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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러일전쟁(露日戰爭, 1904년~1905년)-러시아ㆍ일본의 대립
러시아의 만주점령
의화단 사건이 만주지역으로 확산되면서 건설 중이던 동청철도가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1900년 7월 중순에는 중국군이 헤이룽 강(黑龍江)을 항행 중이던 러시아 기선에게 포격을 가했고 아이훈 건너편의 러시아 도시 블라고베시첸스크(Blagoveshchensk)를 포격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군대를 파견하고 만주 전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연합군이 베이징에서 철수한 이후에도 군대를 만주에 계속 주둔시켰을 뿐 아니라 베이징에서 철수한 병력을 만주에 다시 주둔시킴으로써 러시아 주둔군은 1만 2,000명에 달하게 되었다.
8월에 러시아는 만주에 질서가 회복되면 철군하겠노라고 형식상 선언했으나 주둔은 계속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동북아 정책은 혼돈 상태에 있었다. 람스도르프 외상, 위테 장상(藏相) 등은 철수를 주장한 반면에 쿠로파트킨(A.N. Kuropatkin) 육상(陸相)을 위시한 만주에 있던 군부들은 계속 주둔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베조브라조프(A.M. Bezobrazov)와 같은 황제측근의 모험주의자들이 적극적인 만주 개입을 주장하고 있는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8월의 철군 성명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차제에 만주에서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려고 노력하였다. 1900년 9월 극동총독 알렉세예프(E.I. Alekseev)와 펑톈 장군(奉天將軍) 쩡치(增祺)의 조약교섭, 1901년 2월 람스도르프 외상과 러시아 주재 중국공사 양위(楊儒)의 교섭, 그리고 1901년 10월 리훙장과 중국주재 러시아 공사 레사르(P.M. Lessar)의 비밀교섭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러시아의 이런 행동이 열강의 반대에 부딪친 것은 물론이다. 미국이 다시 문호개방과 영토보전을 선언하고 1900년 10월에는 영국과 독일이 협정을 체결하고 러시아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중국의 하천 및 연안에 위치한 항구들은 모든 국민의 무역과 정당한 경제활동에 자유로이 개방한다. 양국은 중국의 소요를 이용하여 영토상의 이익을 획득코자 하지 않으며 다른 국가들도 그러한 것을 획득하면 안 된다.” 이것이 러시아를 지목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양국은 그들의 협상내용을 열강에 통고하고 동의를 구하였다. 미국과 일본은 흔쾌히 수락하였고 러시아도 수락한다고 답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만주점령을 계속하자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체결하게 된 사정은 이미 전술한 바있다.
만주 철병에 관한 중국 · 러시아의 합의(1902년 4월 8일)
러시아는 영 · 일 동맹 체결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영 · 일 동맹이 체결되자 프랑스 · 러시아 양국은 3월에 중국에서 새로운 분규가 있는 경우 양국은 서로 협의한다고 선언한 것도 전술한 바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동북아 문제로 영국과 대결할 형편은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이런 선언은 아무런 현실적인 의미를 가질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러시아에서는 일본에 강경한 태도를 취할 것이 아니라 신중하고 온건한 정책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위테 장상, 람스도르프 외상, 쿠로파트킨 육상이 그들이었다. 쿠로파트킨은 당초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었으나 영 · 일 동맹 체결 이후 태도를 바꾸었다. 이들 온건파의 주장에 따라 만주 철병이 결정되었고 중국 정부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철군합의가 이루어졌다.
(1) 만주는 중국의 일부로서 중국 정부의 권리회복을 승인하고 러시아 군대는 점령 이전의 상태로 복귀한다.
(2) 이 조약이 조인된 후 6개월 이내 즉 1902년 10월 8일까지 펑톈 성(奉天省) 서남부로부터 러시아군은 철수하고, 그 후 6개월 이내 즉 1903년 4월 8일까지 나머지 펑톈성 지역과 지린 성(吉林省) 전역으로부터 철수한다. 그리고 그 다음 6개월 이내 즉 1903년 10월 8일까지 헤이룽장 성으로부터 철수한다. [다시 말하자면 만주의 러시아 군대는 6개월씩 3번의 시기로 나누어 모든 병력을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3) 러시아 군대가 철수한 후 중국 정부가 만주에서 군대를 증감하는 경우에 이를 러시아 정부에 통지한다. [이 내용은 중국 주권에 대한 중대한 제약이었다.]
러시아는 1기 철수를 약속대로 이행하였다. 그러나 2기 철수는 예정대로 이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펑톈 성 남부와 지린 성 전역을 계속 점령하였다. 그리고 2기 철병의 만료일인 4월 8일에는 만주를 사실상 러시아의 보호 밑에 두려는 이른바 7개항의 요구를 중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물론 이 요구는 영 · 미 · 일 등의 항의로 중국이 거절하였다. 러시아 내에 강경파가 다시 등장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새로운 동북아 정책노선
이즈음 러시아 국내에서는 온건파가 물러나고 강경파들이 대두해 니콜라이 2세의 신임을 얻고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베조브라조프(A.M. Bezobrazov) 국무비서(國務秘書, Staatssekretär), 플레베(V.K. Pleve) 내상(內相), 아바자(A.M. Abaza) 제독 등이 그 핵심인물이었다.
베조브라조프는 조선이 러시아인 브리네르(Yu.I. Briner)에게 1896년에 양여한 압록강 재목 벌목권을 인수하고 1902년에 압록강 벌목회사를 설립하였다. 이 회사의 주주들은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즉, 이그나티예프(A.P. Ignatiev) 경, 헤세(P.P. Hesse) 궁정수비대장, 겐드리코프(V.A. Gendrikov) 의전실장, 아바자(A.M. Abaza) 제독, 유수포프(F.F. Yusupov) 공, 본리아르리아르스키(V.M. Vonliarliarsky), 마튜닌(N.G. Matiunin) 전 조선공사, 세레브리아코프(M.A. Serebriakov) 기병대 대령 등이 주주였다.
이들이 러시아가 만주에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된다고 주장한 것은 그들의 입장으로 보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2기의 철병을 적극 반대하였다. 펑황 성(鳳凰城)의 군대를 압록강 지역으로 이동시킨 것도 이들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하여간 베조브라조프가 계속 만주와 조선을 점령해야 된다는 모험주의적인 노선을 주장하고 이것이 러일전쟁 발발의 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러시아 정부는 1903년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중요한 어전회의를 열어 그들의 극동정책을 토의하였다. 여기에서 러시아의 새로운 동북아 정책 노선이 결정되었다. 이 새로운 노선은 매우 모험주의적이고 일본과의 대결을 전제로 한 정책이었다. 특히 5월의 회의내용에 관해서는 베조브라조프 자신이 회의록을 작성했기에 그 신빙성이 의심되지만 만주 전역을 러시아의 정치 · 경제적인 세력범위 밑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에 회의 참석자 전원이 동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때 신의주 외항인 용암포(龍岩浦)에 러시아 병사 수십 명이 압록강의 삼림(森林)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진출하였다. 5월의 일이었다. 러시아는 더 나아가 용암포 조차를 요구하고 8월에 조차조약을 체결해 군사기지로 사용코자 했으나 영 · 미 · 일의 반대에 부딪쳐 조차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본 정부를 크게 자극한 것은 물론이고 이를 계기로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일본은 러시아와의 대결을 각오하게 되었다. 또한 6~7월에 이르러 러시아가 건설 중이던 동청철도와 뤼다 지선(旅大支線)이 거의 완공됨으로써 철도의 보호라는 측면에서도 러시아 국내에서는 러시아 군대의 철수를 반대하는 의견이 강력히 대두되었다.
뤼순(旅順) 회의(1903년 7월)
이와 같이 동북아 문제에 의견이 분분하게 되자 니콜라이 2세는 위테, 쿠로파트킨, 베조브라조프 등을 현지로 보내 조사한 후 보고토록 하였다. 이들의 복명서는 물론 상반된 결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만주와 조선 문제에 관해 현지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7월 초 뤼순 회의가 그것이었다. 쿠로파트킨, 알렉세예프(E.I. Alekseev) 극동총독, 레사르(P.M.Lessar) 중국 주재 공사, 파블로프(A.I. Pavlov) 조선 주재 공사, 보가크(K.I. Vogak) 소장, 그리고 베조브라조프 등이 참석한 주요한 회의였다.
쿠로파트킨의 희고록에 따르면 자신과 알렉세예프는 베조브라조프 계획에 극력 반대했으며 회의 참석자들은 압록강 벌목회사가 순전히 상업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다고 전한다. 쿠로파트킨이 베조브라조프 밑에서 군사, 정치임무를 맡고 있던 한 중령에게 그런 일을 그만두든지 군복을 벗든지 하라고 명령하자 그는 군복을 벗겠노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고 한다. 압록강 벌목회사에 상당한 군인들이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뤼순 회의에서는 ① 북만주에 한하여 러시아는 점령을 계속하며, ② 조선 북부지역 점령은 러시아에게 이득이 되지 못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 회의 이후에도 남만주지역에 러시아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러시아의 이런 대담한 행동은 일본 군사력을 매우 보잘것없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던 데에서 연유되었다. 쿠로파트킨 같은 비교적 온건한 장군도 “우리들은 13일 이내에 40만의 군대를 일본 국경에 집결시킬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적을 격파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3배나 더 많은 병력이다. 전쟁은 군사적인 산보에 불과할 정도이며 독일 · 오스트리아 국경으로부터 우리의 군대를 움직일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본의 강경론 대두
일본은 중일전쟁 직후부터 러시아에 대한 전쟁 준비에 착수하였다. 육군참모차장 가와카미(川上操六)가 이 계획을 담당하였다. 그의 구상은 중일전쟁 종결로부터 5년 후 러시아와의 전쟁을 가상하고 6개 사단을 증강하며 군사제도는 독일 제도를 대폭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러시아가 중국에 이른바 7개 항을 요구한 직후 일본의 수뇌들은 다시 한번 만한교환(滿韓交煥)에 입각해 러시아와 절충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4월 21일 교토(京都)에 있는 야마가타(山縣有朋)의 저택인 무린암(無隣庵)에서 가쓰라(桂太郎), 이토(伊藤博文), 고무라(小村壽太郎) 등 4인의 회담이 열렸고 여기에서 러시아 정책에 관한 기본구상이 결정되었다.
조선 문제에 관하여는 러시아가 일본의 우월권을 반드시 인정해야 하며 이에 관하여는 일보의 양보도 없다. 만주 문제에 관하여는 러시아의 우월권을 일본이 인정하며 이 기회에 조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다.
이런 4인회담의 결론에 따라 6월 23일의 어전회의에서도 같은 결론을 내리고 고무라 외상에게 러시아와의 교섭을 맡기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즈음 일본 국내에서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었으며 호전집단들이 속출하였다. 1900년에 이미 중국보전과 조선보호를 내걸은 국민동맹회(國民同盟會)란 것이 학습원 원장(學習院 院長) 고노에(近衛篤麿)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러시아가 만주점령을 계속하자 이 단체는 도야마(頭山滿) 등 현양사(玄洋社)의 호전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또 도쿄 대학, 와세다 대학 등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개전을 주장하는 칠박사(七博士)들이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육군, 해군, 외무성 등의 강경론자들이 그룹을 만들어 개전을 주장하고 나섰다. 육군의 다나카(田中義一), 해군의 아키야마(秋山眞之) 등이 이른바 호월회(湖月會)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러시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전쟁을 주장하는 유력한 그룹들이 실권을 잡게 되는 형국이었다.
러일교섭(1903년 8월~1904년 1월)
개전에 이르기까지 러 · 일 양국은 수차에 걸쳐 협상을 전개하였다. 8월의 일본 제의, 이에 대한 러시아의 반대제안, 그리고 1, 2차에 걸친 일본 제안, 이에 대한 러시아의 회답, 끝으로 양국의 최후제안 등 4차례에 걸친 주요한 협정 제안이 교환되었다. 일본의 기본입장은 조선을 자국의 보호령으로 하고 만주에서 러시아의 우월권은 인정하되 기회균등 원칙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러시아는 만주에서의 배타적인 권리를 요구함과 아울러 조선 북부지역에 중립지역을 설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 조선에서 일본의 정치 · 경제적인 우월권은 인정하되 군사적인 우월권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양국은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전쟁의 길을 걷게 되었다. 양측이 제출한 제안들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8월 중순 일본은 협정안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조 · 중 양국의 독립보전과 기회균등, 조선에 있어서 러 · 일 양국의 이익보호 조치의 필요 인정, 조선에 대한 일본의 조언과 원조제공의 권리 인정 등이었다. 그 즈음 러시아는 새로 창설된 극동총독부가 동북아 문제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러일교섭을 도쿄로 옮길 것을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동북아 문제의 실질적인 담당은 극동총독으로 임명된 알렉세예프(E.I. Alekseev) 총독과 도쿄 주재 로젠(R.R. Rosen) 공사가 맡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제도적인 측면에서 혼돈상태에 있었는데 극동총독부 이외에도 베조브라조프의 의견에 따라서 극동위원회라는 기구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위원회는 육상, 외상, 장상, 해상 등 관계대신들이 구성원이었으나 실제로는 아바자 제독이 운영하였다. 외무성, 극동총독부, 극동위원회 등 세 기관이 러시아의 동북아 정책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여간 러시아의 회답은 10월 초에 제시되었다. 만주는 일본의 세력범위가 아니라는것, 조선에서 일본의 군사 활동에 대한 일정한 제한, 39도 이북 북조선 지역의 중립지역 설정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에 고무라 외상은 제1차 수정안을 제시했는데 이 제안은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었다. 중국의 독립, 영토보전도 규정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러시아의 회신은 지연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현지 첩보기관은 러시아의 극동군사력이 계속 증강되고 있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하였다.
12월 중순에야 제시된 러시아의 반대제안은 중국에 관하여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고 단지 조선 문제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 제안은 39도 이북의 중립지역 설정, 조선에서 일본의 군사활동에 대한 제한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일본이 수락할 수 없는 것이었다. 12월 하순 일본이 제2차 수정안을 내놓았는데 이에 대한 1904년 1월 초순 러시아의 회답내용도 기왕의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일본은 1904년 1월 12일 어전회의를 개최하고 러시아와의 국교단절을 토의하였고 최후로 러시아에 협상을 제의한다고 결정하였다. 그 다음날 고무라는 만한교환론에 입각한 종전의 주장을 최후의 제안이라고 로젠 공사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러시아의 회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2월에 들어서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러일전쟁은 일본의 팽창주의 노선과 베조브라조프 일파의 모험주의 노선에 좌우된 당시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인해 발발하였다. 러일전쟁 발발원인에 관한 전통적인 의견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즉 일본의 북진정책, 러시아의 전통적인 남하정책, 그리고 베조브라조프 일당의 모험주의 노선에 전쟁발발의 책임을 묻는 의견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은 위의 세 가지 측면 중 그 어느 하나에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치구조가 지니고 있는 대외팽창적인 성격, 그리고 1903년 4~5월 베조브라조프 일당의 주장에 따라 채택된 러시아의 새로운 노선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러시아 · 일본의 대립 (세계외교사, 2006. 5. 25., 서울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