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과 화살이 되어라
이 좋은 봄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는 것을 축하해 주고 왔다.
주례할 때마다 부부는 삼생의 지중한 인연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남녀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중에서 서로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수천만 분의 확률이다.
그러므로 개자개침의 소중한 만남이다. 저 하늘에서 바늘 하나를 던져 그 바늘이 겨자씨에 꽂힐 확률은 아주 낮다.
부부의 인연은 이와 같이 깨알 같은 난관을 통과한 만남이다.
부부는 그 어떤 만남보다 전생의 인연이 작용한다.
아주 긴 시간과 세월을 기다려 왔다는 뜻. 전생의 인연이 강하면 금생에서도 그 기억의 느낌 때문에 끌림이 강하게 작용하는 원리다. 첫 만남에 끌림이 왔다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전생의 기억들이 현생의 끌림으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현생의 만남은 전생의 염원이 이루어 낸 결과다.
전혀 다른 사람과 만난 것 같지만 이미 전생에 알고 지냈던 사이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부부의 인연에는 우연이란 없다.
홍통의 어느 사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은 주련이 있다고 들었다.
“부부는 인연이 있어야 만나게 된다. 선한 인연도 있고 악한 인연도 있다. 악한 인연은 원수끼리 서로서로 보복을 한다. 아들딸은 빚이 있어야 만나게 된다. 갚아야 할 빚도 있고 받아야 할 빚도 있다. 빚이 없으면 찾아올 인연도 없다.”
이를 달리 풀어 보면 부부는 사랑으로 만나고 자식은 빚으로 만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부부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만나고 자식은 빚을 갚기 위해 만난다고 봐야 할 듯.
세상살이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다.
자식에게 무슨 빚진 사람처럼 정을 쏟고 온갖 정성을 다하는 것을 보면 부모로서 빚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식의 일로 인해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인데 어찌 빚쟁이가 아니랴.
그런데 부부 사이는 선한 인연도 있고 악한 인연도 있다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부부는 전생의 원수지간이 만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사랑하던 사이가 악연 관계로 둔갑하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 많으니까 더 이상이 설명이 필요 없는 부분이다.
어쨌거나 부부의 인연이 되어서 서로에게 큰 상처 주지 않고 백년해로한다는 것은 좋은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인디언의 어느 부족은 결혼하는 청춘 남녀에게 활과 화살을 선물로 준다고 한다.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는 활과 화살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다.
활은 화살이 없으면 쓸모없고 화살 또한 활이 없으면 그 기능을 못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부부는 따로따로 존재하면 활과 화살처럼 그 역할을 전혀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부부는 서로에게 활이 되고 화살이 되어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서로 떨어져 있지 말고 상호 보완하는 인연으로 살아야 만점짜리 부부다.
어린왕자가 “서로 얼굴을 쳐다보지 말고 같은 방향을 쳐다보라.”고 했는데 이 말은 가치관이나 목표의 방향을 맞추라는 조언이다.
그럴 때 부부 사이의 갈등이나 불화가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혼에는 세 개의 반지가 있단다. 약혼반지와 결혼반지, 그리고 고통의 반지다. 누구나 부부가 되면 고통의 반지도 생기는 법이다. 따라서 부부사이에는 행복만 있는 게 아니라 크고 작은 문제도 동반된다는 의미다.
태국의 고승 아잔차 선사의 법문에 이런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어느 부부가 산책을 나갔다가 말다툼을 하게 된다.
산책을 하다가 어떤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부인은 거위소리라고 말하고, 남편은 닭소리라고 우긴다.
결국 서로의 주장 때문에 싸움을 하게 되고 기분 좋은 산책길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아잔차 스님은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닭이든 거위든 상관없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조화이며 산책을 즐기는 일이다.”
이 땅의 부부들이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파경을 맞이하는지 모른다.
소소한 다툼 때문에 미워하고 원망하는 경우가 많다. 사소한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고통의 반지를 기억해야 한다. 부부의 성공은 그 관계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걀이 되지 말고 베이컨이 되어라.”는 충고도 있다. 이는 온전히 자신을 희생시키라는 뜻이다. 그래서 부부는 단순한 남녀의 관계에 머물지 말고 그 관계를 승화시킬 때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의 삶을 사는 나로서는 부부 사이의 다양한 사연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는 처지다. 그렇지만 당사자의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갈등하는 부부들의 문제점은 더 잘 볼 수 있다. 부부 불화에는 일방통행이 없다. 쌍방 과실이 더 큰 비율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주고 따뜻함이 되어 주면서 고난과 위기를 극복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이 땅의 부부들은 삼천 년의 생을 지나 다시 만난 사이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가.
출처 ; 현진 스님 / 산 아래 작은 암자에는 작은 스님이 산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