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처서인데 더위는 쉬이 꺾일 것 같지가 않습니다. 매년 돌아오는 절기마저 똑같지 않다(차이)는 들뢰즈의 말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의 주제가 ‘율법과 성전’이라고 한 말을 뭣도 모르고 말했던 찐빵 시절이 있었습니다. 스가랴서를 끝내면서 제 머릿속에 오롯이 이미지 모션 되는 그림은 결국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세우신 계획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성결‘한 성전(성도)이었고, 율법을 통해서 이 성전을 짓는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
‘거룩하고 흠 없는 백성’이란 단어도 성경공부 입문할 때 들었는데 Q. T를 강조하던 성서 유니온 까까머리 윤 총무님이 생각이 많이 납니다. 생각난 차에 언급하자면 평신도의 눈높이에 맞게 신학, 영성, 소그룹 진행을 가르쳐 준 L T C 룸메이트 박 대영 목사에게 감사를 전해야겠습니다. 요나서 히브리서-에베소서를 가지고 성경 해석학을 목숨 걸고 강의해준 에스라의 이 교수에게도 문안합니다.
-
얼치기 청년에게 소그룹과 자료들을 손수 챙겨주고 수년간 차별 없이 교제해 주신 성서 유니언 북부지부 유 목사님께도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합니다. 목욕탕 모임에서 발가벗고 했던 자기부정 배구도 생각이 납니다. 코로나를 이기지 못하고 작년에 돌아가신 영정 앞에 꽃 한 송이 바치고 돌아왔습니다. 에스겔서는 영동 교회 박 목사님, 룻기는 총신의 김 지찬 목사님, 바울서신은 털보 김 세윤 목사님께서 해박한 지식으로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
"죄란 놈은 사망으로 월급을 준다"느니 "예수님의 통장으로 내가 입금이 되었다"라는 표현은 내 수준에서 귀에 쏙쏙 들어오는 언더스텐입니다. "약한 자가 곤궁에 처했을 때, 강한 자가 무조건 적으로 베푸는 사랑과 충성"을 듣고 제 닉네임이 되어버린 '헤세드'도 또력히 기억합니다. 이사야서는 미남 교수 송 병현 목사의 유창한 통역이 생각납니다. 양 무리 서원의 이 중수 목사님의 시편23편 강의를 듣다가 그분의 독서법과 문학적 스피치에 홀딱 빠졌습니다.
-
양용의 교수의 산상수훈과 스피치, 김 서택 목사의 초창기 설교도 제 성장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묵상하다가 곁길로 새긴 했지만 거론한 이 모든 분들은 하나같이 ‘새 창조’ 신학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율법과 성전’이라는 주제도, 스가랴서의 결론이 ‘성결’로 귀결 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남은 백성으로 대변되는 예루살렘의 구원이라는 주제(1-11)에 이어, 여호와의 날( 슥14:12-21 )의 궁극적인 본질이 드러납니다.
-
메주야!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인생을 살려면 반드시 철학을 하시라. 아비가 50이 넘어 철학을 시작했다만 내가 짦은 시간에 진도를 뺄 수 있었던 건 문학+글쓰기+성경공부 40년이 있었다고 봐. 공동체를 나올 생각이 없거든 큐디도 하고 pbs를 시작하시라. 만약 성경공부가 뿌리내리지 않으면, 환경이나 결혼 같은 변화를 맞을 때 남는 게 없을 수도 있다. 창세기 안에 이미 ‘형상’과 ‘문화 명령’이 들어 있으며, 그 속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도 대화할 수 있음을 배우는 일은 지금도 흥미롭구나.
-
성경이 말하는 ‘새 창조’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면, 들뢰즈가 말하는 ‘생성’은 차이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이 태어나는 과정이고, 복잡계의 ‘창발’은 질서와 무질서의 경계에서 새로운 구조가 솟아나는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 관점을 통해, 변화와 혼돈 속에서 피어나는 창조적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결'한 삶이란 혼돈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용기 아닐까?
2025.8.22.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