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伐草)와 가족사랑
수필가 이정식
일요일 이른 아침, 아들차를 타고 가족과 함께 집을 떠났다. 가는 곳은 내가 태어나고 조상대대로 살아온 선영(先塋)이 잠든 고향땅이다. 그토록 가물고 무더웠던 찜통더위도 처서(處暑)를 지나면서 조금은 기온이 내리는 것 같고, 약간 소낙비도 뿌리고 시원한 바람도 불었다.
추석(秋夕)이 오기 전, 벌초를 하려는 사람들의 자동차 행렬이 길게 늘어져 지루하기 만 했다. 하지만 모두 조상을 위한다는 마음은 다 같은 것이라 생각하니 흐뭇한 생각에 즐겁기만 했다. 어버이 살아 실제 섬길 일 못다 한 아쉬움에 묘소를 찾을 때는 불을 조심하고 때맞추어 풀을 베고 잔디를 가꾸려는 정성이 있어야한다. 벌초는 그래서 금화벌초(禁火伐草)의 준말에서 비롯되어 금초(禁草)라고도 한다.
조상의 산소에 벌초를 하는 일은 능률과 생산성을 추구하는 기업 활동이 아니다. 희생과 봉사를 하는 공익성도 아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존엄한 효심(孝心)과 가족사랑 문화가 싹트는 발원지가 아닐까싶다. 그렇기에 벌초는 자손만대에 이여 내려온 미풍양속 이 되고 있다. 정성을 다하여야한다. 잘못하면 처삼촌 벌초하듯 한다는 비판을 받기일수다.
우리가 조상을 숭배하고 내가 태어난 뿌리를 찾고 보호하는 일이 변해서는 안 되는 자기본연(本然)의 일이거늘 그것이 힘들다하여 고히잠든 선대의 유골을 파헤쳐 화장을 하고 납골당으로 모시고, 더하여 산천에 유골을 뿌리는 일을 흔히 본다. 벌초가 하기실어서인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차라리 벌초를 안 하려거든 자연 속에 그대로 두어라. 그것이 더 낳을 효(孝)가되리라. 이 세상 모든 일이 보다 빠르게, 보다 쉽게, 보다 편하게 사는 것만이 문명의 발달이겠는가. 고이 잠든 조상의 묘소는 우리 자손 된 자의 정신적인 지주(支柱)가 아닌가. 그곳에서 형제간의 우애도, 부모에 대한 효심도, 더나가 이 땅과 나라사랑의 마음도 싹틀 것 이 아닌가. 대행(代行)하는 벌초는 그런 가족 사랑이 없다. 그래서 일 년에 한번 아무리 바쁘고 힘들다 해도 가족이 힘을 합해 풀을 베고 다듬는 벌초를 이해득실의 이기적인 시각으로만 보고 어찌 필요 없는 일로만 치부 할 수 있는가.
높은 산위에 있는 할아버지 묘소를 찾아 오르는 산길은 험했다. 우거진 칡덩굴 으름덩굴 잡목이 앞을 가려 해쳐가며 오르자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래도 마음만은 기쁨이 가득하다. 형제와 손자 조카 모두 한 가족 이기에 그렇다, 나는 산을 오르며 조카들에게 삼촌들은 늙어가니 앞으로 너의 들이 합심하여 조상의 벌초는 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바쁘다 해도 벌초가 먼저다. 그것이 형제가 서로 우애를 돈독히 하고, 가족이 화목하고 행복해지는 길이다.
푸른 숲을 해치며 오르는 길에는 산새도 울었고, 맑은 물소리 도 들렸다, 나무 밑에는 쌓이고 쌓인 낙엽이 썩어 발이 푹 빠지는 것이 솜이불을 밟는 느낌이었다. 푸른 숲속 맑은 공기, 향기로운 풀 내음!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많은 것을 주고 가르쳐 준다. 그래서 철학자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 는 명언이 떠오른다. 나도 언젠가는 이 고향 땅 흙으로 돌아가리라. 도공(陶工)이 흙을 빚어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고 그것이 깨지면 흙으로 돌아가 듯 내 몸도 늙어 수(壽)를 다하면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그것이 하늘이 내게 주신 최대의 행복이 되리라.
높은 산 묘소에서 바라보는 고향마을! 내가자란 유년시절, 하나하나 보이는 곳곳마다 정든 추억이 모닥불처럼 피어오른다. 벌초는 예초기 2대로하니 한 시간 만에 끝이 나고 묘소 앞에 모여 제(祭)를 올렸다. 마을로 내려오니 삼겹살을 굽고 과일을 깎으며 즐거운 점심식사 파티가 벌어졌다. 떡 빵 등 먹거리가 즐비하고 모두 집에 갈 생각은 않고 조상님과 벌초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서로가 해어지기 섭섭해서 인가. 내년에 다시 만남 을 약속하며 정든 고향을 떠나왔다. 그립다 내 고향산천!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낙비 한줄기가 시원하게 내린다. 쏘다지는 빗줄기속에 자꾸 고향 산천 벌초하던 가족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 거리네…….2016.9.4 일요일에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