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
난 이제 곧 수능 봐야하는 고3인데, 학교 안가고 왜 하얀 침대에 누워있는 거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한 달 정도 걸린 거 같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란 걸 깨닫기까지. 그리고 내 상황을 들었다. 난 고3이 아니라 숙명여대 2학년이었고, 지금은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고, 여긴 내방이 아니라 서울대병원이라는 걸….
이게 1997년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믿기 힘들었지만, 이건 꿈이 아니라 진짜였다. 드라마에서나 일어날법한 일이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일어났다. 그 후 서서히 기억이 돌아왔고, 나의 마지막 기억으로 남은 것은 대학 2학년 때 농촌봉사활동이었다.
가족들은 추석 때 나의 마지막 모습을 봤다고 하는데 그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그해 추석을 보내고 중간고사를 치르면서 갑자기 많이 아팠다고 한다. 하숙을 하던 나는 인근병원에서 서울대병원으로 급하게 옮겨졌고, 응급실에서 숨이 끊어져서 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로 옮겨져서 뇌사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만약 깨어난다고 하더라고 분명 장애가 올 거라고, 어쩌면 바보가 될지도, 귀가 안 들릴지도 모른다고 의사들은 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가족은 살려만 달라고 했단다.
40일 후 난 깨어났다. 기적인지, 난 모든 게 정상으로 깨어났다.
보이고 들리고, 신경이 서서히 내려와서 첨엔 손가락이 손목이. 팔이. 그렇게 깨어났다.
그런데, 허리에서 신경이 더디 오더니, 그때부터 별 진전이 없다.
이렇게 나의 휠체어 생활이 시작됐다. 더 이상 나아지는 게 안보이자 병원에선 퇴원하라고 했다. 낙천적이었던 내 성격 탓인지 비록 휠체어를 타고 있었지만 이것에 절망하기보단 집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고향인 광주에 와서 2년 동안 몸조리를 했다. 평소에 건강했던 나는 컨디션이 안 좋은 날 기절할 정도로 몸이 약해져 있었다. 나의 장래를 놓고 가족들은 고민했고 우선 장애인 운전면허를 따기로 했다. 팔만 사용해 운전하는 차가 있다고 했다.
필기를 준비하느라 진짜 몇 년 만에 연필을 잡았는데 재밌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어서였는지, 머리는 온전히 깨었었나보다. 그렇게 한 번에 면허를 따니까, 나도 이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단 자신감이 들었고, 그때 주위에서 공무원시험을 한번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일단 광주에서 제일 알려진 고시학원을 알아봤고, 그 중 유일하게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무등고시학원’을 찾았다. 상담을 받는 중 공무원시험에서 장애인을 따로 선발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또 수학을 전공했으니 세무직이 나에게 맞을 것 같다고 판단해, 일단 세무직 종합반을 듣기로 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일단 한번 도전해 보는 마음으로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2000년 9월의 일이다. 공무원시험은 다음해 5월이었다. 국어·국사·영어는 봤던 것들이니까 처음 접근하기가 쉬웠다. 그런데 부기랑 세법은 너무 생소했다. 하지만 왠지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종합반의 수업은 나의 체력으로는 무리였다. 결석도 잦았고 기초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진도를 따라가려고 하니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4개월간 적응기간을 보내고 2001년이 되자 5월에 있을 시험 때까지 한번 해보기로 했다. 본래 혼자서 공부하고 정리하는 걸 좋아했는데, 몸이 안 따라주니깐 혼자서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장시간 휠체어에 앉는 게 너무 힘들어 한 시간 공부하고 침대에서 두 시간 자버리기도 일쑤였다.
학원에서 집에 돌아와 복습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집에 도착하면 밥도 거의 못 먹고 침대에 기절하듯이 쓰러졌으니까. 그래서 학원에서 모든 수업을 듣기로 했다. 수험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하는 것이었다. 하루에도 학원까지 갈 때와 올 때 그리고 점심시간에 최소 3번 왕복하느라 엄마랑 언니는 아무 것도 못했다.
한번만 도전하고 만약 안 되면 거기서 그만두겠다는 마음으로 했다. 그런데도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학원에 갔다가 그냥 집에 와야 하는 날도 많았다. 부기도 수업시간엔 분명 다 이해했는데, 집에선 거의 복습을 못하니까 다음날 새로운 수업이 잘 이해가 안 되고 그게 쌓여가니까 나중엔 앞부분만 이해한 채로, 거기서 제자리였다. 몸이 힘든 것뿐만이 아니라 복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
그렇게 2001년 5월 시험을 봤다. 가족 모두에게 너무 힘든 수험 생활이었기 때문에 이번에 안 되면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보려 마음먹었다. 지루한 기다림이 지나고 결과가 나왔는데, 내 이름은 합격자 명단에 없었다.
완전히 마음을 비우고 책상부터 정리했다. 장애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제한되는 게 너무 많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점수가 발표되자 점수를 확인해보니 다 커트라인을 넘었는데, 그놈의 부기가 과락이었다. 부기에서 한 문제만 더 맞았더라면 합격이었는데 막상 점수를 확인하니, 정말 다시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기도 생기고, 그런데 나보다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어떻게 그걸 또 하나….
나는 재도전할 자신감도 안 생기고 두렵기까지 했는데, 다시 할 수 있겠냐고 엄마가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다시 학원에 등록하고 이제 나를 도와줄 아주머니를 구하느라 돈은 두 배로 들었다.
부기를 혼자서 해 보려고도 했지만, 일단 문제를 많이 풀어 봐야하는데, 문제도 부족했고, 혼자서는 기본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원에서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때만큼 내 자신에게 실망하고, 돈만 쓰는 내 자신이 싫었던 적은 없었다. 2001년은 부기랑 세법수업만 들었다. 나머지 시간은 자습실에서 부기랑 세법만 복습했다.
난 하반신 마비이기 때문에 한 자세로 있는 게 몸에 가장 안 좋다. 그리고 한 자세로 계속 휠체어에 앉아 있으면 온 몸이 저려서 더 피곤하기도 하다. 일 년을 다시 하면서 등에 파스를 늘 붙이고 다녔다. 학원 이사장님의 배려로 너무 피곤할 땐 5층 안집에서 중간 중간 쉬었다가 했다.
남들은 부기가 젤 쉽다고 하던데 나는 그 과목이 가장 힘들었다. 수학이랑 부기랑은 너무 달랐다. 한편 모의고사를 풀어보니 공부를 중단했던 다른 과목, 특히 암기과목에서 벌써 헤매고 있었다. 그래서 2002년 1월부터 다시 모든 과목 수업을 듣기로 했다.
능률이 오르지 않아 집에선 공부하지 않기로 하고 나머지 과목은 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복습하기로 했다. 수업 끝나고는 자습실에서 오후 6시까진 의무적으로 있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이 없어져서 나도 거의 포기직전이었다. 마음을 편히 가지고 공부할 수 있도록 엄마는 장애인이 되어서 할 수 있는 게 제한은 되지만, 분명 다른 길이 있을 거라고 말씀해주셨다.
이번에 다시 시험보기로 하면서 7급도 같이 준비했었다. 9급이 안되면 7급은 어림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시험만 치고는 이제 다른 길을 알아보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험을 쳤다. 시험을 치르고 당분간 학원도 가지 않고 월드컵 응원만 했다. 그러던 중 발표일이 다가왔다. 합격이었다.
공부하는 내내 내가 하나님께 감사 드렸던 것은 팔이 아닌 다리에 장애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만약 걸을 수 있는데 쓸 수 없었다면 계산할 게 많은 세무직 시험을 시작조차 못했을 테니까.
올해로 6년차 세무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조사관님! 장애를 극복하고 세무공무원이 되셨으니 정말 대단해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그건 잘못된 말이다. 장애를 극복하고 공무원이 된 게 아니라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그것도 일급중증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공무원에 도전했다. 내가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렇게 높은 경쟁률을 뚫을 수 있었을까?
마음속에선 아직도 ‘내가 안 아팠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하기도 한다. 누군가처럼 장애가 행운이라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세무공무원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수학과 여대생이, 40일간의 뇌사상태에서 깨어나서 일급장애인이 됐다.
하지만 세무공무원이 되고 나서 ‘일급장애인 김영하’가 아닌 ‘일급장애인 국세공무원 김영하’라고 멋지게 소개할 수 있다. 소속감을 더해주는 2만 여명의 든든한 동료들도 생겼다. 나의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이렇게 멋진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고 있다.
첫댓글 글 잘 읽었어요!!! 말로 형언 할수 없을만큼 영하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또 축하 합니다~~~^*^ 허허허허
전국의 국가직, 지방직 공무원들의 합격수기를 모으더라고요. 예전에 써둔게 있어서 바로 응모했음다... 하여간, 이걸보고 용기를 얻는다는사람이 있다는걸 생각하면, 이게 합격수기를 쓴 보람이죠..^^
아...그랬군요. 합격수기를 모으는 그런 일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