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해도[黃海道]는 설산[雪山]을 마주하며 사해[沙海]의 바다를 품고
반[半] 만년[萬年]의 유구[悠久]한 역사[歷史] 우리의 역사[歷史],..... ...... 일 만년[一萬年]을 오르내리는 우리의 역사[歷史],....... 조선사[朝鮮史]의 상고사[上古史]에 나타나는 희미하고 짧은 기록[記錄]들과, 비록 고증[考證]은 할 수 없지만, 고대[古代]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로 미루어 본다면, 우리의 역사[歷史]를 일만년[一萬年]이라고 해도, 부족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세계[世界]의 역사상[歷史上] 그 유래[由來]가 없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오랜 역사[歷史]를 지니고 있으며, 하늘로부터 명[命]을 받은 천손[天孫] 민족[民族]으로서, 장구[長久]하고 유구[悠久]한 역사[歷史]를 간직하고, 찬란[燦爛]한 문명[文明]을 꽃피운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 우리 조선사[朝鮮史]의 강역[疆域]과, 주 무대는 어디까지였을까 ?
우리가, 우리 역사[歷史]의 길을 따라가면서,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상식[常識]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역사[歷史]에 관한 많은 것들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것은 반세기[半世紀]을 넘도록 우리가 배워온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역사[歷史]와, 반도사관[半島史觀]의 폐해[弊害]가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역사[歷史]의 본 모습과는 관계없이 변조[變造]되고 왜곡[歪曲]된, 역사[歷史]의 자료[資料]들이, 위선[僞善]의 탈을 쓰고 역사[歷史]의 진실[眞實]로 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사[朝鮮史]와 대륙사[大陸史]의 기록[記錄]에 나타나는 조선[朝鮮]의 황해도[黃海道]는, 어느 지역에 위치[位置]하고 있었으며, 그 크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 이름 그대로 누런 황해[黃海]의 물결이 출렁거리고, 아득한 대해[大海]를 품고 있는 조선[朝鮮]의 황해도[黃海道]는,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나라의 운[運]을 다하는 근세[近世]까지, 어느 지역에 위치[位置]하고 있었을까 ?
황해도[黃海道]는,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西海道]서해도는, 本高句麗之地, 唐高宗滅高句麗, 而不能守, 新羅遂幷之.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땅으로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으나 지켜내지 못했으며, 결국 신라[新羅]가 병합하였다. 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서는,...... 至本朝太祖四年乙亥, 改爲豐海道, 太宗十七年丁酉,又改爲黃海道, 常以都觀察黜陟使, 兼兵馬都節制使, 본조[本朝] 태조[太祖] 4년 을해[乙亥]에 풍해도[豊海道]로 고치었다가, 태종[太宗] 17년 정유[丁酉]에 또 고쳐서 황해도[黃海道]로 하였다. 항상 도관찰 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써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겸하게 하였다. 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황해도[黃海道]는, 고려[高麗]시대에는, 서해도[西海道]라고 하였다. 조선[朝鮮]시대에는, 풍해도[豊海道]라고 하였다가, 황해도[黃海道]로 고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황해도[黃海道]를 고려[高麗]에서는, 왜 서해도[西海道]라고 하였을까 ?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주장대로 지금의 황해도[黃海道]가, 고려[高麗]의 서해도[西海道]였을까 ? 반도[半島]에서 서[西]쪽을 향하고 있는 도[道]는, 한 두 개가 아니다. 그런데 유독 황해도[黃海道]만 서해도[西海道]라고 한 근거[根據]는 무엇이었을까 ?
천하[天下]의 만물[萬物]들은, 각기 그 고유의 성질에 따라서, 그에 합당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하물며, 우리의 선현[先賢]들이 국가[國家]의 일익을 담당하는 중요[重要]한 지역의 명칭[名稱]을 만들면서, 검은 것을 희다고 하고, 그 지역과 연관성이 없는 지명[地名]을 아국[我國]의 땅에다 만들었을까 ?
해[海]라는 명칭[名稱]을 적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오늘날의 바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장강[長江]과 황하[黃河]의 기록[記錄]들을 보면, 바다[海]와 강[江]의 명칭[名稱]을 같이 쓰고 있으며, 조수[潮水]가 물러가고 밀려온다고 적고 있다. 또한 호수[湖水]와 강[江]이 얽히고, 대택[大澤]이 있는 지역은, 예외 없이 모두 해[海]라고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조선사[朝鮮史]에서, 지금 중국[中國]의 황하[黃河]와 장강[長江] 유역의 일대를, 해[海]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는 것은,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해[海]의 기록[記錄]에 대한, 그 일면의 예[例]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사막[沙漠]이 펼쳐지고 염호[鹽湖]와 대택[大澤]이 있는 지역들은, 모두 해[海]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예는, 대륙사[大陸史]의 역사서[歷史書]도, 조선사[朝鮮史]와 같으니, 사서[史書]를 읽으면서, 이를 모른다면, 작은 일이 아니요, 알면서도 해[海]라는 기록[記錄]은, 오늘날의 바다를 말하는 것이 라고 주장[主張]다면, 그러한 자들은, 역사[歷史]와는 관계[關係]가 없는 자들일 것이다.
조선[朝鮮]이 서해도[西海道]를 황해도[黃海道]라고 고친 이면에는, 서해도[西海道]의 지형[地形]과 지리[地理]와, 자연환경[自然環境]이 황해[黃海]와 비슷하기 때문에 황해도[黃海道]라고 고친 것이다. 반도[半島]에 있는 서해[西海]의 푸른 바다와, 사막[沙漠]과 염호[鹽湖]와 대택[大澤]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는, 반도[半島]땅의 조그만 지역을 떼어서, 누런 바다물결이 출렁거리고 아득한 대해[大海]가 펼쳐지는 곳이라고 기록[記錄]을 하며, 황해도[黃海道]라고 명명[命名] 하였으랴 !
우리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를 읽으며, 조선[朝鮮]의 실체[實體]를 파악하고, 우리 역사[歷史]의 혼[魂]과 얼을 호흡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가[四佳]선생의 송권중평출목황주서, 送權仲平出牧黃州序에서,..... 盖今之刺史 卽古之諸侯 刺史之於民 有君道焉 有父母之道焉, 대개 지금의 자사[刺史]는 바로 옛날의 제후[諸侯]이니, 자사[刺史]는 백성[百姓]들에 대한 임금의 도리가 있고, 부모[父母]의 도리가 있다. 고 하였다.
사가[四佳]선생은, 자사[刺史]의 직분은 옛날의 제후[諸侯]와 같다고 하면서,...... 朝廷之制 任外寄者六 曰府尹 曰牧使 曰府使 曰郡守 曰縣令 曰縣監 而牧使則秩正三品 又有通判 爲之僚佐焉 爲界首焉 爲首鎭焉 所管亦不下數十州 其任不旣重乎, 조정[朝廷]의 제도에 외직[外職]을 맡는 관직[官職]은 여섯으로, 부윤[府尹],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인데, 목사[牧使]는 품계가 정3품[正三品]이며, 또한 통판[通判]을 두어 보좌로 삼으며, 계수관[界首官]이 되고 수진[首鎭]이 되며, 관할하는 고을도 수십 주[州]를 내려가지 않으니, 그 임무가 이미 중대하지 않겠는가 ? 라고 설명하고 있다.
만인[萬人]이 알고 있듯이, 수 많은 선현[先賢]들의 문집[文集]을 살펴보면, 박후[朴侯], 김후[金侯], 이후[李侯]등과 같은, 후[侯]의 존칭[尊稱]을 붙이는, 기록[記錄]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지방의 중요[重要]한 외직[外職]으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모두 후[侯]의 존칭[尊稱]을 쓰고 있다. 또한, 후[侯]라는 존칭[尊稱]을 쓰는 이면에는, 그 한사람의 후[侯]가 다스리는 지역이 넓고 방대하기 때문 이었다. 실제로 한 사람의 목사[牧使]가 다스리는 지방 중에, 사방[四方] 천리[千里]가 넘는 지역들이 수두룩하다.
조선사[朝鮮史]의 전반적인 기록[記錄]에 나타나는 관직[官職]의 명칭[名稱]만을 보더라도,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왕조[王朝]들은, 천하[天下]의 존엄[尊嚴]을 지닌 지존[至尊]의 천자지국[天子之國]이었음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다산[茶山]선생은, 제양청계유사시서[題梁靑溪遺事詩序]에서,........ 屬當倭奴之入寇 公乃抗白面而卽戎 糾蒼頭而奮義, 임진년[壬辰年]에 왜적[倭敵]의 침략을 당하자 공[公]은 서생[書生]임을 무릅쓰고 싸움터로 뛰어들어 창두[蒼頭]들을 규합하여 의기를 떨쳤다.
三川鼎沸 六鑾蹈獸角之危 九廟震驚 七尺等鴻毛之擲 中宵投袂 仰星月而昭森 間道揚鞭。御風霆而激烈 삼천[三川]이 물끓듯 하자 천자[天子]는 위험을 무릅쓰고 몽진[蒙塵]을 하였으며, 구묘[九廟]가 진경[震驚]하자, 자신을 곧 기러기털처럼 가벼이 내던졌다. 밤중에 옷소매를 떨치며 비치는 성월[星月]을 우러러보고, 사잇길로 채찍을 날리며 결렬한 풍정[風霆]을 몰아갔다.
寒樓草檄 靑霜薄炎海之雲 瑞石移書 白羽飛霽峯之壘, 광한루[廣寒樓]에서 격문을 쓰니 서릿발 같은 기상은 염해[炎海]에 낀 구름을 걷히게 하고, 서석[瑞石]에서 글을 전하니, 글을 단 화살은 제봉[霽峯] 진영으로 날아갔다. 라고 말하였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의 론자[論者]들이 지금까지 공교육[公敎育]을 통하여 가르쳐 온대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선[朝鮮]이 반도[半島]에 있었다면, 우리의 선현[先賢]들이 남긴 기록[記錄]들은, 모두 허구적인 소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육란[六鑾]은, 천자[天子]가 타는 수레를 말하는 것이며, 구묘[九廟]는, 천자[天子]의 종묘[宗廟]를 말하는 것이니,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은, 당당한 천하[天下]의 만승지국[萬乘之國]이며, 천자[天子]의 나라였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역사서[歷史書]와 문집[文集]들의 상당수가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었으며, 변조[變造]되었고, 고지도[古地圖]라는 것들이 이에 맞추어져 그려져 있음은, 고지도[古地圖] 또한,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의 산물임을 증명[證明]하고 있는 것이다.
고지도[古地圖]를 포함하여, 모든 지도[地圖]들은, 참고는 할 수 있어도 이러한 것들을 증거[證據]로 내세우며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는 길이 될 것이며,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은, 영원[永遠]히 보지 못할 것이다. 본인도 수[數] 십년[十年]전에, 이러한 고지도[古地圖]들을 바탕으로 역사[歷史]의 길에 발길을 옮겼었다. 그러나 뒤에 남는 것은, 우리 역사[歷史]의 희미한 진실[眞實]조차 볼 수 없었다.
그 후[後]에, 수[數] 십여국[十餘國]의 나라를 현지[現地] 조사[調査]하면서, 고지도[古地圖]의 허실[虛實]을 그대로 들여다보게 되었으며, 출처가 불분명[不分明]하고, 어떤 목적하에 만들어진, 고지도[古地圖]를 가장한 조작[造作]된 지도[地圖]임을 확인[確認]하게 되었다.
또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지명[地名]들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고지도[古地圖]와 같이 본래의 지명[地名]들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歷史]가 무너진 오늘날의 현실[現實]을 돌아보면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행태[行態]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식민사관[植民史觀]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우리의 역사[歷史]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앞에 무슨 변명을 할 것인지 궁금하다. 지금 일본은, 속으로 한국[韓國]을 비웃으며, 한국[韓國]을 얼마나 우습게보고 있을 것인가 ?
자기들이 거짓으로 만들어 놓은 더러운 식민사학[植民史學]을, 한국[韓國]의 명문[名門] 대학[大學]이라는 곳에서부터, 국가[國家]에 이르기까지, 공교육[公敎育]을 통하여 국사[國史]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물며 나라의 최고 학부[學府]에 있는, 석학[碩學]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앞장서서 가르치고 있으니, 일본의 아베 같은 자들이 연이어 나오고, 망발[妄發]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한국[韓國] 스스로 식민지[植民地]의 주구 노릇을 하고 있는데, 어찌 속으로 쾌재[快哉]를 부르지 않겠는가 ? 작금에 터져 나오는 일본의 오만방자[傲慢放恣]하고, 사악[邪惡]하며 악의[惡意]적이고 더러운 행태[行態]들은, 한국[韓國]이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 일이며, 일본을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더러운 식민사학[植民史學]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지금까지 가르쳐온 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
그래도 한국[韓國을 대표하는 학자[學者]라고 한다면,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앞에, 당당히 나서서 일본의 더러운 행태[行態]를 준열히 비판하고, 반박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소식은 한줌도 들리지 않으니, 섬나라 도적놈들의 행태[行態]는, 날이 갈수록 그 도[道]를 넘어설 것이다. 식민사학[植民史學]의 폐해[弊害]는, 먼 미래[未來]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대[當代]에 스스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고, 적국[敵國]의 화[禍]를 불러들이며, 적국[敵國]에게 당하게 되는 것이다.
식민사학[植民史學]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우리의 역사[歷史]에 대하여, 옛날부터 반도[半島]의 조그만 나라에서 주권[主權]도 지키지 못하고,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에 대하여 상국[上國]으로 모시고 신하[臣下]노릇을 한, 사대[事大]의 민족[民族]으로 어릴 때부터 가르치고 있으니, 이런 교육[敎育]을 받은 후세[後世]들이, 어찌 자아[自我]를 지닌 국가[國家]의 동량[棟梁]으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와는 관계가 없는,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사악[邪惡]하고 더러운 식민사학[植民史學]을 지금까지 가르쳐오고 있으니, 오늘날 왜놈들의 비열[鄙劣]하고 더러운 행태[行態]는, 한국[韓國]이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의 논자[論者]들은, 일본의 이러한 더러운 행태[行態]에 대한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疑問]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일본 놈들은, 한국[韓國]을 식민지[植民地]로 착각[錯覺]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우리 역사[歷史]의 영웅[英雄]이며, 천하[天下]의 절의[節義]를 지닌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를, 테러범이라고 공개적으로 국제[國際]사회에서 강변하는 천하[天下]에 용서[容恕]받지 못할 만행[蠻行]을 저지르고 있겠는가 ?
이러한 것들이 바로,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를 무너트린 자들의 음모[陰謀]와 책략[策略]의, 한 일면[一面]인 것이다.
조선사[朝鮮史] 강역[疆域]안에 있는 서[西]쪽의 요충[要衝]지역이며, 관서[關西]의 지역이기도 한 조선[朝鮮]의 황해도[黃海道]는, 평안도[平安道]와 더불어 조선[朝鮮]의 서[西]쪽 지역, 수[數] 천리[千里]를 관할하는 광대[廣大]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황해도[黃海道]의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는, 지금의 장액[张掖]과 가욕관[嘉峪關] 을 아우르는 방대한 지역을 다스렸으며, 조선[朝鮮]의 군사적[軍事的] 요충지[要衝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황해도[黃海道]의 평산[平山]에 대하여 역사서[歷史書]는,........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는, 고구려[高句麗]의 대곡군[大谷郡]이었으며, 다지홀[多知忽]이라고도 하였다. 살펴보건대, 한[漢] 나라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두 외부[外部]를 두었는데, 조선[朝鮮]의 옛 지역인 평나[平那] 및 현도군[玄菟郡]으로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를 삼았다. 지금 부[府]의 동쪽 우봉현[牛峯縣]의 성거산[聖居山]이 바로 옛날의 평나산[平那山]이니, 고을 이름이 그래서 얻어진 것이다.
군명[郡名]은, 대곡[大谷], 다지홀[多知忽], 영풍[永豊], 평주[平州], 연덕[延德], 동양[東陽]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에 있는 평산[平山]의 총수[蔥秀]는, 역사적[歷史的]으로 유명한 자연[自然]의 형승지[形勝地]다. 연행록[練行錄]에서도 거론되는 평산[平山]의 총수[蔥秀]는, 대륙[大陸]을 통 털어 이곳이 유일하다. 현재 대륙[大陸]에는, 오색[五色]으로 빛나는 자연[自然]의 경관[景觀]을 가진 곳이, 여러 군데 산재하고 있다. 그러나 평산[平山]의 총수[蔥秀]로 불릴만한 자연[自然]의 경관[警官]을 가진 곳은 평산[平山]밖에 없다. 평산[平山]의 총수[蔥秀]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보기로 한다.
총수산[蔥秀山]은, 부[府]의 북[北]쪽 30리에 있다.
동월[董越]의 기문[記文]에,......... 보산관[寶山館]에서 서[西]쪽으로 10리쯤 가면 산이 있는데 높은 절벽이 흐르는 물을 내려다본다. 구부려진 소나무와 괴이한 돌이 빈 바윗골 사이에 층층[層層]으로 보이고, 첩첩[疊疊]으로 나와서 돌이빨[石齒]이 잇몸[齦齶]처럼 되었는데, 비에 젖은 이끼로 점이 되고 담쟁이덩굴로 얽혔는데, 위태로워 떨어질 듯한 것이 반이나 되고, 그 사이에 비스듬히 걸려 있어 손과 주인이 나누어 앉은 것 같기도 하다.
흐르는 물이 북[北]쪽으로 와서 돌틈으로 흘러나오며 부딪쳐 쏘고, 거품을 뿌리는 것이 구슬이 뛰고 흰 해오리가 날개 치는 것 같으며, 굽이돌고 꺾여서 동[東]으로 가서 멈추는 곳을 알지 못한다. [중략]
동월[董越]의 시[詩]에,..... 길이 맑은 물굽이로 나가자 돌병풍 보이는데 동풍이 비를 뿌려 푸른 이끼 적시누나. 갈다 남은 오색[五色] 돌은, 여와씨[女媧氏]가 어여쁜데 옮겨다 삼한[三韓]에 가까이 놓으니, 거령[巨靈]이 감사하네. 때를 씻노라고 무어라 남간수[南澗水]를 더럽히랴. 공중에 솟은 저곳에 북산명[北山銘]을 새기리. 그대께 부탁하노니, 다시 서까래 같은 붓을 빌려 나의 사신[使臣] 행차가, 이날 지난 것을 기록[記錄]하소. [중략]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수림 끝에 우정[郵亭]이 길을 눌러 있는데, 가는 사람들 물과 함께 동[東]쪽 서[西]쪽으로 가누나. 버드나무 언덕에 녹음이 우거지니 처음으로 해를 가렸고 꽃동산에 붉은 꽃 쇠잔하여 반이나 진흙에 붙었구나. [중략]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세상의 티끌 생각 모두 다 벗어 버리고, 잠시 다른 고장 찾아 보고 넓은 지경[地境] 바라보네. 높은 산의 일천[一千] 봉은, 북두성[北斗星] 이고서 높았고, 평평한 강물 한 갈래는, 땅을 가로 비껴 줄을 긋누나. [중략]
예겸[倪謙]의 시[詩]에,........ 비 나머지 흩어져 눈이 분분한데, 산 안개 공중[空中]에 연하여 아득히 분간할 수 없네. 도롱이[蓑] 하나 입고서 산골짜기를 가니, 말머리가 일만[一萬] 뭉치의 구름을 뚫어 헤치네. [중략]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한 가닥 서북[西北] 길에 돌아가며 고생을 참네. 임금이 그리워 붉은 해를 쳐다보고, 집이 생각나니 흰 구름을 바라보네. [중략]
평산[平山] 도호부[都護府]에는, 평나산[平那山]이 있다고 하였다. 평산[平山]의 평나[平那]를 말하면서, 고지도[古地圖]의 허구[虛構]를 다시 한 번 거론할 수밖에 없는데, 평나[平那]에 대한 지도[地圖]를 보면, 평나[平那]는 현재, 영하회족자치구[宁夏回族自治区]의 은천[銀川] 북[北]쪽에 위치[位置]하고 있다. 평나[平那]는,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도 거론되고 있으며, 영하회족자치구[宁夏回族自治区]에는, 평산[平山]의 총수[蔥秀]라고 불릴 만 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은천[銀川]은, 황해도[黃海道] 배천군[白川郡]의 군명[郡名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고지도[古地圖]를 포함하여 상존하는 지도[地圖]의 지명[地名]들은, 모두 이동된 것이며, 고유[固有]의 지명[地名]을 지니고 있는 곳은, 천백[千百]의 하나에도 지나지 않는다. 이에 더하여, 고유[固有]의 지명[地名]들을 사방으로 흩어놓은 것을 보게 되는데, 이리저리 섞어놓아 그야말로 모순[矛盾]과 혼돈[混沌]의 그 자체이다. 이러한 것들을 간파하고 사서[史書]와 고지도[古地圖]의 허[虛]와 실[實]을 가리지 않은 채,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평산[平山]의 총수[蔥秀]가 있는 지역을, 동월[董越]은, 삼한[三韓]의 지역과 가깝다고 말하고 있는데, 조선[朝鮮]의 한양[漢陽]인 서안[西安]과, 화산[華山]인 삼각산[三角山], 백제[百濟]의 한산[漢山]과 부아악[負兒岳]의 기록[記錄]과, 고구려[高句麗]의 남평양[南平壤], 신라[新羅]의 북한산주[北漢山州]의 기록[記錄]들과, 대륙사[大陸史]의 기록[記錄],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들과 모두 일맥상통[一脈相通]하고 있다.
근세[近世]의 선현[先賢]들이 기록[記錄]한 문집[文集]의 기록[記錄]까지 살펴보면, 지금의 서안[西安]은, 바로 삼한[三韓]의 지역이었음이 명백[明白]하게 들어나고 있다.
평산[平山]의 총수[蔥秀]가 있는 이곳에는, 옛날부터 불러온 평산[平山]이라는 산[山]이 엄연히 존재[存在]하고 있는데도, 정밀한 지도[地圖]에도 이에 대한 표기가 전혀 없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고지도[古地圖]를 포함하여, 세상에 나와 돌아다니며 역사[歷史]와 관계있는 지도[地圖]라고 하는 것들을, 맹신[盲信]하면 안 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백제[百濟]의 온조[溫祚]가 올랐다는 부아악[負兒岳]을 반도사관[半島史觀]에서 삼각산[三角山]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허무맹랑[虛無孟浪]한 거짓말이다. 부아악[負兒岳]은 설명 그대로, 산 전체가, 아이를 업고 있는 형상[形象]을 하고 있는 암석[巖石]으로 된 산으로, 천하[天下]의 절경을 자랑하고 있으며, 화산[華山]인 삼각산[三角山]은, 암석[巖石]으로 이루어진 세 송이의 꽃 봉우리와 같은 산[山]이다. 후[後]에, 이 산[山]들에 대한 생생한 사진들을 공개 할 것이다.
가욕관[嘉峪關]에서 서[西]쪽으로 나아가면, 그 유명한 돈황[敦煌]에 이른다. 돈황[敦煌]에서 서[西]쪽으로, 타클라마칸 사막[沙漠]을 지나면, 총령[葱岭]에 이른다. 돈황[敦煌]은, 황해도[黃海道]의 문화현[文化縣]과, 황해도[黃海道]의 장련현[長連縣]이 겹치는 곳이다. 이곳에는 구월산[九月山]이 있고, 삼위산[三危山]이 있으며, 이 삼위산[三危山]속에는, 지금도 단군[檀君]의 유적지[遺跡地]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황해도[黃海道]의 장련현[長連縣]은,......... 구월산[九月山] 고을의 남[南]쪽 10리에 있다. 사직단[社稷壇]이 고을의 서[西]쪽에 있으며, 성황사[城隍祠]가 고을 북[北]쪽 3리에 있다. 아사진송곶사[阿斯津松串祠]는 사전[祀典]에 큰 냇물로서 소사[小祀]에 실렸으며, 봄 가을로 향축[香祝]을 내려 보내어 제사을 드린다.
여단[厲壇]은 고을 북[北]쪽에 있다. 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사막[沙漠]화가 하루가 다르게 주위로 번지는 현재[現在]의 자연환경[自然環境]과는 차이가 있으나, 이곳의 인근[隣近] 지역에 있는, 고대[古代]에 축조된 성곽[城郭]들의 유지[遺址]들을 살펴 보면, 사막[沙漠]화가 진행되기 이전에는, 웅진[雄鎭]으로서, 번영[繁榮]과 영화[榮華]를 누리던 큰 도회지였을 것이다.
박원형(朴元亨)의 시[詩]에,........ 깊은 마을은 산 북[北]쪽 기슭이요, 옛 고을은 바다 동[東]쪽 언덕이네. [중략]
성윤문[成允文]의 시[詩]에, 월악[月岳]에 상서로운 기운 서렸고, 사진[蛇津]은 장연[瘴煙]에 가셨네 [중략]
함부림[咸傅霖]의 시[詩]에, 바다와 산[山]에 도적떼 없어지니, 울타리에 다시 인가의 연기가 오르네. [중략]
돈황[敦煌]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돈황석굴[敦煌石窟]과 월아천[月牙泉]과, 사막[沙漠]에 남아 있는 고성[古城]과 장성[長城]의 유지[遺址]들을 둘러보고, 구월산[九月山]에 있는 단군[檀君]의 유적지[遺跡地]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우리의 역사서[歷史書]에서 전하는 중요한 역사[歷史]의 유지[遺址]들이, 이 삼위산[三危山]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곳을 찾지 않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황해도[黃海道]의 문화현[文化縣]에 관하여 전하는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은, 소략[疏略]하기만 하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문헌[文獻]만으로도 이를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할 수 있는 것은, 문화현[文化縣]에 관하여 기술[記述]되어 있는 내용들이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직접 대입시켜보면, 한 폭의 그림을 보듯이 일치하고 있음을 파악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황해도[黃海道]의 문화현[文化縣]은,....... 원래 고구려[高句麗]의 궐구현[闕口縣]이다. 고려조[高麗朝]에서 유주[儒州]로 고쳤는데, 현종[顯宗] 때에는 풍주[豐州]에 속하였으며, 예종[睿宗] 때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高宗] 때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유경[柳璥]의 고향이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으며,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고 기록[記錄]하고 있는데, 고구려[高句麗]는, 불가사의 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동[東]과 서[西]를 기준으로, 또한 남[南]과 북[北]을 기준으로, 고구려[高句麗]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어디까지였을까 ?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에 있는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와, 지금 인도의 북부[北部]지방에서 나타나나는, 고구려[高句麗] 역사[歷史]의 흔적[痕迹]은, 고구려[高句麗] 역사[歷史]의 강역[疆域]과 고구려[高句麗]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광대[廣大]하고 넓고 깊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리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문화현[文化縣]의 구월산[九月山]은, 고을 서[西]쪽 10리에 있으니 바로 아사달산[阿斯達山]이다. 다른 이름은 궁홀[弓忽]이요, 또 다른 이름은 증산[甑山], 삼위[三危]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처음 평양[平壤]에 도읍[都邑]하였다가 후에, 또 백악[白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곧 이 산[山]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니, 단군[檀君]이 이내 당장경[唐藏京]으로 옮겼으며, 후[後]에 다시 이 산[山]으로 와서 숨어, 화[化]하여 신[神]이 되었다고 한다. 또 장련현[長連縣] 및 은율현[殷栗縣] 편에 보인다. [중략]
성황사[城隍祠]는 고을 동[東]쪽 1리에 있다. 신증[新增]에는, 고을 북[北]쪽 10리에 있다고 하였다. 삼성사[三聖祠]는 구월산[九月山] 성당리[聖堂里]에 있으니, 바로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의 사당[祠堂]이다. 나라에서 봄가을로 향축[香祝]을 내려 보내 제사드리며, 또 비가 심한 때와 가물 때 기도하면 문득 감응[感應]한다. 전산사[錢山祠]에는, 매년 봄, 가을 및 겨울 10월에 향축[香祝]을 내려 보내어 제사을 드린다. 여단[厲壇]은, 고을 북[北]쪽에 있다. [중략]
장장평[莊莊坪]은 고을 동[東]쪽 15리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도읍[都邑]했던 곳이라고 하며, 그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장장평[莊莊坪]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당장경[唐藏京]의 와전이다. [중략]
권사복[權思復]의 시[詩]에,....... 서하[西河]의 길가엔 붉은 나무도 많고, 구월산[九月山]은 높아 푸른 공중에 반쯤 솟았네. [중략]
이초[李椒]의 시[詩]에,......... 사람의 일이란 기한[期限]이 있어 서로 오고 가건만, 시내와 산[山]은 예전 그대로 맑고 기이 하도다. [중략]
김처례[金處禮]의 시[詩]에,......... 시냇가에 해가 지니 증천[甑泉]이 따스하고, 하늘가에 구름 걷히니 월악[月岳]이 기이하구나. [중략]
대동지지[大東地志]
환인[桓因]은, 환웅[桓雄] 환인[桓因]의 서자[庶子]로서, 속호[俗號]는 곤시씨[坤市氏]이다. 단군[檀君]의 책 머리에 자세하고, 후손[後孫]은 갈라져서 동북[東北]쪽으로 부여[扶餘]가 되고, 그 연대[年代]는 반고씨세기[盤古氏世紀]에 있는 듯하다. [중략]
돈황[敦煌]의 서남[西南]쪽으로는, 양관[陽關]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본래의 양관[陽關]은, 이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當時]에 수 없이 연경[燕京]을 오고갔으며, 양관[陽關]을 거치며 들렸던 우리 선현[先賢]들의 시편[詩篇]들과 기록[記錄]들을 읽어 보면, 다른 곳에서 옮겨온 지명[地名]임이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지금의 양관[陽關]에서 서[西]쪽으로 나아가면, 타클라마칸 사막[沙漠]의 남[南]쪽으로 해서, 곧장 서[西]쪽으로 가게 되는데, 그 곳에는 황해도[黃海道]의 설산[雪山]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연[自然]의 환경[環境]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산맥인 총령[葱岭]의 설산[雪山]이 가로막고 있는데, 조정[朝廷]의 중요한 직책[職責]을 맡고 있는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이, 백설[白雪]만이 흩날리는 설산[雪山]으로 무엇하러 가겠는가 ?
주[周]나라의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맹상군[孟嘗君]의 고사가 전해지는 함곡관[函谷關]은, 지금의 낙양[洛陽]과 서안[西安]의 중간 지점에 있다. 그러나 이 함곡관[函谷關]도, 만리[萬里] 저편의 서북[西北]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에서, 연경[燕京]을 다녀온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은 수 없이 많다. 또한, 원[元]과 명[明]과 청[淸]나라에서,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을 다녀간 사신[使臣]들도 수 없이 많다.
이분들이 연경[燕京]에서 시[詩]를 통하여 감회[感懷]를 노래하고, 당시[當時]의 상황을 적은 기록[記錄]들을 보면, 함곡관[函谷關]은, 연경[燕京]에서 서[西]쪽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연경[燕京]에서 황조[皇朝]의 명[命]을 받은 사신[使臣]들은, 연산[燕山]을 비추는 달빛을 받으며, 함곡관[函谷關]을 넘어 서[西]쪽으로, 사명[使命]을 받들어 끝없이 길을 간다는 기록[記錄]들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기록[記錄]들은, 한[漢], 당[唐]과, 소위 명[明]을 포함하여,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의 실체[實體]를 그대로 보여주는 기록[記錄]들이다. 또한,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들이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임을 다시 확인[確認]시켜 주는 것이며, 대륙사[大陸史]의 나라들에 대한 지정학적[地政學的]의 위치[位置]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와 돈황[敦煌]의 중간 지역은, 황해도[黃海道]의 안악군[安岳郡]이 자리잡고 있던 지역이다. 평산[平山]에서 서[西]쪽으로, 안악[安岳]을 거쳐 황해도[黃海道]의 문화현[文化縣]과 장련현[長連縣] 지역이었던 돈황[敦煌]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서[西]쪽으로 포창해[蒲昌海]를 지나, 고차[庫車]에 이르고, 고차[庫車]를 지나 서[西]쪽으로 나아가면 아극소시[[阿克苏市]에 이르게 된다. 지금은 위구르 자치구로 되어 있는 이곳이 바로, 황해도[黃海道]의 해주[海州] 지역이다.
이곳의 북[北]쪽에는, 천산산맥[天山山脈]의 6000미터에 이르는 주봉[主峰]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바로 남[南]쪽에 아극소시[阿克苏市]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 이곳은, 당[唐]나라가 안서[安西]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한 지역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지도[地圖]에도 그렇게 표기하고 있다. 이곳에서 서남[西南]쪽으로 나아가면, 당[唐]나라의 왕성[王城] 유지[遺址]라는 것이 있다. 지금은 성곽[城郭]이 있던 그 흔적[痕迹]만을 확인 할 수 있는데, 이곳이 과연 당[唐]나라의 왕성[王城]이 있던 곳이었을까 ?
대륙사[大陸史]를 뒤로하고,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따라 가면, 이는 어림도 없는 말이다. 당[唐]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지역이라고 하지만, 이곳은, 고려[高麗]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있던 지역[地域]이지, 당[唐]과는 관계가 없는 곳이다. 동서[東西]로 2000리에 이르는 타림분지가 있는 이곳은, 대대로 동이[東夷], 즉 고조선[古朝鮮]의 주 무대이며,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를 거쳐,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황해도[黃海道]에 이르는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깊은 곳이지, 당[唐]과는 관계가 없는 곳이다.
본인은 이곳과 관계가 깊다. 타클라마칸의 거대한 사막[沙漠]과 황량[荒凉]하기 이를데 없는 이 지역을, 수[數] 십년[十年]에 걸쳐 철저한 현지[現地] 조사를 진행 한 이유는, 이곳, 인근[隣近] 지역[地域]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 그리고 현지에서 전해지는 역사[歷史]에 관한 설화[說話] 때문 이었다. 돈황[敦煌]으로부터, 타클라마칸 사막[沙漠]의 일대와, 거대한 천산[天山] 산맥[山脈]의 골짜기 마다 펼쳐지고 있는 유적[遺跡]들은, 소위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의 왕조[王朝]들과는, 관계가 없는 유적[遺跡]들이다.
또한, 백두산[白頭山]과 요동[遼東]과의 관계와, 숙신[肅愼],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에 있어서, 우리의 역사[歷史]에 대한 수많은 의문[疑問]과 질문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조선사[朝鮮史]의 마지막 왕조[王朝]인 조선[朝鮮]이 망한지 어느덧 한[一] 세기[世紀]를 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우리의 역사[歷史]를 증명[證明]하고 고증[考證]할 수많은 역사[歷史]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 황량[荒凉]하고 광활[廣闊]한 사막[沙漠] 지대와, 천산[天山] 일대에 수 없이 산재[散在]하여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 결정적으로 타격을 가하고 있는 것은, 명[明]과 청[淸]의 연경[燕京]과, 만리장성[萬里長城]의 허상[虛像]이며, 요동[遼東]과 백두산[白頭山]의 관계이다. 우리가 피폐[疲弊]되고, 무너지고 멸실[滅失]된,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아가며, 이러한 역사[歷史]에 관계된 중요[重要]한 문제들을 파헤쳐 밝히지 못한다면,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아 바로 세우는 일은, 영원[永遠]히 이루지 못할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 지금도,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 한국[韓國]의 전반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거짓과 허상[虛像]인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벽과, 민족[民族]의 시원지[始原地]와 백두산[白頭山]의 장령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지며, 소모적인 논쟁으로 날을 보내고 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더하여 교묘[巧妙]히 스며들어, 정체[正體]를 숨기고,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까지 훼방[毁謗]을 놓고 있으니, 말이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 것이지, 그러한 사고방식[思考方式]을 고집하고 있는 이상, 무엇을 기대하고 희망[希望]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
황해도[黃海道]의 대부분은 관서[關西]의 지역에 위치[位置]하고 있었으며, 근세[近世]의 조선[朝鮮]까지 그 강역[疆域]은 변함이 없었다. 동계집[桐溪集]의 척화소[斥和疏]를 보면,..... 平安數城 雖已陷沒 黃海一路 尙得完全, 평안도[平安道]의 성[城]들은 이미 함락되었지만, 황해[黃海]의 일로[一路]는 아직 안전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황해도[黃海道]의 지역적 위치[位置]를 가늠케 하는 기록[記錄]이 아닐 수 없다. 당시[當時]에 청[淸]나라의 군사는 조선[朝鮮]을 침략[侵略]하며, 평양[平壤]을 점령하고, 황주[黃州]를 거쳐 평산[平山]을 지나 송악령[松嶽嶺]을 넘어 개경[開京]으로 들어오고 있다.
조선[朝鮮] 왕조실록[王朝實錄]의 기록[記錄]과, 당시[當時]의 상황을 보고 겪으며, 강도[江都]까지 피난을 갔던 대신[大臣]들의 문집[文集]에 기록[記錄]된 내용을 보면, 청군[淸軍]이 침략[侵略]해 들어오는 과정이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만약 반도[半島]에 조선[朝鮮]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찌 황해도[黃海道]의 일로가 안전 할 수 있겠는가 ? 조선사[朝鮮史]에 나타나는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도[平安道]의 지역적 위치[位置]는, 평안도[平安道]는 북[北]쪽에 있고, 황해도[黃海道]는 남[南]쪽에 위치[位置]하고 있다.
척화소[斥和疏]에서는, 이어서,........ 使江原,咸鏡之兵 繞出賊後 黃海之卒 橫衝其腹, 강원도[江原道]와 함경도[咸鏡道] 군대로 하여금 적의 후미[後尾]를 에워싸게 하고, 황해도[黃海道]의 군졸은 저들의 복부[腹部]를 공격하게 하고, 라며 말하고 있는데, 황해도[黃海道]가 어디에 위치[位置]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작전 계획을 인조[仁祖]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 황해도[黃海道]의 황주[黃州]는 평양부[平壤府]와 접해 있다고 사서[史書]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해주[海州]는 황주[黃州]에서, 서[西]쪽으로 위치[位置]하고 있었으며, 관서[關西]의 큰 고을이라고 말하고 있다. 황해도[黃海道]는, 평양부[平壤府]와 경계[境界]하고 있는 황주[黃州]를 제외하고, 서[西]쪽으로 광대[廣大]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이 들어나고 있다.
또 이어서,......... 畿甸以下四道之軍 把截臨津 則彼虜前無所進 退無所歸 左右受兵 勢分力弱 隻輪不返之功 庶幾可圖, 기전[畿甸] 이하의 사도[四道]의 군사들로 임진강[臨津江]을 막게 한다면, 저 오랑캐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데다 좌우[左右]에서 공격을 받으면, 세력이 나뉘고 힘이 약해져 수레 한 대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주청[奏請]을 하고 있다. 동계집[桐溪集]의 척화소[斥和疏]에 나타나는 이러한 기록[記錄]들은, 대륙[大陸] 조선[朝鮮]의 위치[位置]와 강원도[江原道], 함경도[咸鏡道], 평안도[平安道], 황해도[黃海道]의 위치[位置]를 한눈에 파악 할 수 있는 소중한 기록[記錄]이다.
오늘날, 서역[西域]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많은 내용들은, 지나간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에 대하여, 거짓과 위선[僞善]의 극치[極致]를 보여주고 있다. 돈황[敦煌]의 서[西]쪽 지역을 서역[西域]이라고 하며, 이에 덧붙여서, 실크르도니 뭐니 하면서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는데, 한마디로 이는 황당한 내용이며, 이를 보고 배우는 사람들을 기만[欺瞞]하고 우롱[愚弄]하는 망발이 아닐 수 없다.
대륙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서역[西域]은, 천산[天山]의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그 서[西]쪽에 있는 지역을 서역[西域]이라고 하며, 서토[西土]라고 하는 것이다. 한때는 고구려[高句麗]가, 서토[西土]의 전 지역을 휩쓸고 다스렸다는 것도, 알아야 할 우리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이다.
황해도[黃海道]는, 조선사[朝鮮史]에 있어서 유서[由緖]가 깊은 곳이다. 구월산[九月山]과 단군[檀君]에 대한 고사[古史]와, 고조선[古朝鮮],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 고려[高麗],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깊고 깊은 곳이다. 해주[海州]에는 수양산[首陽山]이 있고, 백이숙제[伯夷叔弟]의 유허[遺墟]가 있으며, 역대[歷代]에 기라성[綺羅星] 같은 위대[偉大]한 인물들을 수 없이 배출한 곳이다.
혜초[慧超] 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에서 발견된 것은, 우리의 역사[歷史]와 관계가 있는 것이지, 그 곳이 어찌 당[唐]나라와 관계가 있을 것인가 ? 식민사학[植民史學]인 반도사관[半島史觀]에서는,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역사[歷史]가, 모두 반도[半島]안에 박혀 있다.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의 기록[記錄]과는 관계없이, 우리의 역사[歷史]는, 반도[半島]안에서 주권[主權]도 없이, 대대로 사대[事大]만 하며 살아온 나라가 아닌가 ?
고구려[高句麗]의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안시성[安市城]의 양만춘[楊萬春] 장군이 이룩한 불후[不朽]의 대첩[大捷]이 있은 후[後]로, 이 땅에 우리의 역사[歷史]는 존재하고 있었는가 ? 당[唐]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군사 수 십만을 배에 태우고 서해[西海]를 건너 반도[半島]로 들어와 백제[百濟]를 멸망 시켰다. 당시[當時]에 반도[半島]에 살고 있던 인구는 얼마나 되었을까 ?
그리고 소정방[蘇定方]이, 반도[半島]의 남[南]쪽에 있는 하동[河東]에 가서보니, 지형[地形]과 지세[地勢]와 그 곳을 흐르는 고인물이, 중국[中國]의 동정호[洞庭湖]와 비슷하다 해서, 하동[河東]의 조그만 산골짜기를 동정호[洞庭湖]라고 명명[命名]하니, 그 이름도 거룩하게, 지금도 하동[河東]에 동정호[洞庭湖]가 있게 되었다고 하였는가 ?
삼국[三國]을 통일 했다는 신라[新羅]와 통일환영[統一寰瀛]을 이룩한 고려[高麗]의 영토가, 반도[半島]의 평양[平壤]까지였으며, 고려[高麗]의 윤관[尹瓘]장군이 개척한 동북면[東北面]의 9성[九城]이 반도[半島]의 함경북도[咸鏡北道] 사이를 맴돌고, 김종서[金宗瑞] 장군이 개척한 육진[六鎭]은, 반도[半島]의 함경남북도[咸鏡南北道]의 지경[地境]이었다. 고 하였던가 ?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신화[神話]라 믿을 수 없고,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초기도 미개[未開]하였던 원시시대[原始時代]였기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에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해괴[駭怪]한 짓을 하며 이를, 선구자적[先驅者的]인 입장에서 만들어 놓았는가 ?
고려[高麗]가 쌓았다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은, 반도[半島]의 평양[平壤]에서 동[東]으로 원산[元山]을 가로지르고 있다. 한반도[韓半島]의 백두산[白頭山]과 두만강[豆滿江] 인근[隣近]에, 어떤 흉악[凶惡]한 이민족[異民族]이 살고 있어서, 반도[半島]의 허리에, 서[西]에서 동[東]쪽을 가로지르는 천리[千里]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단 말인가 ? 허나 이곳에는 장성[長成]의 흔적[痕迹]조차 없다.
그러면서 백두산[白頭山] 기슭의 조그만 산골짜기에 있는 집안[輯案]이, 고구려[高句麗] 700년[七百年]의 도읍지[都邑地]였다고 못 박기를 하고 있으니, 중국[中國]이나 일본의 어용[御用] 학자[學者]라는 자들은, 이러한 것을 지켜보며, 박수를 치고 비웃을 것이며, 속으로 쾌재[快哉]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학자[學者]라는 자들은, 대조영[大祚榮]의 발해[渤海]를 백두산[白頭山]의 인근[隣近]에다 심어놓고, 백두산[白頭山]의 폭발이 발해[渤海]와 연관성이 있다고, 왜놈 학자[學者]라는 자들과 같이 동조하고, 한발 더 앞장서서 나가고 있으니, 그들이 외치는 반만년[半萬年]의 유구[悠久]한 역사[歷史]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은, 백두산[白頭山]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 주위에는 발해[渤海]가 있지도 않았다.
발해[渤海]는, 서[西]쪽의 만리[萬里] 저편에 있는, 지금의 알타이산맥을 중심[中心]으로, 사방[四方] 5000리[五千里]가 넘는, 중앙아시아[中央亚细亚]의 지역을 통치하고 다스린 대제국[大帝國] 이었다.
이러한 것이 한국[韓國]의 역사[歷史]라고, 자랑스럽게 오늘도 공교육[公敎育]의 현장에서 학생[學生]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한국[韓國]의 역사[歷史]는, 어디에 근거[根據]을 두고 있는 것인가 ? 그나마 전하고 있는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와, 선현[先賢]들의 문집[文集]도, 원본[原本]이 훼손[毁損]되지 않고 전[傳]하고 있는 것은, 극소수 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西] 속에서도, 일[一] 만리[萬里]의 대륙[大陸]을 석권하는, 수[數]천[千]건의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이는 모두 사실[史實]로 들어나고 있다.
실증사학[實證史學]을 소리 높여 외치는 반도사관[半島史觀]의 논자[論者]들은, 우리의 역사[歷史]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무엇을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 하여왔는가 ? 그리고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역사[歷史]인 우리의 역사[歷史]를 위하여, 오늘날까지 한 일은 무엇이며,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
우리의 역사[歷史]는,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의사[忠臣義士]들과, 백성[百姓]들이 분연히 일어서서 적군[敵軍]을 분쇄[粉碎]하고, 초연히 전장[戰場]의 이슬로 사라지며 지켜온, 우리 선대[先代]들의 혼[魂]과 정신[精神]과 얼이 깃들어져 있는, 숭고[崇高]하고 존엄[尊嚴]한 것이다.
국난[國亂]이 있을 때마다, 초의[草衣]의 몸으로 홀연히 일어서서, 천하[天下]에 서릿발 같은 기상[氣像]을 드날리며, 검기[劍旗]의 푸른빛이 산천[山川]을 어리며 휘감아 도는 번득이는 창검[槍劍]의 칼날 속으로 뛰어들어, 적군[敵軍]을 쓸어버리고 목숨을 바친, 선현[先賢]들의 고귀[高貴]하고 끝없이 높은 백결[白結]의 절의[節義]의 앞에, 망국적[亡國的]인 식민사관[植民史觀]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의 논자[論者]들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
아극소시[阿克苏市]에서, 서남[西南]쪽에 우전국[于闐國]이 있다. 우전채화[于闐採花]의 시[詩]로 유명한 우전국[于闐國]이 왜 이곳에 있을까 ? 이곳이 흉노[匈奴]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 이곳이 우전국[于闐國]이라고 하는 것인가 ? 흉노[匈奴]는, 이곳에서 하늘의 지주[支柱]인 천산[天山]을 넘어, 저 멀리 서북[西北]지역에 있던 무리들이다. 이미 사라진 중국[中國]이라는 허울 좋은 나라들의 지명[地名]을 조선[朝鮮]의 대륙[大陸]에다 이식[移植]하다 보니, 대륙사[大陸史]의 기록[記錄]과도 어긋나는 괴이[怪異]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해주목[海州牧]
건치연혁[建置沿革], 원래 고구려[高句麗]의 내미홀군[內未忽郡]인데, 지성[池城]이라고도 하고, 장지[長池]라고도 하였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폭지[瀑池]라 고쳐 불렀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고을이 남[南]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였다 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초년에 목[牧]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해주[海州]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 하며, 양주[楊州]와 함께 경기[京畿]의 좌우[左右] 보[輔]로 삼았다. 현종[顯宗] 때에는 절도사[節度使]를 폐지하고 네[四] 도호부[都護府]의 하나로 정하여 안서[安西] 도호부[都護府]라 불렀으며, 예종[睿宗] 때에는 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 [중략]
군명[郡名],..... 내미홀[內未忽], 지성[池城], 장지[長池], 폭지[瀑池], 대녕[大寧], 서해[西海]안서[安西], 수양[首陽], 고죽[孤竹]
수양산[首陽山],......... 고을 동[東]쪽 5리에 있는데 산마루에 대[臺]가 있다.
성임[成任]의 시[詩]에,......... 청산은 창해[滄海]가에 첩첩[疊疊]하고, 창해[滄海]는 청산 앞에 아득하네. 산 이름 수양[首陽]이 기이하고 빼어난데, 지도[地圖]에는 주[周] 나라 땅에 들지 않았네. 옛 대[臺]가 완연하여 아직도 변함없는데, 고을 사람들 역력하게 서로 전하네.
중을 찾아서 야사[野寺]에 갈 것도 없고, 신선[神仙]을 찾아 바다 배를 띄울 것도 없네. 고사리 캐던 옛 자취 그 아니 우러러 볼 것인가, 높이 백세천세[百世千世]에 뛰어났네. 주려도 주[周] 나라 곡식 먹지 않고, 가서 숨는데 형과 아우 같이 하였네. 이것을 달게 여기고 다시 세상에 나가지 않고 그 자취를 산중에 의탁했네.
산[山]이 있으니 이 내 뼈는 묻을 수 있는 것, 주[周] 나라 곡식이 있은들 내 어찌 목구멍에 넣을 것인가. 기어이 한 번 죽음으로 후세 사람들 깨우치니, 높은 바람 천년[千年] 후에도 늠연[凜然]하게 분다네. 아, 외나무로 큰 집을 버티어서, 길이 은[殷]나라를 오래 가게 하지 못한 것이 한이로세.
연평도[延平島],......... 고을 서남[西南]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목장이 있다.산연평도[山延平島],.......... 연평도[延平島] 남[南]쪽 5리에 있다.
사가집[四佳集]
해주객관동헌중수기[海州客館東軒重新記]
海爲關西之鉅州 州 高句麗之內米忽 新羅景德王 置瀑池郡 高麗大祖以郡南臨大海 始名海州 [중략]
해주[海州]는 관서[關西]의 큰 고을이다. 해주[海州]는 고구려[高句麗]의 내미홀[內米忽]이었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폭지군[瀑池郡]을 설치하였고,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군[郡]의 남[南]쪽이 큰 바다와 닿아 있다고 하여, 비로소 해주[海州]라는 이름을 썼다. [중략]
成宗置十二牧 海居其一 尋改節度使 稱右神策軍 顯宗改爲安西大都護府 睿宗又陞爲大都護府 高宗復置海州牧 恭愍王二十二年 倭寇入侵 勦殺守宰 邑吏不救 於是降州爲郡 尋復爲牧 [중략]
성종[成宗] 때 12목[牧]을 설치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해주[海州]이다. 얼마 뒤 절도사[節度使]로 고쳐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 하다가, 현종[顯宗] 때 안서 도호부[安西都護府]로 고쳤다. 예종[睿宗] 때 다시 승격하여 대도호부[大都護府]가 되었고, 고종[高宗] 때에 다시 해주목[海州牧]을 설치하였다. 공민왕[恭愍王] 22년에 왜구[倭寇]가 침략하여 수령[守令]을 죽였는데, 고을의 아전[衙前]들이 구하지 않았다. 이에 주[州]를 강등하여 군[郡]을 만들었다. 얼마 뒤에 다시 목[牧]으로 삼았다. [중략]
其舊號曰大寧 或曰孤竹 州有大首岬,小首岬,延平,龍媒四島 其地廣 其民夥 土田之饒 物產之富 爲諸州最 官於是者 務煩事劇 非有剸治盤錯之才 未易莅也 朝廷遣官 每難其人 [중략]
해주[海州]의 옛 이름은 대령[大寧]이라고도 하였고, 고죽[孤竹]이라고도 하였다. 해주[海州]에는 대수갑[大首岬], 소수갑[小首岬], 연평[延平], 용매[龍媒] 등 4개의 섬이 있다. 그곳은 땅이 넓고 백성[百姓]이 많으며, 농토가 비옥하고 물산[物産]이 풍부하기가 여러 고을 중에 으뜸이다.이 고을의 수령[守令] 자리는, 직무가 번다하고 일이 힘들어서, 복잡하게 엉킨 일들을 잘 다스리는 재주가 없으면 쉽게 맡을 수 없기 때문에, 조정[朝廷]에서 관원[官員]을 보낼 때마다 합당한 인재[人才]를 찾기가 어려웠다. [중략]
丙申春 居正出使鴨綠 再遇李侯於鳳山郡 屬以作記 且言曰 州之鎭曰龍首山 嵳峨崷崒 北連牛耳,佛足兩山 氣雄勢壯 磅礴數十里 軒之東三里許 有首陽山 上有夷齊臺 松檜攙天 森如玉槊 又有薇蕨 肥軟異常 [중략]
병신년[丙申년] 봄에 거정[居正]이 압록강[鴨綠江] 가에 사신[使臣]으로 나갈 때에 봉산군[鳳山郡]에서 이후[李侯]를 다시 만나니,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면서 말하였다.
해주[海州]의 진산[鎭山]은 용수산[龍首山]인데, 험준하게 우뚝 솟아 북[北]쪽으로 우이산[牛耳山]과 불족산[佛足山]에 연결되어, 웅장한 기세가 수십 리에 서려 있습니다. 동헌[東軒]의 동[東]쪽 3리쯤에 수양산[首陽山]이 있는데, 그 위에 이제대[夷齊臺]가 있고 소나무와 회나무가 하늘을 찌르며 빽빽한 산림이 옥[玉]으로 만든 창을 세워 놓은 것과 같습니다. 또 고사리가 있는데 살지고 부드러워 보통 것과 다릅니다. [중략]
聖賢之於春秋 凡所興作必書 何也 重民事也 勞民動衆 時屈擧嬴則貶之 不傷財 不違時則褒之 今侯此擧 在春秋之例 當特書而褒美之 予可無言乎哉 是以記 [중략]
아! 성현[聖賢]께서 춘추[春秋]를 지을 적에, 토목공사는 반드시 기록[記錄]한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백성[百姓]의 일을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백성[百姓]을 고생시키고 민중을 동원하여, 어려운 시절에 호사스러운 일을 하면 폄하[貶下]하였고, 재물[財物]을 손상하지 않고 합당한 시기를 어기지 않으면 칭찬하였습니다. 지금 이후[李侯]가 한 이 일은 춘추[春秋]의 사례로 보자면 마땅히 대서특필하여 칭찬해야 할 일이니, 내가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기문[記文]을 짓습니다. [중략]
사가집[四佳集]
시류[詩類] 황화집[皇華集]
정사[正使] 조선잡영[朝鮮雜詠]
동명왕[東明王]은 천제[天帝]의 후손[後孫]으로 東明天帝孫
능히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었고 富國能强兵
왕씨[王氏]는 서경[西京]에 도읍[都邑]을 정하여 王氏開西京
성첩[城堞]이 중천[中天]에 가로질러 있고 雉堞天中橫
우리 조선[朝鮮]은 동쪽 번방이 되어 我朝作東藩
금성탕지[金城湯池]가 웅장[雄壯]하기도 하여라 金湯壯地形
저 수양산[首陽山]을 바라보건대 瞻彼首陽山
그 뿌리가 몇 천리[千里]나 서리었는고 盤根幾千里
아스라한 서해[西海]의 물은 茫茫西海水
하 넓어 시력이 다 못 미치는데 極目無涯涘
사가집[四佳集]
해주[海州] 방판관[房判官] 옥정[玉精]
관서[關西]의 원이 되어 가는 그대를 보내면서 送君作宰向關西
위하여 이정[離亭]에 나가 이별을 애석해하네 爲向離亭惜解携
고죽국[孤竹國]의 풍성은 예전대로 남아 있거니와 孤竹風聲依舊在
수양산[首陽山] 고사리는 사람을 혼미하게 하겠지 首陽蕨子使人迷
일천[一千] 마을 버들에서는 꾀꼬리가 노래하고 千村垂柳留鶯語
사월[四月]의 날리는 꽃잎은 말굽에 달라붙으리 四月飛花襯馬蹄 [중략]
사가집[四佳集]
황해도[黃海道] 권도사[權都事] 경희[景禧]
서관[西關] 지방의 쇠퇴가 극심하니 西關凋弊極
백성[百姓] 편케 하는 게 제일이고말고 第一要安民
양관[陽關]에서 이별주 한 잔을 권하고 陽關一杯酒
이제 다시 서[西]쪽으로 보내는구려 今復送西歸
북방[北方]의 눈은 매화가 막 떨어진 듯 北雪梅初落
동풍 아랜 말이 나는 듯 달릴 걸세 東風馬似飛
수양산[首陽山]은 한없이 깊숙할 게고 首陽山窈窕
절령[岊嶺] 길은 희미하기만 하겠지 岊嶺路依俙 [중략]
삼탄집[三灘集]
봉사지해주술회병기즉사증교관[奉使至海州述懷幷記卽事贈敎官〕
지난해에 문성[文城]에서 처음 얼굴 알았는데 去歲文城初識面
지금에 와 고죽[孤竹]에서 다시금 또 만났구려 如今孤竹又重逢
술잔에 술 넘실대어 푸른 빛깔 흔들리고 深杯灩灩波搖綠
짤막한 초 빛 발하여 붉은 화염 토하누나 短燭輝輝焰吐紅 [중략]
삼탄집[三灘集]
봉지루[鳳池樓], 해주[海州]의 객사 동[東]쪽에 있는 누각이다
한 띠 같은 외로운 성[城] 바닷가에 가까운데 一帶孤城近海陬
봄바람 속 먼 나그네 홀로 누[樓]에 올랐다네 春風遠客獨登樓
산은 서[西]쪽 북[北]쪽 연해 천[千]겹으로 빛 푸르고 山連西北千重翠
땅은 동[東]쪽 남[南]쪽 터져 만고[萬古]의 물 흐르네 地柝東南萬古流
넓고 넓게 포용하니 하늘 큰 것 알겠으며 納納始知天宇大
아득 멀어 세상에 떠 있는 줄을 깨닫게 하네 茫茫唯覺世間浮 [중략]
정인지[鄭麟趾]의 기문[記文]에,.......... 우리나라는 문교[文敎]가 크게 밝아져서 중화[中華]에 견준다. 수령[守令]이 먼저 선성[先聖]을 알현한 뒤에서야 관청에 나가서 일을 보며, 감사[監司]가 수령[守令]들의 성적을 보는 데에도, 교학을 잘하는 것을 제일[最]을 삼았으니, 나라에서 문[文]을 숭상[崇尙]하여 다스림을 도모하는 뜻이 지극한 것이다. [중략]
해주[海州] 고을은 지역이 넓고 사람이 많으며, 등급이 목[牧]이 되는데도 학교가 폐지되어 수리하지 못하여, 선생과 제자가 다른 곳으로 가서 거처하니 아, 관원[官員]으로서 법[法]을 받들어 조정[朝廷]의 뜻에 맞게 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중략]
수양산성[首陽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만 8백 56척이요, 높이 18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에 안함[安咸], 원로[元老], 동중[童仲] 세 사람이 있어, 터를 보아 쌓았다. 한다. 산중에는 또 고죽군[孤竹君]의 옛 터가 있다.
이색[李穡]의 시[詩]에,........ 섬들은 많이도 봉화[烽火]에 비치고, 밭두둑은 태반이 다북쑥에 묻혔네. [중략]
윤자운[尹子雲]의 시[詩]에,........ 높은 산은 층층[層層]한 구름가에 은은한데, 넓은 바다는 출렁거려 앞을 둘렀네. [중략]
김자지[金自知]의 시[詩]에,......... 고을은 수풀 언덕을 의지하여 궁벽[窮僻]하고, 땅은 바다 어귀에 곁하여 깊었네.
고득종[高得宗]의 시[詩]에,........ 만고[萬古]에 백이[伯夷] 숙제[叔齊] 살던 곳인데, 그 유풍[遺風]에 감회도 깊구나. [중략]
아극소시[阿克苏市]의 바로 서북[西北]쪽에,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의 관아[官牙]가 있었다. 지금은 아극소시[阿克苏市]가 번영[繁榮]하여 대도시가 되어 있지만, 해주[海州]의 관아[官牙]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서북[西北]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현재[現在]는 그 흔적[痕迹]만이 남아서, 해주대도호부[海州大都護府]의 자취만이 지나간 역사[歷史]의 숨결을 들려주고 있다.
해주[海州]의 관소[館所]가 있던 이곳에는, 해주[海州]의 풍경과 산천[山川]과, 수양산[首陽山]을 바라보고, 잔잔하고 푸른 물결의 연못을 내려다보며, 조선[朝鮮]의 대신[大臣]들이, 시[詩]를 지어 해주[海州]의 풍경[風景]과 감흥[感興]을 노래하던 두 개의 연못만이 남아 있다. 이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그 옛날 해주[海州]의 성쇠[盛衰]와 역사[歷史]의 무상[無常]함은, 이곳을 찾는 이의 마음을 뒤흔들어, 수양산[首陽山]과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한 천산[天山]을 오르내리게 하고 있다.
이곳에서 동북[東北]으로 가까운 곳에는, 신목[神木]들이 우거진 신목원[神木園]이 자라잡고 있다. 이 신목[神木]이 우거진 곳은, 이 지역 사람들이 신성[神聖]시 하는 곳이다. 이 신목원[神木園]에 있는 나무들은, 수령[樹齡]이 수[數] 백년[百年]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천년[千年]의 신수[神樹]라고 하는데, 실제로 수령[樹齡]이 천년[千年]이 된 나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륙백년[五六百年]은 훌쩍 넘은 나무들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신목[神木]들이 있는 곳이 바로, 백이숙제[伯夷叔弟]의 유허[遺墟]가 있는 곳이다. 역사서[歷史書]에서 수양산[首陽山]이라고 부르는 산은, 이곳에서부터 동북[東北]으로 천산[天山]의 기슭에 있는,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산[山]의 고봉[高峯] 준령[峻嶺]을 말하는 것이다. 백이숙제[伯夷叔弟]의 유허[遺墟]가 있는 이곳에는, 역사[歷史]의 상거[相距]가 오래된, 고대[古代]의 토굴[土窟]로 된 집들이, 수[數] 천년[千年]의 풍파를 이겨내고, 그 모습을 보전[保全]하고 있다. 단군[檀君]의 시대에는, 토굴[土窟]로 집을 짓고 살았다는 고사[古史]가 실감나는 곳이다.
이 곳의 지형[地形]과 지세[地勢]는, 서북[西北]쪽으로 산이 막히고, 동남[東南]쪽으로는 끝없이 넓은 들이 펼쳐지고 있다. 서북[西北]쪽에 있는 산들 중에는, 6000미터에 이르는, 천산[天山]의 최고봉[最高峰]들이 자라잡고 있다. 시[詩]에,...... 산은 서[西]쪽, 북[北]쪽을 연하여 천[千]겹으로 빛 푸르고 山連西北千重翠, 라는, 이 구절은 이곳의 산세[山勢]를 적절히 표현하고 있는 시편[詩篇]이 아닐 수 없다.
조선[朝鮮]의 근세[近世] 역사[歷史]까지, 조정[朝廷]의 관리[官吏]들과 대신[大臣]들이, 시[詩]와 문집[文集]의 기록[記錄]을 통하여, 황해도[黃海道]의 해주[海州]에, 수양산[首陽山]과 고죽국[孤竹國]이 있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는 것은, 백이숙제[伯夷叔弟]의 유지[遺址]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수양산[首陽山]에 대하여 여러 이설이 있으나, 백이숙제[伯夷叔弟]가 고사리를 캔 수양산[首陽山]은, 바로 이 해주[海州]의 수양산[首陽山]이다.
성임[成任]의 시[詩]에, 청산은 창해[滄海]가에 첩첩[疊疊]하고, 창해[滄海]는 청산 앞에 아득하구나. 산 이름 수양[首陽]이 기이하고 빼어난데, 지도[地圖]에는 주[周] 나라 땅에 들지 않았도다. 라고 노래한 이 시[詩]가 말해 주듯이. 백이숙제[伯夷叔弟]는, 고국[故國]을 떠나 황해도[黃海道]의 해주[海州]에 와서 일생[一生]을 마친 것이다. 또한, 백이숙제[伯夷叔弟]의 기사[其辭]에,......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저 서산[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캐도다. 의 서산[西山]은, 서[西]쪽에 위치[位置]하고 있는,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의 수양산[首陽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극소시[阿克苏市]의 서[西]쪽 지역에 있었던 황해도[黃海道]의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는 한때, 해주[海州]에 예속된 지역[地域]이다. 후[後]에 연안도호부[延安都護府]가 되었지만, 황해도[黃海道]의 해주[海州]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重要]한 자료[資料]를 제시하여 주고 있다. 양존집[陽村集]에서 양촌[陽村] 선생은,........ 遠而望之則東南無際 巨浸稽天 紆餘瀰漫 一目千里, 멀리서 바라보면, 동남[東南]쪽이 끝이 없고, 큰 바다가 하늘에 닿아 호호[浩浩] 망망[茫茫]하여 한눈에 천리[千里]나 보이며, 라는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이것은 황해도[黃海道]의 해주[海州]가 위치[位置]하고 있는 지역이, 반도[半島]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증명[證明]하고 있으며, 반도[半島]의 조선[朝鮮]을 주장[主張]하는 자들에게 경종[警鐘]을 울리는 기록[記錄]이다. 반도[半島]에 있는 황해도[黃海道]의 해주[海州] 지역에서, 동남[東南]쪽을 바라보면 끝이 없어, 한 눈에 천리[千里]를 바라보는 지역이 어디에 있을 것이며, 천리[千里]를 바라본다고 한다면, 지금의 분단된 조국[祖國]의 전체를 포함하고도 남는 면적[面積]에 이르게 된다.
양촌집[陽村集]
연안부 향교기[延安府鄕校記]
鄭敎授來京師語予曰 延安府學 鄭使君謀之於始 李使君成之於終 而其爲政皆有遺愛 是不可不記 [중략]
정 교수[鄭敎授]가 서울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연안부[延安府] 학궁[學宮]을 정 사군[鄭使君]이 처음 계획했고 이 사군[李使君]이 나중에 끝마쳤는데, 그들이 한 정사[政事]가 모두 은혜[恩惠]를 남긴 것이니, 이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遠而望之則東南無際 巨浸稽天 紆餘瀰漫 一目千里 乾端坤倪 渺不知其所極 胷襟恢廓 與天同廣 可以想登太山而小天下之意 [중략]
멀리서 바라보면, 동남[東南]쪽이 끝이 없고, 큰 바다가 하늘에 닿아 호호[浩浩] 망망[茫茫]하여 한눈에 천리[千里]나 보이며, 하늘과 땅이 끝이 없어 흉금[胸襟]이 확 틔어 하늘과 같이 넓어지니, 태산[泰山]에 올라가 천하[天下]를 작게 여긴 뜻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중략]
野闊連滄海, 이원[李原]의 시[詩]에,...... 들이 넓어 먼 바다에 닿았고, 하늘이 낮아 푸른 멧부리에 붙었네. [중략]
池光連大野, 권근[權近]의 시[詩]에,...... 못 물빛은 큰 들에 닿았고, 하늘빛은 낮은 멧부리에 닿았네. [중략]
龍池一葉舟, 유계문[柳季聞]의 시[詩]에,...... 봉악[鳳岳]은 천[千] 층[層]의 돌이요, 용지[龍池]에 한 조각배이네. [중략]
조선[朝鮮]의 황해도[黃海道] 수안군[遂安郡]은, 요동[遼東]과 경계[境界]를 하고 있었다. 왕조실록[王朝實錄]의 기록[記錄]에서도, 황해도[黃海道]의 총령[葱嶺]을 거론하는 기록[記錄]이 실려 있으며, 선대[先代]들의 문집[文集]에 나타나는 기록[記錄]까지 포함하면, 조선사[朝鮮史]의 황해도[黃海道]는, 천산[天山]과 총령[葱嶺]을 휘감고 도는 광대[廣大]한 지역[地域]에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현지[現地] 사람들의 역사[歷史]에 관하여 전하는 사실[史實]들과, 현지[現地]를 정밀[精密]하게 조사한 자료[資料]들을 바탕으로,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들을 따라서 하나하나 고증[考證]을 해 나가다 보면, 모두 틀림이 없는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로 들어나고 있다. 이러한 우리 선대[先代]들이 남긴 기록[記錄]들은, 현지[現地]에서 왕명[王命]으로 직무[職務]를 수행하고, 지방[地方]을 살피며, 애민구휼[愛民救恤]의 생생한 기록[記錄]들을 담고 있음에, 더욱 더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황해도[黃海道]
수안군[遂安郡]
요동산[遼東山], 고을 동북[東北]쪽 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요동산[遼東山] 봉수[烽燧] 옛터 고을 동[東]쪽 2리에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총령진[葱嶺鎭] 동[東]쪽으로 25리에 있으며 본래는 총명둔[聰明屯]이다. [중략]
이예[李芮]의 시[詩]....... 遼山天作險, 요산[遼山]은 하늘이 만든 험지이다. [중략]
이석형[李石亨]의 시[詩]에,..... 새벽에 황주[黃州]를 떠나니 여기 저기 더욱 바쁘구나. 절월[節鉞]을 새 정자[亭子]에 멈추니 벌써 석양이 되었네. [중략]
황해도[黃海道]의 장연현[長淵縣]은, 타클라마칸의 사막[沙漠]이 끝나는 서[西]쪽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조선[朝鮮]의 황해도[黃海道]가 오늘날 파미르고원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음을 기록[記錄]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남곤[南袞]선생의 유백사정기[遊白沙汀記]에 나오는 호수[湖水]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설산[雪山]이 서[西]쪽으로, 끝이 10리[十里]라고 했는데, 실제로 이곳에서는 설산[雪山]의 높은 준령[峻嶺]에 있는 고봉[高峯]들이 흰 눈을 고깔처럼 머리에 이고, 하얗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남곤[南袞]선생의 기문[記文]에서,....... 저 승선봉[勝仙峯]과 비로봉은, 정말 기이하고 빼어나기는 하지만, 산이 높아서 추워 떨리니, 정말 신선[神仙]의 뼈를 가진 자가 아니면 오래 머물 수가 없다. 고 한 말은 이곳을 찾아서 올라가 본 사람이 아니면 어찌 이를 실감[實感] 할 수 있으랴 !
장연현[長淵縣]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장연[長淵]인데,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에서 모두 옛 이름 그대로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백령진[白翎鎭]에 대[大], 소청[小靑] 두 섬이 있다. 하였는데, 지금은 백령도[白翎島]도 고을 경계 안에 들어 있다. 백령도[白翎島]와 대청도[大靑島]도는 서[西]쪽에 있으니 옛날 백령진[白翎鎭]이다. 강령현[康翎縣] 연혁 조에 자세하다.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에 원[元] 나라에서, 적당[賊黨] 탑야속[塔也速]을 여기로 귀양 보내었다. 목장이 있다. [중략]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높은 하늘 스치며 몇 번이나 성내어 날았나, 외로운 섬 돌며 날다가 잠시 돌아가기를 잊었네. 사선[四仙]이 한 번 간 후에 알아줄 이 없으니, 공연히 아름다운 옷 떨치며 석양에 서 있네.” 하였다.
이석형[李石亨]의 시[詩]에,.......... 물가 맑고 모래 희어 기이하기도 한데, 조수[潮水] 나가며 구름 거두고 물 고요한 그때이네. 태평 무사한 시절 만났으니, 장군[將軍]이 창을 비끼고 새 시[詩]를 짓누나. [중략]
대동지지[大東地志]
설산[雪山],....... 서[西]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조니포진[助泥浦鎭],....... 서[西]쪽으로 60리 장산곶의 북[北]쪽에 있다. 북[北]쪽으로 금사[金沙]와 20리, 남[南]쪽으로 오차[吾叉]와 20리, 동[東]쪽으로 용정[龍井]과 20리인데, 옛날에 별장이 있었다. 숙종[肅宗] 37년에 아랑포[阿郞浦] 만호[萬戶]를 내합[來合]하였다.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 금사사보[金沙寺堡] 승장[僧將] 1인. 추포방소[追捕防所] 무수룡포[舞睡龍浦], 남[南]쪽으로 65리, 동령포[東令浦] 서북[西北]쪽으로 55리, 쾌암포[快巖浦], 서[西]쪽으로 50리이다.
오차포[吾叉浦], 조니포[助泥浦], 백령포[白翎浦] 이상 여섯 곳에는, 추포무사[追捕武士]가 있다. 오차포[吾叉浦], 백령도[白翎島], 도사내도[島乃島]는, 모두 요망장졸[瞭望將卒]이 있다. 요망[瞭望] 24곳이다.
신곶[薪串],..... 고을 서[西]쪽 47리에 있다. 별서강[別西江],.... 고을 서[西]쪽 60리에 있다.
백사정[白沙汀],.......... 고을 서[西]쪽 58리에 있는데 길이가 7, 8리요, 넓이는 3, 4리이다. 남[南]쪽에 연못이 있고, 북[北]쪽에 승선봉[勝仙峯]이 있는데, 봉우리 위에는 잔디풀이 있다. 3면[三面]이 바다인데 흰 모래가 평평하게 깔리고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밀려 쌓여 언덕을 이룬다. 어린 솔과 해당화[海棠花]가 붉고 푸르게 서로 비치는데 유람[遊覽]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남곤[南袞] 유백사정기[遊白沙汀記]
아랑포[阿郞浦]는 서해[西海]의 깊숙한 지역이다. 산이 있어 연강[淵康]의 치소[治所] 북[北]쪽에서 서[西]쪽으로 뻗어왔는데 푸르게 뾰죽뾰죽 솟고 구불구불 달려오기 10리는 하다가 항구[港口]에 와서 멈춘다. [중략]
푸른 봉우리 절 밖에 설퇴[雪堆]가 공중[空中]에 솟고, 푸른 솔과 푸른 수림이 그 밑을 둘러싼 것은 비로봉[毗盧峯]이다. 설퇴[雪堆] 아래에 평평한 모래가 희게 깔리고 긴 물가 멀고 가까운 곳에 해당화 붉게 나부끼는 것은 백사정[白沙汀]이다. 저 승선봉[勝仙峯]과 비로봉[毗盧峯]은 정말 기이하고 빼어나기는 하지만, 산[山]이 높아서 추워 떨리니, 정말 신선[神仙]의 뼈를 가진 자가 아니면 오래 머물 수가 없다.
그 중에 아늑하고 수려하여 놀며 거닐기에 합당한 곳은 백사정[白沙汀]만이 제일 좋으므로 가장 이름이 알려졌다. [중략]
기사년[己巳年]에, 내가 겸절도사[兼節度使]의 명을 받고, 관내[官內]를 순시하여 이곳에 이르렀는데 군비[軍備]를 점검하는 여가에, 누각[樓閣]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고 마음으로 좋은 경치임을 알았으나, 공무[公務]가 총총하여 찾아 구경할 겨를이 없이 하룻밤을 자고 돌아가게 되니, 떠날 때에는 머뭇거리며 자못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 [중략]
좀 있으니 긴 바람이 서북[西北]쪽에서 불어오고, 소나무와 노송나무가 우우 소리를 내며 구름이 흩어지니 달빛이 밝아진다. [중략]
나는 이에 무릎을 치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제서야 조물주[造物主]가 재주 많은 줄을 알겠도다. 모래란 원래가 붙지 않는 물건으로서, 움켜서 쥐었다가도 손을 펴면 곧 흩어지는 것인데, 이게 홀로 곧게 높이 솟아 봉우리를 이루고, 바닷바람에 날려가도 무너지지 않으니 이것이 조물주[造物主]의 재주가 아니고 무엇인가. [중략]
내가 일찍이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열람하다가 김극기[金克己]의 백령도[白翎島] 시[詩]를 보니, 사선[四仙]이 한 번 간 후[後]에는 참으로 구경하는 이 없다. 는 구가 있으니, 신라[新羅]의 네 선랑[仙郞]의 무리가, 서해[西海] 지경에서 두루 놀았다는 것을 알았다. [중략]
아깝게도 지방이 무식하여 글이 없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을 좋아하지 않아서 저 네 선랑[仙郞]의 바람 수레 깃 일산놀이와 기린포ㆍ외ㆍ대추의 잔치로 하여금 파묻히게 하여 전함이 없게 되었도다. [중략]
천하[天下] 후세[後世]에서 자연 알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니, 이런 것을 실[實]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무리의 선비들은 어찌 또한 실[實]에 힘쓰지 않을 것이랴. 연강[淵康]에 이른 날, 숙간[叔幹]과 청로[淸老]가, 모두 나에게 권하여 기문[記文]을 쓰라 하므로 사양할 수 없어서 대강 위와 같이 적는다. [중략]
황해도[黃海道] 장연현[長淵縣]의 지역에는, 아랑포[阿郞浦]]가 있고, 대청도[大靑島]가 있으며, 백령도[白翎島]가 있었다. 지금 반도[半島]의 황해도[黃海道] 앞바다에 있는 백령도[白翎島]와 대청도[大靑島]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는 관계가 없는 곳이다. 이들 두 섬에는 각각 목장이 한 곳씩 있었다고 하는데, 역사[歷史]를 조작[造作]하는 자들이, 반도[半島] 황해도[黃海道]의 앞바다에 있는 섬에, 백령도[白翎島]와 대청도[大靑島]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그 황당한 행태[行態]에 그저 할 말을 잃게 하고 있다.
조선[朝鮮]의 황해도[黃海道] 장연현[[長淵縣]은, 서[西]쪽으로 설산[雪山]이 바라다 보이는 지역에 있었다.. 남곤[南袞] 선생의 기문[記文]에서,...... 아랑포[阿郞浦]는 서해[西海]의 깊숙한 지역이다. [생략], ......... 푸른 봉우리 절 밖에는 설퇴[雪堆]가 공중에 솟고, 푸른 솔과 푸른 수림이 그 밑을 둘러싼 것은 비로봉[毗盧峯]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설퇴[雪堆]가 무엇인가 ? 설퇴[雪堆]는, 눈더미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그냥 눈이 많이 와서 쌓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문[記文]에서 말하는 설퇴[雪堆]는, 천산[天山]이나 히말리아의 산 같은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설퇴[雪堆]는, 내리는 눈이 기후[氣候]가 차서 녹지 않고 계속 쌓이며, 이러한 지역에서는 강한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이 눈들이 여기저기 옮겨져서 한군데로 쌓이게 된다. 이것을 설퇴[雪堆]라고 하며, 눈더미라고 하는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꼭 눈을 쓸어서 몇 군데로 모아 놓은 것과 같이 보이는데, 이것이 추우면 반은 빙하[氷河]와 같이 얼기 때문에 쉽게 녹지를 않는다.
기문[記文]에서,......... 설퇴[雪堆] 아래에 평평한 모래가 희게 깔리고 긴 물가 멀고 가까운 곳에, 해당화 붉게 나부끼는 것은 백사정[白沙汀]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도 이곳에 있는 호수[湖水]는, 사호[沙湖]라고 부르고 있으며, 모래로 덮인 산은 백사산[白沙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백사산[白沙山]은 신기[神奇]한 산이 아닐 수 없다. 산 전체가 가는 모래로 덮여 있는데, 뾰족하게 솟아 여러 개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모양이 수[數] 백년[百年]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있으니, 자연[自然]의 신비[神祕]한 조화[造化]는, 인간[人間]이 미칠 바가 아님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또한, 이른바 설퇴[雪堆]라는 곳으로 올라가서 큰 바다를 내려다보니, 아래의 물과 위의 하늘이 새파래서 흔연히 한 빛이 되는데 달도 엷은 구름에 가려 약간 흐릿하였다. 고 이렇게 기록[記錄]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어찌 그냥 눈더미를 말하는 것이 되겠는가 ? 그리고,...... 모래란 원래가 붙지 않는 물건으로서, 움켜서 쥐었다가도 손을 펴면 곧 흩어지는 것인데, 이게 홀로 곧게 높이 솟아 봉우리를 이루고, 바닷바람에 날려가도 무너지지 않으니 이것이 조물주[造物主]의 재주가 아니고 무엇인가. 라며 이곳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을 설명하고 있다.
이 지역은, 지금도 남곤[南袞] 선생의 기문[記文]에서 설명하는 내용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현재[現在]에도 반은 빙하[氷河]가 되어 있는 설퇴[雪堆]가 고봉[高峯]의 기슭으로 산[山]을 이루고 있으며, 모래로 되어 있는 작은 봉우리들은 매서운 바람이 부는데도,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아래로는 검푸른 빛이 하늘에 서리는 거울같이 맑고 잔잔한 호수[湖水]가, 천고[千古]의 준령[峻嶺]을 끌어않고, 태고[太古]의 신비[神秘]를 자랑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경치가 좋은 곳에는, 이를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기 마련이다. 이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으며, 천산[天山] 지역의 삭막[索莫]함을, 이 아름답고 신비[神秘]한 풍경[風景]이, 찾아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봄눈 녹듯이 풀어주고 있다. 또한 호수[湖水]주위로 펼쳐진 백사장[白沙場]은, 호수[湖水]와, 설퇴[雪堆]와, 설산[雪山]이 한 빛이 되어, 천하[天下]의 장관[壯觀]을 연출하고 있으니, 황해도[黃海道]의 장연현[長淵縣]은, 서해[西海]의 깊숙한 곳에서 빛나는 보석[寶石]과 같은 곳이다.
황해도[黃海道]의 해주[海州]는, 관서[關西]의 큰 고을이라고 하였고, 평안도[平安道]의 평양[平壤]은, 서북[西北] 변경[邊境]의 거진[巨鎭]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記錄]들은, 당시[當時]에 이곳에 부임[赴任]하여 이 지역[地域]을 다스렸고, 수 없이 이곳들을 다녀간 대신[大臣]들이 직접 남긴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다.
황주[黃州]와 평양부[平壤府]는, 그 경계[境界]를 맞대고 있었고,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중기[中期]에 평양[平壤]은 이미, 언어[言語]가 다른 민족[民族]들이, 평양[平壤] 백성[百姓]의 반[半]을 차지하고 있어서, 저자거리에 나갈 때는 역관[譯官]을 대동하고 다녀야 한다고, 당시[當時]의 기록[記錄]들은 전하고 있다.
또한, 평양[平壤]은, 전란[戰亂]으로 떠도는 요동[遼東]의 백성[百姓]들이 수[數] 십만[十萬]에 이르는데, 이들을 평양[平壤]에서 받아들여 구휼[救恤]해야 한다고 대신[大臣]들이 상소[上疏]를 올리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고구려[高句麗]의 백성[百姓]들 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요동[遼東]은, 장백산[長白山], 즉 백두산[白頭山]의 서남[西南]지역에 있다고, 대륙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는 기록[記錄]하고 있으며, 이 지역[地域]에, 명[明]과 청[淸]의 북경[北京]인 연경[燕京]이 있었고, 이곳은 고대[古代]로부터 내려오는 유주[幽州] 지역[地域]이다. 불함산[不咸山]산의 북[北]쪽에 숙신[肅愼] 이 있었고, 숙신[肅愼]의 남[南]쪽으로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가 있었다.
서해[西海]의 황해도[黃海道]는, 천겹[千裌]의 총령[葱岭]과 천산[天山]을 끌어당기고, 층층[層層] 첩첩[疊疊]의 설산[雪山]을 부른다.
사해[沙海]의 사구[沙丘]는 타림을 누르나니, 옥등[玉燈]에 빛나는 돈황[敦煌]의 불빛, 천제[天帝]의 빛이로다.
천리[千里]에 서리는 천산[天山]의 지주[支柱], 수양[首陽]을 만세[萬歲]에 비추도다. 삼위[三危]의 구월[九月]은 동방[東方]의 삼성[三聖]을 받드나니,
흩날리는 아득한 모래 먼지 세월을 무상[無常]케 하는데, 삼한[三韓]의 찾는 이는 드물기도 하구나.
남북[南北]을 통한 서경[西京], 중천[中天]을 가로지르고, 천고[千古]의 절의[節義]는 천산[天山]을 푸르게 한다.
팔조[八條]의 유훈[遺訓]은 이미 천세[千歲]의 지난 일, 외로이 정전[井田]의 유수[柳樹]만이 평양[平壤]을 회상[回想] 하도다.
경사[京師] 일 만리의, 관서關西]와 서관[西關], 찾는 이 없다 이르지 말라. 성쇠[盛衰]의 흥망[興亡]은, 지나는 바람결 같나니.
|
첫댓글 금과옥조와 같은 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서해(西海)와 황해(黃海)도에 대하여 조선영토에 관한 자세한 연원을 알고, 조선사의 광대한 역사 영역을 안다면,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의 허구논리는 스스로 무덤속으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제 하나하나 밝혀지는 조선사의 진실앞에, 우리 스스로 선대앞에 떳떳한 모습으로 대할 수 있을 날이 가까워온다고 스스로 자위해 봅니다. 오늘 환국고려님의 글을 보면서 그동안 수많은 날들을 고생한 보람과 함께 "서토"란 바로 중앙아세아지방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외쳐온 지난날들이 회상됩니다. 그렇습니다. 서역이란 그 땅은 바로 조선의 근본지지의 하나로 중요한 역사강역이었다고 봅니다.
수천년 전부터 수백년 전의 "원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륙과 중앙아세아"지방은 바로 조선사의 중요한 영역이었으며, 고구려는 "서토"를 회복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지요. 비록 그곳을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왕조의 문을 닫았으나, 그 후국인 고려는 중앙아세아를 속국으로 강점해버린 때도 있었다고 봅니다. 또한 근대조선은 이곳을 서쪽과 서북지방의 변경지방으로 이민족들을 아울렀습니다. 정말 좋은 글을 보았습니다. 조선사의 진실앞에 "오늘 참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을 부탁드리며, 항상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최남석 선생님, 문무 선생님 감사 합니다. 봄과 같이 포근한 날씨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편안 하시고 즐거우신 설 연휴가 되시고, 항상 건강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황해도에 구월산이 있다면 구월산성도 있을까요? 바로 구월산성에서 일본군과 싸운 삽화가 있어서 윗 글에서 말한 그 구월산성인지 궁금해서요.
글 잘 보았읍니다.
단지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는 것이니 견해차이가 있다 하여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선[朝鮮]의 한양[漢陽]인 서안[西安]과, 화산[華山]인 삼각산[三角山]....
조선의 삼각산은 현재의 화산이 맞는것 같습니다. 김상헌은 청나라로 끌려가기 전에 의주에 머문적이 있습니다.(二年沙漠二年灣)아마도 이때 그 유명한 ‘가노라 삼각산아~~~~’를 지은듯합니다. 보통의 경우 한양에서 이 시(詩)를 쓴 것으로 생각되기 쉬우나 시의 내용과 김상헌의 일정을 살펴보면 의주(龍灣)에서 청나라로 떠나기 직전에 한수 남기고 떠났을것으로 짐작됩니다. 즉 의주에서 삼각산과 한수가 다 보엿던 것이죠....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쟈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제가 추정한 의주가 바로 삼각산(화산(華山))북쪽의 화음시입니다. 아래 사진은 의주 관아로추정되는 옛성에서 바라본 화산(삼각산)의 풍경입니다.
저 산(삼각산)을 보고,또 그 앞의 압록강(한수?)를 보며 떠나는 심정을 읊은 것이죠..
‘해주목[海州牧] ; 지성[池城]이라고도 하고, 장지[長池]라고도 하였다. ’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폭지군[瀑池郡]을 설치하였고...’
池城, 長池 瀑池라는 말에서 알수 있듯이 해주에는 내륙호가 분명 있었을것입니다.(그것도 길쭉한 모양으로) 해주의 ‘海’는 바로 이 내륙호(내륙해)와 불가분의 관계이며
‘철리(鐵利)의 옛 땅을 철리부(鐵利府)로 삼았는데, 광주(廣州), 분주(汾州), 포주(蒲州), 해주(海州), 의주(義州), 귀주(歸州) 등 6주를 관할하였다.<신당서 발해전>’란
글에서 보듯 포주, 해주, 의주는 하나의 부(鐵利府)에 소속된 지명입니다. 포주 해주 의주가 이른바 대륙사의 어느곳이라 생각되기 쉬우나
대륙사와 조선사가 하나의 역사란 관점에서 보면 조선의 해주 의주나, 대륙의 해주 의주나 같은곳입니다. 해주(海州)는 반도에, 해성현은 현재의 만주에 그리고 산서성 남부 본래의 해주자리엔 해주(解州)란 이름으로 각각 흩어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강순(康純)이 치계(馳啓)하기를,
“지금 10월 28일에 수주(愁州)의 올량합(兀良哈) 유상동합(柳尙冬哈)·요시로(要時老) 등이 와서 고(告)하기를, ‘물건을 판매(販賣)하는 일로 인하여 고배(古背) 지방(地方)에 이르러 니마거 올적합(尼麻車兀狄哈) 우두(亐豆)·야다우(也多右)가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같은 부족 사람 지을개(之乙介)가 알타리(斡朶里)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 2백여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포주(蒲州)로 갔다.」고 하였고....<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여기서의 포주(蒲州)도 철리부의 포주와 같은 같은곳이라 생각됩니다.
병신년[丙申년] 봄에 거정[居正]이 압록강[鴨綠江] 가에 사신[使臣]으로 나갈 때에 봉산군[鳳山郡]에서 이후[李侯]를 다시 만나니....
1,반도사관에 따르면 압록강 가기전에 봉산군에서 이후[李侯]를 만난 것이니 봉산군을 지나야 압록강이 나옵니다. 이를 대륙에 적용시키면 황해도 봉산군 넘어에 압록이 되니 봉산이 현 신강성 어디쯤이면 그넘어 현 천산이나 파미르고원 넘어에 압록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며
2,또 하나는, 제 사견입니다만 압록강 넘어에 해주며 봉산군이 나오는 경우입니다. 연행록에 압록강 건너서 봉황성이 나오는데 이 봉황성은 봉황산에 있는 성이며 이 봉황산이 봉산이고 황해도의 봉산군이 된것입니다.
구련성(九連城)에서 봉황성(鳳凰城)까지는 산수가 아름답고 이따금 들이 펼쳐 있다. 봉황성에서 낭산(狼山)에 이르기까지는 ~~~중략~~~연도(沿道)에서 가까운 산으로는 구련성의 송골산(松鶻山), 봉황성의 봉황산(鳳凰山), 광녕(廣寧)의 의무려산(醫巫閭山...<경자연행잡지>
위글에서 ‘해주[海州]의 진산[鎭山]은 용수산[龍首山]인데, 험준하게 우뚝 솟아 북[北]쪽으로 우이산[牛耳山]과 불족산[佛足山]에 연결되어....’
여기서 우이산[牛耳山]이 나오는데 바로 연행록에서의 ‘마이산(馬耳山)’입니다. 소의 귀를 닮은 산과 말의 귀를 닮은 산은 차이가 있을까요.. 하나의 산을 두 개로 분리 시켜놓은 것입니다.
통군정(統軍亭)에 올랐다. 이 정자는 북경 지방과 요동(遼東) 지방을 바로 누르고 있어 넓고 기이하고 웅장함이 다른 누각(樓閣)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마이산(馬耳山)이 가장 가까워서 마치 눈앞에 있는 것 같고...<경자연행잡지>
우리나라의 황해도에 관한 설명은 연행록에서의 압록강 넘어의 정황과 같습니다. 연행록에 구련성을 지나 온정평이 나오는데 이 온정(溫井)은 다뜻한 물이 나오는 온천으로
‘황해도에 온천이 가장 많다. 배천(白川)의 대교(大橋), 연안의 전성(氊城)과 평산(平山)ㆍ문화(文化)ㆍ안악(安岳)에 모두 있는데, 해주의 마산 온천(馬山溫泉)이 가장 좋다. 어떤 곳은 미지근하고, 어떤 곳은 매우 뜨겁다.’<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온천>
의 연려실기술의 내용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해주의 마산온천에서 마산(馬山)은 연행록의 마이산(馬耳山)일것입니다.
'조선[朝鮮]의 황해도[黃海道] 수안군[遂安郡]은, 요동[遼東]과 경계[境界]를 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요동은 해주를 조금 지나 심양부터 산해관까지 요동이고 요서입니다 산해관에서 심양에 이르는 강이 요동벌을 흐르는 요하이고 이 요하의 동쪽이 요동이고 서쪽이 요서입니다. 이 강옆으로 제방겸 도로(沿路 沿道)가 있고 연행사들은 이 도로를 따라 북경에 갔던것입니다.
海州, 本沃沮國地, 高麗沙卑城. 渤海曰南海府, 太平中改置.[續文獻通考卷二百二十九 地考]
해주는 고구려때 사비성으로 요동땅 가까이에 있어야합니다.
조선사와 이른바 중국사(한 당 송 원 명 청)는 서로 별도의 영역에서 존재한 역사 일까요.....제 판단은 같은곳의 역사란 생각입니다. 다만 '중국(中國'이란 곳은 그 크기가 일개 성(省)크기의 영역이고 그곳은 현 산서성 일대일것이란 생각입니다.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이곳이 단군조선의 첫 도읍지이고 고구려가 부여에서 갈라저 나와 현 황하 남쪽에 자리를 잡기 전가지 정치적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대부여님께서 말씀 하시는 구월산, 즉 삼위산에는 큰 성곽은 아니지만, 작은 성곽의 유지가 현재도 남아 있습니다. 이 산은 생각 보다는 매우 험준한 산이지요. 산 자체가 그야말로 금성철벽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맑은 영혼님께서 말씀하시는 조선 한양[漢陽]의 화산은, 백제의 온조가 올랐다는 부아악의 인근에 있습니다. 지금 중국에서 화산이라고 하는 것은 , 본래 화산이 아닙니다. 조선사의 기록에서도, 북악에 있는 화산의 신을 중악으로 모셔와 제사를 모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올리신 사진은 그 중악묘로 사료 됩니다.
평안도의 의주는, 맑은영혼님께서 말씀 하시는 것과, 본인이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의주를 용만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용만에는 지금도 기록과 같은 대가,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비록 건물의 모습은 다르지만,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며, 조선사의 기록에 수 없이 나오는 기록과 한치의 차이도 없습니다. 그리고 소위 중국이라는 나라들에 대하여, 본인도 많은 의구심을 가지고 습니다. 그것은, 조선사의 영역과 많은 부분이 겹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시간이 가면서 점차 명확히 들어 나리라 봅니다. 대부여님, 맑은 영혼님, 관심과 성원에 감사 드립니다.
위의 사진은 관광지로 유명한 현재의 화산이고 김상헌이 보았을 삼각산으로 생각되는 산입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화산[華山]인 삼각산[三角山>에서 화산=삼각산이고 그 산이 한양(현 서안)인근에 있지만 현재의 화산은 아니다란 것이죠...?
맑은영혼님의수고하신 댓글 진정 감사 합니다 사기꾼들이 의도적으로 교란시키니 너무 혼란 스럽습니다 그러나 방향과 산의 대소 자연환경 기후등은 못 속이는 것이므로 이를 기준으로 사서들을 재량해가며 보면 결론이 도출 되지요 결론들을 모아서 다시 검증하면 더 확실해질 겁니다
현 서안이 조선의 옛 도읍지인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맑은영혼님이 말한 "삼각산"은 바로 서안 즉 위수 북쪽에 거대한 산세가 있는데 그곳에 삼각산이 있는걸로 밝혀졌습니다. 직접 서안에 가보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연행록의 대부분은 왜곡 날조된것으로 보입니다. 연행록에서 말한 "북경" 또한 바로 서안인것으로 판단됩니다. 사견이지만 연행록을 곧이곧대로 다 믿으면 판타지소설이되지만, 북경을 찍은 흑백사진을 전부 살펴보고 그리고 오늘날 서안고성을 찍은 수많은 카페 개개인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사진자료를 비교해보니까 일치하는 자료가 분명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