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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3년 3월 22일 토요정례법회 ○
청년 강연
주인부대 청년 3단 윤인덕 교우님의 차분하면서도 진솔한 이야기 ' 원불교를 만나서'
질문과 답변
Q. 김호겸 : 교당에 안착을 쉽게 하신 편인데 신입교도로서 안착을 잘하는 비결?
A. 윤인덕 : 교당에서 행해지는 많은 프로그램들(헌배,사경)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하다보면 깨우치는 것이 생기는 것 같다.
Q. 서현정 : 강연 연마를 위해서 3~4개월 전부터 준비하셨는데 끝난 후 느낌?
A. 윤인덕 : 미리 연마만 잘 하면 강연 제대로 할 수 있겠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 강연원고 쓰고 시간까지 맞춰 놓았는데
막상 실전에 오니 너무 빨리한 것 같습니다.
Q. 류현진 : 인덕교우님 댁이 파주여서 오시기 힘드실 텐데,
먼 길을 달려오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A. 윤인덕 : 내가 차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편하게 오지만,
가끔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일산교당을 보면서
‘저 정도 가까운 거리라면 참 좋겠는데’ 생각한 적은 있다.
인덕 발견
윤인덕 교우님을 위한 3단의 재치만점! 깜찍 '축하 공연'
김정원 교무님 설법
인덕 교우님의 강연 원고를 보고나서
나는 무엇에 매달리고 있는가. 원불교를 만나서 어떻게 되었는가.
내가 학생일 때 무엇을 보고, 무엇을 쫒아서 왔는가 떠올랐다.
인덕교우님은 입교 후 얼마 안 지나서 교당에 안착했다고 하였는데
나는 입교 하기도 전에 전무출신 서원을 세웠다.
바야흐로 20 여년 전, 중학교 때 교당에 가게 되었다.
내 중학교는 익산 북중 이라고 남녀공학이었다.
어렸을 때 친구가 원불교 한번 가보자고 권유하였다. 정토회 교당이었다.
정토회 교당은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데, 교무님들 자녀들이 다니는 교당이다.
은지나 상인이가 익산에서 교당을 다닌다면 자연스럽게 정토회 교당에 다닐 것이다.
그래서 원친회가 되고, 원친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된다.
허 석 교우, 유미 교우, 혜민 교우가 원친회이다.
어머니께 원불교 가도 되냐고 여쭈어보니 네 맘대로 하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집 주변에 교회가 많았기 때문에 원불교를 몰랐다.
그런데 교당을 처음에 갔더니 어색한 분위기가 아니라 편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때 잘 놀았던 친구들이 다 원불교에 있었던 것이다.
약 40명 중 16명 정도가 그러했다.
처음 법회를 보고, 여자 교무님께서 검정 치마에 흰색 저고리를 입고 들어오시는데
교무님이라는 것도 모른 채
처음 느낀 것이 ‘아 저런 사람이 있구나.’, ‘참 순수하고 깨끗해 보인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하면 안될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입교도 안하고 교무님께 이야기도 안 한 상태에서 서원을 세운 것이다.
참 순수했던 그 시절에 성직자라는 직업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인줄 알았다.
그런데 미래의 직업군에 조사하는 성격검사를 보았는데
목록을 쳐다보니, 성직자가 있는 것이다.
나는 성직자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거기에 성직자가 있는 것을 보고
그러면 나도 성직자 해도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여 나는 교당 2주 딱 나가고
‘나는 교무님 하면 안되요?’ 하고 했더니 교무님이 해도 된다고 하셨다.
만약 교무님이 “입교도 안하고?” “네가 뭔데?” 라고 하셨다면 아마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교무님께서도 매우 황당했을 것이다.
입교를 한 것도 아니며 집안에 원불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를 따라 와놓고서 그랬으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여러 가지 연결된 것이 있지만 그게 바로 전생부터 맺어진 인연이고 법연이 아닌가 싶다.
지금 확실하게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나의 법연은 4명이 있다.
그 친구들 중 2명은 같은 교당 친구들이다.
어떻게 보니 나도 전무 출신하고, 내 친구들도 전무 출신한 것이다.
친구가 전무출신을 한 계기가 내가 되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가
“아, 쟤도 하는데 내가 왜 못해” 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왜냐면 집안에 원불교 인연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나는 전무출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의 가계도를 그려보면 교무님 아닌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 친구들과 같이 학교 생활을 하게 되고, 그 인연이 쭉 이어오게 되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힘든 경계가 있지만 같은 법연, 학년, 친구, 인연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내가 나를 바라보고 조금씩 커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전무출신한 사람 중 하나는 1년 후배 친구인데 유원경 교무님 동생으로 나와 동기이다.
나는 해준 것이 없는데 그 친구는 나만 보면 무엇인가를 준다.
그 친구가 이야기하기를 내가 자기에게 잘해줬다는 것이다.
간사 시절, 총부 재무부에서 일을 했는데
돈을 만진 것이 아니라 돈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몸으로 했었다.
그러다 보니 그 친구를 만날 기회가 없었었다.
실내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나는 부러워했으나, 그 친구들은 밖에서 컵라면 먹고 있는 내가 부러웠다고 한다.
그러다 컵라면 하나 준 것이 그 친구는 마음에 남았다고 한다. (^^)
사소하지만 그 인연을 통해서
내가 모르는 법문들, 선진님들을 그 친구를 통해서 많이 알게 되었다.
원불교에 대해서 잘 아는 그 친구를 따라잡기 위해서 나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러다 보니 나 역시 조금씩 발전하게 되었다.
하기 싫은 것도 습관을 들여서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커 나가가고 있다.
나는 원광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그 곳 학생들은 원불교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안다.
시간이 흘러, 기독교 친구 한 명이 나에게 이야기하기를 자기 가족을 위해 기도를 해달라고 했다.
기독교에서 한 자리를 맡고 있는 신심 있는 친구가 왜 나에게 기도를 해달라 할까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일반 사람들과 내가 행동하는 모습도 다르고
예전에 봤던 그 모습이 아니라 원불교인의 모습으로 보니깐 그 친구들이 기댈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고 하였다.
자기가 종교가 있는데도 내가 원불교 성직자라는 이유만으로 ‘자기의 마음이 열린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아, 나도 인정받는구나.’
계속 학교 생활을 할 때는 안에서 보면 다들 도토리 키재기이다.
늘 똑같은 옷에 똑같은 모습으로 같이 있고 공부하는 연속인데
밖의 사람들과 비교하다 보니 어느 순간에 나보다 훨씬 높고 잘하는 친구들보다 일반 교도들 보다
한 발짝 앞에 나가 있는 모습이더라.
스스로 이 모습에 젖어가다 보니 그랬다.
6년이라는 시간을 쉬고 나서 교당에 오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주변의 원친회 친구, 선후배를 보면 십 몇 년 동안 안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더 쉽게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인덕 교우님은 친구 따라서 다시 오긴 했지만
그 시간과 공이라는 것이, 자기 마음을 돌리는 것이 쉽지 않다.
몸이 아파서 교당 한번 쉬면 다음주에 가기 싫다.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몇 번 안나오면 교당가기 싫은 법인데 내가 생각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인연의 끈도 있고, 스스로의 다짐도 있으니 그 시간의 공백을 뛰어 넘고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쉽지 않은 것이다.
인덕교우님이 현정교우님에게 매우 고맙다고 하였는데
왜 후생에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지..(^^) 현생에 갚으시면 된다고 생각한다.
자그마한 것부터 천천히 하셨으면 한다.
내게 소중한 법연 중 한 분이 네팔 교무님이신 원성제 교무님이다.
어떻게 보면 외국에서 교법을 보고 왔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다.
분명 전생에 원불교와 대종사님과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이다. 카스트 제도에서 제일 위가 브라만이다.
그런데 그 브라만에서도 3% 안에 들어가는 완벽한 귀족이다.
그는 인도에서 알아주는 대학에서 수학과를 졸업했다.
그 친구는 나이는 어리지만 하는 행동과 생각하는 것이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
주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 나 역시 분발해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나는 그 친구를 보고 많이 배웠으며
그 친구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을 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인연이라는 것이 무엇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한번의 모습을 통해서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것이다.
정산종사님께서는 소중한 인연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하셨다.
혈연과 법연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영생을 놓고 볼 때는 법연이 더 귀중하다 하셨다.
또 공부하는 동지라야 영겁의 동지가 된다 하셨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서 같이 법회를 보고, 이야기를 듣고 하는 것은 법연으로 맺어진 인연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에서 직장을 구하고 지방에 갔다 하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또 만나게 될 수 있는 인연이라는 것이다.
영생을 통해 볼 때,
혈연은 법연을 통해서 맺어진 가족이 다시 또 가족이라는 인연을 얻고
다시 또 친구라는 인연을 통해서 맺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자기가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어떤 모습으로 생활해야 할 것인가?
나는 계속 이러한 것을 봤을 때 계속 반성하게 된다.
인덕교무님은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성격이 있다고 하셨는데
나는 그것이 좀 더 심했던 것 같다.
스머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학교 다닐 때 별명이 투덜이 스머프였다.
왜냐면 성격이 투덜거릴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성격은 소심한데 드러내놓고 이야기 못하니 뒤에서 웅얼웅얼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처음에는 나 스스로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런 성격도 있어야지, 원불교가 다 좋아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공부를 하고, 주위의 인연들과 스승님에게 문답 감정 받고 나니 바뀌게 되더라.
원불교 학과 가서 신입생 때 성격 테스트를 하게 되었다.
그랬더니 성격테스트를 해 주신 교수님께서 결과를 보고, “이 성격을 가진 사람이 누구세요?” 라고 묻는 것이다.
손을 든 나를 유심히 보면서 교수님께서는 종교계에서는 나올 수 없는 성격이다, 라고 하였다.
안 좋은 성격으로 3% 안에 드는 특이한 성격이라고 하는 것이다.
강연을 받았을 때 처음 드는 생각이
교당에서 인생 곡선을 하셨다는데 나는 어떤 그래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생각 이었다.
인덕교우님은 지금 정상을 하면서 가고 계신 것 같다.
나의 인생 곡선을 보면
중 2 때부터 전무출신 서원을 세워 쭉 위로 가다가 멋도 모르고 간사를 하면서 뚝 떨어졌다.
전무출신과 원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출가했기 때문이다.
내가 2년 동안 간사하면서 꾸중들은 횟수가 너무나 많다.
그때 당시에는 ‘왜 내가 하면 무조건 혼나야 하는가.’ 라는 생각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꾸중이 약이 됐던 것 같다.
그러다 행복지수가 떨어졌던 것이 한번에 올라왔다.
그때가 내가 원불교학과에 입학했을 때이다.
어떻게 급상승을 했는가.
간사 마치고, 군대에 가서 2년 동안 행정병을 하였다.
그 때 밤새워 고생하면서 배운 워드가 입학 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면서 학교생활이 즐거워졌다.
간사 때의 경험 역시 나중에는 다 약이 되었다. 한순간에 박차고 올라 갈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나의 스승님이신 은산 김장원 교무님께 처음 말을 건네는 시간이 약 6년 가까이 되었다.
간사 때는 맞느라고, 학교 때는 무서워서 말씀을 못 건네 드렸던 것이다.
어느 순간 스승님께 말문 열어서 문답감정을 요청하니 나에게 딱 답을 내 주셨다.
하지만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정 하고 싶으면 한번 해봐라.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싶으면 다시는 죽어도 그 일을 하지 말라” 하셨다.
제 스스로는 내가 맞는 것 같은데 왜 스승님은 그런말씀을 하실까 의문을 갖고 행동했다.
그러나 겪어보고 겪어보니 역시 경험을 해보신 스승의 말씀은 다 진리가 되는 구나 느꼈다.
그러고 나서부터는 내 욕심으로 실패를 한 후에는 다시는 똑같은 일을 되풀이 하지 않는다.
스승님이 말씀하신 답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스스로 억제가 된다.
일기를 쓰고, 유무념을 체크하신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학교 때 일기장이 두 개다.
유무념 횟수를 적는데,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들은 수업시간에도 유무념 체크를 한다.
나는 몰아서 하는데, 뭐가 그렇게 잘못을 많이 했길래 그렇게 쓰는가.
하지만 나중에 저도 공부를 하면서 체크를 해보니 한 달을 살고 보니
점수가 마이너스 1,500점이 나오더라.
왜그런가 보니 악한 말. 즉 투덜이 스머프처럼 투덜거리는게 많았던 것이다.
유무념 공부를 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커 나가는 것을 느끼게 되더라.
1,2,3학년 때는 좌선을 나가자, 4학년 때는 씻고 나가자, 대학원 때는 몸을 풀고 나가자
그렇게 조금씩 잡고 해나가니 점점 발전되는 모습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몰랐는데 주위에서는 “애쓴다” 에서 “애썼다”라고 바뀌더라.
여러분들 새벽에 좌선 나오는 거 애쓰는 것이다.
새벽 시간에 나와서 선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종사님께서 내놓으신 일기법.
자기 마음을 하루에 최소 1번씩이라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셨다.
단순하기는 하지만 쉽기도 하면서 혹은 어렵기도 하면서 자신을 바라 볼 수 있다.
솔직히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란 어렵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좌선법은 단전에 기운 정하라고 했는데 단전이 어딘지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일기법은 쉽다. 일기를 쓰면 된다.
계문에 바탕해서 체크를 하면 된다.
그 법에 맞추어 나가면 스스로 하루를 반성하게 되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내일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정리가 된다.
헌배는 힘들고, 심고는 올리기 어렵다.
하지만 일기는 한 줄이라도 쓰면 된다. 그걸 쓰면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무님과 약간의 거리감이 있다.
그랬을 때 문답감정을 받기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일기를 쓰면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을 덜질 수 있다.
그걸 가지고 교무님과 조금 더 친해졌을 때, 문답감정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훨씬 더 내 스스로 원했던 답들이 자연스럽게 풀릴 수 있다.
또한 그것을 하나씩 갖고 있으면서 계속 궁글렸다고 하면
내 생활의 모습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지금 그래프에서 일자로 수평으로 가고 있는 모습은 지금의 내 모습이다.
안암교당에 와서 여러 가지 배우는 것이 많다.
나도 부족한 면이 많다. 그래서 부족한 면을 보완하면서 생활하려 한다.
그랬더니 지금의 모습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지되더라.
주위에 각자 각자 옆에 앉아있는 분들이 소중한 분들이다.
내가 곡선 위를 완전히 뛰어 넘어서 구십도 각도로 하늘을 찌를 수도 있다. 아니면 그 인연을 통해 내려갈 수도 있다.
그런데 옆에 있는 도반 동지들은 내가 진급할 수 있도록 받쳐주는 동지들이다.
법으로써 서로 인연 되어지고, 정으로써 인연되어지고.
쉬운 부분은 아니지만 자기 스스로 주위 인연들과 한걸음 더 맞춰 나간다면 전반적인 것들은 쉽게 된다.
처음에 교당 와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청년들 얼굴을 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장 처음 한 일이 컴퓨터 바탕화면에 청년들 사진을 저장하는 것이었다.
자주 오고 맞대는 교우님이 아니면 얼굴을 못보니 기억에서 사라진다.
조금씩 얼굴 익혀가고 생활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다 보니 내가 부족한 면들을 청년 교우님들께 스스로 배워가게 되고
서로 인연을 걸고 보니, 서로 부족한 면들이 보이고 내가 배워가야 할 면들이 보이더라.
교리에 대해 부족하니 제원 교무님께서 설교하신 것으로 보충해 나간다.
내가 생각할 때는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노는 것과 사진 찍는 것이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못찍었다고 실망했는데 대학원에 가서 보여주면 잘 찍었다 격려해 준다.
계속 그 자리에 멈춰있으면 한없이 머물러 있을 것인데
주위 동지들이 응원해 주고 내가 가야할 길에 대해 이야기 해주니 한번씩 나도 더 챙기게 되더라.
주위에서 누군가가 나를 챙겨준다는 것이 대단한 행복이며 축복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을 대어서 하나씩 배우고 얻어갈 수 있는 모습들이 지금으로써 끝내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나아가 한 발, 한 발 걸어가면
이 연을 따라서 다음 생에 태어나도 스승과 제자로서 혹은 동지로서도 만날 수 있다.
원불교를 만나서 이 강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 웃고, 나중에도 웃고, 내생에도 웃을 수 있는 소중한 법동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질문과 답변
Q. 양규연 : 서원을 세운 것이 너무 어릴 때인데 중간에 그 서원이 간사생활을 하면서 후회된 적은 없는지?
그리고 가족분들이 원불교 가족이 아닌데 교무님으로 인해서 일원가족이 되셨는지?
A. 김정원 : 나중에 출가 결심을 세우고 보니,
부모님은 예전에 입교는 하셨는데 교당에 안나오셨다가 나로 인해서 나오게 되신 인연이 있다.
나는 간사 2년차 열심히 땅 파고 있으면서 완벽한 후회를 하였다.(^^)
간사가 선택인 것도 모르고 출가를 했었기에 어쩔 수 없이 2년을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이겨냈는가.
나는 중학교 때부터 전무출신을 하려는 꿈을 가지었더니, 중간에 나가더라도 다른 꿈이 없더라.
나가서 다른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해 보니 할 것이 없더라.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후회가 없어지게 되었다.
나는 전무출신 말고 다른 것을 생각 못해봤기 때문에 후회는 후회일 뿐,
자연스럽게 서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때 많은 꾸중 속에서 배웠던 것들이 학교 다니면서 다른 사람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의 후회가 지금에 와서는 많은 반성이 되더라.
Q. 문혜은 : 워드계의 대각여래위. (^^)
처음에는 친구들이 유무념 체크를 하는 것을 보고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본인도 변화하셨다. 그러면서 큰 공부가 되셨을 것 같다.
그때의 경험이 그 이후에 어떤 영향을 미치셨는지?
A. 김정원 : 나는 투덜이 스머프였다고 했다.
처음 잡았던 유무념이 혼자 투덜거리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자. 이야기 하자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걸 가지고 맞다. 그르다. 공심이다. 아상이다 등
나보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나에게 답을 내 주었다.
학교 다닐 때 교수님이나 학사 담당 교무님께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게 드러내놓고 보니 답이 나오며, 이 답은 꼭 지키려고 생각하였다.
한번 겪었던 일은 같은 잘못 반복하지 말자 하면서 문답감정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법으로 되돌아왔던 것 같다.
Q. 주성주 : 중학교 2학년 때 전무출신이 되고자 하는 서원을 세우셨다고 했다.
그 때 세우셨던 서원의 마음과 친구에게 자극을 받아서 교전을 봉독하시고 나서의
마음 차이가 어떤 것이 있는지?
A. 김정원 : 처음 세웠던 서원은 교무님의 모습을 보고 ‘나도 한번 해봐야지’ 하는 막연한 상이었다.
종교인이라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서원은 혼자 스스로 생각하는 서원일 뿐, 그것을 동지들과 공부를 하면서 깊어졌다.
처음 출가 동기를 특별한게 없어서 ‘성불제중 제생의세’라 썼는데
어르신들이 정말 큰 서원을 세웠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난 후 바뀐 나의 서원은 ‘세상의 짐이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무출신을 하고 나왔는데 내 몸 하나 내 밥값을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대종사님의 법을 전달하지 못할망정 내 몸 하나라도 건지고 나가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들이는 공덕을 줄일 수 있다.
대종사님께서 펼치신 교법을 다른 사람한테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 몸 하나 밥값 못하고서 권할 수는 없다.
‘좌선이 좋다 해라’ 라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했을 때 ‘뭐가 좋느냐’ 라고 물어보면
‘나 열심히 하고 있다’ 라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 정도면 좋다.
그러면 공도의 밥을 먹으면서 내 몸 하나는 스스로 떳떳하지 않을까.
지금의 서원은 세상에 짐이 되지 말자.
더 나아가면 세상의 짐을 다 없애고자 하는 서원까지 나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첫댓글 늦은 시간까지 정성스러운 후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와~ 은전교우님... 진짜 정성이 가득^^ 본받아야 겠다는 생각이 막 들어요~
이연 교우님께서 깔끔히 정리해 주시는것 저도 잘보고있어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