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림산~운주산 산행기
수원역 8시 40분, 무궁화 열차에 오르기 위해 플렛홈을 여섯사내들(청아,내명,신바람,
회산 바다,나)이 서성거린다.
버스,택시,전철,항공,선박 등의 이동수단이 다양화 됐음에도 서민들의 주요 이동수단인
대중교통은 언제나 인파로 북적인다."무엇을 하려고 이렇게들 우왕좌왕 하는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이고 존재의 한계는 언제이고 어느 곳인지? 밀물이 밀려들면
갑자기 몰려와서 썰물이 빠져나가면 부지불식간 휩쓸려 떠내려 갈 수밖에 없는 미물의
무력한 존재에게 원모심려의 출구전략을 기대하기란 요원한 일이다.신(神)이라면
어떤 수단을 사용했을까?
좌석예약이 없었더라도 입석을 마다하지 않았겠지만 아금받은 내명의
사전예약으로 입석의 불편함을 면하게 되었다.좌석의 안락함에는 그의 명민함이 묻어있고
오늘산행에는 청아대장의 섬세함과 부지런이 담겨있다.
전의역에서 산행들머리로의 이동은 택시이용이 제격이다.택시 2대에 세 명씩 분승을 하고
들머리인 심중리 고갯마루에 이른다.온 산은 흰눈으로 덮혀있다.
다만 남향받이 산자락과 계곳에는 야성의 민낯이 조금 드러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산골짜기
에는 하얀 떡가루로 잔뜩 분칠을 하고 요조숙녀를 가장하고 있다.
2차선 차도 옆으로 "동림산 등산로"라고 쓰인 입간판이 우뚝하고 등산안내 개념도가
친절하게 맞는다.수렛길같은 산길,흰눈이 덮혀있는 산길에 한 두 사람의 족적이
선명하다.이미 입산객이 들어선 모양이다.이른 새벽을 틈타 무엇이 그들을 한적하고
낯 선 이 곳 동림산으로 이끌었을까,우리 여섯 사내들처럼 그들도 혹시 치유불가의
고질(痼疾)인 산애광증(山愛狂症)의 질곡에서 허둥대고 있는지 모른다.
"무엇이 그들을 이 곳으로 끌어들이는가?" 전생의 업보인가?
그런 가능성도 충분히 엿보인다.유아기를 벗어나고 청년기를 지나서 장년기에 들어서고 부터
사태의 우려할 행동의 징조가 발현되기 시작됐기 때문이다.이제는 장년기를 거쳐
노년기의 문턱에서 사위를 두리번 거린다.젊음은 미끈한 피부에 탄력까지 가미한 몸매와
칠흑의 머리칼의 풍성함이 주는 활력이 넘치는 몸짓과 말씨가 파란하늘 푸른 들의
샘솟는 삶을 떠올린다.그들의 영혼도 아직은 그 곳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지난 기나긴 밤의 미몽의 숲을 빠져 나온 육신은 몽매의 그늘을 벗어났지만
영혼은 본태성 태만에서 구태를 버리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잡귀처럼 삶을 푸념하기만 한다.
그들같은 무리를 우리는 흔히 "늙은 애"라고 부른다.영혼은 아직 젊음을 잃지않고 있는 반면
육신은 이미 늙어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몹시 추운 날씨가 될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염두에 두고 내복을 껴입고
그위에 내피쟈켓을 두르고 거푸 동절기 보온쟈켓까지 들쳐입고 히말리아 고산등정이라도
오를 듯 채비에 부족함이 없도록 만전을 다한 모양새가 무색하게 되었다.
구름 한점없는 맑은 날씨에 바람마져 잠을 자고 살포시 봄볕닮은 겨울볕까지
쏟아지니 중무장한 태세가 졸지에 번거롭기만한 짐짝 신세로 변해버렸으니 남이 볼세라
허겁지겁 중무장을 해제하고 경무장으로 환골탈태를 한다.햇볕정책은 이런 경우에나
들어맞는 전략인 모양이다.
동림산 정수리에는 충남 연기군에서 세우놓은 심중리 편입 기념석이 거만하게 우뚝하고
이동통신탑이 세워진 꼭데기에는 CCTV가 입산객들의 행동을 주의깊게 살핀다.
정수리 주요부분은 묘지 서너 기가 뻔뻔하다.동림산성의 쓰임새를 보일 무렵에는
장수가 호령하던 장대(將臺)였을 터, 부지불식 뭇 영령의 안식터로 바뀐 셈이다.
세상의 무관심인지 후세인들의 무지인지 그 앞에 버젖이 세워놓은 동림산성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문이 자못 무색하다.
동림산성에 대한 안내문의 내용을 대강 간추리면, 이 곳 석축산성인 동림산성은 백제때
처음 축성이 되었고 이 후 고려시대까지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청원군 옥산면과
충남 연기군 그리고 천안시에 걸쳐 축성된 산성의 둘레는 819.5m로 비교적 큰 성이었다고
이 글은 밝힌다.아직은 이렇다할 복원은 이루어져있지 않은 모습이다.
흔적만이 세월의 무상함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해발 457.3m의 동림산 정수리,봄볕같은 겨울볕이 한결같다.
기념촬영을 마친 여섯사내들은 망경산 3.3km를 가리키는
푯말의 지시대로 발길을 서두른다.산길은 급작스럽게 절벽의 급경사를 이루고
얌전한 시골색씨를 닮았던 여지껏의 산길이 험상한 낭인의 사악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부랴부랴 아이젠을 착용하고 벌벌 가풀막진 급경사를 내려선다.서까레 굵기의 나무로
만들어 놓은 계단이 길게 이어진다.자칫 자세가 불안하면 곤두박질을 당할 위험구간이다.
그러나 여섯사내들은 태평가를 부를 정도로 느긋한 모습이다.소위 짠밥의 위력이다.
푸르름의 호시절을 마감하고 휴면의 겨울잠에 빠져있는 나목들의 옹송거림은
흰눈으로 덮힌 산길아래 울림으로 내려앉고 잿빛의 움추린 몸매는 와신상담의 봄을
예비하는 스토브 리그의 담금질의 속내가 담겨있다.산길은 오르막을 내놓으며
인내를 시험한다.작은 언덕이나 구릉처럼 보여지고 여겨졌던 산길의 굴곡은 보기보단
딴 판이다.오르막과 급경사가 겉모습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인다.
서까레 나무 계단이 때맞춰 기다리고 보조로프도 수요공급에 차질이 없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있는 송전철탑을 지나면 임도가 가로지른다.
좌측으로는 봉대리를 가리킨다. 흰 카펫을 펼쳐 놓은 듯 하얀눈으로 덮혀있는 전인미답의
임도가 과객을 기다린다.망경산으로의 산길은 임도를 곧장 가로지르면 된다.
망경산까지는 1.3km, 지척이다.
해발 385m의 망경산 정수리는 비교적 비좁은 편이다(동림산에 비하면).
그나마 벤치 2개까지 끼어들어 옹색한 살림을 부추긴다.그 와중에 정상빗돌은 아담하다
운주산의 우람한 실루엣이 아득하게 조망이 된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간식 두어 개와 함께 게 눈 감추 듯 해치우고 막걸리 한 잔으로
산상오찬을 마감한다.망경산 정수리를 뒤로하는 산길도 가파른 급경사를 이룬다.
오른 쪽 등산화에 눈 가루가 스며들은 모양이다. 감촉이 불편하다.
진동한동 급경사를 내려서니 693번 지방도가 기다린다.고소재다.
길 건너편의 산자락에는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 집단묘역구간, "국가유공자묘역"이라고
음각이 된 커다란 빗돌 앞을 지나면 곧바로 숲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이고
계단을 내처 애면글면 이어나가면 산등성이에 이른다.240.2m봉,삼각점이 정수리 한복판에
옹골차게 박혀있으나 조망은 별로 기대할 것이 없는 무명봉에 불과하다.
오르막을 올라서면 내리막이 오만한 자태로 대기하고 있고, 햇볕이 드는 곳은 맨살의
대지가 숨을 고르고 그늘의 한기가 서린 곳은 흰떡가루를 뿌려놓은 듯 겸허하게 숨을
죽이고 있다.
온갖 수목들의 동안거(冬安居)다.동안거란,음력 시월 열엿샛날부터 그 이듬해 정월
보름날까지 90일 동안 일정한 곳에서 수도(修道)하는 일,어머니의 품안으로 겸허이
뿌리를 묻고 생사고락을 신탁한 그들의 믿음은 신비롭기까지 하다.용맹정진의 수도생활
이 기한이 따로 있을 수가 없다.따사로운 태양의 손길이 머무는 시기가 동안거의 마침을
의미하고 혹한의 한기가 전신을 휘감을 무렵이 다가오면 묵언수행의 장기수행을 준비
해야 한다.
쌉싸름하고 구수한 진갈색의 따뜻한 커피로 목을 적신다.오롯이 묵언수행중인 나목들
가지사이로 은빛햇살이 따사롭게 쏟아진다.하늘빛은 예의 코발트색을 간직하고 있다.
작은 임도가 가로지르는 언덕빼기,밤실고개다.
길목에 세워놓은 이정표는 운주산으로의 남은 거리가 1.9km라고 알린다.
평이하게 이어나가던 산길은 덜컥 임도로 내려선다.머지않아 임도 좌측의 숲길이
열리면서 나무계단이 오르막길을 이끌고 곧바로 내려선 산길에는 가풀막의 오르막
나무계단이 다시한번 헐떡임을 강요한다.굵직한 보조로프로 위안을 삼으란다.
운주산 정수리 부위가 손을 뻗으면 곧 닿을 듯 지척에서 거만한 실루엣을 띄운다.
앞서 간 세사내들(바다.신바람.회산)인가?.거뭇한 움직임이 그들이 틀림없을 터,
서둘러 오른 그들이 느긋한 조망을 즐기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해발 459m의 운주산 정상에는 정상을 알리는 표시석은 없다.굳이 세울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모양이다. "백제의 얼"을 되새기고 이어받아 태평성대의 꿈을 실현
하자는 대리석 상징탑이 장대하다.
3단의 원형 기단위의 길쭉한 장방형의 대리석 세 조각을 세로로 세워 삼각으로 서로 붙여
세운 탑, 건립기를 살펴보면,이 곳 운주산성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백제의 탑으로
삼국사기에는 고사성(古沙城),그리고 동국여지승람에는 고산산성(高山山城)으로 전한다.
성곽은 석성의 형태로 둘레는 3.2km가 넘는 거대한 덩치를 보이고 정남 방향의 계룡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웅진왕도 시대의 국방의 최일선을담당하였고 백제 말기에는 구국항쟁의
기지역할을 담당하였다고.후세인들은 이들의 얼을 무궁히 받들고 이어받아 국가중흥의
길로 나가자는 의미와 뜻이 깃들어 있다.
탑 앞의 정수리의 붕긋한 멧덩이에는 천신에게 제를 드릴 고유단(告由壇)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백제의 얼을 기리자는 탑과 고유단이 자리한 정수리 주변으로
빛바랜 석성이 보인다.이리저리 카메라 앵글을 들이대고 촬영을 마치고 정수리를
뒤로 한다.날머리는 고산사 방향으로 잡혀있다.널직한 임도가 지친 산꾼들을 기다린다.
다소 지루하고 미끄럽기도한 임도를 아금맞게 따르다보면 운주산 공원에 이르고
그 곳을 가로지르면 최근 복원한 성곽의 출입구를 나서게 된다.
아이젠에 악착같이 달라붙던 눈덩어리들을 연신 떼어내며 시시포스적인 인내를
감수하며 고통의 미학에 한 낮을 보낸 산행의 피날레를 미곡리에서 장식한다.
콜택시에 몸을 의탁한 채 전의역 주변으로 이동,역 주변의"윤가네"라는 식당에서 부족한
허기와 갈증을 채울 참이다.한 시간 이상의 느긋한 게으름을 즐길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다.
(여섯사내가 기다리는 상행선 무궁화 열차시간은 17시 05분).
첫댓글 구수~한 된장찌개 맛이 나는 산행기
늘~몸에 배였어라
여섯 사나이 산길 가는 뒷 모습이
어찌나 저리 아름다울 수 가 있능겨?
잃어버린 우리들의 제국 백제의 흔적이 곳곳에 배여있는 곳! 여섯사내들도 남다른 감회를 느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