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세탁기
박래여
세탁기를 교체했다. 시집 온 이래 세 번째 교체다. 32년 전 혼수용으로 사 왔던 세탁기는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폐기처분을 했었고, 아들이 네 살 때 분가를 했었다. 그때 산 금성세탁기를 여태 썼으니 참으로 오래 썼다. 26년을 썼다. 몇 년 전에 한 번 고장이 났었다. 수리기사는 아직도 이걸 쓰느냐며 신기해했었다. 수리한 후 여태 잘 썼다. 엊그제였다. 이상하게 세탁물의 때가 안 빠진 것 같아 다시 돌렸더니 가운뎃부분이 헛돌았다. 수명이 다해 가운데 연결부분 쇠가 마모 되어버렸다.
엄마의 세탁기를 꺼냈다. 십 년 전 친정엄마 돌아가시고 엄마가 쓰던 세탁기를 가져왔었다. 바꾼 지 몇 년 안 된 깨끗한 것이다. 그 세탁기는 십 년 동안 사랑방에 처박혀 있었다. 엘지 세탁기다. 십 년을 묵혔던 기계가 잘 돌아갈까. 반신반의하며 바꾸었다. 세탁기의 상표가 금성에서 엘지로 바뀌었다. 시험운행을 했더니 세탁기는 잘 돌아갔다. 하늘에 계신 친정엄마가 웃겠다. 우리 집 가전제품은 모두 골동품 수준이다. 전자레인지도 26년째다. 고장 한 번 안 나고 잘 쓴다. 금성냉장고도 아직 쓰고 있다.
“우리 같은 사람만 살면 전자제품업체 다 망하겠다.”
“그러게. 알뜰살뜰 짠순이로 살아도 살림살이는 매양 똑 같은데. 이참에 아예 드럼세탁기로 바꿔봐? 빨래를 뽀송하게 말려주는 것으로?”
남편은 싱긋 웃고 만다.
엄마가 사용하던 세탁기를 쓰려니 마음부터 찡하다. 그 세탁기 장만하려고 허리띠를 얼마나 졸라맸을까. 아버지 돌아가신 후 당신 손으로 생활비를 벌어 써야 했던 엄마, 자식들에게 생활비 한 푼 보태 달라는 말씀도 없으셨다. 나 역시 농사꾼 아낙으로 곤고하게 살면서 엄마의 삶에 대한 생각도 못하고 살았다. 어쩌다 친정나들이를 가면 용돈 몇 푼 쥐어주고 반찬거리나 먹고 싶다는 것 사다 드리는 것으로 생색을 냈었다. 친정 부모님께 할 만큼 했다고 큰소리도 쳤었다.
가난한 친정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고, 내가 힘들 때 보태줄 여력이 있는 친정이면 얼마나 좋을까. 바랐던 적도 있었다. 늘 내가 도와드려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화를 부리기도 했었다. 힘들 때마다 나만 찾는다고 내가 봉이냐고 소리친 적도 있었다. 생전에 엄마는 ‘너도 자식 키워봐라. 에미 생각날 때 있을 거다.’ 하시던 말씀이 옳았다. 엄마 생각을 자주한다. 늙어갈수록 엄마를 빼박았다는 말을 들을 때면 더욱 엄마가 그립다. 엄마처럼 촌부로 살아가기 때문일까. 엄마처럼 바지런하지 못해서 일까.
엄마가 돌아가실 때 아들이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다. 아파 누워있는 엄마에게 등록금 걱정을 하자 엄마는 ‘우리 외손자 등록금은 내가 마련해 줄 테니 걱정마라.’고 했었다. 진짜 엄마는 등록금을 주고 가셨다. 초상 친 후 엄마의 49제비용까지 제하고 남은 돈이라며 언니가 준 봉투에는 300만원이 들어 있었다. 아들의 등록금이 꼭 그만큼 들었었다. 엄마는 생전에 당신이 했던 약속을 돌아가시면서 이행하신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었다.
그 때처럼 엄마의 손때가 묻은 세탁기를 돌리며 엄마의 영혼이 옆에서 지켜보는 것 같아 따뜻하다. ‘선머슴아 같은 엄마 딸 진짜 짠순이지? 엄마한테 갈 때까지 이 세탁기 쓸 것 같아. 그 때 봐.’ 나는 허공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에게 가는 길이 나쁠 것 같지 않아 더 좋다. 가족이 먼저 가서 기다린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삶과 죽음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앞으로 20년만 지나면 엄마 돌아가실 때 나이가 된다. 그때까지 엄마의 세탁기를 쓰며 살아있을까. 십 년을 간직했던 엄마의 세탁기가 가난했던 날을 떠올리게 하고, 삶에 지쳐서 허덕이던 젊은 날을 떠올린다. 엄마도 그런 세월을 살면서 노인이 되었고, 내 곁을 떠났다. 나도 내 자식들에게 그런 엄마로 남지 않을까. 제 나이만큼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보는 것이 인간의 길 같다. <분노와 애정>에 나오는 작가들 이야기처럼 엄마가 된다는 것은 희로애락을 모두 맛보는 일이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엄마가 그리운 만큼 두 아이도 그립다.
앞으로 엄마의 세탁기는 내 세탁기가 되어 묵은 때,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줄 것이다. 내 마음에 묻은 때마져 날마다 말끔히 씻어 푸른 하늘에 달아줄 것이다. 어떤 빨래든 뽀송뽀송 마를 때까지 엄마의 영혼이 내 곁에서 나비처럼 춤추며 서성거리지 않을까.
‘엄마, 고마워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첫댓글 윽...ㅠㅠ 가슴이 뭉클해지네요. 얼마 전에 저희 어머니 폐암초기라는 얘기 들으니 어머니 주름살만 보이더라고요. '삶과 죽음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ㅎ 그렇지요.
폐암 초기라면 나을 확률이 높아요. 그래도 암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경기를 일으키니. 어머님 마음이 무거울 겁니다. 평소처럼 대하세요. 환자가 환자가 될 때는 주위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눈입니다. 특히 아들일 경우에는 ㅋ
요즘 소설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살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