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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 8장은 "성령장(로마서의 황금장)"입니다.
사도행전은 선교의 현장에서의 성령(중보자 예슈아의 영, 진리의 영, 보혜사)의 거시적 행전이고, 로마서 8장은 엑클레시아로서 우리 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미시적 중보사역을 가르치는 성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예슈아께서 그랬듯이 엑클레시아로서 땅에 있는 우리 위/옆/속에 함께 있고, 함께 거하시는(장막을 치고 그 안에 임재하사 동행하시는) 성령께서도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 예슈아의 영" 또는 "예슈아와 하나님의 영"으로 계십니다. 이것이 죄인들, 타락한 본성을 여전히 육체에 가진 거듭난 자들에게도 복이 됩니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이 하나님으로 계신다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육체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래 로마서 8장 말씀과 강해를 통해 엑클레시아로서 우리 위/옆/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미시적 중보사역에 대한 큰 깨달음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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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므로
(이전 1-7장의 결과로. 따라서 1-7장은 8장 말씀의 원인, 이유, 까닭, 근거가 됩니다. Yeshua ha-Mashiah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지속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삶, 사도 파울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이끄는 성령의 법과 육신의 타락한 본성인 sarks를 죄와 사망으로 끝장 내는 율법을 섬기는 삶-이는 Satan적 율법주의 삶이 아닌, Torah가 가리키는 마쉬아흐께 인도하는 초등교사로서 율법을 섬기는 삶입니다- 등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There is] therefore now no condemnation to them which are in Christ Jesus, who walk not after the flesh, but after the Spirit
(예슈아 마쉬아흐 안에 있는 자들이란 육체에 작동되는 타락한 본성을 좆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마음에 역사하는 성령을 따르는 자들'을 말하고, 성령을 따른다는 것은 '새 언약백성과 함께 있고, 함께 거하며,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보혜사의 Yeshua ha-Mashiah의 말씀으로 가르치심과 마쉬아흐께로 인도하심과 마쉬아흐의 말씀과 피로 깨끗이 씻기심 등의 중보사역에 지속적으로 순종함'을 뜻하고, 성령의 중보사역에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자에게는 요 15장의 가르침대로 마쉬아흐께서 그 안에 계시며, 마쉬아흐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시행하사 응답되게 하고, 그에게서 예슈아의 열매를 맺게 하여 결코 정죄함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생명, 곧 좁고 협착한 길 끝에 있는 하늘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서는 영원한 생존권은 Yeshua ha-Mashiah를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데에 있는데, 성령(의 중보사역)이 싸륵스-타락한 본성으로서 육체-를 절단내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엑클레시아로서 너희의 영과 몸(soma)을 해방시켜(자유롭게 하여) Mashiah의 말씀에 순종케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중보사역 안에서 순종-엄밀히는 성령의 순종케 함에 우리의 지정의를 발동시켜 참예함-은 율법주의적 굴종과는 확연히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 예슈아께서는 성령의 중보사역을 통해 이 땅과 엑클레시아로서 우리에게 일하시고, 사람은 성령의 중보사역으로만 예슈아의 피와 그 안에 있는 생명, 곧 좁고 협착한 길 끝에 있는 하늘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가는 길로 인도될 수 있습니다)
3 왜냐하면(원문에는 '왜냐하면, For에 해당하는 γαρ 가르'가 있음)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사람의 sarks, 곧 타락한 본성을 통과하면서) 연약하여 할 수 없는(항상 모자라, 무기력해져 준수할 수 없는) 그것을(율법의 요구를. 그런데 통전적으로 예슈아께서 율법의 수여자이면서 동시에 해석자이고 완성자이심을 고려하면, 율법-Torah-의 요구는 결국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됩니다. 로마서 8장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토라를 주신 목적'이 예슈아와 그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있음을 암시하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는, 곧 예슈아 마쉬아흐의 말씀에 순종하는 또는 예슈아 안에 있는 엑클레시아로서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씀이 육신 되게 하시고,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슈아의 육신에 죄를 선고하시며(죄 있는 육신으로 선고하사), 그 죄에 합당한 형벌로 저주의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자리로 끌려가 목숨을 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육체에 죄를 정하시고 죽게하심으로 육신의 타락한 본성 때문에 무기력해지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 궁극의 목적은 성령을 보내사 육신의 타락한 본성을 거스릴 수 있게 하고, 성령의 중보사역을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엑클레시아로서 우리 안에 율법이 계시하는 예슈아의 요구 곧, 율법의 완성으로서 산상수훈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5 왜냐하면
(원문에는 헬라어 '가르'의 '왜냐하면 ~ 때문이다' 라는 문장접속사가 있고, ~은 5-8절 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성령의 중보사역에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원어적으로 ‘생각하나니’는 일시적인 생각과 요랬다 저랬다 하는 변덕과 단순한 관심이 아닌 '지배적인 사고방식'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문맥을 따라 뜻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중보사역에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자는 그 사람의 속에 내주하사 임재ᆞ동행함으로 예슈아 마쉬아흐를 증거하고, 그의 말씀을 이루고자 하는 성령의 일을 지배적으로 생각하고,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엑클레시아로서 우리에게는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의 '두 가지 주된 생각 style'이 있고, 어느 쪽이 지배적이냐에 따라 그 결과는 사망과 생명, 곧 평안의 극명한 대조를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7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이 둘이 서로 대립되어 내면의 영적 전쟁을 일으키고, 육신의 타락한 본성이 생각을 지배할 때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까닭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내쉬는 숨결이 영원히 담지되어 있는 말씀, 특히 그 요체요 집대성인 산상수훈의 법을 거스려 파괴하기, 스스로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8 그리고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리고 성령의 중보사역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육신의 타락한 본성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육신의 생각에 지배되어 사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9 만일(참으로 만일, 위 진리를 바탕으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 보혜사의 내주하심이 예슈아 마쉬아흐 안에 있는 자이고,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너희 안에 임재ㆍ동행하시면-선언적이 아닌 실제적으로 임재ㆍ동행하시면, 곧 너희 안에 성령 보혜사의 중보사역이 실제 있으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그 몸은 죄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지만, 그들의 영은 예슈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통하여 생명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져 영생하게 됩니다)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나님은 구원 받은 자의 죽음에 넘겨진 몸도 미래의 부활의 때에 다시 살리사 영원히 죽지 않는 몸에 참예케 하십니다)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엑클레시아로서 우리는 예슈아 마쉬아흐를 통해 죄 사함의 빚을 졌고, 또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새 사람으로 거듭남의 빚을 졌음을 계시함은 그 이면에 거듭난 자에게는 반드시 변제하지 않으면 안 될 채무-마쉬아흐와 성령님에게 갚아야 할 책무-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들이 갚아야 할 책무는 '육신의 타락한 본성에 지배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중보사역에 순종하여 사는 것, 다시 말해서 마쉬아흐와 성령 보혜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는 결코 육체의 타락한 본성을 따라 계속 살아도 되는 자유와 권리가 주어진 게 아닌, 오히려 마쉬아흐와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는 책무가 있습니다.
not to the flesh, to live after the flesh
거듭난 자는 육신을 따라 살기 위하여 육신에게 진 빚은 없다. 그래서 육신을 따라 살 의무가 없다)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현재형)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현재형) 살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성령에 순종하여 살아감의 책무를 망각하고, 육신의 타락한 본성대로 계속 살아가면, 그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파멸에 처단된다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저주 가운데 죽어 음부ㆍ지옥에 던져지게 된다는 실로 소름 돋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예슈아의 피와 성령 보혜사의 임함이 내가 육신의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수단, 핑계거리, 스스로 찍는 낙인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예슈아의 십자가를 현저히 짓밟는 것이고, 영적 자살행위입니다.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와 현대의 구원파의 이단적 가르침을 따라가는 것도 자멸에 방치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는 '틀림없이 죽는다'는 필연적 사실을 계시하는 경고이고, '살리니'는 미래형 동사로 '미래에 이루어질 궁극구원'에 대한 예언의 약속입니다)
14 무릇
(이는 '종합하여 살피건데'의 뜻입니다. 그러나 원문의 말은 'γαρ 가르'로 쓰였고, 그 뜻은 '성령의 중보사역에 순종함으로써 육신의 타락한 본성과 생각과 행실을 죽이는 삶의 결과 구원 받는 까닭은' 이란 뜻의 이유 접속사가 쓰였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나름대로 의역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엑클레시아로서 우리의 옛 사람이 마쉬아흐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음에도 육신의 타락한 본성으로서 육체의 소욕은 끊임없이 성령을 따르려는 우리의 속 사람을 괴롭힙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고, 피할 수 없는 가장 힘든 싸움이 이것인데, 성령으로써 육체의 소욕과 행실을 죽이면 미래에 궁극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중보사역에 순종함으로써 육신의 타락한 본성과 생각과 행실을 죽이는 삶의 결과 구원 받는 까닭은 '성령에 이끌려 순종함으로 살아가기 때문이고, 그러한 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롬 8:14절 말씀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에 이끌려 순종함으로 사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중보사역에 순종하는 자들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강조어가 원문에는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중보사역과 거듭난 자들의 순종만이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담지한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이 되도록 한다는 게 성경입니다.
순종은 소위 로마-카톨릭적 행위구원론과 차원이 다른 개념입니다. 차원이 다른 것을 자꾸 혼동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거듭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멸망의 두려움으로 이끄는 Satan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의 아들 예슈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적시키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특권들 중 특권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간절히 부르짖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와 도우심을 간구하거나 부르짖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우리의 영은 성령의 중보사역과 간구하심의 계시의 빛이 드러나는 영역이고, 양심과 인격의 좌소라고 할 것입니다. 성령은 엑클레시아로서 우리의 양심과 인격-지정의-에 계시의 빛을 비추심으로 양심의 가책, 생각의 깨달음, 확신을 넣어주며, 어떤 경우에는 주님의 직접적인 감정, 음성까지도 전달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엑클레시아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을 증언하십니다. 롬 8:16절 말씀에 근거하여 성령의 내적 증언, 내적증거에 의한 증명에 평생을 걸어야 합니다)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은 현재에는 약속에 불과하지만 주의 날에 마쉬아흐와 함께 하는 공동상속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마쉬아흐와 연합한 에클레시아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반드시 좁고 협착한 길인 십자가 고난도 함께 받아야만 합니다. 이는 육체가 있는한 피할 수 없는 관문입니다)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본절부터 25절까지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장래 만나게 될 영광스런 소망을 가질 것과 그 영광스런 소망 중에 현재의 고난, 곧 35절의 인생의 일곱 가지 질고들을 농부의 인내함으로 견뎌갈 것을 가르칩니다. 성도들의 현재의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는 십자가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의인법을 사용하여 장차 나타날 영광스런 상태를 계시합니다. 사람을 제외한 피조세계의 만물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주의 날에 그 영광스런 베일이 벗겨지는 주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답니다)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피조세계의 만물이 주의 날을 학수고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이전까지는 허무한 데에 굴복ᆞ예속당하며, 좌절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허무한 데라는 것은 '피조물의 썩어짐'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피조물에게 허무한 까닭은 인간의 죄로 인해 피조물까지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의 썩어짐의 생로병사 그 자체는 자기들에게 무익하고 쓸데 없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주의 날에는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새 창조계획에 따라 영광의 자유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그 날에 만물을 새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사도 파울은 피조세계의 만물의 썩어짐을 오이다의 직관으로 볼 줄 아는 눈을 가졌고, 만물이 허무한 데에 힘없이, 저항하지도 못한채 굴복당함의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피조세계의 우주만물은 지금도, 주의 날까지 계속 썩어짐의 생로병사를 통해 우주적인 탄식과 고통의 심포니를 연주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꽃 한송이가 필 때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질 때 슬픔과 내게도 임할 불행을 느끼십니까?
롬 8:22절 말씀을 생각하시고, 성령님의 중보사역 안에서 우주적인 소리를 들어보세요)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성령은 장차 있을 몸의 부활을 보증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부활의 첫 열매인 예슈아의 성품과 인격을 닮은 첫 열매들을 거두게 도와주며, 그것들을 하나님께 가져와 바칠 수 있게 이끌어가시는 영)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다시는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된 신령한 몸, 예슈아의 부활의 몸)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얻었으매는 '부정과거'시제인데, '소망으로'라는 수식을 받게 함으로 본문은 '주님의 구원의 약속, 이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들은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소망으로는 '미래적 개념'이며, 구원받음과 관련하여 다른 성경에는 '현재시제'로, '믿음의 결국'으로 표현하였음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8장의 전체 문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현재 내가 지속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주의 날에 영광의 자유에 도달함, 들어감을 소망하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성경적 참음은 농부의 인내, 견뎌냄으로 농사의 cycle이 내포되어 있고,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속성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중보사역에서 연유되어야 하고, 사랑의 능력으로 견뎌냄만이 성경적 인내입니다. 성경은 직, 간접적으로 끝까지 견뎌라고 하며, 더 나아가 참음으로 계속 기다리라고 권고합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the Spirit)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여기의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εις 휘오데시안을 향하여 성장하는 '엑클레시아로서 우리'이고, 연약함은 '정상적인 것에서 모자람의 성경적 가난함'이며, 성령만이 모든 것에서 가난함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에 '도우시나니'는 원어적으로 살필 때 훨씬 더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성도의 모자람에 가담하여 그것을 자기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신다는 뜻이고, 가담한다는 것은 그 정도에 따라 옆에서 열심히 도와주시거나 보조를 넘어 주체적으로 짐을 함께 지거나 아예 대신 떠 맡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의 사람으로서 모자람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를 알지 못합니다. 특히 저주 받은 옛 사람의 머리로는 기를 써봤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탄식과 애통함으로 엑클레시아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간구하시고, 성령의 간구하심과 하나님의 응답하심으로 비로소 성도의 모자람은 성령의 역사 안에서 채워지게 됩니다.
성령의 임재와 나타나심에 우리의 지정의가 민감하게 또는 우연히 반응할(느낄) 때도 있는데, 이때 그 반응 속에서 성령의 탄식과 애통함과 간구하심에 동참하게 되고, 그 참예의 형식은 성령을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성령의 임재와 나타나심에 자기의 지정의가 반응함으로 성령의 탄식과 애통함과 간구하심에 동참하여 도고하는 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27 마음을 감찰하시는(수색정찰하시는, 샅샅이 살펴 찾아내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의 중보사역에는 성도를 위한 간구하심이 있는데, 성령께서는 자기 생각을 감찰하시는 이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간구하시며, 성령의 생각을 아시는 하나님은 어린 양을 통해 반드시 성령의 간구에 응답해 주십니다.
오순절 예루샬라임의 어느 다락방 안에 있던 엑클레시아 위에 강림하사 제자들 속에 내주하신 성령은 부활하사 하늘로 가신 예슈아에 의해 이 세상에 발출된 보혜사-엑클레시아와 함께 있고, 함께 거하시며, 내주하시는 중보자 마쉬아흐의 영-이신데, 본문의 말씀을 통해 성령과 하나님은 서로 앎의 완전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어느 정도 영적 지각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확실한 진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문맥을 살필 때 여기의 '선'은 흔히 회자되는 것과 다르게 '사람이 생각하거나 측량할 수 없는 지고지선, 곧 장차 하늘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서게 될 궁극구원(final salvation)의 영원한 생존권'을 말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하나님을 아가페적으로 계속 사랑하는 자들이 성령의 중보사역과 간구하심을 받아 궁극구원, 곧 구원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미리 아심은 시간을 초월하여, 시간 속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을 아시는 하나님, 곧 하나님의 신적 전지하심을 강조하는 표현이지 시간의 spectrum상의 특정 사람들을 사전에 아셨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신적 전지하심으로 아는 사람들로 예슈아의 성품과 인격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즉 다시 말해 예슈아 안에서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하나님의 예정은 문자적 뜻과 다르게 과거→현재→미래의 단선적 시간 개념은 중요치 않습니다. 단선적 시간개념에 얽어매고 구속시키는 운명론적 사상은 다 교술이고 이단ㆍ사이비적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계획'이고, '목적'이며,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주권적 뜻'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개입을 포함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예정에는 인간의 인격적 요소와 기능을 허용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인간의 인격적 요소와 기능에 따라 다양한 현상들이 전개됩니다.
하나님의 예정에는 "에이스 휘오데시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이스는 "방향, 목적"을 뜻하는 전치사이고, 휘오데시안은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이는 하나님의 형상 곧 인격과 성품을 닮은 자들이고,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는다는 것은 성숙하고 장성한 자"임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령의 중보사역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에는 신적 전지하심으로 아신 사람들로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이 되게 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주권적 뜻과 인도하심이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담지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로(하나님의 아들 예슈아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으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εις 휘오데시안을 열매로 거두기 위하여 하나님이 시간의 spectrum 속에서 부르시고. 신적 전지하심과 예정 가운데서 하나님의 절대 공의를 충족시키는 예슈아의 십자가 피 흘리심에 근거한 부르심에는 어느 누구도 항변할 수 없습니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칭의는 사전적으로는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심, 정당화하심'인데, 구체적으로 '죄 사함'과 '거듭남'과 '구원의 약속'을 주시는 선언이라 할 것입니다)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장차 주의 날에 궁극구원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는 미래의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부정과거로 표현하신 의중은 '미래에 그렇게 될 것이 확실하고, 필연적인 사건임'을 시사하는 것이고, 또한 '그러니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뎌내야 하고, 참음으로 계속 기다리라'는 암시, 권고입니다.
헬라어의 이러한 어법을 '예상적 부정과거' 용법이라고 한답니다)
31 그런즉(then, 그러므로, 18절에서, 더 줄여서 26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을 근거로 추단하면, 결론을 내리면)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우리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여기서 우리를 '이전 말씀의 문맥'을 고려하여 어떤 자가 우리인지를 바르게 깨달아야 하는데, 한 마디로 '성령의 중보사역에 순종하는 자들'이고, 이들은 늘, 항상 'Satan과 그의 세력들에 의한 미혹과 핍박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영적 전쟁터에 있는 자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성령의 중보사역에 순종하는 자, 즉 마쉬아흐와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을 위하시면, 그 누구도, Satan까지라도 감히 성령의 중보사역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맞설 수 없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위력입니다)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이 말씀은 성령의 중보사역에 순종하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위력적인 개입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슈아의 십자가 피 흘리심은 하나님의 위력적인 개입을 정당화시키는 하나님의 절대 공의가 담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의 절대 공의를 충족시키는 화목제물이신 예슈아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는 예슈아 안에 있는 모든 풍성한 것들-때마다, 건건이 줘도 마르지 않는 풍성한 것들-을 중보자 예슈아의 영을 통해 은사로 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33 누가 (원문에는 '능히'란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하나님이 그 위력으로 세상 가운데서 뽑아내신 자들, 곧 하나님의 절대 공의를 충족시키는 예슈아 안에 있는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 누구도, 심지어 Satan까지라도 하나님의 절대 공의를 충족시키는 예슈아 안에 있는 자들을 거스려 참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거듭난 자도 육신이 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육신의 연약함, 곧 타락한 본성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이 사실인데, 이것에 대해 Satan의 참소가 가능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에도 철저히 대비시켜 두셨습니다. 바로 ⌈성령의 책망하심을 통한 은혜 아래 회개(↔ 율법 아래 회개, 율법주의적 회개, 불성실한 회개)와 예슈아의 피 흘리심에 의한 모든 죄의 용서(이는 시간과 사건의 개념을 초월한 모든 죄악에 대한 용서)와 관계회복⌋의 처방(요한일서 1장)을 허용하사 Satan이라도 성령의 중보사역에 순종하는 자(성령의 인도하는 바를 좆는 자)를 고소할 어떤 명분도 없게 하셨습니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은혜 아래의 회개와 죄 용서의 쟁점은 단선적 시간 속에서의 어떤 것이 아니라 성령의 책망하심과 순종입니다. 우리의 연약함(모자람)에 가담하여 옆에서 열심히 도와주시거나 보조를 넘어 주체적으로 짐을 함께 지거나 아예 대신 떠 맡으시는 '성령의 중보사역과 간구하심'이 없으면, 우리들의 아우성은 허공을 치는 메아리일 뿐이고, 우리들의 몸부림은 이도 저도 아닌 어설픈 몸짓일 뿐이며, 모든 게 죽도 밥도 안 됩니다)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사람은 이 땅에서 성령의 중보사역과 간구하심으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고, 육체의 죽음 이후 영혼은 하늘 하나님 보좌와 네 생물들과 장로들 사이에 서서 간구하시는 어린 양 예슈아를 통해서만 천국에서 의인으로 거주할 수 있습니다. 중보자 예슈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라도 천국에 처소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부활하신 예슈아는 하늘로 가사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했고, 자기의 영을 지상에 파송하여 중보사역을 하게 하였으며, 하늘에서도 여전히 중보자로서 간구하셔야 했습니다.
예슈아는 천국에서 하나님으로만 계시지 않습니다. 말키쩨덱 대제사장이자 희생제물이요, 구속주이시며, 중보자이신 어린 양으로도 계십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외적 환경, 조건의 어려움이나 악화됨)이나 곤고(옥에 갇힘, 말과 행동의 극심한 제약)나 핍박(맷돼지가 밭을 휘저어 걸레같이 만들듯이 명예나 신체, 재산에 극심한 손해를 끼침)이나 기근(굶주림)이나 적신(경제적 가난과 사회적 소외ㆍ왕따)이나 위험(적대자들의 살해위협, 정글의 독충이나 짐승들의 위협, 타고있던 배가 난파되는 등의 극심한 위험)이나 칼(순교)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현세에서 처한 영적 처지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죽음, 순교의 위협)이나 생명(그날 밤 쉼온 페트로가 넘어갔던 이생의 목숨과 삶에 대한 집착, 욕심)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악한 영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지진 등 자연재해)이나
39 높음(우주의 격변)이나 깊음(깊은 계곡이나 갈라진 틈)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35-39절은 어느 누구도, Satan이라도, 환난 등 인생의 일곱 가지 질고들 조차도 'Yeshua ha-Mashiah의 자기 안에 있는 자, 곧 중보자 예슈아의 영이신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을 향한 사랑을 멈추게 하거나 끊을 수 없다는 것이고, 예슈아 마쉬아흐와의 관계를 위협하는 환난 등 인생의 일곱 가지 질고들에 던져져 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중보사역으로 항상, 계속 넉넉히 이기게 된다는 사도 Paul의 확신에 찬 신앙고백이며, 동시에 Yeshua ha-Mashiah께서 자기 안에서 영광의 승리를 하셨다는 것을 선포하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끝으로 말씀 드리는데, Yeshua ha-Mashiah의 사랑과 중보자 예슈아의 영이신 성령의 중보사역이 없이는 우리들의 모든 것은 공허한 메아리요, 이도 저도 아닌 몸짓이며, 죽도 밥도 아닙니다.
첫댓글 로마서 8장은 흔히 '바울복음'이라고 불리워지는 로마서에서도 "유리와 같이 맑고 햇빛과 같이 빛나는 황금장"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진짜 그러합니다.
또 로마서 전체에 '성령을 가르키는 프뉴마'가 모두 34회 사용되었는데, 8장에만 21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가히 "성령장"이라고 할 것입니다.
로마서 전체의 핵심장인 8장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그 전후의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의중을 깊이 헤아리는데에도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통전적 관점에서 성경의 기본 사상과 개념이 다 녹아있을텐데,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깨달아야겠지요.
진리의 세계에는 계단처럼, 까도 까도 계속 까야하는 양파처럼 진리의 위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각자의 깨달음의 수준에 따라 그 메시지의 숨결이 다르다는 것을 양지하시고, 다른 사람들의 메시지 글도 너그럽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