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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5절-6절: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사람들이 진리의 도를 안 받고 하나님의 말씀의 경계에서 벗어나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쓰고 귀를 기울인다는 말이지요.
딤후4:3-말세에 사람들이 귀가 가려워가지고 많은 스승을 둔다고 했지요.
많은 스승을 두고 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계시로써 가르쳐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독교 안에서 교훈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노선에서 이탈된 가르침을 따른다 그 말이요. 진리의 가르침에서 이탈되는 것은 전부 다 아닌 것이라 그 말이다.
그리고 설교하는 교훈하고 가르치는 자리에 그런 자들을 세우면 안 된다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아닌 일반 강연장이나 토론장 같으면 그건 일반적인 차원에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관계가 없지요. 그렇지만 교회에서 성경 들고 가르친다고 할 때 그 교훈이 하나님의 본질적 진리의 노선에서 이탈이 되었다면 그런 곳에는 가면 안 된다는 것이고, 교회에 그런 자들을 세워서 교훈을 하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영적인 문제는 영원한 것이고 영이 죽고 사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스승목사님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가 가르칠 때 양의 피로 구속을 받는다고 하는 교훈이 나갔다.
구약에 보면 꼭 그런 것 같아요. 짐승의 피로 구원을 못 얻는다는 말씀도 있긴 한데 물론 그게 다 우리에게 구원계시 면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한 것인데 ‘양의 피로 구원을 얻는다, 죄씻음을 받는다’고 설교시간에 가르쳤나 봐요.
그러니까 스승목사님이 방에 계시다가 그 소리를 듣고 당장에 만류하고 야단을 쳤던 모양이요. 그 바람에 그 교사가 딴 교회로 갔다고 해요.
교리적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공석상에서 가르치는 교훈이 굉장히 중요해요. 사실 떨리는 거예요. 받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주는 입장은 더 말 할 것도 없고.
혹 몰라서 못 가르치는 것은 그건 모르겠어요. 그러나 본질에서 완전히 이탈된 이단적인 발언은 금해야 되고, 안 가야 되고, 받지 말아야 되고, 하지 말아야 되고. 중요한 것이다. 자타에게 심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을 가만히 보면 귀를 즐겁게 하는 데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어떤 전문적인 목사도 있고, 분야마다 음악을 가르치는 목사도 있고, 체육을 가르치는 목사도 있고, 침을 가르치는 목사도 있고. 교회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선교회도 많이 있지요?
선교라 그러면 나는 성경을 가지고 전도하는 그런 성격을 띤 선교만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각자 자기들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을 그들의 입장에서 또 선교라고 그래요. 일반적인 것을 가르치는 걸 선교라 그런단 말이요.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그런 전문적인 것을 가르치는 자들도 있긴 하지만 한 교역자지만 그 말에 어떤 세상적인 그런 게 들어 있다. 그것도 선생이란 말이요. 귀를 즐겁게 하는 것.
사람들이 헛된 말에 빠져든다.
헛된 말이란 일반적으로 거짓말. 아무 근거도 없는 쓰데 없는 거짓말이지요.
헛된 말과 참된 말은 반대말이지요. 참된 말은 변질 변동성이 없다. 시간이 지나가도 시대가 지나가도 그건 변질이 없어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창세전이나 후나, 말세가 되고 말세 후나 하나님 자체적 변질 변동이 있느냐? 또 하나님이 하신 진리의 말씀에는? 하나님이 하신 그 구원에는? 변질 변동이 없습니다. 계획에 어떤 변동이 있을까요? 계획에도 변동이 없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율법시대 은혜시대 양심시대’ 하고 나누는 건 변질 변동되는 것이다.
참된 말은 물질성적이 아니다. 물질성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게 아니에요. 참된 말은, 진리는 그렇다. 순전히 인격적이며 영적이며 이치적인 것이다.
오늘날 보면 물질성적인 것이 상당히 많다. 사상이 그러니 말이 그렇게 나오고 교훈이 그렇다. 또 물질성적으로 나가는 여기에 사람들이 자극을 잘 받는 모양이요.
참된 말은, 즉 진리의 말씀은 시간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가치적으로나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변질 변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헛된 말은 시간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가치적으로나 물질성이기 때문에 변질 변동성을 갖게 됩니다.
이런 헛된 말은 육이 좋아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현실에서 그 맛을 보기 쉬운 것이다. 이것은 자기가 힘쓰고 애쓰느니만큼 되는 것 같기 때문에 열심히 부지런히 그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으로 그런 정신으로 달려간다 그 말이다.
그렇게 나가는 그 말이 헛된 말인지 참말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꼭 신앙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예수이름으로 하면 그 목적이 어디에 붙었건 간에 믿음 있고 신앙 좋다고 하는 그런 게 오늘날 교회 안에 많아요. 목적적으로는 벗어났지만 예수이름으로 하고 교회간판만 있으면 신앙이라고 봐주고 믿음으로 하는 것으로 봐준단 말이요.
‘신앙 믿음’ 하는 것도 영적이며 진리적이며 인격적이며 이치적이며 도리적인 이건 없고 물질성으로 돌아가는 그런 신앙 그런 믿음인 것이다. 이거 아주 주의해야 돼요.
우리는 분리하고 또 분리해서 올라가야 돼요. ‘이게 물질이다, 아니다’ 하며 물질 그 자체만 보지 말고, 또 ‘목사가 순 돈만 내라고 그런다, 너무 한다’ 그런 정도도 올라가고 벗어나서 예수이름으로 한다고 하는 거기에, 또는 가르치는 교훈에 물질성적으로 돌아가는 교훈을 구별을 해야지요.
마귀가 가면을 쓰고 아주 깊숙이 들어가는 거요. 그래서 거짓의 교훈, 마귀영감의 감화 이런 것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고차원적인 것이다.
성도는 참을 잡기 위해 올라가야 되는데 분별하는 데로 고차원적으로 올라가야 하고, 자기의 신앙사상에서 신앙 인격적인 면에서 고차원적으로 올라가야 되는데 그런데 그러지를 않으려고 한다 그 말이지요. 저차원에서 놀려고 그런다. 사랑 차원이 아니고 교회의 제도나 법 차원으로 놀려고 그래요. 그거 못 써요. 언제까지 그럴 수 없지. 올라가야지.
주님과의 관계에서 서식적 명령적 법적으로 가야 하느냐? 사랑의 인격적 관계에 무슨 제도가 필요하며, 무슨 명령이 필요한가? 눈치만 봐도 척 아는 것이지!
율법의 선생.
7절: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율법의 선생은 율법의 해석자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바로만 해석하면 예수님이 소개가 되고, 천국이 소개되고, 인간이 하나님의 온전으로 그 방향성이 향하게 됩니다. 즉 예수님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또 하나의 목적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도성인신의 목적이요, 성령의 감화 감동의 목적이요, 선지사도 종들의 가르침이요, 이것을 세상 모든 만물이 좋아한다. 한 마디로 율법의 선생이 해석을 잘 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 발견케 해 주는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고, 선지사도 하나님의 종들, 모든 만물의 목적이다.
율법의 선생은 보통 일반 교사들과는 달리 특수한 분야의 선생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반적인 선생이 아니라 그 말이다.
율법의 선생이라고 해서 100% 다 만들어졌느냐? 지금 그런 말은 아니다. 만들어지는 면에서는 또 다릅니다. 어쨌든 율법의 선생이 잘못 가르치면 자타의 영원한 것이 절단 나 버리고 만다. 그래서 선생의 심판이 더 크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도 어떤 학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분야에 있어서 잘못 가르치면 배우는 학생은 성공률이 막히고 만다. 배우고 깨닫는 자들에게 장래 문제가 이 교사에게 있는 것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보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다 더 유능한 선생을 찾는다.
선생이 학생이 잘 되기를 바라고 돈 많이 벌어서 부자 되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되는 소망에서 가르친다면 그 전문분야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다. 그러나 돈만 벌려는 선생은 그 학생의 성적에 관심이 없다.
가르치는 자의 심판이 큰데 왜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할까? 그것은 심판은 그 당장에 눈에 보이지 않고, 가만 보니까 선생은 대우받고 최상급 적으로 살고 하니까 그것이 돋보이고 부럽기 때문이다. 돈이나 물질과 관련돼 있으니 율법의 선생과 일반선생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왜 하나님의 종이 되려고 할까?
① 부흥목사로 이름을 남기고 싶다?
② 무슨 일을 하다하다 안 되니 목사 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을 해서다?
이 속에도 물질이 들어 있다. 목 잘려 죽는다면 누가 하겠느냐?
③ 성경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소원이 작용되어서?
교역자 중에 이런 사람 만나기가 드물 것이다.
자기의 확증(말)하는 것도 깨닫지를 못한다.
율법의 뜻을 밝히는 것이 선생이다.
율법이 말하는 것은 신령적 영원적 궁극적이다. 고로 그런 결과가 아니라면 율법의 해석이 아니다. 율법의 선생은 궁극적 결과를 알아야 가르칠 수 있다.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되고 뭐든지 잘 된다’ 하는 것은 육적으로 가르치는 것. 이렇게 되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느냐?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이 어떻게 될까?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자기가 말하는 것을 깨닫지도 못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뭐요? 궁극적 결과에 있어서 어떤 결과가 오는 것을 도무지 분별을 못한다. 안 한다는 것. 이것은 엄청난 사실 아닙니까?
교회의 모든 가르침에는 분명한 궁극적 결과가 있느냐? 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율법의 목적.
8절: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다. 율법이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거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율법의 선생이 율법의 해석을 그렇게 해석해서 가르친다면 이는 율법을 법대로 취급을 하고 사용하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율법은 선을 이루게 된다.
율법은 죄인을 하나님의 본질적 선의 사람으로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지요. 그게 선이란 말이요. 그래서 율법은 선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그 법대로 쓰지 않는 것은 불법이다. 이건 사람이 그 율법을 악하게 쓰는 거지요. 율법의 목적하는 바대로 하지 않고 그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이고 뜻인 양 가견적 사역적 목적으로 나가고 가르치고 사람을 그렇게 인도한다면 이는 율법을 가지고 악한 일을 하는 셈이다. 사람의 속에 있는 죄는 그대로 둔 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게 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못 닮게 하는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었지요. 율법의 선생이 이를 떠나서 딴 짓을 할 수 있느냐? 모르면 몰라서 안 할까 딴 짓은 할 수 없다.
9절-10절: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 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율법이 있는 목적이 있다. 옳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의사는 건강한 자보다 병자를 위해 있다.
국가법: 인간이 만들어 놓은 법. 타락에서 나온 법이지만 질서유지를 위해서. 어기면 범법자가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법: 자기가 의식을 하던 못 하던 행동에서 건 모두 죄인이다. 법아래 태어났고, 그 법을 어기는 자로 살고 있는 것이다. 해서 하나님의 법이 필요하다. 활동적이고 범법적인 것으로만 보면 안 된다.
거룩이나 경건은 신앙차원의 말이다. 모두 신앙에 관한 죄이다.
이것이 불신자에게는 관계가 없고 신자에게만 관계가 있나? 하나님과 나와의 신앙에 관한 죄이고 신앙적으로 본다니까 불신자에게는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으니까 법을 지켜야 한다.
불법자: 모르면서 짓는 죄가 있고, 알면서 짓는 죄가 있다.
복종치 않는 자: 하나님의 법에 대립적으로 사는 자.
경건치 않는 자: 신앙(믿음)이 없이 사는 자.
죄인: 현재적으로 계속적으로 죄 짓는 상태로 사는 자.
거룩치 않는 자: 영과 육의 분별없이 사는 자. 창녀처럼 아무 거나 맞아들인다.
분별없는 자는 아무 거나 맞아들인다.
망령된 자: 신령한 것을 무시하고 거룩한 일들을 하는 자들을 비웃고 사는 자들.
아비를 치는 자: 자기를 교육하고 교훈하는 자를 대적하는 자.
어미를 치는 자: 자기를 사랑하고 양육하는 자를 대적하는 자.
살인자: 참 생명을 죽이는 자들.
음행: 인간의 쾌락성을 세상에 두는 자들.
남색: 동성연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어기고 쾌락성을 갖고자 하는 자.
사람을 탈취하는 자: 사람을 물질과 바꾸는 것. 일반적으로 유괴범. 신앙적인 유괴범이 많다.
거짓말: 참이 아니 말로 가르치는 자. 일반적으로는 사기꾼.
거짓 맹세: 자기 일생을 임시성적인 것에다 서약하고 사는 자.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 하나님의 궁극적 결과적 교훈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자.
지금 말한 것은 신 불신 간에 안 걸리는 사람이 있느냐? 전부 걸린다. 몇 가지는 안 걸리는 사람도 있겠지.
기독자들이 일반 도덕성을 기준하여 보기 때문에 성경에 여러 가지 죄목들이 나열될 때 ‘나는 어느 죄는 안 짓고, 어느 죄는 짓고’ 하면서 자기가 짓지 않은 죄는 자기와는 관계가 없이 다른 사람의 죄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건 잘못된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이지요.
11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는 것이 바울이 가르치는 것인데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이냐? 서광처럼 빛나는 것. 하나님의 나타남이다.
무엇이 나타났느냐? 무엇이 하나님의 뜻으로 나타났느냐? 즉 무엇이 하나님의 광채냐? 발광체는 자체적으로 빛이 난다. 문제는 빛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빛 자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인데 그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 의사, 기뻐하심을 모두 나타냈다.
인간이 이것을 안 받아들이고 살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사람이 이 빛을 영접하고 살면? 하나님의 그 사랑을 자기가 입게 되는 게 분명하다. 빛 밑에 가면 빛의 혜택을 받는다. 확실하다.
예수 그리스도화 되니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인간이 무엇을 보태드리고 해서 영광이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본질적인 성품을 입어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란 말이지요. 이렇게 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자이다.
사람을 그렇게 인도하고 그렇게 가르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해 나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는 것이다. 이게 복되신 축복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다는 말이 무슨 말이요? 따른다! 왜 따르느냐? 입는다!
세상을 가지고 나와서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 것에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게 하느라고 예수 믿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보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다. 이것이 곧 사단 마귀의 운동인 것이다. 특히 계시록에 많이 나타나 있다.
12절-16절.
이 말씀에서 사람이 바꾸어진 것을 볼 수 있다. 복음이 사람을 바꾸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사울이 바울로 바꾸어졌다.
나를 능하게 하신 이.
12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능하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 능력자를 말한다. 힘 있고 강하고 능력 있고. 능력과 통하는 말이다.
주님은 바울을 능한 자로 만들었다. 또 바울에게 직분을 주었다.
바울에게 왜 그 일을 시키느냐? 사람이 중해서냐, 복음이 중해서냐? 사람이 영원히 망해도 복음이 중요해서 복음전도자로 세웠느냐? 사람이 중해서 사람을 복음처럼 만들어지게 하려니까 그 직책을 주신 거란 말이요. 바울에게 복음전함을 맡긴 것은 그 일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고 바울을 복음대로, 본질대로 만들어지게 하려고 그 일을 시켰다.
사람에는 감염성이 있어서 어떤 일을 계속하다 보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한 자가 되어지기 마련이다. 복음에 능한 자로 만들려면 복음의 일을 시키면 된다. 미신의 일에 능한 자로 만들려면 미신의 일을 시키면 되고.
교회에서 명칭적인 직분인 장로 집사 등등을 주는 것은 교회에 일할 사람이 없어서 일을 하게 하려고? 그래서 직책을 받기 전에는 일을 안 했지만 직분을 받고나서는 ‘이제는 직책을 받았으니 일을 하자’ 보통 그렇게 생각을 한다.
진리가 하자면 자기의 소원이 되어서 하고, 진리대로 자기를 다스려 나가고, 진리대로 자기가 인격적으로 잘 만들어지고, 어떤 환경이 오더라도 어떤 처소에 있든지 자기의 생각이 진리의 생각이 되어가지고 자유자재로 진리대로 움직여 주님과 인격적으로 막힘이 없이 나가는 이것이 뭐요? 다시 말씀드리면 바울은 적응력이 빠르다. 부함에도 가난에도 처할 줄 안다.
자기를 진리대로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이 능력이 얼마나 큰 건지! 사람들은 이 능력을 안 알아주지만 이렇게 사는 자가 능한 자이다.
능한 자: 능력과 비슷한 말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능력 능력’ 하니까 여기서 조금 구분을 둡니다.
자기가 자기를 바로 다스리지 못하면 자기가 죽습니다. 별 것을 다 할 줄 알아도 자기를 바로 다스리지 못하면 손해가 많다.
① 보통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다스리는 자기.(성질을 죽인다) 이것보다는 이런 것을 자유자재로 다스릴 수 있는 그 자기가 더 중요하다.(일반적 차원에서)
② 거짓을 다스리는 참 자기. 보통 사람은 못하는 능력이다.
③ 참 자기가 진리의 소원 목적대로 만들어지는 자기. 이게 능한 자기이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잠언서에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했다.
능한 자기가 어디서 되어 나오느냐? 만들어진 자기에서!
천하에서 제일 중요하고 어려운 것은 자기를 다스려 나가는 것.(만들어지는 자기) 그러나 세상은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자를 능한 자라고 한다.
사람은 모두 능한 자가 되려고 한다. 병 낫고 귀신도 쫓고 뱀에 물려도 안 죽고 사자 굴에 들어가도 안 물려 죽고 사람의 마음을 알고 벽을 통과하기도 하고 높은 담을 뛰어넘고 하는 그런 사람을 능한 사람이라고 한다.
빌4:13-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주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이 말을 어디다 써먹느냐? 무엇을 염두에 두고?
차력사가 기차레일이나 차돌을 손으로 끊는 그 능력 놀랍다. 하지만 ‘그가 진리대로 만들어졌느냐’ 하는 면에서는 다르다.
바울에게도 이적기사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 또 복음 전하는 능력도 있다. 이 능력을 주가 주었느냐?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주신 분이 도로 가져갈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울 속에 자체화로 되어 있는 것은 못 가져간다. 어떤 환경 처소에 있더라도 자유로이 적응하여 진리대로 움직여 나가는 이것은 못 빼앗아 가요. 이것이 능한 것이다.
능한 자: 하나님 없이 이적기사를 행할 수 있는 나를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빌4: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과 막힘이 없이 나가는 그 능력이 놀랍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과 막힘이 없이 진리대로 자유자재로 나가는 이것이 고상하다. 매력 있는 인간이 된다. 바울을 능한 자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고상한 것이다. 이적 기사보다도 더!
능한 자기: 바울이 이적기사나 능력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 인간 자기 스스로 행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잡고 쓰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 가지고 돈 받는 주의로 하지 않았고, 자기 사진과 이름을 종이에 박아서 ‘모든 병자는 나에게 오라’고 전봇대에 써 붙이는 그런 짓은 안 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하는 자들은 인간 자기가 했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거짓 능력이지만!
모세가 바위를 두 번 쳐서 물을 낸 것은(민20:) 능력을 행한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그렇게 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한 그 때의 성질은 만들어지지를 못했다. 자체화 되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가나안에 못 들어갔다.
능력을 행하는 것하고 자체화 되는 것하고는 구분이 되는 것이다. 능한 자와 능력자 역시 구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체화한 것과 능한 것과는 함께 있다.
능한 자는 하나님께서 붙잡고 쓰시면 이적기사를 행할 수 있다. 또한 능한 자는 하나님께서 붙잡고 쓰기 좋게 돼 있기에(만들어졌기에) 하나님께서 이적기사를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 없이 자기 스스로 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또 구분해야 될 것은(아까는 모세를 들어 말했지만) 거짓 선지자들도 이적기사를 행지만 능한 자는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능한 자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적기사를 나타내게 하셨는데 그러면 바울이 능한 자가 됐느냐? 그것과는 또 구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붙잡고 쓰셔도 능한 자가 안 될 수도 있다.(모세의 예-성질 부렸지) 그러니 구분이 된다. 하나님이 붙잡고 쓰셔서 이적기사를 행했어도 만능의 능력자라고 보면 안 된다.
빌4:11- 내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구원을 입은 것과 자체화 되는 능력과는 같이 있다. 어떤 면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어떤 면을 뽑아서 그 면에 대해 얘기하니까 그렇지요.
자칫 잘못하면 이적기사 행하는 것(물론 그 자체는 능력이다. 거짓 기사도 능력이 있어야 행하는 거고)과 능한 자를 같이 볼 수도 있지만 실은 다른 것이다.
바울을 능한 자로 만들어 주려고 복음의 전도자로 세우고 직책을 맡기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능한 자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아까도 말했지만 집사로 직분을 안 받았으면 일을 안 하고, 맡았으니 이제는 충성봉사 하고 자꾸 그렇게만 돌아간단 말이다. 직분을 받고 안 하는 것도 문제지만!
능한 자기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이게 주님의 뜻이고 복음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요약 정리했습니다)
15년 이상 계속 진행되는 김경형목사님의 목회자 신학생 대상 정례집회에 참석하실 분은 궁극교회 홈페이지에서 일시를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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