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행열차 타러가자
노순희
때로 삶이 팍팍하다고 여겨질 때 어쩌다 한 번씩 행선지 미정의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여수요,' '목포요,'… 또는 '경주요,' '포항이요.' 하며 차표를 구입하더라도 꼭 그곳까지 가지 않으면 어떠하리. 가다가가다가 마을 어귀의 노거수 한 그루라도 마음속으로 들어오면 무작정 그곳에 내리고 보는 거다.
마음 닿는 곳에 내려서 낯선 동네 바람의 냄새를 맡고 거기 사는 모르는 사람과 시절이 어떠니 풍광이 좋으니 하며, 사소한 정담을 나누고 싶다. 그러다, 먼 산자락이나 한 뙈기 채마밭이 내다보이는 조그만 밥집에 들러 된장찌개에 고등어구이 한 토막으로 한 끼 식사를 해결함은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그리하여 나는 걸핏하면 정처 없이 떠나는 무작정 여행을 꿈꾸어보는 것이다. 일상의 조급함에서 벗어나 발길 닿는 대로 유유자적 한번 가보고 싶은 심사다. 적당히 낡아 오랜 친구처럼 되레 편안한 완행열차를 타는 건 어떨까.
요즘 사람들은 대체로 고속열차를 선호한다. 광적인 속도가 충족시켜주는 쾌감으로 빠른 것에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동경(일본)에 가서 점심 먹고 오자" 는 광고가 공항 전광판에 뜨는 세상에,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느긋하게 기다려주던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향수는 지나친 감상인지도 모른다. 분명 느린 것만을 예찬 할 시대는 아닌 것이다. 시간은 돈이라는 개념과 돈의 위력 앞에 담담해지기도 쉽지만은 않지만 그러나 독자여! 나는 묻고 싶다. 쏘아버린 화살처럼 흘러간다는 세월에 과연 빠른 것만이 능사인가?
"인간은 하이- 테크가 발전 할수록 정서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로우-테크를 찾게 된다. 의술이 발전 할수록 대체 의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교통수단이 발전 할수록 걷기 열풍이 일어나며 첨단 과학이 발전 할수록 인문학을 찾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미래학자의 역설적 사고 같지만 일리는 있는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도 좀 무료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순간이 있다. 읽어야 할 책과 써야 하는 글을 비롯해서 이런저런 잡다한 염려와 책무를 접고 하릴없이 생각나는 대로 상상하며 뒹굴어보고 싶은 거다. 미래학자 네이스비츠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일상의 단면이다.
이따금 사과 두어 개 귤 몇 개를 가방에 넣고 동해 남부선 열차를 타러가는 날이 있다. 너무나 조촐해서 처음 찾는 이들이 쉽게 지나친다는 해운대 역사驛舍 앞 광장에서 약속한 친구와 만난다. 볼일 없이 떠나는 여행이야말로 얼마나 마음 가벼운가.
개찰구 앞 멀구슬 나무가 섬세한 손길로 이파리를 흔들면 동해남부선 완행열차는 출발한다. 여행자의 마음도 해안선을 따라 느긋하게 달린다. 장구한 세월에도 출렁이는 바다와 빽빽한 숲이 조화롭게 마주하고 있음에도 서로를 그리는 듯이 자연이 빚어놓은 경관은 차라리 서럽다. 쓸모없는 염려와 부풀려지는 고민들이 그 바다에 수장되고 마는 신비의 구간에선 누구나 풍경이 되어 말문을 닫는다.
우리는 그때그때의 결정으로 내리고픈 역에서 내리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은 경주에서 하차한다. 멀리 가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종착지인 포항까지 가는 수도 있다. 과메기가 꼬들꼬들 말라가는 해변 죽도 시장을 구경하며 할머니 상점에서 모자도 한번 사서 써보기도 하고 없는 생선이 없는 시장 안으로 들어가 신선한 회를 맛보며 우리의 살아가는 이야기는 이어지는 것이다.
살뜰한 추억이 빛나는 동해남부선 열차는 누가 뭐래도 우리의 숨겨놓은 연인 같은 친구다. 우울한 심사가 제풀에 도지는 날에는 서슴없이 친구를 불러 해운대역으로 달려가 완행열차와 비밀스런 연애에 빠져버린다. 풍경을 스쳐 지나는 것만으로도 일상탈출의 위안은 충분하다. 완행열차에 기대 앉아 해안선을 달리는 시간의 달콤함을 첫 키스의 기억에 비기랴.
이래저래 세월은 격랑 속에 굽이친다. 한 해 두 해, 십년 또 이십년…. 시간의 궤적이 나이테처럼 쌓여 우리의 얼굴에 밭이랑을 만든다. 아마득한 옛일이 어제만 같고 과거의 식어버린 눈물과 소리 없는 웃음이 한 순간이듯 허허롭다. 다사다난의 생의 길목에서 한가롭던 시간은 정녕 얼마나 될까. 현기증을 유발하며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그러니까 그럴수록 차분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완행열차를 타고 떠나자. 인간사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세월에 여행은 한 방울 윤활유 같은 것이요 고단한 허리를 펴고 바라보는 청아한 가을 하늘 한 조각의 여유다. 우리가 사랑하는 완행열차는 오늘도 조롱조롱 갯내 나는 바닷가 마을을 끼고 산맥을 휘돌아 가고 또 가고 있으리라.*
첫댓글 좋은 글 올려주심 감사합니다. 금방이라도 완행열차를 타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