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 교환학생으로 와서 '국축 없는 생활'이 세 달 가까이 지속된 지금..
직관에 목말라 있는 저는 기어코 웹 사이트 하나를 알아내 스틸러스 경기를 보기도 하고, 이번 달에 있는 크팰 홈경기도 예매하며 어느 정도 갈증을 해소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목마름에 '그래, 가까운 축구팀의 경기부터 직관하자!'하여 리투아니아 A lyga 경기를 관전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A lyga에 대해 아시는 분은 거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또한 몰랐구요. 그래서 본격적인 후기에 앞서 A lyga와 리투아니아에서의 축구 인기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A lyga는 1991년, 리투아니아의 독립과 함께 출범한 리그로, 리투아니아 최상위 프로축구 리그입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k리그 클래식인 격이죠.
2016부터 8개의 팀이 A lyga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12팀이 참가했던 경우도 있다는데 경기장 규모 부족, 재정 부족 등 몇몇 팀의 문제가 겹치면서 8팀으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8개 팀이 총 28라운드를 치르며, 이 결과 8위 팀은 다이렉트 강등, 7위 팀은 하부리그 팀과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됩니다. 상위 6개 팀은 마에스터샤프트 혹은 챔피언쉽이란 이름으로 풀리그로 5라운드를 더 치루게 됩니다. K리그 클래식의 상위 스플릿을 생각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이 결과 최종 우승팀은 UEFA 챔피언스리그에, 2위·3위·컵 대회 우승팀은 UEFA 유로파리그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물론 본선에 직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리투아니아 축구 협회가 UEFA내에서 차지하는 순위에 따라 몇차 예선에 참가할 수 있게 되는지가 결정됩니다.
UEFA에 소속된 54개의 회원국들 중 리투아니아는 국가대표 계수 순위 39위(2015), 리그 계수 순위 48위(2017)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위권이죠. 축구 인기도 낮은 편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농구와는 극명하게 대비가 되서 더 그렇게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리투아니아에서 농구는 넘사벽 스포츠입니다. 세계 무대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고, 프로 리그 또한 높은 인기를 자랑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의 농구팀 BC 잘기리스의 인기가 가장 좋다고 하더군요. 홈구장인 '잘기리스 아레나'는 인프라도 좋고, 좌석 규모도 15,000석 수준으로 스틸야드와 맞먹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농구판 챔스라고 할 수 있는 '유로 리그' 경기에는 평균 1만여 명을 웃도는 관중들이 온다고 하더군요. 이 곳에서 농구대표팀 경기도 펼쳐집니다. (참조 : 위키피디아, 월드풋볼)
그에 반해 축구 인프라와 인기는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월드풋볼에서 찾아보니 2017 A lyga 평균 관중은 500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오늘 직관했던 수도 빌뉴스를 연고지로 한 FK잘기리스는 평균 800명 정도 찾아오는군요. 이 팀의 홈구장이자 리투아니아 국가 대표팀의 홈구장이기도 한 'LFF스타디움'은 5천 석 규모로 농구장인 잘기리스 아레나의 1/3 수준입니다. 시설도 다소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축구를 관전하기에는 괜찮았고, 적은 관중이었지만 유럽 축구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진 및 영상과 함께 후기를 계속 적겠습니다. 카메라가 구린 걸로 유명한 폰으로 찍은거라 화질이 엉망인 점은 양해 바랍니다.
온라인으로 표를 구매했습니다. 좌석은 일반석과 VIP석 중에 고를 수 있었습니다. 일반석이 3.5유로, VIP석이 12유로였습니다. 저는 일반석으로 끊었습니다. 혜자 of 혜자ㄷㄷㄷ
경기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여기가 경기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인데, 축구장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더군요. 하긴 스틸야드를 생각하면 뭐 별 거 아닙니다.ㅋㅋㅋㅋ
조금 더 가니까 눈 앞에 경기장이 나타났습니다. 출입문 앞에 바코드 리더기가 있더군요. 셀프 입장이었습니다. 미리 출력했던 표를 찍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안에는 경찰이 보안 검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페트병이 반입이 될까 걱정했는데, 물병임을 확인하더니 OK사인을 보내더군요. 그러나 맥주는 FC서울처럼 일회용 컵에 따라주더군요ㅋㅋ
경기 시작 30분 전 모습입니다. 선수들이 몸을 풀고, 관중들이 하나 둘 들어왔습니다.
좌석을 좀 더 자세히 찍어봤습니다. 바닥이 콘크리트가 아니라 나무? 같은 것이더군요. 가변석스러운 느낌이었습니다.
경기 시작 직전. 깃발 퍼포먼스로 분위기를 띄웁니다. 맞은편에서 팬들이 같이 깃발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저기서 서포터를 하는가보다 싶었죠. 그런데 반대편 관중석에 모인 서포터즈들이 응원을 하더군요.ㅋㅋㅋ
요나바 원정팬들의 모습입니다.
선수들이 입장했습니다. 시즌 막바지에 챔피언쉽 3라운드로 치뤄졌던 경기. 초록색 유니폼이 리그 2위의 FK잘기리스, 파란색 유니폼이 리그 4위의 FK요나바입니다. 이 경기 전까지 잘기리스는 19승 7무 4패, 55득점 22실점을 기록하며 안정된 공수 밸런스를 갖춘 듯 보였고, 요나바는 9승 7무 14패, 33득점 47실점을 기록하며 수비가 다소 아쉬운 듯했습니다. 기록만 놓고 봤을 때 이 경기는 잘기리스가 쉽게 가져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전반 6분만에 요나바가 선제골을 뽑아냈습니다. 빠른 역습으로 오른쪽 측면을 파고들었고, 낮은 땅볼 크로스를 통해 골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요나바 팬이 제 오른쪽에만 앉은 줄 알았는데 왼쪽에서도 환호성이 들려왔습니다. 심지어 바로 옆은 잘기리스 팬이었는데도ㅋㅋㅋㅋ
K리그만 해도 용납이 안 되는 ‘홈 팀 일반석에서 원정 팬이 함성을 지르는 행위’인데, 여기서는 예외인가 봅니다. 생각해 보니 원정석을 따로 구분지어 놓지도 않았던 것 같네요.
어쨌든 요나바가 계속 경기를 리드하던 도중 잘기리스가 코너킥 찬스를 살려서 동점골을 뽑아내며 쉽게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1분 후, 요나바가 PK를 획득하며 다시 앞서나갈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결과는? 성공!
전반 종료 직전, 요나바가 역습으로 추가 골을 뽑아냈습니다. 이 골로 경기 분위기를 완전히 가져왔죠.
전반전은 잘기리스가 주도권을 가져가며 공격을 풀어나갔다면 요나바는 수비에 치중하면서 역습을 노리는 형태였습니다. 잘기리스는 중원에서 측면으로 길게 벌려주는 패스를 주로 사용하며 공격을 전개했고, 요나바는 지공에서는 아쉬운 모습을 보였지만 역습 상황에서 기회를 살리려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하프타임. 경기장 바로 옆에 보조구장이 있는데, 아이들이 공을 차는 모습이 귀여웠습니다.
후반전은 다소 밋밋하게 흘러갔습니다. 요나바는 더욱 더 수비에 치중했고, 잘기리스는 공격 점유율을 전반전보다 더 많이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점유율에 비해 공격은 큰 소득이 없었고, 요나바 역시 이렇다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후반 중반, 요나바 선수가 경고누적으로 퇴장을 당하면서 경기의 흐름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5분 뒤, 잘기리스가 만회골을 터뜨리면서 역전 가능성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요나바는 또 찾아왔던 결정적인 찬스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공격 대 수비 2대 2 상황에서 골키퍼를 속이는 침착한 패스를 통해 쐐기 골을 터뜨렸습니다. 요나바는 적은 공격 찬스로 최대의 결과를 냈고, 잘기리스는 경기당 1실점을 하지 않는 기록이 무색하게 역습에 취약했고 쉽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인데 아 언제 우리팀 수비 여기까지 갔다 놨지
그렇게 경기는 요나바의 4-2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골이 많이 나서 만족스러운 경기였습니다. 이 날 꿀잼에 꿀잼을 거듭했다던 포항과 상주의 경기가 있는지 모르고 못 봐서 아쉬웠는데, 그걸 덮을 만큼 재밌었습니다. 요나바 골키퍼가 노동건보다 낫다 카더라
총평을 해 보면, 그냥 K리그 경기를 하나 본 것 같았습니다. K리그를 주로 봐서 그런지 진짜 K리그 본 거 같음 일단 적은 관중이 너무 익숙했고(그래도 K리그가 훨씬 많습니다 혹시 오해하진 마시길ㅋㅋㅋ), 그래서인지 오히려 편안한 분위기 속에 경기를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서포팅도 친숙했습니다. 요나바 팬들은 별다른 응원가 없이 골을 넣었을 때나 아니면 한 번씩 요나바! 요나바!를 외치며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 넣었습니다.
잘기리스는 ‘잘기리스 파이팅’과 같은 간단한 가사에 멜로디만 붙여 서포팅을 했는데, 긴 노래가 많은 K리그와는 달리 응원가가 쉽게 입에 붙고 중독성이 강했습니다. 조금 달랐던 것은, K리그는 여성 팬들의 아리따운 하이톤이 남성 팬들의 바리톤을 뚫고 나와 대지를 가른다면, 잘기리스 서포터즈는 대부분 남성이어서 묵직한 저음이 울려 퍼지는 게 그 숫자는 적었지만 색다르게 느껴졌습니다.ㅎㄷㄷ
무엇보다 수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축구를 잘하든 못하든, 국제대회에 나가든 못 나가든, 관중이 많든 적든 내 지역에 내가 응원할 수 있는 팀이 있고 그걸 즐길 수 있다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문득 K리그에 감사해지네요.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욕도 많이 먹는 K리그지만, 내 고장에 내 팀이 있고 무대에서 같이 호흡할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입니다.
이 경기를 시작으로 크팰, 레알마드리드, 벤피카 경기를 볼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독일과 폴란드, 체코, 우크라이나 등 유럽의 여러 리그를 경험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듭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글로 남겨보고 싶네요. 처음 직관한 유럽축구라 이 내용 저 내용 다 써서 길어진 것 같은데, 두서도 없고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담
요나바의 25번 중앙수비수(luka peric)가 떡대도 있고 눈에 확 띄어서 지켜봤는데, 나름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줬습니다. 코너킥 실점 상황에서 애매한 위치 선정은 아쉬웠네요. 활동 반경을 넓게 가져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수비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87년생 크로아티아 출신에 194cm 88kg이며 월드풋볼 피셜로는 프로 통산 41경기를 치룬 걸로 나오네요.
하이라이트가 올라왔네요. 혹시 궁금하신 분들은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ㅋㅋㅋ
https://www.youtube.com/watch?v=hsMGcLwgUwg
첫댓글 여행기 책한권 읽은 느낌입니다
글 잘쓰시네요 보람된 유학생활되세요
감사합니다. 글쓰다가 네트워크 오류때문에 2번이나 다시 썼는데 오래 쓴 보람이 있네요.
@포항답게 한편으론 부럽기도 해요 축구다음으로 여행을 좋아하는데 평소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등 관심이 많았는데 독립역사는 짧지만 유럽답게 고풍스런 건물들과 경치가 아름답더라고요
@별수집가 전북 저는 리투아니아를 비롯해 발트국가에 대해 무지한 채 단순히 '생활비가 상대적으로 덜 든다'는 것만 보고 왔는데..참 매력적인 거 같아요. 물가 싼 것 뿐만 아니라 살기에도 괜찮고, 건물들도 멋있고, 몰랐던 역사나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문화차이까지 알아가는 재미가 있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유럽내 프로축구 리그 중에 이렇게 저렴한 데는 없을 것 같네요, ㅎㅎ
그 값을 뛰어넘는 경험을 한 것 같아요.
저는 늘 타국 리그를 볼때 딱 두가지만 보는데 경기장 인프라와 관중 수만 따집니다. 케이리그 인프라는 전세계에서 무조건 15위 안에 들고 관중수도 20 위권 내에는 듭니다. 동유럽 중 터키,우크라이나,폴란드,러시아는 그나마 잘 되어 있긴 하나 여기도 중하위권 팀들 환경은 심각할 정도이죠. 유럽에 대한 환상이 여전하기에 케이리그가 얼마나 잘되어 있는지 모르는 이들을 보면 답답합니다.
우리나라도 참 좋은 편이죠. 우스갯소리처럼 적은 관중에 익숙해졌다곤 하지만.. 이번에 직관하면서 그래도 k리그가 참 잘 되어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수많은 유럽축구 리그들 중에서도 이피엘 라리가같은 빅리그를 쉽게 접하다보니 생겨버린 많은 편견과 오해들이 아쉬울 뿐입니다.
관람 후기 정말현장감넘치게 잘쓰시네요 다음 후기도 기다려 집니다 동유럽 특히 구소련권국가인데 동양권분들에 대한 인종차별이나 적대시하는모습은없나요...
감사합니다 저도 리투아니아는 독립한 지도 얼마 안됐고 그래서 국민들이 자부심이라고 해야될까요? 그런게 좀 세다고 들어서 인종차별에 대해 많이 걱정했는데 정말 걱정이 기우일 만큼 아무 일이 없네요. 아무래도 동양인 비율이 적어서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은 있어도 적대시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츤데레같은 느낌은 있어요. 겉보기에는 쌀쌀맞아 보이는데 그래도 웬만하면 잘 도와주려고 하는 편인 거 같아요. 특히 젊은 층일수록 확실히 생각이 더 열려있더라구요.
여기서 지내고 또 최근에 다른 유럽 몇 곳을 여행하면서 느낀 건데, 겪어본 국가들 중에 우리나라가 제일 불친절한거 같아요ㅋㅋㅋㅋ
글 잘 봤습니다 저도 해외에서 직관 해보고 싶네요 포항이 acl 나가서 해외원정가서 해외 첫직관이면 가장 좋을련만 ㅋㅋ
감사합니다 저도 포항 해외원정경기 직관 못한게 두고두고 아쉽네요ㅋㅋㅋ다시 잘 해서 꼭 직관갈 기회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재밌는글 잘 봤습니다 ㅎㅎㅎ 리투아니아 놀러간적 있었는데 빌뉴스에도 교환학생 많더라구요 ㅋㅋㅋ 호스텔에서 아저씨들이랑 아이스하키 보고온기억이!
즐거운 교환학생 생활 되시길!!
ㅎㅎ감사합니다!!
이런글 유니크하고 좋아요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곳에 계시네요.
덕분에 한편의 축구경기를 직관한 느낌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10년 전 발트3국 여행 다녀온 사람인데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인상이 제일 좋았는데 그때 생각이 나네요.
거리의 사람들이 다들 길쭉길쭉해서 저 사람들이 모델과 농구로 유명하다는게 납득이 됐는데ㅎㅎ
교환학생 시기 잘 보내시고 유럽여행도 조심히 잘하고 오시길 빕니다.
p.s. 우크라이나의 축구장은 위험해서 안간다는 사람들을 많이 봤었는데, 글쓴분께서도 잘 판단하시겠지만 현지 지인과 동행하시던가 VIP석으로 가시던가 하는 식으로 안전에 유의하시길.
감사합니다ㅎㅎ 안전문제에 더 신경써야겠네요!
국톡분들에게는 흔하디 흔해서 은근히 보기 힘든게 양질의 직관글인데
이건 흥미롭게 다 읽었습니다 ㅎㅎ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리투아니아 리그를 직관한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문득 궁금해집니다.ㅎㅎ
와우 리투아니아 ㄷㄷ
독특하죠ㅋㅋㅋ
와...너무재밌어요. ㅜㅜ
감사합니다!
유럽 특유의 저런 칙칙하고 차분한 날씨가 좋음
맑을 때는 맑은대로 흐릴 때는 흐린대로 나름의 분위기가 있어서 좋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ㅎㅎ한번 경험해 볼만하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넵 감사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