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수한나라당 대표는 26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한나라당은 서민과 중산층을 아우르는 70% 복지 시대를 여는 개혁적 중도보수 정당으로 다시 서겠다"면서 "당의 강령을 중도 개혁의 가치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안 대표는 연설에서 '중도'라는 단어를 12번 사용했다. 안 대표가 말하는 중도의 개념은 복지의 대상을 전체 가구 가운데 소득 상위 30%를 제외한 밑에서부터 70%까지의 가구로 확대하는 노선이라는 뜻 같다.
안 대표가 이런 식의 중도를 들고 나선 것은 민주당이 이달 초 전당대회에서 의료·보육·교육 같은 사회서비스를 국민 전체에 확대하는 '보편적 복지'를 당의 새 강령으로 채택한 데 대한 대응책이다. 2012년 대선을 겨냥한 민주당과의 대중영합적 정책 경쟁에서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선거의 승패를 결정하는 표(票)는 정치적 좌표의 중간지대에 모여 있다. 이것이 현대 정치의 상식이다. 안 대표의 말은 득표 전략의 상식을 당의 기본 줄기인 강령에 담겠다는 말이다. 꼭 그렇게 해야 하는지가 우선 의문이다. 한나라당의 현재 강령엔 '큰 시장·작은 정부의 활기찬 선진경제' '자생복지체제를 갖춘 그늘 없는 사회'가 들어 있다. '작은 정부'는 정부 주도 복지의 낭비와 비효율을 제거하겠다는 뜻으로, 안 대표가 얘기하는 정부 주도 복지 정책과 모순된다. 한나라당은 자신들이 지향하겠다는 중도가 무엇이고, 보수가 무엇이고, 개혁이 무엇인지 분명한 개념부터 국민에게 제시하고 그에 맞춰 강령을 바꾸는 것이 순서다.
안 대표가 '70% 복지'에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모범답안이 있는 듯이 말한 것도 길게 내다보지 못한 처사다. 정부가 내년부터 2015년까지 소득 하위 70% 가구의 보육료를 전액 지원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만 25조원이다. 작년 정부의 재정적자는 43조2000억원이다. 작년 국가부채는 359조6000억원으로 10년 전에 비해 4배 가까이 늘었다. 이러다간 천문학적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2015년까지 공무원 49만명을 감축하기로 한 영국이 밟은 길을 뒤따를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모든 복지 정책의 혜택을 소득 하위 70% 가구까지 주면 정말 도움이 절실한 밑바닥 저소득층에 돌아갈 혜택을 그만큼 줄이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선(先)복지·후(後)고용이 아니라 선고용·후복지가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정책이다.
우파 정당과 좌파 정당이 서로 표를 달라며 복지 경쟁에 뛰어들면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 나라가 재정파탄의 낭떠러지에 떨어진 후에야 정부도, 정당도, 국민도 제정신이 들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세금 부담과 복지 삭감으로 가장 피해받을 계층이 바로 서민과 중산층이다. 대한민국을 그런 낭떠러지로 몰고 갈 운전자들끼리 다음 시대를 놓고 선두 다툼을 벌이는 게 지금의 정치권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보수라고 내세운 적이 별로 없다. 보수라는 단어조차 쓰기를 꺼려왔다. 보수의 진실, 보수의 정의(正義), 보수의 정체성을 모르기 때문에 보수의 자존심조차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