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7년
저녁노을이 지는 들녘에서 한 가난한 농부부부가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하고 있다.
캐다가 만 감자가 바닥에 흩어져 있고
멀리 보이는 교회당이 정지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명화 '만종(晩鍾)'은
프랑스의 자랑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 얽힌 두가지의 秘話는 우리를 숙연케 한다.
1.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백화점 소유주였던
알프레드 쇼사르가 80만 프랑에 이 작품을 구입해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한 후
한번도 거래된 적이 없었던 '만종'은
값을 매긴다는게 불가능한 보물이다.
그러나 작품이 처음 만들어진 1860년 당시
밀레는 물감을 살 돈조차 없는 가난한 화가에 불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상 아르투르 스테반스가
그림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1000프랑을 지원한다.
이 1000프랑으로 탄생한 그림이 바로 '만종'이다.
이렇게 탄생한 만종은
100년 만에 80만 프랑 값어치를 얻었고
그로부터 또 100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의 자존심이자
1000프랑을 지원한 것이 국부(國富)를 일구어
낸 것이다.
루브르에 돌아오기 전
'만종'은 미국 아메리카 미술협회에 팔렸다.
프랑스측은 국회와 행정부는 물론 모금활동까지
벌여가며 '만종'이 미국에 팔리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부자나라 미국을 당할 수는 없었다.
프랑스가 자존심이 상한 채 주저앉아 있을 무렵
백화점 재벌 알프레드 쇼사르가 미국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만종' 을 다시 사들인 것이다.
쇼사르는 이 그림을 개인 자격으로 소유하지 않고
루브르에 기증했다.
예술의 가치를 알아본 쇼사르가 없었다면
'만종'은 지금쯤 미국 어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을 것이다.
2. 그림을 보면, 하루 일을 마치고
농부 부부가 교회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평화로운 그림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그림에는 슬픈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림을 보면,농부 부부가 바구니를 밭밑에 놓고 기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바구니가 감자씨와
밭일 도구를 담은 바구니로 알고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바구니에는
씨감자가 들어있던 게 아니라
그 시대에는 매우 가난하여,배고픔을 참고
겨울을 지낸후, 씨감자를 심는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실정 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아기는 배고픔을 참지못해
죽은 것이다.
죽은 아기를 위해 마지막으로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만종'이다.
그러면, 왜 그림 속의 아기가 사라졌을까?
앞서 말한 밀레의 친구가 이 그림을 보고 큰 충격과 우려에 빠진 나머지 밀레에게
아기를 넣지 말자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밀레는 고심 끝에 아기 대신 감자를 넣어
그려 출품했던 것이다.
그 이후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그저 농촌의 평화로움을 담고있는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살바도르 달리는 달랐다.
그는 이 그림을 보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맛보았다.
그 불안감이 얼마나 집요하게 그의 뇌리에 들러붙었는지
달리는 오랫동안 그 까닭을 알아내려 했고,
그에 관한 책을 쓰기까지 했다.
그는 밀레의 <만종>에 그려진 감자자루를
어린아이의 관으로 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수십 년 후, 이러한 그의 투시력은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정확한 관찰이었음이 밝혀졌다.
루브르 미술관이 자외선 투사작업을 통해
그 감자자루가 초벌그림에서는 실제로
어린아이의 관이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현실 생활에는 서툴렀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삶에 대한 투시력을 갖게 되었다는
그의 고백은 참이었던
독일의 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괴테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人生의 참다운
의미를 모른다" 라는 名言을 님겼다.
"눈물 젖은 빵" 은 가난이나 고통을 의미 하는 것 으로 살다 보면 즐거울 때보다 힘 들 때가 더 많다.고난이나 역경이 닥쳐올 때 어려웠던 시기를 극복한 경험은 삶에 큰 힘이 되고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를 준다.
"눈물 젖은 빵"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프링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작품 "레 미제라블
[Les Miserrables]"의 주인공인 "장발장"이다.레 미제라블은 촤근 영화와 뮤지컬로 만들어져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굶주린 일곱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가난한 청년 "장발장"의 기구한 운명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당시 프랑스에는 "징발장"처럼 끼니를 거르는가난한 사람들이 무척 많아,굶주림이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원인이됐다. 19세기 유명한 프랑스의 화가 "장 푸랑수와 밀레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밀레는 "만종"외에 1857년 작품[이삭줍기]에서 그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秋收가 끝난 들판에서 세 여인이 이삭[추수 하다 떨어뜨린 벼 이삭]을 줍는 그림인데 여인들의
몸 동작이 삶의 고달픔을 나타낸다.한 여인은 이삭을 쥔 손을 아픈 허리에 댄 채 낟알을 줍고 한여인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펴지 못하고 여인들의 손은 고된 노동으로 햇볕에 붉게 타고 거칠게 갈라졌다,
"밀레"는 왜 이삭 줍는 여인들을 비참한 모습으로 그렸을까.? 바로 가난의 고통을 알리기 위함이다.
이삭 줍는 여인들은 농장에 고용된 농부가 아니다.들판에 떨어진 낟알이라도 줍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수 밖에 없는 극빈층이다.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가을걷이가 끝난 농장의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것인데,이삭 줍는 일마저도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림의 배경에는 풍요로움이 넘친다.말을 탄 농장 감독은 추수한 곡식 더미를 짐수레에
싣는 일꾼들을 감시하고 거대한 건초더미와 곡식이 가득 채워진 수레는 농장주가 큰 부자라는
것을 알려준다. "밀레"는 내적으로 낟알을 줍는 빈민과 돈 많은 땅 주인의 들판에 쌓여있는 건초더미를 대비시켜 빈부격차의 실상을 고발한 作品이다
"밀레"가 빈민을 연민의 눈길로 바러본 것은 스스로 뼈저린 가난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밀레"는 생할고를 견디다 못해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고,심지어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경재적 고통에 시달린 밀레의 삶은 그가 1853년에 쓴 한 편지에서도 나타난다.
" 어떻게 하면 집세를 구할 수 있을까요.? 집세보다 더 급한 것은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우는 일입니다."
"이삭 줍는 사람들"을 헐값에 판것도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이다. "밀레"는 밀린 외상값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가게 되엇는데 "밀레"의 부인과 아이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자 어떤이가
동정심에 몇 프랑을 주고 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경험이
있었기에 빈민들의 고통을 실감나게 그릴수 있엇다.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는 프랑스 노르만디 지방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9형제의 맏형으로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과 함께 농사일을 하던그는 파리의 미술 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하지만 도시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1849년,파리의 작은 시골인
바르비종으로 내려갔다. 자신도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 생활 모습과 자연 풍광을
그림으로 나타냈다.
밀레가 바르비종에서 그린 "씨뿌리는 사람" "이삭 줍기" "만종"등의 작품은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아주 잘 나타낸 작품이다.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적인 그의 작품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 1868년 프랑스의 최고 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 만종의 숨은 이야기.
"만종은 황혼 들녘에 종소리에 맞춰 수확한 감자를 두고 기도하는 부부를 그린 그림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그림중 하나다.20세기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
리"가 이 그림에 대해 새로운 주장을 내세웠다. 그림의 감자 바구니는 실제 감자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 시체가 들어있는 관이라는 것이었다.그러니까 이 부부는 자신의
죽은 아이에 대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은 X-선 검사를 했고 그 결과 ,놀랍게도 감자 바구니 앞쪽에
작은 작은 상자모양 스켔치가 나타났다.그러나 그것만으로 어린이용 관이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수수께끼..............
첫댓글 어마어마하게 부자였던 괴테가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는 인생의 가치를 모른다고 했다니 아이러니 입니다. 하하
다이어트 한다고 단식이라도 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