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물지 않는 시린 상처-- “더 이상 아무도 믿지 않는다”…그래도 `희망'을 만들고픈 그들의 소망
“회사가 나를 버렸다. 그리고 언제든 다시 버릴 수 있다” “겨울에 보일라도 못 때는 기라요. 아들은 금방 크니까 옷도 금방금방 줄잖아요. 손님 왔다고 이불 뒤집어쓰고 있던 아가 일랐는데 배꼽티가 되삐는 기라… 그거 보고 자꾸 눈물이 나는데…
“그란데 그아는 유치원에 가고 싶어가꼬 아침마다 유치원 문 앞에서 노는기라… 그거를 지나가던 저그 아바이, 어마이가 본기라… 그놈아가 가슴이 찢어지더라카면서 꺼이꺼이 우는데…”
이미지는 참 묘한 것이다. 남쪽 항구도시 울산을 생각하면 `분주함'과 `현대'가 중첩되어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이미지 때문일게다. 그리고 또 하나. `골리앗' `식칼' `오토바이 부대'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울산 노동운동의 전통을 기억하는, 혹은 그리워하는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 울산은 노동자의 도시다. 구청장을 내기도 하고, 또 노동자후보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을 보일 정도로 `노동의 힘'이 결집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울산은, 아니 적어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 북구 양정동 700번지는 `아픔의 도시'다. 그곳 사람들 누구도 기억하기 싫어하는, 입에 담기 꺼려하는 98년 봄부터 여름까지 양정동 700번지는 `정리해고'를 둘러싼 고통과 아픔, 그리고 투쟁의 현장이었다.
그후 3년,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고 있는 지금,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2001년 `양정동 700번지'의 봄 풍경을 담아봤다.
4월의 끝자락, 울산은 평온했다. 현대왕국을 이루고 있는 북구로 접어들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현대자동차 공장이다. 그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현대하이스코, 현대중공업 등 현대라는 이름을 단 공장들이 이어지고 곧장 방어진이라는 바닷가가 나온다. 이곳의 풍경은 예년과 다를 바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현대그룹'의 울타리에 있던 이들 회사들이 더 이상은 `한 식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대자동차 정문을 들어서면서 솔직히, 3년 전의 일을 기억하고들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괜히 아픈 기억만 들추어내는 건 아닐까. 걱정 속에 그들과 첫 대면했다.
노동조합 사무실 맞은편에 있는 1공장 식당 앞에서 만난 의장1부 이희택(36)씨. 91년에 입사했으니 벌써 12년차다. 별로 할 말이 없다던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그 `사연'을 하나둘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현장은 3월부터 술렁이고 있었다. 정리해고를 `한다' `아니다' 소문만 무성했다. 그리고 5월에 들어서자 반장들이 한사람씩 면담을 하기 시작했다. 다음 순서는 `노란 봉투'가 정리해고 대상자들에게 전해졌다. 어떤 반에서는 조회시간에 대상자를 발표하기도 하고, 또 어떤 반은 개인적으로 불러서 알려주기도, 집에 우편으로 보내기도 했다. 1차 대상자 700여명에게 정리해고 통지서를 전하는 데만 1주일이 걸렸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그 1주일을 잊지 못한다. 의장3부에서 일하는 백창근(32)씨는 그 때를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고 했다. “사람들이 다들 옆 반 소식에 신경 쓰면서 자기가 대상이 아닌지 가슴 졸였습니다” 수 천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해고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양정동 700번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거대한 심리적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때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고과평가를 한 조·반장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만약에 조·반장이 내 이름을 안 올렸으면 정리해고되지 않았을 거 아니냐'는 것. 분노의 화살은 조·반장을 향해 날아갔다. “장난 아니었십니더. `노란 봉투' 받은 사람들이 칼 들고 조·반장들 지기삔다꼬(죽여버린다고) 잡으러 댕깄습니더” 작업장 입구에서 만난 박모(34)씨의 증언이다.
그들은 칼을 들고 반장 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차를 박살내 놓기도 했다. 심지어는 반장 책상에 칼을 꽂아놓은 사람들도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책상이고 뭐고 다 뿌사삐고(부숴버리고) 그랬어예. 회사만 알고 마누라보다 회사 동료들 얼굴 더 오래보고 살았는데 짤릿다카이(해고됐다고하니) 미치는기지 뭐” 한바탕 분노의 폭풍이 지나간 후에 사람들은 `체념'했다.
“그날부터 일주일 동안 문 밖에도 안 나가고 술만 마셨습니다. 술마시다 쓰러져 자고, 일어나면 다시 술마시고. 아무도 보기싫고 술밖에 생각이 안 났습니다” 식당에서 만난 이모(37)씨의 말이다.
다시 일주일. 몸을 추스른 이들이 공장으로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석 달간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그 때 집사람이 만삭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 짤리는 거는 못보겠다고 공장 안에서 천막농성 하면서 매일같이 시멘트 바닥에서 잤습니다. 그 때만 생각하면…” 소형엔진부 강대진(33)씨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IMF를 앞세운 `정리해고 당위론' 앞에서 그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 결론은 277명 정리해고, 1900여명 18개월 무급휴직, 8000여명 명예퇴직이었다. 98년 8월24일의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리해고자, 무급휴직자 2000여명은 거의 모두 현장으로 돌아왔다. 99년 5월부터 12월까지 9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일이다. 물론, 절대로 현대자동차에서는 다시 일하지 않겠다는 166명은 빼고, `반강제적인' 명예퇴직자 8000여명도 빼고 말이다.
어쨌든 그들이 돌아오는데는 1년 내외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그 1년동안 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분노와 체념, 투쟁의 뒤안길에 다시 삶의 문제로 돌아간 그들의 생활은 순탄했을까.
현대자동차에서 만나 인터뷰한 20여명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이 질문에 다다르면 우선 긴 한숨을 내쉰 다음 말을 시작한다. 그리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한다. 다시 5분만 지나면 목소리가 갈라진다. 그리고 메인 목으로 아픔 한움큼 삼키고는 멍하니 허공을 쳐다봤다. 상처, 끝끝내 새살이 돋아나지 않을 것 같은 시린 상처였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퇴직금이라고 돈을 줬어요. 그런데 정리해고에서 무급휴직으로 바뀌니까 퇴직금을 다시 내놓으라고 하더라구요. 반납 안 하면 이자는 이자대로 치고, 1년6개월 후에 복직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거죠. 그래서 돌려줬어요.
파업이 석 달간 계속됐으니까 당장 먹고 살 길이 없잖아요. 라면 하나 사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되는데. 현대백화점 앞 인력센터에 가서 아무 일자리나 달라고 줄 서 있었죠. 그리고 공공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타이어 펑크 나면 하나에 3000원 받고 때워주는 일도 하고, 굴뚝 청소도 해보고” (의장1부 L씨)
여기저기 눈물 배어 있지 않은 사연이 없었다. “겨울이 됐는데 보일라도 못 때는 기라요. 내도 마찬가지고 동료들 집에 가봐도 그렇고. 같이 일하던 사람 집에 갔는데 그 집 아(아이)가 감기가 들리가꼬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기라. 아(아이)들은 금방크니까 옷도 금방금방 줄잖아요. 손님 왔다고 이불 뒤집어쓰고 있던 아가 일랐는데(일어났는데) 배꼽티가 되삐는기라. 그거 보고 자꾸 눈물이 나는데 그 때 심정이 참…” (중형엔진2부 K씨)
“초등학교 다니는 딸애가 학교엘 안 가겠다고 떼를 쓰고 울더라구요.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친구들이 아빠 회사에서 잘린 거 다 안다고, 그래서 학교 가기 싫다고 그러는데 가슴이 무너져내립디다. 집사람은 화장실 들어가서 문 잠그더니 우는 소리 들리고…” (도장2부 P씨)
“같이 일하던 후배 큰아가 유치원에 댕기는데 보낼 돈이 있어야 말이지. 그란데 그아는 유치원에 가고 싶어가꼬 아침마다 유치원 문 앞에서 노는기라. 그래서 몬가게 했더니 이번에는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혼자 놀더라는거지. 오후에 저그 친구들 올 때까지. 그거를 지나가던 저그 아바이, 어마이가 본기라… 소주 한 잔 하면서 그놈아가 가슴이 찢어지더라카면서 꺼이꺼이 우는데…참말로 누구든지 걸리모 지기삐고(죽여버리고) 싶더라꼬, 그 때는” (시트생산관리부 K씨)
“초등학교 다니는 애가 학교에서 우유를 먹는데 그 우유 값이 없었습니다. 남들은 우유 값도 없다 그러면 과장이라고 하는데 안 당해본 사람은 모릅니다. 며칠 늦게 우유 값 4000원을 애 손에 쥐어줬는데, 안 가져가도 된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학교에서 급식하는 거 도와주는데 그거 하면 우유는 그냥 준다는 겁니다. 제 딴에는 돈 없는 아버지 걱정한다고 그러는데…. 어떡하든 먹고살겠다고 하청업체에 들어갔습니다. 기름때가 너무 더러워서 작업복을 세탁기에 넣지도 못하고 마누라가 손빨래하는데 빨래를 할 때마다 울어요” (출고사무소 S씨)
“정리해고 통보를 받고 집사람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제 출입증을 가져오더니 망치로 그냥 부숴버리데요. 출입증을 딱 대놓고 부숴버리는거예요. 말도 없이 계속 망치로 내리치더니…울더라구요. 계속…아무 말도 못했습니다…짐 싸들고 울릉도로 갔어요. 해고수당 받은 거 가지고. 내 딴에는 이 나라를 떠난다고 간 데가 울릉도였어요” (의장2부 J씨)
3년 세월, 그 동안 드러내지 않고 가슴속 깊은 곳에 꼭꼭 묻어두었던 날 선 칼에 베인듯한 아픔들을 다시 꺼내놓는 그들을 보면서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구조조정이라는 것, 흔히 국내에서는 정리해고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이 구조조정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많은 이들의 가슴에 멍만 남겼다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는 했던 걸까.
현대자동차 노사협력팀 박수철 부장은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선택”이었다고 밝혔다. “97년 IMF이후 경기변화에 민감한 고급소비재의 소비가 가장 먼저 감소했습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였죠. 정리해고에 앞서 6개월간 고용유지를 위한 노력을 해왔습니다. 97년말부터 임원들의 상여금을 반납하고 30%의 인원을 정리했습니다” 사실 위기인 것은 분명했다. 판매량은 40% 수준으로 떨어졌고, 특히 내수는 30% 수준으로 급감했다.
그래도 3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의 평가를 듣고 싶었다. “솔직히 지금으로서 평가를 내리기에 부담스러운 면이 많습니다. 우선 대우자동차 문제도 걸려있고, 또 평가가 끝나지 않은 부분이죠. 어쨌든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였던 노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날 이후로 회사의 관리체계는 완전히 무너졌다”는 게 이희택씨의 증언이다. 해고 대상자들이 조·반장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작업 현장에서의 관리체계가 허물어졌다는 것. 이는 회사측에도 인정하는 바다. 당시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조·반장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키다가 차츰 방향을 틀어갔다. “조·반장을 시킨 ×들도 나쁜 ×들”이라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이런 작업현장 와해 현상은 정리해고자와 무급휴직자의 복귀 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또 하나는 한국적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현장 생산라인의 `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가 무너진 것이다. 한국만의 독특한 정서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작업장 내부의 인간관계는 우리의 옛 전통인 `향약'이나 `두레'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서로에 대해 작업장 동료 이상의 애정을 가지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현대차의 경우에도 40명 가량이 일하는 한 반에 속해있는 사람들끼리는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다 알 정도였다. 그리고 말 그대로 `형님' `동생'의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 같은 관계와 공동체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정리해고 과정에서 누구는 반장 편을 들었다고, 또 누구는 회사측 돈을 받았다고 서로에 대해 불신하기 시작했다. 작업장 입구에서 만난 한 노동자의 말은 그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이제는 사람들하고 예전처럼 친해지려고 하지 않아요. 그저 일만 하는 거죠” 회사에서도 이 같은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대책을 내놓았다. 우선 임원과의 작은 규모의 대화시간을 자주 갖고 완전고용보장 합의서를 쓰기도 했다. 홍보팀의 관계자는 “IMF 이후 중단됐던 대규모 문화행사도 자주 열면서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걸로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아니라는 게 노동자들의 `슬픈 진실'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은 91년과 97년의 기억을 떠올렸다.
91년 8월 울산 지역은 태풍의 영향으로 큰 홍수를 겪었다. 방어진에서 현대자동차까지 버스가 다니지도 않았으며 시내 지역은 태화강의 범람으로 울산 전체가 물난리가 났다. 당연히 출근을 할 수 없게 됐고, 회사측에서는 공식적인 휴무를 선언했다.
그런데,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아니 회사측의 표현처럼 현대차 `식구'들은 새벽부터 그 물길을 뚫고 회사로 회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오라고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들이 만든 자동차가 물에 잠기는 꼴은 볼 수 없어서였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이 1만명이었다. 가까운 방어진에서 멀리 경주까지 자기 집이 물에 잠기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회사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당시 출고돼 있던 차량 3만대를 높은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물에 잠긴 차를 밀고 끌며 그들은 그 3만대를 모두 건져냈다. 그리고 물기를 닦아 냈다. 나중에 현대자동차는 3만대의 차량 중 3000대만 일부 하자가 있는 제품으로 할인 판매했을 뿐 나머지 차량은 모두 제대로 팔 수 있었다.
97년 4공장 도장부의 화재사건도 전설처럼 전해온다.
페인트칠을 하는 도장부는 각종 폭발위험이 있는 물건들이 널려있다. 소방관들도 회사 임원들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폭발 위험물을 모두 치워냈다. `내 공장'이 날아가는 것은 막자는 거였다. 3만대의 자동차를 살렸을 때 회사에서는 떡 한 접시씩을 돌렸다. 공장이 날아가는 것을 막았을 때 보상금 20만원을 건넸다. 불평은 했지만, 그들은 더 큰 `뿌듯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 회사를 살렸기 때문에.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지금 생각하모 미친놈들이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현실의 불만과 아픔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무급휴직 끝에 복직한 강재구(35)씨는 말한다. “그 전에 승용제품개발연구소에 있다가 1년 2개월만에 시트설계부로 부서를 바꿔서 복직했는데 다시 돌아왔을 때는 너무 낯설었습니다. 저자신과 가족들에게 너무 큰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죠. 그 전에는 항상 열심히 일하라던 집사람이 이제는 `눈에 보이는 일만 하라'고 그럽니다. 가슴 속에 응어리가 남은 거죠”
이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더 이상 회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건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손해다. 회사측 관계자들도 이쯤해서 솔직한 속내를 털어놨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한 간부들의 진단이다.
“일손이 딸리기 시작하면서 정리해고자와 무급휴직자를 복귀시키고 난 후에 그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상여금도 많이 주고 돈과 정성을 들였죠. 하지만 한 번 상처받은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회사를 안 믿어요. 언제든지 다시 버릴 수 있다는 거죠. 그 사람들을 다독거릴 방법이 없어요. 정리해고 정책은 완전히 실패한 겁니다”
그랬다. 만나는 노동자들마다에게 지금 이 시점에 이전과 같은 홍수나 화재가 다시 발생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져봤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내 일이 아닙니다” 몇몇은 질문을 하는 기자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들의 마음은 그렇게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울산의 저녁도 깊어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좀더 그들 가까이에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현장이 어떤 모습인지를 알고 싶었다. 2공장 의장2부로 들어갔다. 아토스와 산타페를 만드는 공장이다. 산더미같은 부품이 쌓인 곳을 지나면 콘베이어 벨트가 나타난다. 산타페 라인을 찾았다. 천정에는 차체가 매달려다니고 바닥에서는 끝도 없이 차체가 밀려들어온다. 이 라인에서만 하루에 500대의 산타페 완성차가 나간다.
이들이 하는 일은 차체가 지나갈 때마다 나사를 조이고, 부품을 끼우는 것이다. 그들 표현대로 단순조립공이다. 이들이 정리해고나 무급휴직 후에 생계에 곤란을 빚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내 최대의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다고 해서 이들이 자동차를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현대산업사회의 거대한 장치 속의 한 부분일 뿐이다. 찰리 채플린의 풍자가 짙게 묻어나는 `모던 타임스'의 한 장면 같은 공장이었다. 이들은 자기가 맡은 부품을 끼우는 일 밖에 할 줄 아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가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자동차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기증을 느낀다. 마치 바닥이 들려올라오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는다. 한동안 바닥이 움직이는 것인지, 내가 흔들리는 것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다가 아무 말 없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 곁으로 갔다.
그들은 기자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하려 들지 않았다. 한 작업자에게 다가가서 “혹시 이 중에 정리해고나 무급휴직 후에 복귀한 분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셋 중 하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때 옆에 있던 다른 작업자가 동료에게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넸다. “정리해고자 얘기는 가능하면 하지 마” 서로에게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망치로 바퀴의 부품을 끼우던 김지열(32)씨는 “겉으로 표현은 않지만 아직은 앙금이 남아있다”고 입을 열었다. 서로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자기 반의 35명 중 2명만이 원래 있던 부서 사람들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옆에서 기자를 안내하던 현장 관리직 사원도 “이 방법(정리해고) 밖에는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고 거들었다. 쉴새없이 자동차는 만들어져 나가지만, 그 자동차를 만드는 노동자들은 말이 없었다. 생기를 잃고 있었다.
답답했다. `희망'은 없는 것일까. 이 아픔의 공장을 밝힐 한줄기 희망의 빛을 찾고 싶었다. “그래도 우리 아니면 누가 한국 자동차를 만들어 내겠습니까” 들고 있던 스패너를 내려 놓으며 커피 한잔을 권하던 젊은 노동자의 목소리 속엔 작은 희망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한국 노동자의 `자존심'이었다. 절망마저도 녹여버리고, 분노를 풀무질 삼아 그렇게 다시 희망을 만들어가길 소망하고 있었다.
그 날 점심 시간. 2공장 식당 앞에서는 지난 4월10일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자들에 대한 경찰의 폭력진압 장면 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비디오 앞에 모여든 노동자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입을 꼭 다물고 연신 담배만 피워물고 있었다. 그리고 피 튀기며 쓰러지는 화면 속 사람들을 보며 부르르 떨던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즈막히 욕 한 자락을 내뱉고 돌아서는 중년의 노동자에게 비디오를 본 소감을 물었다. “남의 얘기가 아니네” 그 옆의 같은 연배로 보이는 또 다른 노동자가 말했다. “`우리' 얘기도 아니고 `내' 얘기야. 그 때(98년) 공권력이 투입됐더라면 나도 그렇게 맞았을 거야” 자신들의 또 다른 모습인양 비디오 앞의 노동자들은 그렇게 말을 잃었고, 또 그렇게 분노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 노사협력팀 박수철 부장도 안타까움은 마찬가지였다. “태풍예보를 듣고 배를 살리기 위해 고급품들을 버렸단 말입니다. 그런데 태풍이 비껴갔다면 후회스러운 부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때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겠지요”
소형엔진부에서 일하는 강대진(33)씨에게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 “만약 또 다시 정리해고자가 된다면 어떨 거 같으세요” 쓴웃음을 짓던 강씨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죽습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집사람하고 어린 딸한테 어떻게 그 고생을 또 시킵니까” 강씨의 목이 잠기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친구 김귀영(33·소형버스2부)씨가 말을 받았다. “죽긴 왜 죽어. 싸워야지. 누가 죽는지 한번 싸워봐야지” 그날 따라 유난히 하늘은 뿌옇게 흐려 해를 숨겼다. 전국적인 황사 영향이란다. 울산시 북구 양정동 700번지 하늘 위도 뿌연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들은 가장 흔한 단어는 `배신감' `분노'였다. 3년 전 `그 일' 이후로 그들은 너무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일터로 돌아온 그들은 더 이상 회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그 날'이 오면 가슴 속 그 칼을 움켜쥘 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