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룡(李相龍, 1858. 11. 24(음)~1932. 5. 12)선생은 1858년 경북 안동에서 이승목(李承穆)과 부인 권씨 사이의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영남학계의 거유인 서산 김흥락(金興洛)에게 사사하며 명가의 후예이자 정통 유학자로서 손색없는 학문적 수업을 닦았다.
선생이 이렇듯 혁신된 유림의 행보를 걷게 됨에 따라, 그리고 안동지방 특유의 친족적 연대감으로 인해 선생은 이 지역 집단개화의 선두에 자리잡게 된다. 1908년경에는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애국강연, 회보발간 등을 통한 자강운동에 뛰어들었다. 또한 대한협회 중앙본부가 점차 친일적 성향으로 기울자 본부에 통렬한 비판을 가해 구국계몽운동이 갖는 본래적 모습을 지키고자 했다. 계몽운동은 어디까지나 구국의 방편으로 활용될 때 그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한편 당시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 신민회에서는 조국의 망국사태를 맞아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모색을 위해 해외에 독립군 기지개척을 추진하고 있었다.
주진수와 황만영을 통해 이 계획을 전해들은 선생은 이에 찬동, 1911년 1월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고 일가를 거느린 채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을 결행하였다. 이미 50이 넘은 고령에 자신의 삶이 어우러진 고향, 안동을 떠나 새로운 생활을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선생의 결단은 결코 범용한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가도가도 드넓은 벌판만이 이어지는 땅, 바람 찬 간도 땅에 이주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처음 정착한 곳은 유하현 삼원보(柳河縣 三源堡)였다. 선생은 이회영, 이시영 등과 더불어 그곳에 새로운 생활의 터전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는 독립군 기지개척을 시작하였다. 우선 동지들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사장을 맡아 벼농사를 보급하는 등 이주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활동에서 무엇보다도 뜻있고 그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끊임없이 독립운동단체의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한 점이다.
한편 상해의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로 분립된 이후 자체정비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결국 임시의정원은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임시대통령에 박은식을 선임하였다. 박은식 선생은 임시정부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에서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로 바꾸었으며 임시의정원에서는 당시 만주지역 독립운동세력의 중추였던 선생을 초대 국무령에 선출하였다. 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임시정부를 다시금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곧추세우고 분열된 독립운동계에 활력과 연대감을 불어넣으려는 생각으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선생은 임정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간도로 돌아와 1928년 5월부터 전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해 만주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 조직인 삼부 통합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생은 국민부로의 부분적인 통합을 이룬 채 1932년 5월 12일 중국 서란소성자에서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거하였다. 50여년에 걸친 선생의 일관된 구국노력은 의병, 계몽운동, 독립군 등 당시 가능한 모든 독립운동 방안을 섭렵한 것이었고 이는 선생의 폭넓은 인품을 반영한 것이었다.
안동에서 먼 길을 찾아간 아우 상동이 “형님, 이제 그만 고국으로 돌아갑시다”라고 하자, 이상룡은 “인생은 다할 때가 있거늘 무슨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만주 땅에다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나만 돌아갈 수 없다. 장부가 나라를 찾겠다고 출가해서 피맺힌 한을 풀지 못하였으니 장차 어떻게 선조의 혼령에 사죄하겠느냐? 나는 만주 땅에 씨나 떨어뜨리고 갈 테니, 나 죽고 나거든 남은 가족들이나 돌아가게 하겠다”라고 말씀하면서 형제간 이승에서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가 임종할 때 임시정부 국민대표 이진산이 “선생님, 광복사업은 누구에게 맡기시고 가십니까? 통화현, 환인현, 영길현 높은 재를 넘으실 때, 기력이 강건하셔서 독립사업 성공하는 걸 보실 줄 믿었습니다. 나라 일이 암담하니 한 말씀 주십시오”하자, 이상룡은 한 말씀 남겼다.
"변변치 못한 사람이 외람 되게 여러 동지들의 추천으로 중책을 맡아 조그마한 공로도 없이 죽을병에 이르렀으니, 마침내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 것 같아서 참으로 마음이 아프네.
원컨대 여러 동지들은 외세 때문에 스스로 기운을 잃지 말고 더욱 힘써서 이 늙은이의 소망을 져버리지 말게나. 우리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성실뿐이네. 진실로 참다운 성실이 있으면 어떤 목적이라도 달성하지 못함을 근심하겠는가?”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 죽어도 너무 슬퍼하지 말라. 효도로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내가 평시에 중국 복장을 한 것은 중국에 동정을 얻기 위해 입은 것이지 좋아서 입은 것은 아니었다.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돌아가서는 안 되니, 우선 이곳에 묻어 두고서 때를 기다리도록 하라. 조국이 광복되거든 내 유해를 유지에나마 싸서 선산발치에 묻어라.”
이시영,이회영 일가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석주 이상룡 선생.
그 역시 99칸의 가택인 임청각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으로 자랐지만 그의 나이 50에 가산을 털고 일가 수십명을 이끌어
독립운동을 위해 간도로 떠나게 됩니다. 1911년 자신의 집에 있던 노비문서를 다 불태우고 노비들을 해방시켰으며
간도에서 경학사, 신흥학교, 군정부등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김구, 김원봉으로 대표되는 좌우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때 선생은 끊임없이 통합을 부르짖었죠.
많은 이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