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그냥... 점멸하는 계기판을 보며 떠오른 이야기를 상상에 맡기다.
여의도에서 광화문을 지나 종로, 퇴계로까지
자정이 가까운 여의도는 한낮의 교통혼잡을 잊은 채 한산한 표정이다.
룸미러 옆에 보조로 붙여둔 볼록거울 덕에 운전 중이라도 가끔씩
힐끔거리며 그녀를 조목조목 뜯어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녀는 표정이
금세 변하곤 하는데 그것을 발견해 내는 것은 나의 즐거움 중 하나다.
그녀의 장난 끼 가득한 볼에 볼우물이 살짝 파인다. 질문은 내 쪽
에서 시작했는데 대답하는 그녀 쪽이 오히려 짓궂은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하긴 뭐, 열심히 공부만 하는 편은 아니었죠. 그래요, 뭐. 나 날라리
였어요. 어설픈 날라리. 연애두 하구..."
더 이상은 내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녀는 말꼬리를 흐린다.
이번엔 고개를 외로 꼬고 얼굴을 온통 창 밖으로 향해 두어서 도무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마포대교를 비추이는 나트륨
등이 한 개씩 지나갈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나는 다시 그녀 쪽을
훔쳐보았다. 마포대교의 가로등으로 확연히 드러나던 그녀의 목선이
다시금 어둠에 갇혔다.
차에 부착된 전자 시계는 초록색 형광 빛의 숫자를 1분에 한 번씩
바꾼다. 숫자가 달라질 때마다 그녀의 얼굴에 각기 다른 조명을 발산한다.
몇 번인가 그녀의 목선을 따라 초록 그림자가 다른 모습으로 그려졌다.
"있잖아요,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해 줄게요."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는 바람에 핸들을 놓칠 뻔했다.
다시 되찾은 그녀의 수다가 즐거웠다. 내가 자신을 힐끔거리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표정을 수시로 바꾸며 나를 즐겁게 했다.
그녀의 수다는 적당한 쉼표가 들어가 있다. 그저 일상에 대한 이야기일
뿐인데 그녀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는 눈에 잘 익은 동화책처럼 느껴
진다.
"아! 마포다! 여기 내 친구 사는데... 내가 무척 좋아하는 친구죠."
불쑥 불쑥 마음 내키는 대로 주제를 바꿔 버린다. 나는 가끔씩 동조도
하면서 짐짓 놀라기라도 한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떠주기도 했다.
차가 광화문을 지날 때였다.
"나 여기 맨날 출근했어요. 조오기, 육교 보여요? 육교 이쪽에 DJ가 있
는 분식 집이 있었거든. 거기 DJ... 였어요."
"응? 누가?"
"그 남자 말이에요. 내 첫사랑이요. 아저씨, 아까 말해줬는데..."
건성으로 들어 넘긴 말 중에 첫사랑에 관한 부분이 있었던 걸 미처
몰랐다. 내가 관심 있었던 건 대화내용보다 그녀의 표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엔 아랑곳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자세히
듣고자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눈빛이 어렴풋이 허공에 매달고 추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데이트했어요. 멋있고... 예측불허였어요. 후훗."
"예측불허?"
"네, 늘 그랬어요. 그날 어디로 어떤 데이트를 할지 늘 궁금했거든요.
미리 말을 한 번도 안 해주는 거예요. 어느 날은 기찻길로, 어느 날은
화랑으로, 또 어느 날은 공원으로. 그 남자와 함께 있으면 늘 이벤트
였죠. 마치..."
"마치?"
"마치, 보물찾기처럼 말이에요."
"흠, 나보다 좋았었나?"
"하하 하하! 농담이죠? 하하하!"
그녀가 커다랗게 웃었다. 그녀는 크게 웃을 때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목젖이 다 보이도록 입을 크게 벌려 웃는다. 옆에 있는 누구라도 영문
을 모른 채 통쾌해지는 웃음이다.
"학력고사 100일 전에 헤어졌어요. 바로 저기..."
아직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턱을 들어 종로 2가 맥도널드 앞을
가리킨다. 아직도 매장의 불빛이 환하다. 하루 정산을 하는지 손님은
없는데 종업원 몇몇이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정신 차릴 여유는 있었나 보네? 날라리가 말야."
"그게... 그 남자 뜻이었어요. 100일 반지를 직접 만들어 줬어요. 은
으로. 시험 잘 보라구... 그리고, 약속했죠. 졸업식에 꼭 온다고."
"그 남잘 믿었어? 다른 여자가 생긴 거지. 아무리 공부하라고 그만
만나? 만나면서 같이 공부하면 되지. 안 그래? 그런 말을 믿다니,
순진하군. 너."
"...!"
그녀가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이
눈가에 물기가 갑자기 배어 올랐다. 당황한 나는 곧 사과를 했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전방의 빨간 신호등으로 돌렸다.
"그 남자는 나를 조금씩 만들어 줬어요. 나, 날라리였거든요.
소주 한 병은 거뜬히 마시곤 했는데 싫어하더라구요. 여자가 얼
굴 벌겋게 해서 흐느적거리는 거 싫다고... 그래서 끊었어요."
"...흠."
"껌 씹고 다니는 것도 싫어했어요. 신발 질질 끌고 다니는 것도.
유행하던 은어나 곱지 않은 어투도..."
"그래서 다 바꿨어? 쉽게?"
"물론! 그 남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죠."
"... 그 남자, 질투 나는 걸? 좋다! 난 말야, 너 술 마시는 거 좋아
그리고 껌 씹는 거도 이쁘고! 신발도 질질 끌고 다녀! 알겠지?"
"하하하! 아저씬 농담만 해. 하하하!"
그녀가 다시 크게 웃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웃어주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나도 목을 약간 뒤로 젖히고 그녀를 따라 크게 웃었다.
오랫동안 안 써왔던 웃음근육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표정을 천천히 되살려 주고 있었다.
"암튼, 종로 거리에서 헤어진 거죠. 겨울이었는데, 아주 추운...
졸업식엔 꼭 다시 와서 정식으로 우리 부모님께 인사 드리겠다고
했었어요. 그 날, 많이 울었는데..."
속으로 눈물이 흘러 들어가는지 그녀의 어깨가 들먹거리더니 이내
제자리를 찾는다. 정지신호가 조금만 더 길었다면 안아줄 수 있었으련만.
한 팔 안에 다 들어올 것 같은 작은 그녀였다. 아아, 내 품안에서
아무런 미련 없이 평안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근데, 졸업식에 안 왔어요. 많이 기다렸거든요. "
"거 봐. 다른 여자가..."
아차 싶었다. 얼른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나를 쏘아보지도
않았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이 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은 늘 그렇듯
이 어색하다. 게다가 이런 좁은 차안에서의 침묵은 공기를 팽창시켜
터져버릴 것만 같다. 나는 서둘러 차창을 내렸다. 산뜻한 밤공기가
차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녀도 조수석 차창을 내렸다. 그녀의 창으로
침입한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칼을 내게로 나부꼈다. 잘 익은 복숭아
향기가 났다. 눈치 없는 내 사타구니에서 열이 솟았다. 바짓가랑이
아래로 벌써 뻣뻣한 힘이 느껴졌다.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배어 났다. 당장이라도 차를 세우고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녀의 향내나는 머리칼에 얼굴을 파묻고 전율하고 싶었다.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봉숭아 꽃잎을 닮은 그녀의 입술을 한입에
덮치고 싶었다. 그 예쁜 입술로 더 이상은 그 남자 이야기를 못 하게
하고 싶었다. 그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건 오로지 황홀한 절정의 탄
성이게 하고 싶었다. 그녀 깊숙이 침범하고픈 욕망이 나를 점령했다.
"으음..."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사타구니는 더 이상은 주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
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칼이 자꾸만 내 팔에 닿았다. 머리칼
한 올 한 올이 스칠 때마다 내 사타구니 안에서는 급속도의 팽창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는아직 그녀일 뿐이다.
나는 라디오를 켜고 볼륨을 높였다. 귀에 익은 올드 팝이 흐르고 있다.
눈은 자꾸 그녀의 목선을 따라 아래로만 내려갔다. 어두운데도 빛나는
하얀 가슴을 지나 봉긋한 언덕. 잘록한 허리. 군살 없이 탄력 있는 엉덩이.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천천히 뻗쳐 그녀의 어깨를 집었다. 살집이 없
는 어깨를 통해 그녀의 무게가 느껴졌다. 한 품에 안으면 바스러질 것
같은 어깨였다.
"그렇게 세 달인가? 지났어요. 학보가 왔더라구요. 그 남자의 친구로부터
온 거였어요. 아주 간단하게 변명하더군요. 교통사고였대요."
"..으응?"
나는 나를 수습하느라 정신을 차릴 경황이 없었다. 이어지는 이야기 덕분에
다행히도 내 사타구니는 나의 인내심을 더 이상 시험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죽었대요. 겨울철에 늘 있는 사고 있잖아요. 우리 학교 졸업식에
오는 중이었대요. 웃기죠? 소설 같죠? 후훗...."
그녀가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나도 조금씩 진정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놓인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퇴계로를 지나는 신호등은 오랫동안 빨간 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나는 대번에 나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온통 눈물투성이었다. 소리도 없이 그렇게 많은 양의 눈물을 흘
릴 수 있는 건 그녀뿐일 거다. 왠지 미안했다.
"근데, 아저씨 말이 맞을 거야. 치사한 자식. 그 따위 거짓말을 하다니.
여자가 생겼던 거지, 뭐. 잘생기고 멋있는 사람 가만히 뒀겠어요?
아마 지금쯤도 어딘가 에서 잘먹고 잘 살겠죠. 살아 있을 거예요."
그녀는 마법의 주문처럼 ''살아있을 거예요''를 되풀이해서 중얼거렸다.
나는 차를 길가에 세웠다. 그리고 그녀를 깊이 안아 주었다.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어깨를 심하게 들썩이며 내게로 기대 울었다. 봉숭아 꽃잎
을 닮은 작은 입술 사이로 끊임없이 주문을 외웠다. 나는 그녀가
내 품에서 다른 남자를 생각하거나 말거나 너무나 평온한 마음으로
계속 안아 주었다. 내 어깨가 그녀의 눈물로 젖어들었다. 차내의 전자시계
에서는 어김없이 일분에 한번씩 다른 숫자가 전광판에 새겨지고 우리 두
사람을 시시각각 다른 형태로 비추었다. 밤은 그렇게 초록빛으로 깊어갔다.
첫댓글 한 사람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이유가 충분하다고 느낄 때 진정한 사랑에 빠져있는 건 아닐까 싶다.
너무 상위레벨의 사랑을 이야기 하시는 거 가타혀~(본문은 허리하학적 사랑느낌인데, 댓글은 형이상학적...)
네댓글이 더 웃겨 ... 암튼 위트있어 ...레임이 ^^*
난 왜 '위트있어'를 '삐뚤어졌어'라고 인식한거쥐... -_-;;;
그게본질인가부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