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감죽을 먹었나?
이순애
성북동에서 1111번과 2112번 버스종점에서 차를 내려 북악산을 바라보며 걷는다,
이렇게 도심 한복판에 버스 종점이 있는 것이 놀랍다고 소근대는 여행객들이 흘리는 말소리를 듣다보면 어느새 맛집 <누룽지 백숙>을 지난다. 3층 지붕위에는 빨간 바지를 입고 바이
얼린을 켜는 조형물 아저씨가 오가는 사람을 반겨준다. 고풍의상처럼 깊어가는 북악산 가을정취를 연주하는 소리가 펴지는 것 같다. 건너편에는 50개 외국 국기가 색깔과 모양을 뽐내며 펄럭인다. 성북동에 둥지를 튼 대사관(저)이 있는 나라의 국기들이 오순도순 우정을 쌓아가는 상징이다. 곧 우정의 공원과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사찰 성라사에 닿는다. 성북동에 살면서 늘상 보아온 정경이지만 그동안 이곳 픙경도 많이 바뀌었다. 언덕 아래 물길이 많이 복개되면서 도로가 넓어지고 문화역사지구로 유명세를 타면서 한적하던 마을에 여행객이 늘어가고 있다.
성라사 안으로 발길을 옮긴다. 뒷산까지 3,500평이라니 길상사의 꼭 절반쯤이다. 백석이라 불리던 김영한 보살이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할 당시 20년 전 길상사 시가가 1,000억원이었다고 하니 성라사 시가는 500억쯤 할까 속으로 셈을 해본다. 도심 한복판 도로 바로 곁에 위치한 도량이니 신도는 물론 찾는 이둘로 야단법석 할만도 한데 비에 젖은 대웅전과 꽃지는 뜨락은 쓸쓸하게 퇴락해 간다,
이곳이 만해 한용운 선생님이 삼일운동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신 장소라는 거 맞지?
인쇄소에 넘길 독립선언문 원고를 필경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 알고 있다는군,
그런 사실을 알리는 표지판이라도 세워놓으면 안되나?
볼멘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 한다.
심우장이 바로 지척이니 만해선생님은 여기를 얼마나 자주 드나드셨을까?
아니 심우장으로 들어오신 시기가 1930년대이니까 훨씬 전의 일이구나 하는 생각에 미친다. 그러면 이 성라사와의 인연과 당시 활동 근거지였던 북촌 선학원과 가깝다는 이유 때문에 성북동으로 오셨나보다.
시인 김일엽 스님이 머물면서 <청춘을 불사르고> 라는 화고록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일엽스님의 제자인 법성스님이 주지로 계시는 동안 조계종 비구니 승가대학을 세웠으나 후에 중앙승가대에 합병되기도 했단다. 일엽스님은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일본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자연연애론을 주장하며 여러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여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다 1933년 수덕사 만공스님 문하로 출가하였다. .
그후 1962년 파란만장한 일생을 기록한 <청춘을 불사르고>는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을 읽고 불교에 귀의한 여성이 많았다고 한다.
스님이 일본유학시절 만난 일본 명문가 아들 사이에서 타어난 아들이 있었다.
평생 김태신이라는 한국이름을 고집한 일본 최고의 화가, 66세라는 늦은 나이에 스님으로 출가하여 성라암에서 얼마전 입적한 일당스님이 바로 그 아들이다. 스님은 평생 어머니를 그리워하다 수덕사로 찾아가 단 한번 어머니를 만났으나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이런 애틋한 마음을 담은 자전소설이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이다. 일당스님은 이당 김은호화백의 양자이기도 해 더욱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성라사에서 가평에 4만평 성라실버타운을 설립하고 이곳에 납골당을 일반분양을 하려한 게 불과 몇 년 전 이다.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주택가 한가운데 납골당이 웬말이냐고 항의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 바람에 사업을 접고 운영이 힘들어지자 사찰이 경매로 넘어가면서 옛날의 위엄을 잃고 말았다. 한성대학교에서 기숙사를 지으려 했을 때에도 130년 역사의 사찰을 보존해야 한다는 반대 여론에 밀려 보전된 사찰이다.
10여 년 전 성라사와 우정의 공원 사이로 가회동 삼청동으로 연결하는 큰 도로가 뚫리면서 일대는 교통이 좋아지고 상권도 활발해졌다. 누룽지 백숙은 예약을 받지 않기로 유명한데 주말에는 100m 이상 대기손님이 줄을 잇는 명소가 되었다.
원래 인쇄업을 하던 리우식 사장님은 음식점 사업까지 번창하자 성북동을 문화마을로 만들기 위해 누룽지백숙 3층에 음악감상실 <리홀>을 개관하고 온정성을 쏟고 있다.
LP판이 모두 7만장이라니 하도 어마어마하서 모조판이 아니냐고 물으면 모조품 갖춰 놓기가 더 어렵다는 명답으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45년간 모은 음반이라지만 기증해준 사람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한꺼번에 3,500장을 기증한 독지가 덕분에 판매하지 않는 개방공간에서는 가장 많은 음반을 자랑한다고.
그랜드피아노와 재즈드럼까지 갖춘 문화공간이기에 진공관 소리를 좋아 하는 원로 보컬들이 찾는 서울에서 유일한 음악갤러리란다.
성북동은 사대문에서 가깝고 풍광이 수려하여 별장터가 유난히 많다.
별장에서 대원각이란 요정으로 요정에서 사찰로 거듭난 길상사는 백인기의 별장이었고 정원이 아름다운 성락원은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이었다. 덕수교회 안에는 마포 황포돛대 거부 이종석의 한옥 별장도 있다.
사보이빌라 바로 옆집은 이완용의 별장으로 사가정이라 불렸다. 이란 즉 바람과 햇빛과 물과 흙이 아름다운 곳을 말한다. 삼각산 정기가 바로 내려꽂히는 이곳에 재물운과 권력운이 서려있다고 한다. 주인은 마을 모임인 <사가정회> 회장이며 서초법률사무소를 운영하시는 전창종 고문이시다. 따님(전희경)은 한국의 힐러리라 불리더니 민감한 사회이슈마다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말하고 글을 써 박수무대를 몰고 다닌다.
이완용은 독립협회 회장으로 독립협회 현판을 쓸 정도로 예술가로서도 뛰어났으며
효심까지 지극한 명망있던 집안의 지식인이었다. 별장 건너편 성라사에서 만해 한용운님과 육당 최남선을 만나 민족을 걱정하고 독립군 군자금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애국은 잠시뿐, 일본의 힘을 빌려야 나라가 융성하리라는 나름대로의 정세판단에 따라 친일을 하며 많은 이권을 외국에 넘겨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더니 결국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기피인물 매국노가 되어버렸다. 살아서는 이재명의사에게 저격을 당하는 등 미움을 받다가 사후에도 무덤이 파괴되고 자손은 해외로 도망가는 등 집안은 몰락해 버렸다.
그의 집은 중림동에 있었다. 지금 성요셉아파트와 중림동 주민센터 근처였다고 한다.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는데 앞장서자 분노한 민중이 그의 집을 불지르고 조상의 신주를 태웠다. 이로 인해 남의 집을 전전하다가 옥인동에 3,000평이 넘는 저택을 지어 이사했다. 그리고 집과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 별장을 지은 것이다. 막연한 친구이던 사보이호텔 주인이 먼저 자리를 잡고 그를 불렀다고 한다. 이완용은 이리도 좋다는 명당자리에 머물렀어도 왜 매국노가 되었을까?
머물러 산 집이 아니라 가끔 들른 별장이기에 정기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일까?
아무리 풍수가 좋아도 사람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주인장 말씀에 고개가 끄떡인다.
풍수는 한 사람만이 상으로 받는 이 아닐까?
언덕길과 물길이 많던 이 곳에서 한양오경을 빼놓을 수없다.
봄이면 인왕산 살구꽃, 서대문 밖 천연정 연꽃, 동대문 밖 수양버들, 삼청동 탕춘대 물과 바위 그리고 성북동 복숭아꽃을 찾아나섰다는 기록이 생각난다.
그 으뜸이 성북동의 또다른 이름 북둔의 복숭아꽃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창문 밖으로 북악산과 성북동 일대가 한 눈에 보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탁 트인다. 꽃보다도 아름답게 매달린 진주황 감 열매에 저절로 웃음꽃이 피어난다. 복숭아와 감은 공기가 좋은 곳에서만 번성한다는데 성북동이 그런 최적의 장소임에 틀림이 없다. 세상살이 힘들고 지칠 때면 창가에 서서 성북동 일대를 바라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행복한 낮잠 속으로 빠질 것 같다.
내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가 묻는다. (곶감죽을 먹었나? 왜 그리 실실 웃어?)
그냥 먹어도 달디단 곶감으로 죽을 쑤었으니 곶감죽은 얼마나 더 달콤할까?
성북동은 내게 영원한 곶감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