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어느 의사선생님 글이다.
《우리는 얼마나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가.
자신보다 약한 이를 괴롭히고,
더 잘하는 이를 질투하고,
마치 영원할 것처럼 살아간다.
-인턴 시절, 새벽 4층 병동에서 CPR을 하던 환자가 사망했다.
DNR(연명치료 거부)이 없어,
우리 인턴 셋은 돌아가며 2시간 동안 심폐소생술을 했다.
마지막 순간, 보호자는 울며 말했다.
“그만해 주세요.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온몸이 땀에 젖은 채 1층 편의점에서 우유 한 잔을 사 마셨다.
당직실로 가던 길, 3층 신생아실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병원 안에서
한 층에서는 생명이 끝나고,
한 층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태어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다면, 이렇게 짧은 삶을 미움과 질투로 채우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레지던트 시절, 나는 늘 피 흘리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치료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언제나 피비린내 속에서 일했다.
문득, 처치실에서 혼자 앉아 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일 응급실엔 또 누가 오기로 예정되어 있을까?”
“또 누가 다치고, 찢어지고, 부러지고, 죽을까?”
성형외과 병동에서 코 성형수술을 했던 20대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
그는 퇴원 후 한 달 뒤, 오토바이 사고로 응급실에 실려 왔다.
그리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 아이는 한 달 뒤,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서로를 미워하고, 괴롭히고, 질투하는 걸까?
우리는 언젠가 사라질 존재다.
-삶은 너무 쉽게 끝난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사고, 예기치 못한 이별.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서로 미워하고,
서로 괴롭히고,
서로 질투하면서 살아야 할까?
아니면,
조금 더 따뜻하게,
조금 더 이해하며,
조금 더 의미 있는 순간을 만들어가야 할까?
결국, 남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뿐이다.
그렇다면, 이 짧은 시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시간의 흐름 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연속성상에서 그대로 늘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렇게 시간은 익숙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소중했던 순간들도 멀어지게 한다.
그래서 일까? 허무함이 물밀듯 엄습해 올 때가
있다. 결국 모든것은 사라져 버릴 운명이 아닌가?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삶이 허무한 것은
시간 때문만이 아니다.
사라진 것은 우리를 존재하게 한 어느 시점이지,
그 순간 누구와 함께 있었던 사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음이 아픈 건 지나보낸 시간이 아니라
떠나 보낸 사람 때문인 것처럼...
소리의 울림을 만들려면 혼자서는 안된다.
공기를 타고 퍼져나가 다른 소리와 만나야
공명을 이룬다.
우리 삶도 그렇다.
홀로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때론 스치듯 지나가기도 하고, 때론 오래도록
머물며 서로의 삶에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우리의 존재는 의미를
찾는다.
함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를 존재하게
만드는 힘이다.
어울림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가 있다.
제각기 다른 높이, 다른 색을 지닌 소리들이
서로 부딪히며 조화를 이룰 때 화음이 되듯,
사람도 함께 어우러질 때 삶이 깊어진다.
나와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면서 우리의 삶도 더욱 다채롭고
풍성해 진다.
그래서 어울림은 단순한 공존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열린 마음이라 말할 수 있다.
신앙의 영성이 울림과 어울림 속에서 더욱
깊어지는 까닭이다.
창조의 순간부터 (창2:18)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신앙은 혼자만의 고요한 깨달음이 아니라,
함께 예배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여정 속에서
빛을 발한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사고 때다.
죽기 직전에 전송된 안타까운 사진이 있다.
연기가 자욱한데, 한 명도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다 죽었다. 왜?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있기 때문이다. 동조 심리이다.
나중에 실험을 해보았다. 같은 결과가 나왔다.
연기가 나도 4명이 가만히 있으면, 또 다른
1명도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지성의 본산 독일에서 600만 유태인 학살이
일어난 이유는? 단순한 동조 심리 때문이다.
잔혹한 학살자들의 정체는 평범한 시민,
평범한 청년 군인이었다.
안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탄식한다. 이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위에서 내린 명령이면 그냥 따라한다.
남들이하면 그냥 따라한다.
중심 잃은 인생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말씀의 중심성을 가진 사람은 이런 동조
심리를 이겨낸다.
강한 진리를 품고 있으면, 상황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집단 악행에서 건져낼 희망의 사람이 된다.
"3의 법칙"이 있다. 한 사람이 뭘 하면 힘이 없다.
두 사람이 하면 관심만 갖는다. 그러나 3 사람이
하면 동조하기 시작한다.
횡단보도 에서 3 명이 하늘을 쳐다본다.
길 건너던 수십명이 따라서 하늘을 쳐다본다.
해변에서 3 명이 신나게 춤을 춘다.
나중에는 해변의 모든 사람이 따라 춤을 춘다.
한 명, 두 명 일때 영향이없다.
근데 3 명이 되자 동조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것이다.
이렇듯, 깨어있는 3명이 있으면 상황을 변화
시킬 수 있다.
상황을 바꾸는 힘은 "3명의 법칙"이다.
복음으로 말씀의 중심성을 가진 3 명이 필요하다.
중심잡힌 3명이면, 어디든 변화시킬 수 있다.
예수님도
(마18: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쉽게 포기하지 말라.
먼저 중심을 회복하라.
그리고 연대하라. 3 명이면 된다.
3 명이면 충분하다. 해보라.
전(4: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냥하라 그러면 된다.
당신이 변화의 주역이 될 것이다.
함께 그것도 *복음* 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이다.
샬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