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살 여성 수첩에 이름이... 위기 몰린 대통령 후보
역대 선거 이야기] 박정희를 떨게 만든 대선 이슈
주변 여성과 관련된 문제로 대통령 후보가 위기에 몰린 적이 있었다.
1971년 대선 전에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정인숙 이슈 때문에
곤란에 처했던 사례가 그것이다.
당시 언론 보도를 종합해 사건을 묘사하면,
1971년 4월 대선 및 5월 총선을 1년여 앞둔 1970년 3월 17일 화요일이었다.
이날 밤 10시 55분쯤 호텔에서 나온 요정 직원 정인숙(만 25세)은
오빠 정종욱이 모는 코티나 차를 타고 인근의 서울 마포구 서교동 집으로 향했다.
집 근처에서 두 괴한이 나타나 차를 세우고는 뒷좌석에 있던
정인숙의 머리와 가슴을 총으로 쏴 살해했다.
범인들은 정종욱을 협박해 한강 쪽으로 차를 몰도록 했고,
이 차는 한강 북쪽 강변3로(지금의 강변북로 일부)를 잠시 달리다가
제2한강교(양화대교) 부근인 절두산 근처에서 멈춰 섰다.
오늘날의 잠두봉지하차도가 끝나는 부분(일산 방향)이었다.
정지된 차에서 또다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지나가던 운전자가 경찰에 신고했고, 뒷좌석의 정인숙은 숨진 채로,
운전석의 정종욱은 신음하는 채로 발견됐다.
대통령까지... 수첩에 적힌 인물들
이 사건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그 정도로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이른바 '정인숙 리스트' 때문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발견된 수첩에서 정권 고위층들의 연락처가 발견된 것이다.
대통령 박정희, 국무총리 정일권,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등이 기재돼 있었다.
정인숙은 일반 살인사건 피해자와 달리 총을 맞고 쓰러졌다.
특별한 처지에 놓였던 여성이라는 느낌을 줄 만했다.
그런 그에게 세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세상은 수첩에 적힌 누군가가 아이의 아버지일 거라고 수군댔다.
박정희나 정일권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1991년 3월 하와이로 출국한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은 "한때 서울문리사대를 다니던
문학가 지망의 여학생으로 극작가 장 모와 사랑에 빠졌다가 실연의 상처를 안고
돌아서서 인숙으로 이름을 바꿨다"라며
"그때부터 빼어난 미모를 이용, 비밀 요정에 나오기 시작했다"라고 한 뒤
"1968년 말, 아버지가 불분명한 사내아이를 낳은 정인숙은 갑자기
해외여행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라고 말한다.
정인숙은 1969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 뒤 10월 미국으로 날아갔다.
그랬다가 이듬해 1월에 귀국했다. 귀국 2개월 만에 위 사건이 생긴 것이다.
정링권씨 아들 정성일씨가 돌연 출국한다.
누가 살인범인지,
누가 아이 아빠인지를 떠나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에 악재였다.
리스트에 거론된 남성들이 정권 핵심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박 정권의 부담은 '시점'으로 인해 한층 가중됐다.
1970년은 전년도에 3선 개헌을 관철한 박 정권이
장기 집권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었다.
1967년 대선에서 제2기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는 1971년 대선을 통해
3선 고지에 도달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악재가 돌발한 것이다.
야당 역시 어느 때보다 위기감이 고조돼 있었다.
4·19 혁명 1년 뒤에 등장한 군인들이 군부독재정권을 수립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프랑스 대혁명 때의 나폴레옹처럼 총통제를 추진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당의 집권 가능성을 급속도로 떨어뜨리는 정세 변화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야당 내의 위기감은 김대중·김영삼·이철승의 40대 기수론이
어렵지 않게 성공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새로운 리더십을 갈망하게 하는 위기감이 없었다면,
당내 기반이 취약한 40대 정치인들이 한꺼번에
대선 후보군을 형성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위기감 속에서 장래를 불안하게 하는 예언도 나왔다.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김대중의 예언이 그것이다.
그는 1971년 1월 23일 연두기자회견 때 박정희 친위세력의 득세를 근거로,
1971년 5·25 총선으로 구성될 제8대 국회 하에서 박정희가
총통제를 추진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 날 발행된 <경향신문> 1면 좌단 기사는 김대중이
"대통령의 사친(私親) 세력의 대거 등장을 볼 때 8대 국회에 가서는
박 대통령 영구집권의 총통적 체제를 저지르고야 말 것이라는 전망을
낳게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썼다.
박정희가 유신체제 선포로 사실상의 총통제 개헌을 성사시킨 시점이
8대 국회 임기 중인 1972년이니 김대중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됐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총통제로 가는 길목에서 정인숙 사건이 튀어나왔다.
박정희는 1963년 대선 때 남로당원 경력 때문에 빨갱이 논란에 휩쓸리며
46.64% 대 45.09%로 윤보선 후보를 힘겹게 꺾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정인숙 사건 앞에서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야당은 왜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선거운동이 개막됐는데도 이 문제가 잠잠했다.
박 정권의 도덕성과 수권 능력을 공격할 호재였지만
신민당은 이 문제를 꺼내 들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 다음날인 4월 28일 외신부장·정치부장·기획부차장의
대담 형식으로 보도된 <동아일보> '개표 중간서 짚어보는 좌담회'는
"신민당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자금이나 조직 등에 엄청난 열세에 있으면서도
시종 정책 대결로 나오면서 선거전을 선도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해요"라고
한 뒤 이렇게 말한다.
"더구나 말썽 많던 정인숙 여인 사건이나 부정축재자 명단을 거론하지 않고
인신공격을 일체 피한 것도 페어플레이로서 바람직한 일이지요."
신문사 주필, 심리학 교수, 변호사의 대담 형식인 5월 9일 자 <조선일보> 기사
'일요정담'에서도 사회 윤리의 타락을 한탄하면서
"난 이상해요. 지난 대통령 선거의 유세에 왜 정인숙 여인 사건 같은 것이
거론 안 됐는지"라며 김대중의 페어플레이를 안타까워하는 발언이 있었다.
김대중은 정책 대결에 집중하는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정인숙 사건이 거론되지 않은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내막에 관한 기사가 1991년 3월 1일 자 <동아일보> '남산의 부장들 29'다.
이 기사에 따르면 1971년 대선 직전인 그해 3월에 미국 유력 일간지가
정인숙 사건을 특집으로 보도했다.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의 편용호 주간은 이 기사를 1면 톱기사로 올렸다.
이 기사가 그대로 나간다면 정인숙 사건이 대선 이슈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초벌 인쇄가 끝난 직후에 후보 비서실장인 김상현이 제동을 걸었다.
김상현은 '후보는 모르는 일이지만, 내 말대로 하라'라며 기사 삭제를 종용했다.
기사에 따르면 훗날 김상현은 자신이 그렇게 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괄호 속 문장은 <동아일보>에 실린 그대로다.
"김대중 후보 진영에서 볼 때 가장 우려스럽고 취약한 점은 후보 경호 문제였다.
당시에도 강경한 중정(中情)과 군 정보수사기관이 있었으므로
김 후보를 해하려고 하는 일부 과잉 충성분자가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후락 정보부장(70년 12월 주일대사에서 중정부장으로 왔다)을
만난 자리에서 신변안전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그랬더니 이 부장은 박 대통령의 사생활,
정 여인 사건 같은 것을 들추지 말아달라는 얘기였다. 그건 흔쾌히 받을 만했다.
김 후보도 정책 대결의 선거전을 외쳐왔기 때문에 인신비방은 안 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믿고 있었다. 일종의 밀약이 가능했던 것이다."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후보의 신변을 보장하는 대신,
신민당은 정인숙 이슈를 제기하지 않기로 하는 밀약이
김상현과 이후락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다.
김상현 본인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 사실을 인정했으니,
그가 밀약을 체결한 것은 사실이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박 정권이 야당 후보를 암살하지 말란 보장이 없는 시절이었으니,
신변 안전을 보장받는 것도 '핫이슈'를 포기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을 수 있다.
1970년 3월 17일 마포구와 강변북로 일대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타락상을 압축적으로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이것이 이슈가 됐다면 대선을 강타했을 법도 하지만,
당선 못지않게 목숨도 지켜야 했던 야당의 처지로 인해 이슈가 되지 못했던 듯하다.
유신체제로 가는 박정희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던 대선 이슈가
의외로 싱겁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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