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김종서
삭풍(朔風)은 나모 끝헤 불고, 명월(明月)은 눈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 집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예 거츨 거시 업세라.
...
이 시조로 유명한 김종서 장군.
세종 때 북방을 지켜며 여진족을 몰아내며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으로 국경을 넓혀갔던 김종서 장군.
이로 인해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던 그는
그야말로 충신 중에 충신이었다.
그런 충의를 알고 있었기에 수양대군은
그를 회유하는 것이 아닌 '처치'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성삼문이 수양궁에 다녕온 뒤,
그 정세를 김종서에게 세세히 이야기했지만,
수양대군을 얕봤던 것일까?
수양이 정난을 일으켜봤자
군권을 쥐고 있는 자신을 무너뜨릴 수 없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김종서는 계유정난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그의 죽음을 지은이도 안타까웠던지,
성삼문의 이야기를 경솔하게 듣던 그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1. 계유정난
정난은 왕이 궁을 비웠을 때 일어나는 법.
단종이 경혜공주의 생일잔치에 가기 위해 궁을 비운날
일이 터지고 만다.
권람, 한명회, 정린지를 등에 업은 수양대군은
그날 일을 벌일 것을 계획한다.
경비가 허술한 김종서의 집에 가서 김종서와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영의정 황보인도 죽이고 만다.
다음날 아침 세상은 바뀌어 있었다.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가 안평대군을 내세워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죽였다고 수양대군은 이야기한다.
누가 이말을 믿을쏘냐.
이로 인해 안평대군을 귀양을 가서 사사받게 되고,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라 섭정하게 된다.
이 사건을 접하게 된 성삼문과 집현전 학사들은
분을 삭이지 못한다.
김종서 장군이 죽었다면 누가 수양대군을 대적할 수 있는가?
...
이 정난이 일어난 후 신숙주 또한 뜻하지 않은 종1품이라는 벼슬을 받게 된다.
이는 신숙주 본인 또한 놀라게 했으며,
다른 집현전 학사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그래도 성삼문만은 영원한 친구인 신숙주를 믿었다.
이 방법이 수양대군이 신숙주를 꼬득이기위한 마지막 방법이었는데,
신숙주는 충의와 가족의 안위에서 갈등을 하면서,
결국은 변절하여 수양대군에 빌붙게 된다.
2.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계유정난으로 모든 정권을 잡게 된 수양대군.
단종은 이제 꼭두각시가 되었다.
단종이 신임하는 집현전 학사들을 만날 길도 막히고 말았다.
영의정으로 섭정을 시작한 수양대군.
그가 아직도 배가 고픔을 알고 있는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부추긴다.
어려운 정국을 이끌어나가기에는 단종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상왕으로 물러나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에 정린지 등이 계속해서 단종에게 왕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독촉하였다.
이에 단종이 격분하지만 이미 그 주위에는 그의 말을 듣는 자가 없었다.
변절한 신숙주마저 단종에게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넘기라는 말을 하게 된다.
신숙주에게마저 배신감을 느낀 단종은 모든 믿음이 깨어지면서,
왕위를 수양대군에 넘길 것을 선포하게 된다.
운명의 장난인가?
그 옥쇄를 전달하는 임무를 성삼문이 하게 되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성삼문은 옥쇄를 수양대군에 넘기면서도,
가까운 시일에 다시 그 옥쇄를 되찾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3. 단종 복위를 위하여
인정할 수 없지만, 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김질 등은 신숙주의 변절에 분개하고,
앞으로 단종 복위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의를 갖기도 하였다.
여기에 무관 출신이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동참하게 된다.
성승과 유응부는 비록 나이가 지긋하지만
전장에서 갈고 닦은 무장다운 절개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들이 기회를 모색하던 중,
명나라 사신이 오는날 거사를 준비하게 된다.
특이 이때 왕을 보위하는 운검에 성승과 유응부가 지목되어 있었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왜 역사는 비극의 골목길만 찾아다니는가.
이런 낌새를 알아채린 한명회는 운검을 폐하고,
세자를 동궁에 들지 않게 하는 등
명나라 사신을 맞는 행사의 계획을 수정한다.
이에 성승, 유응부와 성삼문, 박팽년등은 의견이 분분해진다.
그냥 거사를 진행하자고 하는 성승, 유응부.
뒷날 다시 기회를 엿보자고 하는 성삼문, 박팽년.
결국 성삼문의 말을 들어 그날의 거사는 미루어지게 된다.
이에 거사에 동참했던 김질이 거사가 들통날까 두려워
이 일에 전모를 수양대군에 고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일에 동참했던 이들이 모두 옥장에 갇히고 만다.
무장으로써 칼한번 베지 못하고 허망하게 붙잡였다며
통곡하는 유응부의 외침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 하다.
4. 충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수양대군의 충의가 깊은 성삼문 일행을 죽이려고 하니 안타깝기도 했다.
그들이 자신을 보좌했으면 하는 마음이 절실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었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리개, 하위지를 차례로 불러
설득했지만, 그들은 모진 고문에도 결국 무릎을 꿇지 않았다.
한편 이런 친구들의 고문소식을 들은 류성원은 자결한다.
결국 그들은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 일가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성삼문, 유응부, 박팽년, 하위지, 리개, 류성원...
력사는 그들을 죽음으로 충의를 지켰다하여 사육신이라 부른다.
..
양심의 가책을 느낀 신숙주는 비몽사몽간에 집에 들어왔는데,
신숙주의 안해 윤씨부인은 신숙주가 성삼문과 같은 길을 갔을 줄 알고,
그녀도 그런 남편을 따르려고 했었는데,
신숙주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심한 배신감과 남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면서 자살을 한다.
..
한편 성삼문의 어머니는 남편인 성승과 성삼문을 비롯한 아들들에
대한 위령제를 지내고,
내인들과 함께 자살을 선택한다.
..
그리고, 조정심은 성삼문의 막내딸을 데리고 멀리 길을 떠난다.
5. 성삼문 절명시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 봉에 락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라리라.
....
그는 죽어서도 후세에게
늘 푸른 소나무로 기억되리...
6. 철새정치인
오늘날 소위 철새 정치인이라는 용어가 있다.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정치인들을 일컫는다.
그런 이들이 이런 사육신의 대한 교훈을 과연 알고 있을까?
오늘도 백성보다는 자신의 밥그릇 챙기기 여념이 없는 우리의 정치인들에게
이 책을 한다발 던져주고 싶다.
7.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사육신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신임을 받고, 문종에게서 나이 어린 세자(단종)를 잘 보필
하여 달라는 고명(顧命)을 받은 사람들이다. 성삼문(成三問:承旨)·박팽년(朴彭年:刑
曹參判)·하위지(河緯地:禮曹參判)·이개(李塏:直提學)·유성원(柳誠源:司藝), 유응부(
兪應孚:中樞院同知事)와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의에서 현창된 김문기(金文起:工曹
判書)를 말한다. 하지만 유응부와 김문기 중 누가 사육신에 포함되는가에 대해서는
학계와 문중들 사이에서 많은 이견이 있다.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단종 1)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하여 안평대군(
安平大君)과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3공(公)을 숙청하여 권력을 독차지
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동조자를 규합하여 단종을 다
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 6월 본국으
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使臣)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
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운검(雲劍)이란 것을 하게 됨을 기화로 세조(
수양대군) 일파를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계획은 좌
절되었다. 이들의 계획이 일단 좌절되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金礩)
등은 뒷일이 두려워 세조에게 단종복위음모의 전모를 밀고하여 세조는 연루자를 모
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하였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러 왕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사람
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당했다. 성삼문·박팽년·유
응부·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으로 처형당하였고, 하위지는 참살당하였으며, 유성
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또한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살해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
비로 끌려갔으며, 사육신 외에도 권자신(權自愼) 등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
었다. 사육신은 1691년(숙종 17) 숙종에 의해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愍節)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짐에 따라 노량진 동산의 묘소 아래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워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