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사도행전(13) 아펜젤러 선교사(4)
아펜젤러 제물포항에 도착하다.
아펜젤러 부부는 1885년 3월 31일 일본의 나고야 항을 떠나 조선으로 오는 정기선 세이리오 마루(Seirio Maru)호를 타고 제물포로 향하였다. 이 배에는 미북장로회 소속의 언더우드(Underwood) 선교사와 스커더(Scudder), 테일러(Tayler)등의 선교사들도 함께 탑승하고 있었다.
이 배는 부산을 경유 4월 5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이때 제물포항에는 자국민 보호를 위한 미국 배 오씨피(Ossipee)호가 정박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오씨피호의 스텐시 (F. M. Stensey) 선장과 일본영사관의 고바야시 영사에게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서울 입경에 대한 자문을 구하였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1년전 있었던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매우 뒤숭숭 해 있었고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매우 높은 상태였다.
오씨피호 선장과 일본 영사의 조언은 언더우드 선교사는 독신의 몸이므로 바로 서울 입경이 가능하겠지만 아펜젤러 부인의 입경 즉 아펜젤러 부부의 입경은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펜젤러 부부는 제물포의 대불 호텔(大弗: 일본 식으로 다이부쓰 호텔이라고 부르는데, 일본인이 세운 조선 최초의 근대식 호텔)에서 7일 머물다가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가 2개월을 더 기다렸다. 그러다가 1885년 6월 20일 헤론(John W. Heron) 부부와 의료선교사 스크랜턴 박사의 모친 메리 스크랜턴(Merry Banton Scranton)과 스크랜턴 박사의 부인 루이자 (Ruisa Scranton)와 딸과 함께 일행이 되어 아펜젤러 부부도 조선에 도착하였다.
서울에 입경하기도 전에 인천에서 교회 개척
스크랜턴 가족은 서울에 아들 스크랜턴이 마련해 놓은 거주지가 있었기 때문에 바로 입경을 했다. 그러나 아펜젤러가 서울에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아직 마련하지 못했기에 제물포에 임시거처를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중국인이 운영하는 해리스호텔(Harry’s Hotel)이라는 곳에 머물렀지만 하루에 2달러 정도의 숙박비가 지출되기 때문에 작은방이 딸린 초가집을 월세 25달러에 빌렸다.
아펜젤러는 임신 중인 아내와 함께 제물포에 38일을 더 머물렀다. 그곳 작은 초가집에 머무르면서 전도를 하고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제물포 교회(후에 내리 교회)의 시발점이다. 1885년 7월 7일에는 미국에서 화물로 부친 풍금이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다. 풍금을 놓고서 신기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당시 아펜젤러의 아내 엘라가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라는 찬송을 불렀는데 이는 조선 상공에 울려 퍼진 최초의 감리교 찬송이었습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오르간을 통해 조선의 모든 땅이 어서 빨리 찬송 듣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다가 1885년 7월 19일에 아펜젤러와 신도들은 정식으로 제물포 교회(내리교회)의 창립 예배를 드렸다.
그 뒤 1888년 5월 14일 20세 청년 동안으로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딘 존스(George H. Jones; 1867~1919) 목사가 내리 교회를 거점 삼아 교육,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891년 11월에 내리 교회는 자체의 예배당을 지었다. 그것이 흰색 석회벽을 세우고 지붕에는 기와를 얹어서 12명 정도가 앉아서 예배드릴 수 있는 화이트 채플이라고 불렸던 인천 최초의 감리교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