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호수
강 문 석

어둠이 서서히 찾아드는 호수에는 는개인양 안개비가 내리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수면 속으로 거꾸로 얼굴을 박은 망봉산 봉우리가 한 폭의 거대한 수묵담채화로 다가왔다. 명성산과 망무봉도 호수를 둘러쌌지만 나그네의 시야를 벗어나 수면에선 그 모습을 만날 수 없었다. 본래 일제 때 지역의 관개용수를 위해 명성산 줄기의 골짜기를 막고 산을 깎아서 7만8천 평 규모의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출발한 호수가 주변의 높은 산봉우리와 기암괴석 덕분에 아름다운 호반여행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일정량 이상의 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만들어 수문을 열어도 호수의 바닥이 보이는 일은 없다고 했다. 호수가 하늘을 거울처럼 담고도 산 그림자까지 보여주니 사시사철 탐방객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수는 일찍이 산속 우물처럼 맑다고 산정山井호수란 이름을 얻었다. 일제가 의도적으로 그러진 않았겠지만 호수는 우리말사전에도 없는 엉터리 이름을 달고 태어났다. 백두산 천지처럼 산꼭대기에 있는 호수가 산정山頂호수인데 여긴 산중이지 산정상이 아닌 탓에 山井으로 어정쩡한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호수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국민관광지가 된지 오래인데 뒤늦게 그 이름을 따져 가타부타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 호수의 위치가 서울에서 불과 70여 킬로미터 거리밖에 안 되니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 산다는 수도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을 터이다. 약간 흐린 여름날 산정호수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차창 밖으로 나타나는 풍광이 특이했다. 해발 이삼백 미터 야트막한 산들에 하얀 구름장이 띠처럼 두르고 꼼짝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떤 것은 땅에 붙은 것도 보였다. 항공기에서 내려다보던 구름이 떠올라 차를 세우고 그 풍광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때 퍼뜩 이 지역은 동란 전 삼팔선 너머 북조선 땅이었다는 게 떠올랐다. 당시 휴전을 앞두고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피아간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가. 오늘 눈앞의 푸른 옷을 걸친 산들도 지척의 헐벗은 북녘 땅을 바라보며 크게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살다가 늘그막에 이곳 산정호수를 찾도록 만든 건 순전히 이곳 기초단체를 맡은 시장이었다. 그렇다면 그를 먼저 만나 인사를 하는 게 도리일 것 같으나 그가 사람을 만나줄 것 같지 않아 생각을 접었다. 호수에 복원하려다 불발로 끝난 김일성별장 때문이다. “짓기만 해봐라. 당장 불을 확 싸질러 버릴 거다!”
지금도 웹에 올라있는 일간신문 기사 밑 성난 민심은 이토록 섬뜩하다. 사변 때 서른여섯 청년이었던 아버지를 여윈 나도 불을 싸질러야 한다는 생각은 다를 수 없었다. 사실 얼빠진 인간들이 떠벌이는 별장이란 것도 호수 제방 끝에 일제 때 수리조합이 농업용수를 관리하느라 지은 건물이었다. 광복 후 김일성이 가끔씩 그곳에 들른 것으로 구전되고 있으나 당시의 건물은 6·25 때 소실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았다. 54억 예산을 확보하여 사유지 매입까지 마친 기초단체도 포천시민들이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의정부에서 군복무 시절에도 포천으로 향하는 도로를 바라볼 때마다 산정호수를 생각했었다. 당시 구닥다리 리코카메라로 찍은 필름을 미1군단사령부 안 사진관에서 현상과 인화를 내 손으로 직접 했었다. 동료 병사들은 외출 때 자신들의 집이 있거나 고궁이 많은 서울을 주로 원해서 내가 꿈꾸던 산정호수는 끝내 찾아가지 못한 채 의정부를 떠나오고 말았다. 산정호수를 찾아가기 전 같은 경기도 땅인 양평을 먼저 들렀다. 얼마 전 한미친선군민협의회가 미 제2사단 창설 100주년을 맞아 이곳 지평리전투기념관에 세운 기념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전사에 기록된 대로 북의 기습남침으로 벌어진 동란에서 3년 동안 국군과 유엔군은 수많은 전투를 겪으며 위기를 넘겼다. 그런 중에도 결정적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차례에 걸쳐 역전의 발판이 된 인천상륙작전과 지평리전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8사단이 해체되고 나서 지역경제가 말이 아니에요. 그냥 파리만 날리고 있어요.” 포천 이동의 제법 번화한 도로 옆에 넓은 주차장까지 갖춘 식당주인이 내뱉는 푸념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산정호수를 찾는 관광객보다 군부대가 주둔하여 병력이 오가야 영업에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삼십만 원 주고 펜션 잡을 필요 없어요. 오륙 만 원이면 온천모텔 깨끗한 것 있어요. 바로 소개해드릴게요.” 숙박한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미리 손님을 이처럼 배려하고 나왔다. 그가 일주일에 하루는 꼭 전국의 산을 찾아간다기에 부산 쪽 올 때 연락하면 도움을 주리라는 말을 했더니 반색했다. 뭐하나 되는 게 없다고 정권을 향해 볼멘소리를 쏟아내다가 그는 아차 싶었던지 금세 말을 바꾸었다. “사실 지금 하는 사람만큼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남자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제법 애교를 부리는 것 같더니 맨 정신으로 왜 이런 헛소리까지 하나 싶었다.
그가 사라졌다면서 탈기하던 ‘오뚜기부대’ 8사단도 타 부대에 통합된 것을 귀가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산정호수를 체험한 사람들이 새벽에 호수를 따라 난 5킬로미터 산책로를 걸어보라고 권한다. 밤새 수면을 뒤덮었던 물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드러나는 호수의 비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수여행을 당일치기보다 일박을 권하는 이유이기도하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그 밤을 달려 호반의 도시 춘천에 도착했고 이튿날 새벽 소양강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내려다보며 소양호 전망대를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