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성산 사랑
 
 
 
카페 게시글
깊은 통찰, 자유 게시판 스크랩 칭의의 세가지 시제적 측면
최믿음 추천 0 조회 15 15.07.23 07: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구원의 서정' 시제적으로 표현된 구원 3가지 구절

 

 

 

과거 [그 때에.. 따랐으니.. ]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엡 2:2

 

 

 

현재 [더욱 지금..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빌 2:12

 

 

 

미래 [구원하시리니.. ]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 딤후 4:18

 

 

 

'칭의'의 3 가지 시제적 측면

 

 

 

'의'의 선물 [과거적 측면의 칭의]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 롬 5:17

 

 

 

"의의 선물"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법적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얻은 과거적 측면의 '칭의'입니다. 선물은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은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를 설명하는데

매우 적절하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입니다.

 

 

 

'의'의 열매 [현재적 측면의 칭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 빌 1:11
'의의 선물'을 받은 것으로 '의'에 대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의’는 법정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관계적인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의의 선물'을 받은 그 때부터,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의의 열매'는 칭의의 현재적인 측면입니다. 

 

 

 

 

'의의 선물'은 칭의의 과거적인 측면이고 '의의 열매'는 칭의의 현재적인 측면입니다. 

그것은 이미 얻은 '칭의'의 은혜 가운데 계속적으로 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언약 백성의 의무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 계속 거할 수 있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 때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의'도 '새 언약'도 '옛 언약'과 구조가 같다고 후커 교수가 지적했습니다. 

'새 언약'도 '옛 언약'과 구조가 같습니다.  우리도 의를 행하므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의의 열매'를 맺음으로 구원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의무로 주어진 것이 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를 행하므로 예수님의 자녀된 관계 안에 거합니다. 

 

 

 

 

포도나무인 예수님의 가지로서의 관계 안에 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관계 안에 거합니다. 

계속 그 구원을 잃지 않고 유지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 때 '의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최종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선물은 값없이 주어지지만 열매는 가지인 우리가 맺는 것입니다. 선물은 공짜로 받지만 열매를 맺으려면 힘써야 합니다. 

성령님의 은혜로서 된 것이지만, 우리도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선물과 달리 열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은 단지 교회를 다니고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생활은 '의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의를 행하는 삶입니다. 

 

 

 

'의의 소망' [ 미래적 측면의 칭의]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 갈 5:5
의의 선물 =  의의 열매 =  의의 소망 이라고 합니다. 소망은 추억이 아닙니다. 소망은 과거가 아닙니다. 

소망은 현실도 아닙니다. 현재가 아닙니다. 소망은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칭의'에는 과거적, 현재적, 미래적인 측면이 있는데 '의의 소망'은 미래적인 측면입니다.
'의의 소망'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최종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의 완성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한 신학자가 권연경 교수님입니다. 권연경 교수님은 '의의 소망'을 자신의 책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말하는 칭의는 '의의 소망' 즉, 소망의 대상이라고 분명히 못 받는다. 

갈라디아서의 싸움터는 '칭의'다.  엄밀히 말해서 현재적 '칭의'가 아니라  '의의 소망' 곧 미래적 '칭의'가 주제다. 

이 '의의 소망'을 두고 '율법의 행위'와 '믿음'이 서로 싸움을 벌인다.  유대교 전통에서 ‘칭의’란 본래 마지막 심판을 배경으로 한 사상이다. 

'의롭게 한다' 혹은 '의롭게 여긴다'는 것은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충실히 지킨 이들을 의로운 자로 인정해주신다는 뜻이다. 
 

 

 

바울은 '칭의'가 종말론적 소망의 대상임을 명시적으로 밝힌다. "우리는 성령으로 믿음으로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라는

갈라디아서의 5장 5절의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의 칭의 논증을 요약하는 핵심 구절이다. 이 결정적 대목에서 바울은 '칭의'를 간절히

기다려야 할 소망의 대상으로 제시한다. '칭의'를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주장할 요량이었다면 결코 나와서는 안 될 진술이다. 

그런데, 바울은 '칭의'를 미래적 소망의 대상으로 당당히 밝히고 있다. 

 

 

 

권연경 교수님은 ‘의의 소망’에 대해서 3 곳에서 인용을 했습니다. '의의 소망'이 무엇인가? 
'칭의'는 '의의 소망' 곧 소망의 대상이다.  그 다음에 '의의 소망'은 곧 '미래적 칭의'다. 즉, 심판석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칭의'는 마지막 심판을 배경으로 한 사상입니다. 바울은 종말론적인 (종말론적이란 예수님 이후의 성취된 것들을 말한다)

소망의 대상임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의의 소망'을 통해서 그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 롬 2:13
미래 심판석에서 받을 '칭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행하므로 이 땅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그런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그 믿음에 서 있는 사람이 마지막 날에 심판석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의 소망' 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의롭다 하는 것을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개신교인들은

이것을 자꾸 현재적인 것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으로만 이런 쪽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

칭의의 교리'가 왜곡되는 것이고 윤리가 상실 되는 것이고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교회가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의 소망'은 '칭의의 교리'인데 '미래적인 칭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 빌 3:10-14
바울이 달려갑니다. 사람들은 '상'이라는 단어에 속아서 바울이 상 받기 위해서 달려간다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거기서의 '상'은

최종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3장 11절에서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목표로 정한 부르심의 상입니다. 이것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구원을 작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신자면 다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천국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삶의 목표와 바울이 이 땅에서 달려간 궁극적인 목적은 부활에 이르는 것이었고

최종적인 '칭의'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세계 최대 교회를 세우면 무엇합니까? 비리와 범죄로 얼룩이고 교회 헌금을 횡령하고

사적인 용도로 잘못 사용하고 불신자도 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이들이 회개치 않으면 어떻게 천국에 가겠습니까? 

여러분, 목회자로서 교회가 부흥하고 세계 최대 교회를 세운 것이 대단한 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것을 위해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종적으로 구원을 목적으로 달려갔습니다. 
바울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 큰 교회와 큰 사역을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라면 나그네가 아닌 것입니다. 

그는 세상 사람입니다. 세계 최대 교회를 세웠어도 그 사람은 세상 사람인 것입니다. 바울은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성공을 목표로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최종 구원을 목표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얻으면 전부를 얻은 것입니다. 

그것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목표를 바로 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무엇이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인생이 목적은 반드시 '의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재물의 소망이나 성공의 소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최종적으로 심판석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그 때에 주님 앞에서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 받는 ‘의의 소망’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 살전 1:2-3
이 '의의 소망'을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소망의 인내'라고 표현했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최종 심판 때 칭의를 받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기도 많이 하고, 사랑하고, 거룩하고 이것이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의 푯대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소망의 인내' 즉 '의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세속화 되면 안됩니다. 

 

 

 

 

절대로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조들이 산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다 얻고 이 땅에서 다 누리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늘에 쌓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대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목사고 진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렇듯 '칭의'는 3가지 입니다. '의의 선물', '의의 열매', '의의 소망'입니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도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도 없습니다. 

 

 

 

 

'의의 선물'이 없으면 '의의 열매'도 없고 '의의 소망'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히 12:14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합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그가 목사라도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의의 열매'는  '의의 선물'과

'의의 소망' 중간에 위치해 있으면서 다리 역할을 합니다. 

 

 

 

 

절대로 우리의 삶에 '의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절대로 최종적인 구원인 '의의 소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수 많은 목사와 부흥사들이 '구원의 확신'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마 5:20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겉 포장만 말씀을 지키고 평토장한 무덤처럼 회칠한 무덤처럼 속에는 음란과 방탕과 탐심과 교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