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엔 길이 없어 / 박태일
그리움엔 길이 없어
온 하루 재갈매기 하늘 너비를 재는 날
그대 돌아오라 자란자란
물소리 감고
홀로 주저앉은 둑길 한 끝
그리움 베리에이션 / 이경철
별거 아니에요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거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거 별거 아니에요
가뭇없이 한 해 가고 또 너도 떠나가는 거
별거 아니에요
바람 불고 구름 흘러가는 거
흘러가는 흰 구름에 마음 그림자 지는 거
마음 그림자 켜 켜에 울컥, 눈물짓는 거
별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찌 한데요
텅 빈 겨울 눈밭 사각사각 사운거리는 저 갈대
맨몸으로 하얗게 서서 서로서로 살 부비는
저, 저 그리움의 키 높이는 어찌 한데요
해가 또 가고 기약 없이 세월 흐르는 건 별거 아닌데요.
그리움을 수선합니다 / 조영민
오랫동안 묵혀둔 아버지의 문서를 버리는데
언제 오셨는지
나의 등 뒤에서 구겨진 문서를 하나하나 펴시는 아버지
소문대로라면
평생 남의 논밭만 경작하고 몽당 담배만 골라 피우셨다던,
그가 평생 경작한 꽃은 나였지만
나는 그에게 후끈한 파스 한 장 되어주지 못했다
지금, 모락모락 먼지로 돌아가려는 모든 문서를 버린다
희망조차도 중고품인 이 집에서 나는
장날이면 눈에 띄던 양은냄비 같은 새 달을 갖고 싶었다
올봄 새롭게 유행할 봉숭아꽃이나 고장 없는 오솔길 하나
장만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래된 기억일수록
들춰보면 모두 헐었거나 수선한 것들이 전부였다
때로는, 동생의 웃음과 깨진 햇빛도 늘 꿰매 쓰던 그가
장독대의 벚꽃을 수선하는 데 꼬박 일 년이 걸렸을 때는
감자꽃 같은 희망이 원인인 줄 알았다, 그 후로도 줄곧 나는
달빛과 야심한 닭 울음소리를 무수히 허비했고
그는 그때마다 나의 사춘기를 붉게 수소문하곤 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의 묵정밭이었다
그가 나의 웃자란 객기를 솎아내는 동안
나는 그의 희부연 여생을 아무런 가책도 없이 허물곤 했다
새로운 묵정밭을 일구려 하셨음일까
재작년 저 세상으로 들일을 가신 후, 아버지는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와도 집으로 돌아오시는 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