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문화예술세계탐방2]아르뛰르 랭보(Arthur Rimbaud), 저주받은 시인의 고향
‘깡마른 체구의 검은 少年’은 ‘멋쟁이 미소년들의 수작’에도 익숙한 탕아(蕩兒)로 명성이 자자했다. ‘등겨 먹던 개가 말경에는 쌀을 먹는다’고 했던가, 소년은 커가면서 고약한 짓만 골라서 하고 다녔다.
1455년 6월, 그는 어느 수사(修士)의 아래 급소를 단검으로 찔러 숨지게 했다. 그때부터 그는 감옥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칼부림 사건으로 교수형의 언도를 받기도 했다. 주정뱅이, 난봉꾼, 깡패, 살인자로 명성(?)을 날리며 ‘파란 많고 죄 많고 비참한 생(生)을 영위한 직업적인 악한(惡寒)’, 이 희대미문의 흉범이 ‘15세기가 낳은 최고의 감동적인 시(詩)’를 발표한 ‘죽음의 시인’ 비용(Villion)이다.
프랑스 문학사에서 비용을 비롯한 몇몇 프랑스 작가들이 ‘저주받은 시인들’로 낙인이 찍혔다. 산문집 《저주받은 시인들》을 발표한 뽈 베를렌느(Paul Verlaine)와 그 작품의 주인공인 아르뛰르 랭보(Arthur Rimbaud)도 낙인 찍힌 시인이다. 이 두 작가는 프랑스 문학사에서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불멸의 작가로 평가받는 거물들이다. 베를렌느는 《무언(無言)의 로망스》 등을 발표, 모호한 시어(詩語)의 암시성과 자유로운 운율을 통해 새로운 음악성을 창조했으며, 랭보는 초월적 절대의 세계를 초인적 감각 체계로 투시하여 새로운 인식의 언어를 발견해 냈다. 그런데도 왜 이들이 저주받은 시인으로 영원히 낙인 찍힌 것일까.
1844년 프랑스 메츠(Metz)에서 태어난 뽈 베를렌느는 유년시절부터 비정상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열한 살 때 벌써 음란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으며, 작품이라고 긁적거린 것은 모두가 외설적 표현들 뿐이었다. 뽈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사촌인 엘리자와 결혼을 했다. 그때부터 그는 습관적인 음주벽이 심해 졌으며, 공병 중위 출신인 부친은 그를 육 개월 동안 집에 가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보들레르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등 시(詩)와 관련된 일에 전념했다. 만취상태에서 두 번이나 모친을 살해하려고 했던 패륜아, 재혼 석 달 만에 《고운 노래》의 주인공 마띨드를 개 패듯 한 비정의 남편, 그는 분명 저주받은 시인이다.
베를렌느보다 십년 뒤에 메츠에서 머지않은 샤를르빌(Charleville)에서 태어난 아르뛰르 랭보도 어린시절부터 유명한 부랑아였다. 그의 유년기는 만용의 모험으로 점철되었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소년은 틈만 나면 독서삼매경에 빠져 작가의 꿈을 꾸었다. 메츠강(江)과 주변 원시림 속에서 시(詩)를 잉태한 랭보는 열다섯 살 되던 해 《고아들의 선물》이란 시를 발표했다. 그러나 랭보는 천성적인 방랑자였다. 그는 파리 등지를 부랑아들과 같이 떠돌아 다녔는데, 한번은 파리북역(北驛)에서 무임 승차혐의로 체포되어 마자스감옥에 수감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샤를르빌과 인접한 벨기에 국경에서 여인숙을 들락거리며 밀수로 재미를 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시작(詩作)에 몰두한 랭보는 열일곱 살 때 베를렌느에 《도둑맞은 마음》 등의 시를 동봉한 편지를 보냈다. 자신에 의해 저주받은 랭보와 랭보라는 존재에 의해 저주받은 베를렌느는 ‘서로가 저주하고 저주받으며 함께 살다가 죽은 저주받은 시인들’이다. 그런데도 두 시인은 지금 상징파의 선구자로 프랑스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그 중 랭보는 ‘조숙한 천재요, 신경질적이고, 격렬한 영혼의 소유자’로 베를렌느를 저주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37세를 일기로 요절한 저주받은 시인이지만, 그의 편영(片影)이 고향(故鄕) 샤를르빌에 영원히 드리우고 있다.
랭보 시(詩)의 원천인 메츠강 기슭에는 창작의 산실이 그대로 있고, ‘옛 물방앗간’이 제법 높고 고풍스럽다. 이 물방앗간이 지금은 랭보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3층 석조건물의 기념관 안에는 시인이 남긴 족적(足跡)들로 가득 차 있다. 거기서 랭보의 묘지까지는 지척이다. 그는 지금 《밤의 오궁(奧宮)》에서 잘린 다리의 아픔도 잊은채 잠들어 있다. 가랑비 촉촉한 랭보의 무덤가에는 이름 모르는 꽃 만이 외롭다.
하지만 “피 토하는 순간까지 사랑으로, 사랑이고 싶은 마음으로 살았다”는 랭보, 이 저주받은 시인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애정은 남다르다. 동성연애 등 파렴치한 개인적 행적에 대한 저주가 끝난 것이다. 오늘의 프랑스인들은 “남 모르는 고뇌를 겪으면서 그 탄식과 비명이 아름다운 음악으로 바뀌게끔된 입술을 가진 불행한 인간”의 문학적 업적을 높이 찬양한다. 그래서 랭보가 프랑스 상징시의 영원한 태두(泰斗)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저주받은 시인의 고향에서 부러웠던 것은 도시의 아름다움 그리고 시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정치가와 행정가들과 지금은 ‘샤를르빌-메지에르(Charleville-Mezieres)’로 이름이 바뀐 도시 사람들의 인간미이다.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샤를르빌-메지에르, 랭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 문인을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보여주는 문인의 고향, 그곳이 우리의 진정한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정치판이 개판”인 대한민국 땅에 샤를르빌-메지에르 같은 예향(藝鄕)이 존재할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이다. (李 龍 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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