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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성공회 광주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레오
2. 맨홀 뚜껑을 열고 나오다
후배가 자취방에 찾아왔다. 연극반에 통 나타나질 않으니 무슨 사고라도 났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문예창작과 학생이며 연극 연출을 맡고 있는 녀석은 작품이 풀리지 않는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대개 저학년후배가 첫 연출을 맡으면 선배들이 마치 자기 작품인 양 야수처럼 달려들어 혼을 빼놓기 일쑤이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주도권을 빼앗겨 골머리를 썩히고도 남의 작품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초짜 연출의 어설픈 무대 위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치열한 선후배간의 기 싸움이 펼쳐지는 전장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 친구는 아예 작품을 선배들에게 맡기다시피 해놓고서는 선배들의 의견충돌과 간섭 때문에 작품이 마무리가 되지 않는다고 푸념이나 하고 다니는 속 편한 친구다.
“형! 어떻게 지내쇼? 사고치고 잠수한 건 아니죠?”
“왜? 잘 안 풀려?”
“비 오는데 방구들만 지고 계쇼?”
“한 잔 하러 왔구나?”
“내 주머니 사정은 주모가 훤히 뚫고 있고, 방법이 없어 왔죠.”
“그래! 나가보자. 비 오는데 술꾼이 설마 술 한잔 못 얻어먹겠냐?”
우리는 흑석동 산을 넘어 노량진경찰서 근처의 술집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사고 터져 경찰서 드나들며 눈여겨 봐두었던 곳이다. 대 여섯평 정도의 술집이 블록이 끝나는 지점까지 일렬로 늘어서 있는 진창길 골목이 정겹게 펼쳐져 있었다. 비 오는 날 오후 두시쯤 되면 이 골목에선 이른 시간에 길 한가운데서 소변으로 자기 이름자를 쓰는 음유시인이 있기에 좁은 골목은 문학적 향기가 짙게 풍기는 예사롭지 않은 공간이 되어 버린다. 나는 감이 오는 첫 번째 술집 문을 열기 전에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후배에게 젊잖게 한마디 했다.
“야! 너 함부로 나 따라하다가는 큰 똥탈 난다.”
“알았어요. 괜히 겁주지 마요!”
“농담 아니야. 심각하게 하는 말이야.”
굴속같이 어둡고 침침한 홀 안에 왠 사내가 혼자서 앙상하게 마른 어깨를 오그라뜨리고 술잔을 입 안에 털어 넣고 있었다.
“여! 이 친구. 오랜만일세. 일찌감치 시작 했구만.
아줌마. 여기도 술상 좀 봐주쇼.
허허! 이것 보게. 이 친구! 술 한잔에 벌써 웃기만 하면 어떻게 하나? 이제 겨우 시작인데. 어서 내 술 한잔 받게.
여기 이 사나이 자네 처음 보지? 내 소개하지. 연극반 후배야. 잘 생겼지?
한잔 줘야지.”
급하게 몇 잔 돌리다 보면 아침 해장술에 이미 취하고 속도전에 주눅이 든 처음 만난 술 선수는 가물거리는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다가 시종일관 거침없는 말투에 눌려 대충 오다가다 만난 술망나니로 치부하고 아침부터 술 한잔 할 수 밖에 없는 사연을 눈물과 한숨으로 풀어놓는다. 그러다 취기가 정수리에 오르면 급기야 술값은 자기가 계산해야 한다고 한사코 고집을 피운다. 우리는 거의 떠밀리듯 술집을 나와 몇 집 건너 뛰어 그 다음 상대를 찾는다. 이렇게 모험적으로 술집 순례를 하다보면 안면이 익은 사람도 만나게 되고 시간이 흘러 골목 끝에 다다를 때쯤에는 나도 누가 친구였는지 새로이 친구가 되었는지 구분을 못할 지경이 된다. 후배와 나는 술꾼들의 넋두리를 들어주기도 하고 이유 없는 싸움도 말려주다 하면서 그 와중에 삥땅친 몇 푼 챙겨들고 노래를 부르며 산을 넘어 자취방에 돌아왔다. 후배는 그 돈으로 오가피주 세 병을 사왔다. 그의 항상 소원인 술 취한 채 잠들기 위해서다. 그는 한국의 문학계와 연극계의 난맥상을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성토하다 어느덧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잠이 들었다. 마치 정전으로 레코드가 천천히 멈추듯이. 나도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은커녕 의식이 술 먹기 전보다 더 또렷해 왔다.
“형! 어둡게 사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야.”
귀에다 대고 소리치듯 누가 말했다. 목소리를 더듬어 보니 연극영화과에 다니는 후배의 음성이다. 얼마 전에 술자리에서 들은 그 말이 망치가 되어 내 가슴에 못을 박는다
“형은 만행에 나선 스님이 아니잖아. 정신 좀 차려!”
머릿기름에 찌든 베개에 얼굴을 묻고 무어라고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는다. 오늘은 공짜 술을 실컷 얻어먹었는데도 기쁘지가 않았다. 첫 번 째 술집에서부터 나는 내심 이미 기분이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낯 선 사내의 바싹 마른 어깨를 보는 순간부터 핏덩이 같은 서러움이 울컥 울대를 타고 넘어왔다. 권투시합을 보면서 속절없이 얻어맞는 놈이 불쌍하게 보이면 이미 권투를 즐기는 마음이 될 수 없듯. 나는 바로 거울 속의 나를 대하는 심정으로 그의 내리막 인생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진짜 내 인생의 위기는 위기였다. 무슨 짓거리를 해도 재미가 없으니. 일상이 흥미진진하게 흘러가지 않으면 금방 싫증을 느끼면서 허무에 빠져버리는 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식 밖에 모르는 부모의 가슴을 찢는 사고를 칠게 뻔했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칠대 독자의 져버릴 수 없는 임무는 대를 잇는 것. 육대 독자인 아버지는 위로 누나가 아홉이나 되는 늦둥이 막내아들이었다. 졸업을 못하고 취직은 못하더라도 필히 사내놈 하나는 남겨놓고 죽어야 할 책무가 내게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 들어가자마자 장가를 보내는 게 어떨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던 분이었다. 그러니 함부로 목숨을 내팽개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제를 모르고 자살을 하니 안하니 약간 시건방을 떨기도 했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목숨이었다. 나는 살 길을 찾기로 했다. 앞이 보이지 않아 힘들 때는 여행이 제격이다. 우선 이 좁고 음울한 자취방을 떠나는 게 순서다.
때마침 연락이 끊겼던 친구가 찾아왔다. 초등학교 시절 부랄 친구인데 대학졸업 후 진로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원산도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친구 어머니는 산부인과 의사이신지라 노잣돈 부족으로 섬에 갇힐 염려는 없었다. 친구는 향토장학금이 간당간당한 상황이라고 엄살을 떨었다. 나는 시외버스 운전사에게 애교를 한번 떨고는 친구를 앞에 세워 놓고 청승맞은 노래를 몇 곡 주문했다. 귀공자 스타일의 유난히 부티 나게 생긴 얼굴이 구걸에는 걸맞지 않았지만 승객들은 장난스럽게 동전을 꺼내들었다. 나는 풍맞은 사람처럼 온 몸을 과장되게 떨며 뒤집은 모자를 코앞에 높이 들이 밀었다.
이 짓거리는 연극반 친구들과 놀러 다니다 돈 떨어지면 흔히 하는 이벤트성 놀이였으므로 이골이 난 터이었다. 친구는 승객들의 의외의 호응에 놀랐는지 상기된 얼굴로 답례형식의 앵콜송을 너무 진지하게 불러 사람들을 웃겼다. 어느 새 대천 앞바다가 눈앞에 넘실대고 있었다. 얄궂게도 그리던 바다는 강한 바람과 위협적인 높은 파도로 심술을 부렸다. 섬주민들과 낚시꾼들은 근심스럽게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도 어느 정도 포기하는 마음이 되어 있었다. 그 때 한쪽 켠에서 몸을 배배 꼬는 시늉으로 있던 몇 깐이 선장을 붙들고 다시 통 사정을 시작했다. 집 안에 큰 일이 있어 물을 건너가야 한다는 것이다. 잠깐 한 눈을 파는 사이 꽤 여러 사람이 선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선장은 처음 얼마 동안은 도리질을 하다가 머리 숫자를 대충 헤어 보더니 결심한 듯 배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었다.
몇 십년을 다니는 길이니 무슨 큰일이야 있겠냐며 자신감이 내비치는 말을 한 마디 했다. 쭈삣거리던 우리도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여행가방을 갑판 위에 던져 올리고는 춤추는 뱃전에 간신히 곡예 하듯 몸을 실었다. 떠날 때부터 파도를 뒤집어쓰던 배가 십여분도 지나지 않아 금방 뒤집힐 것처럼 요동을 치더니 사람들의 얼굴이 새까맣게 죽으면서 갑판과 객실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리며 당황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뱃멀미에 약한 친구는 아예 객실바닥에 누웠고 나는 갑판에서 파도를 구경하며 객실 안을 도배하듯 하는 토사물과 악취를 피하고 있었다. 소위 삼각파도의 위용은 대단했다. 선장이 아무리 기름을 짜듯 용을 쓰며 파도를 향해 뱃머리를 맞추어도 양쪽 뺨을 번갈아 치듯 하는 파도의 각도와 속도를 당할 수가 없었다. 배는 까마득히 높은 파도의 꼭대기에 올랐다가 바닥에 곤두박질 치길 반복하며 금방이라도 못이 몽땅 빠져나갈 것처럼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하얗게 눈을 흘기는 것처럼 보이는 포말을 한참 바라보다 보니 죽은 친구의 얼굴이 물 위로 떠올랐다. 그 녀석은 왜 자살했을까. 그럴듯한 대학에 들어가서 여학생들에 둘러싸여 지낸다더니 채 일학년도 못 마치고 죽어 버렸다.
일기를 비롯한 모든 소지품을 다 태우고 사람 눈에 쉽게 뜨이지 않기 위해 자기 집 근처 공원 벤취 아래 숨어 죽은 내 친구는 키크고 명석한데다 기품 있고 고상한 얼굴 때문에 친구들에게조차 선망의 대상이었다. 중학교 동창이었지만 서먹서먹하게 지내다가 고3이 되자 갑자기 접근해 오더니 수업시간 사이사이 그 짧은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무거운 주제로 개똥철학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덧 친구의 존재는 내가 학교에 다니는 유일한 이유 그 자체라 해도 될 정도였다.
친구는 어디 하나 비뚤어진데 없는 반듯한 최우수 모범생이었고 나는 반에서 꼴찌를 하는 꼴통 문제아였다. 고3의 첫3월은 어느 학교든지 진학 군기 잡느라 각목이 춤을 추는 지옥의 교실이다. 당시 나는 학교를 떠들썩하게 하는 사고를 치고 학교를 그만 둘 핑계를 찾고 있었다. 성당에서 만난 친구의 부탁으로 학생회장후보의 선거연설원고를 써 준 것이 큰 일이 되버린 것이다.
재학 중 내내 도서반원이었던 나는 우연히 사서선생들의 대화 가운데 교장선생의 도서기금 횡령과 학교후원금 착복의 비리를 듣고 이를 성토하는 내용의 원고를 써서 후보에게 넘겨 준 것이 학교 당국에 사전 발각되어 관련자 전부가 치도곤을 당한 것이다.
나는 가까이 뵌 적도 없는 교장선생의 특별한 호출을 받고 교장실에 불려가 교장선생님이 손수 던지신 대형 구리재떨이에 이마를 명중 당할 뻔했다가 간신히 피한 뒤 교내 안전구역에 숨어 있다가 귀가한 사건 이후로 학교가 더욱 다니기 싫어졌다. 나는 3월 한 달간 단 한번 지각한 것을 가지고도 각목이 부러져라 개 맞듯 하는 상황에서 신경쇠약으로 인한 수면부족을 핑계로 무려 열 세번 지각을 함으로써 완전히 열외로 신분상승이 되었고 교련시간에는 같은 증상을 이유로 나무 밑에서 당시 신성시하던 목총을 베고 부족한 수면을 보충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가 있었다.
친구는 나의 그런 면을 너무도 높이 평가해 주어 나의 흔들리는 자존감에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나는 입시의 중압에 시달리는 친구에게 당시 유행하던 쇼펜하워의 염세적 인생철학을 다분히 감상적 차원에서 소개하였고 친구는 일종의 도피처로서 사춘기 소년의 정서적 위안으로 그의 철학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고3 내내 수녀님이 소개해 준 여학생과 만나느라 입에서 주워섬기는 말과는 달리 머리속은 핑크빛 안개 속에서 헤매던 참이었다. 친구는 우등생으로 졸업했고 나는 유난히 문제학생을 사랑하시던 담임선생님의 성적표 조작으로 낙제제도가 엄격하기로 유명한 학교에서 간신히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해가 바뀌어 여름날 지겨울 수밖에 없는 재수학원에서 징그럽게 땀을 흘리며 놀고먹은 학창생활의 뻥 뚫린 구멍을 메우는 중에 바람이 좀 시원해진다 싶어 책이 눈에 들어온다고 좋아했더니 쌩뚱하게 친구의 어머니가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해 온 것이다. 그녀는 아들이 남긴 글이라면서 몇 군데 발췌해 읽어 주는데 그녀의 음울한 목소리에는 자신의 금쪽같은 막내아들의 죽음이 나로 인한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나는 그때 이후로 충격을 받고 또다시 방황하기 시작하였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있던 재수생활이 친구의 죽음으로 흔들려 버린 거다.
파도가 얼굴을 때리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내가 죽으면 친구와 그 어머니에게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고교졸업 앨범에 실린 친구의 얼굴 옆에 빙 둘러 싸인펜으로
“네 몫까지 살으마. 나도 곧 따라 갈께.”라고 썼었다.
뒤통수 쪽으로 다급한 소리가 들리길래 돌아보니 선장이 객실로 내려가라고 쉰 목소리로 악을 썼다. 미끄러운 객실계단을 난간에 의지해 간신히 내려오니 배가 뒤집힐 듯 요동칠 때마다 승객들과 짐뭉치와 토사물이 범벅이 되어 공처럼 굴러 다녔다. 아이들과 여인들의 비명이 통곡과 함께 귓청을 때렸다. 죽을 사람들은 한 배에 탄다더니 나는 저승길에 동행할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눈여겨보았다. 그 때 주위 상황과는 분위기가 완연히 다른 한 쌍의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왠 허우대가 멀쩡한 노인 한 분이 그 난리 통에도 앳띤 중학교 여학생을 끌어안고 입을 맟추려 애를 쓰고 있었다.
마치 기회가 이제야 왔다는 태도다. 처음에 내 눈에는 친손녀로 보였었다. 그런데 어린 여학생이 팔을 내뻗으며 필사적으로 외면하는 걸 보면 아닌 것도 같고, 영문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떼죽음의 위기에 봉착해서 하는 보통사람의 잡두리 치고는 많이 달랐다. 모두들 노인의 그 해괴한 짓거리를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자기 몸 추스르기가 급해 뜯어말릴 엄두를 못 냈다.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처럼 나대던 배가 어느 순간 진정이 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바다의 표정이 달라지더니 사람들이 의관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객실 내 승객들이 인간의 얼굴로 되돌아오면서 아낙네들의 쇳된 목소리가 그 노인에게로 일제히 함포사격 하듯 퍼부어졌다. 나는 노인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차라리 배가 뒤집혔으면 좋았을 걸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외로 꼬고 술병주둥이를 높이 세워 입에 박은 채 못들은 척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막 사신의 사나운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의 얼굴은 비 온 끝의 화창한 날씨와 함께 밝기만 했다.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푸른 가을하늘로 돌아와 있었고 햇빛은 눈을 찌르는 바늘처럼 강렬하게 내리 꽂혔다.
친구는 배 멀미 후유증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럽다고 해서 함께 해수욕장을 천천히 거닐었다. 한없이 펼쳐지는 모래사장 끝자락에 난데없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높이 솟아 있었다. 암벽 타기나 마찬가지의 묘기를 부려 꼭대기에 오르니 작은 비석이 서 있고 뒷면에 여행에 동행했던 고교 친구들의 회한에 찬 추모의 글이 쓰여져 있었다. 아마 이 자리에서 두 남녀학생이 휘몰아치는 파도를 구경하다 해일 때문인지 절벽을 덮어버린 갑작스런 파도에 휩쓸려 들어간 모양이었다.
파도는 원래 가늠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낮게 들이치다가도 하늘이 뒤집히는 형국으로 공중에서 덮쳐 오는 것이다. 왜 인생을 파도에 비유하겠는가. 예상치 못할 의외성이 파도의 속성이다. 도시의 아이들이 그걸 알 리 없고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비석을 쓰다듬으며 망자에게 말을 걸었다.
“일찍 갔구려. 인간사 변화무쌍함을 어이 알겠소. 나도 아직 청춘은 청춘인데 빗나간 청춘이오. 이렇게 비루하고 막막한 게 청춘의 실체라면 빨리 벗어나고 싶소.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할지 무슨 일로 먹고살아야 할지 무슨 재미로 살아야 할지 도통 모르겠소. 이렇게 술 취해 살다 가는 것이 인생인지 혼돈스럽기만 하오.”
원산도에 드나들며 친구로 삼은 어부를 충동질해 낚시 배를 탔다. 물때가 맞았는지 씨알이 굵은 놈으로 건져 올려 회를 떴다. 바닷바람 덕분에 술은 달기만 했다. 달빛은 약했지만 밤하늘에 무수히 박힌 별빛에 서로의 얼굴을 비춰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친구와 나는 난생 처음 가출을 했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그때 밀양으로 도망가서 불안을 달래기 위해 ‘파란 이별의 글씨’라는 ‘신성일 윤정희’ 주연의 영화를 함께 보았고 표충사에 올라갔다가 물에 잠긴 시체를 계곡에서 발견하고 스님에게 알렸던 추억도 나누었다.
친구는 조용한 밤바다가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며 배타고 놀란 가슴을 새삼스럽게 쓰다듬었다. 친구는 배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인상적이었던지 또 한마디를 했다.
“그 할아버지 진짜 마음먹고 한번 해본 걸까 아니면 실수한 걸까? 이해가 안돼.”
“바다가 뒤집어지니까 사람도 제 정신을 잃었겠지. 상습범인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너무 이상했어. 그럴 때 표정이 아주 진지해 보였거든.”
“진지하게 추행을 한다? 말이 되냐? 하기야 사람 속을 어떻게 알겠냐?”
“혹시 그 양반 도 닦는 것 아니었을까?”
“그럼 사람들이 도 닦는 걸 방해한 셈이네.”
“하기야 그 노인네하고 그 여학생 둘은 끌어안고 밀고 실갱이 하느라 죽음의 공포하고는 무관한 것 같더라.”
“맞다! 그래. 여학생이 하도 무서워하니까 그런 식으로 도와 준 건지도 몰라.”
“그럼 우리가 너무 세속적인 거야?”
“우리가 무얼 아냐?”
죽음을 눈앞에 두고 육욕에 사로잡힌 노인이 있는가하면 나이도 풍모도 비슷해 보이지만 누구에게나 스승으로 칭송받는 함석헌선생님 같은 분도 계시지 않은가. 노인도 천차만별이다. 존경받는 노인이 있는 가하면 손가락질 받는 노인도 있는 거다.
함석헌선생님과의 인연은 74년 대학교 일학년 때 명동 흥사단 본부건물인 대성빌딩에서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곱게 빚은 하얀 단발머리, 머릿결이 끝나는 데서 다시 이어지는 푸른 기운이 도는 긴 수염, 두루마기 양말 단화까지 눈을 맞고 먼 길을 걸어오신 분처럼 모든 게 하얗다. 신선이 하강했다 해도 그렇게 멋있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는 방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강의를 시작했다.
“지금 이 민족은 혁명의 도상에 있소.” 말이 떨어지자마자 누군가 고함을 질러 강의를 막았고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두 번째 만난 것은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인 부산에 머물 때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의료보험운동을 시작하셨던 장기려박사님이 주최하시는 모임에서였다.
두 시간 가량 꼿꼿이 서서 성경을 가르치셨다. 강의는 물 흐르듯 유장한 톤으로 재미있는 옛날 얘기 분위기였다. 그 날 강의는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시작하셨다. 베드로가 밤새 다른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으려 했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하다가 날이 밝아올 즈음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르켜 주는 대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고 그 때서야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을 인용하시면서 진리의 알짬을 깨우치려고 밤새 골똘히 사색하시다가 새벽녘에 비로소 어떤 깨우침이 왔을 때의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를 말씀해 주셨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아무리 읽어보아도 전설 따라 삼천리 같던 성경말씀이 그렇게 읽으면 생생한 수행기가 된다는 것을. 강의가 한참 무르익을 때에 누군가 다가와서 메모를 건네주고 갔다.
함선생님이 잠깐 강의를 멈추고 눈을 감고 계시더니 9년간 중풍을 앓던 아내가 막 숨을 거두었다는 전갈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셨다. 노안에 눈물을 그득 담으시고 아내와의 결혼 첫날 밤 그 두 방망이 치던 가슴의 기억을 떠올리시며 그 날 참 행복한 밤이었다는 말씀으로 강의를 마치셨다.
그 날 모임의 뒤풀이까지 하고 집에 돌아와 밤새 잠을 못 잘 정도로 흥분했던 이유는 가슴속에 환한 보름달 같은 깨달음 하나씩을 나누어 담아왔기 때문이었을 게다. 친구와 배에서 만난 노인 얘기를 하다 함선생님이 뇌리에 떠오른 것은 행운이었다. 막상 그 분이 생각나자 당장 그 분을 찾아뵙고 나의 진로문제 그리고 인생의 목표와 방향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열망이 불같이 일었다. 하지만 그 분은 나 같은 사람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분이라는 생각에 찾아 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도 그 분처럼 성경을 깊이 읽으면 무언가 그 안에서 인생의 해답이 얻어질 것 같은 확신이 왔다. 그러고 보니 나는 대학생활 내내 감각적인 연극반 활동에 너무 깊이 빠져 그런 진리와 본질을 추구하는 세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았던 것이 현재의 방황의 원인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어딘가 진지하게 성경연구를 하는 곳을 찾으면 내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세상이 분명 어둡지 만은 않을 텐데 내가 밝은 세상으로 향하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부모의 사랑을 과하다싶을 정도로 받고 자랐다. 단지 부모의 품에서 놓여나 어두운 세계의 매력에 빠져 있었던 것뿐이었다. 친구는 딴 생각에 빠져 건성으로 대답하는 나의 팔을 잡고 흔들며 재차 나의 의견을 물었다. 대학원 진학이 일종의 돌파구가 되지 않겠느냐고. 그런데 대학원진학의 가장 어려운 관문은 영어실력이라고 했다. 그는 학원비를 내 것까지 대신 내어 줄 터이니 같이 다니자고 제안했다.
나는 흔쾌히 그 제안에 응했고 나 역시 대학원에 갈 계획이었다고 즉흥적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졸업이 불안한 상황이니 취직은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고 아버지의 추궁을 피할 방법은 대학원진학 밖에 길이 없었다. 학사경고만 간신히 면한 주제에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큰 소리를 쳤는지 모르겠지만 돌아오는 뱃길은 콧노래가 절로 나올 만큼 즐겁고 상쾌했다.
쪼개지는 것처럼 통증이 심했던 머리도 언제 아팠었냐는 식으로 씻은 듯이 깨끗하게 나아버렸다. 때로는 별 생각 없이 무심코 뱉은 말이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분명한 것은 이번 여행으로 내가 무거운 맨홀 뚜껑을 열어젖히고 밝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첫댓글 ㅎㅎ 글쓴이 요즘은 뭐 하노 ? ㅋㅋ
고등학교때 절친 김경일은 나하고 서대신동 성당에 같이 다녔는데 현재는 성공회신부로 전라도 광주에서 목회활동을 하고있다. 다음카페에 '대한성공회 광주교회'의 매뉴중 '외줄위를 걷는인생'이 있는데 50여편으로 지나온 생활을 기술하고 있다. 5편까지만 여기에 소개하고 그 후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