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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갈라 1,13-24
복 음 : 루카 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을 찾는 회개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축일이자 제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어제 저녁식사때는 수도원에 머물고 있는 안동교구 정영훈 프란치스코 부제와 함께
수도형제들의 따뜻한 축하도 받았습니다.
형제애를 실감나게 확인하는 것이 축일맞이 저녁식사 때요 식사 후 형제들 각자와의 진한(?) 축하 포옹입니다.
한 형제는 가을의 들꽃들 가득 담긴 꽃꽂이도 선물 해줬습니다.
매년 영명축일을 맞이할 때 마다 떠오르는 말마디는 ‘하느님을 찾는 여정’입니다.
하느님을 찾아온, 또 찾게 될 여정을 저절로 성찰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찾는 여정은 동시에 회개의 여정이자 하느님께 점차 가까워지는 여정을 뜻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종파를 초월하여 가장 사랑과 존경을 받는 분이요
성인의 삶 역시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가톨릭으로 오기 전 개신교에 다닐 때 알았던 가톨릭의 성인은 프란치스코 한 분이었고,
처음으로 안 수도회도 베네딕도 수도회 하나뿐이었습니다.
가톨릭에 온 후 세례명은 물론 수도명은 지체 없이 프란치스코로 정했고,
이어 1982년 왜관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했습니다.
세월 지나고 나니 새삼 하느님을 찾는 회개의 여정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밖으로는 山/안으로는 江
천년만년千年萬年 임 기다리는 산/천년만년 임 향해 흐르는 강”
자주 되뇌는 제 자작 애송시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을 찾는 여정을 상징하는 시입니다.
정주定住의 산은 정주의 수도승 성 베네딕도를 닮았고 끊임없이 흐르는 강은
탁발 수도자 성 프란치스코를 닮았습니다.
하여 위 시를 다음과 같이 읽으며 베네딕도 수도회 안에서
프란치스코 수도사제로 살고 있는 제 신원을 확인하곤 합니다.
“밖으로는 베네딕도/안으로는 프란치스코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베네딕도/천년만녀 임 향해 흐르는 프란치스코”
마침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과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절묘한 보완관계를 연상시키는 시입니다.
두 분 다 색깔은 다르지만 똑같이 하느님을 찾는 여정의 모범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성인 같은 교황님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독서의 바오로도 하느님을 찾는 회개의 여정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우리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을 찾는 회개의 여정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의 바오로의 하느님 찾는 삶의 여정은 참 극적이며 비상합니다.
다음 고백이 그의 흔들림 없이 여정에 항구할 수 있었던 내적체험의 비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 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보십시오. 문장의 주어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삶의 문장의 주어 역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주도하시어 바오로의 여정을 인도해주셨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오늘 지금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내가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 친히 부르셨고 보내셨음을 깨닫습니다.
축일을 맞이하여 언젠가 강론에서 밝혔던 제 세가지 소원을 다시 확인합니다.
1. 죽는 날까지 요셉수도원에 정주하는 것.
2. 죽는 날까지 매일 강론을 쓰고 미사를 봉헌하는 것.
3. 죽는 날까지 메테세콰이어 가로수길, 수도원길, 하늘길을 걸으며 기도하는 것.
저뿐만 아니라 우리 수도형제들에게 하느님은 모두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평생 끊임없이 ‘하느님의 일’인 성무일도를 바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에게
하느님은 우리 삶의 존재이유이자 모두일 수뿐이 없습니다.
문득 산악계의 전설인 이탈리아인 라인홀트 메스너가 첫 방한한 후 인터뷰 한 대목도 화두처럼 잊혀지지 않습니다.
“산이라는 현실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요. 그 산은 ‘불확실’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신은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며 환상입니다.
불변의 진리는 자연에 있고, 행복은 산의 정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발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발견입니다.
아직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의 반응입니다. 새삼 발견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불변의 진리는 하느님께 있고, 행복 역시 하느님께 있다는 우리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을 찾는 회개의 여정은 평범합니다. 바로 마리아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섬기는 모범을, 환대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우선적인 것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회개의 시스템 같은 일과표에 충실하여 성전에서의 주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회개의 여정에, ‘회개의 일상화日常化’에 이보다 더 좋은 평범한 수행은 없습니다.
주님은 마르타의 불평에 마리아가 옳았음을 판정해 주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마르타의 수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우선순위를 바로 잡아 주십니다.
필요한 것 한 가지 좋은 몫은 하느님을 찾는 일이요,
주님이 바라시는 대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주님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염려와 걱정은 줄어들고 삶은 단순해지며 깊은 내적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평범하나 가장 좋은 회개의 수행이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마리아와 함께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온갖 좋은 것을 다 베풀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루카11,28).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바쁘게 운전할 때가 있습니다. 약속시간이 촉박하거나, 급하게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
초조해지는 마음을 안고 운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신호등의 시간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늘 이렇게 시간에 쫓기며 살았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승강기를 탔을 때에는 가려는 층 숫자를 누른 뒤에는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누릅니다.
자판기에서 커피 버튼을 누르고는 커피가 다 나오지도 않았는데 입구에 손을 미리 집어넣고서 뽑을 준비를 합니다.
컴퓨터의 부팅 속도가 느리다면서 투덜거릴 때도 많았습니다.
비행기 탈 때에도 맨 먼저 타려는 것인지 일찍부터 힘들게 줄을 섭니다.
신호등의 시간이 길면 또 얼마나 길까요?
승강기 탔을 때 닫힘 버튼을 눌렀다고 얼마나 이득을 볼까요?
커피 나오는 입구에 손을 넣고 있으면 커피가 더 빨리 나올까요?
컴퓨터 부팅 속도의 차이를 운운하는 사람이 정작 타자를 독수리 타법으로 치고 있다면 어떨까요?
비행기를 가장 빨리 타든, 늦게 타든 상관없이 비행기는
똑같은 시간에 출발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서두르는 마음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요?
좀 더 뒤의 시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앞에 있는 시간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늘 이렇게 급하게 매달리다보니 마음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삶이 후회투성이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코앞에 있는 시간에만 매달리는 삶이 아니라, 조금 더 멀리를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내 삶 안의 후회들도 하나씩 줄여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와 그의 동생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초대했기에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만 있을 뿐이었지요.
이 모습이 밉고 얄미웠나 봅니다. 그래서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하십니다. 마르타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눈앞의 일에만 매달려서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눈앞의 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일에 집중하고 그 말씀을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눈앞의 일에만 매달려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보다는 좀더 넓은 안목을 키워서 하느님 나라의 일을 바라보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마르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있었던 일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말씀>의 핵심은 마지막 구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마르타 마르타야!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그렇습니다. 결코, 빼앗겨지지 않는 그 무엇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는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을 지니고 있다’는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죽으시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베타니아에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요한 16,23)에 대해서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결코 ‘빼앗기지 않을 그 무엇’,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인 그 무엇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한 가지”는 ‘전부’인 하나입니다.
이것 하나만 지니고 있으면, 다른 모든 것을 얻게 되는 “한 가지”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께로부터 주어진 것이요, 선사받은 것입니다.
결코 나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요, 내가 만든 것, 내가 획득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이미’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한 가지’, 결코 ‘빼앗기지 않을 그 한 가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오눌 <복음>에서 세 번 반복되고 있는 “주님”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이 사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요, ‘전부인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빼앗겨지지 않는 사실이요, 그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거부될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진정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오로지 이 “한 가지”로 하여, 우리는 행복합니다. 이 “한 가지”로 이미 더할 수 없는 충만한 행복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 행복을 대신할 수 없는 행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이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마치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경청으로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렸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공간으로 내어드리는 일을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승복하는 일이요,
동시에 당신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허용하는 일입니다.
당신께서 나를 섬기도록 자신을 허용해드리는 이 일이야말로
바로 진정 당신을 섬기는 일이요, 당신이 주님 되게 해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이 우리에게 실상 필요한 것 꼭 한 가지요, 그것은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정작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無爲而無不爲의 단계, 곧 무위(無爲)의 도(道)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사실은 전부를 하는 신령스런 도(道)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멘.
주님!
이 한 가지로 하여,
가난을 기쁨으로 살겠습니다.
당신께 속한 자만이
진정 가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가지로 하여,
낮추어 섬기겠습니다.
속한 자만인 진정 낮아질 수 있고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전부를 하는 이 신령스런 일이
바로 당신의 소유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지
실상 필요한 한 가지만을 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주님 되게 하는 일,
바로 그 일만 하게 하소서! 아멘.
자기 몫에 기뻐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의 몫을 행하고 또 그 몫에 기쁨과 감사함을 지닙니다.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알고 확신이 서 있다면 그 몫을 행하는 것에 배 아플 것도 없고 기쁨이 클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고,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르타가 마음이 상했는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루가10,40)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가10,41-42).
마르타의 몫도, 마리아의 몫도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마리아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로마10,17)'.
말씀을 기초삼지 않은 행동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 깨닫게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 해야 할 일을 하게 됩니다.
내 뜻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찾게 됩니다.
마르타는 다소 불평어린 어조로 예수님께 말씀 드렸는데 그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역할을 다 했으면 그것으로 족해야지 생색은 왜냅니까?
열심히 일해 놓고는 마음에는 화를 잔뜩 담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내 몫이었으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스스로 주님을 위해 시중을 들었으면 그 자체를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인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면 그 활동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다시 말하면 활동은 기도 안에서 나온 활동이라야 참된 활동이 됩니다.
또한 기도를 하면 할수록 활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합니다. 활동이 없는 기도는 또한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 안에서 좋은 몫을 택할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몫이 주어졌든 최선을 다했으면 그 자체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가12,31).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뒤로 미루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기억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은 참으로 좋은 몫을 택하신 분입니다.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 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모든 세상의 부를 포기할 수 있었고, 세속적 욕망으로 무너져 가던 교회를
청빈의 정신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성인은 예수님의 오상을 받았으며 주님을 온전히 차지하셨습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을 통해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은총 안에서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교회가 개별 은사자들을 대하는 자세
전삼용 요셉 신부
잔 다르크(프랑스어: Jeanne d’Arc, 1412년 1월 6일 ~ 1431년 5월 30일)는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다.
오를레앙의 성녀(la Pucelle d’Orleans)라고도 불립니다.
프랑스 북동부 지방 동레미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잔 다르크는
그녀의 나이 12세 때인 1424년에 환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는 들판에 혼자 있었는데 성 미카엘과 성녀 카타리나
그리고 성녀 마르가리타가 그녀 앞에 나타나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고
도팽 샤를을 대관식을 위해 랭스로 데려가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백년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왕세자였던 샤를 7세가 프랑스의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부르고뉴 시민들에게 사로잡혀 현상금과 맞바꾸어 잉글랜드 측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잉글랜드는 잔 다르크를 재판장에 세워 반역과 이단의 혐의를 씌운 후에
말뚝에 묶어 화형에 처하였습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9세였습니다.
교회는 오랜 기간 그녀가 진정 주님께로부터 계시를 받고 전쟁에 참여했던 것인지
사탄에 속았던 것인지를 고민해왔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500년가량이나 됩니다.
결국 잔 다르크는 1909년 복자로 시복되었으며, 1920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습니다.
프랑스 아비뇽으로 교황님이 유배 가 있을 때도 하느님은 성녀 카나리나와 성녀 비르짓다 등에게
사적 계시를 내리시어 교황님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교회에 충만히 주시기는 하셨지만 여전히 개별적인 은사에 도움을 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잔 다르크만 보더라도 교회는 그에게 오는 개별적 은사가 진정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구별하는데 수백 년이나 걸렸습니다.
왜 주님은 교회에 직접적으로 계시를 내리시어 이끄시지 않고 저런 개별적인 성인들의 도움을 받게 하실까요?
주님께서 그런 개별적인 계시로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만든 인물이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 입장에서는 말썽쟁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 베드로를 기반으로 사도들을 기둥으로 교회를 세우셨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개인적으로 나타나시고 개인적으로 진리를 깨우치게 하셨습니다.
워낙 바오로가 훌륭한 신학자여서 할례 논쟁에서 교회는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지만
바오로는 명확히 그런 법은 더 이상 따를 필요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세례를 받고도 바로 사도들에게 인준을 받으러오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와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뒤에서야 베드로를 만나려 예루살렘에 갔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베드로가 할례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계 그리스도교인들을
어려워하는 것을 보고는 그를 사람들 앞에서 나무라했습니다.
첫 교황님의 권위를 사람들 앞에서 깎아내린 것입니다. 이 정도면 교회의 말썽쟁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든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면 교회와 상관없이 복음을 전해도 되는 것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 복음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뒤,
예루살렘에 올라가 다시 사도들을 만나려 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십사 년 뒤에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티토도 데리고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나는 ‘계시’를 받고 그리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을 그곳 주요 인사들에게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에 한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2,1-2)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자신이 하는 복음 선포가 헛된 일이 되지 않도록
예루살렘 교회 인사들을 만나 설명하고 허락을 받아야 할 필요를 ‘계시’로 받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바오로 사도도 교회의 권위를 존중할 수 있도록 직접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지만 바오로 사도가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신약성경 절반이 바오로가 쓴 편지의 내용입니다. 그만큼 초대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기는 하셨지만 주님은 바오로와 같은 인물을 직접 뽑으셔서
성령을 충만하게 해 주심으로써 교회가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성령님의 힘으로 살아가지만 성령님은 교회 밖에서도 활동하시며 교회가 도움을 받게 하십니다.
이는 교회 전체 이익을 위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으나,
그런 것을 통해 교회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시기 위한 뜻도 분명히 있으실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을 누가 제한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여기저기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에 도움이 될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성령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교회에 불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의 활동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제한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은사를 받은 자들로 인해 더욱 풍요해집니다.
어쩌면 교회에 대해 쓴 소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교회는 아직 성장해가고 있는 이상 겸손해져 자꾸 더 배우려고 노력해야합니다.
바오로가 없는 교회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개별적인 은사자들이 없는 교회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이런 긴장과 서로간의 도움 안에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도 소위 사적계시에 의해 쓰여진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열권의 책입니다.
초대교회는 겸손하여 바오로의 개인적 파견을 인정할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교회는 성령의 눈으로 분별합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영성가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거나 제한하지 말아야합니다. 물론 사탄에게 속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교회에 순종하지 못할 것이고 그것으로 분별이 될 것입니다.
교회에 순종하는 개별 은사자들은 그 성령의 불을 자칫 끄지 않도록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에게, 또 많은 성인 성녀에게 교회가 도움을 받으며 지금까지 성장해 왔던 것처럼
개별적은 인사들도 그것이 사적계시라는 이유만으로 무시하고 묻어버리려고 해서만은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