 천연색.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제대로 믿으면 세상이 흑백으로 보일 줄 믿습니다. 예수님 따르는 길이 총천연색으로 제대로 보일 줄 믿습니다. 제가 처음에 신학교 갈 때 그랬다니까요. 그래서 “전적으로 주님께 내가 모든 것을 맡깁니다. 내 목숨이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주님 뜻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하고 신학교에 갔는데, 그리고 막상 각오를 했는데도 당하고, 또 당하고 보니까 끊임없이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목회할 때, 한국에 와서, 모든 과정 중에서 수시로 “주님, 그래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말이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의 삶에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예수님 믿으면서 여러분이 버려야 할 것들, 뭐가 있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렸습니까? 그냥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다 제자 되는 것 아닙니다. 제가 처음에 예수님 믿을 때, 그냥 교회 다니는 것으로 족한지 알았습니다. 성경공부하고 같이 하하 호호 하면 좋은지 알았습니다. 교회생활 했어요. 그런데도 그 뒤에도 계속 제가 가는 길은 제가 정했고, 제 나름대로의 목표를 가지고 생활했습니다. 별로 죄인도 아니었어요. 제가 뭐 마누라 때리는 사람도 아니었고, 남의 것을 훔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와서 제가 다 바뀌었냐, 그렇지 않습니다. 언뜻언뜻 수시로 제 나름대로 제 뜻대로 하고 싶은 생각이 울컥울컥 올라옵니다. 어쩔 때는 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후회가 막급하죠. 저뿐만 아니고 여러분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완전히 끝난 싸움이 아니에요. 제 자신과 싸우는 싸움입니다. 주님의 제자 되는 것은요, 안 믿는 가족들과 싸우는 것 아닙니다. 죄악 중에 있는 친구와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내 속에 있는 죄악과의 싸움입니다. 내 속에 있는 이기적인 마음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여기서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주님을 믿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믿으면서 주님 앞에 무엇을 기대하고 사십니까? 주님 앞에 무엇을 기도하고 사십니까? 주님은 여러분께 이야기하십니다. “그래 너희들 나를 따라올래? 나를 따라오려면 이것, 이것, 이것 버려라. 네 목숨도 미워해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길을 가지 아니하면 영생도, 부활의 길도 없습니다. 싫건 좋건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백성들이기 때문에 그 길의 선상에 서 있습니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왜 주저하십니까? 왜 세상을 바라봅니까? 왜 내 속의 욕심대로만 생활하려고 합니까? 왜 거기에 끊임없이 지면서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습니까? 부디 주님 안에서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내가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지금 나를 향하신 우리 주님의 뜻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따라가는 길
눅 14장 25~33절 / 이현우목사
이사야 53:4-6
영국의 어느 교회 지도자 한 분은 사순절을 맞이하며‘사순절이란 절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신분을 분명하게 하는 절기라’했다. 그래서 이 사순절에는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분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고 가르쳤다. 인간에게 신분은 한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를 결정짓고 그 삶의 내용을 가름하는 것이다. 왕의 신분을 살아가는 사람은 왕으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또한 그는 왕의 신분으로서 맞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신분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자기 신분을 제대로 유지한다는 게 여간 쉽지를 않다. 때때로 신분을 망각하고 언행이 그에 맞지 않아 곤란해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적잖음을 보게 된다. 인간에게 신분이 주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삶을 살아가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분을 말할라치면 여럿이 있을 테다. 그리스도교에 입문해 있는 종교인이라 할 수 있을 테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차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인(믿는 자)이라 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교회의 한 사람으로서 교회의 사람이라 할 수 있을 테고 그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 해서 교인이라 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다른 표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선 이런 표현들은 없다. 이런 사정은 물론 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그리스도교가 시작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신분을 군중(무리들), 예수를 좇은 자들, 예수와 함께한 자들, 그리고 제자들이라 했다. 교회시대에 들면서 교회의 사람들, 믿음의 형제자매들로서의 신분을 말한 흔적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돋보이면서도 분명한 신분은 제자다. 예수의 제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언급하곤 했다. 특별한 게 이는 예수님께서 직접‘제자’라는 신분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 누가복음 14장 말씀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제자로 살아가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예수 선생님에게서 배우며 나서야하는 제자로 이 특별한 신분을 말씀했다. 이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어떤 신분의 내용보다 더 중요하고 구체적인 거라 하겠다.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로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내세워야 할 중요한 신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마태복음 28장,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 하는 마지막 당부에는“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하셨다. 예수님의 뒷걸음을 따르는 자들은 제자로 와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로 따라가는 일이란 말이다. 제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그 뒷걸음으로 따라가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도 그를 따를 수가 있다. 전쟁이 났을 때, 한 나라 왕의 군사가 되지 않고서도 비전투 종군자로서 나설 수가 있다. 자기 직분을 다하지 않고서도 중대한 일에 식객이 될 수 있다. 대학에서 배우는 학생이지만, 강의에 출석을 함께 한다 해도 그들 모두가 다 제자라 할 수는 없다. 강의에 출석하는 것과 제자가 된다는 것은 차이가 많다. 예수님은 제자로 나서라 하신다. 예수 선생님에게서 배우고 그리스도의 뒷걸음을 따라가라는 의미를 던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따라가야 한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야 한단 말이다. 오늘 교회의 큰 곤란 중의 하나는 교회 안에 예수와는 먼 거리에서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어도 참된 제자는 너무나 적다는 것이다. 오늘 이러한 사정에서 우리의 신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분명히 해야겠다. 제자로 따라가는 걸음이 험하고 제자로 따라가는 일이 힘겹다 해도 우리의 이 신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이 신분에 맞게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리라.
여기 예수님께서 제자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큰 일을 앞두고 이런 저런 감당해야 할 비용을 미리 계산하고 준비하듯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할 비장한 준비를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따라가는 일이 보통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단히 각오하고서 나서라 하신다. 망대를 짓는 자가 미리 비용을 계산하듯이, 전쟁을 치러야 할 왕이 군사수를 미리 계산하는 것처럼 한다는 말씀이다. 전쟁을 앞둔 왕이 이 정도로서는 도무지 질 수 밖엔 없다고 하면 아예 투항하고 전쟁을 포기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제자로 따르는 비용을 계산 해봐야 한다는 거다.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씀이다. 신앙으로 산다는 것 자체는 이렇게 어려운 거란 말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그의 제자로 나서 산다는 것은 만만하질 않다. 그렇다. 포기해야 할 것도 많고 자기 의지와 욕심을 걷어치워야 할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를 두려워해서, 이런 내용들이 힘들다 싶어 달리 할 수 있는 길이 있는가 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없다. 제자의 길을 가는 것뿐이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있다. 예수님의 그 길은 멸시천대 수치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다. 십자가 죽음의 길이다. 이 길을 가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가 참 제자로서 나와 함께 갈 수 있는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또한 예수님은 말씀에서 이런 경우의 너희로서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못 박듯 한다. 제자들의 걸음을 얼마만큼 어떻게 비싼 대가를 치루면서 예비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첫째, 자기 부모처자, 형제자매 아니 자기 목숨까지라도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뒤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셋째,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두렵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압박감이 보통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정도로는 할 수 없지 않은가 하며 투덜댄다. 도망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두지 않았던 것처럼 사랑의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동행하고 있다. 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나서기만 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특별히 넘쳐나게 된다. 그 순간 신앙인생의 새로운 차원이 펼쳐지게끔 되어있다. 그간 교회 역사 가운데 그토록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를 결단하고 나섰다. 그들의 신앙인생의 앞날에는 오직 하나님의 풍요로운 사랑과 이끄시는 손길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길을 따르는 데서 우리의 신분임을 분명히 해야겠다.
제자로 따라가는 걸음에서 힘겹다고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 가르침의 내용이 어떤 것인들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겸손과 희생,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배우고 수련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길을 갈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을 모른 채로는 그리스도의 영광도 모르게 된다. 그렇다면 그 존귀한 영광은 우리와는 저 멀리 있을 뿐이다. 고난과 영광은 동시적으로 숨 쉬고 있다. 또한 제자직의 삶을 대강 감당하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뒤를 따라가기에 주님의 영광도 우리에게 있음을 내다보라. 제자로 살기 싫다하며 주님의 뒷걸음을 따라가지 않으면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흉내 내는 꼴 밖에 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오늘 우리의 신분을 예수님의 제자로 분명히 하고 이 제자로서의 신분을 유지하는 데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힘써야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제자로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그 길에 주님의 부활 영광의 벅찬 은총은 이미 우리의 일상에 넘칠 것이다.
“새로운 관계”(New Relationships)
눅 14장 25~33절 / 이종윤목사
오늘같이 분열된 세상 속에서 가족만큼 일체감을 주는 연합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첫번째 학교, 첫번째 병원, 첫번째 정부라고도 할 수 있는 가정을 파괴시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를 따를 수 없다.” 이 말씀은 구원의 상을 위하여 대가를 의지적으로 지불할 수 있는 지 물어보는 내용입니다.
Ⅰ. 진리에 대한 철저한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
이 말씀은 진리를 위하여 너희가 철저하게 헌신을 하고 있는지, 심지어 형제와 자매, 처자식에서 부모까지 미워하고 떠날 수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철저한 헌신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몇 시간은 하나님을 믿고 몇 시간은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온전히 하나님을 따라야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상대적인 가치 밖에 없으나 하나님은 절대적이고 온전하신 분이니 온전한 헌신을 드려야 한다는 말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Ⅱ. 그리스도 예수의 독특한 권위를 말씀한 것이다.
오늘 이 세상에는 권세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권세와 권위는 상대적입니다. 반면 주님의 말씀은 절대적이며 오늘 주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은 그러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권세를 가진 분임을 믿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Ⅲ. 제자가 되는 사람들에게 우선권을 선별하도록 했다.
우선권이란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말합니다. 마치 전화를 할 때 순서대로 눌러야 제대로 연락이 되듯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에 순서를 정하자는 것입니다. 네 모든 이웃과 심지어 네 자신까지 미워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선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보다도, 그 어떠한 것보다도 하나님을 우선시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개인의 야망과 자기 중심적 목적을 죽임으로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Ⅳ. 이 세상은 위험한 곳임을 경고하고 있다.
세상은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유혹과 핍박, 시험이 많습니다. 우상을 버리지 못하고 따르는 사람이 있고 세상을 섬기려고 좇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은 궤변적이고 남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함으로 이러한 세상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Ⅴ.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만들어라.
이것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 부분입니다.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만들라는 것은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가족이 복음의 그물에 걸릴 수 있도록 영적 미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 교회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새로운 교제 관계를 가지며 새로운 가족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한 가족 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만물의 아버지시다. 우리 어머니는 따뜻한 복음의 품으로 불러주시는 교회입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님의 제자들, 새로운 가족 관계에서 교회를 형성하여 이 교회를 통하여 날마다 새로워지는 아름다운 축복의 자녀 다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를 위한 포기와 축복
눅 14장 25~33절, 18:29-30 / 김홍도목사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용기가 필요하게 됩니다. 죄를 끊는 용기, 버리는 용기, 주를 위해 바치는 용기,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는 용기 등입니다. 그 중에도 주님을 위해 버리는 용기, 포리에의 용기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줄 압니다. 신앙의 훈련은 하나의 버리는 훈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큰 복을 내려 주시기 전에 포기하고 버리는 훈련을 먼저 시킵니다. 이 버리는 훈련에 합격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큰 그릇이 될 수 없고 큰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것을 버릴 수 있을 때에 하늘의 진정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괘락을 비릴 수 있는 자에게 영원한 복락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8:29~30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그릇에 좋은 것을 담기를 원한다면, 먼저 담겨진 것을 쏟아 버리고 비워야 되는 것처럼 우리들이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축복을 받으려면 세상적인 것,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비워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너무 그런 것에 집착이 되면 그 사람은 정신적 으로 영적으로 약해지고 비겁해지고 근심, 걱정이 많아져 큰 일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둑을 두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만 바둑 두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수양이 많이 된다고 합니다. 바둑을 두다가 이것은 죽었구나 하고 생각이 들면 살아보려고 고집 부리지 않고 포기하고 마음을 돌이켜 다른 곳에다 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어나가다가 보면 먼저번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살아나는 수가 있습니다. 또 이쪽을 두어나가다 죽을 것 같으면 용감하게 빨리 포기하고 또 다른 데를 두어야 바둑을 잘 두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신앙생활에는 버리는 연습을 잘 해야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귀한 열두 제자를 택하실 때도, 보신 시험은 "나를 따르라"고 할 때 부모, 형제, 재산, 직업이라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를 시험해 보셨습니다. 그럴 때에 다 버리고 따른 사람은 비록 불학무식한 어부였지만 베드로 같은 사람은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한 청년은 예수님께서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하고 내 제자가 되라"고 할 때 머리를 긁으면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못 되었습니다. 아마 그 때 그가 일시적인 세상 재물을 버릴 수 있는 용기만 가졌더라면, 성경의 어느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하늘나라의 열두 보좌의 하나를 차지했을런지도 모릅니다.
누가복음 14:26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 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하셨습니다. 32절에도 보면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해야 될 제자에게 요구하시고 신신당부 하신 것은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한 사람이 재산 상속 문제로 형제간에 다투다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공평하게 자기 형제와 나누어 가지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형은 얼마 가지고 동생은 얼마 가지 라고 일러 주시지 않고 도리어 책망하시면서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이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승리와 진정한 문제 해결책과 참 행복의 비결은 아귀다툼을 해서 재산 얼마를 더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속에 탐심을 버리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참 승리와 행복과 만족 은 물질을 얼마나 소유했는가에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성공과 승리는 버리는 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저 쉽게 하루 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정든 고향의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떠나는 훈련을 거쳐서 인정, 육정, 애정이 엉힌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리는 데 용감했고, 가장 귀중하고 가장 사랑하는 아들 유일무이한 외아들 이삭도 용감히 포기하는 용기를 시험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믿음의 조상이 되고 영과 육이 아울러 복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숭배하는 3대 인물 중의 하나가 된 것은 그가 버리기 어려운 것을 용감히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 됨도 용감히 포기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종 노릇하기를 선택했고 그 많은 부귀 영화를 분토와 같이 버렸으며 잘 하면 대 애굽의 황제가 될 수 있는 길도 용감히 버렸기 때문에 현세와 내세에 영원히 빛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청년 요셉은 불타는 청춘의 정욕으로 거절하기 참으로 힘든 미모의 애굽 여인의 노골적인 유혹과 육탄 공세도 용감히 뿌리쳐 버렸기 때문에 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것입니다. 그 애굽 여인, 주인 집 마나님께 잘 보였으면 틀림없이 종살이도 면하고 큰 벼슬도 할 수 있었겠으나, 그런 얄팍한 수단 방법을 용감히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원한 벼슬과 영광스러운 인물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다"(빌립보서 3:7, 8)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해롭게 생각한다고 했고 모든 것을 버리고 생명 까지도 버린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15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 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인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꽉 차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가 그 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었으나 동등한 위치도 버리시고 하늘 나라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종의 형체를 입고 내려오셔서 말 구유에 나시고 세상 사람들을 섬기시면서 기룩한 당신의 손으로 더러운 제자들의 발까지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버리셨 습니다. 우리도 주님 위해서는 귀한 것이라도 버리고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되겠습니 다. 자유가 있어도 스스로 사랑의 종이 됩시다. 권세가 있어도 권세를 포기하고 낮아집시다. 물질도 주를 위해 포기하는 자가 됩시다. 그럴 때에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권세가 있어도 다 쓰지 말고 없는 자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자유가 있어도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있어도 없는 것 같이, 기쁜 일이 있어도 없는 자 같이,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형적은 잠깐 사이에 다 지나가고 만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평화롭게 부흥되고 발전하려면 각자가 모든 소욕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물욕도 탐심도 명예욕도 권세욕도 다 버리고 종의 자세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담임목사는 담임목사대로 내가 제일이니 나를 섬기라 한다든지 전도사님들은 나도 주의 종인데 나를 이렇게 무시하는가 하고 불만을 품는다든지 장로님들은 우리가 목사도 전도사도 맘대로 할 수 있다. 나만 무시해 봐라 그냥 안 놔둔다 한다든지 하면 그런 사람은 존경과 대접받기는 이미 틀려버린 것이요, 그런 교역자와 직원들이 모인 곳에는 분쟁과 투기만 있을 뿐이요, 그런 교회는 부흥되거나 축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났으면 얼마나 잘 났으며 바치면 얼마나 바치며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하잘 것 없는 권세나 명예를 가졌으면 얼마나 가졌겠습니까? 물욕도, 탐심도, 권세도 다 호기할 수 있을 때 그런 교회가 부흥될 수 있고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부요한 자가 되고 참으로 높아지고 존경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포기하는 자에게는 여러 가지 축복을 받습니다
성도들은 날마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는데 영적 성장이란 하나님의 성품(性稟)이 우리 안에 증가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을 때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 100이 있었다면 그후 영적 생명이 자라면서 200이나 300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더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점령해야 할 자리를 자기나 세상 것이 점령할 때 그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은 적극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이 더해지는 것이요, 소극적으로는 하나님 이외의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사람이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즉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가 그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그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물질이나 사업 등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 영적 성장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말을 많이 하는 버릇 때문에 그것이 그 사람을 차지하고 있어서 설교를 10번, 20번 들어도 성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비워 버리고 하나님의 성품이 증가될 때 그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물욕이나 인색함이 있는 사람이 구제하거나 하나님께 바칠 때 그만큼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영적 성장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죄악의 쾌락이, 어떤 이는 허영심이, 어떤 이는 혈기가, 어떤 이는 교만과 자존심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성품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떨어져 나갈 때 하나님의 성품이 더해 가며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버리는 만큼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2. 영적 능력이 증가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능력을 받지만 그러나 더 깊은 영원한 영적 능력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주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버릴 때 받게 됩니다. 히브리서 11:26에 보면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은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삼손의 큰 힘은 머리털에 있었는데 그 머리털은 하나님께 구별해 바쳤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머리털이 깎기울 때 능력이 없어졌고 눈도 없어졌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주님 위해서 헌신하고 바치는 것이 없어지면 영적인 능력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혹은 목사, 부흥사들이 처음에는 주를 위해 헌신해서, 하나님께서 명예를 주시고 물질도 주시는데 나중에는 그 물질과 명예에 사로잡혀 영적인 능력을 잃어버리고 수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높아지고 부자가 되더라도 거기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명예도 재물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3. 영안이 밝아집니다>
마태복음 6:21에 보면 "네 보물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 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말씀하셨 습니다. 여러분 왜 물질과 보물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 눈을 말씀했겠습니까. 물욕과 세상 보물에 가득차 있는 사람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다는 말씀입니다.
노켄티우스 4세가 금그릇과 은그릇을 만지작 거리면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칠 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는 말을 생각하면서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하고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 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말을 받아 대답하기를 "옳습니다.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하는 시대도 지나갔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는 능력의 시대도 따라서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에머슨(Emerson)은 "사람이 만일 땅을 소유하면 그 땅도 그 사람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위경 토삐트편에도 보면 "영의 눈을 건강케 하는 방법은 아끼지 않고 구제하는 것이다" 고 했습니다.
<4. 버린 것의 여러 배를 받습니다>
누가복음 18:29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물질을 버리면 이 세상에서도 여러 배를 받게 되는 때가 오고, 명예와 권세를 버리면 더 높은 차원에서 더 크게 받게 되고, 자기를 버릴 때 참된 자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어느 회사 사장님댁에 초대를 받아갔습니다. 사업이 아주 잘되어서 참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에 있는 기사 한 분이 "우리 사장님은 축복을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어 보니까 그 사장님의 아버님이 수만 석의 부자였는데 공산당에게 몰수를 당하여 망하고 이남으로 넘어 와서 사는데 그전처럼 부자는 되지 못했지마는 웬만큼 농토를 가지고 살다가 세상을 떠날 때에 아들이 넷이나 있었는데 그 아들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고 시골에 교회를 짓는데 몽땅 땅을 바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들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교회에 다 바치니까 그 아들들은 돈이 없어서 고학을 해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교를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그 자식들에게 오히려 고생을 시키는 것 같았지만 오늘 그 자식 대에 와서는 수억대의 부자가 생기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귀한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주를 위해서 포기하는 것이 어리석 은 일 같았으나 그 자손대에 가서 크게 축복으로 갚아주는 사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세상적 생명을 버릴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칭찬, 명예, 권세에 대한 욕망을 죽여 버릴 때 참 만족과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아멘-
내가 건축하는 영적 망대
눅 14장 25~33절 / 이필재목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예수님 자신이 손으로 직접 노동하셨던 일과 깊은 관계가 있는 설교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의 직업을 따라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생활철학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세계 어디를 가도 튼튼하게 살아남는 이유는 그들의 고난 역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성경에 나타난 대로 집시 민족으로 살았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은 사막의 끝없는 여행 1,600킬로미터의 여정을 떠돌이로 살았고, 가나안 정착 이후에도 애굽을 빈번히 넘나드는 순례자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도 끝없는 나그네 삶을 살았습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정리된 국가 개념의 역사가 없이 방황하는 유랑 민족사를 가지고 있으며, 신약 시대에 와서도 흩어져서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태어나시자마자 애굽으로 피난을 떠나신 기록이 성경에 나타나있고,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 첫머리에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니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는 글을 씀으로 유대 민족의 고난 역사, 집시 민족사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난 역사는 그들로 하여금 자연히 살아남는 지혜와 자생력을 강하게 키우게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유대인들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손으로 하는 기술 하나를 습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디를 가도 손만 움직이면 밥은 얻어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일종의 단순 기술노동 하나씩을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울 선생을 보십시오. 그는 유대 사회가 인정하는 학문적 엘리트입니다. 그의 고백에서 “나보다 잘난 사람은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나는 가말리엘 문하생이요 율법의 전문가라” 완전한 문관 출신의 출세자로, 국가를 움직이는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권 소유자가 72명인데 가장 어린 나이에 그 자리를 소유한 초특급 출세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나가는 바울도 기술 노동자임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대 나라나 그 일대의 문화는 유목민 문화요, 유목민들에게 절대 필요한 필수품이 천막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학문의 길을 가면서도 어려서부터 천막을 만드는 천막제조 기술을 배웠습니다. 사실 바울이 돈 없이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들며 자비량 선교사 역할을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손 기술인 장막 제조업 기술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지방에 가서 돈이 없어서 돈을 벌려고 장막 제조 일을 찾아다니다가 업이 같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서 그들과 동업을 했던 것을 볼 수 있고, 그들의 협조를 얻어 선교비 조달을 하여 선교 활동을 훌륭하게 하는 바울 선교의 한 면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목수’라고 하는 기술 노동은 유대인들의 삶의 철학과 맞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열심히 손노동을 하셨는데 오늘 말씀은 자신이 직접 많이 하셨던 망대건축 이야기를 아주 세밀하게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유대 나라 문화 중에 중요한 것이 망대 문화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망대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망대가 없으면 살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이사야 1장 8절에도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원두밭의 상직막 같이” 이런 말이 있어서 포도원마다 망대가 있는 문화를 성경이 알려주고,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마가복음 12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포도원마다 망대를 지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잘 4절에는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이런 말씀도 나오는데, 모두 이 문화 배경의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망대 건축의 노동을 많이 하신 경험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망대 건축에 대한 비유 설교를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이 망대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마을마다 마을을 지키는 비상망대가 있습니다. 군사적 효과의 망대입니다. 24시간 교대로 경비를 쓰는데 이 부족 사회는 언제나 외부의 침입이 문제가 됩니다. 도둑 떼가 들이닥쳐서 마을을 불지르고 재물을 약탈할지 몰라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언제나 망대를 건축합니다. 지난번에 제가 두만 강변에 700리 길을 돌 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이 개울을 건너와서 중국 조선족들이 기르는 소들을 모조리 훔쳐 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큰 재산이 없어지잖아요? 그게 아주 큰 골치라고 두만 강변에 사는 우리 조선족들이 말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자꾸 발견이 되니까 이 경비자는 24시간 교대로 근무하다가 이상한 것이 나타나면 나팔을 불던가 종을 쳐서 비상을 알리고 그 소리가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은 잠자다 말고 모두 전투태세로 들어가게 되는 이런 망대가 옛날에는 어느 사회나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포도원이나 목장 근처에 있는 망대는 주로 도둑이나 짐승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 한국 농촌에도 여름철이 되면 시골 경제에 큰 몫을 차지하는 농산물이 수박, 참외, 토마토, 오이 같은 과일입니다. 농촌에서는 그것이 아주 큰 부업이 됩니다. 그때 돈을 만져 봅니다. 그런데 수확기가 되면 도둑놈들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 수확이 다 된 과일들을 도둑 떼가 한번 지나가 버리면 일년 농사는 헛수고가 됩니다. 그래서 수확기 때는 밭모퉁이에 원두막이라는 망대를 짓고 불을 켜놓고 수확기 때 늘 지키는 그런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어 왔습니다. 저도 옛날 시골에서 많이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설교 초점은 인생이 망대 건축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예수의 제자됨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는 이 망대 건축을 잘 계산하고 생각하면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제자의 성격은 언제나 두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하나는 사도적 성격의 제자입니다. 이 사람들은 성직자들은 말합니다. 세상의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오직 복음 전파만을 위해서 평생을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예수님 주변에 그런 사람들로 열두 사도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봉사적 제자 성격입니다. 이들은 각기 자기의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면서 필요한 부분의 주님의 제자 역할을 감당하는 자를 말합니다. 즉, 오늘날 여러분과 같은 평신도 사역자들을 말합니다. 어떤 제자가 더 우월하다든지 크다든지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 은사대로 사명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기 망대 건축을 해 갈 것인가?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거기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망대 건축비용을 예산하라”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망대 건축할 사람이 먼저 목수에게 요청을 할 거 아닙니까? “망대를 건축해 주십시오.” 그러면 비용을 계산합니다. “이 정도의 비용을 주셔야만 내가 건축하겠습니다.” 그럴 거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늘 해보셨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생을 계산하라”라는 뜻입니다. 시편 90편 12절에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계산을 미리 잘 해야 훌륭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수없이 많은 인생들이 완성하지도 못한 망대 건축을 하다가 오늘 말씀과 같이 웃음거리만 될 수도 있습니다.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이 말씀은 성취 의욕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성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 인생에 내가 건축할 영적 망대가 무엇인가를 계산하라는 뜻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 왕자의 일을 온 세계 설교자들이 잘 사용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왕자의 가정교사였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가르쳐주다가 어느 날 왕자에게 물었습니다. “왕자님! 이제 얼마 후에 왕이 되실 터인데 이 세계에서 가장 힘있는 왕이 되시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헬라를 통일하겠소.” “그래요. 헬라를 통일하실 수 있죠. 그렇게 통일을 이룬 다음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소아시아 일대를 다 정복하고 싶소.” “아, 그럼요! 알렉산더의 군대는 온 세상을 다 정복하실 수 있죠. 그런데, 그렇게 넓은 땅을 다 차지해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까지 다 점령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페르시아, 인도까지 내가 정복하겠고, 그러고 나서….” 자꾸 말하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을 중단시켰습니다. “왕자님! 그래요. 온 세계를 다 점령하셨다고 합시다. 그 다음에는 뭘 하시겠습니까?” 사실 이 알렉산더는 징기스칸과 함께 세상 역사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가장 넓은 땅을 정복한 역사의 인물입니다. 그가 점령한 세계 곳곳에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도시가 70개나 있습니다. 20세에 왕이 되어 그가 말한 대로 헬라를 통일하고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다 점령하고 페르시아의 정복은 물론이요, 인도의 인더스 강까지 점령했습니다. “그래요. 다 점령하셨다고 합시다. 온 세상이 다 알렉산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빙그레 웃으며 “그때는 나도 죽겠지요.” 그랬단 말입니다. “아니, 그러면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고 죽을 것 없이 그냥 편하게 살다 죽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되고, 또 그 전쟁을 하다가 대왕님도 죽을지 모르는 그 험악한 길을 그냥 안 가고 편안히 사시지 왜 그러한 인생의 탑을 쌓으시려 합니까?” 그렇게 질문하고 대답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가 인도 완전 점령을 이루지 못하고 인더스 강에서 군을 되돌려 다시 돌아와 이번에도 아라비아 원정을 나섰는데 아라비아 모래벌판에서 33세에 더 이상 건강이 버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점령했던 모든 땅을 예수님은 복음으로 점령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와 똑같이 3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건축했던 망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소 일찍 죽고 오래 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고유 권한이니까 우리가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망대 건축의 완성의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나는 지금 어떤 기초 위에 내 인생의 망대를 어떻게 건축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33세에 돌아가셨으나 “다 이루었다.” 완성입니다. 바울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완성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적을 헤아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미리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예수님이 지금 설교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전쟁터 나가는 군인과 그 성격이 같습니다. 미국에는 한국 교인 가운데 선물 가게를 운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심방을 다녀보면 공통된 간증이 하나 있습니다. “목사님, 이 가게를 하면서 은혜 받는 게 하나 있습니다. 선물 가게에는 십자가 목걸이를 많이 팔거든요. 이 가게를 열고 지금까지 물건을 사간 사람들이 이것 좀 깎아 달라, 할인해 달라. 이런 사람들이 많은데 십자가 목걸이를 살 때는 깎아달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 마음은 누구든지 값싼 십자가는 싫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그런 마음으로 보았을 때 ‘아!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자 하는 의미는 다 거룩하구나!’ 그것을 많이 느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몸에 십자가를 지니고 다니시죠? 왜 지니고 다니십니까? 두 가지 뜻이 있어요. 하나는 주님의 보호가 나에게 있기를 기도드리는 심정이고, 다른 하나는 ‘나도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겠습니다.’하는 이 두 가지 때문에 십자가를 지니고 다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장식용이 아니라 영적 믿음의 표현을 그렇게 표시로 내가 하고 지니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오늘 26절에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주님의 제자 성격은 전쟁하는 군인과 같으니 적군을 헤아리라는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은 가장 소중한 인간 관계마저도 초월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전쟁 나가는 군인이 “아, 나는 부모님을 모셔야 하기 때문에 안 되겠습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선택의 우선권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 부모와” 부모는 하나님 다음으로 공경의 대상이 됩니다. “처자와” 처자보다 더 귀하게 취급하는 것은 세상에 누구도 없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초월한단 말입니다. “형제자매” 혈통 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 목숨까지” 아니, 목숨하고 무엇을 바꿉니까? 이런 것들은 어떤 경우에도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관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체를 십자가라고 할 때, 그것까지 초월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나간다는 것은 생명을 거는 일이 됩니다. 로마의 전성기 역사인 그 당시에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사형을 당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진 사람은 백퍼센트 사형수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 자체가 죽으러 간다는 뜻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의 그 한번 밖에 없는 네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를 어디에다 걸겠느냐?”입니다. 33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마지막 대목은 삶의 가치관 설정입니다. ‘알렉산더 같은 영웅은 전쟁만 하다가 끝이 났는데 나는 무엇을 하면서 내 인생 영적 망대를 완성시킬 것인가?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자 할진대 그것에다 생의 우선권을 부여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근대 스포츠 역사에서 축구로 세계에서 제일 찬양받던 사람은 브라질의 펠레 선수였습니다. 남미 선교를 가보면 그 나라에서는 펠레가 예수님 같아요. 누구든지 청소년들은 펠레같이 되는 것을 원합니다. 그가 은퇴하는 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나는 내 인생을 축구에 걸고 살았습니다. 이 하나의 사명을 위해서 나는 살았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그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주님께 와서 인생의 가치관을 물었습니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될 가치관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 청년이 기특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열심히 노력해서 자기 주변을 튼튼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성공한 바람직한 영적 청년이다.” 칭찬도 해줬습니다. 사업 성공도 했고 출세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삶의 가치관이 너무 지나치게 재물에 있는 것을 보시고 “네가 한 가지 고칠 것이 있다. 어쩌면 너의 삶의 가치관을 재물에 두고 있느냐? 그것을 변경시킬 수 있는 마음은 없느냐? 삶의 우선권은 영생이다.” 그런데 그 청년은 “그것만은 안 됩니다.”라고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의 제자로 삶의 방향을 정한다는 것은 우리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가치가 영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 의미를 네가 아느냐?”
우리 일상생활의 가치관을 한번 살펴봅시다. 여러분이 열심히 노력해서 얻으려는 모든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더 귀한 것을 찾고자 노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나 얻었습니다.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나는 그것을 또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내 손에 이미 들려져 있는 이것을 버려야만 그것이 얻어진다고 했을 때 여러분 어떡하시겠습니까? 그때는 과감히 그것을 버려야 되잖아요? 여러분, 우리의 삶의 과정의 시작을 보세요.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런데 모체로부터 나에게 연결되어 있는 생명줄이 하나 있어요. 탯줄을 통해서 생명 공급을 받아서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생명체로 성장을 한 것입니다. 이제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제는 세상에서 살아야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되죠?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이 뭡니까? 생명의 줄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탯줄을 끊어야 됩니다. 이제는 더 가치 있는 생명의 시간이 되었으므로 한 쪽의 줄은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 스스로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이 그렇게 시작을 한단 말이죠. 주님은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 때 한쪽의 줄을 끊어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주님은 제자들을 보실 때 최고의 가치라고 판단하는 것이 그들의 목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보다 더 큰 가치가 영생이니까 영생의 가치를 위해서는 목숨의 가치를 버려야 될 때가 올 것이다. 어떻게 하겠느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말들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즉, 기독교 국가들은 기독교 문화로써 처음부터 살아왔기 때문에 핍박이라는 것이 이 시대는 없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예수님 믿는데 핍박이 있습니까? 가족 가운데 지독하게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있으면 좀 불편한 거 그 정도만 있는 것이지, 또 가문에서 다 예수를 안 믿는데 내가 신앙을 지키기가 좀 거북한 거 이런 것들뿐입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대다수의 기독교 국가가 정부에서 신앙생활을 도와줍니다. 세금을 낼 때 내가 교회에다 이만큼 헌금했다고 증빙 서류를 내면 내 수입에서 그것을 공제함으로 세금을 덜 내게 해주는 일을 국가가 하고 있단 말입니다. 미국 같은 교회에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면 거기다 투자하는 금액은 자기 일년 수입에서 그것을 다 공제해 줍니다. 그만큼 세금을 안내도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비영리 단체 쪽에 내가 하고 있으니까 세금을 안내도 된다는 것입니다. 목적대로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영리단체가 얼마나 많습니까? 부시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되고 6개월쯤 있다가 교회로 편지가 왔어요.‘앞으로 정부 프로그램을 교회를 통해서 하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정부에서 이런 선한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교회가 한 절반을 내면 국가가 그 나머지 절반을 주어서 그 사업을 잘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해줄 테니까 합의가 잘 이루어져서 좋은 결과를 맺도록 합시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도 백악관 모임에 오라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교회가 좀 크니까 그런 연락이 왔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국가의 도움 안에 들어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핍박을 하느냐 말입니다. 이런 문화권에서는 사실 목숨을 바쳐야 되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목숨을 보호받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2,000년 역사를 살펴보면 목숨을 버려야 되었던 피 흘림의 역사였잖아요? 주님의 말씀대로 목숨까지 버렸던 제자들 때문에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확장된 것이며, 지금 우리들이 목숨을 버릴 필요가 없이 처자나 부모를 버릴 이유가 없이도 신앙생활을 아주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앞서간 성도들이 그런 과정과 역사를 다 거쳐주었기 때문에 그 혜택을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적을 알고 전쟁에 임하라!” 예수님 시대에는 생명을 걸어야만 예수님을 믿었단 말입니다. “마귀의 역사는 만만치 아니하다. 그러니까 처자와 부모와 이런 인간관계에서 가장 소중한 관계까지도 초월할 수 있을 때 그때 하나님의 역사는 너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사도적인 삶이다.” 삶의 가치관이 오늘 말씀과 같이 정해질 때 이 땅의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평온한 시대에 잘못하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한다고 하는 주님의 제자된 우리가 역사를 중단하고 세상의 웃음거리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것들이 모여서 인생을 논하고 신의 섭리론을 들고 나오더니 저 모양으로 끝이 나는구나.” 웃음거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망대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 온 동네 사람들의 생존에 위협을 받았습니다. 가장 튼튼하게 서서, 언제나 구원의 나팔을 울려야 되는 망대의 사명 “시작하였으면 완성시켜라. 망대가 망대의 역할에 충실하는 한 모든 사람들은 안심하고 자기 생업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망대 지키는 자로, 망대를 건축하는 자로 비유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약속하는 이 망대 건축자의 행복은 무엇인가? 바로 제자됨 그 자체를 행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다는 자체,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나도 지고 갈 수 있다는 것에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야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돈이 많아지든지, 온 세상에 영광을 얻게 된다든지, 출세의 마음을 너무 쓴다든지 그렇게 하면 내 제자는 능히 되지 못하리라. 도중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셨습니다. 오늘도 교회는 세상을 향하고 종을 치고 나팔을 불고 밤새도록 망대지기가 되어 망대를 지키고 그렇게 나를 객관성 있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주님이 마련하신 안식의 세계를 기다리며 내 인생의 마지막 시간까지 도중에 그만 두지 말고 이 완성의 마침표를 찍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이 마을에서 살았을 때 이 앞에 탄천이라는 조그만 강이 흐르잖아요? 옛날에 이쪽저쪽 동네 사람들이 탄천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패싸움도 많이 했고 씨름도 많이 했고 저 강 하나가 흐르는 게 행복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여름이면 맑은 물이 흘러서 목욕도 하고, 밤에 고기를 잡는다고 하고, 겨울이면 얼음이 얼면 썰매타기, 팽이치기 등 한강까지 연결되는 탄천에서 이 양쪽 사람들이 다 재미있게 시간가는 줄도 모릅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그곳을 행복의 터전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뛰어 놀고, 해가 넘어가도록 집에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습니다.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에는 틀림없이 이곳저곳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엄마 아빠들이 자기 아들, 딸들 부르는 소리입니다. “얘들아, 들어와라! 저녁 먹어라!” 행복이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안식의 세계로 들어와라! 우리 모여 앉아서 따뜻한 식사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하자!” 어느 날 주님은 내 인생의 어두움의 시간에 나를 부르실 것입니다. “이제는 내게로 오라! 안식의 세계에서 이제는 너와 내가 안식을 누리자! 너는 일생동안 나와 같이 내 영적 망대를 건축하고 지키기에 너무나 고생했다. 내게로 오라!” 그래서 주님은 이 약속을 주시면서 목숨까지 버리면서 하나님 사역에 헌신한 망대의 건축자와 망대지기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건축하는 망대는 중단하지 않았는가? 완성까지 갈 것인가? 오늘 이 말씀에 의해서 영혼의 결정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설교하신 망대 건축의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가 깊이 깨닫고 나는 지금 내 인생을 어떻게 계산하고 어느 지점에 있으며 중단하지 않았는가 내 영혼을 진단하는 말씀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 한 주간을 하나님이 주시는 우리 사역의 현장으로 순례의 길을 떠날 때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믿음의 승리자가 모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제자되기 위해 무엇을 지불해야 하나
눅 14장 25~35절 / 이종윤목사
오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믿는 것을 값싼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교회를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가는 것이지 무슨 대가를 지불해야 하냐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분명히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지 아니하고는 나를 따를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나 오라고 초청은 받지만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에 거기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Ⅰ. 무슨 대가를 지불할까?
부모와 처자와 형제, 자매, 자기 자신까지 포기하지 않고서는 주님 앞에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희생이 없어서는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 없는 제물을 원하지 않습니다. 또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고독합니다. 부모도 형제도 모두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을 더 우선시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또, 십자가를 짐으로 고난, 곤고한 일을 겪어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의 비판 또한 피할 수 없을 것이며, 환란조차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이 것을 생각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권위 외에 내 모든 생각과 계획을 무너뜨려야 할 것입니다.
Ⅱ. 대가를 피할 경우
대가를 피할 경우, 어려움이 생겼을 때 모두 날아가버리는 역사밖에 남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때 처음에는 흥분하다가 나중에 불만을 토로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할 때 그러했으며, 데마는 바울을 따라 전도길에 나왔으나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가버렸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두려워했으나 자기 죄 때문에 결구 그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자 모두 흩어져버렸습니다. 싸구려 신앙, 기복신앙, 뿌리 없는 신앙은 이권, 시험, 유혹, 핍박 앞에서 뿌리가 쉽게 뽑혀 버리는 것입니다.
Ⅲ. 비싼 대가를 지불할 경우
자기 의의 대가가 지불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포기하는 개벽으로 우리 의를 위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죄의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내가 지은 죄값을 받을 각오를 하고 옛사람을, 자기의 옛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 미련하며 연약한 것임을 깨닫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친구 된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종이 아닌 친구라 일컬어주셨으며 우리는 그에 합당한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계획을 버리는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이 것은 곧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결론
우리 모두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미워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제자가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자가 되는 길
눅 14장 25~35절 / 이삼규목사
12-13세기에 칭기즈 칸이 정복한 땅은 777만 평방킬로미터에 이릅니다. 알렉산더대왕(348 만 평방킬로미터)과 나폴레옹(115만 평방킬로미터), 히틀러(219만 평방킬로미터) 세 정복자가 차지한 땅을 합친 것보다 넓은 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의 손자이자 원나라 시조인 쿠빌라이 칸에 이르러 정복한 면적은 훨씬 더 늘어났습니다. 동쪽으로 고려에서부터 서쪽 헝가리까지, 북쪽 시베리아로부터 남쪽 베트남 근방까지 쿠빌라이 칸은 만주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인류역사상 첫“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출현이었습니다.
당시 몽골고원 인구는 100만-200만 명이었습니다. 이 숫자가 중국, 이슬람, 유럽사람 1억-2억 명을 정복하고 거느린 것입니다. 칭기즈 칸과 그 시대 유목민인 몽골인들은 수많은 시대를 앞서가는 놀라운 장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목민들의 장점과 희대의 영웅인 칭기즈 칸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혼자서 인류역사를 개척해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와 함께 제국건설의 열망을 품고서 온 몸을 불사른 동지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몽골유목민들은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려면 사람과 사람사이에 강한 믿음과 결속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맺은 관계를 ‘안다’와 ‘너커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로 치면 ‘너커르’는 평생 동지, ‘안다’는 평생친구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칭기즈 칸에겐 유달리 너커르와 안다가 많았습니다. 오갈 데 없는 사람, 어려운 사람, 꿈을 품고 있지만 뜻을 펴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제국건설의 주역이 된 것입니다. 칭기즈 칸 곁에는 ‘4준마’, ‘4맹견’이 포진해 있었다고 합니다. ‘4준마’는 칭기즈 칸의 참모이거나 정책 쪽에서 활동했습니다. ‘4맹견’은 주로 전투에서 지휘관 역할을 했습니다. 칭기즈 칸과 여덟 명은 하나같이 결속을 중시하고 배신을 혐오하는 공통점을 지녔습니다. 이들은 칸에게 생명을 다해서 헌신함으로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제자를 두시기를 소원하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허다한 무리’였습니다. 저마다 부푼 꿈을 안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열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무리들에게 주님은 진정 제자가 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
원래 '제자'라고 하는 말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배우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학생이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수업을 받듯이 열심히 배우는 자, 그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둘째는 "훈련 받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를 영어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disciple"라고 합니다. “disciple”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말과 일맥상통하는가 하면 "discipline" 다시 말하면 "훈련한다"하는 말과 뜻을 같이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는 훈련받기를 즐거워하고 계속해서 훈련받는 사람이 제자"라고 하는 말입니다.
제자는 바로 어렵지만 훈련받는 사람이 제자로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믿음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되지만 제자는 훈련을 통해서 태어나 때문입니다.
셋째는 "따르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데 좋은 곳에만 가는 것이 아니고 괴로운 곳, 나쁜 곳, 아주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제자라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도 모든 성들은 주님을 따라서 이곳까지 오셨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님의 뒤를 잘 따르는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우리 자신의 소원이나 이루기 위하여, 떡이나 얻기 위하여, 병이나 고치려고 하는, 이런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군중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하여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제자라고 말하지 않고 무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리와 제자는 무엇이 다릅니까?
무리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면, 제자는 예수님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무리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제자는 자기희생을 감수하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무리들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마음과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라면, 반면에 제자들에게는 주님을 위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가족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는 ‘제자’라는 말을 세 가지로 정의하셨습니다.
1>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사람이 참 주님의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는 증거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3>전도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요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친히 정의하신 제자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제자가 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제자가 되려면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행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 모든 혈육과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해석하는 데에는 주의를 해야 합니다. 종종 자기 부모나 형제들에게 옳지 못한 행동을 하면서 이 말씀을 통해 자기 자신의 잘못하는 것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라, 아내를 사랑하라, 자녀를 돌보라’는 말씀들이 있는데, 그 말씀들이 오늘 본문과 전혀 상치되지 않는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옛날 박태선이가 운영하였던 신앙촌에서는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부부생활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미워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 ‘미워한다.’는 말은 헬라어는 ‘미세오’라는 말입니다. 미세오라는 말은 “조금 사랑하다, 덜 사랑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덜 귀히 여기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즉 제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세상적인 가치관 즉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원수가, 곧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주된 요인이 종종 자기 집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막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주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잠시누릴 평안을 위해서, 임시적인 평안을 위해서 주님과의 관계를 멀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하여서 부모, 처자, 형제, 자매를 버리고 수도원에, 혹은 기도원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중심, 자기만족을 위한, 어떤 현실도피현상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현실이 너무 견디기 어려우니까 마치 머리를 깎고 세상을 등지고 절에 들어가는 현상이 있어 왔습니다. 애인들에게 상처를 받고 수녀원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도 현실을 견디기 어려우니까, 혹은 현실에 적응하기 힘드니까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기도원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자세는 절대 비성경적인 자세입니다. 우리 주님이 요구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저 산 속에다가 초막 셋을 짓자는 아주 거룩한 유혹을 합니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 짓고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짓고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자고 하는 너무나 거룩한 말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여러분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들끼리 산 속에 따로 모여서 살면 정말 믿음으로만 잘 살 것 같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은 절대 자기 가정을 희생시키고 떠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주님보다 덜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숨은 그만두고 그 까짓 돈 몇 푼 때문에 주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는 제자의 조건에서 이미 미달된 상태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가치 중심을 어디에 두십니까?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십니까? 그 무엇보다 주님을 우선순위 일번에 모시려는 가치관으로 바뀔 때 비로소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여러분이 주님의 참 제자가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잘못된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2.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 합니다(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바로 참된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형수들은 그냥 가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처형 장소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서 그 곳에서 처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빈손으로 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라는 그 곳까지 갈 때는 반드시 우리에게 지어 주신 십자가 있습니다. 각자 그것을 지고 주님이 오라는 곳까지 우리가 가야 되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가 지고 있던 짐은 사실은 십자가는 아니었습니다. 원래 우리는 무슨 짐을 지고 있었습니까? 죄의 짐을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근심의 짐, 걱정의 짐, 염려의 짐, 생활의 모든 짐, 욕심의 짐들을 우리가 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모든 저주와 근심과 염려의 짐들을 대신 다 맡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11:28절을 보면 주님의 귀한 선포가 있습니다. "수고하는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셨습니다. 짐을 맡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저주의 짐, 근심의 짐, 죄악의 짐을 다 맡아 주시고 우리에게 그 대신 십자가를 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괜히 쓸데없는 짐을 지고 그것을 십자가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흔히 독재자들이 그것을 많이 이용합니다. "내가 민족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겠노라"고 그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이웃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당하는 불이익,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당하는 고통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까닭에 내가 겪게 되는 불이익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 당하는 여러 종류의 갈등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어떤 수도사가 사막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좀 도와주십시오. 어디 계십니까? 주님 저를 도와주소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나는 네 마음속에 있느니라. 그리고 나는 네 가슴에 머리를 대고 쉬고 있느니라." "주님 이상합니다. 주님 내 마음에 계신데 왜 내 마음속에는 아픔이 있습니까?"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있기 때문이니라." 주님을 모신 자는 큰 소망과 기쁨 중에 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신 까닭에 남들이 모르는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남들은 죄를 범해도 괜찮은데 우리는 조금만 죄를 범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남들은 대충 대충 자기 욕심을 따라 살지만 우리는 진실하고 바르게 살기위하여 남들이 모르는 갈등과 고통을 가지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아픔입니다. 거룩한 십자가를 우리가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지기만 하면 참된 제자의 길로 우리는 접어들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회피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내가 지면 제자의 길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11:29,30절 말씀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내 짐을 메라고 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에는 멍에를 소 한 마리에 끄는 것이 아니라 항상 소 두 마리가 끄는 그런 멍에를 사용했습니다.
"와서 멍에를 메라.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우리 혼자 십자가 메고 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만약에 내 십자가 지면 그 옆에는 누가 계십니까? 우리 주님이 계셔서 같이 내 짐을 져 주시고 같이 내 모든 십자가를 져 주셔서 함께 그 모든 짐들을 넉넉하게 짊어지고 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내 짐이 무겁다고 탄식하고 계십니까? 남들에 비해 나는 너무 어려운 십자가를 졌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내게 가장 적절한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주신 그 십자가 그것을 기쁨으로 지고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그때 우리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의 원래 이름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입니다. 크리스토퍼라는 뜻은 대단히 좋습니다. "그리스도를 지고 가는 자." 훌륭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생 동안에 그리스도를 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황금을 지고 다녔습니다. 그의 눈은 황금 찾기에 혈안 했습니다. 그의 인생이 끝나 가고 있을 때 괴로워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주님, 내 이름은 그리스도를 지는 자인데 지금까지 저는 헛된 것만 졌습니다. 그리스도를 지고 크리스토퍼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결심합니다. 죽기 14년 전부터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만 지고, 십자가만 지고 사는 거룩한 삶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괜히 황금의 짐을 머리에 지고 무겁다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은 그런 물질의 짐, 염려의 짐, 욕심의 짐, 이런 짐을 지고 살도록 하나님이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돈을 벌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사업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짐은 우리의 짐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짐은 주님이 대신 맡아 주실 것입니다. 주님에게 모든 짐들을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짐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의 짐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순종의 십자가, 교회를 위한 충성의 십자가,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십자가 이런 십자가만 우리의 짐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제자가 져야 하는 네 가지 십자가가 있습니다.
1) 기도의 십자가 2) 말씀의 십자가 3) 전도의 십자가 4) 교제의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오늘 쓸데없는 것을 지고 있으면 이 시간 주님 앞에 다 그 짐을 다 맡기십시오. 물질의 십자가, 욕심의 십자가, 모든 근심의 십자가 그 모든 짐들은 다 맡기시고 오직 주님이 내게 맡겨 주시길 위한 거룩한 십자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복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제자가 되려면 포기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33절).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두 가지 비유를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망대 짓는 비유입니다. 그 당시 망대를 많이 지었는데 망대를 짓기 전에는 먼저 예산을 세워야 합니다. 계산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잘 마칠 수 있도록 준비한 다음에 망대를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또 한 가지 비유는 무엇입니까? 군대가 전쟁터에 출전하기 전에 먼저 자기 전력을 살펴보고 전력을 평가한 다음에 전투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화친을 청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계산하지 못하는 지휘관이 있다면 그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제자의 길을 가기 전에 미리 알고 가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내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고 가야 합니다. 여러분 왜 예수를 믿었습니까? 지금 왜 주님을 따르고 계십니까? 예수 믿으면 병도 낫고, 자녀도 잘 되고, 장사도 잘 되고, 또 출세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여러 가지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을 주시기 때문에 주님을 따라 가십니까? 그러다가 만약에 여러분 뜻대로, 기대대로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알고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로 사는 길에서 우리는 고난도 당할 것입니다. 부족도 경험할 것입니다. 억울함도 맛볼 것입니다. 답답함도 경험할 것입니다. 손해도 볼 것입니다. 자존심도 상할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래도 따라가는 사람이 바로 제자입니다. 제자의 길은 이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손해도 있는 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주님이 욕을 당하셨으니 제자도 욕을 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위해 고통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주님과 함께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이웃을 위해 당할 고난을 감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된 제자는 자기의 이익을 포기합니다. 자기 생각을 포기합니다. 자기 욕심을 포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포기할 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진정한 제자는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젊은 부자 청년 하나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묻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저는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청년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청년의 우상은 재물이었습니다. 청년은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슬픈 기색을 띠고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가 되는 길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계산해도 망대 지을 비용이 나오지 않은 성도가 있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혼자서 열심히 계산하지 마시고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주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주여 이것밖에 없습니다. 어떠합니까? 주님이 받으셔서 우리로 망대 지을 수 있는 넉넉한 비용을 채워 주소서”
아무리 계산해도 부족합니다. 망대 짓는 비용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있는 포기의 원칙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주님에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한 아이가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것을 자기 혼자 먹지 아니하고 주님 앞에 드렸습니다. 작은 것, 모든 것이 드려 질 때 주님의 손에서는 5천명을 먹이는 놀라운 양식이 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내 힘으로 내 인생의 망대를 세우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포기하고 주님께 드릴 때 참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군사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을 것입니다. 아무리 세어 보아도 만 명 밖에 안 되고 적군은 이만명입니다. 이런 상황을 경험 할 것입니다. 힘이 부족합니다. 지혜가 부족합니다. 재능이 부족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 힘으로 안 될 것 같은 그런 절망의 순간을 경험하십니까? 여러분 포기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 앞에 맡기시면 주님은 새롭게 우리를 받으셔서 우리와 함께 연합군을 만드셔서 그 어떤 적군이라도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위대한 군대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내 부족한 능력과 지혜와 재능을 주님께 내어놓으면 주님께서 모든 전쟁과 대적을 책임지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도록 축복할 것을 믿습니다. 내게 있는 물질과 지혜와 재능 이런 것들을 내가 만약 움켜쥐고 있으면 이것은 그대로 부족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손을 펼치면 주님 앞에 포기하며 바치기 바랍니다. "주님 이것이 저의 지혜입니다. 이것이 제가 가진 모든 능력입니다. 제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 받으소서." 이렇게 바치는 순간에 우리 주님은 연약한 우리의 모든 것을 받으셔서 강하게 사용하시고 위대한 하나님의 군대로 사용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 혼자 하려고 하지 마시고 포기합시다. 주님과 합쳐서 주님과 함께 일을 합시다. 내 자신만의 목표를 포기하고 주님의 목표를 내 것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진정 주님의 참 제자가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모든 일에 주님이 우선순위 일번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자입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입니다. 더 나아가 포기할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포기하면 주님이 모든 삶을 책임지십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집착을 버려라
눅 14장 25~35절 / 김홍도목사
인간은 대개가 강한 집념으로 성공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떤 사물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고 버리는 데 용감해야 승리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어떤 일에 지나치게 집착을 하게 되면 거기에 노예가 되기 쉽고 따라서 실패와 불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어느 작가가 쓴 "이기려면 버려라"는 책에 보면 "인간은 집착을 버린 만큼 강해진다"는 말을 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집착을 버려야 강하고, 담대해지고 따라서 성공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마귀는 어떤 사람을 사로잡아서 그 인격과 정신을 파괴시키고 멸망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사건에 집착을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찰거머리처럼 거기에 대한 생각을 떼어 버릴 수 없도록 달라 붙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상이 오게 하고 인격을 파괴시키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 조그마한 잘못된 일로 너무 집착을 하게 되면 마귀가 역사하는 것임을 깨닫고 집착을 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룟 유다에게 마귀가 예수님을 팔아 버리려는 생각을 넣었을 때 분명히 잘못된 줄로 알고 털어버리려고 했겠으나 마귀가 얼마나 강하게 찰거머리처럼 달라 붙었던지 결국은 예수님을 팔게 되었고, 그 일로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하고 말았던 것을 우리는 나무나도 잘 압니다. 저는 얼마전 대단히 슬픈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세상을 작고한 사람은 전에 우리 교회에도 몇 번 나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생전에 모 은행의 과장까지 지냈던 사람이고 건강한 체구를 갖고 있었고 유도 6단의 실력자이기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통해서 몇 마디의 충격적인 말을 듣고 상심하다가 노이로제까지 걸리게 되었고 요사이 와서는 완전히 삶의 의욕까지 상실하고 그로 인해 몸에 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전도를 받아 우연히 교회에 나오다가 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고 그 후로는 교회 생활마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죽기 전 날에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아무도 모르게 철물점에 가서 빨랫줄을 사가지 고 와서는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귀란 놈은 이토록 하찮은 말 한마디로 시작해서 완전히 멸망케 하고 가정에까지 비극을 안겨다 주는 악한 존재임을 기억하시고, 어떤 사소한 일에 집착을 하게 하는 마귀의 생각을 속히 떨어버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적인 집착을 버려야 마귀를 이길 수 있고, 어떤 마귀의 시험에도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신앙 생활의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굳게 집착(Attach) 하고, 주님 외의 세상적인 것에는 집착을 버리고 떨어지는(Detach) 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26절에도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세상적인 것에 집착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계속해서 본문에 보면 망대를 세우는 이야기와 임금이 싸우는 데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모든 일에 계산을 하고 나서 자신이 생길 때에 착수를 하고 그 일에 대해서는 물질이나 생명까지 버릴 각오를 하게 되면 성공하고 승리하게 되는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물질이나 생명까지라도 포기하고 따라 나서야 참된 제자가 될 자격이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신약 성경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시면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뿐만 아니라 죽게 되는 것과 같이 너희 인생들도 포도나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지 아니하면 삶의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요. 포도나무 가지가 원줄기에 붙어 있지 아니하고 만약에 뽕나무나 소나무에 붙어 있다면 그 가지가 온전히 살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참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믿고 그에게 붙어 있어야지 그렇게 못하고 세상 것에 집착하면 그 심령은 시들어 버리고 마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날마다 끊임없이 마귀가 주는 유혹이나 세상적인 것에 집착을 버려야 승리하고 열매맺는 생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물질에 대한 집착, 애정, 명예, 자존심, 생명의 애착심,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버릴 수 있는 자가 될 때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도 보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분명히 기억하십시요! 세상적인 것에 집착하면 행복할 것 같고, 승리하고 성공할 것 같아도 , 그런 사람은 그것의 종이 되고 자유를 빼앗기게 되고 평안도 빼앗기게 되고 결국에는 불안 속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우는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난 아들 이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그 귀한 아들을 잡아 제사를 드리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령을 내리셨을 때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아무런 반항도 대꾸도 하지 아니하고 순종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미워서가 아니라 세상이나 자식에 대한 집착을 떼어 놓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 역시 믿음으로 순종하게 될 때 그 후에 인정을 받고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서 3장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당시 느부갓네살 왕이 만들어 놓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고 계명을 따라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게 될 때 급기야는 풀무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게 될 때 7배나 뜨거운 풀무불 에 들어갔으나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고 살아났던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에 있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토록 보존하리라"는 말씀같이 세상의 어떤 귀한 것까지라도 집착을 버리면 담대해지고 오히려 얻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고린도전서 7장에도 보면 "아내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집착을 버리고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집착을 하면 할수록 염려, 근심, 불안이 더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있어도 없는 자 같이 집착을 버리고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어느 공산국가에서 목사님 한 분을 붙들어다가 고문을 하는데 고문을 하면 할수록 "감사합니다"만 연발합니다. 고문하던 공산당원이 그 목사님에게 무엇이 감사하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때에 그 목사님의 말이 예수 이름으로 매를 맞고 핍박을 받는 것은 훗날 하나님 앞에 가서 상받을 것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자기 두목에게 이야기했더니 옥에다 가두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때에도 이 목사님은 더 기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조용한 골방에 앉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되니 오히려 더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전해 듣고 난 이 두목은 그 목사님을 죽여버리라고 했습니다. 이 때에 그 목사님은 더 기뻐하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다가 순교를 하는 것은 제일 큰 영광이요, 제일 큰 상급을 받는 것이 되기 때문에 더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 생각다 못해 이 두목은 목사님을 더 때리지도 못하고 죽이지도 못하고 안타까워 하다가 풀어 놓아 주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초연한 자세로 집착을 버리면 누구도 우리를 항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승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하면 살길이 열리고, 물질에 대해서도 집착을 버리면 오히려 물질이 따라 오게 되어 있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국제 정세를 볼 때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크메르가 공산화되었고, 월남도 같은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한국을 사랑하고 계시고 커다란 섭리와 경륜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결코 다른 민족과 같이 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것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죽을 각오를 하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기만 하면 이 백성을 망하지 않도록 구원해 주실 것을 믿으시고 소망 가운데서 살아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개인에 있어서 괴로움과 번민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까? 아직까지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에 풍랑과 역경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까? 아직까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이 있기 때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 편에서 서서 미련과 애착과 집착을 버리게 될 때에 참 평안과 축복이 있어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적이고 마귀적인 유혹과 미련과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보호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내 몸을 불살라서
눅 14장 25~35절 / 박조준목사
마태복음 16 : 24를 봉독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 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여기 주님께서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그리고 나를 따르게 하라. 몇 해 전에 모스크바 대학의 어느 학생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이긴다고 말하지만 우리 공 산당은 기독교가 2,000년 동안에 해놓은 일을 50년 동안에 그보다 더 큰 일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독교인은 몸바쳐 일하지 못하고 우리는 몸바쳐 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는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 이런 말을 모스크바를 방문한 어느 미국 크리스천에게 말하였습니 다.
이 말은 바로 초대교회 때의 기록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그 몸을 바친 혁명적인 젊은이의 그룹이 2,000년 전, 미움으로 가득한 세상에 나가서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들이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믿는 바 예수라는 분에게 저희의 생을 온전히 바친 젊 은이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죽기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어떤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써의 의미를 상실하였다고 보여집 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잊어버렸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작은 무리요,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정 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참으로 주님께 몸바친 사람들이 나갈 때 세상을 변혁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도, 어떤 적은 무리지만 진정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얼마나 놀랍고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구약 성경을 통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가령 구약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셨는지 여러분은 잘 아십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 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 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늙어서 100살에 나서 얻은 자기 생명보다도 더 귀한 (어떤 의미에서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나가서 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뽑아 아들을 죽여 번제로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를 멈췄습니다. 공중에서 소리나기를 "아브라함아 됐 다. 넉넉하다, 이제 내가 너는 나를 위해서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게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모세를 보세요. 모세는 바로의 딸의 양자였습니다. 그는 애굽의 왕좌를 상속받을 가능성이 있 었습니다. 언젠가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의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습니 다. 그러면 그는 모든 부와 모든 영광과 모든 권세를 한 몸에 지닐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 여금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광야에 가서 공부하고 기도하고 배우고 자라기를 원했습니다. 요셉 은 어떻습니까? 요셉은 자기 형들에게 팔려 애굽에 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낯선 곳 아무 도 자기를 모르는 곳에 갔으니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요셉을 아는 사 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보디발의 아내는 매우 예뻤습니다. 아주 매혹적이고 성적 으로 생겼었습니다. 더구나 그 여자가 동침하기를 원했습니다. 요셉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젊은 사람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청을 들어주면 자기가 출세하는 데 얼마나 도움될 것 도 알았습니다. 흔한 말로 "꿩먹고 알먹는 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것을 거절하였습니 다. 그 여자가 요셉의 옷을 붙들며 간청할 때 옷을 벗어 던지고 감옥과 죽음이 그를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그 여자를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젊은 청년 요셉을 시험하였습니다. 요셉 뿐 만 아닙니다. 다니엘도 그렇습니다. "다니엘, 너는 바벨론에서는 더 이상 기도하지 말라 만일 그대로 계속하면 너는 사자굴에 들어간다"는 공포가 내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 는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였습니다. 그가 그 나라의 총리였지마는 그를 미워하는 사람 들은 그를 사자굴에 던져 넣었습니다. 물론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던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을 통해서 부르시고 그의 뜻을 이루게 하십니 다. 신약에 와서 바울 사도가 또한 그렇습니다. 초대교회에 보낸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보세요. 고 린도후서 11장에 "유대 사람들로부터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그리고 스물 네 시간 동안을 아득한 바다 위에 헤매었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 강물의 위험과 도둑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 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노동과 고역에 시달리며 여러번 밤을 새우 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번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지불한 대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십자가를 지라, 너 자신을 부인하라, 나를 따 르라, 그리하면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면서 주님은 이미 발을 내디디셨습니다. 여러분! 보통으로 우리는 부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부하셨으나 우리를 부하게 하시 기 위해서 가난해지셨습니다. 우리는 편한 것을 찾습니다. 그러나 "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도 깃 들일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 우리는 환영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에게 배척과 싫어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우 리는 고통을 피해보려 합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상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잘 못 때문에 매를 맞으셨습니다. 우리는 자기 중심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하 여 나의 생명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온전히 다른 사람 중심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가르치셨고 그대로 사셨고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 "여러분! 오늘 저녁 모든 것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실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 신약성경을 펴보세요. 기독교에 대한 말씀을 읽을 때 나오는 말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 입니다. "싸운다" "고난 당한다" "일한다" 이와 같은 동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제자들로 하여금 초대교회를 움직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심한 고난을 받아야만 하는 군인으로써 신약에 나타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 : 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하였습니 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그의 군대에 입대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입대하면 여러분의 역량과 자질에 따라 훈련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준 비된 사람만 쓰십니다. 운동경기에 출전하는 선수가 훈련받지 아니하고 열심히 연습하지 아니하 고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운동선수와 같습니다.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로 오라 그 리고 나를 배우라" 훈련한다는 말의 뜻은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보세요. "누구든지 내 게 오는 사람은" 여기서 우리 주님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적으로 택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이 주님께 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아직도 예수를 나 개인의 구주로 영접해 본 경험이 없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아직도 내 삶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오늘 특별히 굉장히 많은 젊은이들이 어디에도 그 몸을 맡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저녁 여러 청년을 향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불사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을 찾으세요. 그것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수백만의 중공의 젊은이들이 모택동을 위하여 행진합니다. 마땅히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진해야만 합니다. 중공의 청년들이 모택동의 글과 말을 따르는 것처럼 우리도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구절을 따르고 그래서 그것이 우리 손의 검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번 세례문답을 하면서 청년들에게 암송하는 성경구절 있으면 암송해 보라고 했더니 별로 없었습니다. 퍽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위험한 일입니다.그리고 "너 희 자신을 부인하라" 주님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우리 자신을 부인합니까? 이 말은 이기주의의 반대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사랑인데 그 대상이 나 자신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입 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너 자신을 부인하라. 우리는 하나님 먼저 이웃을 다음에 그리고 나를 맨 나중에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 다. 오늘 젊은이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시험을 이기라는 뜻입니다. 죄악된 모든 향락에서 너 를 부인하라는 뜻입니다. 향락은 죄입니다. 더구나 우리 자신의 교만을 부인하라고 하는 뜻입니 다. 지성적인 교만, 신앙적인 교만, 이 모든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혹 어떤 때 어떤 일을 성취 하는 자부심을 가지는데 그것 옳습니다. 혹 어느 정도의 야망도 가지는데 그것이 틀린 것은 아 닙니다.그러나 야망은 나를 내세우고 나에게 영광 돌리기 쉬우므로 야망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 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하나님은 계시다. 하나님은 이러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적응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나 의 생의 중심이다."고 말할 수 있어야 겠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성을 지배하고, 사상을 지배할 때에만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성만 가지고는 주님께 올 수가 없습니다. 우 리는 믿음으로 그에게 나와 행할 때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실 것입니다. 혹 어떤 분은 이 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는 믿는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제 주위에는 다 믿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를 그 리스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 아니요 그것이 당신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당신 개인이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져야만 합니 다. 만일 개인적인 관계가 없으면 그를 따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가지면 우리 가 세상에 사나 세상의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속에 사시고 이 세상의 악에 가담 하지 아니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악에서 분리되어 삽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 : 11에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 을 제어하라"우리 영혼과 싸우는, 영적인 생활에 거슬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이 모 든 것을 없이 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정욕과 싸우는 전쟁터에 있습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인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있기를 원합니 다. 그런데 어느 쪽에서도 행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분명히 하세요. 이 쪽 을 취하든지 저쪽을 취하든지 결단을 내리세요! 여러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면서도 마귀 처럼 살아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떨어뜨리지는 마세요. 차라리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마세요. 초대 교회 때 교인은 교회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크리스천 윤리에 합당하게 살지 않으면 그는 교회 밖으로 내쫓김을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철저한 훈련이 필요합니 다. 매일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그러나 내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겼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한 것이기 때 문에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고도 그 모든 것을 오물 같이 여겼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졌던 모든 지성주의, 내가 소유할 수 있었던 모든 재물을 나는 기쁨으로 포기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쓰레기같 은 것들입니다.""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십자가는? 이것은 자발적인 것입니다. 우리 마 음대로 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치 않으면 그만 둘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죄에 대한 형 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혼자 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금이나 상아나 은이 아닙니 다. 그렇다고 이것은 가난과 질병도 아닙니다. 생의 번뇌도 아닙니다. 우리가 져야 하는 짐도 아닙니다.바울의 십자가를 육신 안에서 찌르는 가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때의 십자가는 죄인들을 사형 집행하는 장소였습니다 사형대였습 니다. 그래서 그때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따르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3 : 13-14 "그러므로 우리도 그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영문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갑시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는 것 입니다. "윈스톤 처칠 경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습니다. " 우리는 얼마나 이 세상에서 오래 살는지 알 수 없습니다. 1년, 2년, 5년, 10년, 오래지 못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들 을 포기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내 몸을 불살라서 주님을 위해 살지 않으시렵니까? 과연 여러분 은 예수님을 위하여 죽기로 작정되어 있습니까? 일사의 각오를 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변화될 것입니다.
제자 됨의 조건
눅 14장 25~35절 / 유영설목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결단의 동기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좋아하던 것을 끊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다면, 우리는 주님의 보좌 앞에서 다시금 새로운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가운데 결단을 요구하는 것들을 위해 이 시간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1. 사랑과 관심의 대상을 바꾸었습니까?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 자식, 형제,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가족은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입니다. 결코 외면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예수님도 부모가 있었고,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가족의 중요성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매우 어려운 선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가족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가족에게만 한정 되어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이웃에게도 그만큼의 사랑과 관심을 나타내라는 뜻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의무와 도리를 이행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될 만한 것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것, 버리고 절제해야 할 것들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사랑과 관심을 바꿀 때, 주님은 더 좋은 것으로 함께 하시고, 더 큰 인생의 비전을 갖게 하실 것입니다.
2. 신앙과 삶에 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하루생활 24시간 가운데 혼자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간을 “묵상의 시간”이라 표현합니다. 생각을 키우고, 마음의 평안을 체험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신앙과 삶에 대한 반성이 요구됩니다. 내 직분, 내가 맡고 있는 사역, 내가 신앙적 신분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시간과 물질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27절)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무리들은 기적을 체험하고, 훌륭한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분명히 하셨을 때, 그들은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관계와 사명을 새롭게 하는 자리에 있었지만 제자비전이 없었습니다.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현실에 내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이 내 삶에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취미와 낭만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걸어가는 내 신앙의 자리에 묵상의 시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비유로 교훈을 주시며 일깨우셨습니다. 1) 예산에 관한 비유 - 무모한 건축가가 공사비용을 예상하지 않고, 망대를 세우는 일을 할 경우, 일을 마치지 못하고, 중단하게 됩니다. 규모 없이 일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면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고, 자신에게도 부끄러운 일이 됩니다.
2) 전쟁의 비유 - 싸움터에 나가는 군사는 적군의 화력과 병력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싸워서 제압할 지, 아니면 타협해야 할지를 판단하게 됩니다. 무모하게 일시적인 감정만 가지고 나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제자는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환경을 극복하는 용기 그리고 지혜롭게 처신하는 현명함이 요구됩니다. 목표와 방향, 비전을 잃어버리는 감정으로 주님을 따르지는 못합니다. 감정과 이성의 조화,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동시에 나타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포기하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있을 때, 말씀으로 비전을 보게 되고, 성령의 강권적인 힘이 타나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맛 잃은 소금의 운명에 대해 교훈하셨습니다. 맛 잃은 소금은 소금으로서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거름에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 합니다. 마 5:13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맛 잃은 소금은 거짓, 위선, 역기능이 나타날 뿐입니다. 소금이 본래의 성분을 유지하고, 목적대로 쓰여야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소금 같은 사회적 역할과 사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 비전을 이루어가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셈하고 헤아려 보라
눅 14장 25~35절 / 이병일목사
오늘 우리는 3월 1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야만에 항거했던 민족민중항쟁을 기념하면서 “민족자주선언 기념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며칠 후인 3월 1일을 삼일절이라고 해서 다양한 행사들이 있는데, 어떤 날에 “--절”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국경일에 부친 ‘천장절’, ‘명치절’을 분별없이 사용하여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삼일민족항쟁 하면 떠오르는 역사적인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기미독립선언서’입니다. 독립선언을 준비할 때에 개신교측에서는 너무 노골적인 독립선언으로 일제와 충돌하는 것보다 독립청원서를 내제고 제안했으나, 천도교 측에서 청원이나 건의는 민족자결의 정신과 다르기 때문에 독립선언의 뜻을 분명히 밝혀 전 민족을 궐기시키고 전 세계에 결의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을 33인이라고 하는데, 천도교의 15명, 개신교에 16명, 불교에 2명이 참여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에 대하여 몇 개의 문답으로 알아보겠습니다.
① 독립선언서는 누가 기초하였습니까? - 최남선. 천도교의 최린이 최남선을 추천하여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언서를 기초한 장소는 임규의 일본인 부인의 집이라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면 최남선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나요? 서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만해 한용운이 독립운동에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 선언서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반대했다고도 합니다.
② 3월 1일에 33인(실은 29명;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불참, 김병조 대신 함태영이 참석)이 모인 곳은? - 태화관. 태화관은 중국 음식점 명월관의 지점으로, 한때 이완용이 살던 집을 수리하여 음식점으로 사용한 곳입니다. 이곳은 이완용이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조약을 밀의하던 장소이며, 1907년 7월 17일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케 한 음모와 을사오적들이 합방조약을 준비하던 곳입니다. 아이러니.
③ 독립선언서 말미에 있는 행동강령인 ‘공약삼장’은 누가 썼나요? - 한용운. 일제는 독립선언서보다는 공약삼장의 내용을 들어 서명자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하려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는 무력항쟁을 선동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한용운이 선언서를 작성할 것을 최린에게 거절당한 후에 공약삼장을 추가하였다고 합니다.
④ 기미독립선언서보다 앞서 발표한 선언서는? - 대한독립선언서. 오늘 예배 시간에 낭독할 독립선언서입니다. 음력 1918년(무오년) 11월(양력으로는 1919년 2월 초)에 선포되었다고 하여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합니다. 그 내용은 우리나라가 완전한 자주독립국이고 민주의 자립국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한일합병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사기와 강박 그리고 무력 등의 수단을 동원하여 강제로 병합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우리의 영토, 즉 한토(韓土)를 지키기 위하여 무력의 사용도 불사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2천만 동포들에게는 국민된 본령이 독립임을 명심하여 육탄혈전, 즉 맨몸으로라도 결사적으로 항쟁하여 독립을 되찾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역사를 돌아볼 때에 친일과 부일의 문제가 많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개신교에서는 신사참배와 부일협력의 죄책을 어떻게 고백할 것이냐를 두고, 개인뿐만이 아니라 교단 차원에서도 미묘하게 견해를 달리하고, 때로는 감정적 대립을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기장 교단 내에서도 이 문제와 관련한 죄책고백을 드러내놓고 주장하는 것을 꺼려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제는 침략 초기부터 종교에 대한 탄압을 집요하게 했는데, 그 중에서도 기독교에 대해 심하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가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항일집단이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기독교가 서양 선교사들을 매개로 일제와 경쟁하거나 적대관계에 있는 서양 제국과 국제 여론, 국제기구에도 연결되어 있어 이들을 쉽게 통제하거나 예속화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고, 셋째는 일제의 천황 숭배사상과 신사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그들의 지배이데올로기가 기독교와 공존할 수 없었으며, 넷째는 기독교가 끊임없이 교육과 사회적인 계몽 활동을 통해 잠재적인 배일사상의 텃밭이 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김삼웅의 “종교, 근대의 길을 묻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과 목사들이 신사참배와 친일과 부일협력을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죄책고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실제로 기독교대한복음교회에서는 “교단 창립 70주년을 맞이하여 하나님과 민족과 역사 앞에 엎드려 회개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초대감독 최태용 목사 친일행적에 대한 죄책고백문을 발표하였습니다. 더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더 민족을 사랑하지 못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과 민족과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교단으로 회복하여, 낮은 곳에서 낮은 자들과 더불어 맑은 생명신앙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이 되겠다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우리 교단의 김재준 목사 역시 일제 시대의 신사참배의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단 내의 많은 사람들이 이점에 대해 말하기를 불편해하거나 거론한다고 해도 매우 변명 일관이 많았습니다. 즉, 당시에는 조선신학교를 살려야 하기 때문에 장공도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를 펴거나, 장공은 겉으로는 신사참배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일제야 망해라’라고 기도했기 때문에 진정으로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목사와 교수로서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신사에 참배하는 일의 파급효과를 생각할 때에 그리 간단한 변명으로 넘어갈 일을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의 의미에 합당한 고백과 돌아섬이 있어야 합니다. 돌아서기 위해서 먼저 죄과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교단의 이름으로 하느님과 민족과 역사 앞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가 일제와 관련한 죄책고백을 하는데 있어서 분명히 주장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고백뿐만 아니라 일제의 참회를 요청하고 침략과 강제동원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정당한 보상과 사과를 하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기독교계의 죄책고백을 주장할 때에 일본과 독일 기독교계의 죄책고백을 예로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교는 그들은 침략자의 입장이고 우리 민족은 피해자의 입장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평면적으로 대입하는 것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강제징용을 당한 분들의 문제를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차원에서 과거의 청산을 요구해야 합니다.
오늘을 민족자주선언 기념주일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3월 1일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민족의 자주를 침해하는 세력은 누가보아도 미국입니다. 특히 “평택 미군기지 확장”과 관련한 미국의 요구는 주권국가로서 매우 수치스러운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또한 국회에서도 계속 거론되고 있는 “전략적 유연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단순한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생명과 평화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미국은 2000년 11월 부시(George Walker Bush)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부터 해외주둔 미군을 유연하게 배치해, 세계 어디에서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PR)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계획에 따른 전략적 유연성이란 미국 정부가 21세기 새로운 안보환경에 맞추어 추진하는 해외주둔 미군의 전면적인 개편계획으로, 유사시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에 신속하게 파견해 전쟁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계획입니다. 이러한 재편은 주일미군과 주한미군의 역할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전략적 유연성은 주한미군이 더 이상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는 붙박이 군이 아니라, 주한미군을 동북아시아 신속 기동군으로 재편해 중국과 타이완의 분쟁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와 기타 분쟁지역에 투입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획 하에서 평택에 미군 기지를 집중하는 것이며, 실제로 이라크 전에 주한미군을 파병하였습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전면 허용으로 ‘이제 우리나라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전면 허용됨으로써 세계가 공인하는 주한미군 해외침략의 전초기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와 함께 동북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막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14:25-35은 흔히 “제자가 되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읽혀집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요구하면서 세 가지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세 가지 물음으로 시작되는 그 내용을 보면서 나와 민족의 일에 대해 어떠한 원칙을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지를 “셈하고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원칙은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의 모든 일에 적용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욕망이나 잠깐의 방심으로 무시되기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게 셈하고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먼저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28절) 이는 일의 시작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일의 완성 즉,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목표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에 당장의 이익이나 수치보다는 긴 역사적인 안목으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교육위원회>
지금 우리 민족의 궁극적인 목적은 통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단은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 제대로 설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불황이나 복지의 미비도 그 원인을 분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회 정치적인 대립의 중심에 분단에서 오는 정신병이 있습니다. 통일로 가는 길에 우리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 걸림돌이 너무 많습니다. “치매 걸린 노인”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당하더라도 한 걸음씩 나아가야합니다.
“싸우러 나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서 자기에게로 쳐들어오는 그를 자기가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를,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31절) 이는 궁극적인 목적을 긴 역사적 안목으로 보면서,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를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분명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골치가 아프더라도 사건의 이면을 보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이 때에 다시 눈앞에 벌어지는 사건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결정한 것에 대하여 가능한 것부터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부서와 작은모임의 활동>
현 단계에서 우리 민족의 실천은 자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분단의 아픔과 질곡을 넘어서기 위하여 분명한 우리의 주권과 생명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민족자주는 구체적인 실천 강령입니다. 이것은 민족지상주의가 아니라 분단을 이용하여 우리를 밟고 지나가면서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는 미국의 패권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이미 우리는 경제적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침략전쟁의 공범자가 되었습니다. 동북아 패권을 확장하기 위한 미국의 요구에 끌려 다니기만 하는 정치인들의 나약한 놀음을 생명을 사랑하는 농부의 마음으로, 생존권을 요구하는 비정규직의 쓰린 마음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19세기 말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주변 국가들의 전쟁터로 이 땅을 내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34절) 이는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의 정체성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잃지 말아야 하는 본질을 묻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서의 면면을 흐르는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공동체의 평화입니다. 구약의 표현으로는 하느님의 샬롬이고, 신약의 표현으로는 예수님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로마나 미국이 주도하는 힘의 지배에 의한 평화가 아닙니다. 미국의 세계지배를 향한 탐욕이 판치는 세상에서, 우리의 땅을 자기들의 전초기지로 만들려고 하는 이 상황에서, 소금의 짠맛처럼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평화를 향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 평화를 향해 가는 길에 민족의 통일도 있고, 민족의 자주도 있습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셈하여 보고, 지금 어떻게 행동할지를 헤아려 보고, 하느님이 우리를 통해 이루시려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발견합시다.
평안하십시오. 다가오는 순간순간의 삶 속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많은 어려움 앞에서 당당하십시오. 우리 민족의 평화를 깨뜨렸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하여 목숨 걸고 투쟁했던 선배들의 정신을 되살려 오늘 우리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가로막고 전쟁을 준비하는 세력을 단호하게 거부합시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을 셈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헤아리며, 평화를 향해 나아갑시다. 한 처음에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을 만들어 모든 생명이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은혜와 로마의 힘에 의한 가식적인 평화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과 오늘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위하여 연대하게 하면서 힘 주시는 거룩한 영의 역사가 이 민족 자주와 통일을 향해, 모든 생명의 평화를 위해 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의지와 실천 속에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에겐 큰 그림이 필요하다!
눅 14장 26~27절 / 조남신목사
예배로부름 :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26,27)
개회기도 : 주현절 여섯째주일을 신학교육주일과 민속주일로 지킵니다. 신학교를 위해 기도합니다. 어려운 교육현실 속에서도 복음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교육받을 수 있게 하옵소서. 민족의 명절 설을 앞두고 민속주일로 지킵니다. 흩어져 살던 모든 가족들이 함께 만날 때 주님을 좇는 자로서 또한 더 큰 그림을 그리는 계기가 되게 하소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오니, 이 시간 더 큰 믿음의 세계의 그림을 보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설교
> 오늘은 신학교육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드리는 주일헌금은 신학교로 보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총회에서는 교회 예산의 1/100을 신학교육헌금으로 책정하도록 정해 놓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 사정상 그것을 실천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만, 그래도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신학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관심을 가져주기 바랍니다.
> 오늘은 민속주일입니다. 이 민속주일에는 무슨 말씀이 필요할까하고 생각했습니다. 지난주에는 그림들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어요. 세계적인 화가의 그림들, 대구가 낳은 천재화가의 그림들, 이중섭의 그림, 백남준의 비디오 설치 예술 작품들 등등 ..... 모두가 다 대작이었습니다. 큰 그림들이었습니다. 이런 큰 그림들을 보면서 잠시 일상탈출을 시도해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작은 그림들만을 그리고 사는지..... 알 수가 없지요!
> 민속주일입니다. 설 연휴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가족들이 오고 가고 하겠지요.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 오늘은 민속주일을 맞아 이런 가족문화에 대해 그림을 좀 더 크게 그리면 어떻게 될까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전통적으로 가족중심의 문화이지요. 그래서 뭐니뭐니해도 부모님께 효도하고, 어른들 잘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를 지키고, 제사 지내고..... 하는 일을 우리의 큰 가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집안에 해가 되는 일은 해서는 안되도록 교육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참 좋은 미덕이지요. 우리는 그 동안 이러한 전통문화 덕분에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끈끈한 가족의 유대관계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속에서 나오는 정겨운 에너지로 가족을 일키고, 가문을 일으키고, 나아가 산업을 발달시키는데 사용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 그러나 그러다 보니까 그런 유교중심의 가족문화가 가져다주는 역기능적 요소들도 많이 있지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있었지요.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는데, 그 책이 잘 팔린 것도 이런 점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것들을 예로 들어 지적하고 있어요. 효도문화가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도 설 준비를 하느라고 힘 드실텐데.....
> 그러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세계가 하나되어 가는 글로벌시대에서, 우리에게 앞으로 필요한 가족관은 어떤 것일까? 성경은 거기에 대해 어떤 의식을 가르쳐주고 있는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지요. 그것은 먼저 가족이 우상이 되는 극단과 그렇다고 해서 반대 극부적으로 가족을 무시해버리는 그런 극단을 경계하도록 가르쳐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혜안을 가지고 일찍부터 우리에게 제시해준 기독교 가족관입니다.
> 먼저 창세기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세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일찌기 - 창세기 12:1에 나오지요 - "너는.....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하고 그에게 명령하지요. 그리고 예수님도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말씀하세요. 누가복음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 형제, 자매 .....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시지요. 모두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런 말씀들이지요.이께하라 마모루가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인 비판"이란 책을 썼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하시는 말씀 같아요. 명절에 비장하면 부담스러운데..... 무슨 말씀입니까? 가족이 우상이 되면 안된다는 말씀이지요. 그것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부모님, 처자, 형제, 자매..... 이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입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어요. 그런데 그 소중한 선물만 생각하다보니, 정작 선물을 주신 분은 망각하기 시작해요. 그러다 보니 선물이 우상으로 변하기 시작하지요. 아브라함도 그랬던 것 같아요. 늙어서 얻은 이삭이 너무 소중하다보니, 금이야 옥이야..... 아들이 우상이 되어가고 있었던가 봐요. .....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경계 하시기 위해 말씀하시지요 :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나에게 바칠 수가 있느냐?" 네 아들을 세상을 위해, 공의를 위해, 대의를 위해 바칠 수 있느냐? ... 우리는 정말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인생의 큰 그림, 대작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렇다고 하나님이 가족을 무시하라고 하진 않았지요. 하나님은 가족이라는 시스템을 창조의 계획으로 세워 놓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부부가 되게 해서 가정이 탄생하잖아요. 그 가정을 통해서 또 자녀가 출생하고.....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또 축복하셨어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다"(시편 127:3). .....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런 자손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계승하기를 요구하셨다는 증거가 되지요.....
> 하나님은 이런 가족이란 시스템을 존중하셨다는 증거를 또한 오늘 창세기 본문 7절에서 찾아 볼 수가 있지요. 7절에 뭐라고 쓰여 있어요?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 원래 2절에 보면, 하나님은 언약을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세웠다고 그랬어요.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 그런데 여기 7절에 보면, 그것이 아브라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는다"고 그랬어요. 점점 확대되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이 언약이, 이 언약의 혜택과 정신이 그의 자식들에게 계속해서 계승될 것을 기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7절)고 하셨어요. 단지 아브라함 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보여 주시곤 하셨습니다.
> 어떤 심리학자가 이런 글을 썼다고 그래요. 우리 대구에서는 담장 허물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데, 이런 경계, 울타리를 허물어서 open하자는 그런 의도이겠지요. ..... 그러면 울타리가 있는 것이 좋아요? 없는 것이 좋아요? 없는 것이 좋아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어떤 심리학자가 그것이 정서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어요. 울타리를 높이 해 놓았을 때 심리적으로 어떠냐? 그렇게 좋지 못하다는 거였어요. 왜냐면 울타리를 높이하면 밖이 보이질 않아요. 폐쇄적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폐쇄적인 공간에서 폐쇄적인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거였어요. 그러면 반대로 울타리를 없애버리면 어떻게 될까? 여전히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불안해한다는 통계가 나왔어요. 그 어떤 보호장치가 없다보니 불안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럼 가장 이상적인 것은 무엇일까? 낮은 울타리! 낮은 울타리가 우리에게 정서적으로 가장 좋다는 결론이었어요.
> 그렇다면 우리는 가족에 대해 어떤 그림을 그려 볼 수 있을까? 지나치게 폐쇄적인 가족관을 가져선 안되겠지요. 가족 이기주의가 극심하다고 하는데, 그러기 때문에 밖을 내다볼 수가 없지요. 그렇다고 경계를 모두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가족이란 시스템이 무너질 수 있어요. 그렇다면 성경적인 가족관은 어떻게 그려볼 수 있습니까?
> ① 가족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새벽예배 때에 빌립보 1장 3-4절을 보면서 바울이 빌립보 교인을 향해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쁨으로 간구 한다"고 했는데, 먼저 우리는 우리 가족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쁨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을 귀히 여기십시오. 책임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두모두 소중하게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책임을 다한 아비였어요. 메소포타미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갈 때도 아비 데라를 모시고 갔어요. 너는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했는데. 조카 롯도 데리고 갔어요. 하란에서 6년이나 지체했던 것은 아버지가 건강이 안 좋아서, 임종이 가까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버지가 임종하신 후에야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 가나안을 향해 떠나는 것을 봅니다.... 뿐만 아니라 계집종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에게도 배려를 하지요. 서자인데, 배려를 해요. 하나님도 그 서자를 축복하고(창세기 16:10) 그도 하나의 민족이 되도록 약속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아브라함이 아비로써 책임을 다하는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 ② 그 다음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가족관은 가족주의를 넘어서서 더 큰 가족의 그림도 그리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 4절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부디 가족주의를 넘어서서 "열국의 아비"가 되는 큰 그림을 보여주셨어요. 그래서 이름까지 고쳐 주셨어요. "아브라함"은 "높으신 아버지", "존경받는 아버지"인데 "아브라함"으로 고쳐주셨어요. "아브라함"은 "열국들의 아비"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로 살라는 큰 그림을 그려주셨어요. 그래서 그의 인생의 지평을 넓히시고,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나님은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요즈음 "악의 축"(axis of evil)이란 말이 많이 나오지요. 악의 축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 명절이 되니까 TV에 실향민, 혼자사는 독거노인들, 양로원, 고아원, 소년소녀 가장들이 방영되고 있어요. 모두 함께 하는 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이런 믿음의 거물 아브라함을 통해서 여전히 더 큰 그림, 더 큰 환상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아직도 크고 작은 울타리, 경계, .....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계를 긋고,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선을 긋고, 그래서 조금만 침범해 들어오면 난리가 나지요. ..... 이런 모습은 원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은 사실 우리를 만드실 때 그림을 크게 그리셨던 것 같아요. 기대가 컸던 것 같아요. 그것을 생각하면, 저도 항상 죄스러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렇질 못하거든요.....
> 내 집이 너무 좁아지고 있습니다. 내 핏줄에 너무 사로잡혀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깥에선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관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들 점점 더 걱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들을 향해 다시 큰 그림을 보여 주시지요. 마가복음 3:31이하에서 .....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우리의 경계, 우리의 울타리, 우리의 벽을 뛰어넘어, 남들을 보고, 이웃들을 바라볼 때 이 세상은 온통 하나님의 집이 되어가고 그래서 모두가 명절같이 느끼는 훈훈한 세상이 되어갈 것입니다.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에요." 오늘! 오늘! 오늘! 설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기도 : 우리에게 큰 가족의 그림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갈 때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집이 되어가게 하옵소서.
기도로 계획한다는 것은?
눅 14장 26~33절 / 김태환목사
무슨 일을 계획하는 데에는 “현명한 계획”이 있고, “무모한 계획”이 있습니다. 무모한 계획이란 자기의 힘과 능력,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resources)이 얼마나 되는지 잘 따져 보지도 않고 일을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힘과 능력에 부치는 일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무모한 계획의 결과는 시작한 일을 다 마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모한 계획을 세운 결과에 대한 두 가지 비유를 들어 주셨습니다. 어느 사람이 탑을 쌓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앉아서 곰곰이 비용이 얼마나 들 것인지 잘 따져 보지도 않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중간에 비용이 떨어져 탑을 완성하지 못하고 공사를 중지하고 말았습니다. 또 어떤 왕이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적군이 20,000명의 군사를 끌고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이 왕은 자기의 군대가 절대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그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전쟁에 패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습니다.
현명한 계획을 세운다는 것을 그 반대의 경우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미리 잘 따져 봅니다. 자기가 가진 자원이 얼마나 되는지 신중하게 조사해 봅니다. 돈이 모자라서 중간에 중단하거나 하는 일이 시행착오가 생기지 않습니다. 현명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무모한 일을 벌이지 않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미리 사신을 보내서 화해를 청합니다. 아까운 인명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오늘 말씀을 어떻게 여러분의 삶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1)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시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의논해서(under His counsel) 실제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을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의 힘을 지나치게 믿습니다. 그리고 무모한 시도를 합니다. 자기의 힘과 능력, 자기의 자원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무모하게 시작합니다. 무모한 시도와 믿음이 무엇이 다른지 모릅니다. 기도로 계획한다는 것은 결코 무모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로 계획하는 사람은 중간에 공사를 중단하는 사람과는 다르고, 무모한 전쟁을 시작하는 왕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앉아서 따져 보지 않고, 헤아려 보지 않은 사람들을 경계하신 것 아닙니까? 너희는 믿음을 말하면서 그렇게 무모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 아닙니까? 기도로 무슨 일을 계획한다는 것은, 곧 기도와 함께 “careful calculation”이 따라야 한다는 말씀 아닙니까? 믿음으로 한다고 하면서, 기도로 한다고 하면서 중간에 공사를 중지하고 만 사람처럼, 전쟁에서 패한 왕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 아닙니까? 기도로 일을 계획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 하나님의 지도 가운데 실제적인 계획을 세우는 전략적인 일을 말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 실제적인 계산, 그 실제적인 전략 가운데 희생과 눈물이 빠져서는 안 됩니다. 모든 하나님의 일에는 우리의 희생과 눈물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면서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형제, 혹은 자매를 미워하지 않으면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6절)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33절)
(2) 우리는 재정적인 운영에 있어서 “그리스도 중심(Christ-centered)” 전략을 세우는 법을 성경에서 배워야 합니다. 모든 계획에는 재정 문제가 따릅니다. 이 재정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이 말은 돈의 사용 용도, 사용 목적이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일에, 복음이 확장 되는 일에 재정을 편성하고 써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사업들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가정에서, 사업체에서 사용되는 돈도 궁극적으로 같은 원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돈의 사용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일 때 정당성을 갖습니다.
(3) 우리는 재정적인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Lordship 아래 갖다 놓아야 합니다. 이 말은 이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재정을 궁극적으로 다루시는 분이 내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면 다 된다고 말합니다. 돈의 많고 적음이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돈의 필요함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에도 역시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있어야 선교를 합니다. 돈이 있어야 세운 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일도,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우리는 재정적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Lordship 아래 놓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리스도 중심으로 재정을 운영한다는 말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문제를 한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의 주인공은 그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이 말씀은 오순절에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4-6절)”
두 제자가 선포하고 있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궁극적으로 믿고 있는 것은 은과 금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사역의 힘은 은과 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나왔습니다. “은과 금”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사도들이 믿고 있었던 것은 돈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추진할 때, 교회에서 추진하는 일이라면 궁극적으로 그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 일을 추진할 때, 그러므로 돈은 없어도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전략이라든지, 혹은 재정 문제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Lordship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혹은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추진하면서 돈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묘한 차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미묘한 차이의 결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또 하나의 예는, 구약성경 학개 2:8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개 선지자는 답보 상태에 있는 성전 재건을 격려하기 위해서 페르시야에서 귀국한 선지자입니다. 유다의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성전 재건 사업은 중단되었습니다. 중단된 이유는 돈이 없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니까 공사를 계속하지 못하고 중단하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의 힘에 의존하고 있습니까? 돈이 없으니까 선교 사업도 못한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 이런 일도 못하고, 저런 일도 못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세상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돈 문제를 주관하시는 분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바로 이 문제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다!” 학개 선지자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너희는 돈이 없어서 성전을 짓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돈 문제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아느냐?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이런 뜻입니다. “너희는 지금 돈이 없어서 성전 짓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지금 너희가 소유한 은과 금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느냐?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이런 뜻입니다. 결국 성전을 짓는 공사가 중단된 것은 다른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 중심의 사고”를 하지 않았고, 재정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Lordship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성전 짓는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는 후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는 인색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학개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성전이 아직도 폐허로 남아 있는데 너희가 그렇게 멋진 집에서 사는 것이 옳으냐?” (학개 1:4) 페르시야에서 귀국한 학개가 백성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성전 짓는 일이 중단되었습니까?” “돈이 떨어졌습니다. 돈이 없어서 공사를 못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학개 선지자가 이렇게 반문합니다. “성전은 이렇게 폐허가 된 채로 버려져 있는데, 당신들은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페르시야에서 막 귀국한 학개 선지자의 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우리는 재정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 중심의 전략”을 세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재정 문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Lordship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선언했던 베드로와 요한에게 배워야 하고,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고 선언했던 학개 선지자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함께 구체적인 전략을 세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도만 하고 끝내는, 그리고 일을 추진하는 방식은 잘못하면 “무모한 시도”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전략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일을 인본주의적이라고 비난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careful calculation”아닙니까? 믿음은(혹은 기도)는 무모한 시도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그 일을 추진할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것입니다. 전략을 잘 짜서 탑을 성공적으로 세우고, 전쟁에서 패배를 자초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로 계획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 있습니까?
눅 14장 25~33절 / 성홍모목사
지난 주간에 한국교회의 큰 별이신 옥한흠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옥한흠목사님(1938-2010)은 사랑의 교회를 창립하시고 은퇴하여 원로목사님으로 계시다가 지난 2일 향년 72세의 일기로 소천하셨습니다. 2006년에 폐암 진단을 받은 뒤, 투병생활 하시다가 급성폐렴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누구보다도 민족과 한국교회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시며, 목회자로 모범을 보이시는 분이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옥목사님은 우리 한국교회에 제자훈련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만드셨으며, 평신도를 깨우는 새로운 종교개혁을 일으키셨습니다. 옥목사님은 국제제자훈련원을 일으키시고, 한국교회 모든 목회자들의 멘토이셨으며, 스승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하시며, 모두 다 훈련하여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 살게 하려고 힘쓰신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는 목회자들을 모아 제자훈련을 전수하셨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시면서, 제자훈련으로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는 광인론이라는 특강을 하셨습니다. 제자훈련에 물두한다는 말이나 열정이라는 말보다, 미쳤다는 말을 쓰셨습니다. 열정과 비전의 사람으로, 미친 사람이라 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옥목사님의 열정을 본받아 목회에 열정을 다하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과 같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 위기를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위기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과 같이 평화의 시대요, 경제적으로 잘 사는 시대요, 과학과 의학이 발전되어 살기 좋은 시대가 되었는데, 위기는 무엇이 위기냐고 하실 것입니다. 누가 예수 믿지 말라고 하더냐, 누가 박해한다고 위기라고 진단하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좋은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신앙적인 면에서 보면 위기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무한 성장이 이루어질 것으로 알던 때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한국교회가 배가 성장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으로 넘어오면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교인 증가율은 곧 교회성장지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1950-1960년에는 25% 성장으로 대단한 성장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0-70년 사이에는 무려 412%의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기하급수적인 성장이었습니다. 동리에 천막을 치고 십자가를 내어 걸기만 해도 교회가 되었습니다. 1970-1985년에는 성장이 둔화되면서 103%의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도 그때가 참으로 좋았습니다. 1985-1995년에는 35%의 성장으로 하향곡선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1995-2005년에는 -1.6%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희한하게 14,4000명이 감소하였습니다. 그 144,000명이 감소하였다는 통계를 보면서 그들이 하늘나라로 휴거되었는가 하는 농담도 나왔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교회성장은 정체되었고, 교단마다 비상에 비상수단으로 전도에 열을 내고 있지만, 성장하는 교단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저성장요인도 있지만, 사회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교회의 내적인 요인도 함께 작용하였습니다. 한국교회가 정체되고, 쇠퇴를 초래하는 보다 중요한 요인은 교회적인 것이었습니다. 한국사회가 급변하는 동안에 한국개신교회는 정체기를 지나 마이너스 성장으로 곤두박질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기윤실에서 설문조사하여 발표하는 것을 보면 1995-2005년 사이에 구교 가톨릭교회는 74%라는 경이적인 성장을 이루었고 불교는 4%의 성장을 기록할 때에 우리 개신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떨어졌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종교사회학자들이 나서서 설문조사와 함께 심층 분석으로 원인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신뢰도’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종교는 가톨릭교회이었고, 다음으로 불교요, 그 다음이 개신교회였습니다. 종교가 없는 비종교인들에 있어 종교 호감도를 보면 가톨릭교회가 1위요, 불교가 2위요, 개신교회는 가장 낮은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적고,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은 늘고 있습니다.
기윤실에서 신뢰도 문제를 가지고 설문조사하였습니다. 한국교회를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아주 신뢰한다: 5.2%, 조금 신뢰한다 : 13.9% 두 수치를 합하면 19.1%만이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치는 2-3년 전보다는 약간 회복되는 수치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사람은 국민 5명에 1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 수치입니다. 그러면 60.3%의 대다수의 국민들은 향후 개신교회가 신뢰받기 위해서 해야 할 사회적인 활동이 있다면 봉사와 구제활동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개신교회가 신뢰성을 잃어가는 것을 보면 개인의 영적인 문제에 그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지도자들이 너무나 속성으로 양산되고 있으며, 봉사와 구제와 같은 사회적인 역할은 미미하기만 하고, 진리를 가르치고 생활하는 것보다 교세 확장에 힘을 쏟고 있기에 신뢰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 오셔서 한국교회의 위기와 희망을 강의하였던 이원규박사의 최근 저서, “힘내라 한국교회”를 저자로부터 받아가지고 읽어보았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한국교회가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교회적인 요인은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교인이 교인답지 못하다는 현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한다면 이미 기울어져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더욱 암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교인이 교인답지 못하다는 말은 결국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교회를 이루기 때문에 우리 모든 교인들이 교인답게 변할 수 있다면 교회도 아울러 변하는 것이기에, 결국은 우리 모든 교인들이 변해야 하고, 교인다워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간에 “제자도”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영국 성공회의 가장 유명한 목회자요 저술가요 신학자이신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으로, 목사님이 세인트 바나바 칼리지에 있는 성공회 안식관에 머물면서 마지막으로 쓰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스토트 목사님이 88세의 나이로, 당신이 말하는 대로 마지막 책이라고 하시면서 마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쓰신 책이었습니다.
참고로 존 스토트 목사님은 본명은 ‘존 로버트 웜즐리 스토트’(John Robert Walmsley Stott)이시며 1921년에 나셔서 아직 생존하시는 영국 성공회의 신부이십니다. 성공회는 개신교회에 속하는데, 사제를 목사라 하지 않고 신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942년에 성공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런던의 올소울스교회(All Soul's Church)와 성바나바(St. Banaba Church)에 사목하였습니다. 현재는 올소올스 교회의 명예사제로 있으며, 성공회의 안식관에 들어가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현재 목사님은 90세의 나이로 영국을 대표하는 목회자요 신학자이신데, 그를 복음주의 신학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일생 결혼하지 않고 오직 목회에만 전념하신 분으로, 개신교회의 교황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너무나 유명합니다.
이 분이 쓰신 “제자도”라는 책이 얼마나 감동을 주고, 좋은 책인지 저의 목회에 새로운 도전을 주었습니다.
저의 남은 목회는 이 제자도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힘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존 스토트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에 대하여 그의 온 지식과 경험과 비전을 담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제자도라는 말을 잘 이해하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의 일생에 그가 선포하는 대로, 그가 말하고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하면서 제자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만 앞세우고, 행함이 전혀 따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언행일치를 통하여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존 스토트가 이 책 제자도의 머리말에서 “제자인가,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제목으로 책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첫째 왜 제자인가?” 그의 설명을 요약해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신약성경에 3번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면, 많은 이들이 놀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11:26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는데, 시리아의 안디옥이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11:26에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곳은 국제적인 도시였으며, 당연히 교회도 국제적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바울을 재판하는 아그립바왕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벧전4:16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벧전4:16에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제자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되었고,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제자라는 말에는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시고 세우시고 보내신 사도들도 처음에는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제자로서 훈련받아야 하고, 제자로서 일생을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지적하는 것을 보면 “보통 우리는 선택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철저한 제자도를 회피한다. 적당히 헌신할 만한 영역을 고르고, 대가를 치러야 할 듯한 영역은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우리에게 복종할 영역들을 취사선택할 권리가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마데테스”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Disciple 이라고 하는데, 라틴어로는 디사이플루스(Discipulus)라고 합니다. 이 말은 배우는 자, 생도, 제자라는 말입니다. 이 제자라는 말이 복음서에서는 232회, 사도행전에 27회나 나오는데, 서신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부를 때에 ‘제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서신서의 자자들, 사도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제자라고 하지 않은 것은 헬라문화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기독교가 단지 철학적인 운동으로서 오해받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교회는 예수 믿는 자들을 제자로 불렀고, 제라라고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훈련시키신 것을 보면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는 특수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자가 되는 사람은 반드시 스승을 닮아가야 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스승과 묶여 있는 인격적인 위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곧 나요, 나는 선생님의 분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만남, 변화의 삶, 새로운 가치관이 스승과 제자를 연결시켜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몸은 돌이키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6-27절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은 그리스어로 ‘미세오’라고 하는데, 싫어하다, 덜 사랑하다는 말입니다. 주님에게 나아가고, 따르고 믿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부모와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형제나 자매와 같은 가족들, 나아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롬14:7-8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려고 하면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 자기만이 지고 가야하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라는 말은 사형틀입니다. 살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매달려 죽어야 하는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비유가 망대의 비유입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28-30)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망대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가 계획한 망대의 규모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상당히 큰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망대를 완성할 수 있는지, 그 비용을 산출해보아야 하고,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지 그가 치러야할 대가를 앉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합니다. 그가 중도에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망대를 세우는 사람에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응분의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결코 부귀영화를 누리는 길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길입니다. 값을 치르지 않는 역사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망대를 건축하는 것은 그 만큼 비용이 들고 값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한 때,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보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적은 시험에 빠지고 넘어지고 상처를 입더니, 교회에 나오는 것조차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제자로 살려는 마음이나 있었습니까? 주님은 나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셨는데, 우리의 시간, 물질 건강을 바쳐 이제는 갚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라고 하면 목숨까지도 다 내어주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군대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31-32절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 말씀도 동문서답하시는 것 같지만, 제자로서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쟁이란 수많은 생명이 죽임 당할 수 있습니다. 나의 생명은 보존되고, 죽음의 화살이 비켜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있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이 명예를 생각하거나, 소유에 대한 욕심이 있다거나 살겠다는 생각이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전투, 오로지 적을 물리치려는 열정, 목숨 걸고 싸우려는 열정만이 그를 지켜줄 것입니다.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33절에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소유 중심의 사람이 아니라, 존재 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무겁다고 여기던 그 십자가가 나를 지고 주님에게로 갔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잘 살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까? 이제는 잘 죽기 위하여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 작은 예수들이 나타나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주님처럼 죽으려는 사람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 분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온 사람이었다고 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약함의 능력, 고난을 통한 영광, 죽음을 통한 영생 이런 것은 파라독스, 역설적인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영원한 사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이요, 주님을 따르는 일에 목숨을 건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