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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燕山) 곧 연연 산(燕然山)을 찾자! < 2 부>
○ 연산(燕山)에 대해 제 1 부에서 알아보았지만, 그래도 미심쩍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방향(方向)과 거리(距離), 특이지형(特異地形) 분야(分野)로 보았을 때, 역시 오리무중(五里霧中)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과 같은 심정(心情)이다.
과연 옛 “연산(燕山)”은 어디에 있는, 어떤 산(山)을 말하는 것일까? 현재(現在)의 북경(北京)이 옛 북경(北京)이 될 수 있을까? 답답한 마음뿐이니...........!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다시『연산(燕山) 곧 연연 산(燕然山)』을 찾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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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산서(山西), 섬서(陝西)등으로 나눴는데, 실제 그 속 내용(內容)을 보면, 전혀 다른 지방(地方)도 설명(說明)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대륙(大陸)에서 근세기(近世期)에 편집(編輯)된 역사서(歷史書)나 지리지(地理志)등은 고의적으로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을 가능성(可能性)이 많다는 점을 주지(主旨)해야 한다. 【이것은 곧 현재(現在)의 행정편제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현재(現在)의 것에 맞춰 원전(原典)해설(解說)을 한다면 함정(陷穽)에 바로 빠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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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산서(山西)편 / 연연 산(燕然山) 원전(原典)본문(本文) /《燕然山在漠外.漢武征和三年,遣李廣利伐匈奴,深入至郅居水,還至燕然山,戰敗降匈奴.後漢和帝初,竇憲出朔方雞鹿塞,至涿邪山,會軍分兵,破北單于於稽落山,遂臨私渠北海,憲出塞三千餘里,登燕然山,刻石紀功而還.匈奴傳:燕然山,在匈奴中連邪烏地.北史:燕然山,在菟園水北.》
○ <번역(飜譯)> / 燕然山在漠外.漢武征和三年,遣李廣利伐匈奴,深入至郅居水,還至燕然山,戰敗降匈奴. : 연연 산(燕然山)은 막(漠)의 밖에 있다. 한(漢) 무제(武帝) 정화(征和)3년, 이광리(李廣利)를 보내 흉노(匈奴)를 쳐, 깊숙이 들어가 “질 거 수”【郅居水 : 질(郅) / 고을 이름 질】에 이르러, 연연 산(燕然山)에 이르러 복귀하였는데, 전쟁(戰爭)에 패(敗)해 흉노(匈奴)에 항복(降伏)하였다.
<번역(飜譯)> / 後漢和帝初,竇憲出朔方雞鹿塞,至涿邪山,會軍分兵,破北單于於稽落山,遂臨私渠北(?)海,憲出塞三千餘里,登燕然山,刻石紀功而還. : 후한(後漢) 화제(和帝) 초에, 두 헌(竇憲)이 삭방(朔方)의 계 록(雞鹿)요새를 나와, 탁사 산(涿邪山)에 이르러, 군(軍)을 모아 병사(兵士)들을 나누어, 계 낙산(稽落山)에서 북 선우(單于)을 깨뜨리고, 사거(私渠)에 임해 ( )해에 이르렀는데, 두 헌(竇憲)이 요새를 나와 3천 여리이다. 연연 산(燕然山)에 올라 그 공(功)을 돌에 새기고 돌아왔다.
<번역(飜譯)> / 匈奴傳:燕然山,在匈奴中連邪烏地.北史:燕然山,在菟園水北. : 흉노(匈奴)전 : 연연 산(燕然山)은, 흉노(匈奴)의 가운데 연이은 사오(邪烏) 땅에 있다. 북사(北史) : 연연 산(燕然山)은 토 원수(菟園水) 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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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연 산(燕然山)을 찾을 수 있는 단서(端緖)?
● 위 본문(本文)에서 『전한(前漢)의 장수(將帥) “이광리(李廣利)”가 흉노(匈奴)를 토벌하려고 진군(進軍)하여, 연연 산(燕然山)에 올랐다.』고 하였으니, 『그의 열전(列傳)➊과 무제(武帝)본기❷(本紀) 및 흉노(匈奴)전❸』을 찾아보자.
《燕然山在漠外.漢武征和三年,遣李廣利伐匈奴,深入至郅居水,還至燕然山,戰敗降匈奴. : 연연 산(燕然山)은 막(漠)의 밖에 있다. 한(漢) 무제(武帝) 정화(征和)3년, 이광리(李廣利)를 보내 흉노(匈奴)를 쳐, 깊숙이 들어가 “질 거 수”【郅居水 : 질(郅) / 고을 이름 질】에 이르러, 연연 산(燕然山)에 이르러 복귀하였는데, 전쟁(戰爭)에 패(敗)해 흉노(匈奴)에 항복(降伏)하였다.》고 하였다.
➊ 이광리(李廣利) 열전(列傳) / 後 十 一 歲, 征 和 三 年, 貳 師 復 將 七 萬 騎 出 五 原, 擊 匈 奴, 度 郅 居 水.〔一〕 兵 敗, 降 匈 奴, 為 單 于 所 殺. 語 在 匈 奴 傳.(1)師 古 曰 :「郅 音 質」 : 후 11년, 정화(征和) 3년, 이사 장군(貳師將軍)은 7 만기(萬騎)를 이끌고 오원(五原)을 나와, 흉노(匈奴)를 쳐, 질 거수(郅居水)를 건넜다. 병사는 패해, 흉노(匈奴)에게 항복(降伏)하고, 선우(單于)에 그곳에서 살해되었는데, 흉노(匈奴)전에 있다. 【주석(註釋) (1) : 사고(師古)가 이르기를, 『질(郅)의 음은 질(質)이다.』】
❷ 전한서(前漢書) 권6 무제(武帝)기 / 征和三年春正月,行幸雍,至安定,北地.匈奴入五原,酒泉,殺兩都尉.三月,遣貳師將軍廣利將七萬人出五原,御史大夫商丘成二萬人出西河,重合侯馬通四萬騎出酒泉.成至浚稽山(1)與虜戰,多斬首.通至天山,虜引去,因降車師.皆引兵還.廣利敗,降匈奴. 【注/(1)師 古 曰:「音 峻 雞.」 】: 정화(征和) 3년(B. C 90) 봄, 옹(雍)으로 행차해, 안정(安定), 북지(北地)에 이르렀다. 흉노가 오원, 주천을 침입해 두 도위를 죽였다. 3월, 이사 장군 ‘이광리’를 보내 7만 명을 거느리고 오원을 나가게 하고, 어사대부 ‘상 구성’은 2만 명을 거느리고 서하(西河)를, ‘중합 후’는 ‘마 통(馬 通)’은 4만 기를 거느리고 주천(酒泉)을 나갔다. ‘상 구성’은 준 계 산(浚稽山)에【注 (1) / 사고(師古)가 이르기를, 음은 준 계(峻 雞)이다.】 도착한 후 흉노와 싸워, 많은 적을 참수했다. ‘통(마 통이다)’이 천산(天山)을 꿰뚫으니, 흉노가 이끌고 물러났는데, 그로 인해 거사(車師)를 항복시켰다. 모든 군을 이끌고 귀환했다. 이광리는 패하자, 흉노에 항복했다.
❸ 흉노(匈奴)전 / 貳師將軍將出塞,匈奴使右大都尉與衛律將五千騎要擊漢軍於夫羊句山狹(1) : 이사 장군【이광리(李廣利)를 말한다.】이 성채를 나갔다. 흉노는 우대도위(右 大 都 尉)를 보내 ‘위율(衛 律)’과 함께 5천기를 이끌고 부양(夫 羊).구산(句 山) 골짜기(狹)에서 【 주석(註釋) / (1) 服虔 曰:「夫 羊, 地 名 也.」 師 古 曰:「句 山, 西 山 也. 句 音 鉤.」 복건(服虔) 이 이르기를, 부양(夫 羊)은 지명이다. / 사고(師古)가 이르기를, 구산(句 山)은 서산(西山)이다. 구(句)의 음은 구(鉤)이다. 】한 군(漢軍)을 요격하게 하였다.
貳師遣屬國胡騎二千與戰,虜兵壞散,死傷者數百人.漢軍乘勝追北,至范夫人城(2),匈奴 奔 走, 莫 敢 距 敵. : 이사장군은 속국(屬國) 호기(胡騎) 2천을 파견해 함께 싸우도록 하니, 흉노 병(虜 兵)이 허물어져 흩어지니(壞散), 수백(數百)명에 이르는 사상자(死傷者)가 났다 . 한 군(漢軍)은 승세를 타고 북쪽으로 추격하여, 범부인성(范 夫 人 城)에 이르렀고 【주석(註釋) / (2) 應劭曰:本漢將築此城.將亡,其妻率餘衆完保之,因以爲名也.張晏曰:范氏能胡詛者. 응소(應劭)가 이르기를, 본래 한나라 장수가 이 성을 쌓았는데, 장수가 죽자, 그의 처(妻)가 남은 무리를 이끌고 완전하게 보존하니, 이로써 이름으로 취하였다. / 장안(張晏)이 이르기를 : 범 씨(氏)가 미치도록 오랑캐를 저주하였다. 】흉노는 달아나 도주하여, 감히 대들지 못했다.
會貳師妻子坐巫蠱收,聞之憂懼.其掾胡亞夫亦避罪從軍,說貳師曰:「夫人室家皆在吏,若還不稱意,適與獄會,郅居以北可復得見乎?」(3) : 때마침 이사 장군(이광리를 말함)의 처자(妻子)가 무술(巫術)로 남을 저주하는데(巫蠱) 연루되어 잡히자, 이를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했다. 그의 속관(屬官 : 掾)인 ‘호 아부(胡 亞 夫)’ 또한 죄를 피해 종군하였는데, 그는 이사 장군(貳師將軍)을 설명하며 말하기를 : 『부인과 온 집안사람들이 모두 관리의 손에 있으니, 만약 돌아가서 뜻에 맞지 않으면, 더불어 감옥(獄)에서 만날 것이니, 질 거(郅 居) 이북의 땅을 다시 보고 그것을 득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주석(註釋) / (3) 如 淳 曰 : 以 就 誅 後, 雖 復 欲 降 匈 奴, 不 可 得.: 여순(如淳)이 이르기를, 주살된 후에는 비록 다시 흉노(匈奴)에 항복(降伏)하고자 해도 할 수 없다.】
貳師由是狐疑,欲深入要功,遂北至郅居水上.虜已去,貳師遣護軍將二萬騎度郅居之水.一日,逢左賢王左大將,將二萬騎與漢軍合戰一日,漢軍殺左大將,虜死傷甚衆.軍長史與決眭都尉煇渠侯謀(4) : 이사 장군(貳師將軍)이 이로 인해 의심을 품게 되어(狐 疑), 깊이 들어가 자기의 공을 스스로 들어내고자 하니(要功), 마침내 북쪽으로 질 거수(郅居水) 위에 이르렀다. 흉노(虜)는 이미 떠난 뒤인지라, 이사장군은 호군(護軍)을 보내 2만 기를 이끌고 질 거수(郅居水)를 건너게 하였다. 하루, 좌현 왕의 좌 대장을 만나, 흉노 2 만 기는 한 군(漢軍)과 하루 동안 맞붙어 싸웠는데, 한 군(漢軍)은 ‘좌 대장’을 죽였으며, 흉노(虜)는 사상자(死傷者)가 매우 많았다. 군(軍)의 장사(長史)가 결 휴 도위(決 眭 都尉) 휘 거 후(煇 渠 侯)와 모의하면서 : 【주석(註釋) / (4) 晉 灼 曰:「本 匈 奴 官 也. 功 臣 表 歸 義 侯 僕 多 子(䨓)[雷] 後 以 屬 國 都 尉 擊 匈 奴, 封 煇 渠. 煇 渠, 魯(閎)[陽] 縣 也.」 師古曰:眭音息隨反.煇音輝.僕多者,字當爲朋. : 진작(晉灼)이 이르기를, 『본래 흉노의 관직이다(휘 거 후는). 공신 표(功臣 表)에 의하면 귀의 후 복 다(僕 多)의 아들 뢰(雷)가 뒤에 속국도위(屬國都尉)로 임명되어 흉노를 공격하고, 휘 거(煇 渠)에 봉해졌다. ‘휘 거’는 노양 현(縣)이다. 사고(師古)가 이르기를, ‘휴(眭)’음은 식(息)과 수(隨)의 반이다. 휘(煇)의 음은 휘(輝)이다. 복 다(僕 多)는, 글자가 붕(朋)이 되어야 마땅하다.
曰:將軍懷異心,欲危衆求功,恐必敗.謀共執貳師.貳師聞之,斬長史,引兵還至速邪烏燕然山(5). : 이르기를 : 장군이 다른 마음을 품어, 무리들을(병사) 위험하게 하며 공(功)을 구하려하니, 필히 패(敗)하게 될까 두렵다하면서, 공모(共謀)하여 이사 장군(貳師將軍)을 잡으려 하였다. 이사 장군(貳師將軍)이 듣고는, 장사(長史)의 목을 베고,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가 속 야 오(速 邪 烏)의 연연 산(燕然山)에 다다랐다. 【주석(註釋) / (5) 師 古 曰:「速 邪 烏, 地 名 也, 燕 然 山 在 其 中. 燕(一音) [音 一] 千 反.」 : 사고(師古)가 이르기를, 속 야 오(速 邪 烏)는 지명이다. 연연 산(燕然山)이 그 가운데에 있다. 연(燕)의 음은 천(千)의 반(反)이다.】
單于知漢軍勞倦,自將五萬騎遮擊貳師,相殺傷甚衆.夜塹漢軍前,深數尺,從後急擊之,軍大亂敗,貳師降.單于素知其漢大將貴臣,以女妻之,尊寵在衛律上. : 선우(單于)는 한 군(漢軍)이 피로에 지쳐 싸움에 싫증냄을 알고(勞倦)는, 스스로 5만 기를 이끌고 이사 장군(貳師將軍)을 가로막고 치니, 서로 죽고 다친 무리가 매우 많았다. 밤에 한 군(漢軍) 앞에. 수척(數尺) 깊이를 파 놓고, 뒤에서 급히 치니, 한 군(漢軍)은 크게 어지러워 패하고, 이사장군은 항복하였다. 선우(單于)는 평소 그가 한(漢)의 대장(大將)으로 귀한 신하(貴臣)임을 알고, 자신의 딸을 처로 주고, 존총(尊寵 :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총해하는 것)하여 ‘위율【衛 律 : 본시 한(漢)의 관리(官吏)로 흉노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항복(降伏)하여 흉노(匈奴)의 정령(丁靈)왕이 된 인물】’의 위(上)에 두었다.
● 『이사 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의 온 가족이 무고(巫蠱)로 죄를 받게 되자, 출정(出征)중인 ‘이광리(李廣利)’는 흉노(匈奴)에게 항복(降伏)하여, 선우(單于)의 여식(女息)을 처로 맞아 살았으나, 결국 한(漢)의 관리(官吏)로 흉노(匈奴)에게 항복(降伏)했던 “위율(衛律)”로부터 모함(謀陷)을 받고 제천의식(祭天儀式)의 제물(祭物)로 살해(殺害)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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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연 산(燕然山)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서(端緖)
(1) 질 거 수(郅居水) : 在塞北.漢征和三年,遣李廣利出五原,匈奴悉徙輜重,北抵郅居水,左賢王驅其人民度余吾水六七百里,居兜御山,單于自將精兵度姑且水,廣利深入,度郅居水,還至燕然山,敗降匈奴.兜御山,姑且水,皆在大漠之北. : 성채의 북쪽에 있다. 한 정화(征和) 3년, 이광리(李廣利)가 오원(五原)을 나가, 흉노(匈奴)는 치중(輜重 : 군수품)을 남김없이 옮겨, 북쪽 질 거 수(郅居水)를 막고, 좌현 왕(左賢王)은 말을 달려 그 인민들을 여 오 수(余吾水)를 건너 6, 7백리의, 두 어산(兜御山)에 거하게 하고, 선우(單于)가 직접 정병(精兵)과 고차 수(姑且水)를 건넜다. 이광리는 깊이 들어가, 질 거수(郅居水)를 건너, 연연 산(燕然山)에 다다라 뒤돌아왔는데, 패(敗)하여 흉노(匈奴)에게 항복했다. 두 어산(兜御山)과 고차 수(姑且水)는, 모두 대막(大漠)의 북쪽에 있다.
(2) 범부인성(范 夫 人 城)에 이르렀고 【주석(註釋) / (2) 應劭曰:本漢將築此城.將亡,其妻率餘衆完保之,因以爲名也.張晏曰:范氏能胡詛者. 응소(應劭)가 이르기를, 본래 한나라 장수가 이 성을 쌓았는데, 장수가 죽자, 그의 처(妻)가 남은 무리를 이끌고 완전하게 보존하니, 이로써 이름으로 취하였다. / 장안(張晏)이 이르기를 : 범 씨(氏)가 미치도록 오랑캐를 저주하였다. 】
(3) 속 야 오(速 邪 烏)의 연연 산(燕然山)에 다다랐다. 【주석(註釋) / (5) 師 古 曰:「速 邪 烏, 地 名 也, 燕 然 山 在 其 中. 燕(一音) [音 一] 千 反.」 : 사고(師古)가 이르기를, 속 야 오(速 邪 烏)는 지명이다. 연연 산(燕然山)이 그 가운데에 있다. 연(燕)의 음은 천(千)의 반(反)이다.】
(4) 燕 然 山 在 漠 外 : 연연 산(燕然山)은 “막 외(漠外)”에 있다. / 막 외(漠外)란 대막(大漠)지대를 벗어난 막북(漠北 : 사막의 북쪽지대)과 같은 의미(意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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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竇憲出朔方雞鹿塞,至涿邪山,稽落山,遂臨私渠北(?)海,憲出塞三千餘里,登燕然山,刻石紀功而還. : 두 헌(竇憲)이 삭방(朔方)의 계 록(雞鹿)요새를 나와, 탁사 산(涿邪山)에 이르러, 계 낙산(稽落山),●사거(私渠)북( )해에 이르렀는데, 두 헌(竇憲)이 요새를 나와 3천 여리이다. 연연 산(燕然山)에 올라 그 공(功)을 돌에 새기고 돌아왔다.
위의 말은 처음 두 헌(竇憲)이 삭방【朔方 : 전한(前漢) / 하투(河套)의 악이다 사(鄂爾多斯)】의 『계 록 새(雞鹿塞 : 황하 서북 안)』에서 군대를 이끌고 나온 후, 『탁 사산(涿邪山)과 계 락 산(稽落山)』을 지나, 『사거(私渠)해(海)』를 지나서 『연연 산(燕然山)』에 올랐는데, 『행군거리가 3천리였다』는 이야기다.
◈ 일단 “계 록 새(雞鹿塞)”는 황하 서북(西北)안에 있다는 것이니, 3천리(千里)에 대해 ‘구슬-어스’로 직선거리(直線距離)를 알아보니, 서북(西北) 방향(方向)으로 항 애 산맥(杭愛山脈)의 ‘항 애 산(杭愛山 : 낙타 산)’ 북방(北方)지대의 『‘하이어가스’호수와 ‘오브스’ 호수』주변이 되는데, 이곳 은 외몽고(外蒙古) 서북쪽【 당노산맥(唐努山脈) 남쪽지방, 알타이산맥(山脈) 동쪽지방, 항 애 산맥(杭愛山脈)의 서쪽지방은 북(北), 동(東), 서(西)쪽은 험준한 산맥에 가로막혀 있는데, 이곳에는 크고 작은 7 개의 호수가 있으며, 이 호수로 몰려드는 크고 작은 하천들이 많다. 이곳은 오직 동남(東南)쪽만이 열려있는데, 그 남쪽지방에는 ‘고비사막’이 펼쳐져 있다.】지방이다.
그러나 정(正) 북(北)쪽 지방이 될 수 없는 것은, 대막(大漠) 곧 큰 사막(沙漠)의 북쪽이란 특이지형(特異地形)의 한계(限界)가 존재(存在)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대륙(大陸)의 사막(沙漠)지대는 현 황하(黃河) 서쪽지방【하서지방(河西地方)】에 존재하며, 특히 전한(前漢) 무제(武帝)시절이라면, 이천(二千)일백(一百)여년 전(前)의 일이기 때문에, 당시(當時)의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오늘날의 것보다 휠 씬 “서쪽지방”에 있었다는 것을 참고(參考)한다면, 『서북방(西北方)지대(地帶)가 올바른 것이다.』
그렇다면 당(唐)나라 때 “연(燕)”의 땅이라 한 곳, 즉 “현 신 강성(新疆省) 남쪽지방의 ”연(燕)의 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라는 문제(問題)에 봉착(逢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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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匈奴傳:燕然山,在匈奴中連邪烏地.北史:燕然山,在菟園水北. : 흉노(匈奴)전 : 연연 산(燕然山)은, 흉노(匈奴)의 가운데 연이은 아오(邪烏) 땅에 있다. 북사(北史) : 연연 산(燕然山)은 토 원수(菟園水) 북쪽에 있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菟園水,在燕然山南.魏書云:南去平城三千七百餘里,魏主燾擊柔然,循栗水西行,至菟園水,分軍搜討,東西五千里,南北三千里,俘斬無算.是也. : 토 원 수(菟園水)는 연연 산(燕然山)의 남쪽에 있다. 위서(魏書)에서 이르기를 : 남쪽으로 평성(平城)까지 3,700 여리인데, 위(魏) 주(主 : 왕) ‘도(燾)’가 유연(柔然)을 치는데, 이들을 좇아 율수(栗水) 서쪽으로 가, 토 원 수(菟園水)에 다다라, 군(軍)을 나누어 유연(柔然)을 찾아 동서 5천리, 남북 3천리(千里)를 벌하였는데, 수급을 벤 자와 사로잡힌 자가 셀 수 없었다.
● ‘평성(平城)’에서 ‘3천7백리’라면, 『북(北)쪽으로 ‘바이칼 호수’의 북(北)쪽 지방이며, 서북(西北)쪽으로는 ‘항 애 산맥(杭愛山脈)’의 ‘항 애 산(杭愛山)’ 북쪽지방이다. 문제는 ‘평성(平城)’은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이다. 위(魏)는 “고구려(高句驪)”이며, 대륙 사(大陸史)에서 “고구려(高句驪)왕조(王朝)”를 숨기기 위한 왜곡(歪曲)의 산물(産物)일 가능성(可能性)이 농후(濃厚)하다.
가장 중요(重要)한 점은, 『“당(唐)”나라 때의 시인(詩人)묵객(墨客)들의 “글”속에서는 “연(燕)”나라의 땅이 “옥문관(玉門關) 서(西)쪽”으로 설명(說明)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대륙 사(大陸史)에서 선비족(鮮卑族) “연(燕)”의 땅은, “부여(夫餘)의 서쪽지방에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부여(夫餘)는 하서회랑(河西回廊)의 주천(酒泉) 북방(北方) 지대에 있었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는데, 후한서(後漢書) 부여국(夫余國)편에서는 “지방(地方) 2천리”라고 하였다. 【논거(論據)와 고증(考證) : 괄지 지(括地志) 진한(辰韓)과 호위우공추지(胡渭禹貢錐指)】
『부여(夫余)가 있었던 주천(酒泉) 북방(北方)에서, “1천리 서(西)쪽 땅은, 돈 황(燉煌)과 옥문관(玉門關) 근처요”, “2 천리라면 포창해(蒲昌海)주변이다.” 【 1리를 4km 또는 5km로 환산하느냐에 따라 그 위치는 다소 달라질 수 있다.】
● 『연산(燕山)과 연연 산(燕然山)』에 대한 여러 설명을 보듯이, 이해(理解)하기 어렵도록 편집(編輯)해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課題)이나, 『연산(燕山)은 연나라 땅에 있었으며, 동방(東方)에서 연(燕)의 도읍지(都邑地)를 찾아 가려면 필히 사막(沙漠)땅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좀 더 확실한 고증(考證)자료(資料)를 찾아야 확신(確信)할 수 있는 증거(證據)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연산(燕山)의 위치(位置) 향방(向方)에 따라 엄청난 변혁(變革)이 요구(要求)되기 때문에 조선(朝鮮)을 해체(解體)한 자(者)들의 치밀(緻密)함이 돋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진실(眞實)은 어둠에 묻히지 않으리라 확신(確信)을 가지면서 계속 비경제적(非經濟的) 활동을 계속해야 될 것 같다.
●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연산(燕山)”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에 대해 고견(高見)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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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중국(中國)사람을 “되놈”이라고 하였다. 국어사전(國語辭典)을 검색(檢索)해 보면, “중국(中國)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 또는 비하(卑下)하여 부르는 말, 오랑캐를 낮춰 부르는 말”이라고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중국(中國)은 오랑캐”라는 말이 된다.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는 그 “되놈”을 “중화(中華)인” 또는 “화인(華人)”이라고 하여, 그 나라 왕을 천자(天子)라고 하면서, 사대(事大)하였다. 분명(分明)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확실하다. 오랑캐란 곧 호인(胡人)들을 말하는 것이며, 호(胡)란 서쪽에 살고 있는 서융(西戎)을 가리키는 말이며, 곧 서호(西胡)와 같다. 융(戎)이란 말이 곧 “되놈”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되놈”이라고 부르는 종족(種族)은 곧 『융(戎)』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는 곧 “중국에 살고 있는 백성(百姓)”을 말하는 것이고, 그곳에서 『서쪽에 살고 있는 융(戎)을 낮춰 부르는 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호과(胡瓜).후추(胡椒), 호두(胡桃)라고 칭하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호(胡)란 곧 서쪽에 사는 융(戎)들을 말하는 것이다. 또 호(胡)란 말을 “옥편(玉篇)”에서 찾아보면, “옛 몽고(蒙古)지방에 살고 있던 종족 호”이며, 이는 “청안(靑眼)을 갖고, 붉은 수염과 털이 많이 나있는 미후(獼猴)와 같은 종족(種族)”이라는 역사서(歷史書) 기록(記錄)과 통하며, 곧 “옛 몽고족은 서쪽 땅에 살고 있었던 호(胡) 곧 융(戎)을 말한다.” 이러한 자(者)들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되놈”이며,
서융(西戎)=서호(西胡)들을 “되놈”이라고 낮춰 불렀던 “우리”들은 조선(朝鮮)의 조정(朝廷)이 있었던 “황도(皇都)”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되놈, 되놈”하면서 무시(無視)당하고, 비하(卑下)당하고, 욕을 먹었던 종족(種族)들은 서쪽에 살고 있는 호(胡)들을 말하며, 그들을 무시(無視)하고, 비하(卑下)하고, 욕했던 우리들은 “조선(朝鮮)의 중국(中國) 땅에 살고 있었던 우리들의 선대(先代)조상(祖上)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도(半島)에 살고 있었던 토착민(土着民)을 제외(除外)한, 많은 수의 선대(先代)조상(祖上)들은, 조선(朝鮮)이 해체(解體)되면서 이주(移住)한 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 분들이 평소에 말했던 “되놈”이란 말이 반도(半島)로 이주(移住)한 사람들에 의해 불러지게 된 것이다.』라고 한다면 잘못된 것일까? < 2 부 끝>
2012년 11월 01일 <글쓴이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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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무 선생님의 주장은 확실히 들어맞습니다.. 청사(靑史) 지리지를 찾아보면, 신강(新疆) 구역 내에 연연산(燕然山)이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긴 합니다..
<현조>님!
그런데 "연산"이라는 산의 위치에 대한 확실한 고증과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이게 아주 힘듭니다. 저는 일단 '연산'에 대해서만은 역사서 원전보다는 전한이나 후한시절의 악부시나 당니라시절의 이백이나 왕유, 고적등이 지은 詩시)속에서 찾아보고자 하는데, 이것은 역사서의 왜곡보다는 손이 덜 탓을 것이란 생각때문입니다.
연산에 대한 고견이 있으시다면, 좋은 내용을 부탁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올바른 역사를 찾고자 노력하시는 문무선생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연행록에서 연행사들은 사막을 건너 북경에 이르게 됩니다.그 모래사막은 검다하여 검은 모래사막이라 합니다. 이 검은것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바로 석탄분진입니다. 유주, 북경등 북방의 땅은 석탄 앙금이 쌓여서 된 땅이라 합니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고비사막이나 신강성의 누런 모래사막과는 다르죠. 여름철에 북경을 갔던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는 사막을 건너갔다는 느낌을 거의 받을수 없습니다. 즉 여름에는 많은 비로 수렁땅이 되어 통행하기가 어렵웠고, 건조한 겨울철이면 땅이 말라서 먼지가 휘날려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되는것이죠. 유주땅 주변에는 석탄
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연행록을 남긴 많은 사람들은 조선(황하 이남)의 푸른 산천을 보다가 건조하고 황량한 북방의 땅을 보니(산서성의 반 건조지대) 황막하다 했던 것이지, 그들이 우리가 아는 지금의 신강성의 사막이나 중앙아의 사막처럼 거대한 사막을 갔던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의주부터 북경까지의 2천리 길 중 요동 8백리라 했으니 그중에 발해(내륙호)도 있어야 하고...요동 천산, 공동산, 홍라산 ...많은 마을과 사찰과 탑. 문묘, 관제묘등등.....이 있어야 하는데 신강성 남쪽과 그 주변에 그런 문화 유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산동 산서의 기준이 되는 산은 지금의 태항산맥이라 생각합니다.. 산서에 연연산이 있으면 지금의 산서성이 연나라땅인 것입니다. 산서성 중남부에 사막이 없어서 북경이 될수없는 조건이라 한다면 연행사들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사막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연행록을 남긴 많은 조선 말엽의 사람들은 고비사막이나 신강성사막 혹은 중앙아사막을 본적이나 있었을까요.
중원 동쪽의 지명들, 가령 현재의 북경이나 심양, 산해관, 백두산등등은 지명이 이동되어 과거의 위치가 아니라 합니다.
중원 서쪽의 지명들, 가령 연연산이라는 항애산, 돈황서쪽의 옥문관, 곤륜산 남쪽의 화전, 백룡퇴등등은 검증이 되었는지 모르겠읍니다.과거의 지명이 현재까지 그 위치에 남아있는 곳은 몇 개나 될까요..
백두산은 그 산의 돌이 눈과 같아 백두라 했다는 말은 사실이라 생각됩니다. 수경주에 태백산은 백석산이다 라고 했으니 백두산의 백(白)의 정체는 흰 돌입니다. 백두산이 어디에 있든 그 산의 돌(산을 이루는 암석)은 흰 돌이어야 합니다.
백두산은 사류하의 북쪽에 있다 했고, 사류하는 모래많기로 유명한 사하역과 옥전현 사이에 있으니 백두산은 북경(연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합니다. 백두산은 흰 돌산이고 그 돌산은 이동할수도 이동 시킬수도 없이처음부터 끝까지 그자리일테니 그러한 땅이 있는곳을 찾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요..?
연산군의 연산은 그 연산이 확실하다고 보는데 그럼 연산군시기까지는 거기를 보유 했다는 이야기인가요?
글쎄요. 거기까진 생각치 못했는데..........'연산'을 찾는다면 조선의 지리적 위치 또한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인데.......하나 하나 되돌아보면서 정리를 해볼까 합니다.
"연산과 요수등" 몇 가지 쟁점사안만이라도 잘 파악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맑은영혼님이 언급하는 사류하(沙流河)도 하북(河北)의 아골산(鴉鶻山)에 흐르는 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명나라(明)의 연산도(燕山圖)에 따르면, 근세 조선(朝鮮)의 압록강(鴨綠江]도 연연산(燕然山)의 동쪽 인근에 흐르면서, 남쪽에는 요수(遼水)와 황하(黃河)가 서로 합치는 지형적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 아골산(鴉鶻山)이 위치할 개연성이 높다는 데에 문제입니다.. 또한.. 백두산(白頭山)과 직접 관련되는 흥안령(興安嶺)도 역시 하투(河套 : 악이다사)의 음산(陰山) 그 자체이라고 하는 청나라(靑) 기록도 존재합니다.. 여러 정황을 보자면, 문무 선생님의 주장이 들어맞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것은, 정확한 사류하(沙流河)가 증명되기 위해선 그 북쪽에 흰 돌산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지도에 어떻게 표시되든 그 진위 여부를 알수 없기 때문입니다.그리고 북경(연경)의 주변 정황들(석탄,벽돌로된 성(城),여러가지의 묘(廟)문화, 흰 돌산, 지형적으로 분지형 평야지대 등등)과도 서로 맞아야 정확할 것입니다.
독사방여기요 산서 편에, 峨眉嶺 아미산? 을 본 기억이 나네요.
아미산은 사천에 있는 산 인데, 산서에 아미산과 검각, 잔도, 파촉의 남정관, 한중이 있다면, 연연산을 찾으시는데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글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