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70년대 청년문화의 중심 ‘명동 청개구리의 집’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포크가수들이 1971년 서울YWCA 내 ‘청개구리의 집’에서 개최된 제2회 청개구리 사운드 공연에서 노래하고 있다. 최규성 씨 제공
1970년대는 격변의 시기였다. 냉전과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극도의 불안감이 팽배했던 당시, 자유와 평화를 외치는 반전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끓어올랐다. 그 중심에는 청년들이 있었다. 청년들을 하나로 만든 것은 모던포크와 록 같은 새로운 음악이었다.
군사정권에 의해 통제 분위기가 극에 달했던 답답한 현실에 당대의 젊은이들은 숨이 막혔다. 탈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 문화적 돌파구의 멍석을 서울 중구 명동1가 1-1에 위치한 서울YWCA에서 깔아 주었다.
한국 포크의 성지, 1970년대 청년문화의 중심으로 평가받는 명동 ‘청개구리의 집’이 탄생되는 시대적 배경이다. 1970년대는 기성세대들을 뒷방으로 물러나게 만든 청년들이 대중문화를 주도했던 새로운 시대였다.
청년문화는 흔히 통기타, 생맥주, 청바지로 대변된다. 그 세 가지 키워드로 당대의 청년문화 전체를 풀어낸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지만 그 중심에 통기타와 포크송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지금과는 달리 당대의 젊은이들은 놀 공간이 변변치 못했기에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기회가 적었다. 이에 서울YWCA는 청소년들에게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급한 대로 직원식당을 개조해 주일을 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후 7∼9시 2시간 동안 개방했다. 43년 전인 1970년 6월 29일의 일이다.
처음 서울YWCA의 의도는 달랐다. 저소득층의 젊은이와 외국에서 여행 온 젊은이들 그리고 지방에서 여행 온 젊은이들에게 싼값으로 숙소를 제공하는 유스호스텔과 비슷한 성격의 숙소를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기금이 확보되지 않아 젊은이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라도 제공하고자 안뜰 구석 큰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 있던 단층 건물을 청개구리의 집으로 개조했던 것. ‘청개구리’라는 이름은 물가에 어울리는 버드나무의 이미지, 젊은이의 반항정신, 끊임없는 도약의 의미였다.
60평이 넘는 넓은 실내 바닥에는 녹색 카펫을 깔았고 입장하는 사람은 모두 신발을 벗게 했다. 메뉴는 단 한 가지 콜라뿐이었다. 콜라 한 잔 값으로 99원을 내면 누구나 입장이 가능했다. 오후 7시 개장해 9시까지 운영된 청개구리의 집이 처음 오픈했을 때는 별다른 시설이 없었다. 의자도 테이블도 음향·조명시설도, 심지어 방석도 없었다. 창고에 카펫만 깔아놓은 소박한 풍경이었다.
손님 중에 기타를 들고 와 노래하는 친구가 생겨났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주위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이동할 수 있는 얕고 둥근 무대 옆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이후 인테리어에 신경을 쓰면서 천장과 벽도 모두 푸른색으로 칠해졌고 유리창마다 온통 연꽃잎이 그려져 있어 아늑한 연못 속에 들어온 분위기를 연출했다.
청개구리의 집은 일주일을 단위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같이 가요평론가 이백천이 운영했던 포크살롱 ‘아베크 李’, 상설 연극프로 목요극장, 언더그라운 시네마, 클래식 음악강습회, 요리강습, 명사와의 만남, 젊은이의 광장 토론회, 각 나라 민속축제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의자도 없는 불편한 공간이었지만 아무 불평 없이 바닥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음악을 듣고 연극과 영화를 즐기며 문학과 낭만을 이야기했다.
외국 번안곡이 세상을 지배했던 그 시절, 이곳에서 우리 노래 창작운동의 불씨가 생성되었다. 아마추어 대학생 포크가수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직접 그린 포스터를 붙이고 리사이틀 무대를 열기 시작했던 것. 1970년대 한국 포크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곳에서 서울미대생 김민기와 재수생 양희은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다. 양희은의 첫 모습은 화려한 의상이나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선머슴애처럼 청바지, 청남방, 청색 운동화 그리고 생머리에 통기타가 전부였다. 청개구리의 집 공연에 참여했던 원로 평론가 이백천의 기억이다.
“양희은이 청개구리에서 리사이틀을 했던 날, 경기여고 동창생들이 몰려와 대성황을 이뤘어요. 공연 후 어땠냐고 묻기에 ‘너무 흥분한 거 아냐? 좀 들떠 보였어’라고 말했는데 ‘나 노래 안 해! 다신 노래 안 해’라고 울음을 터트려 주위 사람들이 그를 달래느라고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가 스타로 떠오를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죠.”
당대 거의 모든 포크가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로 여성포크 창작앨범을 발표했던 방의경, 혼성듀엣 라나에로스포의 한민과 초대 여성 멤버 은희, 최안순, 남성듀엣 투코리언스의 김도향, 손창철, 서유석,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영세, 사월과 오월, 이주원, 최초의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도 청개구리의 집 단골손님이었다.
이용복은 등장 자체만으로 화제가 되었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방송 출연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런 제약 없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청개구리의 집에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1969년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한 김민기는 그림물감 값이 부족해 고교동창 김영세와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의 포크듀오 ‘도비두’를 결성해 대학가와 시내 음악다방에서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학업보다 음악에 더 큰 매력을 느낀 김민기는 서울YWCA 청개구리의 집 창단멤버가 되었다. 김민기는 고교동창 임문일의 소개로 재동초교 동문인 양희은과 만나 ‘아침이슬’ 같은 시대를 상징하는 명곡들을 빚어냈다.
또한 그곳에서 인연을 맺은 평론가 최경식과 기독교방송 김진성PD의 지원으로 1971년 명반으로 회자되는 첫 독집을 발표했다. 서울음대 작곡과 여대생 김광희는 김민기의 1집과 양희은의 1, 2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힘을 보탰다.
청개구리 무대를 통해 다운타운 최고의 통기타 가수로 떠오른 양희은은 김민기와 이용복, 김광희의 도움으로 1집을 발표해 한국 포크의 대모로서 첫 행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모두 청개구리의 집이 만들어낸 소중한 인연들이다.
1970년 소박하게 오픈한 청개구리의 집은 입소문을 타면서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6개월 후 유스센터 건립 모금을 위한 창작 포크송을 소개하는 페스티벌을 대강당에서 열었다.
평론가 최경식이 주관했던 이 공연에는 최양숙, 서유석, 김홍철,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서수남, 도비두, 라나에로스포, 에보니스, 아미고스, 미7사단 캄보밴드 등이 출연해 대성황을 이뤘다.
개관 1주년을 기념해 포크 페스티벌 ‘청개구리 사운드’를 개최했다. 이때는 서유석,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이용복, 쉐그린, 투코리안스 등이 참여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1년 남짓 운영 후 잘나가던 청개구리의 집은 갑작스럽게 문을 닫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적자 운영이었지만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이상 현상에 군사정권은 불안했을 것이다.
청개구리의 집은 10년마다 한 번씩 부활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1988년 ‘청개구리 마당’이란 이름으로 부활했었고 1990년대에도 이백천과 이정선이 주도해 부활 공연을 진행했었다. 디지털 세상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지난 2003년에도 서울YWCA 바로 그 자리인 1층 마루홀에서 ‘청개구리 포크 콘서트’란 이름으로 부활했었다.
당시 부활 청개구리 공연은 아이돌의 댄스음악 일변도 대중문화에서 소외된 386세대 팬들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그 시절 정통 포크가수들을 다시 불러내면서 시작된 일종의 대안문화운동이었다. 필자는 한국일보 기자 시절 1년 6개월 동안 이 공연의 운영자로 일한 인연이 있다.
당시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오후 8시, 서울YWCA 1층 마루홀은 100석 규모를 훨씬 넘는 180∼200여 명의 중년층이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 때론 자리가 없어 무대 앞에 주저앉아 2시간을 버텨야 했지만, 불평 한마디 하는 법이 없었다.
1970년대 당시 포크 열풍의 중심세대였던 청년들은 어느덧 삶에 지친 중년세대로 변해 있었다. 그들이 한 달에 한 번 애오라지 포크음악에 취해 그들만의 문화를 만끽했던 것은 문화사각지대로 내몰린 소외감이 원동력이 되었다. 부활된 서울YWCA 청개구리 공연은 지친 중년들의 쉼터 역할을 넘어 포크송을 통해 젊은 세대들과의 교감이 이뤄지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청개구리 1세대 서유석, 이용복, 김광희, 방의경부터 김의철, 윤연선, 현경과 영애 박영애, 양병집, 이정선, 그리고 김두수, 이원재, 이성원, 나팔꽃 동인, 이정미, 전경옥, 손지연, 박강수, 손병휘, 손현숙 등 통기타 가수들은 포크음악의 부활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특히 이틀에 걸쳐 진행된 고 김정호의 트리뷰트 공연은 지상파 8시, 9시 뉴스를 타고 소개돼 대성황을 이뤘다. 1년 6개월 이어진 부활 청개구리 공연은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대중음악계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결국 7080 음악 부활로 이어졌다.
‘젊은이들에게 보람 있고 즐거운 대화의 공간을 마련해 준다’는 취지로 생겨난 서울YWCA 청개구리의 집은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노래한 국민가요 ‘아침이슬’이 처음 발표된 한국 포크의 성지로 평가받는다. 지금은 대형건물이 들어서 사라졌지만 1층에 위치한 마루홀은 청소년들의 문화공간으로 여전히 그 역할을 이어 가고 있다.
1970년대 명동 노래운동… 포크송 새로운 전기 마련, 노래동아리 탄생 밑거름
1968년 트윈폴리오에 의해 대중화에 성공한 포크송은 1970년대를 맞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전개된 노래운동이다.
1970년 서울YWCA ‘청개구리의 집’에 이어 1972년 6월 14일 명동 코리아나백화점 3층 문화 살롱에서 두 번째 노래운동 ‘맷돌 공연’이 시작되었다.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 이 공연은 명동 시공관(국립극장)에서 장현종, 임진수, 이탄 등 6명의 시인들에게 가사를 의뢰해 백순진, 김광희 등 대학생 작곡가들이 멜로디를 만들었다. 김민기, 양희은, 4월과 5월, 서유석, 송창식이 발표하는 실험적인 특별공연을 열었다.
서강대생 신창균은 당시 보사부 장관의 아들. 맷돌 공연이 군사정권의 감시와 제약 속에서도 한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역할이 컸다.
1975년 2월 “순수하고 진실한 민족의 얼이 담긴 창작노래로 혼탁한 사회를 정화시키고 경종을 울리겠다”는 목적을 표방한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 태동했다. 음악다방 DJ 출신인 함장 구자룡과 총무 구자형 형제가 주도했고 한돌, 구자형, 정태춘, 곽성삼, 강인원, 명혜원, 남궁옥분, 유한그루, 이종만, 개그맨 이홍렬 등이 이 모임에 참여했다.
인공적인 조명이 아닌 촛불을 켜고 진행된 참새를 태운 잠수함 공연은 1년간의 서울 동숭동 시대를 접고 해바라기 공연이 사라진 명동 가톨릭 여학생회관으로 무대를 옮겼다. 1979년 해체된 참새를 태운 잠수함을 끝으로 10년의 명동 포크송 운동은 마감됐다.
'참새를 태운 잠수함’
첫댓글 그때 그시절로 소환해봅니다
음악을 엄청이나 듣고 다녓던 70년대
명동거리를 매일 드나들듯이 다녓던
때를 생각해봅니다
김민기 친구 참좋아햇는데 금지곡으로...
여고시절
살던집 건너편이 Ywca였는데..
찬송가화음만 아름답게 들리던 기억밖엔 ㅎㅎ
거기는 못가봤네요
참
대단한 곳이였는디--
나도 그당시 친구한테 말만 들었지 한번도 몬가봤네
명동의 필하모니는 가끔 클래식 겉멋이 들어서리 왔다리 갔다리 ㅋ
종로의 르네상스도 ㅎ
@애니
크래식음악감상실 다닌건..수준급 사람 맞제 겸손하시기는..ㅋ
그옆 삼층 지대로인 본전다방이 대단한 시설이였구~
@희수 맞아 본전다방 참피온 다방등 유명한 다방이 많았지
울친구가 제주도에서 유학와서리 참피온다방옆 카톨릭 여학생 기숙사에 있어서리 가끔 놀러가던 생각도나고
명동성당밑의 파고파고라는 생맥집에서 한양공대 ROTC들과 미팅하던생각도 나고 ㅎㅎ
@애니 2005년인가 인터냇 시작함서 이사람 저사람 옛기억의 사람들 찾는다꼬 그당시 나의 파트너였던 사람을 수소문했던 생각도
그것도 참 오래전기억이네 ㅎㅎ
@애니
참피온다방 알믄
맞은편 산타나다방은?
블랙앤화이트로 꾸민 완죤 롹다방이였지..
성당밑 하면
뉴중앙다방. 막걸리튀김골목 다 생각난다
올여름 그동네 지나는데
아예 흔적도 없드라~
넘 오래 살았나싶구 ㅋㅋ
@희수 산타나 다방은 모리것네 ㅎ
아이구 튀김골목 유명하제
거기 재개발 한다니까 그곳 상인들만이 아니구두 반대하는 사람들 많았제
추억의장소가 없어지니
하지만 서울시에서 하는일을 누가 막을수가 ㅠ
@애니 희수님, 애니님
본문보다 더 재미있는
두 분의 정겨운 채팅 ~ ^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