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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중마방서(古鏡重磨方序) 1
중국의 제왕과 학자들이 남긴 70여종의 명(銘)과 잠(箴)과 찬(贊)을 퇴계(退溪)선생께서 모아서 애송(愛誦)하시던 일생의 좌우명(座右銘)들로 엮어진 책이다.
1. 성탕(成湯) 임금의 세숫대야에 새긴 반명(盤銘)
盤銘 : 은(殷) 탕왕이 세수대야 바닥에 새겨놓은 글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진실로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매일매일 새롭게 하여 나날이 새롭게 하라.
(解說)
위 글은 중국 고대 하(夏)나라의 폭군이던 걸(傑)왕을 몰아내고 상(商)나라 곧 은(殷)나라를 세운 성탕(成湯)왕이 자신의 마음을 반성하고 수양하기 위해 세숫대야에 새긴 글이다.
인간의 마음은 한 자리에 머물면 고인 물처럼 썩고 만다. 그러므로 과거의 잘못된 일이나 남으로부터 당한 억울한 일이나 자신이 이룩한 과거의 업적 등에 마음이 집착되면 원래 밝은 마음은 오염되고 부패되고 만다.
마음은 시냇물처럼 항상 새롭게 흘러야만 한다. 눈에도 집착하지 말고, 귀에도 집착하지 말고, 느낌에도 집착하지 말고, 생각에도 집착하지 말고, 항상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저 높은 산 속 바위틈의 샘처럼 항상 새롭고 신선한 생각을 내어 청정한 생활을 매일매일 이끌어 가야 한다. 바로 이런 삶이 새롭게 태어나는 ‘일신 일일신 우일신(日新 日日新 又日新)’하는 참된 삶이다.
시냇물은 흘러야 제격이고, 샘은 시시각각 솟아야 제격이며, 인간은 새벽마다 거듭 태어나야 제격이다.
2. 무왕(武王)의 좌석 네 모퉁이에 새긴 석사단명(席四端銘)
席四端銘 : 주 무왕이 좌석 모퉁이에 새긴 글
安樂必敬, 無行可悔.
편하고 즐거울 때 반드시 공경함을 지니라.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긴다.
一反一側, 不可不志.
눕거나 엎드리거나 항상 마음을 가다듬어 조심조심 나아가라.
殷監不遠, 視爾所代.
은나라 백성들이 가까운 곳에서 네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를 일일이 감시하고 있다.
(解說)
무왕(武王)은 은나라의 폭군 주(紂)왕을 몰아내고 아버지 문왕을 이어 주나라를 세운 주나라 제 2대 왕이다.
비록 은나라의 폭군 주왕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주왕조를 건국했지만 아직도 은나라 백성들은 은나라에 미련을 가지고 있으며 만약 주나라 왕이 조금이라도 왕도에서 어긋난 짓을 하면 당장 들고 일어설 기세다.
백성들이란 평소에는 물처럼 왕이라는 배를 온순히 그들 위에 띄우고 있지만, 왕이 왕도에서 벗어난 짓을 하면 언제라도 노도같이 그 배를 뒤엎어 버릴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왕조를 개창한 지금, 마치 살얼음 위로 걷는 것처럼 조심하고 경계해야만 한다.
우주의 참모습은 변화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지금 생활이 한 때 편안하고 즐겁고 남들 위에 군림한다고 해서 이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며, 비록 현재의 생활이 고달프고 남아래서 전전긍긍한다고 해서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우주 만상은 끊임없이 돌고 돌아 태극운동을 전개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윗자리에 있을 때는 아래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생각하고 아래 자리에 있을 때는 윗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생각하는 마음의 폭을 지녀야 한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윗자리가 어디 있고, 아랫자리가 어디 있느냐. 오로지 저마다 인생이란 무대에서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가며 저마다의 마음자리를 밝게 수양해 가는 것이 생의 의의가 아닌가.
예컨대 우리 몸이라는 사회가 건강하게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입은 먹고, 코는 숨쉬고, 귀는 듣고, 눈은 보고, 위장은 소화하고, 큰창자는 배설물을 저장해야만 한다. 거기에는 깨끗함과 더러움도 없고, 귀하고 천한 것도 없고, 위도 아래도 없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차별은 보이는 대상들을 인간의 좁은 시각에 맞추어 서로 비교하고 판단하고 자만하고 시기하고 울고 웃고 하는 한바탕 귀신놀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무엇보다 전체와의 조화가 근본이 된다. 기쁠 때는 다른 이의 슬픔을 생각하고, 이익이 날 때는 다른 이의 손해를 생각하는 자타를 원융하는 삶, 즉 온 우주만상이 한 몸이요 한 생명이라는 보다 넓은 인생관 정립이 요청된다.
3. 무왕(武王)의 거울 위에 새긴 감명(鑑銘)
鑑銘 : 무왕이 거울 뒤에 새긴 글
見爾前, 廬爾後.
그대의 앞은 눈으로 보고 그대의 뒤는 생각으로 살펴라.
(解說)
육체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존재의 실상이 아니다. 존재의 실상은 겉으로 드러나 있는 모양이나, 소리, 색을 넘어선 적멸의 여여(如如)한 자리에 놓여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겉으로 드러난 형상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천태학(天台學)에서는 어떤 존재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겉모습을 가(假)라 하고, 변화하는 겉모습 배후의 변함없는 일여(一如)의 적정(寂靜) 평등한 모습을 공(空)이라 칭하고, 이 둘의 모습을 동시에 비추어 보고 원융하는 것을 중(中)이라 한다. 바로 이 중의 자리에 서서 사물을 바라볼 때 비로소 사물의 진상이 드러난다.
그래서 육안(肉眼)으로 앞에 있는 사물의 현재 드러난 모습을 보고(假), 사유의 힘으로 사물 배후의 평등하고 여여한 본체를 보고(空), 이 둘을 종합하여 사물의 진상을 파악해 간다(中).
4. 무왕(武王)의 세숫대야에 새긴 반명(盤銘)
盤銘 : 무왕이 세수대야 바닥에 새긴 글
與其溺於人也, 寧溺於淵.
사람에 빠지는 것 보다는 차라리 연못에 빠지는 편이 낫다.
溺於淵猶可游, 溺於人不可捄也.
연못에 빠지면 헤엄이라도 쳐서 나올 수 있지만, 사람에게 빠지면 도저히 빠져나올 길이 없다.
(解說)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장막은 철(鐵)의 장막도 아니고, 죽(竹)의 장막도 아닌, 인(人)의 장막이다. 철의 장막은 녹여 내고, 죽의 장막은 베어 낼 수 있지만, 사람의 장막에 가려지면 장막 자체가 보이지 않으므로 걷어낼 마음조차 내지 못한다.
역대 수많은 혁명가들이 처음에는 정의로운 사회개혁에 착수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첨하는 소인배들의 달콤한 인(人)의 장막에 가려져서 원래의 원대한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종국에는 후회와 한탄 속에 생애를 마감하고 만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사랑하되 사랑에 빠지지 말고, 미워하되 미움에 빠지지 말고, 재산을 모으되 재산에 빠지지 말고, 명예를 추구하되 명예에 빠지지 말고, 언제라도 원래의 빈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여백의 마음을 지녀라’고 했다.
이를 두고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내라’ 고 하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나아가라.’고 한다.
5. 무왕(武王)의 기둥 위에 새긴 영명(楹銘)
楹銘 : 무왕(武王)이 기둥에 새긴 글
毋曰胡殘 其禍將然.
잔혹함이 멀리 있다고 말하지 말라. 장차 그 화가 미칠라.
毋曰胡害 其禍將大.
해로움이 멀리 있다고 말하지 말라. 장차 그 화가 커질라.
毋曰胡傷 其禍將長.
손상이 멀리 있다고 말하지 말라. 장차 그 화가 늘어날라.
(解說)
잔혹함이 아직 멀리 있다고 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재앙이 미치고, 해로움이 아직 적다고 해서 그대로 내버려 두면 그 재앙이 더욱 커져가고, 손상이 문제시 될 것까지 없다고 해서 그대로 방치해 두면, 그 재앙이 반드시 늘어난다.
그러므로 항상 '서리를 밟으면 장차 굳은 얼음의 계절이 다가옴을 안다' 라는 주역의 말처럼 유비무환의 자세로 마치 살얼음판 위로 걸어가듯 조심조심 미리 미리 대비해가야 한다.
6. 무왕(武王)의 지팡이 위에 새긴 장명(杖銘)
杖銘 : 무왕(武王)이 지팡이에 새긴 글
於乎, 危於念疐 於乎, 矢道於嗜欲 於乎, 相忘於富貴.
아! 분한 마음에 얽매이면 위태롭고, 즐기고 좋아하는 일에만 빠지면 도를 잃고, 부귀에만 빠지면 서로의 정리(情理)를 잃는다.
(解說)
분하고 원통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우선 자신부터 다치고, 지나친 쾌락에 빠지면 삶의 진리를 추구하는 도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재물 축적과 높은 자리에 연연하면 사람들 사이의 정분과 의리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항상 중(中)의 자리에서 경(敬)의 자세로 일관하는 삶의 태도야말로 올바른 자세이다.
7. 주왕조(周王朝) 종묘 앞 금인 위에 새긴 금인명(金人銘)
金人銘 : 주왕조 종묘 앞 쇠로 만든 인물상 위에 새겨놓은 글
戒之哉! 無多言, 無多事.
삼가고 삼가라.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일을 많이 도모하지 말라.
多言多敗, 多事多害.
말이 많으면 실수가 잦고, 일이 많으면 해가 많은 법이니라.
安樂必誡, 無行所悔.
편하고 즐거울 때 반드시 경계하라.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기느니라.
勿謂何傷, 其禍將長.
勿謂何害, 其禍將大.
해로움을 말하지도 말라. 장차 그 화가 늘어날까 두려우니라.
勿謂不聞, 神將伺人.
직접 듣지 못한 일은 말하지도 말라. 귀신이 엿보고 있느니라.
滔滔弗滅, 炎炎若何.
불꽃이 일어날 때 당장 끄지 않으면 불길이 삽시간에 솟아올라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마느니라.
涓涓不壅, 終爲江河;
한 방울 물이 새어 나올 때 막지 않으면 끝내 강물로 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되고,
綿綿不絶, 或成網羅;
한 올의 실이 이어지면 마침내 그물이 되어 몸을 묶게 되고,
毫末不札, 將尋斧柯.
털끝만한 초목이라도 미리 뽑지 않으면 마침내 도끼자루가 되어 사람을 해치게 되니 미리 조심하고 경계할 지어다.
誠能愼之, 福之根也.
사전에 경계하고 조심하는 것이 모든 복의 근본이니라.
口是何傷禍之門也.
입이란 무엇인가. 모든 손상과 재앙이 드나드는 문이니라.
强梁者, 不得其死.
고집 세고 힘센 사람은 제 명에 죽지 못하고,
好勝者, 必遇其敵.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적수를 만나며,
盜憎主人, 民怨其上.
도둑은 주인을 미워하고, 백성은 그들의 윗사람을 원망하느니라.
君子知, 天下之不可上也, 故下之.
군자는 천하 위에 군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므로 스스로를 낮추고,
知衆人之不可先也, 故後之.
백성보다 앞설 수 없음을 알고 있으므로 스스로 뒤에 서느니라.
江海雖在下, 長於百川以其卑也.
강과 바다는 비록 낮은 곳에 있지만 스스로 낮기 때문에 백 줄기 냇물보다 더 길고 넓게 이어져 가느니라.
天道無親, 常與善人.
천도(天道)는 비록 사사로이 친하고 멀리함이 없지만 언제나 선한 사람 편을 드느니라.
戒之哉! 戒之哉!
삼가하고 삼갈지어다.
(解說)
위의 글은 주왕조 종묘 앞에 세워놓은 쇠로 만든 인물상 위에 새겨놓은 명문(銘文)이다. 사전에 조심하고 경계할 것을 주지시키는 내용이다.
군자는 사물의 기미를 미리 알아차리고, 보이기 전에 보고, 들리기 전에 듣고, 일이 일어나기 전에 수습한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행하는 것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철저한 성찰과 대비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리 조율하여 문제를 해결해 간다. 이를 두고 무위(無爲)의 치(治)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비록 제왕이라도 가볍게 입을 열어서는 안 되며 또한 신하의 말을 액면 그대로 쉽게 믿어서도 아니 된다. 항상 자신 내면의 수양과 성찰을 토대로 중(中)의 자세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퇴계 선생은 '자성록' 서문에서 '군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혹시 거기에 상응하는 실천이 따르지 않을까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입이라는 것은 잘못 사용하면 만 가지 재앙의 출구가 되고, 귀도 또한 잘못 들으면 만 가지 어리석음의 근원이 된다.
다음은 항상 겸손한 마음을 견지하는 일이다. 저 우뚝 솟은 산봉우리는 물 한 방울 간직할 수 없지만 저 낮은 계곡은 백 천 갈래의 물을 모아 개울을 형성하고 강을 형성하고 마침내 바다로 이어진다.
도가(道家)에서는 이를 두고 '상덕약곡(上德若谷)', 또는 '지선여수(至善如水)'라 하며, 원효는 겸손한 마음을 '하심(下心)'이라 하고 이 하심보다 더 자기를 낮추고 겸양하는 마음을 아래 '하(下)'자의 아래 부분인 '복(卜)'자를 따서 '복성(卜性)'이라 칭하고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8. 최원(崔瑗, 최자옥)의 좌우명(座右銘)
약 천구백여년 전 후한시대의 학자 최원(崔瑗)은 자신의 책상 옆에 귀감이 될 글귀를 새겨 두고 자신의 언행을 경계했는데, 역사상 최초의 좌우명(座右銘)이 되었다.
無道人之短, 無說己之長.
施人慎勿念, 受施慎勿忘.
남의 단점을 말하지 말고 자기의 장점도 말하지 말며, 남에게 베푼 것은 조금도 생각에 남기지 말고 남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것은 결코 잊지 말라.
世譽不足慕, 唯仁爲紀綱.
세상의 명예는 부러워 할 것이 못되니 여기서 벗어나, 오직 인(仁)함으로 생의 바탕을 삼고,
隱心而後動 謗議庸何傷.
은자(隱者)의 마음으로 한걸음 물러나 조용히 지내라. 이렇게 하면 어찌 남의 비방과 헐뜯음이 내 몸에 상처를 가할 수 있겠는가.
無使名過實, 守愚聖所臧.
이름이 실제보다 지나치게 드러나게 하지 말고, 성인께서 감추어 둔 마음의 보물을 어리석한 가운데 지켜가며,
在涅貴不緇, 曖曖內含光.
검은 무리 가운데서 검게 물들지 않음을 귀하게 여기고,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항상 밝은 광명을 품고 다녀라.
柔弱生之徒, 老氏誡剛強.
부드럽고 약함이야말로 생명의 특성이니, 노자(老子)는 특히 지나치게 강함을 경계하였다.
(解說)
항상 남의 좋은 점과 밝은 점을 보고 이를 격려하고 신장시켜서 나쁜 점과 어두운 점을 없애게 하고, 꽉 쥔 주먹손으로 꾸짖기보다는 활짝 편 손으로 너그럽게 덮어주고 어루만져 잘못된 점을 고쳐나간다.
남에게 베푼 은혜는 마치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물건을 뒤지지 않듯이 두 번 다시 생각지도 말며, 반대로 남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아무리 작아도 잊지 말고 이에 감사하며 여기에 보답할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내 스스로 세상의 물욕에서 한걸음 물러나 바른 도리를 지켜나가니 어찌 세상의 하루살이 같은 부질없는 비방들이 나를 흔들리게 할 수 있겠는가.
실제 자신의 능력보다 이름이 과대하게 알려져 있거나, 지나치게 높은 지위에 앉아 있다면,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그 자리에 합당한 자신의 역량을 길러가고 덕을 함양해 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낮에는 비록 권세와 위압으로 그런대로 흘러가지만, 밤에는 뭇 세인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생명의 특성은 연약하고 부드러운 것이고, 죽음의 특성은 굳고 단단한 것이다. 갓난애와 갓 돋아난 풀은 연약하고 부드럽고 유연하다. 그러나 시체와 죽은 나무 등걸은 단단히 굳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가 항상 유연하고 남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따스한 인정의 샘이 끊임없이 솟아난다면 바로 이것은 싱싱한 밝은 생명의 무한한 지속의 암시가 되고,
반대로 우리의 사고가 경직되어 항상 자기 고집에만 빠져있고 이웃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고 인정의 샘이 메말라 있다면 이는 곧 자신이 죽음이 가까이 와 있다는 경고가 된다.
9. 변란(卞蘭, 위하란)의 좌우명(座右銘)
重階連棟 必濁汝眞
金寶蒙屋 將亂汝神
높이 솟은 수십 간의 호화저택은 사람의 본바탕을 흐리게 하고, 보석 따위로 지나치게 집을 치장함은 사람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한다.
厚味來殃 艶色危身
求高反墜 務厚更貧
지나치게 맛에 끌리면 재앙을 부르고, 미색에 끌리면 몸을 위태롭게 하고, 지나치게 높은 자리만 추구하면 오히려 떨어지고, 지나치게 재물욕에 빠지면 오히려 가난해진다.
閑情塞欲 老氏所珍
周廟之銘 仲尼是遵
정서를 한가롭게 하고 욕심을 버리는 것은 노자께서 귀하게 여기신 것이고, 주나라 사당에 새겨져 있는 글은 공자께서 평생 소중히 여기신 것이다.
審愼汝口 戒無失人
從容順時 和光同塵
입을 단단히 지켜 사람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세속에 묻혀 살되 분명하지 않은 것은 전하지 말고,
無謂冥漠 人不汝聞
無謂幽冥 處獨若羣
남의 잘못은 듣지 말며, 음흉한 귓속말을 삼가며, 혼자 있을 때는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듯이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
不爲福先 不與禍隣
守玄執素 無亂大倫
常若臨深 終始惟新
복을 앞세워 화를 자초하지 말고, 세속에 묻혀 있으면서도 타고난 천리(天理)를 잘 지켜, 인간의 정도(正道)를 따르며, 항상 깊은 물가를 걷는 듯 깨어있는 마음으로 신중히 나아가라.
(解說)
마음이 머무는 곳이 몸이고, 몸이 머무는 곳이 집이다. 집의 주인은 몸이요, 몸의 주인은 마음이다. 그런데도 몸을 더 중히 여겨 마음을 시들게 하고, 집을 더 중히 여겨 몸을 병들게 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주객이 전도된 어리석은 짓이다.
한 몸이 편안히 쉴 수 있으면 집은 집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한 마음이 편안히 작용할 수 있으면 몸은 몸으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본질과 중도에서 벗어나 겉치레에 치중하게 되면 몸을 망치고 마음을 망치고 마침내 한 생을 헛되이 망치고 만다.
항상 겉치레와 물욕, 색욕, 명예욕에서 훌훌 벗어나, 마치 마음을 푸른 솔 푸른 하늘 위의 백학처럼 자유롭게 풀어놓고 유유자적 해야만 비로소 여태 눌려 있었던 생의 묘광(妙光)이 훤히 드러난다. 그리고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변덕스러운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세속에 있되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은, 마치 연꽃이 진흙탕 속에 뿌리를 두고 있되 그 꽃은 수면 위에 떠서 항상 청정함을 지켜가듯이, 원력을 향해 정진하는 수행자 같은 삶을 말한다.
10. 백거이(白居易)의 좌우명(座右銘)
勿慕富與貴, 勿憂賤與貧.
自問道何如, 貴賤安足云.
많은 재물과 높은 신분을 부러워하지 말고, 낮은 신분과 빈궁함을 근심하지 말며, 오직 스스로 마음의 도(道)가 어느 정도인지만 묻는다면, 신분의 고하(高下)가 어찌 문제가 되겠는가?
聞毁勿戚戚, 聞譽勿欣欣.
自顧行何如, 毁譽安足論.
남의 비방을 듣고도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칭찬함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행실의 올바름만 추구해 간다면, 뜬구름 같은 명예의 오르내림이야 어찌 논할 가치가 있겠는가?
無以意傲物, 以辱遠於人.
無以色求事, 以自重其身.
오만한 생각으로 남을 업신여기지 말고, 뭇 사람들의 비방에 개의치 말며, 색(色)으로써 일을 구하지 말고, 오직 스스로 몸을 자중해가라.
遊與邪分岐, 居與正爲隣.
於中有取舍, 此外無疎親.
집을 나서서 길을 떠날 때는 삿된 사람들과 동행하지 말고, 집에 와서는 도리에 맞는 사람들과 이웃해 가라. 이 가운데 취하고 버릴 것이 있을 뿐이지 따로 사람을 멀리하고 가까이 할 것은 아니다.
修外以及內, 靜養和與眞.
養內不遺外, 動率義與仁.
바깥 몸가짐을 바르게 닦아서 내면의 심성(心性)을 중화(中和)의 도리에 맞게 하고, 또한 내심을 수행하여 그 덕향이 바깥 행실에까지 미치게 하여 한 동작 한 동작마다 의(義)와 인(仁)이 스며들게 하라.
千里始足下, 高山起微塵.
吾道亦如此, 行之貴日新.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되고, 높은 산도 한 알의 흙이 쌓여 이룩되듯이, 인간의 도(道)도 조그만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도를 행함에는 나날이 스스로 새로워짐을 귀하게 여길 뿐,
不敢規他人, 聊自書諸紳.
終身且自勉, 身沒貽後昆.
감히 남을 규제하는 따위는 결코 마음에 두지 말라. 큰 띠에 이 글을 써 놓고 종신토록 지키며 힘쓰다가 죽은 뒤에는 이 띠를 후손에게 전해 줄 것이다.
後昆苟反是, 非我之子孫.
만약 나의 후손으로서 이 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이는 분명 나의 후손이 아니다.
(解說)
뜬 구름 같은 일시적인 빈부, 귀천, 명예 따위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의 마음의 수행 정도가 어느 정도 익어 가고 있는지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남의 일시적인 비방이나 신분의 고하나 명예의 유무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항상 어진 이와 동행하여 인(仁)의 싹을 길러가고, 바른 가치관을 지닌 이와 벗하여 생의 정도(正道)를 따라 묵묵히 걸어가며,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의 자세로 항상 몸과 마음을 닦아 가면 종국에는 내외명철(內外明徹)한 훈훈한 덕향(德香)의 자리에 오를 수가 있다.
작은 흙 알갱이 하나하나가 모여 태산을 이루고, 작은 걸음 하나하나가 쌓여 천리 길을 이루듯이, 강물처럼 쉼 없이 흘러가는 자세야말로 수행의 올바른 자세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경책하고 스스로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과정이지, 결코 자랑하거나 남을 훈계하거나 규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자손에게는 많은 재산보다 인생의 바른 길을 인도해 주는 성현의 말씀 한 구절이 더욱 긴요하다. 비록 내 자손이 나의 피와 뼈를 받았을지라도 그 마음자리가 나와 동떨어져서 삿된 길을 걷는다면 이를 어찌 나의 자손이라 일컬을 수 있겠는가?
11. 이지(李至)의 속좌우명(續座右銘)
短不可護, 護則終短.
長不可矜, 矜則不長.
단점을 감싸면 단점은 끝까지 단점으로 남고, 장점을 자랑하면 장점은 끝까지 장점이 되지 않는다.
尤人不如尤己,
好圓不如好方.
남의 허물을 찾는 것 보다는 나의 허물을 먼저 살피고, 둥그런 장점에 안주하기 보다는 모난 단점을 살피고 고치는 편이 낫다.
用晦則天下莫與汝爭智.
撝謙則天下莫與汝爭强.
어리석은 듯 자중하면 천하 사람들이 그대의 총명함을 헐뜯지 않고, 하심으로 겸손하면 천하 사람들이 그대의 강함을 다투지 않는다.
多言者老氏所戒.
訥言者仲尼所臧.
노자께서는 말이 많음을 경계하셨고, 공자께서는 말의 절제를 사랑하셨다.
妄動有悔, 何如靜而不動.
大剛則折, 何如柔而勿剛.
함부로 행하면 후회함이 따르니 고요히 근본을 지키는 것보다 못하고, 지나치게 강경하면 부러지기 쉬우니 부드럽고 온유한 것보다 못하다.
吾見進而不已者敗.
未見退而自足者亡.
나아가기만 하고 그칠 줄 모르면 실패하기 쉽고, 물러나 스스로 자족하면 패망하는 법이 없다.
爲善則遊君子之域.
爲惡則入小人之鄕.
선한 행동을 거듭하면 군자의 나라에 노닐고, 악한 행동을 거듭하면 소인의 나라로 추락된다.
吾將書紳帶以自警, 刻盤盂而過防, 豈如長存於座右, 庶夙夜之不忘.
이제 큰 띠에 이 글을 써서 스스로 깨우치고, 세숫대야나 사발에 새겨서 허물을 방지하고자 하며, 아울러 자리 오른쪽에 오래도록 간직하여 아침 저녁으로 이 글을 읽어 종신토록 잊지 않고자 한다.
(解說)
단점을 단점으로 인정하는 순간 그 단점은 부단한 노력으로 고칠 수가 있지만, 그 단점을 혹시 남의 눈에 보일까 숨기고 감추기만 하면 그 단점은 끝까지 단점으로 남는다. 그리고 장점도 장점이라는 자만심에 빠지는 순간 장점은 더 이상 장점이 되지 못한다.
남의 허물을 찾는 것은 이미 내 마음속에 그런 유(類)의 잠재된 씨앗이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의 반영으로 그런 허물이 보인다. 그러므로 근본 처소에 고요히 앉아 내 마음의 거울을 닦는 것이 최선이다.
착한 행동의 한 걸음은 보잘 것 없지만 이것이 쌓이고 쌓여 선한 세계를 이루어 마음의 극락정토가 이룩되고, 악한 행동의 한 걸음은 보잘 것 없지만 이것이 쌓이고 쌓여 악한 세계를 이루어 마음의 지옥세계가 펼쳐진다.
그러니 어찌 행동 하나 하나를 조심하지 않겠는가? 스스로 허물을 고쳐 나의 일심이 청정해지면 내 주위가 청정해지고 내 주위가 청정해지면 온 천지가 청정해진다.
그래서 중국의 한산자(寒山子)는 '심월자정명 만상하능비(心月自精明 萬象何能比)' 즉 '내마음의 달이 스스로 맑고 밝으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다'고 읊었다.
12. 유우석(劉禹錫)의 누실명(陋室銘)
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이름이 나고,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신령스럽게 된다.
斯是陋室, 惟吾德馨.
이곳은 비록 누추한 방이나 나의 인품의 향기가 스며있다.
苔痕上階綠, 草色入簾靑.
이끼는 계단 위로 군데군데 푸르고, 풀색은 늘어뜨린 발 사이로 파랗다.
談笑有鴻儒, 往來無白丁.
可以調素琴閱金經.
큰 선비가 도를 논하고, 막된 사람의 왕래가 없으니, 거문고를 타고 고귀한 경전을 펼칠 만하다.
無絲竹之亂耳, 無案牘之勞形.
南陽諸葛盧, 西蜀子雲亭.
여러 가지 현란한 악기의 어지러움이 없고 공문서나 편지에 시달림이 없으니, 남양 제갈공명의 초가집이요, 서촉의 자운정(子雲亭)이다.
孔子云, 何陋之有.
공자께서는 '군자가 거하니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셨다.
(解說)
산은 높이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고, 물은 깊이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드러난 겉모습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산에 신선이 살면 영산이 되고, 물에 용이 살면 용담이 되고, 몸속에 성현(聖賢)의 마음이 깃들면 성현이 된다.
나라야 귀천이 없지만 마음자리가 귀한 사람이 모이면 귀한 나라가 되고, 마음자리가 천한 사람이 모이면 천한 나라가 된다.
이같이 원래 처소 그 자체는 선악이 없다. 그 곳에 머무는 사람이 선하면 선한 자리가 되고, 악한 사람이 머물면 악한 자리가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도하셨을 때 부처님 주변의 그 척박하고 메마른 땅이 온갖 눈부신 빛과 아름다운 연꽃으로 장엄된 정토로 바뀌었다.
조직체도 사회도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청정하고 밝을 때에는 청정하고 밝은 조직체가 전개되고, 그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탁하고 어두울 때는 탁하고 어두운 조직체가 된다.
또한 개인의 소지품도 마찬가지다. 낡은 책장과 빛바랜 책도 맑은 영혼과 소담한 꿈을 지닌 여인의 손길이 닿으면 언제나 시골길 들국화 같은 신선한 향기를 자아낸다.
13. 사마광(司馬光, 司馬君實)의 반수명(槃水銘)
槃水銘 : 물그릇에 새기다
槃水之盈 止之則平;
平而後淸 淸而後明.
물그릇에 가득 담긴 물은 움직임이 없으면 평편하고, 평편한 뒤에야 맑아지고, 맑아진 뒤에야 밝아진다.
勿使小欹, 小欹則傾;
傾不可收用, 毁其成.
조금이라도 기울어지면 쏟아지고, 쏟아지고 나면 다시 거둘 수가 없으니, 여태까지 이루어 놓은 것들은 헛된 공으로 돌아가고 만다.
嗚呼, 奉之可不兢兢.
아! 만사가 이러하니 어찌 조심조심 받들고 삼가지 않으리오?
(解說)
우리의 마음은 물과 같고 우리의 몸은 물을 담은 그릇과 같다. 그릇이 바르게 안정되어야 물이 고요해지고, 물이 고요해진 후에야 하늘의 밝은 진리의 달이 수면 위에 떠오른다.
마찬가지로 외형적인 행동거지가 우선 반듯해야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진 후에야 지혜의 빛이 드러난다.
14. 범순인(范純仁, 范堯夫)의 사마공 포금명(司馬公 布衾銘)
布衾銘 : 사마공이 덮던 삼베 이불에 새긴 글
藜籗之甘, 綈布之溫, 名敎之樂.
명아주 잎, 콩잎, 베 이불(布衾) 등 거친 음식과 거친 이불이 오히려 달고 따스하며, 인륜 도덕의 가르침이 오히려 즐겁다.
德義之尊, 求之孔易, 享之常安.
도덕과 정의를 존중하고 구하기가 오히려 쉽고 이를 지켜 가면 언제나 평안하다.
錦繡之奢, 膏梁之珍, 權寵之盛.
利慾之繁, 苦難其得, 危辱旋臻.
반면에 비단으로 수놓은 옷으로 사치하고 산해진미로 배불리 먹으며 권세와 총애를 구하고, 명예와 이익을 쫓아 눈코 뜰 새 없이 동분서주하는 일은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오히려 괴롭고 스스로를 위험과 재앙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일이다.
舍難取易, 去危就安, 至愚且知
이같이 어려움을 버리고 쉬움을 취하며, 위험을 멀리하고 평안함을 이루는 것이 소극적이고 어리석은 것 같지만 사실은 지혜로운 일이다.
士寧不然.
선비로서 어찌 이 길을 마다하겠는가?
顔樂簞瓢, 萬世師模.
紂居瓊臺, 死爲獨夫.
안연은 대광주리와 표주박으로도 즐거움을 찾아서 천대 만대 스승의 모범이 되었고, 주왕(紂王)은 옥으로 만든 화려한 누대에 살았지만 죽어서는 한낱 필부로 전락되고 말았다.
君子以儉爲德, 小人以侈喪軀.
군자는 검소함으로써 덕을 삼고, 소인은 사치함으로써 몸을 망친다.
然則斯衾之陋, 其可忽諸.
그런즉 이불이 누추하다 하여 이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解說)
우리 범부들은 허상에 사로잡혀 부질없는 오욕(五欲), 즉, 식욕, 색욕, 재물욕, 명예욕, 수면욕에 빠져 삶의 바른 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한 세상 다 보내고 만다.
한정된 물질과 자리를 서로 소유하려고 저마다 싸워대다가 의리를 상하고, 마음을 상하고, 마침내 몸마저 상하고 만다. 그러나 무한히 솟아나는 도와 사랑과 정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가져가도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일시적인 육체를 위하기보다는 영원한 마음을 위해, 때로는 눈멀고 귀멀고 벙어리 되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무소의 뿔처럼 오직 한길로 나아간다. 그 한 길은 곧 도의 길이요,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영원한 수행자의 길이다.
15. 위화보(魏華父)의 띳집에 새긴 명(茅齋銘)
茅齋銘 : 띠풀로 지붕을 덮은 집
茅之爲物, 可植可莤,
可籍可鼎, 可包可束.
띠풀은 심을 수도 있고, 술을 거를 수도 있고, 자리에 깔 수도 있고, 점괘를 만들 수도 있고, 물건을 싸고 묶을 수도 있다.
堅剛潔白, 君子之屬,
肆古宮室, 編茅架木.
그리고 그 성질이 굳세고 단단하고 깨끗하여 마치 군자의 성품과 같으므로, 옛 궁궐의 집들은 띠풀로 꼰 새끼줄로 나무를 얽어매어 지었다.
土階簡簡, 淸廟肅肅.
당시 소박한 흙 계단으로 쌓아올린 사당은 한가롭고 맑고 엄숙하였다.
候直分社, 農綯乘屋,
上下同然, 儉而易足.
제후는 그 지방의 사직 등 행정을 맡고, 농민은 새끼를 꼬아 지붕을 이어서 상하(上下)가 하나같이 서로 검소하여 쉽게 만족하였으며, 또한 검소함 그 자체를 드러내어 자랑하지도 않았다.
匪惟著儉, 抑亦觀德,
於泰象陽, 於詩比玉.
돌이켜 띠풀의 덕성을 살펴보면, 주역의 태(泰)괘에서는 양(陽)을 상징하고, 시경에서는 옥에 비유하였다.
瓦葺之分, 考工所錄.
기와집과 초가집의 소박한 규모는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에 기록되어 있다.
迨其流弊, 文題刻桷,
去潔尙華, 損剛從欲.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 소박함은 없어지고 오히려 사치스러움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바르고 굳셈은 없어지고 오히려 사사로운 욕심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趙君之居, 澗泉之目,
章泉之詩, 古義是篤.
그러나 송나라 태조의 집이나, 간천(澗泉)의 외양이나, 장천(章泉)의 시에는 옛 도리의 향기가 여실히 남아있다.
睹名知訓, 我銘維服.
글을 보면 그 가르침을 알게 될 것이니, 나는 이제 이 내용을 글로 새겨 길이길이 지니고자 한다.
(解說)
띠풀은 여러 용도로 두루 쓰이며, 강직하고 소박하고 순수한 모습은 마치 군자의 성품을 방불케 한다.
옛 적에는 군주와 백성들이 소박하고 검소하여서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군주와 백성들의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아 재물욕과 사치욕에 빠져 그 순박하고 선한 본마음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욕심이 적은 것을 최고의 보물로 삼고, 숲 속의 한가로이 누워있는 못생긴 통나무를 닮아가며 소박한 모습으로 늙어가고자, 띠풀의 순박하고 강직한 덕성을 글로 새겨두고 이를 실천하고자 다짐한다.
노인은 나이 많음 그 자체로도 공경 받을 요건이 되겠지만 스스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기는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노인이 흘러가는 세월과 더불어 자기 스스로 심을 닦는 수행이 무르익어 그윽한 향기를 은은히 자아낼 때, 효사상이니 경로사상이니 따위를 부르짖지 않아도, 주위의 젊은이들은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공경하며 그들 인생의 조언자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런 면에서 띠풀과 같은 덕성을 지닌 인격체로 늙어가겠다는 다짐은 정녕 자신의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올 곧은 이들의 의연한 삶의 태도라 하겠다.
16. 범충(范冲, 범익겸)의 좌우명(座右銘)
一, 不言 朝廷利害 邊報 差除.
첫째, 나라 일의 이롭고 해로움이나, 변방의 소식이나, 사신의 임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二, 不言 州縣官員 長短得失.
둘째, 지방관원의 장단점이나 득실을 말하지 않는다.
三, 不言 衆人所作過惡.
셋째, 여러 사람이 지은 허물과 악행을 말하지 않는다.
四, 不言 仕進官職 趨時附勢.
넷째, 관직이나 벼슬살이에 나아가서 시류를 좇고 세도에 발붙이는 저급한 일 따위는 말하지 않는다.
五, 不言財利多少 厭貧求富.
다섯째, 물질적 이익의 많고 적음이나, 가난함을 싫어하고 부유함을 구하는 일은 말하지 않는다.
六, 不言 淫媒戱慢 評論女色.
여섯째, 음란하고 문란한 말이나, 희롱하거나 거만한 말이나, 여색을 평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七, 不言 求覓人物 干索酒食.
일곱째, 술 음식 사람 물건 등을 탐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又曰 :
다시 여기에 아래의 일곱 가지를 더 첨가 한다.
一, 與人附書 不可開拆沈滯.
첫째, 남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반드시 봉함을 확인하고 여러 통의 편지가 한꺼번에 겹치지 않도록 한다.
二, 與人並坐 不可窺人私書.
둘째, 여러 사람과 더불어 앉아 남의 사사로운 편지 등을 몰래 보지 않는다.
三, 凡入人家 不可看人文字.
셋째, 남의 집에 들어가서는 남의 글들을 훔쳐보지 않는다.
四, 凡借人物 不可損壞不還.
넷째, 남의 물건을 빌려서 손상을 입히거나 돌려주지 않는 일은 없도록 한다.
五, 凡喫飮食 不可揀擇去取.
다섯째, 먹고 마실 때에는 가려서 먹거나, 입맛에 따라 취하고 버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
六, 與人同處 不可自擇便利.
여섯째, 남과 한 자리에 있을 때는 자신만의 편함과 이로움을 꾀하지 않는다.
七. 見人富貴 不可歎羨詆毁.
일곱째, 남의 부귀함을 보고서 한탄하거나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凡此數事有犯之者.
足以見用意之不廣.
위의 사항들을 자주 범하는 사람은 아직 그 마음의 씀씀이가 둥글고 넓지 못하다는 증거가 된다.
於存心修身 大有所害 因書以自警.
위의 못난 행동들은 마음을 보존하고 몸을 수양하는데 크게 방해가 되므로, 이에 글로 써서 곁에 두고 스스로를 경계하고자 한다.
(解說)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위정자들의 잘못된 행동은 과감히 들추어내고 비판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형벌을 마땅히 받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은 고치지 못한 채 남의 허물만 질책하며 비판하는 것도 문제는 있다.
우선 자신의 마음을 말끔히 닦은 후 맑고 순수한 눈으로 남의 잘못을 보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편이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사람의 특정한 한때의 잘못을 그 사람의 변함없는 전체 모습인양 고착시켜 버리는 태도도 문제는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시시각각 변화해 간다. 그대로 고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특정 공간과 시간 속의 특정한 모습을 화석화시켜 이 모습을 그대로 어느 한 사람의 고정된 이미지로 영원히 낙인찍어 버린다면 이것보다 더 큰 죄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지금보다는 더 선해지고, 향상되고, 아름다워지고, 덕이 있는 존재로 변화되고 있다고 보고, 믿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인생 70세가 그렇게 오랜 세월은 아니다. 철들자 20대요, 결혼하여 정들고 아기 낳다 보면 30대요, 직장에 자리 잡고 집 장만하다 보면 40대요, 자녀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 걱정하다 보면 50대요, 직장 정년 문제와 퇴직 후의 생활 등에 고민하다 보면 60대요,
퇴직 후 제대로 되지 않는 몸과 더불어 씨름하다 보면 70대요, 자녀와 주변 사람에게 짐이 되지 않고 어떻게 죽을까 번민하다 보면 벌써 차가운 관속에 누워있다. 길어보았자 진해 벚꽃놀이 70번이면 이 세상과 하직하고 만다.
그러므로 잘 수행된 마음 하나 달랑 들고 떠나는 마지막 여행길에 가져가지도 못할 재산이니 명예니 권력이니 남의 행동에 대한 시시비비니 따위로 일부러 마지막 여행길을 무겁게 할 필요는 없다.
우선 가까운 사람들과 화해하고 모든 존재들과 화해하여 걸림 없는 마음으로 마치 잘 다린 옥양목 두루마기 곱게 차려입고 붉은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수행자의 뒷모습처럼 청정하게 살아가야 한다.
17. 한유(韓愈, 한퇴지)의 오잠(五箴)
人患不知其過, 旣知之, 不能改無勇也.
사람들이 자신의 허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허물이 무엇인지 알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이는 용기가 없는 탓이다.
余生四十有八年, 髮之短者日益白,
齒之搖者日益脫, 聰明不及於前時.
내 나이가 48세에 이르니, 벌써 머리털은 날로 허옇게 빠지기 시작하고, 이빨마저 흔들리다 빠져가고, 총명함도 전일과 같지 않다.
道德日負於初心, 其不至於君子, 而卒爲小人也昭昭矣.
도와 덕은 처음 먹었던 마음을 등져서 군자의 길과는 점점 멀어지고, 오히려 소인의 길로만 가까이 간다.
作五箴以訟其惡云.
이에 다섯 가지 잠(箴)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고자 한다.
첫째, 놀이를 경계하는 유잠(游箴)
余少之時 將求多能, 早夜以孜孜, 余今之時, 旣飽而嬉, 早夜以無爲.
나는 어릴 적에는 여러 가지 재능을 개발하고자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힘썼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태만하여 유희에만 빠져 아침저녁으로 공부하고 수행하는 일은 찾아볼 수 없다.
鳴乎余乎, 其無知乎, 君子之棄而小人之歸乎.
아! 내 어찌 바로 이것이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배를 불러들이는 일인 줄 일찍이 몰랐던가?
둘째, 말을 경계하는 언잠(言箴)
不知言之人, 烏可與言.
말하는 의도를 알지 못하면 어찌 함께 말할 수 있겠는가?
知言之人, 黙然而其意已傳.
그러나 말하는 의도만 일단 알면 사람이 말이 없어도 그 뜻을 알 수 있다.
幕中之辯, 人反以汝爲叛, 臺中之評, 人反以爲傾.
장막 속에서 나눈 논쟁을, 사람들은 도리어 너는 틀렸다고 몰아치고,
높은 누대 위에서 한 논평을 사람들은 뒤집어서 너를 위태로운 지경으로
몰아세운다.
汝不懲邪, 而呶呶以害其生邪.
이같이 쓸데없이 사사로운 말이나 핑계를 일삼다 보면 너의 생애에 큰 누가 된다.
셋째, 행동을 경계하는 행잠(行箴)
行與義乖, 言與法違.
後雖無害, 汝可以悔.
행동이 의리에서 어긋나고, 말이 법도에서 벗어나면, 비록 그 뒤에 당장 해로움이 없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 일이 반드시 생긴다.
行也無邪, 言也無頗, 死而不死.
행동에 삿됨이 없고 말에 치우침이 없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
汝悔而何, 宜悔而休.
네가 후회할 일을 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땅히 뉘우치고 고쳐야 한다.
汝惡曷瘳, 宜休而悔.
네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땅히 그치고 뉘우쳐야 한다.
汝善安在, 悔不可追.
너의 선한 행동이 확고히 자리 잡으면 후회할 일이 따라올 수가 없다.
悔不可爲, 思而斯得, 汝則弗思.
후회할 일은 미리 신중히 생각하면 알고 막을 수가 있는데 너는 다만 깊이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넷째, 좋고 싫음을 경계하는 호오잠(好惡箴)
無善而好, 不觀其道.
無悖而惡, 不詳其故.
선한 일이 아닌데도 좋아하면 그 도리를 살필 수 없고, 법도에 맞는데도 싫어하면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前之所好, 今見其尤,
從也爲比, 捨也爲讎.
전에는 좋았던 일이 이제는 허물로 보이기 시작하니 처음 따를 때는 친구
같았지만 버릴 때는 원수가 된다.
前之所惡, 今見其臧,
從也爲愧, 捨也爲狂.
전에는 싫었던 일이 이제는 좋은 것으로 보이기 시작하니, 처음 따를 때는
못마땅했지만 버릴 때는 어리석음이 된다.
維讎維比, 維狂維媿,
於身不祥, 於德不義.
원수지거나 친하게 지내거나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은,
이 모두가 내 일신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덕행에도 맞지 못하다.
不義不祥, 維惡之大幾,
如是爲而不顚沛.
옳지 못하고 못마땅한 것은 나쁜 것 가운데 으뜸이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어찌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齒之尙少, 庸有不思,
今其老矣, 不愼胡爲.
나이가 아직 젊을 때에는 어리석어 미처 생각을 못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서도 신중하지 못하면 이것이 과연 누구의 허물인가?
다섯째, 이름이 알려짐을 경계하는 잠지명잠(知名箴)
內不足者, 急於人知,
霈焉有餘, 闕聞四馳.
안으로 부족한 사람은 성급하게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나, 마치 큰비가 온 것처럼 스스로 덕행이 차서 넘치는 사람은 그 소문이 저절로 사방으로 퍼진다.
今日告汝, 知名之法,
勿病無聞, 病其嘩嘩.
오늘 그대에게 이르노니, 이름이 사방에 퍼지는 방법은, 이름이 사방에 알려지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이름이 사방에 무성히 알려짐을 병으로 삼는데 있다.
昔者子路, 惟恐有聞,
赫然千載, 德譽愈尊.
옛날에 자로는 그 이름이 퍼짐을 극히 두려워 하였지만 오히려 그의 이름은 천 년 동안 빛나며 덕망과 명예는 날로 높아만 가고 있다.
矜汝文章, 負汝言語,
乘人不能, 揜以自取.
너의 문장을 자랑하고 말솜씨에 오만하여 남이 능하지 못함을 업신여겨 덮어 눌러버리고 그 위에 자기를 내세우거나,
汝非其父, 汝非其師,
不請而敎, 誰云不欺.
남의 부모도 스승도 아니면서 청하지도 않는 오만한 충고를 일방적으로 퍼붓기를 고집한다면 어찌 사람들이 너를 참되게 바라보겠는가?
欺以買憎, 揜以媒怨,
汝曾不寤, 以及於難.
이같이 너 스스로 미움을 사고 원한을 만들면서도 일찍이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반드시 어려운 지경에 빠지고 만다.
小人在辱, 亦克知悔,
及其旣寧, 終莫能戒.
소인은 욕됨을 당하면 처음에는 뉘우칠 줄을 알지만 이윽고 곧 편안함에 이르면
나태함에 빠져 끝내 경계할 줄을 모른다.
旣出汝心, 又銘汝前,
汝如不顧, 禍亦宜然.
너의 마음에 스스로 우러난 이 모든 것을 이미 너 앞에 글로 새겨 놓았으니, 스스로 이를 돌보지 않는다면 장차 그 화가 미치는 것도 마땅하리라.
18. 진덕수(眞德秀; 眞西山)의 닥종이 이불에 새긴 저금명(楮衾銘)
楮衾銘 : 아들 지도(志道)에게 주는 글
楮君之先滕同, 厥宗麻源湛魯, 豈其分封.
닥나무는 등나무와 같은 부류의 식물로서 원래 담로산의 마(麻)라는 식물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그러므로 닥나무와 마는 근원으로 올라가면 서로 분봉할 수 없다.
粤有智者, 創之爲紙,
傳聖賢心, 衣被萬世.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 닥나무를 가지고 종이를 만들어, 그 위에 성현의 마음을 기록하여 전하니 이 식물의 은덕이 크다.
巧者述之, 製爲斯衾,
覆冒生人, 厥功亦深.
그 뒤를 이어 어떤 현인이 이 닥나무로 이불을 만들어, 산 사람을 덮어주니 또한 이 식물의 공덕이 깊다.
朔風怒號, 大雪如席,
晝且難勝, 況於永夕.
북풍이 몰아치고 큰 눈이 온 세상을 덮으면, 낮에도 견디기 어렵거늘 하물며 긴 밤이야 어찌 베와 솜 없이 지낼 수 있겠는가?
豈無纖纊, 衣以厚繪,
擁之高眠, 可當嚴凝.
두터운 천으로 옷을 만들어 얼굴 눈 까지 덮어 써야 겨우 매서운 추위를 견딜 수 있다.
井地不行, 民俗多窶,
終歲之廑, 弗給布絮.
토지의 정전제(井田制)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여 백성은 예의를 차리지 못 할 정도로 가난하여, 겨우 겨우 한 해를 넘기게 되었고 베와 솜을 얻을 수가 없어서 겨울 추위에 벌벌 떨어야 했다.
一衾萬錢, 得之曷繇.
그러던 중 다행히 닥으로 만든 이불을 얻게 되었으니 그 값어치는 만 냥에 해당되고 그 기쁨은 비할 데가 없다.
不有此君, 凍者成丘.
만약 당시 이 닥이 없었더라면 얼어 죽은 사람이 언덕을 이루었을 것이다.
我嘗評君, 蓋具四德.
나는 일찍이 닥이라는 식물을 평하여 네 가지 덕을 갖추었다고 말했다.
盎兮春溫, 皜兮雪白.
따뜻한 봄에는 무성하고,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에는 굳고 단단하며,
廉於自鬻, 樂於燠貧, 誰其似之.
스스로 자랑하기를 싫어하고, 온화하고 가난함을 즐거워하니 어느 누가 이것과 견줄 수 있겠는가?
君子之仁, 我方窮時, 惟子與處.
군자는 인(仁)하니, 내가 가난할 때 오직 그대 닥이불과 함께 거처하였거늘,
豈如弁髦, 而忍棄女.
어찌 한 번 쓰고 버리는 물건처럼 그대를 내팽개 칠 수 있겠는가.
不歃而盟 偕之終身.
피를 나누어 맹세한 적은 없지만 종신토록 함께 살고자 하노라.
且將傳之, 于萬子孫.
또한 일만 자손들에게 다음 말을 전하고자 한다.
咨爾小子, 惟素可寶.
아! 너희들은 오직 소박함을 보물로 삼아라.
敝縕是慚, 豈曰志道.
누더기와 솜을 부끄러워 한다면 어찌 너의 이름인 지도(志道)에 부합될 수 있겠는가?
奢不可縱, 欲不可窮.
사치함을 멋대로 내버려 두어서도 안되며, 욕심을 끝까지 채워서도 안된다.
去華務實, 前哲所同.
화려함을 버리고 앞서간 성현들이 함께 하시던 일을 성실히 힘쓰라.
以侈致喪, 何羨乎季, 倫之錦障.
사치하게 장례를 치르기로 마음 먹으면 석숭이 오십 리 길을 비단으로 깐 화려함도 모자랄 것이고,
以德見欽, 何陋乎溫, 公之布衾.
덕을 흠모하여 드러내는데 마음을 두면 어찌 사마온공의 베 이불이 누추하게만 보이겠는가?
忲心一開, 其流曷已.
사치한 마음이 한 번 열리면 절제하는 마음의 무너짐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
虎攫狼呑, 寔自玆始.
이로 인하여 정말 호랑이의 발밑에 깔리고, 늑대의 입 안에 들어가는 형국이 된다.
故曰; 儉者廉之本, 廉者行之先.
그러므로 검소함이야말로 청렴함의 근본이 되고, 청렴함이야말로 모든 행실의 우선처가 된다.
吁嗟汝曹, 可不勉旃.
아! 너희들은 어찌 이를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解說)
이 글은 진서산이 그의 아들 지도(志道)에게 준 경계의 말이다. '지도'라는 이름은 '뜻을 물질에 두지 말고 도(道)에 두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요즘은 자녀에게 재산과 지위를 물려주는 사람은 많지만 자녀의 평생 영혼의 양식이 되는 가치관과 심수양의 지침을 물려주는 사람은 드물다. 이런 도(道)의 전수에 바탕을 둔 부자(父子)간의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부자유친(父子有親)이다.
원래 자신의 내면이 덜 찬 사람일수록 외형의 화려한 장식으로 이를 보충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내면의 덕성이 가득 찬 사람은 아무런 외형적 꾸밈과 장식이 필요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마치 통나무 등걸처럼 소박하게 넓고 자족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살아간다.
그러므로 닥나무로 만든 이불을 덮고 살던 어려운 시절은 그것대로 족하고 아름답다. 결코 누추하거나 부끄러운 것이 없다.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마음이 차면 저절로 소박해지고 소박해지면 검소해지고 검소해지면 청렴해지고 청렴해지면 모든 행동이 제자리에 바로 선다.
진서산과 그의 아들 지도 사이의 '뜻'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관계는 다음 시를 떠올리게 한다.
부자유친(父子有親)
매미소리는 여름 낮에 좋고, 귀뚜리 소리는 가을밤에 좋아라. 붉은 연꽃과 푸른 물결은 마주보고 웃고, 아버지와 아들은 뜻이 통해 좋아라.
19. 정이(程頤, 程伊川)의 사물잠(四勿箴)
四勿箴 : 네 가지 예에 어긋나는 것을 하지 말라
顔淵問克己復禮之目,
안연이 나를 극복하여 본래의 예(醴)로 돌아간다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조목을 여쭈었더니,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공자가 이르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도 말아라'고 대답하셨다.
四字身之用也. 由乎中而應乎外, 制於外所以養其中也.
이 네 가지는 바깥 몸의 작용인데, 바깥 몸의 작용은 내부 마음의 작용으로부터 일어나는데, 오히려 이같이 밖으로부터 몸을 통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내부의 심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顔淵事斯語, 所以進於聖人.
안연이 이 말을 받들어 실행하였기 때문에 성인의 자리에 이를 수가 있었다.
後之學聖人者, 宜服膺而勿失也.
뒤에 성인을 배우는 사람들도 마땅히 이 글을 가슴에 간직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因箴以自警.
그러므로 경계하는 글을 지어 스스로를 깨우치고자 한다.
첫째, 보는 행동을 경계하는 시잠(視箴)
心兮本虛 應物無迹
操之有要 視爲之則
마음은 본래 텅 비어 있어서 사물에 응하여도 흔적이 없으나, 그것을 조절하는 요령이 있으니 바로 눈으로 보는 행위가 표준이 된다.
敝交於前 其中則遷
制之於外 以安其內
克己復禮 久而誠矣
망상에 사로잡혀 덮이고 엇갈리어 정견(正見)하지 못하면 그 내부심이 요동하여 제자리에 있지 못하게 되지만, 밖에서 보는 것을 통제하여 정성스레 정견(正見)하게 되면 그 내부심이 안정되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자리에 이를 수가 있다.
둘째, 듣는 행동을 경계하는 청잠(聽箴)
人有秉彛 本乎天性
知誘物化 遂亡其正
사람은 원래 천성에 근거한 변함없는 떳떳한 도리가 내재되어 있건만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다섯 가지 알음알이에 이끌리어 물질세계에 덮여버리고 마침내 그 바른 도리를 잃고 만다.
卓彼先覺 知止有定
閑邪存誠 非禮勿聽
그래서 성현께서 분별심을 그쳐서 안정됨을 되찾고, 삿됨을 버리고 정성됨을 보존하여, 예가 아닌 것은 듣지도 말라고 당부하셨다.
셋째, 말하기를 경계하는 언잠(言箴)
人心之動 因言以宣 發禁躁妄
사람 내부 마음의 움직임이 말의 인(因)이 되어 때로는 금지된 것을 발설하기도 한다.
內斯靜專 矧是樞機
興戎出好 吉凶榮辱
때로는 안으로 마음이 고요하고 전일(全一)하여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하여 어긋난 말이 나와 이것으로 인하여, 전쟁도 일어나고 좋아함과 미워함도 일어나고, 길흉과 영욕도 일어나기도 한다.
惟其所召 傷易則誕
헐뜯고 말이 쉽게 바뀌면 거짓되기 쉽고, 헐뜯고 번다하게 되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
傷煩則支 己肆物忤
出悖來違 非法不道
스스로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면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 화합할 수 없게 되고, 법도에 어긋나는 말을 하게 되면 돌아오는 말도 어긋나게 된다.
欽哉訓辭.
그러므로 삼가 말의 경계함을 소홀히 할 수 없다.
넷째, 행동을 경계하는 동잠(動箴)
哲人之幾 誠之於思
志士勵行 守之於爲
철인(哲人)은 심용(心用)의 기미를 알고 이를 자신의 사상(思想) 속에서 정성스럽게 지키고, 지사(志士)는 행(行)에 힘써 직접적인 실행 속에서 이를 지킨다.
順理則裕 從欲惟危 造次克念
천지의 의리대로 따르면 여유가 있고, 사사로운 인욕을 따르면 위태로워지니, 한 순간이라도 인욕을 이기고 의리를 지켜야 한다.
戰兢自持 習與性成 聖賢同歸.
삼가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스스로 지켜서 원래의 밝은 본성과 일상생활을 동시에 일치시킬 때 비로소 성현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解說)
우리들 마음의 움직임은, 눈, 귀, 입, 몸을 통해 나오고 반대로 눈, 귀 입, 몸으로 들어온 것은 또한 우리 내부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내부의 심이 바로 섬으로써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말하고 바로 행동하며, 동시에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말하고, 바로 행동함으로써, 내부의 마음을 더욱 바르고 고요하게 만들어 간다.
이를 두고 내외명철(內外明徹)이라 하고, 혹은 내외직방(內外直方)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는 경(敬)으로써 내부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써 바깥 행동을 방정하게 다듬는다.
즉 천리(天理) 즉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하늘이 부여한 성품인 명덕(明德)을 지키고 공경하는 자세로 심(心)을 바로 잡고, 옳고 마땅한 도리로써 눈, 귀, 입, 몸을 다스려 바깥 몸가짐을 절도 있고, 예의 바르게 이끌어 가는 것이다.
20. 장재(張載, 張橫渠)의 서명(西銘)
西銘 : 서쪽 창에 걸어 놓다
乾稱父, 坤稱母.
予玆藐焉, 乃混然中處.
하늘은 아버지라 하고 땅을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나는 조그만 몸으로 이 가운데 홀연히 일체가 되어 존재한다.
故天地之塞, 吾其體.
天地之帥, 吾其性.
그러므로 하늘과 땅에 가득 차 있는 형상은 나의 몸이요, 하늘과 땅을 거느리는 모든 원리는 나의 마음이다.
民吾同胞, 物吾與也.
백성과 나는 같은 배에서 태어났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한 형제이다.
大君者, 吾父母宗子.
其大臣, 宗子之家相也.
임금은 천지의 맏아들이요, 대신(大臣)은 맏아들집의 가신(家臣)이다.
尊高年, 所以長其長.
慈孤弱, 所以幼吾幼.
나이 많은 사람들을 공경하는 것은 그 어른 됨을 마땅히 어른으로 대우하는 까닭이요, 외롭고 약한 사람을 따뜻이 대하는 것은 그 딱한 것을 마땅히 딱한 것으로 대우하는 까닭이다.
聖其合德, 賢其秀者也.
성인(聖人)은 천지의 덕과 합치된 사람이고, 현인(賢人)은 사람들 가운데 그 덕이 빼어난 사람이다.
凡天下疲癃殘疾, 惸獨鰥寡,
皆吾兄弟之顚連而無告者也.
고아, 자식 없이 늙고 병든 이, 장애자, 과부, 홀아비들은 모두 내 형제로서 의지하고 하소연할 곳도 없는 외로운 사람들이다.
于時保之, 子之翼也.
樂且不憂, 純乎孝者也.
천명(天命)을 보존함은 자식으로서의 부모를 받듦이요, 천명을 즐거워하고 걱정하지 않음은 부모를 섬김이다.
違曰悖德, 害仁曰賊.
천명을 어기는 것을 패덕(悖德)이라 말하고, 인(仁)을 해치는 것을 도적이라 말한다.
濟惡者不才, 其踐形惟肖者也.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고 타고난 성품을 잘 간직하여 기르는 것이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이다.
知化, 則善述其事.
窮神, 則善繼其志.
천리의 운행 변화를 알면 부모의 사업을 잘 이어갈 수 있고, 천지의 신묘함을 알면 부모의 뜻을 잘 이어 갈 수 있다.
不愧屋漏爲無忝.
存心養性爲匪懈.
혼자 있을 때도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음이요, 천리를 보존하고 밝은 본성을 기르는 것이 나태하지 않음이다.
惡旨酒, 崇伯子之顧養.
育英才, 穎封人之錫類.
맛난 술을 싫어한 것은 우 임금의 부모 섬김이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영고숙(穎考淑)이 장공(莊公)에게 효심을 옮겨준 일과 같다.
不弛勞而底豫, 舜其功也.
無所逃而待烹, 申生其恭也.
힘들어도 묵묵히 참아 부모를 기쁘게 한 분은 순임금이며, 도망치지 않고 끓는 물 속에 삶기기를 기다린 것은 신생(申生)의 부모 공경이다.
體其受而歸全者, 參乎.
勇於從而順令者, 伯奇也.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잘 간직하여 기르다가 온전히 돌아간 분은 증삼(曾參)이고, 복종함에 용감하여 부모의 명령을 따른 분은 백기(伯奇)이다.
富貴福澤, 將以厚吾之生也.
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와 은총과 행복은 나의 삶을 두텁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 가난과 낮은 지위와 근심과 슬픔은 나의 삶을 옥처럼 갈고 닦는데 도움이 된다.
存吾順事, 沒吾寧也.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것을 잘 지키다가 죽어서는 편안히 쉰다.
(解說)
우리들은 보통 우리 몸뚱이 속에 든 생명만이 우리 것이고, 저마다의 몸뚱이마다 저마다 다른 생명체가 각각 하나씩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리의 눈에서 바라보면 몸뚱이마다 들어있는 각각의 생명은 결국은 하나의 대생명이다.
파도는 저마다 각양각색이지만 모두가 바닷물로서 하나이다. 건물 내의 전구의 모양들은 각양각색이지만 그 속으로 흐르는 전기는 하나이다.
'서명(西銘)'이라는 것은 서쪽 벽에 붙인 자신을 훈계하는 글을 말한다. 서명 속에 있는 '하늘은 아버지, 땅은 어머니,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존재들은 바로 내 몸이요 내 형제이고, 모든 원리와 법칙들은 바로 내 마음이다'는 내용은 바로 진정한 의미의 인(仁)과 자비와, 봉사와, 사랑의 터전이 된다.
21. 장재(張載, 張橫渠)의 동명(東銘)
東銘 : 동쪽 창에 걸어놓다
戱言, 出於思也.
戱動, 作於謀也.
희롱 삼아 하는 말도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런 생각이 자리 잡고 난 연후에 우러나오고, 희롱 삼아 하는 행동도 우선 자신의 마음속의 꾀함이 있고 난 연후에 드러난다.
發於聲, 見乎四肢.
謂非己心. 不明也.
欲人無己疑, 不能也.
이같이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생겨난 후에 온 몸을 통해 밖으로 드러난 것을 두고, 이것은 스스로의 마음이 아니고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라고 변명하는 것은 밝지 못함이요, 그러고도 남들이 나를 의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過言, 非心也.
過動, 非誠也.
지나치게 과장된 말은 본심(本心)이 아니요, 지나치게 과장된 행동은 성(性)에서 벗어난 짓이다.
失於聲, 繆迷其四體,
謂己當然, 自誣也.
欲他人己從, 誣人也.
잘못된 말을 내뱉어서 몸을 미혹에 빠뜨리고도 스스로 도리에 합당하다고 우겨대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행위이고, 그러고도 남들이 나를 따르기를 바라는 것은 더구나 남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或者, 謂出於心者歸咎爲己戱,
혹자는 허물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장난 탓이라고 변명대기도 하고,
失於思者自誣爲己誠, 不知戒.
허물이 스스로의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심은 옳고 성실하였다고 변명하기도 하면서,
其出汝者反歸咎.
스스로를 삼갈 줄 모르고 오히려 모든 허물을 나 아닌 다른 외부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其不出汝者長傲且遂非, 不知孰甚焉.
이들의 한동안 으스대고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불손한 태도는 가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도 남음이 있다.
(解說)
아무리 희롱삼아 내뱉는 한 마디의 말이나 장난삼아 저지르는 가벼운 행동도 알고 보면 모두가 자신의 심(心)의 자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은 내 자신도 모르게 한 말이니 행동이니 혹은 그저 별 뜻도 없이 장난삼아 한 말이니 행동이니 하면서 변명을 대고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런 행동이 드러나면 곧바로 자신의 심(心)의 본원자리로 되돌아가서, 자신의 동요된 심(心)을 철저히 성찰하여 그런 말과 행동을 일으킨 심속의 잠재된 씨앗을 제거해야 한다.
의식 속에서 인욕(人欲)을 제거하고 나아가 무의식 속의 인욕까지 철저히 제거하여 꿈속에서 마저 인욕의 싹이 트지 않을 때, 비로소 무사심(無私心), 즉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어선다. 그러므로 경(敬)의 자세는 죽어서야 그만둘 마음의 경계심이다.
22. 여대림(呂大臨, 呂與叔)의 극기명(克己銘)
克己銘 : 자신을 극복하라
凡厥有生, 均氣同體.
胡爲不仁, 我則有己.
物我旣立, 私爲町畦.
勝心橫發, 擾擾不齊.
무릇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우주의 일기(一氣)를 고르게 받아 경계가 없는 하나의 같은 큰 몸을 이루고 있건만 마치 혹처럼 별개의 것으로 분리되어, '나와 너'라는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이기심이 생겨나서 마침내 가지런하지 못하게 되어 너와 나의 차별이 생겨난다.
大人存誠, 心見帝則.
대인(大人)은 성(性)에 바탕을 두고 심안(心眼)으로 천리(天理)를 본다.
初無吝驕, 作我蟊賊.
처음부터 사욕(私慾)을 버리고 교만함이 없이, 사적(私的)인 나를 보기를 마치 벌레 보듯 하고,
志以爲帥, 氣爲卒徒.
지(志)를 장수로 삼아 기(氣)를 졸개 삼아 마음대로 부리며,
奉辭于天, 誰敢侮予.
천리(天理)를 받들고 천리에 호소하니 누가 감히 대인을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
且戰且徠, 勝私窒慾.
昔爲寇讐, 今則臣僕.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어루만지고 사사로움을 이겨 욕심을 막아서, 마침내 이기기 전에는 원수였던 것을 이제는 신하와 부하로 마음대로 부리게 된다.
方其未克, 窘吾室廬,
婦姑勃磎, 安取厥餘.
아직 완전히 이기지 못한 때에는 나의 집이 궁핍하고 좁아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다투어 여유를 얻기가 어려웠지만.
亦旣克之, 皇皇四達.
洞然八荒, 皆在我闥.
孰曰天下, 不歸吾仁.
일단 이기고 나면 사방으로 툭 트이고 온 세계가 훤해져서 모든 것이 나의 집안에 있게 되니 천하가 나의 인(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瀁痲疾痛, 擧切吾身.
一日至焉, 莫非吾事.
가렵고 고통스런 모든 병이 내 온 몸을 도려낼지라도, 단 하루라도 그러한 툭 트인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나의 바램이다.
顔何人哉, 希之則是.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는 어떤 사람인가? 그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면 그런 사람이 되리라.
(解說)
원래 우주는 한 생명의 너울거림이다. 이를 두고 우주, 태극, 일기(一氣), 일리(一理), 일심(一心), 대생(大生)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 생각의 치우침으로, 전체적인 조화의 통상(通相)에서 분열되고 괴리되어 별상(別相)으로 떨어져, 나와 너'라는 경계심(境界心)을 품고 마침내 천리(天理)를 잃고 사욕(私慾)에 물들은 좁디좁은 자기 경계에 고착된 개체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마음을 돌이켜, 하늘로부터 타고난 명덕(明德)인 본성(本性)에 바탕을 두고 사사로운 인욕(人欲)을 제거하고, 공명정대한 천리(天理)를 보존해 가면, 마침내 경계가 툭 트여 여태까지 좁은 자신의 경계 속에서 마치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다투듯 벌떼처럼 일어나던 모든 사념들이 멈추고 자신의 뜻(志)이 바로 서서 모든 감각들을 마치 장수가 졸개를 부리듯 마음대로 부릴 수가 있다.
즉 자신의 경계 속에 빠져 인욕(人欲)이 천리(天理)를 이길 때에는 모든 감각이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게 되나, 수행을 통해 자신의 좁은 경계를 벗어나와 천리(天理)를 자신의 정으로 삼게 되면 모든 것이 훤하고 툭 틔어 모든 사념이 사라지고, 번뇌심이 그쳐 여태까지 주인 노릇하던 감각과 외물들을 졸개로 굴복시켜 이들을 자기 뜻(志)대로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이를 두고 진정한 의미의 극기복례(克己復禮)라 일컫는다.
23. 장사숙(張思叔)의 좌우명(座右銘)
凡語必忠信.
무릇 말은 반드시 충성스럽고 미덥게 한다.
凡行必篤敬.
행동은 반드시 독실하고 공경스럽게 한다.
飮食必愼節.
음식은 반드시 신중하고 절도 있게 먹는다.
字畫必楷正.
글씨는 반드시 해서(楷書)로 반듯하게 쓴다.
容貌必端莊.
용모는 반드시 단정하고 정중하게 한다.
衣冠必肅整.
옷차림은 반드시 엄숙하고 가지런하게 한다.
步履必安詳.
걸음걸이는 반드시 안정되고 찬찬히 걷는다.
居處必正靜.
거처는 반드시 바르고 고요하게 한다.
作事必謀始.
일을 꾸밀 때는 반드시 처음에 계획을 철저히 한다.
出言必顧行.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실천할 수 있는지를 되돌아 본다.
常德必固持.
떳떳한 덕행은 반드시 굳게 지킨다.
然諾必重應.
승낙은 반드시 신중히 생각한 후 답한다.
見善如己出.
착한 행동을 보면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기쁘게 여긴다.
見惡如己病.
악한 행동을 보면 마치 자기의 허물인양 여긴다.
凡此十四者, 我皆未深省.
무릇 이 열 네 가지는 내가 어느 하나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다.
書此當座, 隅朝夕視爲警.
그래서 여기에 기록하여 자리의 한 쪽 모서리에 붙여두고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자 한다.
(解說)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열 네 가지 지침이다. 눈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하는 데에만 그친다면 아주 간단하고 쉬운 것들이다. 그러나 가슴 속으로 스며들어 가식 없이 자연스런 행동과 덕으로 드러나기까지는 많은 세월을 요하는 어려운 것들이다.
24. 범준(范浚, 范蘭溪)의 심잠(心箴)
心箴 : 마음을 경계하다
茫茫堪轝 俯仰無垠
人於其間 䏚然有身
넓고 넓은 천지(天地)는 우러러 보고 굽어보아도 끝 간 데 없는데, 사람은 그 가운데 조그만 몸으로 존재해 있다.
是身之微 太倉稊粃
參爲三才 曰惟心爾
이 몸의 작음은 마치 나라의 큰 창고 속 한 알의 돌피 같지만, 마음은 천지와 동참하여 천, 지, 인 삼재(三才)를 이룬다.
往古來今 孰無此心
心爲形役 乃獸乃禽
옛적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있었겠나마는, 마음이 육체의 부림을 받으면 금수에 지나지 않게 된다.
惟口耳目 手足動靜
役間抵隙 爲厥心病
눈, 귀, 입, 손, 발 등의 동정(動靜)에 틈새가 생겨서, 마음이 사욕(私欲)에 의해 침해받거나 막힘을 당하면 마침내 마음은 병들고 만다.
一心之微 衆欲功之
其與存者 嗚呼幾希
한 마음은 미약하고 뭇 욕망은 강하니 뭇 욕망이 쳐들어오면, 이 마음은 보존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君子存誠 克念克敬
天君泰然 百體從令
군자는 성(誠)을 보존하고 경(敬)을 지켜서, 천군(天君)인 마음이 흔들림이 없이 굳건하게 육체를 지배해간다.
(解說)
인간의 육체는 천지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아주 미약하고, 인간의 심(心)은 끌어 모으면 좁쌀보다도 작지만, 펼치면 온 우주를 담고도 남음이 있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연약한 갈대의 모습은 인간의 몸이지만 생각은 천지를 포괄하는 인간의 심이다.
이같이 광대하고 심묘(心妙)한 마음을 자신의 좁은 육체 안에만 끌어넣어 육체의 감각과 욕망에 의해 조종당하면 금수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심을 펼쳐 자신의 밝고 청정한 심을 온 우주에 충만 되게 하여 심으로 육체의 감각과 욕망을 다스려간다면 자신의 성(性)과 우주의 이(理)가 합쳐져서 공자의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즉,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서 어긋남이 없다'는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
25. 주희(朱熹)의 구방심재명(求放心齋銘)
天地變化, 其心孔仁.
천지간(天地間)의 변화하는 마음을 일러 공자는 인(仁)이라 하였다.
成之在我, 則主于身.
이 인(仁)을 내 몸 위에서 이루면 내가 내 몸의 주인이 되는데 그 주인은 어떤 모습일까?
其主伊何, 神明不測.
그 모습은 신명(神明)도 가히 알지 못한다.
發揮萬變, 立此人極.
그러나 드러내면 만 가지 묘용(妙用)을 펼치므로 인간은 이를 최고의 표준으로 삼기도 한다.
晷刻放之, 千里其奔.
非誠曷有, 非敬曷存.
잠시라도 그것을 놓아버리면 천리로 달아나 버리니, 성(誠)과 경(敬)을 다하지 않고 어찌 이를 보존할 수 있겠는가?
孰放孰求, 孰亡孰有.
혹자는 놓아버리고, 혹자는 거두어 들이며, 혹자는 놓쳐버리고, 혹자는 보존한다.
屈伸在臂, 反覆惟手.
때로는 이것은 팔처럼 접혔다 펴졌다 하고, 때로는 손바닥처럼 엎어졌다 젖혀졌다 하니,
防微謹獨, 玆守之常.
그 미묘한 틈을 방비하고, 홀로 있을 때 삼가지 않으면서 어찌 이것을 지키는 떳떳함을 누릴 수 있겠는가?
功問近思, 曰惟以相.
이같이 간절히 묻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생각해가는 것을 일러 오로지 힘씀이라 한다.
(解說)
구방심재명(求放心齋銘)이란 놓쳐버린 마음을 다시 되찾는 재에 새겨놓은 명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재라는 것은 공부하는 집 또는 방을 뜻한다.
천지간의 변화하는 원리가 곧 심이고 만물을 낳고 낳아 생장시키는 천지심이 곧 인(仁)이다. 이 천지간에 가득 찬 심의 본성을 내 몸 위에서 구현하고 나면 내 자그만 몸뚱이뿐만 아니라 천지지간(天地之間)의 모든 만물을 내 손아귀 안에 쥐게 되는 대자유인이 된다.
그럼 이 마음의 본체는 어떻게 생겼을까? 이 심의 본체는 오감(五感)을 떠나 있으므로 귀신도 볼 수 없다. 그러나 펼치면 만 가지 묘용을 드러내는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런 신묘한 심도 놓아버리면 아무런 힘이 없게 된다.
이 심을 성(誠)과 경(敬)으로 보존하고 지켜나갈 때 비로소 그 영묘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심은 사물에 의해 막히고 분별심에 의해 시들며 천리의 자양분에 의해 성장하고 공명정대한 인(仁)에 의해 펼쳐진다.
26. 주희(朱熹)의 존덕성재명(尊德性齋銘)
尊德性齋銘 : 덕성(德性)을 높인다
維皇上帝, 降此下民,
何以予之. 曰義與仁.
하늘의 천제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의(義)와 인(仁)이다.
維義與仁, 維帝之則.
欽斯承斯, 猶懼不克.
이 의(義)와 인(仁)이야말로 천제의 법도이니, 이를 우러러 받아서 혹시 이루지 못할까 삼가고 두려워해야 한다.
孰昏且狂, 苟賤汙卑.
淫視傾聽, 惰其四肢.
褺天之明, 慢人之紀.
혹자는 마음이 밝지 못하여 상도(常道)에서 벗어나 구차하고 더럽고 추악한 데 빠져 음란한 눈길과 귀로 주위를 보고 들으며 방탕하게 행동하여 천리(天理)의 밝음을 더럽히고 인간의 바른 도리를 업신여긴다.
甘此下流, 衆惡之委.
이리하여 심(心)이 점차 아래로 오염되어 가는 것을 오히려 좋아하고 수많은 악행을 자행한다.
我其監此, 祗栗厥心.
나는 이러한 일을 두려워하여 항상 마음으로 경계한다.
有幽其室, 有赫其臨.
執玉奉盈, 須臾顛沛.
혼자 있는 어두운 방에서도 나를 감시하는 밝은 눈은 빛나고 있으므로 나는 스스로를 경계하여 마치 소중한 옥(玉)을 잡은 듯, 가득 찬 물 잔을 받들 듯 행동거지를 조심조심 삼간다.
任重道悠, 其敢或怠.
눈 깜짝할 사이에도 천리(天理)를 보존할 책무는 무겁고, 수행해 가야 할 길은 멀기에 감히 한 순간이라도 가볍게 행동하지 못한다.
(解說)
존덕성재명(尊德性齋銘)이란 '덕성을 높이 받드는 재에 새긴 명'을 말한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밝은 덕, 즉 명덕(明德)을 밝히는 일이다. 그래서 대학(大學) 경문 첫머리에 '대학지도 재명명덕(大學之道 在明明德)'이라고 내세운다.
인간은 타고난 순수한 정신의 결정체인 본연지성(本然之性)과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육체에서 우러나오는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그러나 순수한 정신에서 말하는 본연지성 즉 천리(天理)는 미세한 반면에, 우리의 행위, 즉 육체에서 말하는 사욕인 기질지성은 거칠고 강하다. 그러므로 자칫하면 천리의 밝은 덕이 거친 사리사욕의 구름떼에 가려지고 조종당한다.
이런 연유로 수행자는 항상 이를 경계하고 경계하여 천리를 보존하고 길러서 이 천리가 인욕을 지배하도록 이끌어 가야 한다. 바로 이것이 수행자의 무거운 책무이자 끝없이 가야할 머나먼 인생의 여정이다.
27. 주희(朱熹)의 지도재명(志道齋銘)
志道齋銘 : 도에 뜻을 두다
曰趨而挹者, 孰履而持.
맨 발로 달려가 맨 손으로 물을 마시는 사람에게 신과 그릇을 주는 이는 누구인가?
曰飢而寒者, 孰食而衣.
배고프고 춥다는 사람에게 밥과 옷을 주는 이는 누구인가?
故道也, 者不可須臾離.
도(道)라는 것은 이같이 일상생활에서 한 순간이라도 떠날 수 없다.
子不志於道獨罔罔其何之.
그러므로 뜻을 다만 도(道)에 두지 어디에 두란 말인가?
(解說)
'지도재명(志道齋銘)'이란 '뜻을 道에 둔다'는 재(齋)에 새겨놓은 명(銘)이다. 道는 마치 공기와 같고 옷과 같다.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함께 병행해야 할 마땅한 길이요, 도리이다.
마치 맨 발에 신이 필요하듯 물을 넣을 때 컵이 필요하듯 필요한 존재이며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요, 추울 때 입는 옷과 같이 삶의 요소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도를 떠나면 한 순간이라도 살아갈 수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떠나 먼 히말라야 산맥에서나, 혹은 고원한 철학서적 속에서 도를 찾으려는 헛된 망상에 젖어 있다.
그 마음만 열면 바로 '지금 여기(now and here)'가 히말라야 산맥이요, 철학 서적이며, 도의 상주처(常住處)이다. 선문(禪門)에서는 이를 두고 '너의 발아래를 주시하라(照脚下)'고 한다.
28. 주희(朱熹)의 거덕재명(據德齋銘)
據德齋銘 : 덕에 근거하다
語道術則無往而不通.
談性命則疑獨而難窮.
도덕과 학술에 관해서라면 보지 않고도 훤히 통달하지 않음이 없으나, 성명(性命)에 관해서는 혼자 의아해하고 깊은 뜻을 캐어내지 못한다.
惟其厚於外而薄於內,
故無地以崇之.
이는 바깥으로는 두터우나 안으로 얇기 때문이고, 내부의 기반 없이 그저 밖으로만 쌓아올린 탓이다.
(解說)
거덕재명(據德齋銘)이란 '덕을 굳게 지키는 재에 새긴 명'을 뜻한다.
객관적인 지식과 논리의 축적인 학문에는 훤히 달통해 있지만 정작 자신의 생명의 파장 그 자체인 자신의 본성과 천명(天命)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이 많다.
학문과 인격을 이원적으로 바라보는 서양에서는 체계적인 지식을 논리에 따라 잘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학설을 이끌어 가는 사람을 대체로 학자라 칭해준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식의 체계와 인격은 별개이다. 그러므로 인격적으로 비루하지만 학문적으로는 '대학자'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일원론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동양에서는 객관적인 학문의 체계와 학자의 인격을 하나의 심(心)의 수렴과 확장 과정으로 간주하므로 인격은 비루하지만 학문적으로는 대학자라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즉, 존양성찰로 자신 내부의 덕을 두텁게 하고 격물치지로 외부의 지식을 쌓아가서 이 둘이 경(敬)에 의해 하나로 관통될 때 비로소 학자다운 학자로 칭해진다.
29. 주희(朱熹)의 의인재명(依仁齋銘)
依仁齋銘 : 인에 의지하다
擧之莫能勝, 行之莫能至.
雖欲依之, 安得而依之.
기대어도 기댈 수 없고 다가가도 도달할 수 없다면, 비록 그것에 의지하고 싶어도 어찌 의지할 수 있겠는가?
爲仁由己, 而由人乎.
哉雖欲違之, 安得而違之.
그러나 인(仁)은 스스로 마음의 어짊에서 우러 나오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다가오는 것이 아니므로 항상 의지(依支)할 만한 것이며 어기고자 하나 어길 수 없는 마음의 본연이다.
(解說)
의인재명(依仁齋銘)이란 '인(仁)에 의지하는 재에 새긴 명'을 말한다.
인(仁)을 나와 떨어진 별개의 객체로 보아 이에 도달하기 위해 억지로 인위적인 노력을 해간다면 이는 도저히 도달 불가능한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인(仁)을 하늘에서 부여받은 나의 본연지성으로 간주하면 바로 내가 인(仁)에 의해 숨쉬고 인(仁)에 의해 생각하고 인(仁)에 의해 행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인(仁)의 출발점은 너와 나를 하나의 생명의 너울거림으로 바라보는데 있다. 인간 생명의 본질은 구획된 것이 아니고 전체로서의 '하나'에 있다. 전체 하나로서의 넘실거림, 무궁한 상생(相生)의 원리, 바로 이것이 곧 인(仁)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인(仁)에 뿌리를 내리고 인(仁)의 영양분을 흡수해야만 비로소 생명의 꽃과 향기를 피울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인(仁)은 의지할 만하고, 어기고자 해도 어길 수 없고, 버리고자 해도 버릴 수 없는 내 생명의 호흡 그자체이다.
30. 주희(朱熹)의 유예재명(游藝齋銘)
游藝齋銘 : 예술에 노닐다
藝云樂云, 御射數書.
俯仰自得, 心安體舒.
是之謂游, 以游以居.
예(藝),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즉 예절, 음악, 활쏘기, 말타기, 글씨, 셈하기의 여섯 가지 기예를 스스로 터득하여 마침내 마음이 안정되고 몸이 편안해지는 상태에 이를 때, 이를 일러 예에 노닐음이라 한다.
嗚呼游乎, 非有得於內,
孰能如此, 其從容而有餘乎.
이같이 집에 머물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간에 안으로 얻음이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노닐음이라 칭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의 심은 정녕 고요하고 여유롭다.
(해설)
유예재명(游藝齋銘)이란 '기예 즉 예술 등에 몸담아 여유롭게 노니는 재에 새긴 명'을 뜻한다.
위 글은 동양의 군자가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 기예(技藝)를 논한 글이다. 이를 요즘 현대인이 갖추어야 할 기예와 연결해 보면, 예절은 오늘날의 에티켓 즉 의례 절차 등을 말하고, 음악은 오늘날의 노래솜씨 및 음악적 소양을 말하고, 활쏘기는 오늘날의 호신을 위한 태권도를 말하고, 말타기는 오늘날의 자가용운전을 말하고, 글쓰기는 오늘날의 워드 프로세서와 연결되고, 셈은 오늘날의 수치 해석 및 천문학과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기예는 손길에서 만드는 한낱 기술로 끝나서는 안 되고 이를 바탕으로 내심의 인격인 덕과 연결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참다운 기예가 될 수 있다. 즉 기예가 삶과 앎과 일체가 되어 덕성으로 무르익을 때 비로소 진정한 예술혼으로 피어날 수 있다.
31. 주희(朱熹)의 숭덕재명(崇德齋銘)
崇德齋銘 : 덕성을 숭상하다
尊我德性, 希聖學兮.
玩心神明, 脫汙濁兮.
나의 덕을 지키고 길러서 성인의 학문에 이르기를 바라고, 마음의 신명(神明)을 보존하고 드러내어 더러움과 탁함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해설)
숭덕재명(崇德齋銘)이란 '덕을 숭배하는 재에 새긴 명'을 말한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바른 길인지 혼란스런 세상에 덩달아 중심도 없이 갈팡질팡 살아갈 것이 아니라, 각종 외물에 이끌리어 가는 감각을 잘 다스려 안으로 수렴하여 내속에 있는 밝은 덕을 숭배하고, 이를 밝혀가는 것을 삶의 여정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삶이야말로 덕성을 두텁게 하고 인(仁)의 범위를 넓혀가는 풍성한 삶이다. 자연의 흐름과 더불어 육체가 노쇠해지는 것도 한스러운 일인데, 언제나 그 자리에서 밝은 빛을 발하고 있는 마음마저 노쇠하게 만들어 버린다면 이 얼마나 개탄스런 일인가?
비록 세월과 더불어 육체의 빛과 미는 잃어 갈지라도 절제되고 수행된 심(心)의 빛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순수를 더하고 성스러운 느낌마저 자아낸다.
어찌 심의 본자리에 늙고 병듦이 있고 삶과 죽음이 있고 성스럽고 더러움이 있으며 너와 나의 구별이 있겠는가? 이 자리가 곧 지선(至善)의 자리이다.
32. 주희(朱熹)의 광업재명(廣業齋銘)
廣業齋銘 : 사업을 넓히다
樂節禮樂道中庸兮.
克勤小物奉膚公兮.
예절과 음악을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중용(中庸)의 덕을 기르고 조그만 일에도 정성과 근면을 다함으로써 장차 큰일을 도모한다.
(解說)
광업재명(廣業齋銘)이란 '업을 확충하여 널리 펴는 재에 새긴 명'을 말한다.
예절의 형식을 너무 지나치게 숭상하면 실속이 없는 딱딱한 겉치레의 허위로 흐르기 쉽고, 예절의 형식을 너무 소홀히 하면 방탕한 행동으로 흐르기 쉽다.
음악도 너무 지나치면 이성과 논리가 결여된 감정적인 행동으로 흐르기 쉽고, 너무 소홀히 하면 따스한 인간성이 결여된 지나친 이성으로만 무장된 차가운 인간으로 전락되기 쉽다. 그러므로 음악과 예절은 그 중용의 묘가 무엇보다 우선 된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일상생활의 자그만 일에도 정성과 최선을 다 하는 습관을 길러줌으로써 이를 확충하여 보다 큰 공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이같이 중용과 매사에 정성과 최선을 다 하는 태도는 어릴 적부터 길러주어 마치 사업을 확장해가듯이 이를 연령과 더불어 마땅히 넓혀가도록 해야 한다.
33. 주희(朱熹)의 거인재명(居仁齋銘)
居仁齋銘 : 인에 머물다
勝己之私, 复天理兮.
宅此廣居, 純不己兮.
자신의 사사로운 인욕(人欲)을 이겨서 천리(天理)를 되찾고, 이 되찾은 천리의 넓은 품안에서 편안히 안거(安居)하여, 자신의 오염되고 잘못된 점을 스스로 깨끗이 하고, 바르게 고쳐간다.
(解說)
거인재명(居仁齋銘)이란 '항상 인(仁)의 자리에 머물 것을 강조하는 재에 새겨놓은 명'을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몸이 있기 때문에 사사로운 욕심에 이끌리기 쉬운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인욕은 강하고 도심(道心)은 미세하다고 일컫는다.
그러나 일단 인욕의 감옥을 부수고 나와 무한히 펼쳐져 있는 천리의 자리에 서면 모든 것이 하나의 광명천지로 전개된다.
사사로운 인욕의 좁은 흙탕물 속에서 아무리 몸을 씻고 씻어도 더러움을 없앨 수 없지만 광활한 천리(天理)의 호수 속으로 나오고 나면 단 한 번의 목욕으로도 해묵은 더러움을 없앨 수 있다.
바로 이 호수가 인(仁)의 자리이다. 이 인(仁)의 자리는 너와 나를 경계 짓는 분별심과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들어설 수 없는 자리이다.
군자는 항상 천하의 넓고 넓은 자리에 거하여야 한다는 말 속의 이 자리는 물리적, 공간적 자리가 아니고 심의 활동무대이며 동시에 심 그 자체의 용량인 인(仁)의 자리를 말한다.
34. 주희(朱熹)의 유의재명(由義齋銘)
由義齋銘 : 의를 따르다
羞惡爾汝 勉擴充兮.
遵彼大路 行無窮兮.
너와 나를 구별하여 친소(親疎)에 빠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오로지 내 마음 속의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넓혀가는 데 전념한다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解說)
유의재명(由義齋銘)이란 '모든 일을 의로움(義)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재에 새긴 명'을 말한다.
의(義)란 삿된 생각을 벗어나 공명정대한 천리(天理)의 자리에 우뚝 서서 티끌 만큼의 마음의 흐림이 없이 생활해 가는 것을 말한다.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즉 '경(敬)으로서 내면을 가지런히 하고, 의(義)로써 외면행위를 바르게 한다'는 말처럼 의(義)란 밖으로 드러나는 일상생활의 행위 면에 초점을 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우주의 마땅한 도리인 이(理)가 인간의 심에 품부된 것을 성(性)이라 한다. 이 성(性)의 내면적 방향, 즉 성(性)이 내면적으로 인욕에 물들지 않은 채 원래의 순수한 빛을 그대로 유지토록 하는 자세를 경(敬)이라 하고, 심속의 성(性)이 바깥으로 드러나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행위의 법도와 합치되도록 신중히 살피는 자세를 의(義)라고 한다.
결국 경(敬)과 의(義)는 성(性)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동일하지만, 그 성(性)을 추구하는 방향 면에서 경(敬)은 천리와 인욕을 구분하고 천리를 따르려는 내면성찰에 중점을 둔 반면에, 의(義)는 일상생활의 드러나는 행위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서로 구분된다.
35. 주희(朱熹)의 학고재명(學古齋銘)
學古齋銘 : 옛것을 배우다
相古先民 學以爲己
今也不然 爲人而已
옛 선인들은 스스로의 타고난 명덕(明德)을 밝히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했는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을 한다.
爲己之學 先誠其身
君臣之義 父子之仁
聚辨居行 無怠無忽
至足之餘 澤及萬物.
스스로를 위하는 '위기지학'은 먼저 그 몸을 정성되게 하여, 군신(君臣)간의 의리와 부자(父子)간의 인(仁)을 소홀히 하지 않고 부지런히 밝혀 그 혜택이 두루 넘쳐 만물에까지 이르게 한다.
爲人之學 燁然春華
誦數是力 纂組是誇
結駟懷金 煌煌煒煒
반면에 '위인지학'은 겉으로 보기에 봄꽃처럼 화려하여, 암송하는 수려한 문장과 능숙한 수(數)는 힘이 되고, 편찬한 여러 권의 책은 자랑거리가 되고,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와 황금빛 옷 등은 세인의 눈을 부시게 하는 충분한 광영이 된다.
世俗之榮 君子之鄙.
그러나 이것은 세속인의 눈에는 부귀영화이지만, 진정한 군자의 눈에는 부끄러움이 된다.
維是二者 其端則微
眇綿不察 胡越其歸
그런데 자신을 위한 '위기지학'과 남에게 돋보이기 위한 ‘위인지학’은 그 첫 단서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결국에는 북쪽의 호나라와 남쪽의 월나라처럼 그 간격이 천양지차로 벌어지고 만다.
卓哉周侯 克承先志
日新此齋 以迪來裔
훌륭하도다. 주씨 가문이여! 선인(先人)의 뜻을 지극히 받들어 이 학고재 재실을 지어 날로 새롭게 하여 후손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구나.
此齋何有 有圖有書
厥裔伊何 衣冠進趨
이 재실에는 문장도 있고 도(道)도 있으니 여기에 따라 그 후손들이 일상생활에서 예의범절을 다 하고,
夜思晝行 咨詢謀度
絶今不爲 惟古是學
밤에는 존양성찰하고, 낮에는 돈독히 실행하니, 어찌 의논하고 헤아림에 어려움이 있겠는가?
先難後獲 匪亟匪徐
我則銘之 以警厥初
이같이 성인의 학문은 처음에는 어려우나, 뒤에는 몸에 젖어 흡족한 상태가 되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유유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解說)
학고재명(學古齋銘)이란 '옛것을 배우고 익히는 재에 새긴 명'을 말한다.
진정한 학문은 자신의 타고난 명덕(明德)을 밝혀 이를 토대로 자신의 생활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 주위 사람들의 생활도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데 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학문을 부귀영화와 출세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학문과 자신이 괴리되고 앎과 행이 괴리되고 앎과 삶마저도 괴리되고 만다. 그 결과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오히려 이기적이고, 고단수의 불법을 교묘하게 저지른다.
참된 학문은 곧 닦음을 말하는 것으로 학문과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하나가 된다. 그래서 앎과 행이 일치되고 앎과 삶이 조화된다. 즉 학문의 길이 곧 행의 길이고 삶의 길이 되어 일체가 일원론적인 측면에서 두루 다 원용된다.
(繼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