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6월 10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마르코 14,12-16.22-26)
he took bread, said the blessing,
broke it, gave it to them, and said,
"Take it; this is my body."
Then he took a cup, gave thanks,
and gave it to them,
and they all drank from it.
He said to them,
"This is my blood of the covenant,
which will be shed for many.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과 법규를 일러 준다. 백성은 ‘주님의 명령’에 따를 것을 약속한다. 감격한 모세는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약속의 증표로 삼았다. 그런 뒤 제사를 바치며 백성의 약속이 견실해질 것을 기도하였다(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대사제로 오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단 한 번의 제사로 인류를 해방시키셨다. 염소와 황소의 피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새로운 계약의 중개자이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신다.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신다.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당신의 피라고 또 말씀하신다. 성체성사의 신비가 이루어지는 장면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많은 사람이 성숙해지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믿음의 길을 걸었지만 성숙한 신앙인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적 소식’에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신비스러운 소문’에는 호기심 이상으로 반응합니다.
성체성사의 신심이 부족한 탓입니다. 교회 내에 신심 활동과 쇄신 운동이 많지만 그 귀착점은 언제나 성체 신심입니다. 성경 속의 예수님과 ‘성체의 예수님’은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병자들을 고치시고 악한 영을 몰아내시던 분과 성체성사의 예수님은 결코 다른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힘은 느낄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 때문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이러한 신비를 묵상하는 날이지요. 그러니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예수님의 힘을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함께하셔야’ 인생과 신앙이 성숙함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몸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당신께 오라는 적극적인 말씀입니다. 정성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이 그분께로 가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성체 신심은 강화됩니다. 깨달음을 만납니다. 신앙의 기쁨이 주어집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면 결국은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
중국 송나라 시대의 어느 여인이 지은 아름다운 시가 기억납니다. “진흙 한 덩이로 당신의 모습을 빚고 나의 모습을 빚습니다. 그리고 그 진흙을 한데 짓눌러 뭉갭니다. 그러고 나면 내 안에 당신의 모습이 있고, 당신 안에 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남편과 하나로 있고 싶은 여인의 간절한 사랑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요 내 피다.” 우리와 함께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먹히는 사람들
-이준석 신부-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히 ‘성체성사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월절 만찬에 먹어야 했던 누룩 없는 빵을 당신의 몸으로
소개하셨습니다. 또한 포도주를 새로운 계약을 맺는 당신의 피로 소개하시면서
과월절 저녁 어스름에 스스로를 희생하여 식탁에 올라오는 어린 양과
동일시 하셨습니다. 이로부터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용서받고 구원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분의 희생과 내어주심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계약의 당사자가 되었고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토록 큰 은혜를 받아 누리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몸, 마음, 시간, 노력, 열정을 다른 이를 위한 양식으로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모든 이가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려 하고, 섬기기보다는
지배하려 하며, 먹히기보다는 잡아먹고자 하는 치열하고 냉정한 세상에서는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을 각오하는 굳은 결심이
필요합니다. 크게 받았으니 크게 돌려드리겠다는 굳은 다짐이 필요합니다.
‘나눔의 삶’ 깨닫고 실천하자
‘나눔의 삶’ 깨닫고 실천하자
-배광하신부-
영원한 사랑의 음식
▤사랑의 완성체인 성체
이탈리아의 영성가인 ‘카를로 카레토’는 그의 책 「보이지 않는 춤」에서 이 같이 말합니다. “내 아버지, 우리 아버지, 이 말에 모든 계시가 요약되어 있고, 성경 전체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또 기쁜 소식의 내용이 담겨 있고, 모든 두려움의 종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참되고 본질적인 의미에서 또 진정한 생명의 의미에서 내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내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나를 바라보십니다. 하느님은 내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내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내가 그분과 영원히 함께 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이 내 아버지시라면 나는 더이상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인 우리 모두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싶어 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의심이 많은 우리에게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루카 11,11-12)
그리고 당신 사랑의 가장 큰 절정인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을 송두리째 주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사랑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님 사랑을 보답하는 길은 그분들이 나에게 해 주신 가없는 그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을 결코 다 갚을 수 없습니다. 그분들의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작은 보답이라도 드릴 수 있는 것이고, 불효를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을 또 다른 세대에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셨으며, 당신의 사랑을 보고 배운 우리들이 그 사랑을 또 다시 전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같은 내리사랑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기억입니다. 아름다운, 감사로움의 사랑을 잊지 않을 때, 사랑은 이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성 바오로는 기념과 기억의 제사, 사랑의 성체성사를 기억하며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3-24).
▤평화와 구원의 음식
히브리 말로 평화는 ‘샬롬’입니다. 샬롬은 ‘완전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가득차 모자람 없다는 뜻입니다. 엄마의 젖을 모자람 없이 만족하게 먹은 아기의 잠든 모습을 연상하면 되겠습니다. 그때 아기의 모습은 평화스러움 그 자체입니다. 비취색의 푸른 바다와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평화를 느끼는 것은 그 자체로 모자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평화이십니다. 하느님 그분이시야말로 가장 완전한 충만함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충만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당신의 충만함을 온전히 나누어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매일의 현실에 나타나는 성체성사의 은총인 것입니다. 이 같은 엄청난 사랑을 거저 얻어먹고 영육의 건강을, 삶의 충만함을 되찾은 우리는 반드시 나누어야 할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속량 제물이 되시어 나누셨습니다. 이를 오늘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히브 9,14)
‘김지하’ 시인은 자신의 시 「밥」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 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 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우리는 분명 주님에게서 모자람이 없는 충만함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때문에 이제는 이 은총을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영원한 생명의 피를 우리에게 주실 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죄인이지만, 이 지상에서 감히 체험하지 못할 천상의 음식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모든 것이 충만한 평화와 기쁨, 내어 주심의 완전한 사랑의 감격과 행복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충만한 기쁨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
나눌수록 커지는 성체의 신비"
-이기양신부-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이나 아쉬운 사람과 작별할 때 가장 아끼는 물건이나 아주 특별히 기억될만한 것들을 선물로 주고받습니다. 저에게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송별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신부가 돼 처음 사목을 했던 성당을 떠나던 날이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환송을 나왔는데 사람들로 꽉 차 있는 성당 마당에서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차 유리창을 막 두드리며 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신부님!"
창문을 열었더니 시커먼 봉지 하나가 쑥 들어왔습니다. 뜨거워서 만지지도 못하고 옆 좌석에 놓고 할머니와는 변변히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떠나오고 말았습니다. 새 임지 성당에서는 환영 인사로 분주했고, 이틀이 지난 뒤 짐정리 도중에 그 봉투를 발견하고 열어보니 그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만두였습니다.
생각해보니 시장에서 만두장사를 하던 할머니가 제게 이별 선물로 갓 쪄낸 뜨거운 만두를 한 봉투 가득 담아오셨던 것입니다. 이틀이나 지났기 때문에 만두는 모두 상해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할머니께 얼마나 고맙고 죄송했는지 모릅니다. 사제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이별의 선물을 주고받았지만 지금도 제일 기억나고 잊히지 않는 선물 중 하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뜻을 따라 이 세상을 떠나 승천하셨습니다. 떠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당신의 '몸'과 '피'를 주셨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손수건이나 반지, 책이나 필요한 물건 등은 줄 수 있지만 내 몸과 피를 선물로 내준다는 것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해 보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성체를 모시면서 그분과 일치되고 한 몸이 돼서 그분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성체의 삶을 다짐하는 날이 바로 오늘 성체성혈대축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나는 꽃이에요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을 솔방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어요.
그래도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예요
가을이 오면….
김용석 시인의 '가을이 오면'이라는 동시입니다.
꽃잎도, 꿀도, 향기도 남김이 없이 다 나눠줬지만 정작 잃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꽃은 노래합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기뻐합니다. 꽃의 신비에 대한 이 노래가 성체성사의 신비를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아낌없이 내어줄 때 나는 성장하고, 풍성하게 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남기신 예수님의 선물, 성체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더 데레사가 한국에 오셨을 때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마더 데레사는 성체를 하루에 두 번 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듣고 보니 하루에 미사를 두 번 참례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아침 미사 때 성체를 모시며 예수님과 만나고 그 후에는 하루 일을 하며, 즉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며 그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예수님을 두 번씩 만난다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소외받고 죽어가는 이들과의 만남이 두 번째 영성체라고 이야기하던 마더 데
레사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오늘은 성체성혈대축일입니다. 고통 받는 이웃과의 나눔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내 방이 어디 있느냐?”
-구요비신부-
아주 경건하고 독실한 개신교 형제들 중에 가톨릭의
혼인 미사나 장례 미사에 참여하였다가‘신자 아닌
분들은영성체를할수없습니다!’라는안내말을들으며깊
은 슬픔을 느낀다는 말을 듣곤 한다. 한 개신교 신학자께서
는‘성체성사는칼과총탄보다도강합니다’라고하였다.
미사 예식 중에 집전자인 사제만이 개인적으로 바치는 기
도들이 있다. 예물준비 때에 사제는 포도주에 물을 한 방울
섞으며‘이 물과 술의 신비로 우리도 우리의 비천한 인성(人
性)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참여케 하소서!’하
고 속으로 기원한다. 사실 내게는 이 순간이 미사 중에 가장
행복한 때이다! 하찮은 물질인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를 이룬다는 신앙 고백은 이렇게 우리 인간
성(人性)이하느님의신성(神性)으로변용(變容)될수있다는
희망뿐 아니라 온 세상과 우주 자체의 진보와 변모로 우리
의시야를열어준다.
신토불이(身土異)가 말해주듯 어쩌면 인간의 몸과 정신
도 그가 태어난 땅의 소출을 섭생할 때에 최상에 이를 수 있
다. 이렇듯 하느님의 모습으로 태어난 인간이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살 때에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
재로 나날이 성장해 간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천사의 양식
(Panis Angelicus), 신령한음식이라고노래하는것이다.
빵과 포도주가 그분의 몸과 피로 실체적으로 변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로 말하자면 일종의‘핵분
열’과 같은 근본적인 변화의 원리가 창조 안에 도입된다. 이
변화는 온 존재의 핵심에 파고들어 실재를 변화시키는 과
정,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시
기까지(1코린 15,28)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시작한다
(사랑의성사p.32).
그래서우리가 단지영성체로주님의몸과피를받아 모시
는수동성에머물러서는안될이유가여기에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 19)’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행위에 우리를 끌어들인다. 그러기에 당신께서 참으로 원
하시는 봉헌물은 이 세상의 성장, 우주 만물의 진화라는 거
대한 흐름 속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이를 통해
이루어지는그성장뿐이다(떼이야르드샤르댕).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익명의 사람이 제공
하는 큰 이층 방에서 거행되었다고 전한다(15절). 예수님은
이 집주인에게‘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14절)’하고 물으신다. 이 부유한 주인은
기꺼이 자신의 제일 큰 방을 내어 드린다. 이 주인은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자신을 개방하고 주님과 제자들을
영접하는관대하고너그러운마음을보여주고있다.
이는‘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22절)’라고 말씀하시는 주
님의 마음과 상통한다. 예수님의 자기증여, 즉 자신이 지니
고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다 내어주심을 닮고 있다. 이 자기
증여의 텅 빈 공간 안에 새로운 인간의 탄생과‘새 하늘과 새
땅’의도래가이루어지는것이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
께먹고, 그사람도나와함께먹을것이다’(묵시 3,20).
성체의 삶
-김찬선신부-
성체와 성혈의 삶을 사는 한 자매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이 삶을 살게 된 데는 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여고생 때 동무 따라 성당 갔다가
흰 미사수건이 아름다워 영세를 하였는데
결혼하고선 서울로 와 이내 성당을 잊고서 살았습니다.
남편이 큰 기업의 과장이어서 먹고살만하였지만
자매님은 여장부 기질이 있어서 일찍부터
학교에서는 자모회 회장으로 활동을 하였고,
사회에서는 사회활동과 정치활동도 하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남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자녀 교육 문제에서도 남편은 평범하게 아이들을 키우려하였고
자매님은 그야말로 치맛바람 일으키며 사교육이 지나쳤습니다.
가정 경제면에서도 남편은 자기 월급으로 자매님이 만족키를 바랬지만
자매님은 남편의 월급으로 만족할 수 없어 학원을 열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부부는 서로 의견을 날 세우며 다투었습니다.
문제는 사업을 확장하면서부터였습니다.
남편이 만류하는데도 자매님은 무리하면서까지 식당을 열었고
이것이 잘 되지 않아 집까지 담보를 잡히게 되었는데
결국은 모든 것을 다 날리게 되었습니다.
집이 넘어가기 전 날 자매님은 자살을 해야겠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발길이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 살던 고향으로 향하더랍니다.
여기저기를 돌다보니 어렸을 때 다니던 성당이 눈에 들어와
성당 안으로 들어갔고, 성체 등에 이끌려 성체 앞에 앉았습니다.
성체 앞에 앉아있으니 여고생 때가 떠오르며
그때는 자신이 그렇게 깨끗했는데
지금은 어쩌다가 이렇게 욕심 사나운 사람이 되었는지
후회가 되어 하염없이 눈물이 나더랍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는데 문득 옛날 미사 때
신부님이 성체를 축성하며 하시던 말씀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다.”
이 말이 떠오르면서 “그래, 나는 오늘 죽었다!
나를 위한 나는 오늘로 죽었고,
이제부터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남편으로부터 무슨 심한 얘기를 듣더라도 다 받아들이고
용서를 청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용서를 청하니 남편은 전혀 나무라지 않고
집을 잃었지만 당신을 새롭게 얻어서 오히려 기쁘다는 것입니다.
이후 자매님은 햇빛 잘 들어오던 큰 집에서
반 지하 셋집으로 이사를 가서 살게 되었는데
작은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이 그렇게 고맙고
사는 것은 불편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편하더랍니다.
이후 자매님은 정말 가족을 위해서 자기를 바치는 삶을 사셨고
여장부 기질이 여전하셔서 그런지
자기도 어려운데도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헌신적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어 가정의 평화를 가져다주고
자기를 바쳐 사람들을 살리는 삶,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남겨주신 성체의 삶이 아닐까,
오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묵상해봅니다.
- 강선남-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의 수난사는 유다 지도자들의 음모로 시작됩니다.(14, 1 - 2) 다음은 예수님에 대한 음모와 유다가 배반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베타니아에서의 저녁 식사를 중심으로 하는 첫 번째 이야기에 이어 두 번째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마지막 만찬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14, 12)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에게 “도성 안으로 가거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 를 만나면 그를 따라가서,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 에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방이 어디 있는지’ 물으라고 하십니다(13 - 14절).
그 ‘집 주인’은 제자들에게 자리를 깔아 준비한 큰 이층 방을 보여주었습니다(16절). 루카 복음사가(22, 8)는 여기에 나오는 ‘두 제자’ 를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세 복음서의 병행구절에서 모두 ‘그 집의 주인’ 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한편 마태오는 마르코와 루카와는 조금 다르게, 예수님께서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당신과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방을 요구하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마태 26, 18)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기 위해 준비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마르 11, 1 - 2) 그때에도 예수님의 기적적인 예견력을 볼 수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함께 보낼 마지막 시간이 이렇게 차질 없이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은 그 집에서 파스카 음식을 드시고 계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14, 22) 또한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린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24절) 루카는 이 파스카 축제에서 행해지는 특별한 예식 배경을 이에 앞서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루카 22, 14 - 15) 마태오 역시 이 만찬을 준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의 때가 가까웠다.’ 는 표현을 넣어 당신의 고난이 가까웠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태 26, 18 참조).
최후 만찬에 대한 이 이야기는 두 가지 요소를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빵에 대한 행위와 말씀이요, 다른 하나는 잔에 대한 행위와 말씀입니다. 이 행위들은 ‘들고’, ‘찬미드리고’, ‘떼어’, ‘주시다’ 라는 팔레스티나 지방의 유다인들의 식사 순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권하시고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시는 말씀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축복하신 빵을 손에 드시어 함께 나누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닌 의미는 이 빵이 그분의 몸이라는것 그 이상입니다. 그 다음 잔을 두고 하신 말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을 통해서만 비로소 예수님의 ‘몸’ 이 어떤 한 사건과의 특별한 관련 속에서 이해되고 있음이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죽음에 내맡겨진 (루카 22, 19 참조) 예수님의 몸을 말합니다.
성찬의 빵과 성찬의 잔이 함께 받아들여질 때 그 의미가 완전해질 것입니다. 잔과 관련한 예수님의 행동은 빵에 대한 표현과 거의 동일한 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어 주신 잔은 돌아가며 손에서 손으로 건네집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이것을 마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의‘계약의 피’ 를 담고 있는 잔은 제자들을 위해 준비된 까닭입니다. 같은 잔을 마시는 제자들은 그분의 피와, 이로 맺어지는 하느님과의 계약에 참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리는 계약의 피’ 는 이집트 탈출이라는 성경 전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으며 희생제물의 피를 백성에게 뿌려주고 선언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 8) 그러나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이 계약은 이스라엘의 죄로 거듭 깨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오래 참으시는 하느님은 예언자들, 특히 예레미야를 통하여 새로운 계약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주겠다.”(예레31, 31 - 33)
루카는 이 잔이 “내 피로 맺는 새 계약” (루카 22, 20) 이라고 좀 더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동체에 약속하신 새로운 계약은 그분의 피로써 확실하게 체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비로소 뚜렷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고난 받고 죽은, ‘주님의 종’ 이 떠오릅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 53, 4) 이어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르 14, 25)고 하십니다. 새 계약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에서 성취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과 더불어 주님의 식탁에 앉습니다. 빵과 잔을 나누며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봅니다. 그 얼굴 너머로 주님의 얼굴이 보입니다.
“시속 0km”
-이우진신부-
요즘 ebs 교육방송이 변화하고 있다. 그저 입시를 위한 강의나 보충수업 같은 방송에서 벗어나 내셔널 지오그래피나 디스커버리 채널처럼 볼 만한 다큐멘터리를많이 제작하여 다방면으로 알고 싶은 욕구들을 자극하고 있다. 얼마 전 보았던 “시속 0km”라는 5분짜리 짧은 영상은 내게 큰 화두 하나를 던진다. 내용인즉 이러하다.
“이동은 인간의 본능, 삶을 위한 수단. 인간은 다른동물들과 경쟁하며 살아왔다. 하버드대 리버만 교수는우리의 조상들은 청소동물로 맹수가 먹다 남긴 고기를먹기 위해 하이에나와 경쟁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한계, 아무리 빠른 인간도 시속 36km를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의 문명은 이 한계를 극복하고먹잇감을 얻게 되었다. 21세기 잦은 전쟁을 통해 성취한 스피드 시속 8,000km(음속의 8배). 인간은 동물들을 제압하고 이제는 서로를 제압하기 위해서 더욱더 치열하게 경쟁하고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속 0km,나무는 태양, 물, 이산화탄소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이동하지 않고, 다른 생물을 잡아먹으려 하지 않으며, 지구 생명체 중 가장 크게(아메리카 삼나무 : 키 84m 둘레 31m) 지구 생명체 중 가장 오래(브리스톨콘 소나무: 추정 나이 5000년) 살 수 있다. 시속 0km, 다른 생물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영양분을 만들고 섭취하는 나무는 지구상에서 가장 독립된 생명체다. 시속 8,000km,
인간이 속도를 높이며 환경을 개척하는 이유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에 가장 종속된 생명체다.”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뛰어나다고 생각했던 인간. 하지만 또 다른 기준으로 볼 때 가장 종속되어 있고 의존적이며, 나약하고 독립적이지 못한 존재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내가 육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경쟁해서 다른 육을 잡아먹어야 하는 존재. 인정하기 싫은 불편한 진실이라고나 할까. 나무처럼 살 수는 없을까. 육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너무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이 또한 인정하기 싫은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 살기 위해서 존재하기 위해서 경쟁할 수밖에 없고 잡아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 영적이 배고픔 또한 마찬가지리라. 사랑을 성취하고 쟁취하여 얻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치열
하게 발버둥치고 경쟁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자 순리라고, 오랜 세월에 걸쳐서 습득해온 인류의 생존 방식이라고 이야기할 지도 모르겠다. 나무처럼 살 수는 없을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내어주신다. 경쟁하지도 잡아먹으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을 내어주신다. 그래서 그 사랑과 마음은 그 어떤 생명체보다 크게, 넓게,깊게 드러난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을 산 제물로
기쁘게 내어놓으신 사건, 그것이 성체 성혈 대축일 오늘의 화두인 것이다. 종속되어 있고 의존적이며, 나약하고 독립되지 못한 우리가 육적으로 영적으로 존재할 수 있기 위한 어떤 숙명과 같은 불편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희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모습처럼 자신을 서로에게 내어 놓고 희생하게 될 때, 그 불편한 진실은 오히려 우리를 서로 하나로 일치시켜주는 매듭이 된다. 이매듭은 우리를 서로 이어주고, 하느님과 우리를 일치시킨다.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생각난다.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셨던 나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성체와 성혈을 오늘도 받아 모시며,
그 사랑에 감사드리고, 그사랑을 나의 가정과 이웃을
위해 살 수 있도록 기도하고다짐하는 한 주간 됩시다.
아멘.
새로운 계약의 피
-전삼용신부-
일주일에 8달러짜리 셋방에 사는 델라와 짐은 가난한 신혼부부입니다. 이 두 사람은 가난해도 서로를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델라는 남편 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기 위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팝니다. 그 머리카락은 짐이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금시계와 함께 부부가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보물이었습니다.
델라가 머리카락을 팔아 준비한 것은 시곗줄이었습니다. 짐은 그 때가지 시곗줄이 없어 가죽 끈을 매어가지고 다녔고 남들 앞에서는 부끄러워 마음 놓고 멋진 금시계를 꺼내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짐은 아내의 머리가 짧아져있는 것을 발견하고 말을 잊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온 것은 아내의 머리카락을 위한 빗이었기 때문입니다.
델라가 자신이 사온 시곗줄을 내놓으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서 산 것이라고 하며 머리는 다시 자랄 것이라고 짐을 위로합니다. 그러나 짐은 빗을 사기 위해 시계를 팔았다고 고백합니다. 둘은 이 선물을 당분간 잘 간직해두며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자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오 헨리의 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의 줄거리입니다.
짧고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면서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은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주셨습니다. 즉, 생명을 주신 것이고 미사 때마다 지금도 주시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완전한 만큼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우리와 한 몸을 이루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도 혼자서만 해서는 소용이 없는 것처럼 우리 자신도 온전히 그분께 드릴 줄 알아야 그분과의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실 때,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드시고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너희는 이것을 받아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우리가 매 미사 때마다 듣는 이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새로운 계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옛 계약부터 알아야합니다. 오늘 제 1 독서에 모세의 중재로 옛 계약, 즉 구약이 어떻게 맺어졌는지가 나오고 있습니다.
모세는 먼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백성들에게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계명을 잘 따르겠다고 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모세는 소를 잡아 그 피를 대접에 담고 제단과 백성에게 뿌립니다. 모세는 피를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계약은 피로 맺어졌습니다. 피란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과의 계약은 단순한 거래나 협정이 아니라 ‘생명’에 관계 된 것입니다.
제단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즉, 하느님과 인간들에게 같은 피를 뿌리며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같은 피, 같은 생명, 같은 혈족으로 맺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계약엔 반드시 조건이 붙게 되어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조건은 ‘계명’입니다. 인간이 계명을 지키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겠다는 것이 계약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옛 계약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둔다. 이 새 계약은 그 백성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이집트에서 데려 내 오던 때에 맺은 것과는 같지 않다. 나는 그들을 내 것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나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예레 31,31-32)
예레미야 예언자는 소의 피로 맺은 계약이 파기되고 새로운 죄의 용서를 바탕으로 한 계약이 맺어질 것임을 예언합니다. 피는 생명이고 죄를 씻어주는 힘이 있지만 동물의 피로는 사람의 죄를 씻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리니,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 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 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예레 33,33-34)
이제 새로운 계약의 조건은 돌이나 종이에 쓰인 법이 아니라 마음 안에 새겨진 법, 즉 ‘양심’이 곧 계약의 조건이 됩니다. 양심 안에는 ‘사랑’이란 법이 새겨져 있고 그것을 거스를 때는 빨간 불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구약의 십계명도 잘 지키지 못하여 계약이 파기되었는데 하물며 우리가 어떻게 양심대로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죄를 용서하는 피’까지 계약에 추가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시는 피는 이제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계약의 피일뿐만 아니라 계약을 어길지라도 그 죄까지 사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모든 이의 죄의 사함을 위하여 흘릴 피니라.”
따라서 양심을 지닌 인간은 누구나 개인적으로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양심의 법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새로운 계약이 깨어지고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겨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정화되면 새로운 계약은 계속 유효하게 됩니다.
그러면 새로운 계약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요?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분은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면서 육체를 취하시어 그 육체를 지니고 하늘로 올라가셨듯이, 그 분의 신성에 참여하는 누구나 그분의 육체처럼 영원성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계약이란 성자께서 육체를 취하셔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된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혼인하여 한 몸을 이루지 않고서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분과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새로운 계약이고 그 이유로 당신의 살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성혈을 영하지 않고 성체만 영하더라도 이미 그 안에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계약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그 분처럼 산다는 뜻인데 서로서로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사랑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를 영한다는 것은 실로 그분과 한 몸이 되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내 안에서 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신부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개신교 부부가 천주교로 개종하였습니다. 두 분은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고 형제님은 안 그런데 자매님이 자꾸 미사 중에 눈물을 흘리더랍니다. 몇 주 동안 그랬기에 남편이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자매님 대답이 이랬습니다.
“전 지금까지 성경 말씀으로만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몸을 직접 모셔서 그 몸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와 사신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눈물이 나는 내가 이상한 건가요?”
성체를 영하면서 정말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나도 내 온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이웃과 한 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는다면 매번 영하는 성체는 그 때마다 의미 없이 내 안에서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과 한 몸이 되기 위한 조건은 그분이 당신의 모든 것을 나에게 주셨듯이 나도 나의 모든 것을 그 분께 봉헌해 드리는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나무를 보면서
갑곶순교성지에서 생활을 한 지가 벌써 3년째입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3년 전에 비해서 성지의 변화된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지요. 더군다나 많은 일들을 제가 직접 해왔기 때문에, 성지 구석구석에 무엇이 있는지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해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성지를 둘러보다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다니던 길이었는데, 그날에서야 처음 보았던 것이
지요.
그 나무를 바라보면서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이 나무를 왜 지금에서야 보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이 제 마음 속에 생기더군요. 그러면서 성지에 관해서는 많이 알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했지만 사실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합니다. 더군다나 나와 관계된 것이라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특히 이렇게 나약하고 부족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몸으로써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신비를 묵상하는 날이지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이유는 바로 우리들과 늘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나요?
주님께서는 2천 년 전 잠깐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을 만난 사람들에게만 깊은 감동을 주고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2천 년이 지난 바로 지금 이 시간에도 살아있는 빵으로써 우리 곁에 계시기 위해 당신이 직접 성체성사를 세우셨습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다가오신 주님이신데, 우리들은 그 사랑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한 마음으로 인해서, 마치 예수님을 반대했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예수님과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성체성사를 세우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뜻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으며, 그 모습을 닮으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만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매번 미사 때마다 좋은 음식으로써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나의 잘못된 모습으로 아무런 느낌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체를 모시면서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빠다킹신부
예수님께서 우리의 밥이 되셨듯
-이봉하수사-
로마에서 지낼 때 여러 곳으로 성지순례를 다녔습니다. 방학 때뿐 아니라,
학기 중에도 틈나면 선후배와 함께 성지를 방문한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이었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성지순례를 했던 곳 중에서 가슴 깊이 기억된 곳은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란치아노에 있는 ‘예수님의 성체 성혈 기적’성당입니다.
그곳에서는 아주 오래 전,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 한 사제의
미사성제 중에 일어났던 기적인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이 그대로 지금껏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 말씀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부활과 함께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에 관한 것일 겁니다.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저 또한 미사성제 안에서 성체를 영하면서 ‘정말 예수님의 몸일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존재를 보이는 밀떡을 통해
받아 모시면서 누구나 한번쯤 의문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밀떡이
순간 생생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여 우리의 손 위에 얹혀지게 된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그만 기절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와 늘 함께
계시겠다는 예수님의 인류를 향한 사랑과 새로운 계약의 표징으로서 우리에게
말씀과 성사를 통해 밥이 돼주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밥이 되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우리 또한 이웃에게 밥뿐 아니라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김지영 신부-
◆오늘 지내는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성체와 성혈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유일한 날이다. 우리가 미사 때 받아 먹는 성체는 한갓 밀가루를 구운 빵조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살아갈 힘을 주는 예수님의 몸이요, 사랑인 것이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부숴지고 나누어지고 먹히는 삶을 사신 예수께서는 오늘도 미사 안에서 부숴지고 나누어지고 먹히는 존재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다. 우리는 영성체 때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 하면 ‘아멘’이라고 대답한다. 아멘은 히브리 말로 ‘참으로 그렇습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는 뜻이다. 곧 ‘그리스도의 몸’은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같이 밥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까?’라는 뜻이고, ‘아멘’은 ‘예, 꼭 밥이 되겠습니다’라는 의미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제 성체를 모심으로써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밥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는 것임을 깨닫고 내게 밥이 되어 오시는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진실되이 ‘아멘’ 하고 응답해야 하겠다. 마더 데레사는 성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성체는 나를 지탱해 주는 밥이기에 성체 없이는 나의 봉헌생활은 하루 한 시간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버림받은 그 사람이 예수님의 성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의 핵심 주제 성체성사
-양승국 신부-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신자들 얼굴을 마주보게 됩니다. 한명 한명 얼굴을 쭉 한번 훑어보면 천차만별입니다. 미사가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승리의 잔치, 구세주 하느님께서 죄 많고 부족한 우리 인간에게 오시는 감사의 축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전례이기에 당연히 행복에 겨워야 함에도 그렇지 않은 얼굴들도 많습니다.
주일미사가 의무라니, 빠지면 귀찮게 고해성사를 봐야하니 어쩔 수 없이 오셔서 '제발 좀 빨리 끝나라'는 표정들도 눈에 띕니다. 더 심한 분들은 도대체 의욕이 없는 분들입니다.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소가 닭 바라보듯이 멀뚱멀뚱 바라봅니다. 심드렁한 표정입니다. 흥미도 반응도 없습니다. 때로 연옥벌이라도 받는 것 같은 모습의 신자들도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다'는 표정도 눈에 띕니다. 진지한 얼굴, 단정한 자세, 미사 전례의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려는 경건한 모습입니다. 마치도 이 세상에서 드리는 마지막 미사인 듯 정성이 지극합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는 속죄의 제사, 희생의 제사, 십자가의 제사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기쁨의 축제입니다. 따라서 미사가 거행되는 시간은 환희의 순간입니다. 감사의 순간입니다. 은총의 순간입니다. 부족한 죄인들이 천상잔치에 참여하니 너무도 기쁜 나머지, 너무도 감사하고 은혜로운 나머지 감격에 겨워 눈물이 흐르는 은총의 순간이 미사입니다.
'성체성사의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만년에 이르러 그 힘든 상황에서도 죽기까지 성체성사와 끈을 놓지 않으셨던 분, 그래서 그분께서 세상에 보낸 마지막 편지 역시 성체성사가 핵심주제였습니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져오는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분께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 지가 벌써 꽤 지났네요. 만년에 이르러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지요. 위급한 순간마다 자주 가시던 병원이 로마 시내에 위치한 제멜리(쌍둥이란 의미) 병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입원하셨던 2005년 3월 성목요일을 기해 교황님께서는 당신이 극진히 사랑하셨던 모든 사제들에게 유언과도 같은 서한을 보내셨습니다.
이 편지 주제가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저는 이 편지를 고이 간직하고 틈날 때 마다 꺼내서 읽어보곤 합니다. 교황님 유서다 생각하면서. 그 내용이 너무나 감동 깊고, 또 의미심장합니다.
"사랑하는 사제 여러분, 저는 다른 환자들과 나란히 병원에서 회복을 기다리며 성찬례를 통해 저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통에 일치시키면서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온 교회가 성찬례에서 생명을 얻으므로, 사제의 삶은 더욱 성찬례로 구현되는 삶이 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제들에게 '성찬 제정문'은 축성문 이상의 것, 곧 '생명의 조문'이 돼야 합니다."
"성체성사 때 모두 경건히 침묵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엄한 말씀을 되풀이할 때 우리 사제들은 이 구원의 신비를 전하는 특별한 전령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찌 설득력 있는 전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제들을 향한 교황님의 충고말씀은 제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신자들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너무나 행복해하는데, 구원의 방주에 오른 것이 너무나 기뻐서 저리 감사하는데, 정작 가장 성체성사 가까이 서 있는 저, 매일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저는 별 감흥이 없던 때가 많았음을 깊이 반성합니다.
오늘부터라도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는 성찬 제정문을 낭독할 때마다 이런 마음을 지녀보고자 노력하렵니다.
"나를 구워먹든지 삶아먹든지 어떻게 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를 이용해도, 돌아서서 험담해도, 나를 구박해도 나는 묵묵히 견딜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내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런 나를 통해 무한히 자비하신 하느님을 조금이라도 느끼시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에 굶주리고, 허기와 갈증에 허덕이는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몸은 은혜롭게도 늘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달려갈 수 있는 성체성사 그 한가운데 자리 잡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의 사랑을 기억하라
-허영업 신부-
마가렛 호레는 아일랜드 태생으로 ‘고아들의 어머니’라 불린다. 그녀는 어려서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으나 부모가 열병으로 죽는 바람에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아 행복한 생활을 했으나 그것도 잠시뿐,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가 사고로 죽고 만다. 다시 혼자가 된 그녀는 작은 호텔에서 빨래를 하면서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결심을 했다. ‘고아원에 가서 일을 해야겠다. 내가 돈은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도울 일이 있을 거야….’ 어느 날 그녀는 작은 고아원을 찾아가 그곳의 어려운 사정을 보고 불쌍한 고아들을 도울 궁리를 한다. 드디어 마가렛은 젖소 두 마리를 사서 우유를 짜고 그것을 팔아서 고아들을 도왔다. 우유가 잘 팔려 젖소 한 마리를 더 사고, 빵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장사가 굉장히 잘 되어 많은 이윤을 남겼다. 그러나 마가렛은 돈을 많이 벌어도 항상 자신은 누더기 옷을 입고 열심히 일을 했다. 사람들은 검소하게 살면서 고아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그녀를 ‘고아들의 어머니’로 존경했다. 사람들은 마가렛이 죽은 후에 그 아름다운 마음을 기리며 뉴올린즈에 평소처럼 초라한 옷차림을 한 그녀의 동상을 세워 주었다. 그녀가 엄청난 사랑의 기적을 이룰 수 있던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고아들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 성체성사에 관한 가르침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말씀이다.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들고 기도하고 축성하신 후 나누어 주시며, 이 빵과 포도주가 당신의 살과 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 예식을 행할 때마다 당신을 기억하라고 당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에서 사제가 축성하는 빵과 포도주를 통해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억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을 하면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현재 우리 안에서 재현해야 한다. 곧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늘 기억함으로써 성체성사의 삶을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성체성사적 삶의 시작이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삶의 위기와 고통의 순간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도와 주고 염려해 주는 수많은 이웃들의 기도와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사랑 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웃을 통해 우리 각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를 위해 피 흘리시고 죽으신 주님의 사랑, 그 기억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하다.
우리를 그리스도로 변화시키는 성체
-조욱현 신부-
오늘은 성체성사의 제정과 그 신비를 기념하는 축일이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성목요일, 최후만찬에서 세우셨으나 이날은 수난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수난을 떠나 기쁨으로 성체성사를 기념할 날을 생각하게 되어 제정하게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후대에 이 날을 삼위일체 대축일 후 첫 목요일이나 첫 주일을 이 축일로 지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일인 오늘 지내고 있다. 성체와 성혈에 대한 기적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의 한 가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로마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볼세나라는 아름다운 도시가 있다. 이 도시에는 작고도 아담한 성당이 있다. 이 성당에 들어가면 왼 쪽으로 약 13세기 때 일어난 성체와 성혈의 기적을 보존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의 미사를 드리던 제대가 그대로 있고, 제대의 대리석 일부가 유리관 속에 보존되어 있다. 이 기적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사제가 자신이 미사를 매일 봉헌하면서도 항상 성변화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 자신이 사제이면서도 그러한 의심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이 사제는 결국 로마 여행을 하기로 하고 로마 순례를 떠나게 된다. 로마를 순례하고도 이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사제직을 떠나겠다고 생각하였다. 로마를 향하여 가는 도중 이 볼세나를 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도 이 사제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성변화를 확실히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성찬의 전례에서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그는 또다시 의심을 하였다. “정말 이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로 변할까?”. 그러나 이게 웬 일인가! 축성기도가 끝나자 성작에 담긴 포도주가 순간 피로 변하였고 이 사제는 깜짝 놀라 성작을 제대 위에 떨어뜨리고 만다. 그래서 피는 제대보를 적시고 제대의 대리석을 붉게 물들였다. 이 기적을 본 사제는 결정적으로 회개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제대보는 지금까지 기념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 이 후로 성체와 성혈 대축일이 제정되었으며 거행되어 오고 있다고 한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시어 제자들에게 주신다. 그 빵은 바로 당신의 몸으로 천지 창조로부터 부활 성령 영광의 현양에 이르기까지의 형언할 수 없는 신비의 경륜을 위하여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이렇게 복되신 아버지께 파견 받은 성령이신 거룩한 친교로 채워진 빵을 예수께서는 떼면서 “이는 내 몸이다”라고 선언하신다. 이렇게 신적 권능으로 충만한 이 빵은 하나이며, 나뉘어졌고, 많은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한다”(1고린 10,16-17). 그리고 당신 피의 잔을 들고(참조: 요한 18,11!, 아버지께서 주신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하지 않겠느냐?) 감사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많은 사람(모든 이)을 위하여 흘리는 계약인 나의 피이다”라고 하신다. 그리고 부활로서 시작되고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잔치에서 실현된 그리고 그들과 하나가 되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이 (메시아적) 포도의 열매(포도주)를 다시 마실것이다”라고 덧붙이신다. 그리고 “파스카 찬가” 시편 112-117과 시편 135편을 노래하고 올리브산, 겟세마니로 그리고 구원의 수난으로 가신다.
미사 때 축성되는 빵과 포도주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것이며, 이를 정성 되이 준비하고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게 됨을 믿고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며,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영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몸과 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당신으로 변화되게끔 해 주신다. 즉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화, 하느님화, 그분과 같이(1 요한 3,2) 되는 것이다. 이는 성체성사가 우리 인간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남겨주신 가장 귀하고 신비로운 성사임을 알게 해 준다. 이는 실제로 많은 교부들이 가르친 것이다.
이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와 성체께 대한 신심이다. 우리가 성체를 통하여 주님을 닮는, 진정한 친교를 나누며 사는, 그래서 올바로 주님을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겠다.
성체성사, 생명력 얻는 사랑의 밥상
- 김영수 신부-
나는 매일 식구들을 위해 밥상을 차립니다. 날마다 고슬고슬한 밥을 짓고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밥상을 차리면 식구들은 밥상에 둘러 앉아 밥을 나누어 먹습니다. 밥짓는 사람의 행복은 식구들이 밥을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보는 때입니다.
밥상을 차려 놓으면 어떤 식구들은 ‘복스럽게’ 밥을 먹기도 하지만 어떤 식구들은 ‘복이 달아나게’ 밥을 먹기도 합니다. 밥상머리에서 깨작거리며 밥을 먹는 사람, 반찬투정을 하며 편식을 하는 사람, 밥보다도 군것질로 배를 채우는 사람, 몸에 좋다면 무엇이든 꾸역꾸역 미련스럽게 챙겨먹는 사람…이런 사람들에게는 정성들여 차려놓은 밥상이 아깝습니다.
소담스럽고 복스럽게 밥을 잘 먹는 사람은 사는 일도 담박하고 기운찹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밥 잘 먹는 사람은 ‘복덩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밥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밥을 잘 챙겨먹으면 잔병치레가 없고, 생활력도 강해서 사는 일이 힘차고 복 받은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날마다 드리는 미사는 당신 자신을 밥으로 내어주신 예수님의 몸과 피로 밥상을 차리고 그 밥상에 모여 예수님의 사랑을 먹고 마시는 생명의 축제입니다.
나는 매일 이 밥상을 차리고 밥을 퍼서 나누어 주는 일을 하며 밥 짓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밥 퍼주는 사람의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사에 지친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갈증을 풀고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음으로써 힘을 얻어 사는 모습은 밥 짓는 남자의 보람이며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밥상의 밥이 되셔서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를 살리십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이사 55, 1~2)
먹는 일이 단순히 육신의 허기만을 채우는 일로 그치면 인간으로서 먹는 일이 아니라 짐승처럼 먹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인간으로서 먹는다는 것은 몸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일만이 아닙니다.
밥을 나누어 먹는 일은 자신의 존재를 나누는 일이기도 합니다. 함께 걷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동반자’(Companion)라는 단어는 ‘함께’(Com)라는 단어와 ‘빵’(Panis)이라는 단어가 합쳐져 ‘빵(밥)을 함께 먹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인생의 길을 함께 간다는 것이고, 나의 존재를 함께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가족을 ‘식구’(食口)라고 부르는 것은 먹는 일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지는 일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먹는 일은 생존의 기반이기에 밥을 함께 먹는 일은 생명을 함께 나누는 생명의 축제이며, 서로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나누는 사랑의 축제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양식으로 내어주신 놀라운 선물을 현재화시키는 생명의 밥상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마련된 이 좋은 밥상에 둘러앉은 우리는 예수님을 먹고 마심으로써 한 식구가 되는 것이며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식탁에 모여 그분을 먹고 마시는 우리의 모습은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이는 성체안에 담긴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정성껏 받아 모시지만, 어떤 이는 마음의 준비 없이 형식적으로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기도 합니다.
성체성사 안에 담긴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그분의 현존 안에서 살아가지만 의미도 모른 채 허겁지겁 자신의 허기만을 채우려는 사람에게는 힘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밥으로 내어주시고 그 밥을 함께 나누어 먹도록 하신 일은 ‘밥’이 지닌 가치와 ‘먹는 일’ 안에 담긴 신비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밥상을 차리는 먹거리에는 농부들의 수고와 땀이 들어있고, 밥 짓는 사람의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으며, 힘들고 혼란스러운 세상 안에서도 참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생명력을 얻는 사랑의 밥상입니다.
우리를 먹이고 살리시기 위하여 조건 없이 바쳐진 예수님의 몸을 먹고 사는 일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을 수 있게 합니다.
천상의 양식이며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양식인 성체성사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이 담긴 사랑의 성사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당신 자신을 밥상에 내어 놓으시며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오늘도 나는 식구들을 위해 맛있는 밥상을 준비합니다. 밥상 위에 차려지는 예수님의 구원이 오늘도 새롭습니다.
성찬은 빵도, 포도주도, 우리 자신도 모두 변하게 하는 하느님의 일, 곧 성사(聖事)이다.
-서공석 신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복음에서 들은 대로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 전날 저녁 제자들과 함께 해방절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과 하신 이별의 만찬이었습니다. 해방절은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켰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념한다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상하고 그 사건이 지닌 의미를 오늘의 삶 안에 되살려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상을 위한 제사에서 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제사에서 우리가 조상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들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분들이 아끼고 사랑하셨던, 우리 형제자매들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제사 후 음복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그분들의 시선에서 형제자매들을 바라보고 우애를 다집니다. 돌아가셔서 과거의 존재가 된 그분들이 오늘 우리의 삶을 위해 갖는 의미를 되살려 내는 것입니다.
해방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고, 그들의 삶 안에 되살려 내는 의미는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과, 그 함께 계심은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해방이 보여주었듯이 그들에게 은혜로운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이 해방절 식사였던 것은,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삶 안에 되살려낸 예수님이었고, 그분 안에 하느님이 주시는 해방과 은혜로우심을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식탁에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주 잔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는 말씀과 더불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빵을 먹고 그 포도주를 마셔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몸과 같은 피가 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계약의 피라는 말씀은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계약은 쌍방이 미래 행동 방식을 약속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신 빵을 먹게 하고,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면서, 쌍방의 미래 행동 방식을 정하셨습니다. 그 빵을 먹고 그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 안에 예수님이 살과 피로 살아계셔서 당신의 삶이 그들 안에 발생하게 한다는 약속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몸이라는 단어는 인간관계를 의미하고 피는 생명입니다. 그 빵을 먹고 그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의 인간관계와 생명을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 만찬으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미래의 행동방식이 정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자비를 실천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인관관계이고 생명입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피’라는 말씀이 요약합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 사회의 실세였던 사제들과 율사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특권을 받았다고 믿으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나 잘못 지키는 사람에게나 하느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유대교의 제도권에 몸담은 사람에게나 제도권 밖에 있는 사람에게나 하느님은 함께 계십니다. 제도권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높은 사람 행세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3.45). 그 시대 사제들과 율사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그들 자신의 위신을 찾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셨습니다. 그것은 섬김의 인간관계였고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강요하던 십일조와 제물 봉헌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을 것을 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유로운 응답으로서의 사랑을 기대합니다. 군림하고, 명령하고,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보복하는 것은 횡포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베푸시는 분이기에 우리도 당신의 자녀 되어 불쌍히 여기고 베푸는 일을 자유롭게 실천할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종교 제도권의 지도자들 같이 위신을 찾고,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시대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두둔하는 것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비하하는 천박한 행동이었습니다. 자기의 체면과 위신을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하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에 구애받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리시기에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버려진 이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은 그들과도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몸짓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무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와서 나를 따르시오.”(마르 10,21)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재물이거나 위신이거나, 베풀고 쏟는 일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버리고 와서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한 사람을 위한 계획에서 해방되라는 말씀입니다.
성찬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과 피라는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의 인간관계와 삶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이해하듯이, 우리 자신을 보는 눈도 성찬에서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가지셨던 인간관계와 삶을 배워 실천하는 우리가 됩니다. 빵이 예수님의 몸이 되고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가 되었다는 말로써 성찬에 대한 말이 끝나지 않습니다. 성찬은 우리 자신도 변하게 합니다. 이 변화는 어느 한 순간에 기적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생명은 한 순간에 자라고 한 순간에 무엇을 배우지 못합니다. 생명은 시간과 함께 서서히 성장하고, 서서히 무엇을 습득합니다. 우리는 성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면서 시간과 더불어 이 변화가 우리 안에 일어날 것을 빕니다. 우리만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서서히 벗어나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삶이 우리 안에 실현되게 하는 성찬입니다. 성찬은 빵도, 포도주도, 우리 자신도 모두 변하게 하는 하느님의 일, 곧 성사(聖事)입니다.
나를 먹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산다.
-유영봉 신부-
묵상길잡이 : 축성한 밀떡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면 그것이 성체교리의 전부인 양 생각한다. 그러나 성체교리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성체성사는 교회의 근원이며, 믿을 교리의 요약이며, 지킬 계명의 전부이며, 모든 은총의 샘이다.
1. 성체성사는 교회의 근원
우리는 성체성사에 관한 신비는 단순히 "축성한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그것이 전부인 양 생각한다. 그러나 성체성사의 신비는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며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이다. 누가 이 백성이며 공동체의 일원인가?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성찬의 식탁에 모여 온 신자들이 바로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참 백성인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고 할 때, 성찬의 식탁에서 그리스도의 같은 몸과 피를 나누어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들이 바로 교회를 이루는 하느님의 백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바로 성찬의 식탁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성체성사는 믿을 교리의 핵심이다.
신앙인이 믿는 믿음의 대상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믿을 교리'란 바로 그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관한 교리이다. 우리가 계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온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하느님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다. 강생과 수난과 부활, 성령을 보내심 등이 모두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교리가 바로 성체성사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신다. 말하자면 당신을 우리의 '밥'으로 주시는 것이다. “밥이 되어 준다.”는 말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며 죽어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훅 불면 날아 가버릴 만큼 무한히 낮추시고 미소한 밀떡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 인간을 위해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을 무한히 낮추시어 인간으로 모습으로 인간에게 오셨고, 참으로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또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바쳐 제물이 되시고, 그것도 부족하여 매일 미사 때마다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음식으로(밥으로) 주시는 것이다. 여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참으로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성체 성사야말로 하느님이 얼마나 크신 '사랑 자체'인가를 남김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를 참으로 알면 '믿을 교리의 핵심'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체성사는 지킬 계명의 요약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살아야 할 근본 규범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의 이중 계명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참 모습은 바로 성체 성사 안에 있다. 우리에게 성체 성사로 다가오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6, 56)하셨다. 밀떡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그 분께 “주님, 저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하며 한번 여쭈어보자. “너희는 서로 발을 씻어 주라!"하셨듯이 “너희도 서로 밥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온 존재를 던져 모범을 보여주셨듯이 “서로 발을 씻어주는 종이 되어 주라.”고, “서로 자신을 밥으로 내어 주라.”고 우리에게 외치시는 것이다. 서로 밥이 되어주고 섬기는 거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온 몸으로 외치시는 것이다. 성체 성사 안에 그리스도 신자가 살아야 할 사랑의 계명이 온전히 담겨 있다. 성체성사를 깊이 알면 그리스챤 계명의 본질을 다 아는 것이다.
4. 성체 성사는 모든 은총의 샘이다
당신 스스로 어떻게 하는 것이 참 사랑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6,57) 하셨다. 그리스도 신자생활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다. 우리는 일상 생활 안에서 “주님, 이럴 때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주님, 용서해주십시오” “주님, 함께 하시고 도와주십시오.”“주님, 감사합니다.”하며 주님과 함께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기꺼이 그 일을 자임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한번도 주님께 청하지 않고 눈길도 주지 않는 때가 많다. 성당 문밖을 나가면 외인이나 다름없이 그냥 내 멋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주님을 슬프게 해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일치해 사는 삶이 그리스챤 생활의 진수(眞髓)이다. 그렇게 하루를 살면 하루를 성인으로 산 것이다. 어떤 수사님은 기차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개찰구로 나가다 보니 손에 표가 두 장이 쥐어져 있었다. “이 표는 누구의 것입니까?” 하는 질문에 수사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분은 항상 주님과 대화를 하며 지냈기 때문에 예수님의 표를 샀던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청할 때면 주님은 항상 은총으로 함께 해 주시고자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께 기회를 드리지 않는 것이다. 성체성사 안에 우리가 성인으로 살 수 있는 모든 은총의 샘이 있음을 깨닫자.
예수님 닮기
-윤용선 신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닮기’를 추구하는 자입니다. 그분 흉내만을 내는 삶이 아니라, 그분을 전적으로 닮은 삶을 사는 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각자는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다양한 모습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건설과 그분 뜻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 안에서도 공통적으로 지녀야 할 중요한 기본 자세는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신앙인이라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 또한, 신앙인들이 그렇게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종합적으로 기리는 오늘 전례 안에서의 복음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삶이 어떠한 지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너희는 이를 먹고 마셔라."(마르코 14, 22∼24 참조)라고 하시며, 바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계속 내어놓으시는 그분을 만납니다. 우리는 그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성장합니다. 그러나 내가 먹고 마시는 단계에만 머물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기꺼이 거듭 내어 주시는 사랑의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도 당신의 삶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은 삶이란 남을 위하여 자신을 계속 내어놓는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어놓는 삶은 바로 성체적 삶입니다. 주님의 성체 안에서, 내어놓는 삶이 어떠한 지를 잘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체적 삶이란, 땅에 뿌려지고 시련 가운데 싹을 내고 성장하여 결실을 맺는 밀알과 같은 삶이요 부서지고 으깨어짐을 통해 변화되는 밀떡과 같은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먹히시는 성체처럼, 남에게 먹히는 삶 -남의 밥이 되는 삶-이 바로 성체적 삶입니다.
오늘의 대축일을 맞으며, 예수님을 닮은 삶, 내어놓는 삶, 성체적 삶이 바로 이 세상에서 가능한 나의 삶이 되길 다시금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 자체가, 오늘 복음(마르코 14, 26)에서처럼, 예수님과 함께 찬미가를 부르는 아름다운 여정이길 희망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그대로였다
-이기양 신부-
제대 앞에 꽃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여러분들 보시기에 무엇을 형상화 한 것 같습니까? 성당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성체를 표현한 작품인 것 같습니다. 제대 꽃을 보니 오늘이 무슨 축일인지 한 눈에 알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원래 성체성혈 대축일은 오늘이 아니고 성 목요일 최후 만찬 때 세워진 것인데 그 다음 날이 바로 수난절이기 때문에 따로 떼어서 이렇게 성체성혈 대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밤을 함께 보내시면서 사랑하시던 제자들과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바로 이 ꡒ성체ꡓ와 ꡒ성혈ꡓ입니다.
어린이 미사 때 초등부 어린이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ꡒ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헤어질 때 어떤 선물을 했나요?ꡓ
여기 저기서 대답이 나왔습니다.
ꡒ딱지요.ꡓ
ꡒ수첩이요.ꡓ
ꡒ게임 C.D.요.ꡓ
손수건도 나오고 초코렛도 나왔습니다. 우리는 왜 헤어지는 친구와 선물을 주고받을까요? 이별이 아쉽기 때문이고, 또 나를 오래 기억해 달라는 의미로 내가 아끼는 것을 선물로 내어 줍니다. 사목 생활을 하다보면 보좌 신부 때는 2년에 한 번씩, 주임 신부가 되면 5년에 한 번씩 아쉬운 이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에게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송별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신부가 되어 처음으로 사목을 했던 잠실 성당을 떠날 때였습니다. 떠나는 날 많은 신자들이 환송을 나왔는데 사람들로 꽉 차 있는 성당 마당에서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차 유리창을 막 두드려대며 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ꡒ신부님! 신부님!ꡓ
창문을 열었더니 웬 시커먼 봉지 하나가 쑥 들어왔습니다. 아주 뜨거운 봉지였습니다. 뜨거워서 만지지도 못하고 옆 좌석에 놓고 할머니와는 변변히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떠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신 없이 떠나서 다음 임지에 도착해 보니 또 거기는 거기대로 많은 환영 인파가 나와 있어서 역시 정신이 없이 인사를 하고 바로 이어서 점심 식사를 하고 짐을 내려놓고 하느라고 차에 있던 그 할머니의 선물을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틀 뒤에 그 봉투를 발견하고 열어보니 그 안에 들어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만두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시장에서 만두 장사를 하던 할머니가 떠나는 제게 이별 선물로 갓 쪄낸 뜨거운 만두를 한 봉투 가득 가져오셨던 것입니다. 이틀이나 지났기 때문에 만두는 모두 상해 있었는데 그것을 열어보고 저는 그 할머니께 얼마나 고맙고 죄송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그 때의 느낌과 상황이 고스란히 기억됩니다. 사제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이별의 선물들을 주고받았지만 지금도 제일 기억나고 잊혀지지 않는 선물 중의 하나가 그 만두입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이나 또 아쉬운 사람과 작별할 때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나 특별히 기억될만한 것들을 선물로 주고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며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바로 당신의 ꡒ몸ꡓ과 ꡒ피ꡓ를 주셨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손수건이나 반지, 책이나 필요한 물건 등은 줄 수 있지만 내 몸과 피를 선물로 내 준다는 것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해 보았겠습니까?
돌아가시기 전날 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셨습니다.
ꡒ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ꡓ(마르14,22)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예수님은 모두와 함께 잔을 돌려가며 마셨습니다.
ꡒ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ꡓ(마르14,24)
이렇게 당신의 몸과 피를 내 놓으심으로써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적은 이천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체와 성혈을 모시면서 그 분과 일치되고 한 몸이 되어서 그 분의 삶을 살게 됩니다. 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마음에 담는 날이 바로 오늘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고 들려주셨던 삶의 모습들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 사는 것, 즉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이웃을 위해 기꺼이 나를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십니다.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 주시기 직전에 예수님은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무릎을 꿇고 제자의 발을 씻어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전 생애를 마음에 새기고 그대로 따라 살겠다고 우리는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면서 예수님과 일치하고 이제는 나의 삶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 이것이 성체성사의 의미이자 오늘 대축일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가을이 오면>이라는 김용석의 동시를 소개합니다.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을 솔방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어요.
그래도 난 잃은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예요
가을이 오면.
꽃잎도, 꿀도, 향기도 남김이 없이 다 나누어주었지만 정작 잃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꽃은 노래합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기뻐합니다. 꽃의 신비에 대한 이 노래가 성체의 신비를 바로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꽃이 만일 내 꽃잎인데 왜 벌이 날아와서 귀찮게 하느냐고, 또 왜 바람이 내 향기를 모두 다 빼앗아 가느냐고 화를 내고 문을 닫아 버린다면 벌도 나비도 바람도 오지 못하고 마침내 그 꽃은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단 한 개의 열매도 맺지 못하고 말라져 끝이 나버릴 겁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아낌없이 내어줄 때 나는 성장하고, 풍성하게 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체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심지어 몸과 피까지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나눔은 이천여 년 동안 그리스도교가 지속되어온 힘이고 바탕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몸을 모시는 우리가 알아야 할 삶의 지향도 바로 이것입니다. 작은 꽃이 자기의 향기와 꿀을 나누며 많은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성체를 받아 모시며 예수님처럼 나를 나누며 살아갈 때 참으로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이기적으로 살아갑니다. 내 것은 움켜쥐고 내놓기 싫어합니다. 반면에 남의 것은 어떻게 해서라고 취하고 싶어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은 남이 해주고 나는 쉽고 편안하게 즐기는 것만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나눔이 생명이라면 이러한 욕심은 죽음입니다.
우리가 모두 잘 아는 마더 데레사가 한국에 오셨을 때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마더 데레사는 하루에 성체를 두 번 영 한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듣고 보니 하루에 미사를 두 번 참례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아침 미사 때 성체를 모시며 예수님과 만나고 그 후에는 하루 일을 하며, 즉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며 그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예수님을 두 번씩 만난다는 것이지요. 소외 받고 죽어 가는 이들과의 만남이 두 번째 영성체라고 이야기하던 마더 데레사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언제 만날 수 있습니까? 내 것을 나누고 이웃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노력할 때 그 곳에서 이웃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 한다고 해서 모두가 거룩해지고 모두가 주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주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성 목요일 날 행해진 최후의 만찬 때 그 자리에 있었던 베드로와 유다도 예수님이 나누어주신 빵, 즉 성체를 받아 모셨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유다인들에게 잡혀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했고,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돈에 대한 욕심으로 은돈 서른 닢에 스승인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새기고 살 때는 열매 맺는 생명을 살 수 있지만, 주님의 몸을 모시고도 내 욕심만을 채우고 나누기보다는 이웃의 것을 움켜쥐려고만 한다면 주님과 만나기는커녕 죽음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며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수도원과 교도소를 비교한 글이 있습니다. 수도원과 교도소는 외형상으로는 똑같습니다. 갇혀서 지내고, 인간적인 욕구들을 절제해야 하고, 거친 음식을 먹어야 하며 불편한 잠자리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도원과 교도소가 분명히 다른 것은 교도소에는 언제나 불평과 보복의 감정들이 들끓는 다면 수도원은 늘 감사의 물결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도 주님의 마음을 닮지 않고 불평과 불만과 미움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속한 직장과 가정과 사회가 감옥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을 모시고 주님의 마음을 내 마음 안에 담고 산다면 불편한 가정과 힘겨운 직장과 어려운 동료들 안에서도 주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넘치고 감사의 마음이 오고가는 멋진 공동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잠시 후에 우리는 또 주님의 몸을 모시게 됩니다. 주님의 몸을 모시면서 진심으로 주님의 사랑에 감사 드리고 주님과 일치되어 사랑의 삶을 살고자 결심한다면, 마더 데레사와 같이 어려운 이웃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힘겨운 삶의 현장에서도 평화롭고 풍요로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체를 모시면서도 이기적인 마음과 나 중심의 삶을 버리지 못한다면 이스카리옷 유다가 나와는 상관이 없는 먼 과거만의 일이 아니게 됩니다. 또 평화와 거리가 먼 교도소의 삶이 나와는 무관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살 때 우리의 삶을 통해 제 2의 그리스도가 여기저기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그 무한한 은혜에 감사 드리고 주님을 모시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를 노력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우리의 모습 속에서 주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우리는 제 2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성체성혈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가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 풍성히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